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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16)

후스코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리스에게 일러바쳤다.
《쥐새끼가 텼어요.》
특수 기동대에서 아르멘다리즈의 아지트를 급습, 증거물을 획득하고 벽에다 총알 구멍 여러 개를 뚫어놓기는 했으나 정작 체포해야 할 대상은 진작에 낌새를 눈치채고 달아난 후였다.
이 졸렬한 보스는 자기 몸 하나 보전하겠다고 급습 정보를 숨긴 채 부하들을 미끼로 내버려 두었다. 부하들이 체포에 불응하며 총격전을 벌이는 동안 그는 휘파람을 불며 SUV 핸들을 조작하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금괴와 현찰이 가득 들어간 가방이 들어가 있어 앞날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당분간 허리띠 졸라매어야 할 휴업 상태를 면치 못하긴 하겠으나... 아르멘다리즈는 운전석 유리창을 열고 바깥 바람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업이라는 건 햇빛 쨍쨍한 날이 있는가 하면, 때 이른 가뭄에 시든 풀처럼 갑자기 고개를 떨구는 날도 있는 법이다.

《이 자식이 경찰 내부에 정보원을 두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까지 조심했는데도 정보가 새어나간 걸 보면 아르멘다리즈가 문 경찰이 보통이 아니라는 거겠죠. 덕분에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아요. 감찰팀 사람들이 잔뜩 화가 나선 누가 급습 정보를 흘렸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얼굴 가죽만 남기고 회를 떠버리겠다고 장담하고 다니고 있거든요.》
통화하기가 영 껄끄러운 상태였던지 후스코는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리스는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화장실 물 내리는 리얼한 소리를 전부 듣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리스는 후스코가 전화를 빨리 끊어준게 고맙기까지 했다.

『도망쳤단 말이지. 그럼 하는 수 없이 플랜B로 가야겠군.』
그렇게 혼잣말을 하기는 했으나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플랜A의 연장선이다. 영어를 전혀 모른다던 외국인 창부 스롤란이 사실은 영어를 할 줄 알며, 그녀가 내부 고발자가 되어 아르멘다리즈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다는 극비 내용이 누설되기까지 한 마당에 특수 기동대의 급습 정보가 그쪽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문제는 그 끄나풀이 누구냐는 거다.

귀 안쪽으로 숨겨놓은 통화 장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핀치?』
《2시간 전에 아르멘다리즈의 핸드폰으로 익명의 암호화된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할 수 있겠어요?』
《알아내려고 하는 중입니다.》
지금 쯤이면 모니터의 열린 화면으로 아담스 패밀리의 집사가 현란하게 연주하는 쳄발로 악보 모양새로 엄청난 정보들이 흘러내리고 있을 터였다. 그 앞에서 핀치는 안구 건조증으로 고통 받으며「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희곡을 읽고 있을 적의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400년 전처럼 밀납으로 봉인된 편지를 상대에게 보낸 뒤에 난롯불에 태워버리게 하면 모를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익명이라는 건 현대 사회에선 존재하지 않지요. 그보다 미스터 리스? 아르멘다리즈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염려 마세요. 이럴 줄 알고 아르멘다리즈의 차에 위치 추적기를 몰래 달아두었습니다.』
《흠... 우리에게 각자 할 일이 생겼군요.》
그럼 서둘러라, 수고해라, 조심해라, 덧붙는 이야기 일절 없이 핀치와의 연락이 끊겼다.
약간의 서운함을 뒤로 한 채 리스는 미리 세팅해 둔 위치 추적기로 시선을 주었다.
아르멘다리즈는 외부로 주소가 노출된 적 없는 그만의「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째서 집으로? 설마, 위조된 여권을 가지러?
리스라면 지하철 유료 보관함 같은 장소에 여권을 숨겨두었을 것이다. 침실 서랍장 깊숙이 숨겨놓는 건 무모하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다수의 사람들은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맨몸으로 달아나기는커녕 집으로 돌아와 서랍장을 열고 갈아입을 여벌의 속옷따위를 챙기는 이상한 짓을 저지른다. 그러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주에 이미 다락방에서 여행용 가방을 꺼내놓았어, 참 잘 생각했지 - 웃기는 짓이다. 궁지에 몰렸을 적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야 하는 법이다. 집에 들려 소지품을 챙길 여유따윈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집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과연 무엇일까.

