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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judgment 07

※ 한글로 작성해선 바로 이어붙이기 해버립니다. 그래서 접기 기능을 잘 안 쓰지요. (질질 늘어지는 모양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아차 소리를 내고 있다)
뭐, 내용이 어두워졌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어지는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과 많이 틀릴 수 있습니다. 기아병에 대한 내용은 마빈 해리스의《작은 인간》책을 참조했습니다.
케엥, 형제가 말다툼 하는게 좋아요. 이런 건 별로...
그나저나 3월까지 장기 휴방. 어쩌라고? 우리더러 죽으라고? ※


처음엔 아버지와 형들이 끌려갔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나치 친위대의 호송 트럭에 실려가면서도 그들은 가족에게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입을 벌려 소리를 내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타고 트레블링카, 헬름노 등등의 이름을 들었다. 아우슈비츠 이름도 누군가 수군거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버지가 어머니와 눈을 맞췄다. 그걸 지켜보던 어머니는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행여나 군인들에게 몹쓸 짓을 당할까봐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고만 했다. 그런 어머니를 누나 에르시가 붙잡았다.

남자들이 올라탄 트럭이 떠나자 이번엔 어머니와 누나들 순서가 되었다.
공포에 질린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탄식의 소리를 냈다.
오겐 맥콰드는 몸부림치며 자식놈 옷가지나마 붙잡으려던 어머니의 하얀 손을 잊지 못했다.
《저 아인 겨우 일곱 살이란 말예요! 제발! 죽이지 말아주세요! 죽이지 말아줘요!》
날카롭게 비명을 질러대던 어머니의 머리를 그들이 총신으로 두들겨 팼다.
어머니는 피를 흘리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래봤자 그는 홀로 남겨졌고, 누이와 어머니가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 역시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1944년, 9월의 마지막 주의 일이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죽어야 했네.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엔 나이가 어렸고,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거든. 그네들 말대로라면 금쪽 같은 식량을 축내기나 하는 버러지였지. 하지만 나치는 우릴 죽이기를 주저했어.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는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이름 높았던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자였거든. 여기 있는 스텔라의 아버지는 금 세공 기술자, 마이클의 아버지는 보석 감정가였네. 헤더의 부모님도 보석 세공사였고. 다시 말하자면 나치는 우리들 아버지들을 공짜로 부려먹기 위해《여차하면 가스실로 보내버릴 수 있는 어린 자식놈》이라는 인질이 필요했던 걸세. 그건 말도 못 하게 효과적이었지. 생각을 해보게. 하루에 열 여섯 시간을 노동하면서 군소리조차 할 수 없었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횟가루가 발려진 아이의 시체가 구덩이에 던져지게 될 거라는 경고를 들었단 말이야. 그리고 몸에서 짜낸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어 보내주겠다고도 했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이 가루가 되도록 다이아몬드를 만지고, 또 만지고, 다시 만지고...』

그렇게 해서 한 자리에 모인 전문 기술자들의 자녀들 숫자는 마흔 다섯이나 되었다.
나이가 제일 어렸던 마리아는 다섯 살.
게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던 헤더는 열 세 살.
오겐은 일곱 살, 스텔라와 마이클은 각각 여덟 살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 다섯 분의《만찬》을 준비할까요?』
비서 힐케마이어가 조심스런 얼굴로 응접실 문을 열고 이쪽의 분위기를 살펴왔다.
세 명의 노인이 호흡을 같이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 기아병이라는 것에 대하여 아는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여 어렵사리 질문했다.
오겐의 물음에 샘은 가볍게 에, 소리를 냈다.
말 그대로다. 너무 굶어서 생기는 질병이다. 물질의 풍요로움에 신음하는 현대 미국에선 결코 보기 힘든, 물론 깡마른 슈퍼 모델들에겐 일찍이 저주스런 직업병이 되었지만, 영양 섭취가 충분치 못 했을 적에 인간이 겪는 신체적 반응이 바로 기아병이다.
샘은 손가락을 깍지끼고 자신이 아는 것을 신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갈증이 심해지고, 소변의 양이 늘고, 입안이 마르고, 체중이 급격하게 줄어들며,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기자라서 그런가. 한참 젊은 사람임에도 잘 아는군. 그런데 조금 더 굶으면 그러한 증세는 오히려 줄어들게 되네. 몸은 허약해지고 추위를 많이 느끼게 되지. 의기소침해져서 자신들의 배고픔에 대해서조차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네. 피부는 건조해지고 각종 신체 기능은 서서히 중지되기 시작해. 그리고 머리털이 빠져. 근육이 분해되고 장기가 피부에 달라붙지. 이때가 되면 이미 말도 못하게 고통스럽네. 몸이 이미 완전히 축났으니까.』

