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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43)

추수감사절 식탁에 앉아 입안 가득 달콤한 과일을 베어 물었을 적의 기쁨이었다.
충만함, 풍요로움, 만족감, 포만감 기타등등의 단어들을 가져와 벽걸이 장식으로 만들어 높은 곳에 걸어두었어도 이 기분을 정확히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각각 다른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 콘을 양손에 쥐고 번갈아 핥아먹어도 어른에게 꾸지람을 듣지 않는 유쾌한 날이었다. 리스는 팔을 뻗어 상대방의 손을 붙잡았고, 그 손은 따뜻했다. 코로 세탁물의 상쾌한 향이 맡아졌다. 아니면 샴푸 냄새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깨끗하고 기분 좋았다. 그르렁 신음소리를 내며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뺨을 가져가 비비고, 문질렀다. 부족함 없이 가득 채워진 사람의 체온이 담요처럼 그를 에워쌌다. 리스는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소중한 사람의 넓적다리를 숭배하며 쓸어내렸다. 소유욕이 달궈진 프라이팬 위로 올라간 계란 노른자처럼 단단히 그 형태를 잡아갔다.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분주해졌다.
「기분은 어때요. 좋아요? 핀치.」
잠이 확 달아난 건 그 다음이었다.

쇼크 상태인 채로 뚜껑을 내린 변기에 올라앉아 머리통을 쥐어뜯어도 그럴 듯한 답이 안 나왔다. 목이 칼칼했고, 공복인 위장이 제법 좋지 않은 신호를 보내왔다.
혹시 상태 호전에 도움이 될까 싶어 찬물로 열심히 세수를 한 뒤에 다시 변기 위에 앉았다.
괜찮아 졌느냐고? 졸음이 말끔하게 가시자 오히려 나쁜 방향으로 악화되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자기혐오는 그를 대서양 한 복판까지 떠밀고 갈 참인 듯했다. 리스는 당혹감에 허우적대며 물 내리는 손잡이를 힘껏 눌렀다. 그리고 두 번 더 눌렀다. 이대로 다 떠내려 보내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달각달각 눌렀다. 그렇다한들 해석이 난감한 꿈의 잔상은 그를 구석으로 몰았고, 하느님 맙소사 - 10살 가까이 연상인 고용주에게 - 그것도 남자 -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모든 꿈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또한 모든 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길게 풀린 두루마리 휴지를 목에 둘둘 감고 나서야 리스는 그럴싸한 답을 구했다.
『옳아. 그건 스포츠 마사지였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른 지푸라기라도 잡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리스는 마침내 변기 뚜껑에서 몸을 일으켜 양치를 하고 면도를 했다.
림보로 나가지 않은지 이제 27일 째의 아침이다.

