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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46

초원을 불살랐던 화마는 마침내 그 기세가 꺾였고, 오랜만에 일어난 핀치는 외출복을 걸쳤다.
차렷 자세로 선 상태로 손을 각각 배꼽과 그 건너편 허리로 가져갔다. 그 상태에서 자신의 자세를 점검해봤다. 물리치료가 효과가 있어 엉덩이를 뒤로 내민, 속칭 오리 궁댕이 포즈라고 불리우는 디스크 환자의 전형적인 굴욕의 자세까지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나쁜 징조를 걱정하는 점술가의 카드처럼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척추 보호대를 챙겼다. 이른바 영감님 코르셋이라 부르는 종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 날씬한 허리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들이 착용했던 속옷과는 그 기능이 다르면서도 방식은 비슷하다 하겠다. 나이 탓에 어쩔 수 없이 늘어진 아랫배를 이리저리 끌어 모은 뒤, 탄력감 제로의 플라스틱 안에 꾸겨 넣고 모두 여섯 개나 되는 벨크로로 단단히 조였다. 헐렁하면 효과가 없다. 의사는 밭은 호흡이 나올 정도로 잡아당기라 조언했다.
끙끙거리며 작업을 마치고 거울을 보니 피가 머리로 몰려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다.
핀치는 다시 양손을 배꼽과 그 건너편 허리로 가져갔다. 상당히... 꼴불견이었다.

