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는 시간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제 곧 1, 2분 안으로 커피숍 문을 열고 그녀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미 15분 전부터 자기 몫의 커피가 식어가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만 있던 리스는 시계를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효한 포지션을 위해 뒷문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도중에 멈칫했다. 카터는 적이 아니다.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과연 있는가. 씁쓸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카터는 자신의 정수리 모양을 알아보고 그가 앉은 좌석을 향해 똑바로 다가올 것이다. 리스는 원래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어요?』 무료하다는 듯 종이 냅킨을 세로로 접었다 폈다 하고 있는 리스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카터는「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보군」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평소 패턴대로라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카터의 등 뒤로 기척을 죽인 채 다가온 리스가 사람 심장에 무리가 가는 짓을 저질렀어야 했다. 어깨를 툭툭 치거나, 갑자기 말을 걸거나, 불쑥 고개를 들이밀거나... 애 떨어지게 만드는 리스의 그런 행동에 화를 낸 적은 없다. 그러나 솔직히 울컥하고 짜증이 날 때가 있다. 매복한 적에게서 불시의 습격을 받았을 때의 기억과 겹쳐 등줄기가 서늘해지곤 했던 것이다.
『아, 형사님. 어서 오세요.』 판에 박힌 인사말은 뒷전이다. 카터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색했다. 오늘 이 남자 왜 이러나. 『뭐죠. 무슨 일 있어요?』 『아무 것도요, 형사님』 『그렇담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갑자기 헷갈리게 하지 말아요.』 『뭐가 헷갈린다는 거죠. 전 지금 영원과 찰나의 상관 관계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영원은 말 그대로 영원인데 0과 1사이에 존재하는 찰나라는 개념이 사실은 그 영원과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헷갈리게 하지 말라니까요, 존. 게다가 저는 영원이니 찰나니 하는 것들에겐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요.』 제목이 표기되지 않은 파일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그녀는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미국에는 신앙의 자유라는 것이 있다. 따라서 존 역시 종교를 가질 권리가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존은 종교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다. 종교의 거시적 목표는「구원」인데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은 필연적으로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다. 신과 악마를,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믿어도 구원만큼은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과 같이 식탁에 앉을 적마다 일용한 음식에 대한 감사 기도를 빼먹지 않는 카터 또한 유감스럽게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부류에 속한다. 전장 아닌 전장에서 사람을 여럿 죽인 존 역시 상황은 엇비슷할 거다.
『다 떠나서 누가 영원이니 찰나니 하는 괴상한 이야기를 꺼내던가요, 존.』 웨이츄리스를 손짓으로 불러 자기 몫의 커피를 주문하다 말고 카터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리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짐짓 시선을 피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음... 두통 환자가요.』 『두통이 생길 법도 하군요. 그런 고민으로 머리를 아프게 하다니... 테일러가 학교 댄스파티 파트너를 놓고 고민에 빠지면 전 이렇게 대꾸해요. 아들아, 이불 뒤집어쓰고 끙끙거려봤자 다 소용 없다. 차라리 거울을 보면서 여드름을 짜도록 해라.』
거기까지 말한 카터는 곁눈질로 주변을 확인한 후, 파일 내용을 건너편에 앉은 리스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미 알고 있죠? 앤 블리스는 불구속 처리되어 석방되었어요.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하고, 정신과 상담 및 사회봉사 명령을 수행해야 하지만 그녀의 법적 보호자가 주장한 심신미약 내용이 판사 앞에서 통했거든요. 정신과 치료를 받은 이력이라는 걸 그쪽 변호사가 무지 강조하더군요. 뭐, 아주 거짓은 아니라서 부친의 사고사 이후 앤은 조울증을 심하게 앓았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앤이 현장에 가지고 나왔다던 권총의 강선흔 검사 결과가 타 강력 사건에서 나온 탄환과 비교했을 적에 일치한 케이스가 없었어요. 그래서 충동적으로 권총을 가지고 나왔으나 발포할 의사는 전혀 없었던 걸로 치고...』 리스가 손가락을 구부려 찻잔 받침을 건드렸다. 여전히 그는 커피를 입에 넣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사람 얼굴을 조준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는데요, 카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음 경찰서로 나와 목격자 진술을 별도로 하세요, 존.』 『그렇게 못 한다는 걸 알잖아요.』 『그렇다면 내 앞에서 불만을 꺼내지를 말던가.』 크림을 잔뜩 넣은 커피를 스푼으로 휘젓다 말고 카터가 눈을 부라렸다.
