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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34)

기계가 새로운 번호를 보내왔을 적에 핀치는 안도의 한숨부터 쉬었다.

누군가가 살해 위협을 받고 있거나, 아니면 흉악한 계획을 짜고 있는 중일 거다.
이걸 반갑게 받아들인다는 건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허나 지난 나흘 간 두 사람이 겪었던 미묘한 감정의 동요를 고려하자면 이건 흡사「가뭄에 단비」였다.
리스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핀치를 따라다녔고, 핀치는... 음. 생리전증후군 비슷한 걸 경험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으며, 서점에 들어가 충동구매를 했다. 아이스크림을 마구 먹고 복통을 일으켰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4,800달러 52센트 어치의 책들과 잡지를 순서나 내용을 무시한 채 마구 읽었다. MIT 신입생 시절에 버본과 히로시마 버섯 짬뽕 칵테일에 취해 쓰레기통 속에 머리를 처박았을 때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들이 겪는 혼란을 지극히 불쌍히 여겨 하늘에서「번호」를 내려주셨구나 싶었다.
번호가 강림하사, 독가스를 내뿜으며 기다란 꼬리를 만들던 혜성이 지평선 아래로 물러갔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던 3월 15일이 지나갔다. (* 3월 15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거라고 예언된 날이며, 실제로 이 날에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부르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했음. 흉사의 날을 의미)
이 느낌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타인의 불행을 빌미로 일상을 되찾고 있는 자신을 저주하며 단정하게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톰 클랜시와 존 그리샴, 그리고 마이클 크라이튼의 문고판 책들을 종이 박스에 쓸어 담았다. 책을 무척 좋아하는 그는 흥미를 잃어버린 책들이라고 해도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버리지 않는다. 대신 길가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방치한다. 혹시 새끼 고양이라도 들어가 있는 건가 싶어 박스 주변을 기웃거릴 선량한 이웃들은 구조해야 할 동물 대신 밀리언셀러 작가들이 쓴 흥미 위주의 소설들을 찾아낼 것이고, 혹자는 집으로 몇 권 가져가 재밌게 읽을 것이다.

『새 번호가 나왔습니다. 미스터 리스.』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어요.》
『그럼 림보에서 만나도록 하죠.』

환호하는 소리까지는 듣지 못했으나 리스 또한 좋아라 한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역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도서관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뿐만 아니라 각종 모니터와 키보드가 세팅된 핀치의 작업 테이블에 두 다리를 보란 듯이 올려놓고 - 어린애도 아니면서 - 톰 클랜시의 넷포스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인「나이트 무브」의 낱장을 과시하듯 팔랑거리고 있었다. 핀치가 진작에 종이 박스에 넣어 정리한 것과 똑같은 판본이었다.

소설은 이른바 양자 컴퓨터라는 걸 이용해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하는 사이버 테러 특수부대 요원들의 활약상을 묘사한다. 총알은 없고 대신 케이블과 마우스가 있다.
열심히 읽었다는 걸 과시하고자 리스가 괜히 아는체를 했다.
『2진법 논리회로가 아닌 큐비트 양자회로는 기존의 수퍼 컴퓨터가 100년 넘게 작업을 해야 하는 데이터를 분 단위로 처리할 수 있다던데요, 핀치.』
2011년 5월에 128큐비트 프로세스가 장착된 양자 컴퓨터 시제품이 1,000만 달러 가격으로 시장에 나온 적도 있지만... 핀치는「테이블에서 발을 치워주십시오, 미스터 리스」라는 의미로 고개를 옆으로 기우뚱하고 움직였다.
『글쎄요. 결어긋남 현상을 해결해야 비로서 양자정보처리 기술이 상용화될 수 있을 겁니다. 것보다 그런 책들이 리스 씨의 취향인가요.』
책을 내려놓고 고용주에게 자리를 양보한 리스는 해석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취향일 리가! 솔직히 말해 리스는 글자를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몸 쓰는 걸 좋아했지,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톰 클랜시는 아마존에서 선정한 미국의 10대 작가 중 한 명이니까요. 음... 핀치가 보기엔 어떤가요. 그의 소설은 재미있던가요?』
『재미있다, 재미없다는 개인의 척도에 따라 다릅니다, 미스터 리스. 하지만 애초에 이 세상에 재미없는 책 같은 건 없어요. 어떤 책이든 재미있는 법이지요. 따라서 읽은 적이 없는 책은 대체로 재미가 있고, 한 번 읽었던 책은 그것보다 재미있어 하는 데 좀 더 수고가 드는 것뿐입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아뇨. 일본의 괴기 소설가 교고쿠 나츠히코의 말입니다.』
괴기 소설가? 리스는 입을 떠억 벌렸다.

