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 of interest (26)

불편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그동안 핀치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는데, 악마라는 초현실적인 존재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고, 혹시라도 사탄이 어느 나라 신이냐 리스가 질문할까봐 그런 거였다.
고인이 된 사담 후세인은 부시 대통령더러 사탄이라 욕했다.
그렇다면 사탄은 미국의 신인 것인가.
아니, 그걸 떠나서... 빈 라덴은 어쩌고? 리스가 사탄의 정체는 오사마라고 우기면 그때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사람을 두고 무식한 자, 그리고 그보다 더 무식한 자로 구분하는 건 좋지 않아, 해롤드. 자네는 가끔 주변 사람들을 여전히 천동설을 주장하는 종류로 몰아붙이는데 말이지... 이제는 로마 카톨릭도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고?」
그리운 친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맞는 말이다. 핀치는 자신이 턱도 없이 리스를 바보 취급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미안, 네이슨.」

그동안 리스는 뇌에 잔주름을 열심히 만들고 있는 고용주를 곁눈질로 관찰했다.
처음에는 쩔쩔매며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단호하게 입을 다물고, 그리곤 부끄러워한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앤 블리스는 악마 숭배에 관심이 있는 걸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핀치는?』
보다 침착해진 핀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리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글쎄요. 앤은 겨우 열 다섯 살이잖습니까. 그렇게 심각할 것 같지는 않네요.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으로 사탄을 거들먹거리니까요.』

또래 여자애들 다수가 그러하듯 뱀파이어 스토리를 좋아하고, 온갖 욕설로 점칠된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듣고, 해골 무늬 피어싱을 하고, 다듬은 손톱에 검은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그 정도 치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라서 사탄을 상징하는 별 무늬의 심볼도 없이 그저 시든 장미로 장식된 인터넷 화면 하나만 가지고 사탄 숭배 운운하는 건 너무 성급했다.
그런 것보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웹 디자인 학습 과제의 결과물로서 그야말로 별 것 아닌 것이다.
쓰여진 문구는 요즘 아이들 말마따나 쿨 하게 보이니까 집어넣은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핀치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렇다. 개운치 않은 것이다.

핀치는 기억하고 있는 책의 줄거리를 더듬었다.
소설에는 가발을 쓴 괴팍한 영국 귀족이 등장했고, 그 가발의 빛깔은 보라색이었다.
「일본인들이 사람 머리카락을 분홍색으로 칠했다고 무어라 할 것도 없군.」
주인공인 브라운 신부는 그 가발을 벗으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귀족은 자신의 가문이 오래 전부터 무서운 저주를 받았고, 그 결과 괴물로 변한 귀를 숨기기 위해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고 말하며 한사코 거부한다.
그에게 달려들어 가발을 강제로 벗기자 만 천하에 드러난 그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네?』
리스가 당황해하며 그를 쳐다보았지만 핀치는 계속해서 바쁘게 머릿속 책장을 뒤졌다.
「숨겨야 할 것이 없다는 걸 숨기기 위해 엑스무어 공작은 일부러 요란한 가발을 썼다. 사실 그는 진짜 공작이 아니었고, 그의 정체는 사채업이나 하던 건달 같은 변호사로...」
『음, 그렇다면 신원 도용인가.』
『뭐라고요?』
열 다섯 살의, 보호자가 없는 소녀는 학교는 물론이고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화랑을 운영하는 이모는 이러한 조카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앤 블리스가 앤이 아니고, 이모가 사실은 이모가 아니라면 어떨까.

핀치가 막「보험사기」단어를 떠올릴 즈음, 리스가 예고도 없이 노트북을 강제로 덮었다.
핀치의 손가락은 여전히 노트북 자판 위에 올려져 있는 상태였기에「피아노 뚜껑이 내 손가락을 먹었어요」상황은 피할 수 없었다.
『아파!』
『집안에서 사람이 나왔어요, 핀치. 저쪽이 노트북 불빛을 알아차릴까봐 그랬어요.』
『말로 경고해주면 큰일이라도 납니까.』
『계속 딴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요.』
거기까지 말한 리스는 숨죽이고 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내려와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야 할 것 같아요.』
거리가 벌어지면서 사람의 인영이 흐릿해지자 리스가 서둘러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Posted by 미야

2012/06/21 14:47 2012/06/21 14:47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52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661 : 662 : 663 : 664 : 665 : 666 : 667 : 668 : 669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0051
Today:
1757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