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 19 : Next »

person of interest (28)

여섯 개의 모니터를 눈앞에 두고 거장은 정교한 푸가를 연주했다.
라는 건 살짝 틀린 설명이고, 실제로 핀치가 눈으로 보며 작업하는 컴퓨터 화면은 다섯 개였다.
나머지 하나의 모니터는 배불뚝이 인형 속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로부터 전송되어져 오고 있는 화면을 띄우고 있었는데 습관적으로 스프링 달린 인형의 머리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탓에 화면의 상태는 썩 깨끗한 편은 아니었다. 스파이 인형이 올라가 있는 책상의 소유주인 후스코는「이것은 호텔 벨 보이를 부르는 종이 아니다」투덜거렸지만 동료들의 짓궃은 손장난을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카메라는 반복되는 충격 탓에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곤 했고, 그 결과 지금 카메라에 잡힌 건 절반의 카터였다.

코드 입력 작업을 하다 말고 핀치가 가볍게 킁 소리를 냈다.
『우리가 준비한 인형이 지나치게 귀여웠던 걸까요.』
『생김새와는 관계가 없을 겁니다, 핀치. 그들은 저 인형을 영험한 부적이라고 생각해요.』
경관들은 의외로 미신을 잘 믿는다.
그만큼 그들이 생명을 위협받는 다급한 상황에 자주 노출된다는 얘기다.
백미러에 십자가를 걸어놓으면 총알이 알아서 피해간다 - 아침에 구두를 털면 재수가 없다 - 용의자를 잡으러 나가기 전에 열리지 않는 13번 라커룸을 쳐다봐선 안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전설을 만들었고, 부적을 신봉했다.
『우리가 보냈다고 하지 않고 아들이 아빠의 안전을 기원하며 선물한 인형이라고 설명했으니 다들 재수가 좋은 물건이라고 여기고 있을 겁니다. 좋은 운을 나눠 갖기 위해 손으로 인형을 만지는 거구요, 실제로 후스코가 대런을 보호하려다 엉덩이에 총알을 맞은 이후 행운의 부적으로 인기가 크게 치솟았다고 하더군요.』
핀치는 아연실색하여 리스를 쳐다보았다.
『게티스버그 전투의 영웅 죠슈아 로렌스 체임벌린도 엉덩이에 총 맞고 죽을 뻔했다고요. 그게 왜 행운이 되는 겁니까?』
리스는 여전히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믿으니까요.』

사실 리스는 그게 행운인지 아닌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알게 뭐람. 뱃가죽에 구멍이 안 뚫렸으니 행운이라고 하면 행운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상을 입었으니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건 오로지 카터의 일그러진 표정으로서 - 리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으아. 절대로 화내고 있어, 절대로 화내고 있어, 절대로 화내고 있...

핀치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미묘하다고 여겼다.
대다수의 미국인이 그러하지만 비슷한 또래의 아들을 키우고 있는 카터는 아이들이 관련된 일에는 한층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혼 후 싱글 파더 신세인 후스코도 그럴 때만큼은 부패경찰의 이미지를 벗고 배 나온 늙은 람보 역할을 자청했다.
설령 애들이 크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해도 주유소 강도 대하듯 주먹으로 때려잡아선 안 된다는게 그들 두 사람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따라서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어도 키터나 후스코 모두 리스의 행태에 불만을 가진 듯했다.
여자애를 주먹으로 때려서 기절시켰어 - 당신 정말 아무리 막 나가도 그러는 거 아냐.
모니터 화면 속의 카터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화면 아래로 흰색 글자로 코팅된 자막이 흘러갔다.

『카터가 지금 뭘 생각하는지 신경 쓰입니까, 미스터 리스?』
카터와 후스코 두 사람 모두를 유용한「자산」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그들의 감정에 반응하며 저런 식의 반응을 보인다는 건 눈여겨 볼만했다.
『제 판단으로는 결과적으로 리스 씨의 대응은 적절했다고 봅니다만.』
핀치는 거기까지 말하고 출력된 자료를 리스에게 건넸다.
『그 아이들, 단순한 장난이었다고 하기엔 판사 앞에서 설명해야 할 것들이 무척 많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유행하는 플래시몹 어쩌고 하기엔 정도를 넘었어요.』

자기네들 딴에는 그건 일종의 게임이었다고 했다.
「매월 정해진 날짜에 게시판이 열려요. 누가 오너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편지봉투 모양의 아이콘을 클릭하고 이름을 적으면 게임에 참가할 수 있게 되요.」
고인이 된 스틸스 형사의 뱃지를 보여주자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있던 소년은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아이에겐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최소한 그는 부모님이 정해놓은 통금시간을 어겼다. 게다가 코앞에서 주먹질하는 리스를 목격했음이다.