무시하고 자판을 눌러 암호를 입력하고 림보의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미국의 여러 기관에 사전에 침투시킨 프로그램이 그 즉시 SSN 번호를 추적하여 신원 증빙용 사진 하나를 걸러내 모니터에 띄었다.
서른 초반의, 뺨이 통통한 여성이었다. 사진 위에 굵은 붓터치를 인위적으로 더하면 르느아르가 그린 복숭아 빛깔 여자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밝고 따스해 보이는 르느아르의 여인들과는 달리 이쪽은 표정이 매우 어둡고 우울해 보였다. 눈썹이 뭉개진 표정 탓에 사랑스럽게 생긴 외모가 빛이 바랬다. 그녀는 깊게 좌절했고, 그 탓에 내면이 파괴되었다. 증명사진은 목 놓아 흐느꼈다. 나는 불행합니다.

『시드니 앰버. 거주지는 퀸즈입니다.』
인쇄된 주소를 리스에게 건네면서 핀치는 살짝 눈짓했다.
리스는 이미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Posted by 미야

2012/07/06 12:39 2012/07/06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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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33)

갓파님들...? 슬슬 나라는 인간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리스는 미스 모레간을 기억했다.
그녀는 해롤드 렌이 운영하는 손해보험사에서 근무한다. 긴장을 하면 옷자락을 아래로 죽죽 잡아당기는 버릇이 있으며, 얼굴이 잘 붉어지곤 한다. 젊은 여성임에도 손톱은 짧게 정리, 올드한 취향의 씨드 진주가 장식된 귀걸이를 착용했다. 키는 작은 편에 속하고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 인상이 좋다.
그리고 그녀는 리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늘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니나 리스는 자신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걸 안다.
이쪽에서 적절하게 굽고 뒤집으면 모레간은「어머,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요...」이러면서 사장의 스케쥴을 슬쩍 귀띔해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경계심을 풀고 사장님 험담을 해주면 더더욱 좋다. 이를테면, 우리 사장님은 짜증이 나면 겉으로는 웃어도 의자 팔걸이를 그러잡아요, 과일을 씌운 커스터트 타르트를 숨겨두고 다른 사람 안 주고 혼자서만 몰래 드신 적도 있어요, 기타등등.

『미스터 루니? 자산관리자라고 하셨던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알렉산더 마이어입니다.』
당했다... 미스 모레간은 사라지고 50대의 머리 희끗희끗한 남자가 악수를 청해왔다.
각이 진 양복 깃과 영국식 악센트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청색 눈은 맑았고,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보험사 사장의 개인 비서라기 보다는 유럽 굴지의 명문가에 봉사하는 집사처럼 보였다. 생각이 깊고, 빈틈이 없으며, 입이 무겁고... 리스는 당혹감을 잘 포장해서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호주머니 속에 감춘 채 악수에 응했다.