상대방을 미행하며 뒷조사를 하던 때와는 양상이 다르다.
「우리는 미끼를 풀었고, 그쪽에서 물어주길 기다리고 있지요. 다시 말해 당신과 내가 적의 접근을 유도하며 그의 시야에 일부러 노출되어야 하는데 상대가 언제,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나타날지 아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이 경우 미리 준비하기도 어렵고, 대처하기도 까다롭다.
리스는 두 팔로 책상을 짚은 자세에서 핀치와 시선을 맞췄다.
「나야 성대한 환영 파티를 열어줄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핀치, 당신은 그렇지 않죠.」
리스의 지적에 핀치는「제가 원래 파티를 안 좋아하긴 하죠.」퉁명스레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미스터 리스.」
리스는 안전가옥으로 사용하던 세 군데의 싸구려 원룸을 신속히 정리하고 장기 투숙이 가능한 모텔로 잠자리를 옮겼다. 비용은 현금으로 처리했다. 그 장소가 어디라는 건 고용주에게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고 하지 마라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기분이 이상한데요. 저는 당신의 사생활을 항상 존중해왔습니다.」
「이건 제 사생활 문제가 아닙니다, 핀치.」
리스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당신과 나는 최소한으로만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적의 시야에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아요. 당신은 나에게 문자를 보내선 안 됩니다. 전화도 안 됩니다. 직접 만나러 와도 안 됩니다.」
「허. 꼭 헤어지자고 하는 여자 친구처럼 말하고 있군요, 미스터 리스.」
「글쎄요. 듣고 보니 별거를 선언하는 남편 비슷하긴 하네요.」
「그렇담 전 위자료를 청구하겠어요.」
농담을 농담 같지 않게 말하면서 핀치는 뒷목을 주물렀다.
「그동안 번호가 나오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우체국 사서함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보내세요.」
「당신에게 제 도움이 필요할 적에는요.」
「당분간 카터와 후스코를 못 살게 부려먹을 겁니다.」
「반대로 제가 당신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요.」
「핀치... 제발. 혼자서 어디 나가지 마요. 부탁이니 절대 혼자 움직이지 마요.」
리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로서는 낚시가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존 프라이드는 지금까지 네 번의 킬링-체크 인 게임에 참가해서 만족스러운 스코어를 기록하며 연승을 기록했다. 존은 자기 자신에게 돈을 걸었고,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대하여 허풍을 떨기도 했다. 무료 플래시 게임 사이트 게시판에「나는 곧 떼부자가 될 거다」적어놓았다. 이에 반응하듯 저녁 늦게 이스트 사이드 주소가 적혀진 초청장을 하나 더 받았다. 상단에는「배틀 로얄」이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었다. 이번에는 통도 크게 여러 명이서 죽고 죽이는 시늉을 하려는 듯했다. 원하던 바대로 판이 커졌다고 생각한 리스는 즉석에서「YES」라고 답신을 보냈고, 존 프라이드 명의의 계좌에서 1,500달러를 인출해뒀다. 이번에도 자기 자신에게 돈을 걸 작정이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카운터라는 불리우는 레게 머리가 늘 나타난다.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앞니에 천박해 보이는 보석을 박았다. 이 자는 돈을 관리한다. 그리고 실탄이 장착된 총을 소지하고 있다. 권투나 레슬링 종류의 훈련을 받은 적이 있어 몸의 움직임이 좋다.
카운터의 부하로 여겨지는 다른 녀석들이 세 명 더 있다. 이들은「선수」들과 접촉을 꺼린다. 주로 하는 일은 현장 정리 및 감시이고 경찰에게 뒷돈을 찔러주는 일도 한다.
돈을 받은 경찰은 8번서 소속이다. 부패 경찰은 부패 경찰과 뜻이 잘 맞을 것 같아 공중전화를 사용해 후스코에게 넌지시 뒤를 캐달라 부탁을 해뒀다.

「아이고,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요즘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죠.」
「목소리가 왜 그런가, 라이오넬.」
「글쎄요, 내 목소리가 왜 그럴까요. 당신이 직접 말해보시구려.」
「그러니까 카터에게 당신 아들이 학교에서 치어리더와 키스하다 들켰나요, 이렇게 직구를 던지지 말았어야지.」
「그걸 어떻게 알았... 아니, 것보다! 제기랄.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와는 다르게 성적으로 조숙하다고만 했을 뿐이라고요!」
「그래도 잘못했다고 빌고 사과해, 라이오넬.」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카터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볼 적마다 마실 것을 찾는답시고 책상에서 달아나곤 하잖아. 언제까지 그럴 건데.」
「내 맘이에요. 흥.」
불만도 많고, 말도 많은 작자지만 시키는 일은 착실하게 잘 한다.
조사된 내용은 곧바로 핀치에게 E메일 형식으로 전달될 것이다.

『그럼 슬슬 아침 식사를 해야겠군.』
통조림을 데워먹는 건 이젠 질렸다. 그리고 건강에도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옷을 챙겨 입은 리스는 방에서 나오기 전 거울을 보았다.
거울 저편에선 웬 날건달 하나가 열쇠를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12/07/29 21:45 2012/07/29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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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42)

어제 케이블 방송 보느라고 올리는 거 깜빡했네요.
마지막이라고 해도 연속 3편 방송은 심했음. 나는 오늘 정상 출근임... 졸려 미치겠음.