지팡이를 두고 나온 노인네처럼 힘겹게 걷다 택시를 발견했다.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뉴욕시 택시는 승객이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승차거부를 하면 라이센스를 박탈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택시기사는 재수가 없다는 미신을 들어 장애인을 잘 태우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미시는 달랐다. 그의 생각에 맹인이나 불구자는 영업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역겨운 체취가 나는 마약중독자나 바닥에 토하는 술주정뱅이가 더 싫고 무서웠다. 지지난 밤에도 토사물이 묻은 시트를 닦아내느라 엄청 고생을 했다. 게다가 역한 냄새는 아무리 걸레로 문질러도 잘 빠지지 않았다.
뒷좌석에 올라탄 승객이 몸을 움찔 떠는게 보였다. 특유의 시큼한 냄새를 맡은 것이리라. 라미시는 이번 차례가 끝나면 적당한 장소에 차를 세우고 시트를 걸레로 다시 닦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2시간 전에도 같은 내용을 떠올렸다는게 함정 - 가게에 들려 시트러스 향이 나는 방향제를 사야겠다며 투덜거리며 핸들 위로 올려놓은 손가락을 툭툭 움직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핀치는 20분 거리에 있는 공원 이름을 댔다. 림보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이다.
『좀 늦으셨네요.』
백미러를 뒤편을 흘끔거리던 라미시의 말에 다시 한 번 몸을 움찔 떨었다.
『실례지만... 지금 뭐라고요?』
『늦으셨다고요.』
이 업계의 사람들 다수가 그러하듯 라미시는 수다가 많은 편이다.
『어린이 바자회 때문에 거기로 가는 거죠? 오전에 학부모 한 명을 태워서 알아요. 행사는 오후 2시부터인데 지금 출발하면 늦으신 거죠. 하지만...』
그가 핀치의 허리 보호대를 알아차렸다.
『흐음, 선생님이 늦어도 다들 이해를 해주실 겁니다. 허리는 어쩌다 다치셨어요? 무거운 걸 들다가? 아님 학교에서 넘어지신 건가요? 요즘 애들은 많이 거칠어서 큰일이겠어요.』
핀치는 자신이 교사로 오해받았음을 깨달았다. 돗자리만 펴지 않았을 뿐, 남의 관상도 볼 줄 안다던 택시 운전자들은 종종 그를 교사나 도서관 사서로 오인하곤 한다. 두꺼운 안경 탓인가? 아니면 손에 들고 다니는 책 때문일까? 누군들 알까. 라미시가 백미러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자 핀치는 애매한 미소를 띄운 채 적당히 박자를 맞췄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게 뼈아픈 실수였다. 라미시는 신이 났다.
『그렇구 말고요. 저도 자녀가 있지만 이건 뭐 걸어 다니는 폭탄 수준이라니까요. 저번에는 친구와 싸우고 돌아와서는 엉뚱하게 제 애미에게 화풀이를 하지 뭡니까. 네 태도가 그게 뭐냐 야단을 쳤습지요. 그랬더니 요 밤톨만한 자식이 자기 방에 대화 거부 - 부시는 사탄이었다, 라고 적혀진 스티커를 붙여놓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지 뭡니까. 제가 어렸을 적엔 상상도 못 했던...』
핀치의 안색이 서서히 납빛으로 변해갔다. 라미시의 수다는 이제 전반적인 교육 불신으로 주제가 옮겨가「바자회랍시고 코흘리개 애들에게 장사를 시키다니오. 나는 반댈세!」가 되었다.
『어떤 학교에서는 지각을 하지 않고 수업에 꼬박꼬박 참석을 하면 현찰로 돈을 준다면서요? 완전 미친 짓이예요.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 아들은 생각이 달라요. 돈이 정의이고, 돈이 곧 만능이고, 돈이 권력이고... 뭔가 기본부터 잘못되었어요.』
나는 사실 선생님이 아닙니다 고백할 타이밍을 놓친 핀치는 음, 이러고 미소를 지었다.
리스는 그런 억지 웃음을 짓는 걸 대단히 싫어했는데 라미시는 반대로 좋아하는 눈치다.
『역시 선생님은 대화가 통하는군요!』
우리가 언제 대화를 했다고? 자기 혼자서 다 말해놓고 - 핀치는 이번에도 웃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라미시의 수다가 교육에서 갑자기 낙태 금지나 동성 결혼 문제로 건너뛰었다는 얘기는 아니고.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시커멓게 생긴 사람이 허겁지겁 올라탔다.
《어라... 리스 씨?》
그럴 리 없었다. 목이 불편한 핀치는 최대한 고개를 돌려 동석자의 얼굴을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핀치의 시야로는 콧잔등 일부만 보였을 뿐이고 대신 제법 묵직해 보이는 검은색 가방과 왼손으로 쥐고 있었던 권총 한 자루는 보기 싫어도 눈에 잘 들어왔다. 무기에 반응, 그는 두 팔을 엉성하게 들어올렸다.
『헤이! 이보쇼! 뭐하는 짓입니까. 합승은 안 돼요. 그러니 도로 내리는게 좋...』
『잔말 말고 출발해. 어서!』
이제 라미시도 권총을 보았다. 수다쟁이 운전기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쏘, 쏘지 말아요. 제발 쏘지 마세요!』
『출발하라니까.』
불청객은 안전장치를 풀고 라미시의 머리를 겨눴다.
핀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총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비상 단추를 누를 생각은 하지 마. 양손을 계속 핸들 위에 올려놓고 직진하도록.』
『돈이 필요한 겁니까? 그럼 다 가져가세요! 다 드릴게요! 그, 그러니 제발!』
『머리가 날아가기 싫으면 입 다물어.』
『예, 예예!!』
『속도를 더 내. 하지만 과속은 안 돼. 눈치보지 마. 계속 직진한다.』
택시 기사를 겁준 사내는 다시 핀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 고개를 숙여.』
곤란하다.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만 신체는 협조를 거부했다.
『그게...』
『뭐야, 교통사고 환자냐.』
네, 아니오 대답을 생략한 핀치는 최대한 몸을 숙이려고 노력하며 남자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예기치 않은 동석자는 그가 보인 신체 언어를 제대로 읽어낸게 분명했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 하지만 제대로 협조하면 다치는 일은 생기지 않아.』

슬프게도 리스는 그제야 연락을 취해왔다.
《핀치? 지금 어딥니까. 번호가 나왔습니다.》
거기에 차분히 대답할 수가 없다는게 아쉽다.
그래도 이번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리스가 핀치의 응답 없음에 의아함을 표현하며 다시 이름을 불러왔다.
《핀치?》

핀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죠.』
『조용히 해.』
『무슨 일인가요. 왜 이러는 건가요.』
『질문을 하지 말라고 했잖아!』
권총을 쥔 동석자가 짜증이 난다며 고함을 질러댔다.
이 정도면 리스의 귀에도 충분히 들렸을 터, 실제로 리스가 흡, 이러고 놀란 소리를 냈다.
《금방 갈게요.》
소리를 낼 수 없었던 핀치는 눈동자만 옆으로 조용히 굴렸다.

