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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judgment 19

※ 딘이 흘린 눈물 한 방울에 보기 좋게 격침, 반짝반짝 라이징 썬 모드를 회복하려면 제법 시일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종결부 진입입니다.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멀리서 보면 5개 동의 신축 아파트 건물로도 보인다. 할로겐 외부 조명등과 산뜻하게 칠해진 밝은 계란색 페인트가 잘 정돈된 느낌을 자아냈다. 하지만 차를 몰고 가는 내내 주변으로 늦은 퇴근으로 녹초가 된 직장인들의 구부정한 어깨가 눈에 띄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외출을 서두르는 젊은 커플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만 환하게 켜졌을 뿐, 인기척이 완전히 지워진 건물은 흡사 텅 비어버린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안내 표지판에 따라 왼편으로 자동차 핸들을 돌리던 샘은 오래된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마법사의 감쪽같은 눈속임으로 꾸며낸 나무 합판이 와지끈 넘어가자 그 뒷 배경으로 민둥 벌거숭이 허허벌판이 나타난다. 귀부인들은 수건을 흔들며 혼절하고, 채플린은 모자를 살짝 들었다 놓으며 들통난 거짓 앞에서 베시시 웃는다.
모두가 가짜. 후~ 바람을 불면 날아가 버리는 판자 조각. 못 하나 빠졌다고 무너지는 세트.
설마, 그럴 리 없겠지 생각하고 속도를 줄였다.
거리가 더 좁혀지자 건물은 이제 신축 병원처럼도 보였다. 외부 주차장에 세워둔 사설 앰블런스 차량이 모두 석 대나 된다. 하얀 유니폼을 위 아래로 반듯하게 차려입은 뚱뚱한 여자가 네모난 짐꾸러미를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에게서 물건을 인수인계 받는 나이 지긋한 남자 직원도 완벽하게 표백된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운동화마저 하얗다. 멀리서 보고 있자니 꼬마 유령 캐스퍼의 심술쟁이 삼촌들이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샘은 조수석에 앉은 헤더를 곁눈질로 훔쳐봤다. 그녀는 아직 이렇다 할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눈치는 있다. 소독약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병원」운운하기엔 아직 이르겠다만, 건물 로비로 휠체어가 일렬 횡대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 모양에서 샘은 이 건물의 진짜 기능이 무엇인지를 쉽게 짐작했다.

헤더가 안달하는 어린애를 야단치듯 점잖케 눈짓했다.
『맞아. 요즘 사람들 말로 은퇴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지. 시쳇말로「살아있는 퇴물들의 밤」이랄까. 나이 지긋한 노인들만 모여 사는 곳이야.』
조지 로메로 감독의 좀비 영화의 제목을 비틀어 표현하면서 저쪽으로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고 가라고 방향을 지시했다. 이미 사전에 여러번 와봤던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도 지리에 익숙했다. 머뭇거림이라는게 없다. 이쪽, 혹은 저쪽이라고 간단히 신호하며 능숙능란하게 숨어들어갈 공간을 찾아냈다.
『여기.』
『이곳?』
『뒤로 돌아 세워. 옳지.』
헤더의 말대로 후진하여 후미진 곳으로 차를 세우면서 고개를 길게 빼봤다. 헤에,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자리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늘어진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완벽한 위장이 되어주었다. 근방으로 가로등도 없어 이 상태라면 얼굴에 일부러 검댕을 칠하지 않더라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겠다. 차량의 색상도 검정이겠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끄자 순식간에 그 존재감이 어둠에 묻혀 지워졌다.

『차는 이곳에 세워두고 올라가자. 정문으로의 접근은 안돼. 그쪽에선 경비원이 일일이 방문자의 이름과 방문 시각을 적고 본인의 싸인을 받아. 게다가 이런 시간에 아들이 손녀를 데리고 할머니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아마 IQ가 한 자리수의 가엾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는 안 믿어줄 거야.』
『잠깐! 누가 손녀고, 누가 아들... 이, 이봐! 설정상 네가 내 딸이 되는 거야?』
『CCTV를 피해야 하니까 한참 돌아서 가야 해. 이쪽으로.』
『무리야, 그건! 14년 전의 내 나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이를 만들기는커녕 여자 친구랑 뽀뽀도 못 해봤을 때라고.』
『뭘 듣고 있었나. 거 무지 답답하네. 거기서 왜 정색을 하는 거니. 그러니까 정문으로는 안 들어갈 거라고 한 거잖아. 정말이지 넌 짜증스런 성격이구나.』
차가운 눈으로 째려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경비 절감 문제로 외곽에 설치된 CCTV는 한정적이다. 따라서 감시 카메라에 안 찍히고도 건물 앞으로의 접근은 충분히 가능하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제법 머리를 굴려야 한다. 머리를 굴리기만 해야 하던가, 몸은 그 곱절로 굴려야 한다.
샘을 향해 자신의 뒤를 정확히 따라오라고 단단히 주지시킨 뒤에 헤더는 겨울 바람에 얼어붙은 화단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신발 자국이 흙에 찍힐까 염려하는 기척도 없다. 용감한건지, 무모한 건지 모르겠다. 잠깐 기다리라는 이쪽의 부탁에도 아랑곳 없이 다리 가랑이가 찢어져라 한쪽 다리를 회색의 담벼락에 걸쳤다. 운동 신경은 제법 좋은 편이었다. 체구가 작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엉덩이를 들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되면 발도장 어쩌고는 잊는게 낫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샘 역시 허겁지겁 콘크리트 격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는 어익후.
바깥쪽에선 1m가 조금 넘는 블록이 안쪽에선 그 깊이가 3m 남짓이나 되었다. 경사진 언덕을 수평으로 깎아 도로를 낸 탓에 안과 밖의 높이가 서로 상이하게 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현기증을 일으켰다. 건너편으로 무작정 뛰어내리려니 망설여진다. 더도 말고 딱 2층 높이다. 저 바닥이 어쩐지 까마득히 멀어 샘은 추락의 공포를 느꼈다. 이걸 헤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뛰었다는 건가. 정말이지 독한 여자다.

