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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죄송합니다. 고딕풍 내장 파이 이야기가 될 거라는 쥰쥰의 예고는 순전히 허풍이었습니다. 아직도 피가 안 나오고 있음! 찢어진 뱃가죽도, 말뚝 박힌 머리도, 잘려진 젖꼭지도 없음! ※


이후로도 침묵으로 사람 목을 윽죄이는 전화가 세 번 정도 왔다.
그때마다 딘은 땅을 쳐다봤고, 하늘을 두리번거렸고, 제발 참으라 애원하는 샘의 눈빛을 씹어 뭉개며, 마침내 스팀이 올라「이따위로 종용하지 않아도 이 엄.마.는. 무지 노력하고 있어!」라고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크악!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직 장가도 못 간 남자에게 이게 무슨 행패야?! 사람 귀로는 들리지도 않는 돌고래의 목소리로「엄마, 엄마」노래를 불러대는 건 짜증 난단 말이야!』
딘의 얼굴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촛불 조명을 턱 아래로 놓은 것처럼 변했다.
핸드폰을 길바닥에 팽개쳐 박살을 내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그가 무시무시한 결심을 한 것을 눈치챈 샘은 과자가게 아저씨가 던져주는 사탕을 두손으로 공손히 받아내는 동작을 취했다.
비싼 물건에 화풀이는 하지 말아주세요. 정 던지고 싶다면 이리로.
다행이다. 묘한 뉘앙스로 뺨 근육을 실룩거리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제정신을 찾은 그의 형은 이 마당에 캐치볼 놀이는 사절이라는 걸 분명히 하며 귀신 붙은 핸드폰을 호주머니 속에 도로 넣었다.
『여기서 샐샐 웃기만 해봐. 정강이를 걷어차줄테다. 닥치고 공구 박스나 챙겨, 샘.』
『네, 엄마.』
『지금... 무시라?』
『알았으니 그만 노려봐. 무서워서 심장마비 걸리겠다.』
『조심해, 샘. 형에게 자꾸 기어오르면 네놈 명줄이 획기적으로 확 줄어들 수 있어.』
유선방송 서비스 센터 직원의 유니폼을 쫙 빼입은 딘은 유명 케이블 회사의 로고가 박힌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깊이 눌러썼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의 복장을 입은 동생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화가 끝까지 치민 것이 확실한 딘의 날카로운 눈빛에 위축된 샘은 어린 강아지에게 명령하는 듯한 형의 동작에 이번만큼은 별 군소리 없이 따랐다.

날씨가 맑았다. 봄 같지 않게 더워서 아스팔트 지면에서 아지랑이가 활활 피어올랐다. 남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 망치며 드라이버 같은 걸 잔뜩 집어넣은「가짜」공구 박스를 오른손에 든 샘은 두꺼운 자켓을 걸친 등이 덥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가방에 집어 넣은 듯했다. 그래서 불평하며 자꾸만 미끌어지는 손잡이를 힘주어 고쳐 쥐었다.
『딘. 여기에 커다란 돌이라도 넣었어?』
『그렇게 무겁냐. 하여간 우리 동생은 보기와는 달리 몸이 허약해서... 형이 대신 들어줘?』
『됐어.』
잘라 말하며 괜찮은 분위기의 2층 벽토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을 방문하기에 앞서 이들 형제는 이미 사전 탐색이라는 걸 해치운 뒤다.
담장을 따라 고장난 케이블 선을 수리하는 척하며 두 명의 주부와 대화를 나눠봤다.

「캐빈 쉐퍼드 씨요? 무슨 세일즈를 하는 사람 같던데... 하여간 괜찮은 이웃이예요. 댁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케이블을 몰래 연결해서 도둑 시청을 하는 몰염치한 사람은 절대로 아녜요.」
「그 집엔 디즈니 아동 채널은 안 필요할 거예요. 그는 부인과 단 둘이 살아요.」
「잘 모르겠군요. 우린 만난 적이 없어요. 그 집 부부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거든요.」
「우린 툭하면 잔소리 하랴, 싸우랴, 누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줄 거냐 다투느라 늘 시끄러운데 그 집 부부는 소리를 내는 적이 없어요. 하하하, 얼마나 조용한지 밤에도 소리를 일절 안 내더군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죠?」

알다마다요. 딘은 능글맞게 맞장구치며 웃어주었다.
잘 생긴 서비스 센터 직원과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떠는게 즐거웠던지 여자들은 까르르 소리를 내었다. 반대로 샘에겐 영화 채널이 더 많은 서비스에 가입을 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느냐고 질문을 던져 그의 혼을 절반은 빼놓았다.「저는 진짜 직원이 아니라서 그런 것까진 몰라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적당히 둘러대는데 애를 먹었다. 다행히 여자는「그런 것도 모르고... 진짜 케이블 방송국에서 나온 거 맞아요?」라며 꼬치꼬치 묻는 대신, 같이 자리한 딘에게 추파를 던지는 쪽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녀는 간소하게나마 커피를 대접하고 싶으니 같이 집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딘은 깊이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감사하다고 낼름 말했고, 샘은 이를 말리느라 형의 발을 세게 밟아야 했다.