『자, 그럼 리스 씨, 아니. 존 프라이드 씨... 이 노트북을 잘 챙기도록 하세요. 잃어버려도 안 되고, 푼돈 받고 다른데 팔아도 안 됩니다.』
그 말을 하는 핀치가 묘하게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여 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단순히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그는 언제나처럼 입술을 얇게 말았고, 안구건조증 탓에 눈가는 붉었으며, 벽돌색 격자무늬 넥타이가 빈틈없이 목을 조르고 있었다. 다리를 저는 것도 심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등급을 매기자면 오늘의 통증은 대략 6번, 7번이 넘어가면 처방에 따라 독한 약을 먹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는「As Happy As A Sandboy」표현을 떠올렸다.
여관으로 모래를 퍼다 나르던 소년은 에일 맥주에 취해 기분이 끝내줬다. 치카치카 붕붕.
리스는 핀치의 머그컵 안의 내용물이 설탕 한 스푼이 들어간 녹차가 아니라 알콜 비슷한게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발을 내딜 적마다 썩은 판자가 삐걱거린다. 존은 구멍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이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핀치.』
『노트북입니다.』
어떻게 그걸 물어볼 수 있느냐며 핀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 세상에. 노트북을 모른단 말예요?』
이 양반아, 지금 그런 걸 물은게 아니잖아 - 확실히 상태가 이상하다. 리스는 핀치의 머그컵을 빼앗아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도 보았다. 고용주가 그런 그를 짐승 쳐다보듯 했는데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뒤에 혀를 길게 잡아당겼더라면 반응이 훨씬 대단했을 거다.
『남이 마시던 걸 갖고 이상한 짓하지 마세요, 미스터 리스.』
핀잔에 못 이긴 척하고 머그컵을 작업 테이블 위로 얌전히 돌려놓았다.
그러나 의혹의 눈초리까지는 거두지 않았다.

『위장 신분인 존 프라이드 씨에게 걸맞는 노트북입니다. 비밀번호 바꾸지 마시고 바이러스 체크 안 해도 됩니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라던가 포르노 사이트가 즐겨찾기로 등록되어 있어요. 남들 보라고 만든 신통찮은 은행 거래 내역이 좀 있고, 소액의 빚 독촉 메일도 보이게 해뒀습니다. 그리고 마우스로 작동하는 슈팅 게임도 들어가 있고요. 기록에 남는 거라 매일 20분 이상 꼭 게임을 하셔야 합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사슴이나 토끼를 잡는 플래쉬 게임이에요. 조작법만 익히면 어렵진 않을 겁니다.』
『사슴이나 토끼...』
『누가 죽기라도 했어요? 얼굴 펴요. 정 마음에 안 들면 앵그리버드 게임 할래요?』
이 노트북을 해킹한 사람이 존 프라이드에게 킬링 체크-인 게임 초청장을 보내올 정도는 되어야 한다 - 핀치는「잊지 말고 포르노도 자주 보고 그러세요」주의를 주고는,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기생충 같은 존재, 무단침입과 기물파손 전적을 가진 존 프라이드 스페셜을 끝마쳤다.

리스는 방어하듯 양팔을 가슴에 두른 자세로 미비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지적했다.
『시키는대로 합니다. 다 좋아요. 당신이 골라준 사이트에서 유료로 결재한 포르노 동영상 열심히 보겠습니다. 그런데 플래시몹 게임에 열중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은 안 듭디까.』
이런 장난을 즐기는 건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다. 그 사이에서 머리를 짧게 다듬은 40대의 존 프라이드는 눈에 띌 것이다.
『그게 재밌는 점입니다, 미스터 리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작업 테이블로 돌아간 핀치는 오늘따라 몸의 균형 잡는 걸 무척이나 어려워하며 의자에 힘겹게 앉았다. 착석한 뒤에도 한동안 왼쪽다리 허벅지를 주물렀다.
그 동작을 눈여겨 본 리스는 핀치가 겪고 있을 오늘의 통증 수치가 6번 이상일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이미 7번을 넘어 진통제를 복용한 상태일 수도 있다.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을 의식한 핀치가 다리에서 얼른 손을 치웠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반신욕을 끝내고 욕조에서 일어서다 실수로 미끌어진 것뿐입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써가며 바둥거렸더니 근육통이 왔어요. 적절히 조처했으니 금방 나을 겁니다. 아니아니, 제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고요.』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라며 핀치는 엉뚱하게 성을 냈다.
『예전엔 애들 장난이었는데 지금은 성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포르노가요?』
『무슨 포르노요.』
『성인 버전이라면서요.』
『오늘따라 주의력이 산만하군요, 미스터 리스. 이야기의 흐름을 부지런히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제가 얘기한 건 킬링 체크-인 게임이었어요.』
『의사에게 몸을 보였습니까. 당신의 주치의는 뭐라던가요.』
남의 집 대문을 노크하는 요령으로 핀치가 테이블을 톡톡 소리 내어 두드렸다.
『리스 씨. 집중해주세요.』