「최초 참가비는 20달러이고, 오너는 이중 10%를 수수료로 가져가요. 오너는 상대방의 핸드폰 번호와 세팅된 게임 장소를 통보하고 모형 건을 보내줘요. 페인트 탄환은 두 개밖에 안 줘요. 룰은 간단해요. 정해진 위치에서 붙어 먼저 명중시키는 편이 체크-인을 성공시키는 거고, 수수료를 뺀 나머지 36달러를 가지게 되는 거죠. 이긴 사람은 거기서 게임 오버를 선언할 수도 있고 다시 36달러를 걸고 게임에 참가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해서 받을 수 있는 돈이 점점 커져요. 저기요... 우리 엄마에게 연락하실 거예요?」
소년은 비굴하게 손바닥을 비비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스는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문제가 아니다.
진짜 총격전이라고 착각한 경찰에게 게임 중 사살당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으로 현행 법은 길거리 서바이벌 게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초청장을 클릭하면 트로이 목마가 컴퓨터에 설치됩니다. 그래서 참가자가 자기 주소를 밝히지 않았음에도 모형 건이 집으로 도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전문적이네요.』
『전문적이고 말고요, 미스터 리스. 그리고 그 오너라는 존재는 돈도 제법 벌었을 겁니다. 이건 전형적인 피라미드 사기와 같아요. 개인은 20달러씩 투자를 하고 결국 그 돈을 잃죠. 승자가 혼자 독식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승자는 게임 오버를 선언해서 자기 몫의 돈을 가져가지 않고 계속 게임에 참가하죠. 그러니 10%의 수수료와는 별개로 게임이 끝나지 않는 이상 모든 돈은 오너의 수중에서 돌고 도는 겁니다.』

오너의 별명은 사탄이라고 했다.
『먼젓번에 봤던 한 장차리 웹페이지를 기억하십니까. 시든 장미꽃으로 장식된...』
『그곳에서 초청장을 발급하는 건가요.』
『정확하게는「발급되었던」입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눈치를 챘던지 호스팅 서비스가 중지되었어요. 현재는 연결되지 않는 페이지로 나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이 맞다면 그 오너라는 자도 상당히 급박해졌을 겁니다. 게임 오버를 인정하기 싫은 참가자가 주최 측이 배급한 모형 건이 아닌 진짜 총을 가지고 나와 모의 살인이 아닌 진짜 살인을 하려고 했으니까요. 하긴, 사탄의 음모라는게 오죽하겠느냐만은...』
거기까지 말한 핀치는 단축키를 사용해 커터 형사를 비추고 있는 모니터를 황금빛 알갱이들이 파도처럼 흘러내리는 디자인의 대기 화면으로 전환시켰다.

Posted by 미야

2012/06/26 14:27 2012/06/26 14:27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527

Leave a comment

person of interest (27)

마른 체격에 모자까지 눌러썼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겅중겅중 걷는데다 흐릿한 간판 불빛만 갖고 판단하기엔 성별조차 모호했다. 리스는 상대가 앤 블리스가 아닐 가능성도 고려했다.
회색 스니커즈를 신은 목표는 20분 가량 남쪽을 향해 쉬지 않고 걸었다.
이대로 직진하다 왼편으로 빠지면 저평가된 부동산 재개발 지역으로 묶여 갈수록 쇄락하고 있는 B.H.거주지로 이어지게 된다. 해가 떠있는 낮에는 그럭저럭 괜찮으나 땅거미가 지고부터는 베테랑 마약 단속반 형사들조차 발걸음을 꺼려하는 곳이다. 최근들어 권총을 사용한 묻지마 살인이 연속으로 세 건 발생해서 경찰 당국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소지품이 전부 사라진 것으로 보아 단순 절도가 강력 범죄인 강도 행위로 일이 커진 것 같다는게 당국의 해석이었지만, 어쨌든 범인은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 그리고 꼭 살인범들만 죽은 사람의 몸을 뒤져 지갑을 훔쳐가는게 아니다.
리스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저울질하며 목표와의 간격을 일정 거리로 좁혔다.

늦게까지 영업하는 패밀리 레스토랑 부근에 이르자 순간 목표가 흠칫하고 멈춰 섰다.
덩달아 리스도 재빨리 으슥한 구석으로 몸을 붙였다.
하지만 상대는 이쪽의 기척을 알아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것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핸드폰이 메시지 도착을 알렸고, 모자를 쓴 목표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뜬 내용을 확인했다. 리스가 서있는 곳에서도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텍스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며 운동화를 신은 발로 땅을 퍽퍽 찼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심하게 겅중거리는 걸음걸이로 2차선 차도를 무단횡단 했다.