『뭘 어물거리는 거야. 서둘러, 고릴라!』
『나는 고릴라가 아니야.』
『알았어, 오랑우탄.』
말이나 못 해야 예쁘지.
종용하는 헤더의 목소리에 발목이 사큰거리는 걸 각오하고 투박한 모양새로 착지했다.

『여기서부터는 자세를 많이 낮춰야 할 거다. 건물 벽에 바짝 붙어서 잘 따라오도록.』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시키는대로 했다.
『꽤나 여러번 와봤던 모양이군.』
『사전 답사는 충분히 하자는게 내 철칙이야. 보여? 오른쪽으로 다섯 번째 창문이 안전 장치가 망가져 있어. 그리로 들어가자.』
『와... 상세하게도 알고 있군. 이건 사전 답사 수준이 아닌데.』
헤더는 천천히 손가락을 세었다.
『면회를 왔다고 얘기하고 들어와본 것이 두 번. 여기 근무하는 의사 선생님의 딸이라고 속여먹고 돌아다닌게 한 번. 직원에게 뇌물을 주고 옥상에도 올라가봤지. 덧붙여 말하자면 그 뇌물이라는 건 캔디바였어. 이럴 적엔 열 네 살의 외모라는게 아주 요긴해지더군.』
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 존이라면 무어라 말 했을까. 배울 점이 많다고 감탄하진 않았을까.

3개동은 일반 거주 시설이라고 한다. 혼자서 식사 준비나 목욕을 할 수 있고, 간단히 방 청소를 할 수 있는 기력을 가진 노인들이 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일종의 임대형 아파트로, 약간의 위락 시설을 끼고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가 되어 있었다. 자갈로 포장된 산책로와 테니스장, 그리고 그네가 있었다.
샘은 방치된 테니스장을「이건 농담 맞지?」라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실제로도 테니스장은 격한 운동을 할 수 있는 장소로서가 아니라, 버려진 공터로밖엔 안 보였다. 흙물이 들어 아무렇게나 굴러더니는 노란 공이 흉물스러웠다. 직원들이 저기서 테니스를 치면 할머니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모르겠다. 헤더의 설명으로는 지하 1층으로도 실내 헬스장이 있다는데 과연 이용하는 입주민들이 있을련지 의문이다. 노인들은 원래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법이다. 아니면 자전거라던가, 역기라던가 하는 것 말고 딘이 좋아하는「매직 핑거」같은 기계가 안마기로 위장하고 놓여져 있는 건가? 샘은 덜덜덜 진동하는 침대에 누워「어, 시원하다~」를 외치는 할아버지를 상상하곤 얼굴을 찡그렸다.

교통 정리를 하는 경관의 표정으로 헤더가 나머지 설명을 덧붙였다.
『나머지 2개동은 병원을 겸한 입원실이야. 상주 직원들의 숙소 또한 이곳에 있어. 죽을 날이 다가와 거동이 불편해진 노인들이「환자」의 타이틀을 쓰고 이곳으로 옮겨오지. 몸은 건강하지만 증상이 심한 치매 환자들은 아래층에, 머리는 멀쩡한데 사지가 맛이 간 환자들은 윗층에... 대충 이런 식이야.』
역시 여러번 뒤지고 돌아다닌 솜씨다. 머뭇거림 없이 직원용 승강기를 타고 4층까지 올라갔다가, 세탁실로 향하는 복도를 통해 10m 가량을 걸었다. 다시 비상 계단으로 나와서는 작동이 영 신통찮은 감시 카메라가 여전히 수리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에 총총 걸음으로 6층까지 올라갔다. 뒷구멍 조사는 그야말로 철저해서 내통자가 적군에게 돈을 받고 성안 내부 지도를 팔지는 않았나 싶을 지경이었다.

복도를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없음을 거듭 살피고 헤더가 짧게 휘파람을 불어 신호했다.
『이쪽.』
그녀가 눈짓으로 가리킨 608호의 입구에는 다음의 이름으로 명패가 걸려 있었다.
「미하일 요하넨버그」
솔직히 말하겠다.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샘은 짐짓 뒤로 물러서는 동작을 취했다.

『본명은 귄터 베르겔트.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그 사람이지? 당신을 강간했다는 나치... 그 남자 맞지?』
『이봐? 윈체스터. 당신이 강간당한게 아니잖아. 뭘 겁내는 거야. 개나 돼지 취급을 당한 건 바로 나야. 왜 얼굴을 굳히고 그래. 아님 저 방에 마귀처럼 머리에 뿔 달린 남자가 뜨겁게 석탄을 태워가며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삼지창으로 무장하고 너는 누구냐고 야단이라도 칠까봐?』
그녀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킬킬거렸다.
샘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시선을 피했다.
『틀려. 저 사람이 겁나서 그러는게 아니야. 앞으로 당신이 저 남자에게 할 짓이 마음에 걸려서 그래. 당신... 죽일 거잖아, 저 사람을.』
『응. 신을 대신하여 심판한다.』
『헤더.』
『무서우면 동석하지 않아도 된다. 이대로 밖에서 기다리겠나.』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난 뒤, 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화로 장식된 꽃병이 초라했다. 목욕을 오랫동안 하지 못하고 방치된 탓에 배설물의 악취가 섞인 역한 체취가 느껴졌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 바짝 말라붙은 노인은 너무도 약해보여서 샘이 주먹으로 한대 치면 그대로 숨이 끊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1인용 침대가 만주벌판으로 보일 지경이다. 노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가냘픈 색색 소리를 내며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편안치 않은 듯, 기진맥진하여 끙끙 신음했다.