『차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샘.』
발잔등에 하얗게 찍힌 신발자국에 식겁하며 딘이 투덜거렸다.
『미안하게 되었군요, 카사노바 씨.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일 하는 중이야.』
『커피 마시는게 두 시간이 걸리겠니, 세 시간이 걸리겠니. 넌 너무 여유가 없어.』
『아이와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야. 딘? 그만 불평하고 초인종을 눌러.』
『쳇... 오키토키.』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걸까 초인종을 누르기에 앞서 딘이 헛기침을 했다.
케빈 쉐퍼드는 이미 직장으로 출근하고 집에 있진 않을 것이다. 차고 문은 굳게 내려져 있었고, 현관문으로는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이집 식구들은 사생활이 겉으로 드러나는게 싫은가 보다. 전반적으로 붕대로 꼭꼭 싸맨 분위기다. 1층 유리창은 한 장도 빼지 않고 모조리 불투명 효과를 넣어 뿌연 우유색이었다. 누가 망원경으로 안을 살펴보기라도 한다는 건가. 이 정도라면 거의 헐리우드 유명 배우의「파파라치따윈 질색이야~!!」수준의 알레르기 반응이다.

샘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창문 너머를 기웃거리다말고 다리를 떨었다.
『인기척이 없네. 부인도 어디 외출한 건 아닐까.』
『2층 창문이 열려져 있어, 샘. 안에 사람이 있다는 얘기야.』
『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조용한 걸. 이거, 이거...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터뷰처럼 전형적이다 싶지 않아? 얌전하고, 보수적이고, 남의 눈에 안 띄고... 그거 알아? 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도 동네에서 이웃 사람들과 다정하게 살았대. 퍼스트 레이디인 로잘린 카터와 같이 사진을 찍을 정도로 민주당 열혈 후원자여서 그의 체포 소식에 지미 카터도 까무라쳤지. 사업가적 기질도 있었는데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평판까지 들은 사내였어. 직접 광대 분장을 하고 병원을 찾아다니며 아픈 아이들을 상대로 자선 공연까지 했다는 거야. 그런데 알고봤더니 33명이나 죽인 새디스트였더라, 라는 결론이었지.』
『그래, 네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이 형은 잘 알겠어. 이 세상의 모든 광대는 박멸해야 마땅한 존재라는 거지?』
광대라면 질색인 동생의 습성을 잘 아는 딘은 엉뚱하게 응수하고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렀다.

사실 누구보다 선량하다 생각했던 조용한 이웃이 알고 봤더니 연쇄 살인마였다는 얘기는 신문에 종종 나오곤 한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외톨이고, 존재감이 희미하다. 도무지 피비린내 나는 참극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뚜껑을 열어봤더니 이건 완전 개자식이다. 냉장고에서 잘려진 사람 팔뚝이 나왔더라 식의 흉악한 뉴스를 접한 이웃들은 그제야 눈이 휘둥글 벌어진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린 그런 사람이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눈치도 못 챘고요.」
이것을 일컬어「착하고, 평범한」이웃집 연쇄살인범의 법칙이라고 한다.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하는 건 은밀한 곳에서라는 얘기다. 밖으로 보이는 지킬 박사는 신사적이고, 학구적이며, 예의바르다. 안색이 파리하다는 것만 빼면 모든게 지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악수를 청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눠야 할 우리의 이웃이다.

『무슨 일이시죠.』
재니스 쉐퍼드는 깡마른 체구의 여자였다. 금방에라도 반으로 뚝 부러질 것처럼 말라서 샘은 그녀가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가 방금 전에 회복된 것으로 여겼다. 눈빛도 어두웠고 무척이나 허무해 보이는 여자였다. 조금이라도 빛을 쬐면 드라이아이스처럼 녹아서 송두리째 사라질지 모른다. 존재감이 약해서 여러 사람들 틈새에 서있으면 아예 없는 것처럼 무시당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색도 엹고 그림자도 엹다. 피부색이 너무나 하애서 뒤쪽에 있는 벽이 그대로 비칠 지경이었다.
『신고를 받았어요. 댁의 TV는 잘 나오나요? 근방으로 노이즈 현상이 극심하다고 해서 확인차 점검을 나왔어요. 괜찮으시다면 이 집의 케이블 선의 정상 유무를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산 덕분에 거침 없이 지어낸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재니스는 그런 딘을 멍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어딘지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그녀는 따스한 바깥 날씨에도 불구하고 겨울에나 어울릴법한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저어, 뭔가 잘못된 것 같군요. 우린 신고를 하지 않았는데요.』
『예, 그러시겠죠. 사실은 서비스 불량 원인을 몰라 여러 곳을 확인하는 중이예요.』
『그렇담 다른 집을 살펴보세요. 우린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요.』
딘은 깜짝 놀랐다.
『에?』
『TV는 바보 상자예요. 그렇지 않나요.』
한 방 멋지게 맞았다.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라고? 텔레비전을 하나도 안 봐? 당신 미국인 맞아? 미국인이 아니라 원시인 아냐?
그렇다고 해도 차마 생각한 그대로를 입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 당황했을 적의 버릇 그대로 콧망울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거... 농담이죠? 뉴스도 안 본단 말예요?』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뉴스는 신문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이만 실례했으면 하는데요.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아님 제가 계속 방해받아야 할 까닭이라도 있을까요?』

