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 of interest (33)

갓파님들...? 슬슬 나라는 인간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리스는 미스 모레간을 기억했다.
그녀는 해롤드 렌이 운영하는 손해보험사에서 근무한다. 긴장을 하면 옷자락을 아래로 죽죽 잡아당기는 버릇이 있으며, 얼굴이 잘 붉어지곤 한다. 젊은 여성임에도 손톱은 짧게 정리, 올드한 취향의 씨드 진주가 장식된 귀걸이를 착용했다. 키는 작은 편에 속하고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 인상이 좋다.
그리고 그녀는 리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늘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니나 리스는 자신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걸 안다.
이쪽에서 적절하게 굽고 뒤집으면 모레간은「어머,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요...」이러면서 사장의 스케쥴을 슬쩍 귀띔해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경계심을 풀고 사장님 험담을 해주면 더더욱 좋다. 이를테면, 우리 사장님은 짜증이 나면 겉으로는 웃어도 의자 팔걸이를 그러잡아요, 과일을 씌운 커스터트 타르트를 숨겨두고 다른 사람 안 주고 혼자서만 몰래 드신 적도 있어요, 기타등등.

『미스터 루니? 자산관리자라고 하셨던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알렉산더 마이어입니다.』
당했다... 미스 모레간은 사라지고 50대의 머리 희끗희끗한 남자가 악수를 청해왔다.
각이 진 양복 깃과 영국식 악센트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청색 눈은 맑았고,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보험사 사장의 개인 비서라기 보다는 유럽 굴지의 명문가에 봉사하는 집사처럼 보였다. 생각이 깊고, 빈틈이 없으며, 입이 무겁고... 리스는 당혹감을 잘 포장해서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호주머니 속에 감춘 채 악수에 응했다.

마이어의 손은 부드럽고도 냉랭했다. 뜨거운 머그컵을 쥐는 요령으로 리스의 손을 쥐었는데 이런 류의 매끄러운 손을 가진 남자는 워싱턴 정계에서 특히 찾아보기 쉽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미스터 루니.』
『사전에 약속을 잡지 못했습니다만. 해롤드와 만났으면 합니다.』
노련한 눈이 재빠르게 리스의 위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평범한 사람은 마이어의 이러한 행동을 아마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비밀스러웠고, 능숙했다.
『유감스럽게도 렌 사장님은 개인 일정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일인가요?』
『흠... 』
『괜찮으시다면 다른 날로 약속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이번 수요일은 어떠십니까.』
『아뇨. 고맙지만 됐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리스의 매력은 50대 성인 남성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마이어가 동성에게 끌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눈빛만 봐도 확실했고, 오히려 그는 체격이 좋고 피부가 그을린 리스에게 일종의 반발감 비슷한 걸 가진 듯했다.
손등이 하얗지 않으니까 양이 아니라 늑대라고 여긴 것일지도. 아니면 허영심에 가득차 머리에 부분 염색을 하고 인공 썬탠이나 하는 부류로 봤을 수도 있다. 모레간과 달리 마이어는 리스의 점수를 아주 낮게 매겼다.

『저번에 뵈었던 미스 모레간은 휴가를 간 건가요.』
리스는 핀치가 그녀를 해고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녀는 지난 11일에 다른 부서로 옮겨갔습니다.』
잘 정리된 서류철을 닮은 목소리로 마이어가 대답했다. 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미스터 루니.』
『네.』
『조만간 루니 씨가 방문할 거라면서 사장님께서 미리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트라이탁 에너지 주식에 대한 건 이미 조처했으니 그것에 관한 선생의 조언은 일체 필요가 없다고요.』
『트라이탁 주식이오?』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반문했더니 마이어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리스는 베일러 짐 투자회사에서 프랍 트레이너로 일했던 애덤 샌더슨을 기억했고, 4백만주 - 약 3억 달러 상당의 주식 공매로 난리가 났던 트라이탁 주식 건도 잊지 않았다. 애덤은 이후 회사를 그만두었고, 지금은 가족 사업인 푸드 트럭 체인점을 운영한다.
그래서 그게 뭐. 그 트라이탁 에너지 이야기가 지금 왜 나오는 건데?
리스는 지금 이 시점에서 핀치가 그 주식 이야기를 전언으로 남겼다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도도 모르겠고, 의미도 모르겠다.

『제게 남긴 전언은 그게 전부입니까.』
확인하려 다시 물어보자 마이어는 못된 사기꾼 쳐다보듯 리스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생김새는 멀쩡한데 능력은 좀 모자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게 분명했다. 사장에게 주식 투자를 잘못 권유해놓고 지금에 이르러 딴청이냐는 무언의 비난도 섞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아함을 가장한 비아냥이 뒤를 이었다.
『죄송합니다, 미스터 루니. 우리 사장님은 원래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걸 대단히 싫어하셔서요. 그래서 주제 넘게 제가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프랑쉬멍(분명히 말해서), 렌 사장님에겐 당신과 같은 자산관리인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옳거니. 그러니까 존 루니 이름으로 이곳을 들락날락하지 말라는 경고구먼.

『나가는 출입구는 복도를 돌아 왼편입니다, 선생님.』
알렉산더 마이어는 예의 왕실 집사와도 같은 정중한 태도로 돌아가 리스를 배웅했다.

쫓겨나다시피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핀치에게 문자를 보냈다.
《같이 점심 먹어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자신이 밑도 끝도 없이 뻔뻔한 요구를 했음을 깨달았다.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신의 성실한 부하직원이 날 사무실에서 쫓아냈어요.》
이건 꽤나 투정부리는 어조이긴 했지만... 뭐.
《베트남 음식 어때요?》
리스는 태어나 생전 처음으로 문자 메시지에 이모티콘이라는 걸 삽입하고 싶어졌다.

『당신, 정말 못 말릴 사람이군요!』
꾸언(월남쌈)과 짜즈(만두튀김) 주문은 뒷전이고 핀치는 불 같이 화를 냈다.
『그래요. 나는 화가 났어요! 그러니 파인애플 볶음밥도 먹을 거예요!』
음료와 음식이 담긴 둥근 쟁반을 맵씨 있게 들고 가던 종업원을 향하여 핀치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Posted by 미야

2012/07/04 20:26 2012/07/04 20:26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536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650 : 651 : 652 : 653 : 654 : 655 : 656 : 657 : 658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19302
Today:
1008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