헤더는 침대의 오른편으로 가서 가만히 노인의 손을 만졌다.
나이 탓에 흐려진 회색의 눈이 사람 체온에 반응하여 슬그머니 떠졌다.
헤더는 침착한 목소리로 이사야 47장 10절에서 11절의 성경 구절을 암송했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노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 야밤에 갑자기 아는 척을 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진심으로 묻는 것 같았다. 노인의 허깨비를 닮은 얇은 가슴이 힘겹게 올라갔다 다시 내려갔다.
헤더는 노인의 손을 더욱 힘 주어 잡았다.
『귄터.』
그동안 숨겨왔던 본명이 불리워지자 노인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런데 그게 무섭다거나, 두렵다는 쪽이 아니었다. 샘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은 환했다.
『아, 아아...!! 드디어... 드디어...!!』
『생각 나?』
『나고 말고, 여지껏 지금 이 순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소.』
노인이 확인하듯 헤더의 오른손을 잡고 손가락을 헤아렸다. 그 손가락이 모두 여섯임을 확인하고나자 놀랍게도 그는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헤더... 헤더. 그게 당신의 이름이었지.』
『기억하는군.』
『당신은 아름다웠지. 지금도 변함 없이 아름답군. 천사가 되면... 모두 그렇게 되는 건가.』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나는 천사가 아니야, 귄터.』
『그치만 하느님의 사자잖소... 마침내 나의 기도에 응답하여 내려온... 콜록. 그렇지?』
그는 확신에 가득차 다시금 편안한 웃음을 흘렸다.

Posted by 미야

2007/03/27 21:23 2007/03/27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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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judgment 18

※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이거 휴방이 계속되는 3주동안 이놈의 형제들이 왕왕 우는 걸 곱씹으면서 지내야 되는 건가요. 으앗?! ※


딘이 스케치북에 그린 성냥곽 소녀와는 어디를 봐도 닮지 않았다. 아니, 그걸 닮으면 오히려 큰일이다. 자로 잰 듯한 네모난 몸통과 젓가락을 닮은 팔 다리라는게 인류에게 가능하다면 화성인의 조상이 문어라는 주장도 신빙성을 얻게 된다. 샘은 맘 편하게 Delete 키를 눌러「네모네모 스펀지송」이미지를 삭제했다.
그렇다면 오겐 맥콰드가 만든 예술적 카메오 조각과는 닮았던가. 샘은 냉정하게 이 또한 아니라고 판단했다. 자동차 뒷자석으로 기절해 누운 여자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노틀담 성당 담벼락으로「숙명」이란 단어를 낙서하게 만든 집시 여자 에스메랄다의 비극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헐렁한 점퍼 차림새에 진 바지, 할인 판매점 바구니에서 건져올렸을 면 블라우스, 대충 묶은 머리 고무줄 장식, 파란색 스니커즈 신발. 지금의 이 아이는 엄마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고 가출을 결행한 비행 청소년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말라붙은 코피와 볼록 튀어나온 혹까지 더해져「아주 막 나가는 중입니다」라는 훌륭한 광고판이 되어 주었다. 이마에 생긴 생채기에 일회용 반창고를 붙여주자 배경음으로 껌을 짝짝 씹는 소리가 들려왔을 정도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탓에「불량」의 이미지는 곱절이 되었다.
오겐이 지금의 그녀를 봤다면「나의 천사를 돌려줘! 이건 배반이야~!」를 외쳤을지도.
샘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 받침 대용품으로 사용할 목욕 타올을 세 번 반복하여 접었다.

『으으...!!』
베개를 깔기 위해 머리를 살짝 들어올리자 헤더가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걸 조심스럽게 도로 누이며 자세를 편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어쨌든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켰을게 분명하다. 남이 애지중지하는 귀한 자동차에 손가락 사이즈의 구멍을 뚫어놓았다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지언정, KO를 당한 아픈 사람에게 더 이상 잔인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한참을 아래를 내려다봐야 하는 사이즈의 소녀라는 점이 - 호적상 실제 나이는 그렇다치고 - 샘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그래서 목이 아프지 않도록 만들어주고, 가방에서 꺼낸 옷을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그녀가 권총을 들고 덤볐다는 사실은 이미 흐릿해졌다. 대신 가출한 이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했다가 집으로 무사히 돌려보내야 한다는 어른의 의무감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누가 가출을... 아이고, 머리야. 했다는 거냐.』
헤더가 투덜거리며 한쪽 눈을 빼꼼 올려떴다. 그러다 기운이 다했나 보다. 맥 풀린 소리와 같이 하여 떠진 눈이 도로 감겼다.
『너... 바보라는 소리를 곧잘 듣곤 하지? 내 추측이 맞지? 윈체스터.』
바보라니. 억울한 오해다.
『설마. 스탠포드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까지 받았는 걸.』
『그래? 요즘 대학엔 바보를 응원하기 위한 장학금이라는 것도 있는가 보군.』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묘하게 딘을 닮았다. 그래서 샘은 화를 내기는커녕 빙긋 웃었다. 이건 흡사 열 네 살의 형과「누가 내 티셔츠를 입었어!」를 두고 말다툼을 벌이는 기분이다.
『왜... 웃어?』
킥킥 소리에 헤더가 어렵게 다시 눈을 떴다. 그녀는 내심 불안한 눈치다. 도발은 자기가 먼저 해놓은 주제에 겁 먹은 여자들이 흔히들 그러듯 시트에 누인 두 무릎을 단단히 붙였다.
뭡니까, 누가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있기라도 합니까. 딘이라면 짜증스럽다는 식으로 냉큼 이렇게 쏘아붙였을 거다. 브래지어도 착용 안 한 아이에게 무작정 덤빌 만큼 나는 안 굶주렸다고.
하지만 샘은 딘이 아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대신 농담을 따먹었다.
『글쎄. 내가 받은 장학금이「포레스트 검프*」재단에서 나왔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님 나만 모르고 있었나?』
나치 헌터도 영화는 본다. 상냥함을 품은 이 농담엔 헤더도 픽 소리를 내고 웃었다.