길가에 주차된 검정색 SUV를 확인하고 건물 계단으로 향했다.
아르멘다리즈의 감춰진 둥지는 사무실 빌딩의 4층에 위치했다. 1층은 보험회사며 T셔츠를 파는 일반 점포가 입주해 있었고, 2층은 전당포, 3층은 비어 있었다. 꼭대기인 4층은 원래 주거용은 아니었는데 자물쇠 달린 셔터를 달아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복도식 맨션처럼 불법 개조를 해놓았다. 보이는 문의 숫자는 모두 둘, 엘리베이터 이용 없이 4층까지 곧장 올라가자니 이마로 땀이 솟았다. 물론 숨이 차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다른 이유로 땀이 났을 거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적막 속에서 길게 늘어진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리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하나하나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서 상대방을 응시했다.
뺨에 난 길죽한 상처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리스는 긴장했다. 일라이어스의 오른팔이자 게슈타포와도 같은 남자 - 그는 장갑을 낀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
『냉동 트럭에서 고생한 사람치고 건강해 보이니 좋군. 우리 두목이 안부 전하라고 그랬네.』
책을 읽는 듯한 어조로 존에게 간단한 안부 인사를 전했다.

Posted by 미야

2012/05/29 20:35 2012/05/2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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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15)

케이블 방송 번역에서는 후스코가 리스에게 반말을 합니다만... 안 어울려요.


사업의 시작은 사소한 계기였다.
도박 빚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여자 친구의 개인적인 서비스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정확하게는「섹스 상납」이었고, 누런 낯짝을 가졌던 빚쟁이는 아르멘다리즈의 콩팥 하나와 걸 프렌드의 정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무엇이든지간에 넓은 마음으로 존중하겠노라 선언했다.
에일린은 울면서 남의 콩팥 대신 팔리는게 싫다고 말했다. 하긴 창부가 되라고 하는데 손뼉치고 그 일을 하겠다며 입고 있던 속옷을 내릴 여자는 없을 것이다.
아르멘다리즈는 진심으로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그는 병원 침대에 드러눕는 대신 주먹으로 여자 친구의 얼굴을 여러 번 때렸다.
결국 여자는 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화장을 한 모습으로 억지로 파티에 보내졌고 세 명의 남성들의 시중을 들었다.

에일린은 이후로도 두꺼운 화장을 해야 했다. 가끔씩 스카프와 선글래스로 얼굴을 가린 채 병원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진품 샤넬 백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수입이 의외로 짭짤했다. 남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고.
아르멘다리즈는 눈을 덮고 있던 얇은 비늘이 벗겨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인생이 시궁창이라면 하루살이 벌레보다는 쥐가 되는게 더 좋지 않겠는가. 결심이 서자 거리로 나가 여자를 몇 명 더 구했다. 폭력을 서슴치 않는 악질 포주 아르멘다리즈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래서 통칭 랫인가...』
『질이 나쁜 놈이죠. 이놈은 데리고 있는 여자들을 보호하지 않거든요.』
라이오넬이 눈빛을 반짝였다. 만화책을 보면서 열광하던 시절의 흥분감이 거기에 있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최근 들어 그는「좋은 경찰」노릇도 썩 괜찮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쓰레기 같은 나쁜 놈들을 붙잡아 혼내주는 좋은 경찰 말이다.

『인생이 시궁창이라면 벌레보다는 쥐가 되는 것이 낫다, 이놈이 늘 입버릇처럼 지껄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별명이 랫이죠. 그런데 말이죠. 쥐에게 실례되는 말입니다. 쥐도 그렇게 뻔뻔하게 살지 않는다고요.』
대부분의 포주들은 거리의 위협에서 상품인 여자들을 보호한다. 그들이 수금하는 수수료는 보호의 댓가이며, 또한 정기적으로 손님을 알선하는 것에 대한 보답이다. 일종의 공생 관계다. 창부들은 수입의 45%를 지불하고 포주와 동업한다. 다시 5%는 지역 경찰들에게 쥐어주는 뇌물로 들어간다. 남는 절반인 50%가 몸을 팔아 얻은 순수한 노동의 댓가이며 그것으로 집세와 식비, 의료비 등등을 충당한다.
『물론 질 나쁜 놈들은 그보다 수수료를 더 많이 가져갑니다. 그래도 아르멘다리즈 같지는 않죠. 이놈이오? 단 한 푼도 여자들에게 주질 않아요. 그 부분에선 신념이 아주 철저합니다. 국물까지 쪽쪽 빨아먹죠. 도망가려고 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감금해둡니다. 엉터리 계약서를 쓰게 해서 오히려 빚덩이에 올라앉게 만들어요. 그런 면에선 똑똑한 놈입니다.』

리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런데도 체포가 되지 않는다는 건가.』
후스코는「댁이 더 잘 알 거 아뇨」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잡초를 뽑아버리려면 어느 정도 키가 자라야 하는 법이죠. 이 바닥에선 잔챙이는 신경을 쓰지 않아요.』
『그거 좋지 않은데. 내 기준으로 봐선 아르멘다리즈는 올챙이가 아니었어, 라이오넬.』
『압니다, 알아요. 뒷다리 나온 개구리 새끼로 컸죠. 본업인 매춘업 말고 콜롬비아산 헤로인 유통도 건들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이봐요, 그 어금니 아프다는 식의 표정은 뭡니까. 우리도 아주 병신은 아니라고요. 우리가 까마득히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수?』