후스코가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면 리스는 아마 본때를 보여주겠노라 윽박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카터가 불만을 표현하며 툴툴거리면 리스는 늘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곤 했다. 나쁜 남자다.
전혀 줄 기색이 없는 리스의 블랙 커피를 곁눈질하며 카터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말이죠, 존. FBI라고요.』 『FBI가 왜요.』 『모르고 있진 않겠죠? 앤 블리스 말고 실제로 사람을 총으로 쏘고 다니는 체크-인 게임 참가자가 따로 있어요. 조사가 진행 중이라 일개 경찰인 제가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는 건 미리 말해둘게요. 하지만 분명한 건「저격」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재미를 이유로 애들 게임에 멋대로 끼어들었고, 게임 진행자가 제공한 장난감 총은 말 그대로 장난감일 뿐이라며 진짜 저격용 소총을 들고 현장으로 나갔다는 거예요. 인터넷에 소문이 퍼진 건 보름 전이고, 오너라고 불리는 체크-인 게임 진행자는 악성 루머니까 믿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사실 루머처럼 보였던게 사망자가 아직 없어요. 그들이 찾고 있는 저격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상은 하지 않아요. 주로 노리는 부위는 살집 든든한 엉덩이로...』 『추정한 유효 거리는?』 『말을 도중에 자르지 말아요, 존. 400미터? 그러니 분명 퇴역 군인이죠. 그리고 게임 상대가 여자인 경우에는 일부러 가방이나 길바닥을 맞춰요.』 『호오, 꽤 신사적이군요.』 『과연 그럴까요. 신사들이 남극대륙에 단체 관광을 갔다가 전부 행방불명이 되고 난 다음에야 그는 신사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이쯤해서 리스는 손가락을 깍지꼈다. 『걱정 말아요. 그는 머지않아 당국에 의해 체포될 겁니다.』 『뭐라고요?』 카터는「이건 또 무슨 신종 예언이란 말인가」표정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당신... 뭔가 아는 내용이 따로 있는 거군요.』 『글쎄요.』
핀치가 만든 기계는 모든 이메일을 확인하고, 전화를 감청하고, CCTV에 녹화된 내용 전부를 체크한다. 미국 국토의 모든 신호를 무슨 진공 청소기마냥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기계는 계획된 모든 범죄를 인식했다. 「그래서 저는 기계를 학습시켜 관련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도록 했습니다. 관련 없다고 판단되는 정보는 자정 무렵에 시스템에서 자동 삭제됩니다. 하지만 많은 목숨이 걸려 있는 사건은「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류되어 FBI나 NAS 같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지요.」 게임이랍시고 남의 엉덩이를 노리는 저격수의 존재는 이미 기계가 파악했을 것이다. 다만 그의 아홉 자리 숫자는「관련이 있는 것」으로 처리되어 핀치에게로가 아닌 정당한 권리자인 국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핀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카터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뭔가 중요한 걸 알고 있는 거죠, 당신.』 『틀려요, 카터. 이런 건 알고 있는게 아닙니다.』 카터는 믿지 못하는 눈치지만 지금 리스의 이 말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다. 리스는 그의 비밀스런 고용주를 떠올리며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Posted by 미야
2012/07/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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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는 단골 가게를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매번 새로운 가게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라서 가끔은 종업원이 그의 말쑥한 얼굴을 기억하고 먼저 인사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는 동료분과 같이 오셨군요.』 사람을 상대하는 장사꾼들은 유달리 인상착의에 대해 기억력이 좋다. 『흠,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왼쪽 눈썹 위로 피어싱을 한 이 젊은이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꽤 자주 방문했던 모양이니 어떤 메뉴가 맛있는지 저에게 추천해줄 수 있겠군요.』 메뉴판을 집어 올리던 핀치가 묘한 어투로 비꼬았다. 그렇다고 종업원 앞에서 입씨름을 할 수도 없는지라 리스는 무난하게 대응했다. 『이번이 세 번째라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니 이번엔「내부자 고발」로 가도록 하죠.』 그러니까 가게에서 추천해주는 걸로 고르겠다는 뜻이다. 종업원은 싱긋 웃으며「금요일 만찬」이라는 제목을 가리켰다. 언뜻 듣기에 최후의 만찬 리메이크 판인가 싶어 기분이 찜찜했으나 메뉴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생선 요리일 것이다. 아직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이유로 금요일에는 육류를 먹지 않는다. 리스는 멎적게 웃으며 금요일 만찬 세트 2개와 자신을 위한 요거트 샐러드, 그리고 핀치를 위한 초컬릿 케이크 조각을 추가로 주문했다.