수용소에선 성인 기준으로 하루 800 칼로리만이 섭취 가능했다.
독가스만이 살인 무기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나치는 그들을 굶겨서 죽이려는게 명확했다.
먹을 것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스텔라가 눈물을 보이며 울먹거렸다.
『그것이 성장기 어린애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를 생각할 수 있어?!』
생존을 두고 동포 전부가 경쟁 상태로 들어갔다.
독방에서 바퀴벌레를 잡아먹은 빠삐용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규정된 배급량은 하루에 두 번, 얇게 잘라낸 검은 빵 한 조각에 반 그릇의 멀건 스프가 다였어. 그나마 제대로 배급이 되었을 적의 이야길세.』
몇몇의 이기적 어른들은 퀭한 눈빛을 한 아이들에게 식사를 주려 하지 않았다.
배고픔은 선한 사람도 아귀로 만들었다. 그들은 아이들 몫의 빵을 빼앗아 자기 목구멍 속에 넣었다.
쥐들조차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44년의 12월은 혹독했다.

사용인들이 신호를 받고 손님들에게 정중하게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자리를 함께 한 딘과 샘은 할 말을 잃었다. 이름만 만찬이고 이건《개 먹이 페스티벌》이었다.
검은 덩어리에선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딱딱한 빵은 눈으로 보기에도 돌덩이처럼 보여 과연 이로 씹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손으로 만져보니 까끌한 촉감이 강철 부스러기 같았다.
스프는? 말을 말자. 색깔 자체가 역겹다.
당황한 것이 분명한 딘은 최고급 식기에 담겨진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를 두고 난감한 눈치다. 무엇 하나 부족한게 없는 사람들이「극악의 다이어트 식단」을 실험하고 있다? 이런 미친 짓을.

『우리의 생명을 지켜준 헤더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세 명의 노인은 조용히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잠자코 빵을 스프에 찍어 입에 넣었다.
하는 수 없어 샘도 이들을 따라했다.
단, 딘은 동생과 달리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빵이 필요했네...』
오물오물 음식을 씹던 오겐이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슬픔과 분노에 차서 외쳤다.
『빌어먹을 빵들!』
아이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헤더는 책임을 느꼈다.
그 참혹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애썼다.
어른들에게 애원하고, 빌었고, 때로는 몸을 팔았다.
오겐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망할 것... 그놈의 더러운 나치 놈에게...!』

기껏해야 두 덩이의 빵을 흥정하기 위해 헤더는 바닥에 손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 나, 나는 남창이 아녜요! 거기에 넣지 말아주세요!
- 무슨 소리. 너는 돼지다. 그리고 나는 돼지의 항문을 범하는 못된 놈이고. 자! 허리를 들어!

그 장면을 구석에 숨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던 오겐은 한참만에 헤더가 보물처럼 품에 안고 돌아온 빵을 도저히 입에 넣을 수 없었다.
그걸 그녀는 단호한 투로 억지로 씹고, 삼키게 했다.
「이것은 나의 피와 살이다. 오겐? 구토가 나도 절대로 뱉으면 안된다.」
시키는대로 하면서 오겐은 소리를 내지 않고 오열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밤새도록 절망했다.
아름다웠던 누이, 그리고 어머니, 그리고 첫사랑...
그녀의 살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 그걸 먹었다.
토하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겐. 모욕은 생명과 비교하면 하찮은 것이거든.」
눈물 범벅이 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헤더는 웃어보였다.
누구보다 상처받았으면서도.
마흔 다섯의 아이들을 자기 목숨처럼 지키려던 여인은 힘 주어 밝게 웃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딘이 수저를 들었다 도로 놓았다. 테이블을 때리는 탕 소리가 모두의 눈썹을 찌푸리게 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응?』
『헤더는 어떻게 죽은 거죠.』
오겐과 스텔라가 어랍쇼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러니까 자네의 조부님은 무어라 하셨는가. 네마 나타스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네. 그저 헤더가 죽었다는 말만... 음, 그게 좀 수수께끼 같긴 했어.』

스텔라가 기억하는 네마 나타스는 매우 친절한 남자였다. 키가 훤칠했고 잘 생겼다. 헤더가 보살폈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마리아를 종종 무릎에 앉혀놓고 이상한 말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에 노랫가락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어느 나라의 노래냐고 물어봤더니「바빌로니아」라는 먼 나라의 아주 오래된 노래라고 했다.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노래라고... 그러면서 네마 나타스는 주머니에 넣어두고 있던 분홍과 노랑의 캔디 같은 것을 마이클이나 스텔라에게 나눠주었다.