조직 범죄 단속반에서 약 냄새를 맡고 아르멘다리즈를 추적하고 있다고 했다. 윗선에서 그의 사업을 눈여겨보기 시작한게 벌써 1년 가까이 되어간다고 했으니 슬슬 체포 물증이 튀어나올 시기였다. 살인 사건 수사부 소속인 후스코의 능력으로는 상세 내용까지 캐낼 재주는 없었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냄새」가 맡아지는 것이다.
후스코는 무의식적으로 살집 있는 콧망울을 톡톡 건드렸다. 코, 코, 코. 이것이 경찰의 재산이다.

『헤로인 수입을 비밀리에 추진하는 동안 아르멘다리즈가 창부 하나를 개인적으로 끼고 있었답니다. 녀석도 불알 달린 수컷이니까요. 외국에서 불법 이민을 온 여자로 영어를 전혀 못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여자를 발가벗겨 침대에 눕혀둔 채 콜럼비아 마피아 녀석들과 천연덕스럽게 비즈니스 전화도 하고 그랬답니다. 완전히 방심한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 여자가 반 벙어리이긴 했어도 영어를 아주 몰랐던게 아니었어요.』
『호오?』
『그래서 조직 범죄 단속반에서 이거 제대로 잡았다 이러면서 여자를 증인으로 세우고 아르멘다리즈를 소탕하려고 했죠. 문제는... 인사부 말로는 얘기가 도중에 세어나갔다고 합디다. 그래서 놈이 완전히 미쳐서 여자를 죽여버렸다고 하더군요.』

이쯤해서 리스는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대로 사람을 고인으로 만들지 마. 스롤란은 아직 안 죽었어.』
후스코는 펄쩍 뛰었다.
『어엉? 댁이 그 여자 이름을 어떻게 압니까?』
그러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다물었다.
이 패턴, 반복되는게 지겹다...
『또 그런 겁니까. 또!』

의미불명의 미소를 띄운 리스가 서류 파일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걸 보면 조직 범죄 소탕반 친구들이 무척 좋아할 거야. 익명으로 전달해. 그럼 모두 정리될테니.』
『스롤란은 어쩌고요.』
『아르멘다리즈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 안전하게 있어. 그녀는 이미 서류상으로 죽었으니 자네도 입 다물고 모르는 척 해.』
『아까는 사람을 마음대로 고인으로 만들지 말라면서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능구렁이처럼 웃던 리스가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선글래스를 꺼내들었다.

Posted by 미야

2012/05/27 19:18 2012/05/2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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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14)

순서 엉켰음 (풀 자신 없음), 분량 적음, 끈적임 없음.


별 생각 없이「굿 나잇, 핀치」인사했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은 20시 40분이 좀 넘은 시간이었고, 따라서 표면적인 뜻만 따진다면「좋은 저녁입니다」인사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모든 말에는 숨겨진 뉘앙스가 있는 법이며, 이 경우엔 포근한 이부자리, 그리고 세트로 붙는 굿 나잇 키스라는게 있다.
아니나 다를까, 꼬장꼬장한 품성의 보스가 대놓고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본 리스는 불현듯 누가 그에게 맛없는 시금치를 억지로 먹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아니면 브로콜리. 그것도 아니면 당근...

『저는 당근을 좋아합니다, 미스터 리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라며 잔소리하던 핀치는 순간 혀를 깨물었다.
리스는 온몸을 떨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의 고용주는 당근을 좋아함. 수첩에 적어놓고 내일 모레까지 음미할 기세다. 핀치는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녹황색 야채를 저주했다.

『그보다 오늘은 옷차림이 달라 보이는군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아무거나 고르고 보았다.
뭐, 솔직히 말해 핀치는 리스가 무슨 옷을 입던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몸에 꽉 끼는 청바지를 입어도 괜찮고, 엉덩이가 흘러내리는 반바지를 입어도 괜찮다. 코를 쥐게 만드는 노숙자 차림새였어도 싫은 소리 하지 않았을 거다. 그들에게는 사전에 정해놓은 드레스 코드라는게 존재하지 않았고, 위장을 위해서라면 우주복이라도 구해 입어야 할 판국이다. 그러니 맨날 입던 검정색 양복이 아닌, 생소한 가죽 재킷을 입고 나타났다고 수선을 떨 까닭이 없다. 이건 그저 순수하게 화제 전환용 멘트일 뿐이다.
『재킷이 리스 씨에게 잘 어울립니다. 보기 좋은데요.』