『케이크...요.』 『고백해봐요, 핀치. 당신, 단 거 엄청 좋아하죠?』 좋아한다, 싫어한다, 일언반구 없이 핀치는 눈을 가늘게 떠보였다. 『언제는 차에 넣는 설탕 한 스푼에 경기를 하더니 이제는 저에게 고칼로리 음식의 대명사이자 현대 인류의 적그리스도 취급을 받고 있는 초컬릿 케이크를 권하는 겁니까.』 리스는 그게 문제가 되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제가 신경을 쓰는 부분은 당신의 체중이 아니라 건강 상태입니다. 지금 당신은 당분을 섭취한 후 의자에 기대앉아 한숨 돌려야 할 사람처럼 보여요.』 『오호라, 제 몰골이 흉악함을 완곡하게 표현해줘서 정말 고맙군요, 미스터 리스. 두통이 좀 있지만 어젯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게다가 전 커피의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분명 몸 상태가 안 좋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초컬릿 케이크라니. 주문을 받아 적던 젊은 종업원의 입술이 순간 실룩거리며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입맛이 꽤나 별난 중년 남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케이크는 어린아이와 어린 소녀들을 위한 음식이다. 적어도 네이슨은 그렇게 여겼...
거기까지. 단단하고 거대한 방어막이 양갈래로 뻗어나가려던 연산 작용을 강제 중지시켰다. 표면으로 올라온「네이슨」이라는 이름에 반응, 왜앵왜앵 울어대는 경고등 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핀치는 자신이 의외로 많이 지쳐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피로감은 연달아 나오고 있는 번호들 때문은 아니다.
『돈 떼먹고 도망간 애인을 손보려던 남자는 제가 잘 처리했습니다, 핀치.』 주문한 음식의 서빙을 기다리던 중에 리스가 간략한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목격자를 살해하려던 뺑소니 운전자는 붙잡아 카터에게 넘겼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주전 멤버로 발탁하지 않았다고 화내던 사커 맘도 적절히 설득했어요.』 『어떻게요.』 『축구부 코치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대리 시험이라던가 성적표를 조작한 일들을 교육 위원회와 교장 선생님에게 일러바칠 거라고 알려뒀지요.』 『순순히 물러나던가요.』 『경고의 의미로 직장 동료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메일로 보내줬어요. 단순히 협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면 섣불리 나서지 않을 겁니다.』 『그러기를 바라야겠군요.』 『자신이 근무하던 수퍼마켓을 털려던 현금출납원도 조처했습니다.』 『경찰에 넘겼나요.』 『조용히 접근해서 아이의 병원비를 그렇게 구하려 하다간 복지국에서 아이를 빼앗아갈 거라고 충고했죠. 애 엄마가 하도 서럽게 울어서 준비한 수술비는 소파 아래 그냥 숨겨두고 왔습니다. 그런데, 핀치. 언제 나에게 말해줄 겁니까?』
핀치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요.』 『지금 한숨을 쉰 이유요. 그리고 당신 눈밑으로 다크 서클이 생긴 까닭도요.』 핀치는 시치미를 잡아뗐다. 『말했잖아요, 리스. 두통이 있어요.』 리스의 눈매가 험악해졌다. 『핀치. 그들과 달리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거짓이 아닙니다, 미스터 리스. 지금 제가 두통이 없는데 머리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건가요.』 『꾀병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두통 탓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손가락을 깍지 끼고 리스는 핀치를 지긋이 응시했다. 『말해요, 핀치.』 리스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 이야기가 안 끝나... 제목도 없이 룰루랄라 저질렀는데 이건 무슨 일일 드라마야. 안 끝나...;;
Posted by 미야
2012/06/29 15:05
2012/06/2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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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간 핀치의 일진은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실수로 발목을 접질렀고, 원인 불명의 갑작스런 배앓이를 했고, 처방전에 씌여진 약을 복용하자 이번엔 두통이 생겼다.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계신가요.』 『스트레스야 늘 받고 있지요.』 성 마리웨자 병원의 야간 당직의는 그 외에도 판에 박힌 질문들을 더 던졌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가, 알레르기가 있는가, 복용하는 다른 약이 있는가, 식욕의 변화는 없는가,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가... 핀치는 기진맥진해서 예, 아니오 말도 못하고 도리질만 했다.