더 무어라 하면 경찰을 부를 기세다. 딘은 비우호적인 분위기를 읽고 재빨리 발을 뺐다.
『실례 많았습니다, 부인. 저희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던게 아니었음 좋겠...』
채 말을 끝맺지 못한 까닭은 눈치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어랍쇼 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샘이 눈빛으로만「누구야?」라고 물어왔다.
글쎄올시다. 딘은 궁금해하는 동생에게 무어라 해줄 말이 없었다.
발신자 번호 없음.
나쁜 예감에 얼굴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귓가로 바짝 가져갔다.
순간 세 명의 안색이 싹 달라지고도 남을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년을 죽여버려.......... 저 흉악한 년의 각을 떠버려..........》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박쥐의 노래가 아닌, 엉망으로 늘어진 테이프에서 억지로 재생시킨 듯한 괴상한 목소리였다. 싸구려 공포 영화에서 악마가 내는 목소리라며 영화 관계자가 특수 효과로 지어낸 것 같았다. 유괴범이 돈 내놓으라 사람을 협박할 적에 써먹는 변조 장치를 사용한 모양이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빴다.
딘은 눈을 부릅뜨고「당신 누구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재니스도 찢어져라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악마! 내 집에서 당장 나갓! 사라져!』
당황한 샘이 잠깐만 기다리라 애원하기도 전에 벼락이 떨어졌다.
『주여! 아버지! 사탄으로부터 우릴 구원하소서! 아멘, 아멘!』
졸지에 지옥에서 온 사자가 되어버린 형제들을 향해 십자가 성호가 그어졌다.
『이, 이건 진짜 아니야! 오해예요~!!』
그래봤자 재니스는 흉흉한 눈빛으로 샘을 노려보며 현관문을 쾅 닫아버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닫겨진 문 저편에서 큰 목소리로 주기도문이 암송되고 있다는 건 딘도 잘 알 수 있었다.
살인범으로 누명도 뒤집어 썼고, 사기꾼 취급에, 재수 없는 악당으로 오해도 받아봤다. 그치만 사탄 취급은... 이미 끊겨버린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딘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우리더러 왜 사탄이라는 거야! 아줌마! 억울해! 억울하다고! 다시 나와봐요! 아줌마!』
그런다고 재니스가 딘의 요구에 응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환장하겠네.
딘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개미의 행렬을 구경했다.

『재수 없어!』
이번만큼은 샘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형은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 부숴뜨렸다.

Posted by 미야

2007/04/29 16:08 2007/04/2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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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본문 중 * 표시는 원래 주석이 붙을 자리를 표시한 거지만 귀찮아서 모조리 패스합니다. 겔름병이 천장을 꿰뚫었음. 음화화. 그나저나 이 속도라면 베드씬까지 가는데 100만광년 걸리겠습니다.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딘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사물의 모양새를 제대로 읽어내렸음에도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침대는 침대인데... 욕지기 나온다. 꽃분홍색의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달렸다.
그 고운 자태에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곤두서는 기분이다. 그는 악 소리부터 질렀다.
『우라질! 이래선 마피아 조무래기들의 밀회장소일 리가 없잖아!』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소공녀의 방을 정성을 다해 재현해냈다. 금색의 술이 달린 쿠션이 있고, 리본을 묶은 인형이 있다. 공주님이 손수 사용할 옷장은 너무나 작아서 고급 미니어처처럼도 보였다. 서랍 손잡이가 은으로 만든 아기 딸랑이처럼 보이는 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미치겠다. 책장으로 피노키오, 백설공주, 걸리버 여행기 같은 고전 동화책이 몇 권 꽂혀져 있다. 그 아래쪽으로는 진주 장식이 된 어린이용 슬리퍼가 물방울 무늬의 러그 위로 반듯한 모습으로 놓여졌다. 슬리퍼의 크기가 어찌나 작던지 눈물이 나오려 했다. 전신 거울은 또 어떻고. 그 작고 앙증맞은 물건은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딘의 허리밖엔 오지 않았다.
포도 덩굴이 장식된 문제의 거울 옆으로는 빈 꽃병과 스탠드가 있다. 혹시나 싶어 달각 소리가 나도록 스탠드의 갓끈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전기는 오래 전에 끊어졌는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번엔 스탠드를 뒤집어 바닥 면을 살펴보았다. 제품의 라벨이 닳아 몇 개의 숫자를 빼곤 읽을 수가 없다. 아마도 7, 그리고 1... 제대로 읽어낸 것이 맞다면 1971년에 생산된 물건이다. 입술을 삐죽이며 스탠드를 도로 내려놓았다. 기분이 이상하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라니.
손바닥을 털며 눈을 돌리자 테디 베어의 새카만 단춧구멍 눈이 딘을 빼꼼 쳐다보았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뭘 보냐, 이눔 새끼야. 건방지게 굴면 이 형님이 눈깔을 확 빼버린다.
혼내키며 곰 인형을 손으로 밀어 쓰러뜨렸다.