그래도 여전히 머리를 움직일 수 없었던 것 같다. 목소리도 잔뜩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멍했다.
『어째서...』
『응?』
『사람이 총으로 쏜다고 하면 잠자코 만세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너처럼 대책 없이 구는 건 처음 본다.』
『미안.』
『나에게 사과할 일은 아니지, 윈체스터.』
『뒷자석에 숨어있던 사람이 갑자기 덤비면 그렇게 하라고 아버지에게서 배웠어.』
『뭐? 일부러 자동차 사고를 내라고 배웠다는 거야? 잘못 배웠어. 그랬다간 다치기 쉬워. 무모한 사내였다고 진작에 소문은 들었지만 존 윈체스터라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군. 아들을 어떻게 가르친 거야. 그치만... 뭐, 인정을 안 할 수는 없겠어. 아주 쓸모 없는 것도 아니야. 실제로 멋지게 적을 제압했으니까.』
샘은 무어라 대꾸할지를 몰라 마냥 어색한 손바닥만 비볐다.
그런 샘을 꿰뚫어 본 것처럼 헤더가 뒷말을 덧붙였다.
『나를 다치게 만든게 정답인 거야.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머뭇거리는 1, 2초에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법이니까. 네 아버진 널 자랑스러워 할 거야.』
『그래도 여자를 때렸는데...』
샘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 그 머리의 붓기는 모르긴 몰라도 쉽게 안 가라앉을 거야.』

그 어색한 사과를 일부러 한쪽 귀로 흘려 듣고 헤더가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왜 혼자서 있는 거니? 네... 파트너는? 딘 윈체스터는 어딨어?』
파트너라는 단어의 맛이 대단히 멋졌다. 동시에 듣는 순간 기운이 좍 빠졌다.
『저어, 형은 단독 행동에 들어갔어.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몰라. 연락도 되지 않아.』
『설마.』
『놀란 것 같은데 진짜야. 그러니까 말인데, 총을 들고 위협해봐도 나에게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어.』
샘은 더러운 머리를 긁적였다.
『네 추측과는 달리 딘은 날 파트너라고 생각을 안 하거든.』
그렇고말고. 파트너로 생각 안 한다.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부하, 내지는 짜증나는 심부름꾼, 신통치 않은 조수, 말썽쟁이 동생, 젖 먹여 키워야 하는 아기... 마침내 키가 쑥쑥 자라 같은 눈높이로 서게 되었을 적부터 샘은 딘과 나란히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늘 앞장 서서 걸었고, 동생의 키가 훨신 커졌다는 걸 깡그리 무시했다. 그런 딘의 등을 눈으로 쫓을 적마다 샘은 늘 커다란 벽을 느끼곤 했다. 아무리 바둥거려도 딘의 눈에 비친 샘은 여전히 어린애다.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을 날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아, 하고 탄식 섞인 굵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딘이 보기엔 내가 영 믿음직스럽지 않은가봐.』

확실히 그럴지도.
하지만 본인에게 그 말을 했다간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헤더는 속으로만「맞아. 넌 믿음직스럽지 않아」라고 긍정했다. 그리곤 자신의 몸을 덮은, 어쩐지 홀애비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남성용 겉옷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보통은 권총을 들이대고 죽이겠다고 위협한 상대에게 이런 식의 친절은 베풀지 않는다. 밧줄로 꽁꽁 묶거나, 수갑을 채워 아무렇게나 던져놓는 법이다. 때로 어떤 자들은 비닐 봉지를 씌워 뒷 트렁크에 감금하기도 했다.「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진 않아?」라고 물어보면서 오랜 여행에 지쳐 멀미를 일으킨 어린 조카 대하듯 이러는 건 처음 겪는다. 그것이 어쩐지 한심스러워 헤더는 끙 신음했다.

『내가 무섭지는 않나.』
일어나 앉으려 해봤다. 욱씬, 머릿속으로 둔한 통증이 내달렸다. 그 감각이 너무나 강렬해 도로 무너져 내렸다. 조금은 더 쉬어야 한다는 걸 마지못해 인정하며 이마를 짚었다.
『내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잖아, 윈체스터. 나는 살인자야. 몬스터야.』
샘의 눈이 커졌다.
『저어... 그래도 코피는 잘도 터지던 걸.』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이 겨우 코피가 터졌다는 정도로 뒤집어졌다는 건가. 이건 걸작이었다. 하여 헤더는 시트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샘은 위가 무거운 돌로 꾹 눌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간헐적으로 짧은 경련을 일으키는 좁은 어깨만 보고는 그녀가 울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건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뭐, 좋게 그녀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바보 취급을 당한 것 같아 썩 유쾌하지 않았다. 풀 죽은 소리를 내며 샘은 콧구멍을 벌릉거렸다.
『그래, 맘대로 비웃어. 이런 나를 바보라고 신나게 비웃으라고.』
『틀려... 비웃고 있지 않아, 윈체스터.』
『좋아. 그럼 확인해보게 고개를 돌려 나에게 네 얼굴을 보여봐.』
헤더는 얌전히 시키는대로 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샘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이고. 괜히 이쪽을 보라고 그랬다. 샘은 자신의 실책을 저주하며 혀를 깨물었다.