『핀치. 앤 블리스의 이름으로 개통된 핸드폰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성년이라서 법적 보호자의 명의를 빌렸을 수도 있지요. 허나 제가 확인한 범위 내에선 없었습니다. 아, 잠시만요...》
바로 옆에서 은밀하게 소곤거리고 있다는 기분... 목덜미가 오싹해지더니 솜털이 섰다.
목덜미를 문지르고 있는데 핀치가 말을 이었다.
《이거, 안 좋은데요, SNS 기록으로 보면 캐서린 그로보스 본인입니다. 하지만 각각 다른 위치에 한 사람이 나란히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 리스 씨가 보고 있는 쪽은 십중팔구 복제폰이겠군요. 또 다른 캐서린은 지금 라이브 콘서트장에 있는 것으로 조회되고 있습니다.》
『복제폰으로 전송된 문자 내용이 뭔지 확인할 수 있겠어요?』
《약간 까다롭지만 가능합니다. 기다리세요.》

리스 또한 2차선 도로를 건너 모자를 쓴 친구에게로 다시 접근했다.
한 블록을 지나자 주변은 훨씬 밝아졌다. 야간 영업을 하는 편의점이나 셀프 세탁방, 패스트푸드점 등등이 나타났고, 분위기에 걸맞게 행인의 숫자도 늘어났다.
비열한 마약 상인이나 칼을 든 강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리스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꺼져, 쌍년아.》
목표를 주시하며 걸어가던 리스는 껑충 뛰며 제자리에서 반 바퀴 빙글 돌았다.  
『.......... 핀치.』
《방금 확인한 문자 내용입니다.》
심장에 안 좋다, 이런 건. 깜짝 놀랐다는 건 숨기고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설마, 제가 욕을 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미스터 리스.》
리스는 황급히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흠, 방금 리스 씨 목소리 톤이 올라갔어요.》

핀치의 도움으로 이제 리스의 핸드폰으로도 그들이 주고받는 문자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속의 속도로 - 애들이 엄지손가락만 가지고 그렇게 빠르게 글자를 입력할 수 있다는 점에선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엄청난 단문들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내용의 거의 다수가 욕설 - 목을 따버리겠다, 이런 건 애교일 정도의 - 리스의 한쪽 눈썹이 구부러졌다. 상대가 가운데손가락을 치켜올린 사진을 전송했다.

《말로 떠들지 말고 날 잡아보시지 - 븅신》
《엉덩이 구멍에 손가락 넣고 질질 싸고 있냐》
《아니. 네 시체 사진을 찍으러 간다》
《체크-인》
《웃어봐. 지금 총으로 네 머리 겨누고 있어》
《구라 즐즐》
《졸라. 체크-인》

총으로 머리를 겨누고 있다고? 리스는 고개를 세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엉덩이에 뿔난 강아지가 뜨거운 석탄을 입에 물려는 찰나다.
리스는 전속력으로 뛰었다.
검정색 바람막이 점퍼를 입은 남자애가 커다란 쓰레기통 뒤에서 몸을 일으키는게 보였다. 모자를 눌러쓴 목표가 화들짝 놀랐고, 바람막이 점퍼는 으스대며 총으로 상대의 가슴을 겨누었다.
『누가 구라 즐이라는 거야. 체크-인.』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것과 동시에 리스는 바람막이 점퍼의 오른팔을 꺾었다.
『!!』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던 것 같다. 총알이 발사되었다.
쾅 - 이 소리도 아니고, 탕 - 이 소리는 더더욱 아니고.
총알은 날아갔으나 화약이 터진게 아니다. 핏, 하는 맥주 뚜껑 따는 김 빠진 소리라니.
리스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제기랄~!! 옷이 더러워졌잖아!』
이 각도에서 보니 틀림없이 여자 아이다. 모자를 눌러쓴 소녀가 앙칼지게 고함을 질러댔다. 그녀의 오른팔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페인트?』
『닥쳐! 체크-인!』
소녀가 총을 들어 리스를 조준했다.
이번에도 페인트 탄?
판단을 유보한 채 리스는 왼쪽 팔꿈치로 여자애의 턱을 세게 후려쳤다.
충격을 받고 소녀의 몸이 옆으로 빙글 돌아갔다.
리스는 멈추지 않고 주먹으로 다시 여자애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이 정도라면 뇌가 흔들렸을 터, 흰자위를 드러낸 여자애가 큰 대자로 벌렁 쓰러졌다.