Posted by 미야

2012/12/24 11:03 2012/12/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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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45

※ 낙서 식으로 짧게 이어가고 있는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불붙는 고통이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다.
짐작했던 바 그대로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진통제는 그다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의사는 1부터 5까지의 숫자 중에서 지금 느끼는 통증의 수치가 어느 정도 될 것 같으냐 질문을 던져왔다. 핀치는 잠시 생각한 후 4.327 라고 대답했다. 닥터 에반즈는 소수점을 찍고도 뒤로 세 자리나 덧붙인 구체적인 숫자에 놀란 눈치였다. 당황하여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요령으로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그렇다고 해도 어리석게「그거 참 독특하네요」입방정을 떨지는 않았다. 그의 환자는 통증을 통제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성자의 고행을 닮은 그 눈물겨운 노력을 비웃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련한 의사는 고개를 숙여 독일어나 라틴어로 추측되는 단어 몇 가지를 기록했다. 악필인데다 필기체여서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의 병원은 손으로 쓴 챠트 말고 컴퓨터 전산 작업으로 환자에 대한 자료를 기록한다. 그러니 여기서 그의 악필이 문제될 일은 없다.
「곤란합니다. 저번보다 더 강한 약을 지어드릴 수 없어요. 제 양심을 걸고 당신을 중독자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냥 옥시코돈 사흘치 처방전만 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의사 앞에서 핀치는 더 이상 약을 달라 졸라대지 않았다.
손바닥을 싹싹 빌며 애원할 수도 있었으나 품위를 잃기 싫었다.

무슨 짓을 해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똑바로 누웠다가 지금은 엎드린 자세로 부드러운 베개에 코를 박았다. 덕분에 호흡이 곤란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뼈에 고정 핀을 넣은 상태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는 별 거 아닌 동작이 발레의 데벨로뻬 만큼 어려워지는 법이다. 얼굴을 돌릴 수 없으니 남는 길은 질식사밖에 없다. 핀치는 속으로 조소했다. 엎드려 졸다 죽으면 그야말로 해외토픽 감 - 그래서 다시 노력을 기울여 베개를 코가 아닌 이마에 대는 것으로 약간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코가 뚫리자 살 것 같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허리 통증은 장난이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이러고 약통에 든 알약을 전부 입안에 털어놓고 와드득 꿀꺽 먹어버릴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니까 생각만 해봤다. 그 일을 실천에 옮기려면 그만한 각오와 다짐이 필요한 법인데 핀치로서는 그만한 분량의 결심을 끌어 모을 수 없었다. 약통의 뚜껑을 열고나면 늘 손이 떨렸다. 결국 거기까지였다.
대신 후회와 죄책감이라는 것이.
수십 개의 발이 달린 벌레처럼 스멀스멀 올라온다.

TV를 보는 걸 퍽이나 싫어했지만 리모컨을 조작하여 코미디 프로그램을 틀었다.
웃음소리를 들으면 통증이 완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본인이 직접 웃으면 더 효과가 있고.
유감스럽게도 윙윙 소리를 내는 머리로는 유명 코미디언의 잡담 까먹는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핀치는「너희들끼리 맘대로 떠들어」이러고 조작된 웃음소리를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깔깔 웃는 방청객들이 눈물을 닦으며 박수를 치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운전 중 문득 고개를 돌리니 위협적인 표정을 한 타조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는 줄거리였다. 그게 그렇게 웃긴 이야기던가. 모르겠다. 핀치는 방송을 따라갈 수 없었다. 입담이 대단한 코미디언이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팬더가 1등석을 타고 미국에 왔어요. 기내식으로 뭐가 나왔게요. 대나무 잎사귀요, 와하하.
그 한심스러움에 동조할 수 없었던 핀치는 그레이스와 손을 잡고 공원 산책로를 걸었던 좋은 시절을 회상하며 행복한 꿈을 꾸기로 결심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레이스는 파란색 외투를 입었다. 작업 중 실수를 저질러 소매에 물감이 묻어있다. 다행히 비슷한 초록색 물감이 튀었다며 그녀가 웃었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조합이라니, 마티스가 좋아할 조합 아니겠느냐며 아무렇지도 않게 얼룩을 문지른다.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으로 짙은 초록색이 번져간다.
물감이 번진 손을 활짝 펴보이며 그레이스가 질문을 해왔다.
「이런 나와 팔짱을 낄 수 있어요? 해롤드.」
「물론. 물감 따윈 무섭지 않아.」
이것이 과연 졸음인지, 아니면 단순한 피로감인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멍한 느낌이 더 커졌다. 상상 속의 걷는 동작은 굼떠졌고 빛은 나뭇잎 그늘에 녹아들었다.
이곳은 저승인가. 그레이스는 페르세포네인가. 명부의 여왕과 기꺼이 팔짱을 끼고 숲속을 걸었다.
소리를 내어 대화를 하지 않아도 영혼과 영혼이 하나로 통했다는 그런 충족된 느낌.