어째서 이런 곳에 아이 방을 꾸며놓은 걸까. 햇빛 한줌 들지 않는 지하실에... 단순히 쓰지 않는 물건들을 모아다 이리로 옮겨놓았다고 하기엔 가구들이며 놓여진 소품들의 배치가 자연스럽다는게 마음에 걸린다. 청소를 좀 하고 먼지를 쓸어내면 당장에라도 이 안에서의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 니콜 키드먼이 열연한「디 아더스」영화가 되어버린다는게 문제긴 하지만.
안절부절한 마음을 감추고저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정말로「디 아더스」일까? 햇볕에 조금이라도 닿을라치면 치명적인 상해를 입고 마는, 자외선에 손상된 피부 세포가 정상으로 재생되지 않는 희귀 유전병에 걸린 가여운 아이를 위해 만들어진 방이다? 모르겠다. 손전등을 들어 다시 벽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게 0.1%에 불과할지언정 그럴 가능성은 있다. 시력을 잃고, 외모가 망가지고, 신경마저 퇴화하여 인간 이하의 몰골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될 아이를 가여워한 그들 부모가 새카만 어둠으로 보호하려 한 것이다. 허나 설사 그랬다고 쳐도 이건 도를 넘었다. 환기를 위한 작은 구멍조차 없는 이곳에서의 생활은 바스티유 감옥에서의 종신 옥살이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따스한 햇빛이 얼굴에 닿는 그 사랑스러운 느낌을 박멸하고 새벽 빛의 아름다움이 지워진 곳으로 아이를 밀어뜨리다니, 분명 자식을 애닳게 사랑하는 부모가 할 짓은 아니다.

등 뒤로부터 바스락 소리가 나면서 눈부신 불빛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아이고, 귀신 나왔다. 흠칫 놀란 딘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놀라지 마. 진정해. 나야. 괜찮아, 형?』
밧줄을 타고 구덩이 아래로 내려온 샘이 제일 먼저 딘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다친 곳은?』
『별 거 아냐, 샘. 조금 긁히기만 했어.』
『휴우... 다행이다.』
그럭저럭 형이 무사하다는 걸 알자마자 어린아이마냥 활짝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형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음을 깨닫고 이마를 찌푸렸다.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믹스된 샘의 얼굴은 여느 코미디언 뺨치게 대단히 코믹했다. 그러니까 웃던지 찡그리던지 둘 중의 하나만 하란 말이다 - 동생의 팔꿈치를 툭 때리고 고갯짓으로 소녀풍의 침대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한껏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저리로 가서 누워보지 않겠니? 샘.』
형의 제안에 샘은 당황했다. 말도 더듬었다.
『내, 내가 왜?』
『그냥. 레이스가 달린 저 침대가 어쩐지 너에게 퍽이나 어울릴 것 같아서. 부탁할게. 수줍은 얼굴로 저기에 누워「자기, 빨리 날 안아줘~」이러고 유혹하는 널 보고 싶어.』
한달 내내 큰 비가 내려도 이보단 덜 우울할 거다. 그의 눈썹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형! 큰일났어. 아무래도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나봐! 내가 지금 손가락을 몇 개 들고 있는지 알겠어? 이거 보여? 응?』
『이놈의 자식. 가운데손가락 하나만 치켜들고 누굴 엿 먹이려는 거냐.』
『흥! 시작은 딘이 먼저 했잖아.』

어쨌거나 샘 또한 지하실의 숨겨진 비밀,「옛날 옛적에 한 어여쁜 공주님이 바스티유 지하 감옥에서 살림을 차렸답니다」를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형 못지않게 그 역시 대단히 놀란 것이 분명하다. 벌어진 콧구멍이며, 안으로 말려들어간 아랫입술 등등이 밧줄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린 해골을 봤을 적의 반응과 대단히 유사했다.
우물에서 사다코 나왔다. 그것도 머리 산발하고 각기춤 추는 사다코다.
리본을 목에 감고 있는 곰 인형을 발견한 동생의 얼굴 위로 생리적 혐오감이 떠올랐다.