『두통이 생겼다고 진통제에 의지해선 안 된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가끔씩 의지하곤 하는 의사 아그네스는 겉으로 봐선 매우 깐깐한 성격이다. 『환자분께선 절 버튼만 누르면 진통제가 나오는 자판기로 여기고 계시는 듯하지만요.』 그리고 남들 앞에서 기분 좋게 웃는 법도 없다. 『하지만 꾀병이 아니라 정말로 힘들어 한다는 걸 잘 아니까 이틀치 약을 처방해 드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진통제는 제꺽 처방해준다. 사실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진통제가 나오는 자판기가 맞았다. 아그네스는 처방전을 남발하고 벤조디아제판, 코데인, 옥시코돈, 바이코틴 등등의 약품을 뒤로 빼돌리는 사람이다. 핀치가 불법행위를 자행한 그녀를 의사협회에 고발하지 않은 까닭은 빼돌린 약품을 의료보험이 없는 길거리 노숙자나 불법 이민자들에게 비교적 싼 가격으로 나눠준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그네스 또한 핀치에게 모든 사실이 들통났음을 알고 있다. 그녀가 핀치의 병원 방문을 전산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까닭은 그런 이유에서다.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그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쌀쌀맞았고, 핀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다. 뒤돌아 사라질 적엔 발걸음이 매우 빨랐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무척이나 냉랭했다.
겉으로 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서글프다. 푸른 형광등 조명 아래서 핀치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흠칫흠칫 놀라 깨어났고, 그때마다 침대에서 일어나 편집증 환자처럼 방문 손잡이와 창문 걸쇠를 확인했다. 모든 출입구에 장치한 센서는 계속해서 초록색 불빛이었기에 손으로 만져 자물쇠를 확인하는 건 무의미했다. 하지만 핀치는 땀을 흘렸고, 머리는 계속 쑤셨다. 마지막으로 베개에 머리를 눕혔을 적에 시계는 정확히 4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서 핀치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곰곰이 생각해야만 했다.
림보로는 나가지 않았다. 그의 위장용 직업군에서 - 정확하게는 손해보험 사업 쪽에서 정기 결재를 요구해왔기 때문에 오늘은 그쪽에서 업무를 봐야만 했다. 보험 업무는 늘 지루하다. 핀치는 벌써부터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옷차림은「제법 성공은 했으나 꽉 막힌 성격의 보수적인 사장님」으로. 구닥다리와 사촌 관계인 보라색의 넥타이를 매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었다. 구두는 이태리제 모레스티 수제 신사화를 골랐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싱글벙글 미소 짓는 법을 연습했다.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게 문제긴 해도 경력 짧은 비서 모레간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렌 사장님. 업무에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 일정에 미팅 약속이 있었던가요, 미스 모레간?』 『아닙니다. 스케쥴이 누락된 건 아니고요... 그건 아닌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자산관리인 존 루니 씨라고 하던데요.』 명함까지 받았으니 잡상인은 분명 아니라고요, 사장님 - 리스의 매력에 넘어간 모레간은 분명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았음에도 사무실 문밖에 일찌감치 리스를 세워두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손짓만 하시라고요 - 모레간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상의 옷자락을 아래로 반복하여 잡아당겼다. 마음에 든 이성 앞에서 긴장한 탓일게다. 핀치의 두통은 더욱 깊어졌다.
『저어, 혹시 사장님은 자리에 안 계시다고 해야 하는 거였나요.』 경험이 적어 실수가 잦은 그의 어린 비서는 비로소 쩔쩔매기 시작했다. 사장의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음이다. 『사장님?』 모레간의 불안해하는 목소리에 핀치는 재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아... 괜찮습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입니다. 루니 씨를 안으로 안내해주세요.』 핀치는 손톱 찌꺼기만큼 남은 힘을 모조리 쥐어짜서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리 연락하지 못하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해롤드.』 말로는 그렇게 사과했으나,「나는 어느 때고 약속 없이 당신을 만날 권리가 있지요」라는 얼굴을 한 리스가 당당히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아프다. 통증. 격하게 잡아당기는. 어쩌면 지금 핀치가 느끼는 이 감각은 두통이 아닌 건지도 모른다. 단순히 두통이라고 정의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고통이다.
『해롤드?』 『신경 쓰지 마세요. 별 것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입니까.』 『배가 아직도 아파요?』 『병원에는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파하는 얼굴이잖아요. 당신의 여비서는 무어라 말 안합디까?』 서류에 서명하던 걸 멈추고 사용하던 펜을 책상 위에 바르게 올려놓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용건은요? 미스터 리스.』
그렇다고 인정할 리는 결코 없으나 리스는 그 순간만큼은 무척 서글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Posted by 미야
2012/06/27 17:00
2012/06/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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