애정을 담아 그녀의 팔과 손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파란색 코트는 어디에 벗어뒀어요? 그레이스.」
「어라. 내 이름은 그레이스가 아닌데요, 핀치.」
어느새 상대는 키가 더 커졌고, 훨씬 늠름해졌다. 이제 핀치는 눈을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해야 했다. 어리둥절한 기분이다. 동시에 이 변화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렇다, 이 모든 건 화색의 뇌세포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다.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것은 여기에 없다. 핀치의 몸은 무게감을 잃고 바닥에서 1cm가량 떠올랐다.
멍한 눈빛을 하고 있자 상대가 코앞에서 손가락을 딱딱 소리를 내어 튕겼다.
「뭐예요. 잠들지 말아요. 지금 꿈 꿔요? 해롤드.」
「어... 음. 어차피 꿈이잖습니까.」
입으로 내뱉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렇다. 이건 꿈이다. 그러니 곤란해질 일 따위는 없다. 심호흡을 하며 아기처럼 배를 볼록 내밀었다. 그렇게 하는 걸 리스가 재밌다며 구부러진 새우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요?」
「안전한 곳으로 돌아갔는데요.」
「그럼 우리도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야 하겠군요, 미스터 리스.」
「그래야 하겠지만...」
친구는 밝은 모습으로 웃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바보처럼 보이기도 하는 미소였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핀치. 그렇지 않나요?」
대답 대신 팔을 뻗어 새치로 뒤덮인 남자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 핀치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의견에 동의했다.

못이 박힌 투박한 손이 핀치의 등을 덮었다.
이것은 마법의 손이다. 아픔은 사라져라, 그들은 함께 주문을 외웠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며 손바닥이 목덜미에서부터 꼬리뼈 부근까지 왕복하여 움직였다.
의사가 뭐라고 그랬더라... 맞다. 이완. 긴장을 풀고.
뒤틀린 뼈들이 수다를 떨며 각자 제자리를 찾아 덜걱거리기 시작했다. 간혹가다 리스가 그것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는 이쪽으로. 너는 다음 순서로. 차례를 지키렴. 오글거리며 뼈들이 소음을 내었다. 동시에 적당히 꾹꾹 누르는 압박이 느껴졌다. 핀치는 입을 둥글게 벌렸다. 와, 기분 좋다.
「굉장해요.」
「그거 참 다행이군요.」
「리스 씨, 그거 다시 해봐요.」
「어떤 거요.」
「꾹꾹 누르는 거.」
「이건 지압이라고 하는 겁니다.」
「리스 씨, 그거 좋아요. 정말 좋아요.」

간호사들이 킥킥 소리를 내어 웃었다.
물리치료 중에 조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환자가 잠에 취해 잠꼬대를 하고 있다.
『리스 씨. 그거 기분 좋아요...』
글쎄다. 깨어나면 창피해 죽을지도.