『Sun of bitch... 아무리 봐도 이건 범죄의 현장인데.』
변호사가 되고자 법학을 공부하던 그에겐 이 모든게 다르게 해석되었다. 지금은 이곳에 없는 몇 가지의 물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캠코더, 인터넷, 겁에 질린 어린 소녀. 이 세 가지의 조합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의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아동 포르노를 촬영하는 현장이 이와 비슷하다는 걸 풍월에 들은 적이 있다. 자연광이라고는 요만큼도 들어오지 않는다. 잘 꾸며져 있으되 결코 사랑스럽진 않다. 바싹 말라있고 긁으면 부스러질 것 같다.
날렵한 동작으로 침대 커버를 들추고 혹시라도 핏자국이 있는가부터 살폈다. 다행이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수상한 얼룩은 일단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샘은 옷장을 열고 내부를 살폈다. 텅 비어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원피스가 세 벌, 치마와 바지, 그리고 셔츠와 블라우스가 차곡차곡 걸려져 있었다. 서랍을 열자 반듯하게 개켜둔 어린이 속옷도 나왔다. 단, 보관된지 오래되어 옷들의 상태는 대단히 좋지 않았다.
『어림 짐작으로도 10년은 확실히 넘었어.』
차마 손으로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아 손전등으로 내용물을 휘적거린 샘은 한숨과 함께 서랍을 닫았다. 캠코더 앞에서 맨살을 훤히 드러낸 채 속옷을 갈아입기를 강요당했다면 진짜지 죽고 싶었을 거다. 원피스의 사이즈는 기껏해봐야 여섯, 일곱 살 아동에게 맞는 크기였다. 옷만 가지고 추정하자면 피해자는 10대 미만의 어린이다. 불쌍해라... 샘은 눈가를 살짝 닦았다.

『넌 비약이 너무 심해, 샘. 변태 성욕자들이 여기서 애를 학대했다고? 그게 아닐 수도 있어.』
딘은 스탠포드 대학 중퇴자의 가설에 어쩐지 회의적이었다.
가까이 와서 이것 좀 보라며 침대 기둥으로 불빛을 비췄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뒤로 길게 뺐다. 샘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눈높이를 낮췄다는 걸 확인한 딘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거 보여? 먼지가 끼어 지금은 자국이 희미하지만 침대 기둥에 문양이 있어.』
정말 있다. 원과 뒤집혀진 두 개의 정삼각형의 결합.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 (* 에메랄드 타블렛)
여섯 개의 꼭지점을 알아본 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헥사그램이잖아.』
『맞아. 솔로몬의 인장이자 다윗의 방패인 헥사그램이야. 악마를 쫓아내는 강력한 심볼이지.』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는 거지?』
『그러게 말이다. 아동 포르노와 헥사그램은 그렇게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 않냐?』
굳이 동의를 구하지 않더라도 딘의 의견이 옳다. 샘은 반론을 제시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침대 기둥마다 날카로운 칼로 그어서 만든 듯한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영문을 모르겠다. 불편한 기분이 된 샘은 일단 EMF 미터기를 꺼내 눈금부터 확인했다. 기계는 건전지가 닳은 리모컨처럼 굴었다. 눈금은 요만큼도 요동을 치고 있지 않다. 고장을 의심하며 애꿎은 계측기를 흔들어봤다. 여벌의 EMF 미터기를 가지고 오지 않은게 후회스럽다.

엎드리다시피 해서 한층 더 자세를 낮춘 딘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어 고장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있는 동생의 주의를 잡아 끌었다.
『침대 모서리만이 아니야. 이곳 바닥으로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게 확실한 자국이 더 있어.』
『그것도 헥사그램 모양이야?』
『약간 달라, 샘. 이건 유니커셜 헥사그램*인 것 같다. 손전등 하나로 전부를 확인하기는 어렵군. 거기다 그려진 사이즈가 대단히 커. 지하실 방을 전부 커버하고도 남겠어.』
『아휴! 이거... 아동 포르노보다 더 나쁘잖아.』
『네 말이 맞아. 이건 하기아조 에마우톤*이야. 아동 포르노라면 경찰을 불러야겠지. 하지만 이거, 분명히 우리 일이다. 누군가 이곳에서 의식을 행했어. 그런데 이 형은 그게 그다지 썩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기아조 에마우톤.
단순히 번역하면「자신을 거룩하게 하다」라는 의미다. 문자적인 뜻은 그러하고, 업계(?)에선 강력한 부적과 상징의 힘을 빌려 나쁜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여러 방마 방식들을 통칭한다. 결계를 만든답시고 문가에 소금을 뿌리는 행동도 하기아조 에마우톤이다. 수호 성인의 이름을 문신으로 팔뚝에 새기거나 성직자가 축성한 성스러운 물건을 소지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
단, 무슨 일이든 도가 지나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되는 법.
보호가 지나치면 감금이 되는 것이고, 방어가 지나치면 공격이 되어버린다.
장소도 장소거니와 이곳에 그려진 보호의 문장들이 너무 크고 거창하다는 점에 형제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바비 아저씨가 이걸 보시면 무어라 하실지 궁금하군.』
퇴마꾼 바비는 자신의 은신처에 솔로몬의 진을 멋지게 그려놓고 있다. 그쪽으로 아는 바도 많다. 바비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겠다 생각한 샘은 핸드폰에 내장된 카메라로 구석구석을 찍기 시작했다. 해상도가 낮다는게 아쉽지만 그럭저럭 눈으로 알아볼 수는 있으니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릴 순 없다.
침대와 침대 모서리, 그리고 바닥. 천장도 한 컷 찍었다.
샘의 장난을 눈치채고 치즈를 외치며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딘도 한 장 찰칵.