그녀의 눈은 창백한 달빛처럼 보였다. 동시에 검은 구름처럼도 보였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 샘은 이 모든게 혹시 환청이 아닐까 염려되었다.
『그거 알아? 필사적으로 기도해도 하느님은 너무 바쁘신 분이라 이쪽의 간절한 목소리를 쉽게 알아듣지 못 하셔. 대신 그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악마가 응답하지. 그리고 상투적인 목소리로 이러는 거야.「네, 유료 상담 서비스 센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댓가로 제일 소중한 것만 내놓으세요. 그럼 무엇이든 기꺼이 처리해드리겠습니다.」싫든 좋든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에선 물불을 가릴 형편이 아니잖아? 그래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정말로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거예요?」라고 확인하여 물어보게 되는 거지.』
한 방울의 맑고 투명한 눈물이 다시 뺨을 적혔다.
『나는 우리를 살려달라고 했어. 너는 이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겠지?』
악마와 계약했구나.
샘은 켜지도 않은 라디오 채널을 만지작대는 시늉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일때마다 먼 바다로까지 떠밀려간 구명정에서 조난 신호등이 하얗게 점멸했다.
『죽고 싶지 않았어. 그때까지도 난 그게 무서운 죄라는 걸 몰랐어... 정말 몰랐어.』

꿈을 꾸었다. 환상인지 착각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생생한 꿈이었다.
『숙소로 전염병이 돌고 있었어. 엘리베스는 열이 심했어. 키마야는 기침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은 그게 다 우리가 더러워서 그런 거라고 단정을 지었고, 다 같이 샤워를 해야 한다고 했어. 몸을 정결하게 만들면 나면 앓던 병도 깨끗이 사라질 거라고 큰소리를 쳤어.』
여러 번 반복해서 꿈을 꾸었다.
일렬로 서서 이동했다. 명령대로 옷을 모조리 벗고 발가벗은 채로 뛰었다. 창고 같은 커다란 방으로 몰려갔다. 노인과 어린이, 여자애들이 추위에 벌벌 떨며 시린 팔꿈치를 비볐다. 무척 추웠기 때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짬도 없었다. 어서 모든 일이 끝나 숙소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랬다.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어린 마리아가 울음을 터뜨리며 손을 잡아왔다.
어른들이 웅성거렸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불안한 눈초리로 사방을 살폈다. 천장에는 샤워 꼭지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고, 바닥엔 거칠거칠한 촉감의 타일이 깔려 있었다. 눈을 아래로 내려 아무 무늬 없는 회색의 타일을 보았다. 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 짐짐했다.
철문이 굳게 돌아가는 소음이 들리면서 밖에서 독일군이 무어라 외쳤다.
1월 17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거라곤 한 줌의 신선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 기꺼이 마리아의 연약한 몸을 밟고 올라탔다는 거였다.

『독가스는 일반 공기보다 무거워서 바닥에 깔려. 키가 작은 순서대로 죽어갔지. 우아한 죽음이라는게 있었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밟고, 또 밟고 올라섰어.』
찢어지는 비명이 심장을 갈가리 헤집는 가운데 출입구쪽에 난 조그만 유리창을 통해 누군가 샤워장 안을 들여다 보았다.
화사한 꽃과도 같은 연보라색이었다.
웃고 있다.
재미있어 한 것도 같다.
그제서야 헤더는 자신이 마리아를 발로 밟아 죽였음을 깨달았다.
절망에 빠져 목 놓아 울었다.
그런 그녀를 누군가 다시 밟았다.
뺨이 찢어지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수 차례 밟힌 머리가 마침내 와지끈 부숴졌다.
눈과, 코와, 귀와, 입으로 피를 뿜으면서 헤더는 생각했다.
죽고 싶지 않아. 이렇게는 죽고 싶지 않아.

『서른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그 꿈을 꾸었어. 그래서 나는... 나는...』
샘은 자학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으니까 더 말 하려 하지 마.』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걸로는 변명이 되지 않아. 역시 난 심판받아야 마땅해.』
『헤더.』
『나는...!!』
『헤더.』
당혹스러워하는 샘을 향해 그녀는 눈물로 애원했다.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죽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아! 부탁이다. 오쿠림바의 주문을 나에게 넘겨줘! 나에게 줘! 부탁할게, 부탁할게! 이렇게 빌게! 난 이제 죽고 싶어! 부탁해! 부탁할게! 이제 죽어도 된다고 해줘!』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덜덜 떨리는 여섯 개의 손가락이 샘을 붙잡았다.