Posted by 미야

2012/12/21 13:33 2012/12/2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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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44

※ 아청법 개정이나 폐기는 사실상 물 건너갔네요. 인터넷 검열은 더 심해지겠죠. 공지는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


벽돌을 어설프게 쌓은 뒤에 얇은 합판을 덧대어 만든 벽은 생활소음을 막아주지 못했다.
301호실의 3개월 된 아기가 울기 시작했고, 그 옆집인 302호실에서 F자가 들어간 쌍욕을 퍼부어댔다. 한계에 이른 그는 당장 조용히 시키지 않으면 아기를 직접 목 졸라 죽이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치겠노라 위협 중이었다. 내용을 옮겨 적기가 무서울 정도의 협박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리스는 침대에 웅크린 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트럭을 운전하는 302호실 사내는 입만 거칠 뿐이어서 직접적인 물리력 행사로 돌입할 가능성은 적었다. 게다가 아기에게 손을 대느니 자기 눈깔을 뽑아버릴 위인이었다. 다만 그는 만성적 수면장애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앞집인 306호실 주인은 화장실에 들어가 용변 처리 중이었고, 5분도 되지 않아 배관이 텅텅 소리를 냈다. 막노동꾼인 306호 사내는 새벽 6시면 일을 나간다. 5시 30분에는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한다. 이 양반에겐 좀 특이한 버릇이 있는데 변기의 물을 꼭 세 번 내린다. 똥이 굵어서? 결벽증이 있어서? 알게 뭐람. 항상 같은 시각에 들리는 물 내리는 소음은 일종의 모닝콜 역할을 해줬다. 리스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운 아침.
시트를 정리하고 군대식으로 홑겹이불을 접었다.
숙면을 취한 시간이 짧은 탓에 하품이 나왔다.
엉덩이를 긁으며 욕실로 향했다.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정확히 3분.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 너머로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난 중년의 남자가 치매 환자를 닮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짜를 물어봐도 도리질하고, 요일을 물어봐도 도리질을 하게 생겼다. 오늘의 미국 대통령이 누구냐고 질문하면 케네디라고 대답할까봐 무섭다.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가 필요하다.
뜬금없이 그는 핀치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제 입었던 셔츠를 집어 들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곧 인상을 찡그린 그는 쓰레기통을 열고 때가 탄 셔츠를 꾸겨 넣었다. 옷장에는 비닐로 포장된 새 셔츠 일곱 개가 수평으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맨 위의 것을 집어 능숙한 손놀림으로 포장을 벗겼다. 중국에서 건너온 싸구려 기성품은 바느질이 엉망이다. 특히 단추를 꿰맨 방식이 후지다. 눈썰미가 제법 있는 핀치는「월급으로 수류탄만 사지 말고 제대로 된 옷도 좀 사라」잔소리를 퍼붓곤 한다. 하지만 재밌게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으면 그때는 또 얘기를 바꿔 너무 눈에 튄다고 무어라 한다. 지나가는 여성들이 뒤를 돌아다볼 정도로 꾸미고 다니면 안 된다고 -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기 전에 속칭「강철의 브래지어」라고 불리는 특수 소재의 가슴 패드를 둘렀다. 이것이 있으면 중거리에서 22구경에 맞았을 경우 (운이 좋으면) 심장과 폐를 보호할 수 있다.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거라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지만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안심이다. 무게도 가벼운 편이라 활동감에 제약을 주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핀치가 이걸 좋아한다. 벌어진 옷 틈새로 강철의 브래지어가 보이면 그는 매우 흡족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걸 알고부터 리스는 위로부터 단추 세 개를 일부러 풀어헤치고 고용주의 시야에 잘 보이도록 각도를 맞춰 의자에 앉곤 한다. 애인에게 실리콘 보정물을 삽입한 가슴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여자라도 된 기분 - 어쨌든 핀치가 좋아하니까 그걸로 되었다 - 지금은 핀치가 없으니까 두 개를 남기고 셔츠 단추를 전부 채웠다.
단추에서 손을 떼어내기 전, 그는 핀치가 보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향하는 곳은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체육관이다.
살을 빼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닌, 그러니까 뒷 세계에서 흔히 주먹이라고 여겨지는 어깨들이 실력이 녹슬지 않게끔 트레이닝을 하는 장소다.
체육관의 주인이 금룡회의 부두목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장소가 차이나타운이라서 그런지 90%가 넘는 사람들이 동양인이다. 그런다고 중국어로만 대화를 하는 건 아니며, 흘러나오는 노래 또한 중회권의 인기가요가 아니다.
「기분 잡치게 여기에 왜 흰둥이가 있는 건데?」
따라서 영어로 흘리는 배척의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만둬. 함부로 나서지 마라. 저 자는 칭 노인의 친구다.」
「에?」
「그는 우리를 보지 않을 거다. 그러니 우리도 그를 보지 않는다. 너는 아직 이곳 규칙에 익숙하지 않군. 이제 알았으면 그만 저쪽으로 가서 메요와 스파링이나 해.」
이곳에서 리스는 유령이다.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심지어 이용 요금을 받으려 하지도 않으며, 수건을 빌려주는 법도 없다. 유일한 예외는 리우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인데 오직 그만이 리스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해온다.
『헬로우.』
그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게 문제긴 하다. 리우는 미국에 온지 이제 2년 5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일반회화는 그럭저럭 가능하지만 문장이 짧고 말이 서툴다.
『헤이, 존. 나와 권투 경기를 하지 않겠어? 3라운드로. 어때?』
『싫어.』
『쳇, 냉담하네.』
『자네는 손을 다치면 안 되잖아.』
『피아니스트도 아닌데 손가락 다칠까봐 걱정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리우가 길죽하게 생긴 손가락을 활짝 펴 보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야매 의사다. 조직원이 총에 맞으면 총을 빼내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으로,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어깨들은 그를 제법 공손히 대하는 편이다. 리우의 손에 목숨을 맡겨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일단은 한 수 접어주는 것이다. 반면 칭 노인의 먼 친척뻘 된다는 점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육촌 고모의 남편, 다시 그 아들의 조카가 되는 관계는 사실상 남남이나 마찬가지라며 리우는 손사래를 치곤했다. 본인의 입으로 그렇게 떠들고 다니니 조직원들도 그렇게 여긴 듯하다. 내면으로 숨겨진 진실은 몇몇의 관계자만 알고 있다.