Posted by 미야

2012/06/23 10:58 2012/06/23 10:58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525

Leave a comment

person of interest (26)

불편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그동안 핀치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는데, 악마라는 초현실적인 존재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고, 혹시라도 사탄이 어느 나라 신이냐 리스가 질문할까봐 그런 거였다.
고인이 된 사담 후세인은 부시 대통령더러 사탄이라 욕했다.
그렇다면 사탄은 미국의 신인 것인가.
아니, 그걸 떠나서... 빈 라덴은 어쩌고? 리스가 사탄의 정체는 오사마라고 우기면 그때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사람을 두고 무식한 자, 그리고 그보다 더 무식한 자로 구분하는 건 좋지 않아, 해롤드. 자네는 가끔 주변 사람들을 여전히 천동설을 주장하는 종류로 몰아붙이는데 말이지... 이제는 로마 카톨릭도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고?」
그리운 친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맞는 말이다. 핀치는 자신이 턱도 없이 리스를 바보 취급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미안, 네이슨.」

그동안 리스는 뇌에 잔주름을 열심히 만들고 있는 고용주를 곁눈질로 관찰했다.
처음에는 쩔쩔매며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단호하게 입을 다물고, 그리곤 부끄러워한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앤 블리스는 악마 숭배에 관심이 있는 걸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핀치는?』
보다 침착해진 핀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리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글쎄요. 앤은 겨우 열 다섯 살이잖습니까. 그렇게 심각할 것 같지는 않네요.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으로 사탄을 거들먹거리니까요.』

또래 여자애들 다수가 그러하듯 뱀파이어 스토리를 좋아하고, 온갖 욕설로 점칠된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듣고, 해골 무늬 피어싱을 하고, 다듬은 손톱에 검은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그 정도 치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라서 사탄을 상징하는 별 무늬의 심볼도 없이 그저 시든 장미로 장식된 인터넷 화면 하나만 가지고 사탄 숭배 운운하는 건 너무 성급했다.
그런 것보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웹 디자인 학습 과제의 결과물로서 그야말로 별 것 아닌 것이다.
쓰여진 문구는 요즘 아이들 말마따나 쿨 하게 보이니까 집어넣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핀치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렇다. 개운치 않은 것이다.

핀치는 기억하고 있는 책의 줄거리를 더듬었다.
소설에는 가발을 쓴 괴팍한 영국 귀족이 등장했고, 그 가발의 빛깔은 보라색이었다.
「일본인들이 사람 머리카락을 분홍색으로 칠했다고 무어라 할 것도 없군.」
주인공인 브라운 신부는 그 가발을 벗으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귀족은 자신의 가문이 오래 전부터 무서운 저주를 받았고, 그 결과 괴물로 변한 귀를 숨기기 위해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고 말하며 한사코 거부한다.
그에게 달려들어 가발을 강제로 벗기자 만 천하에 드러난 그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네?』
리스가 당황해하며 그를 쳐다보았지만 핀치는 계속해서 바쁘게 머릿속 책장을 뒤졌다.
「숨겨야 할 것이 없다는 걸 숨기기 위해 엑스무어 공작은 일부러 요란한 가발을 썼다. 사실 그는 진짜 공작이 아니었고, 그의 정체는 사채업이나 하던 건달 같은 변호사로...」
『음, 그렇다면 신원 도용인가.』
『뭐라고요?』
열 다섯 살의, 보호자가 없는 소녀는 학교는 물론이고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화랑을 운영하는 이모는 이러한 조카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앤 블리스가 앤이 아니고, 이모가 사실은 이모가 아니라면 어떨까.

핀치가 막「보험사기」단어를 떠올릴 즈음, 리스가 예고도 없이 노트북을 강제로 덮었다.
핀치의 손가락은 여전히 노트북 자판 위에 올려져 있는 상태였기에「피아노 뚜껑이 내 손가락을 먹었어요」상황은 피할 수 없었다.
『아파!』
『집안에서 사람이 나왔어요, 핀치. 저쪽이 노트북 불빛을 알아차릴까봐 그랬어요.』
『말로 경고해주면 큰일이라도 납니까.』
『계속 딴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요.』
거기까지 말한 리스는 숨죽이고 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내려와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야 할 것 같아요.』
거리가 벌어지면서 사람의 인영이 흐릿해지자 리스가 서둘러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Posted by 미야

2012/06/21 14:47 2012/06/21 14:47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523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 19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4646
Today:
14
Yesterday:
135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