Posted by 미야

2007/03/24 23:34 2007/03/24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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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judgment 17

※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2007년이면 극중 딘의 나이가 27세가 아닌 28세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에이, 몰라... 1시즌을 한꺼번에 몰아서 봤기 때문에 착오가 있었습니다. ※


콘택트 렌즈가 빠졌다며 손바닥으로 오물 투성이의 더러운 바닥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샘은 원래부터 시력이 좋은 편이라 안경을 쓰지 않는다. 당연히 콘택트 렌즈를 잃어버린 일이 없다. 떨어뜨린 적이 없으니 사방을 휘젖는다고 손가락에 투명한 작은 조각이 잡힐 까닭 또한 없었다.
『딘, 딘!』
게다가 그의 형은 콘택트 렌즈 사이즈가 아니다. 평소에 알라스카 불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을 뿐, 문설주에 대고 키 높이로 선을 그은 뒤에 한 뼘, 두 뼘, 이런 식으로 헤아리려면 시간이 꽤 걸릴 만큼 신장도 큰 편에 속한다. 따라서 와이셔츠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를 줍는 듯한 행동을 하면서 딘을 찾는다는 건 완전히 바보 짓이었다.
그래도 번쩍 형을 들어 올렸던 자세로 바닥을 뒹굴었다고 생각한 샘은 당황하여 딘을 계속 찾았다. 설마, 칸막이가 있는 곳까지 굴러가버린 건가. 납작 엎드려 동전을 찾는 시늉을 했다. 흘린 고무 지우개를 주우러 가는 어린애처럼 구석을 기웃거렸다.
『빨리 나와, 형. 여기 있어?』
청소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의 문을 강.제.로 뜯고 안을 살폈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
망가졌다고 생각하여 줄을 풀러 호주머니로 집어넣은 손목시계를 여전히 차고 있다. 내려다보니 밤 10시 20분... 일부러 흔들지 않아도 째깍 소리는 잘 들렸다. 소동 와중에 유리 커버로 새로운 기스가 생긴 것이 전부,「고물이긴 해도 아직은 끄떡 없다오」라며 은색의 시곗줄이 하얗게 불빛을 반사했다.
순간 샘은 몽둥이로 뒷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건 꿈이다. 꿈이었다. 그치만 한편으론 납득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현실과 구분이 가지 않는 꿈이 가능한 건가. 촉감이 있었고, 질감이 있었으며, 냄새가 있었다. 방금 튀겨낸 팝콘의 고소한 버터 냄새를 분명히 맡았다. 어디 그뿐이던가. TV에서 흘러나오던 뮤직 비디오의 노랫 가락이 꽤나 시끄러웠다는 것을 기억한다. 싸구려 조명등의 불빛, 그리고 넘어졌을 적에 통증은 어디까지나 가짜가 아니었다.
그럼 뭐냐. 꿈이 아니다?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헤집...으려다 코를 찌르는 지린내에 질겁하여 팔을 도로 내렸다. 변기에 빠져 허우적대다 겨우 빠져나온 듯한 악취가 소매에서 풀풀 풍겼다. 청소 상태가 불량한 화장실 바닥을 몸통으로 직접 쓸고 다닌 주제에 뭘 바라겠느냐만은, 곳곳에 남은 얼룩의 정체가 무엇일지는 감히 상상하기가 끔찍했다.
세탁 자체를 포기했다. 맨 위에 걸친 겉옷을 벗어 둘둘 만 다음, 아낌 없이 쓰레기통에 넣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바지도 버렸다. 하지만 침팬지 치타가 옆에서 맛있게 바나나를 먹고 있는 것도 아닌데 차마 타잔 흉내는 낼 수 없었다. 무릎에 남은 갈색 얼룩이 배설물이 아니길 빌며 얇은 셔츠 한 장 차림새로 에취 재채기를 했다.
으아, 꼴불견.
어쨌든 평생을 화장실에서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딸딸한 코를 문지르며 결심했다. 밖으로 나가자. 또 아나, 아까의 상황이 고스란히 반복될지. 그렇다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예의 장면들은 샘이 가진 예지의 능력으로 투시한 가까운 미래일 것이다.
그렇다면.
딘을 만날 수 있다.
보자마자 둘러 메고 뛰어야지.
설레여 살짝 흥분했다. 준비 운동 겸 제자리 걷기를 두어 번 하고 출입구 손잡이를 잡았다.
크응 힘 주어 목을 가다듬고.
찰칵.

『여기예요! 저 사람을 잡아! 잡으라고요! 저놈도 가게 집기를 때려 부쉈어요!』
아이쿠, 이런 초 난감한 일이.
얼굴에 시퍼렇게 멍자국이 남은 사내가 화장실에서 나온 샘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부랴부랴 손가락질을 했다. 그리고 박살난 테이블의 잔해 옆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는 얼굴이었다. 주정뱅이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졌을 적에 이걸 뜯어말리겠다고 참견했다가 아마겟돈 대 참사를 맞이했던 가엾은 가게 종업원이었다.
『빌어먹을 호모 자식! 야! 물어내! 내 얼굴도 같이 물어내란 말이야!』
입고 있는 근무복이 성질 고약한 강아지가 입으로 물고 좌우로 마구 흔들어댄 모양새다. 점점이 뿌려진 빨간 얼룩은 아마도 사람의 피일 게다. 절반은 남의 것이고, 그 절반은 본인의 것이다. 다행히 코피는 진작에 멎었지만 말라붙은 피딱지는 입술 위로 여전히 검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맞은게 억울하기도 했거니와 장사를 망친게 분했던 모양이다.
『저놈 잡아요!』
『빨리 경찰에다 신고해!』
『여보세요, 여기 웨스턴 퍼블릭 빌딩 3층에 있는「바빌로니아」술집인데요, 방금 개 망나니가 우리 가게에서 행패를 부려놓곤... 앗! 도망간다!』