모든 사물은 진화한다.
좋은 쪽으로든, 좋지 않은 쪽으로든,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애들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질이 좋지 않게 변질되었더군요. FBI가 속칭 사탄이라고 불리우던 범인을 체포하자 뿌리가 뽑히기는커녕 제어력을 상실한 느낌입니다. 보다 과격하고, 보다 폭력적이고, 보다 선정적인 쪽으로 양상이 바뀌었어요. 승부를 두고 일종의 도박을 한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이번에 카터가 체포한 젊은 친구의 모바일 쪽에서 승률이 어떻네, 거는 돈이 어떻네, 중계인에게 따져야 하네 기타등등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핀치가 힐끗 리스를 쳐다보았다.
『도박판을 벌리면 배 나온 중년 아저씨들은 환호하게 되어 있지요.』
그럼 나도 배 나온 중년이라는 건가. - 진통제 복용한 핀치는 싫다.

『당신은 열성적으로 돈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에 참가도 해야 합니다.』
핀치의 눈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다.
『판을 휘저어놓아야 해요. 그래야 잠잠하던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뛰어오를 겁니다. 그러면 우리 둘이서...』
뒷말을 흐린 그는 미끼를 문 물고기를 낚시대로 휙 잡아당기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Posted by 미야

2012/07/21 11:55 2012/07/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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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41)

기계가 번호를 보내오지 않았음에도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도 생길 수 있구나, 엉뚱하긴 해도 감탄을 금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애용하는 보드판에는 전문 사진작가가 북극에서 찍은 고래 사진이 한 장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리스는 사진 하단부로 보드마카를 사용해「흰수염 고래」라고 적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고른 사진 속 고래가 실은 밍크 고래라는 건 미처 모르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리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같은 걸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TV 시청조차 즐기지 않는다. 라디오 방송으로 스포츠 중계를 듣는게 전부 - 오프라 윈프리나 데이비드 레터맨 쇼가 뭔지도 모를 거다.

그래봤자 사람 얼굴을 찍은 사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핀치는 오류로 점칠된 정보를 일절 무시하고 - 리스는 자신의 행동이 일종의 장난으로 여겨진게 은근히 분한 눈치였다 - 흐릿한 바탕에 사람 인영으로 보이는 시커먼 그림자가 전부인 CCTV 캡춰 사진을 셀로판테이프를 사용해 추가로 그 옆에 나란히 붙였다.

할 말이 있다는 투로 빤히 쳐다보는 리스를 모르는 척하고 핀치가 안경을 고쳐 썼다.
결론, 자료랍시고 붙인 사진은 두 가지 종류 모두 쓸데없었다.

『좋아요, 천천히 따져봅시다.』
책상으로 돌아온 핀치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의 지휘자처럼 양손을 모두 들었다.
수수께끼의 이 남자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있다. 사망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킬링 체크-인 게임에 개입하여 장난감이 아닌 진짜 총으로 사람을 쏘고 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다친 사람만 나왔지만 멀잖아 사망자가 나오리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하여 사건 성격상 핀치는 이 남성의 정보가 FBI쪽으로 넘어갔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여전히 흰수염 고래 사나이는 무탈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 소거법을 사용해볼까요, 미스터 리스. 그럼 첫 번째...』
『기계의 하드웨어에 문제가 생겨 작동이 불완전하게 되었다.』
리스는 그의 고용주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예의 주장을 다시 꺼냈다. 이른바, 정교한 기계가 그만 더위를 살짝 잡수셨어요 - 라는 얘기다.
투덜대며 뺨에 바람을 집어넣는 고용주를 향해 리스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압니다. 당신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며 단정하여 말하겠지요, 그렇지만 말예요. 나는 기계에 대해 자세한 걸 모릅니다. 핀치, 당신이 많은 부분을 나에게 솔직히 말을 해주지 않고 숨겼기 때문이에요.』
애매한 뉘앙스의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리스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허나 그가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자 몸서리치게 만들던 냉기는 흔적도 없이 조용히 물러갔다.
『매우 건강한 사람도 가볍게 감기를 앓곤 하잖습니까. 잘 만들어진 기계 장비라는 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노후화 되면서 각종 문제가 생길 겁니다. 아무리 좋은 노트북도 5년이면 고물이 되잖아요. 어쩔 수 없이 엔지니어들이 그때마다 문제가 생긴 장치를 새 것으로 재빠르게 교체를 해줘야 할텐데 요즘 미국 경기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나사 과학자들까지 실업자로 전락하는 마당에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SSN 번호만 뽑아내는 기계에 거금의 예산을 투입하긴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워싱턴 DC에서 관련 예산을 삭감하라 지시했다고 가정하면...』
이쯤해서 핀치가 손바닥을 펼쳐 일단 멈추시오 싸인을 보내왔다.
『기계를 위해 나사의 예산을 삭감한 겁니다, 미스터 리스.』