『집주인이 이것에 대해 무어라 할지 대단히 궁금하군.』
『모른다고 딱 잡아뗄 수도 있지.』
『정말로 모르거나...』
『아님 뭔가를 숨기거나.』
『여기 집주인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딘.』
『캐빈 쉐퍼드.』
『만나봐야겠네.』
『두말하면 잔소리.』
딘은 슬슬 지상으로 올라가자고 하면서「섹시하게 사진 잘 찍어줘」어깨를 슬그머니 비틀었다.


※ 포옹씬 촬영따윈 기대 안 한다! 키스씬을 찍어라! 크립키~!! ※

Posted by 미야

2007/04/27 19:58 2007/04/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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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리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곳곳에 지뢰밭처럼 깔린 설정 오류 발견시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레드 썬을 외쳐주기 바람. 그나저나 요즘 쥰쥰은 맛있는 햄버거를 봐도, 고소한 아몬드를 봐도, 잘 빠진 나이프를 봐도, 썩 괜찮아 보이는 부적을 봐도, 눈치껏 딘의 호주머니에 챙겨주고 싶다는 욕구에 떨고 있습니다. 맛 갔어, 간 거야! 크앙~! ※


요람에 누운 아기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다. 천장에 매달린 채 피를 흘리던 엄마 메리가 비명과 함께 불에 타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동생을 안고 집밖으로 무작정 뛰어나가지 않아도 된다. 치솟던 화염, 뜨거운 열기, 그것은 이미 일어났던 일이고, 결코 바뀌지 않을 과거이다. 오래 전에 불은 꺼졌고, 악마는 커다란 상흔을 그들 가족에게 남긴 채 떠났다.
『형?』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의 약해빠진 마음이다. 딘은 까칠하니 짧은 수염이 돋아난 뺨을 미친 듯이 문질러댔다. 정말이지 우습지 않은가.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새 집에서 오금이 저려 움직일 수가 없다니. 계단을 절반만 올라간 동생이 근심에 젖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니, 비난하고 있다. 연약한 그를, 어리숙한 그를, 듬직하지 못한 사내를, 전혀 형 답지 않은 그를 냉정한 눈초리로 뜯어보고 있다. 아버지 존을 빼어닮은 눈으로 꾸중하고 있다.
 가슴이 욱씬거렸다.
나는 바보다. 이곳은 켄자스의 그 저주받은 집이 아니다.
한참만에야 체념하고 샘을 향해 어서 위로 올라가라 손짓했다.

『뭐 하냐, 동생아. 2층 침실을 확인해 본다며.』
여전히 움직이려 하지 않는 샘을 다그쳤다. 아직까지도 차가운 눈으로 위 아래를 죽 훑어보는 동생의 시선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실험대 위로 올라간 개구리를 해부하는 거냐 - 힐난의 빛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버럭 화냈다.
『샘!』
『그 전에... 딘도 이리로 올라와서 보겠어? 내가 발견한 걸. 여기서 보니까 여기 마루는 무지 이상해.』
오해였다. 샘은 딘이 아니라 마룻바닥을 지긋이 관찰하고 있었다.

가까이선 내용을 결코 볼 수 없는 그림이 있다. 한참을 떨어지고 나서야 그림 한 가운데에 칠해진 갈색의 얼룩이 사람의 코였음을 깨닫게 된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 눈이 보이고, 다시 입이 보인다. 내가 뭘 잘못 보았나 싶어 반대로 가까이 다가서면 사람의 이목구비는 어느새 마법처럼 사라지고 캔바스 위로 두껍게 칠해진 투박한 물감 덩어리들만 남는다.
마찬가지였다. 기구를 타고 하늘로 높이 올라가고 나서야 나스카 대 평원에 그려진 인류 문화 수수께끼가 나타났다. 동생의 말대로 계단으로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화가가 몰래 숨겨둔 그림이 바닥에서부터 떠올랐다.