운동화를 정리하려는데 리우가 도발하는 것처럼 리스의 발을 툭툭 건드렸다.
『후지마 테크로닉스.』
애들처럼 장난치지 말고 저리로 가라며 인상을 쓰던 리스가 그 단어를 듣자 돌연 얌전해졌다.
그러든 말든 리우는 툭툭 차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나라면「그것」은 안 건드릴 거야, 존.』
『그것?』
『가능하면 상대하지 마. 우린 분명 경고했어.』
거기까지만 말한 리우는 그대로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리스는 모두로부터 무시를 당하며 40분 정도 땀을 흘렸다.
무아지경 속에서 샌드백을 때리고 또 때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마침내 샌드백을 껴안고 나 죽는다 소리를 꺼냈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 나이는 속일 수가 없다.
핀치가 보고 싶었다.

베어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또 망가뜨렸다.
개는 지금 욕구불만이다. 여기서 더 심해지면 일부러 도서관 책장에 대고 소변 테러를 가하기 시작할 거다. 색상으로 표현하자면 주황색. 빨강이 되기까지 멀지 않았다.
『나쁜 개.』
먹이와 물을 챙겨주면서 개의 머리통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야단치는 목소리엔 그다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리스는 베어의 심정을 이해했다.
모르는 사람이 그를 데리고 퇴원 수속을 마쳤다는 걸 알았을 적에 리스 또한 병원 대기실에 비치된 잡지책을 이로 물어뜯고 갈가리 찢고 싶어졌다. 사설 경호업체 직원인게 분명한 남자는 사전에 학습한 그대로 의뢰인을 데리고 안전한 장소로 비밀리에 이동했다.
이동을 예정대로 무사히 마치자 핀치는 문자로 퇴원 소식을 전달했다.
《저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미스터 리스. 번호가 나오면 연락하겠습니다.》
어찌나 그다운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참 정 없는 사람이다.

도서관의 작업용 의자에 앉아 쓸데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베어는 사료를 절반 정도나 남겼다. 식욕이 없다며 그대로 엎드려선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지 않아 리스 또한 공복이었다.
『끼니마다 먹어야 하는 것도 귀찮구나.』
나가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대신 부적인양 핸드폰을 손에 쥐고 끼릭끼릭 소리가 나게끔 의자를 좌우방향으로 회전시켰다.
배는 고팠다. 그래도 의자에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만사 귀찮아졌다.
그는 진실로 핀치가 보고 싶었다.

Posted by 미야

2012/12/20 12:13 2012/12/2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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