몰랐던 얘기다. 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이를 설명하는 핀치의 표정도 썩 편치는 않았다.
『언론은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폐지가 금융위기와 재정난 탓이라고 설명하지요. 하지만 진실은 달라요. 우주왕복선의 1회 발사 비용은 평균 15억달러(1조6,000억원)입니다. 정부는 차라리 이 돈으로 재사용 궤도선을 근거리 우주로 날려 보내는 대신 테러를 방지하는데 도움을 줄 기계를 운영하자고 결정했어요. 인류의 꿈과 희망을 팔아 안전을 구입한 겁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히, 우주왕복선.

보다 먼저 기운을 차린 건 핀치 쪽이었다.
『그럼 두 번째 가정으로 넘어가보죠. 소프트웨어이든 하드웨어이든, 기계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흰수염 고래」를 파악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기계는 사전에 계획된 범죄만 감지한다. 그래서 홧김에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하거나, 과도하게 어린애를 흔들어 영유아 돌연사를 일으켰다거나, 교통사고, 비행기사고 등등에 대하여선 감지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 모두 여섯 명이 총에 맞았는데 이는 사전에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모두 우발적 충동 범죄였다는 겁니다. 모조리 우연에 불과한 것으로 어쩌다보니 총 맞은 사람 전부가 킬링 체크-인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거구요.』
그런게 과연 가능한가. 우연이 중첩되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억지다.
하여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며 핀치는 세 번째 손가락을 접으며「다음 가정으로 건너뜁시다」말했다.

『해당 SSN이 관련 정보 부서에 통보되는 프로트콜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봅시다.』
『연방수사국 후버빌딩 1층으로 번호가 도착했는데 책임자가 일부러 묵살했다는 건가요.』
『또는 필연적으로 묵살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미스터 리스.』
『글쎄요... 그들은 해당 SSN의 인물이 이미 사망한 것처럼 나왔다고 해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역시 묘지에 묻혀 있던 테레사 휘태커를 살아있는 모습으로 찾아낸 적이 있잖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었다면 그쪽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막대한 자원과 조직력으로 더 훌륭하게 처리하겠죠.』
사망자, 혹은 위장 사망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상대가 여행을 온 외국인이었다면 어떨까.
이번에는 핀치가 도리질을 했다.
『내국인 테러행위만 적발이 가능했다면 기계는 반쪽 불량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스. 행정력이 있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모양과 형식은 달라도 자국의 시민에게 식별이 가능한 숫자 코드를 제공합니다. 관광객으로 위장했다고 놓치는 일은 없습니다.』

이제 리스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다 틀린 건반을 누른 피아노 연주자처럼 양손을 어지럽게 흔들어댔다.
『OK. 슬슬 알 것 같네요.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겠죠. 교통신호를 무시한 차량을 붙잡아 세웠는데 주차위반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았어요. 교통 경관이 왜 그랬을까요.』
『외교관 차량이어서?』
『상대가 똑같이 경찰관이었다는 가설은 어떻습니까.』
『오.』
핀치는 두 눈을 깜빡였다. 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떴다.

Posted by 미야

2012/07/19 21:40 2012/07/1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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