둥그런 원이다. 그것도 일부러 자를 대고 오려낸 듯한 완전한 모습이다. 그러나 인테리어 업자가 그렇게 하는게 예뻐보이겠거니 싶어 처음부터 색을 달리하여 바닥을 깐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바로 문제였다. 딘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결의 방향과 미묘한 변색의 결과로 이러한 효과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라. 그런게 가능하다면 원숭이가 실수로 자동차를 분해한 뒤에 다시 그 부품으로 비행기를 조립해낼 수 있다.

『카펫을 깔아서 전에 살던 세입자들은 이걸 미처 몰랐던 모양이군. 봤다면 난리발리 쳤겠지.』
얼룩 부위를 발로 쿵쿵 찍으며 딘이 말했다.
『혹시 바닥에 깔린 배관이 잘못되어 저 부분만 물에 젖었던 건 아닐까.』
그래도 만사가 조심스러운 샘은 제일 그럴 듯한 이야기를 꺼내며 그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건 죄다 우연이다? 샘... 자연에선 콤파스를 대고 그린 듯한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삼각형 모양의 산이 있기를 하냐, 정육면체 모습의 바위가 있기를 하냐. 정말로 네 말대로 배관 문제였다면 얼룩이 찌그러진 타원 모양이어야 맞지. 어쨌든 확인해볼 방법은 딱 하나야.』
『켁!』
『저 속으로 뭐가 있는지 보게 뜯어보자.』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새로 수리를 끝낸 집안에 몰래 들어와 마룻바닥을 마구 뜯어낸다? 지하실 바닥을 삽으로 파헤치는 것과는 수준이 달라도 끝장으로 다른 일이다. 흙이야 도로 덮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강제로 깨부순 거실 바닥은 집주인이 돈을 들여 고쳐야 한다. 뻥 뚫린 구멍을 보고 마구 비명을 질러댈 사람들 얼굴이 훤하다. 아이고, 맙소사.
『있잖아, 딘. 우리 이렇게 갑자기 막 나가도 괜찮은 거야?』
쪼그리고 앉은 샘은 신고를 받은 경찰차가 출동했다는 투로 근심에 젖었다.
나이프를 꺼내 각각의 나무판의 이음새 부분으로 칼집을 넣으려는 딘은 콧방귀를 뀌었다.
『아서라. 너나 나나 진작부터 막 나가고 있었어. 몰랐어?』
딘이 보기엔 마룻바닥을 뜯는 일이나 지하실 바닥을 삽으로 파는 일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그렇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칼집을 넣었다고 그게 자리에서 쉽게 떨어질 것 같으면 인테리어 업자는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고 사기를 친 거다.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힘을 주었지만 나무판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칼날을 비틀어 보았다. 살짝 위로 들렸다가 도로 원위치.
약이 바짝 오르려 한다. 좀 더 강력한 도구가 필요하다. 곡괭이라던가, 드릴, 그것도 아니면 손도끼, 정 뭐하면 총이라도 한 번 쏘아서... 애 낳는 감각으로 끄응 소리내어 힘을 주었다. 순간 칼날의 끝부분이 따악 부러졌다. 제기랄 욕하고 벌떡 일어나 얄미운 바닥을 발로 쾅 찍었다.

일 하는 도중에 성질을 부리지 말라고 얼마나 귀 따갑게 주의를 들어왔던고. 냉정함을 잃으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면 지도나 나침반 없이 산에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그 결과야 뻔하다. 조난당해 꼴 사납게 죽게 된다. 존은 아들에게 이 점을 반복하여 말했다. 화가 나도 화를 내지 말라고. 감정을 제어하지 못 하는 자는 사냥꾼의 총을 잡을 자격이 없다고 늘 강조에 강조를 더하곤 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버지.」
대포 터지는 굉음과 같이 하여 꺼진 바닥 아래로 와당탕 굴러 떨어지면서 딘은 아버지 존이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웠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뭡니까, 정말. 이렇게 허망한 죽음이라니.
새카만 암흑의 바다에 빠져 엉덩이부터 휩쓸리면서 딘은 흐릿해진 눈을 감았다.

『우와앗?! 디, 디인~!! 딘!』
워낙에 순식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보지도 못 했다. 투명한 팔이 형의 바지를 붙잡고 잡아챈 것도 같다. 중력이란 것이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린 거라고 하기엔 시야에서 사라진게 너무나 갑작스럽다. 보통 바닥이 꺼지는게 이런 식은 아닐 터인데?! 썩지도 않은 나무판이 성인 남자의 발길질을 견디지 못 하고 꺼진 것도 대단히 수상쩍거니와, 무슨 수챗구녕으로 물이 빠져나가듯 사람 몸뚱이가 빨려 들어간 것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샘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형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하느님, 맙소사! 디인~!!』