리스는 여분의 의자가 많음에도 핀치의 왼편 부근에서 서성이며 흥, 콧소리를 내었다.
그는 핀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걸 즐긴다. 콧소리 또한 기분 좋을 적의 버릇이다.
『요즘은 합성 피혁도 천연 저리가라로 감쪽 같단 말예요. 아무튼 당분간은 양복을 입지 않으려고 해요.』
『왜요.』
『6개월간 카터가「수트 입은 남자」에 관심을 두고 집요하게 따라다닌 여파가 남았더군요. 무슨 도시 전설이 되어버린 듯해요. 심지어 만남 수집가처럼 제 이야기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생겼어요. 이름은 벡스턴이고,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전 권으로 구입해 서재에 진열해두고, 도넛을 먹으면서 뱃살을 걱정하는 평범한 순찰 경관입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내이고, 저에 대해「4층 높이의 건물을 장비 없이 맨손만으로 오르는 남자 - 옷차림은 양복」으로 여기고 있어요.』

핀치의 눈썹이 2층 높이로 올라갔다. 아니, 그보다 길어 2층 반 높이였다.
『재밌군요.』
『생각만큼 재밌지는 않습니다, 핀치. 그 순찰 경관은 어설픈 솜씨로 비번인 날에 카터를 미행까지 했어요. 호기심에 수트 입은 남자 이야기를 확인하려고 말이죠. 미행을 눈치 챈 카터는 그가 일라이어스의 지시를 받은 부패 경찰이라고 착각했고, 하마터면 그를 잡을 뻔했어요.』
핀치에게 흰머리가 늘었군, 속으로 생각하며 다음 이야기를 덧붙였다.
『최소한 오른팔을 꺾었습니다.』
이제 리스는 핀치의 오른편 부근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조명 탓일지도 모르겠다. 각도를 달리하니 거슬리던 흰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벡스턴은 오해였다고 주장했고, 카터는 자신의 물리적 행동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그래도 카터의 의심은 덜 풀렸어요.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다 눈에 띈게 도합 다섯 번이 넘는데다가 그가 목격된 장소가 벡스턴의 순찰 구역과 맞지 않았으니까요. 카터는 신중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당신은 카터의 부탁을 받고 벡스턴의 뒤를 조사한 겁니까.』
순간 리스는 묘한 기시감에 당황했다. 핀치의 저 표정... 비슷하게 닮은 걸 최근에 본 적이 있다. 그게 어디였더라... 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번개처럼 깨달았다. 가게에서 동양인 바텐더가 그에게 관심을 기울였을 적에 벡스턴이 지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소똥 개똥 말똥구리...」지분대는 욕설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술잔에 든 얼음이 달그닥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이곳은 술집이 아닌 도서관이고, 의자에 앉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해롤드 핀치다.

『당신의 보스는 접니다. 카터 형사님이 아니고요.』
핀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서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고 목소리 톤을 제대로 꾸밀 줄 알았다. 더하기는 +, 빼기는 -, 곱하기는 *, 나누기는 /, %s는  문자열의 시작 주소을 받아 null 값이 입력될 때까지 문자들을 입력받는 서식 문자... 방금 전에 말한 내용이 졸음을 부르는 종류라고 해도 그런가보다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도 감정 전부를 삭제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핀치는 재빨리 부차적 공략을 펼쳤다. 쉽게 말해 리스가「핀치, 화내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요」입을 떼기도 전에 다른 화제로 갈아탔다.

『미겔과 스롤란의 새 신분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썩을 고용주.
핀치는 무뚝뚝하게 업무 이야기만 계속했다.
『스롤란이라는 이름이 캄보디아 어로「사랑」이라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미겔이 그 어린 창부에게 한눈에 반한 까닭이 어쩌면 이름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란이라고 이름을 바꿨더니 미겔이 변심했더라 이런 줄거리는 아니었음 좋겠군요. 이쪽은 현금이 든 봉투입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약간의 여비도 같이 준비했습니다. 국경을 넘자마자 임산부가 빈털터리가 되어선 곤란하니까요. 그건 그렇고 자기 아기를 가진 여자를 죽이려고 든 포주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미스터 리스.』

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차분하게 설명하고 싶었다. 결코 변명이 아니다.
「카터가 저에게 부탁한게 아닙니다. 카터는 부탁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냥 알아서 한 거예요.」
그러나 핀치의 두 귀는 막혀 있었고 새 신분증과 현금이 든 봉투가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계획이 있습니다. 곧 처리하죠.』
하는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입 다물고 그에게서 내용물이 든 봉투를 건네받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2/05/24 11:29 2012/05/2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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