살 길은 오로지 36계 줄행랑이다. 샘은 그때까지도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있던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걸 느끼며 곧장 뒤돌아 비상구를 향해 전력질주 하기 시작했다.
도주로를 눈치껏 가로막고 선 장정 셋을 몸통 박치기로 밀어붙였다. 볼링 핀이 날아가는 경쾌한 효과음과 같이 하여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미안합니다. 눈짓으로만 사과하고 홀로 남은 가냘픈 체구의 사내를 무천도사의 에네르기 파로 날려보냈다. 희생자는 윽, 소리를 내고 통증을 호소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거듭 사과하며 한 걸음에 다섯 계단씩 뛰어 내려갔다.
악어의 이빨 가득한 주둥이와도 흡사한 어둠이 팔을 벌렸다. 궁창은 큰 소동과 같이 하여 물과 뭍으로 갈라졌다. 죄책감과 민망함을 각각의 징검다리로 밟고, 진흙밭과도 같을 도망자의 인생을 향하여 기꺼이 점프했다.
나중에 병원으로 꽃다발을 보내드릴게요.「쾌유를 빕니다」라는 카드도 같이 넣어드릴게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걸 참아가며 쓰레기통이 늘어선 좁은 골목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이미 따라오는 기척은 없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 뛰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배고픔에 썩은 생선 토막을 입에 가져가던 도둑 고양이가 갑작스런 인기척에 반응, 경계심을 드러내며 목을 그릉거렸다. 흠칫 놀란 샘은 벽쪽으로 바짝 붙어 주제에 인간을 위협하는 고양이의 버르장머리를 꾸짖었다. 뭐, 그래봤자 샘이 그 고양이보다 낫다고 할 것도 없다. 자신이 왜 야단을 맞아야 하는지를 수긍하지 못한 고양이는 꼬리를 세우고 야옹 울었다. 둥근 얼굴이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너나 잘 하세요」하는 몸짓으로 담을 넘어갔다.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공기 너머로 입김이 하얗게 번져나갔다.
아아, 살았다? 가쁜 호흡은 이내 가라앉았지만 가슴이 윽죄는 느낌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달리기를 하면서 흘린 땀이 식으면서 순식간에 체온이 내려갔다. 모든게 지랄 염병맞다.

『엣취!』
여기다 욕지기 나오는 상황 한 가지 더.
어쩌면 좋냐. 임팔라를 어디에 세워두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샘은 스스로를 잔뜩 패주고 싶었다. 자동차에서 내려 술을 마셨다가,「잡아가고 싶다면 맘대로 잡아가라지」봇장을 부려가며 운전대를 잡았다가, 미친 척하고 술을 마시기를 반복했던 걸 떠올렸다. 덕분에 기억은 엉킨 실타래 그 자체이다. 술이 샘을 잡았고, 다시 샘이 술을 잡았다. 이 와중에 뇌는 원심분리기처럼 고속으로 회전하여 기억의 파편을 좌우로 마구 흩뿌려 놓았다.
쓴 웃음을 지으며 뺨을 문질렀다. 딘이 이 사실을 알았다간 생매장을 결행했다. 베이비의 뒷 트렁크를 찌그러뜨린 것만으론 성이 차질 않아 감히 음주 운전이라는 걸 했다 이거지. 거기다 길바닥에 흘리고 잊어먹기까지. 어쩜, 유언장은 다 적었냐. 샘은 근엄한 자세로 삽을 들고 위협하는 형을 상상했다. 그리고 구덩이 바닥에 얼른 누우라고 턱짓하는 딘의 얼굴을 떠올렸다.
절대로 모르게 해야 한다. 추긍을 하면 증거 있느냐고 무조건 발뺌하자.
그 최초의 증거 인멸을 위해 샘은 손바닥으로 하아~ 입김을 분 다음 자신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지를 확인했... 겍. 진저리를 치며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저주했다. 술주정뱅이의 입냄새라는 건 바로 이런 거였다. 불쾌감을 떨어내려 애쓰며 손바닥을 가슴팍에 문질러 닦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바지 주머니로 자동차 열쇠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는 것.
고개를 푹 숙인 샘은「잘 하면 새벽까지 무작정 돌아다니게 생겼군」툴툴거리며 시린 옆구리로 팔을 끼었다. 그리고는 대략 이쪽이겠거니 생각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숨을 쉴 적마다 뽀얀 김이 밥 짓는 농가의 굴뚝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그래도 차가운 밤공기는 오히려 약이 되어주었다. 머리가 제법 맑아졌고, 그저 죽고만 싶던 마음이 가라앉았으며, 마비가 되었던 이성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나는 이곳에 무사히 있습니다」라고 신호를 보내주었다. 차분해지고 있다. 이래서 편두통을 앓는 환자들이 한밤의 산책을 즐기는 모양이다.
석고 붕대를 감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한 시린 손을 비비며 왕래가 완전히 끊긴 한적한 도로를 따라 동네를 돌았다. 속눈썹이 얼어붙고 있다. 불 꺼진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무의식중에 그 수를 헤아렸다. 창문이 하나, 창문이 둘...
가까운 곳으로 작은 개울이 있는 모양이다. 하천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귀에 익었다. 끊겼던 필름이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졌다.

다리.
교각을 지나자마자 차를 세우고 구석진 곳에서 소변을 봤다.
다행이다. 임팔라는 근방에 있다.

샘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 자동차 열쇠를 영험한 부적인양 손에 꽉 쥐었다.