마이어의 손은 부드럽고도 냉랭했다. 뜨거운 머그컵을 쥐는 요령으로 리스의 손을 쥐었는데 이런 류의 매끄러운 손을 가진 남자는 워싱턴 정계에서 특히 찾아보기 쉽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미스터 루니.』
『사전에 약속을 잡지 못했습니다만. 해롤드와 만났으면 합니다.』
노련한 눈이 재빠르게 리스의 위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평범한 사람은 마이어의 이러한 행동을 아마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비밀스러웠고, 능숙했다.
『유감스럽게도 렌 사장님은 개인 일정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일인가요?』
『흠... 』
『괜찮으시다면 다른 날로 약속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이번 수요일은 어떠십니까.』
『아뇨. 고맙지만 됐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리스의 매력은 50대 성인 남성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마이어가 동성에게 끌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눈빛만 봐도 확실했고, 오히려 그는 체격이 좋고 피부가 그을린 리스에게 일종의 반발감 비슷한 걸 가진 듯했다.
손등이 하얗지 않으니까 양이 아니라 늑대라고 여긴 것일지도. 아니면 허영심에 가득차 머리에 부분 염색을 하고 인공 썬탠이나 하는 부류로 봤을 수도 있다. 모레간과 달리 마이어는 리스의 점수를 아주 낮게 매겼다.

『저번에 뵈었던 미스 모레간은 휴가를 간 건가요.』
리스는 핀치가 그녀를 해고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녀는 지난 11일에 다른 부서로 옮겨갔습니다.』
잘 정리된 서류철을 닮은 목소리로 마이어가 대답했다. 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미스터 루니.』
『네.』
『조만간 루니 씨가 방문할 거라면서 사장님께서 미리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트라이탁 에너지 주식에 대한 건 이미 조처했으니 그것에 관한 선생의 조언은 일체 필요가 없다고요.』
『트라이탁 주식이오?』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반문했더니 마이어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리스는 베일러 짐 투자회사에서 프랍 트레이너로 일했던 애덤 샌더슨을 기억했고, 4백만주 - 약 3억 달러 상당의 주식 공매로 난리가 났던 트라이탁 주식 건도 잊지 않았다. 애덤은 이후 회사를 그만두었고, 지금은 가족 사업인 푸드 트럭 체인점을 운영한다.
그래서 그게 뭐. 그 트라이탁 에너지 이야기가 지금 왜 나오는 건데?
리스는 지금 이 시점에서 핀치가 그 주식 이야기를 전언으로 남겼다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도도 모르겠고, 의미도 모르겠다.

『제게 남긴 전언은 그게 전부입니까.』
확인하려 다시 물어보자 마이어는 못된 사기꾼 쳐다보듯 리스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생김새는 멀쩡한데 능력은 좀 모자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게 분명했다. 사장에게 주식 투자를 잘못 권유해놓고 지금에 이르러 딴청이냐는 무언의 비난도 섞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아함을 가장한 비아냥이 뒤를 이었다.
『죄송합니다, 미스터 루니. 우리 사장님은 원래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걸 대단히 싫어하셔서요. 그래서 주제 넘게 제가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프랑쉬멍(분명히 말해서), 렌 사장님에겐 당신과 같은 자산관리인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옳거니. 그러니까 존 루니 이름으로 이곳을 들락날락하지 말라는 경고구먼.

『나가는 출입구는 복도를 돌아 왼편입니다, 선생님.』
알렉산더 마이어는 예의 왕실 집사와도 같은 정중한 태도로 돌아가 리스를 배웅했다.

쫓겨나다시피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핀치에게 문자를 보냈다.
《같이 점심 먹어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자신이 밑도 끝도 없이 뻔뻔한 요구를 했음을 깨달았다.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신의 성실한 부하직원이 날 사무실에서 쫓아냈어요.》
이건 꽤나 투정부리는 어조이긴 했지만... 뭐.
《베트남 음식 어때요?》
리스는 태어나 생전 처음으로 문자 메시지에 이모티콘이라는 걸 삽입하고 싶어졌다.

『당신, 정말 못 말릴 사람이군요!』
꾸언(월남쌈)과 짜즈(만두튀김) 주문은 뒷전이고 핀치는 불 같이 화를 냈다.
『그래요. 나는 화가 났어요! 그러니 파인애플 볶음밥도 먹을 거예요!』
음료와 음식이 담긴 둥근 쟁반을 맵씨 있게 들고 가던 종업원을 향하여 핀치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Posted by 미야

2012/07/04 20:26 2012/07/0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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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32)

핀치에게서 별도로 연락이 온 건 없었다.
개의치 않고 리스는 습관처럼 림보로 향했고, 짐작했던 바 그대로 도서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리스는 쥐고 있던 테이크 아웃 커피를 일단 핀치의 작업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황동 장식이 달린 옷걸이에 대충 걸어 놓았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다.
그러나 핀치는 전직 CIA 요원 모르게 순간 이동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핀치가 애용하는 사서 전용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손가락을 삼각형으로 모은 리스는 속으로 숫자를 다섯까지 세었다. 하나, 둘, 셋...  림보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리스는 살짝 실망감을 느꼈다.