저 위에서 말벌에 쏘인 곰이 나 죽는다 울부짖고 있다. 그 소리가 대단히 성가셔서 - 구덩이에 빠진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니까 제발 조용히 하란 말이닷 - 딘은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가까스로 앞으로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았다. 그렇다고 해도 고맙다 인사를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코앞에서 큰 북과 작은 북을 동시에 팡팡 두드려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음이다. 샘의 목소리는 원래 조곤조곤하다. 밤중에 불 꺼놓고 시시콜콜한 주제로 잡담을 나누다보면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다. 내 목소리는 자장가가 아니야 - 라고 항의하지만 그건 본인이 몰라서 하는 소리. 그런 주제에 흥분하면 300년간 전문가로부터 조율을 전혀 받지 못한 금관 악기로 돌변한다. 그 끼꺽대는 소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완전히 사람 미치게 만든다. 그래서 딘은 동생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걸 매우 싫어한다.
『혀엉~!! 제발 대답해, 무사해?! 형~!!』
귀가 아팠고, 머리가 울렸고, 앞 뒤를 구분할 수 없었다.
딘은 빌었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저 망할 곰의 주둥이에 손수건을 틀어 넣어라.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 그보단 팔과 다리가 송두리째 떨어져 나간 것 같아 무서웠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하며 손가락을 까닥 움직여 보았다. 다행이다. 격렬한 통증이 뇌를 후벼팠지만 정상적으로 움직여 주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최소한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신음하며 무릎을 구부렸다. 몸에 걸쳐져 있던 판자 조각 때문에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동작이었다.

『움직일 수 있어? 괜찮아? 내가 곧 내려갈테니까 조금만 참아!』
위로부터 한 줄기 밝은 빛이 내려와 시야를 교란했다. 손전등으로 아래를 비춰보고 있는 모양이다. 잔해들의 더미 한 가운데서 널브러져 있을 몸뚱이의 무사 여부를 확인하느라 램프의 빛은 좌로, 우로, 그리고 위 아래로 계속하여 움직였다. 거실 바닥으로부터 3m 아래로 떨어진 딘은 덕분에 멀미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여기다 맹렬한 전자 음악만 더해지면 나이트 바가 따로 없겠다. 엑스타시를 복용한 것도 아닌데 위장이 부글 끓었다. 이렇게 애원할테니 제발 손전등은 그만 흔들어라.

『딘~!! 내 목소리가 들리면 움직여. 제발 움직여줘. 아니다, 혹시 머리 다쳤어? 그럼 내가 갈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 자식아! 움직일까, 아님 움직이지 말까.』
짜증 섞인 형의 목소리에 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다행이다. 말투로 보아 크게 다치지 않았다. 신께 감사를 드리며 손전등을 움직여 딘의 얼굴을 비췄다.
그것이 눈부셨던지 잔뜩 찡그린 그가 손바닥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컷!」을 외쳤다.

『차로 돌아가서 밧줄을 가져올게.』
『그러지 말고 손전등부터 던져.』
『응?』
『손전등! 귀 먹었냐! 손전등 내놔!』
 
샘은 일단은 형이 시키는대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조준해서 던졌다고 해도 벌러덩 누운 자세로 떨어지는 손전등을 두 손으로 받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주변이 어두운 것도 감각을 둔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게다가 부러진 판자 조각이 피부를 쏠아대고 있어 방해가 되었다. 오로지 감각만으로 내려오는 문명의 선물 - 손전등을 낚아채는데 성공은 챘지만 덕분에 팔뚝으로 없던 생채기가 하나 생겼다. 활활 달아오르는 쓰라림에 딘은 아뜨뜨 소리를 내었다.

『제기랄, 못에 긁혔잖아. 재수 없게 파상풍에 걸리면 큰일인데.』
『아래는 어때, 딘?』
『독촉 좀 하지 마!』
훅 숨을 들이마시고 좌우로 손전등을 비췄다.
좋다. 흐릿하게 보이는 건 네모 반듯한 나무 기둥이고... 반대편으로 보이는 건 대들보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몸을 추스린 딘은 2차 붕괴를 걱정하며 - 그것이 비록 쓸데없는 염려라고 할지라도 - 머리를 움찔움찔 가슴팍에 넣었다 꺼냈다를 반복했다. 다행히 윗층 마루는 더 무너질 기색은 아니다. 애시당초 바닥이 꺼진게 비정상이다.
머리 위의 안전부터 확인한 그는 버릇처럼 손전등의 건전지 넣는 부분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그럼 오른편으로는... 옳거니. 용도를 파악하기 힘든 가느다란 파이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편으로는... 공간이 제법 넓다. 전반적으로 무슨 창고나 와인 저장실 같은 분위기다. 금주법 시대에 밀주를 만들어 보관했을 법한 그런 음습함이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진짜로 술통이나 유리병 같은 물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판을 옆으로 치우고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쥐고 있던 손전등을 어깨 높이로 올렸다.

『아이고.』
그리고 딘은 신음했다.
『침대잖아!』
금주법 시대의 갱들이 지하실에서 밀회를 즐겼던 건가.
상상하던 술통은 간곳 없고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침대였다.

Posted by 미야

2007/04/25 12:51 2007/04/25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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