이참에 돌아가는 일의 순서와 내용을 곱씹어보자.
1942년 태평양 전쟁 시절에 토마스 스테이플러는 죽어가는 일본군 포로로부터 오쿠림바의 주문이라는 걸 빼앗았다. 그것을 소리내어 읽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스테이플러는 그것을 성경책 속에 숨겨놓고 두려워했다.
정말로 그런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윈체스터 형제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만 믿는다.
그래도 아주 가짜는 아니었는지, 헤더라는 이름의 나치 헌터가 이걸 노리고 접근해선 형제들의 수중에서 멋지게 채갔다.

여기서의 문제. 샘은 콧물이 나오려던 코를 만지며 눈썹을 찡그렸다.
1. 몸싸움 와중에 주문이 적힌 종이가 일부 찢어졌던 모양이다. 그 찢어진 조각을 딘이 갖고 있다. 샘이 이 사실을 추궁했을 적에 딘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2. 헤더가 무슨 목적으로 오쿠림바의 주문을 소유하려고 하는 건지 아직 그들은 모른다. 통신 판매원 흉내를 내고 전화를 걸어 목소리로만 나치 전범을 죽이기 위해? 샘은 슬슬 이러한 가정이 웃긴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3. 이번 일에 초현실적 존재가 개입된 것이 확실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일 이후로부터 헤더가 나이를 전혀 먹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머리에 심각한 총상을 입고도 잘도 떠들어대던 여자,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꿈...
이래저래 상식의 선에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바로 이거다. 딘이 샘을 배제하고 혼자서 움직이자 결심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딘은 일찌감치 괴물의 존재를 눈치챘고, 때문에 동생을 이번 일에 가급적 얽히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노란 눈의 악마가 샘을 위해 준비한 계획이라는 것도 있겠다, 눈덩이에 눈을 붙이면 눈사태가 일어나는 법이라고 속으로 많이 걱정을 했나 보다.
바보, 바보, 바보! 차가워진 손으로 열심히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래봤자 보라색으로 변한 손톱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이놈의 형은 왜 이다지도 아버지 존과 똑같이 구는 건지. 멍청이 같은 짓이다. 샘은 입술을 핥으며 어둠 너머를 노려봤다. 악마가 얽혔다면 딘 혼자서 이번 일을 해결하기란 사실상 벅차다. 제3자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걸 알면서도 혼자 움직이자고 결정했다면 진짜지 딘은 구제 불능이다!
불안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살피며 언덕 아래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전문적 방면의 도움이 필요한 건 그 또한 마찬가지다. 일단 엑소시즘에 대한 책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아, 저기 있다. 드디어 찾았다. 소변을 봤던 장소에서 10미터. 홀로 덩그마니 놓여져 있던 임팔라를 마침내 발견했다. 빠르게 뛰어가 훅 하고 숨을 몰아쉬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샘은 제일 먼저 누구에게 손을 내미는게 좋을지를 궁리하며 차 안으로 몸을 빠르게 구겨넣었다. 앨런? 아니면 바비?

바로 그때. 등줄기에 오싹 한기를 느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지금을 기다렸다는 식으로 뒷자석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꼼짝 마, 윈체스터.』
『와앗?!』
번쩍이는 총구를 봤다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위협을 느낀 샘은 엑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차가 급발진하자 관성의 법칙에 의거, 몸이 자연스럽게 뒤로 젖혀졌다. 샘 말고 몰래 차안에 타고 있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잃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눈을 부릅뜨고 백미러를 쳐다봤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 작은 얼굴과 체구... 맙소사. 잘못 판단한게 아니다. 그.녀.다.
더욱 기겁하여 이번엔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제기랄! 귀가 먹었어?! 꼼짝 말라고 했잖아!』
몰래 숨어들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주제에 안전벨트로 몸을 고정하고 있을 리 없다. 열 세 살짜리, 아니. 열 네 살짜리의 작은 몸뚱이는 단박에 앞으로 튕겨나왔다. 샘은 그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팔꿈치의 각을 세워 다가오는 소녀의 얼굴을 정통으로 찍었다.
『으악!』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며 얼굴을 감쌌다.
지금이다! 재빨리 팔을 뻗어 총신을 붙잡았다.

『놔!』
코피가 터졌음에도 헤더가 앙칼지게 고함을 질러댔다.
『너라면 놓겠냐?!』
샘도 지지 않고 고함을 질러댔다.
『놔라, 놓으라고! 쏜다! 쏜다니까!』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것 같아?! 이 마당에 자동차에 총알 구멍까지 뚫리면 난 진짜지 형에게 맞아 죽어! 그러니까 너야말로 놔!』
『이게!』
『항복해!』
『즈히루트! (조심해!)』
원하지 않던 탕- 소리가 두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천장으로 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났다.

샘은 펄쩍 뛰며 울부짖었다.
『빌어먹을! 정말로 쐈어!』
『맞은 거냐. 맞았느냐고, 윈체스터! 다쳤어?!』
『쏘고 나서 걱정을 왜 해! 안 맞았어! 하지만 그게 다행인게 아냐! 맙소사. 이걸 어쩌면 좋아. 딘이 저걸 보는 날엔 날 멸치 국물로 만들 거야~!!』
『그러기에 내가 뭐랬어. 놓으랬잖아, 윈체스터! 얌전히 있어!』
『너야말로 가만히 있어!』
이성이 뚝 소리를 내며 끊어지려 했다. 샘은 괴력을 발휘해 헤더의 목덜미를 잡았고, 하나, 둘, 셋 신호하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엇 하는 사이에 소녀의 몸이 가볍게 위로 들렸다. 들리기만 했던가. 앞좌석으로 날아왔다. 계기판으로 이마가 쾅 하고 부딪쳤다.
『끗...!!』
그대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잠잠하다 싶더니 헤더의 목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Posted by 미야

2007/03/22 16:52 2007/03/2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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