어쩌면 핀치는 양치질을 끝마치고 마른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는 중일 수도 있다. 시계는 이제 오전 7시 10분을 가리켰다. 그만하면 이른 시각이다. 물론 그들의 삶이라는게 규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일반인의 생활패턴 공식에 대입하여 추측하는 건 쓸데없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부짖는 자명종과 씨름 중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일찍 문을 여는 다이너에 앉아 좋아하는 에그 베네딕트를 주문했을 수도 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일 수도 있으며, 이웃집 강아지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중일 수도 있다.
리스는 손톱으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신경질적으로 톡톡 쳤다. 말 그대로 상상은 자유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추측도 사실은 아니었다.

욕구불만 비슷한 것을 느끼며 맨 앞에 놓여진 자판의 엔터키를 검지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대기 화면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화면으로 모양이 바뀌었다.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관리자 로그인 암호는 특수부호를 포함하여 모두 여덟 자리의 글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핀치는 주기적으로 암호를 갱신한다. 뿐만 아니라 제3자의 접속 시도를 탐지하기까지 한다. 어깨 너머로 훔쳐본 암호를 외워뒀다가 시험 삼아 입력했을 적에 - 당연한 얘기지만 유효하지 않은 접속이라며 경고 메시지가 떴다 - 낯빛이 달라진 핀치가 꾸중하는 태도를 취하며 도서관 안으로 불쑥 걸어 들어왔던 적도 있다. 엑서스 거부시 시스템은 핀치의 핸드폰으로 알림 메일을 자동 발송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제불능의 편집광은 오류 입력이 3회가 넘으면 하드 드라이브에 자기 파괴 바이러스가 설치되게끔 카미카제 세팅까지 해뒀다.
「신중해야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미스터 리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순간 과전압 유입으로 기계를 토스트처럼 바짝 구워버리는 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지금 그가 테이블 아래로 허리를 굽혀 보고 있는, 어른 주먹 크기의 네모난 검정 박스가 바로 그 흉악한 임무를 맡았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 디자인은 염두에 두지 않은 탓에 단추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특대 사이즈의 레고 블록처럼 보였다 - 시퍼런 번개가 번쩍일 거다.

「전부 파괴되는 겁니까.」
「네.」
「도서관에 불도 지를 기세군요.」
「필요하다면요.」

책을 그렇게나 사랑하는 남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쉽게 나올 줄을 몰랐다.
인류문화의 보고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넉 달과 일곱 밤낮을 불타오르는 걸 지켜보던 광신도 칼리프 우마르야 아무렇지도 않았겠으나 핀치는 휘날리는 재와 티끌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아니, 제정신을 유지하기는커녕 이미 살아있는 몸이 아닐 것이다.
리스는 그 점이 염려스러웠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핀치는 그게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필요하다면, 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스터 리스.」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머지않았을 수도 있다는 식이었다.
「것보다 당신이 실수로 이곳을 날려버리는게 먼저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무기고를 정리하고 수류탄은 제발 다른 곳으로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수류탄이 아니라 소음탄인데요.」
「어쨌든 핀을 뽑으면 터지는 거잖아요.」
그런 대화가 오고 간지 벌써 2개월...

격정을 닮은 충동이 일어 무작위로 키보드의 자판 하나를 꾹 눌렀다.
예상 외로 컴퓨터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3분이 더 지나면 오전 8시 정각이 된다.
h a r o l d w h e r e a r e y o u n o w
그의 보스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림보는 고요하다.
컴퓨터는 묵묵부답이다.
차가운 물이 목 부근까지 차올랐다는 감각에 리스는 진저리를 쳤다.

Posted by 미야

2012/07/03 22:20 2012/07/0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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