헤더는 왜 오지 않는 거냐고, 보고 싶다고 오겐이 울면 멋있는 사내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거라고 늠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굳세게 자라야 한다. 헤더는 너희들이 백발의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죽는 것을 저 먼 곳에서 언제까지나 지켜볼 거다. 그러니 나에게 약속해주겠니?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받지 않는 멋진 남자와 여자가 되겠다고. 헤더의 근사한 자랑거리가 되겠다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질 때까지 아이들은 영국군의 보호를 받았다.
그때까지 헤더의 빈 자리를 대신 메워준 사람이 멋쟁이 네마 나타스다.

스텔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방 직전에 발진티푸스가 돌았어. 헤더 언니는 아마도 병에 걸렸던 것 아닐까.』
『아녜요. 매번 기침을 하긴 했어도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니었어요.』
『베른게르의 말로는 가스실로 끌려갔다고...』
『틀려요! 가스실로 가는 행렬에선 아무도 헤더 누나를 못 봤습니다!』
『저어... 이건 진짜 끔찍스런 가정이지만 언니를 강간했다는 귄터 놈이 총으로 쐈다는 말도 있어. 연합군을 피해 달아나면서 언니를 쐈다는 거야.』
『귄터 그 개자식! 날로 뼈를 씹어도 모자를 놈!』
『내 생각으로도 귄터가 언니를 죽인 것 같아. 그래서 넴 나탁이 우리에게 알리질 않은 거고.』
『스텔라? 그 멋쟁이씨의 이름은 네마 나타스라고 하잖아요.』

이쯤해서 딘은 의자를 뒤로 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푼을 마이크처럼 손에 쥐고서 말이다.
『자자, 신사 숙녀 여러분? 이쯤해서 연극은 그만 둡시다.』
그리고 질렸다는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헤더는 죽지 않았잖습니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아님 정말로 모르는 겁니까. 당신들이 사랑한다는 그 헤더는 여전히 열 네 살의 나이로 살아가면서 사람을 사냥하는 헌터가 되었잖소.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으며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뭐요? 전염병? 가스실? 지금 개그하자는 거요? 그 망할 여자랑 내가 코앞에서 마주친게 한 달도 넘지 않았소.』

스텔라가 심장 부위를 움켜쥐고 쥐어짜는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색색거렸다.
『허억! 지금 뭐라는 거야... 저 사람?』
핏기 가신 얼굴로 마이클 프레데닉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당장 입 다물어, 딘 윈체스터!!』
오겐도 만만치 않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마이클? 마이클! 저 사람은 스탠리 플래니건이라고 자기 소개를...』
길게 얘기할 것 없다며 그가 단호히 턱을 굳혔다.
『오겐, 그리고 스텔라?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함세. 그러니 자네들 두 명... 가짜 기자 양반은 날 따라오도록.』
그리고는 하얀 네프킨을 결투를 신청하는 장갑이라도 되는 양 테이블에 내던졌다.

Posted by 미야

2007/02/19 23:00 2007/02/1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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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2007/02/22 18:48 # M/D Reply Permalink

    커헉! 헤더가 나오면서부터 급전개되고있는듯한 느낌입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역시 형제는 붙어있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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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judgment 06

※ 제멋대로의 망상을 달리는,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이상하다 싶은 건 전부 패스해주세요. 현대물엔 쥐약...;; 아아, 어렵다. ※


말쑥한 수트 차림새의 남자는 기자로 변신한 그들 형제들과 가벼운 악수를 나눔과 동시에 찡그림인지, 아님 미소인지 모를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반갑다는 것과, 반갑지 않다는 뉘앙스가 각각 절반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함은 아마도 상류 사회 특권 계층을 수도 없이 접대하면서 터득한 자기 보호 본능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딱 잘라《싫습니다》내지는《좋습니다》라는 걸 주장하지 못하는 가엾은 중생이었다.

왕을 모시는 시종장인양 양 손바닥을 살짝 포갠 자세로 남자는 샘과 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제 전화 통화로 인터뷰는 곤란하다고 말씀을 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기쁘기 그지 없군요. 이렇게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다는 건 저희 선생님에겐 더할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자, 일단은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밖은 춥습니다.』
남자의 말투에서 샘은「정중한 거절법」이라는 제목의 필수 교양 과목을 떠올렸다.
모르는 사람은 저 말에서「이얏호, 문턱 하나를 넘었다!」라며 좋아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 모르는 사람 중에는 어린애처럼 방긋 웃는 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철 모르고 기뻐하기엔 너무 이르다. 십중팔구 저 사내는 빙빙 돌려 과장되게 말하는 것으로 약간의 시간을 허비한 뒤에,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미안합니다만」내지는「안타까운 일입니다만」이란 수식어구를 잔뜩 붙여선, 귀찮은 손님들을 도로 찬바람 몰아치는 문 밖으로 내칠 것이 뻔했다.
동의를 나타내며 살짝 끄덕이는 턱의 움직임이라던가, 반짝거리는 구두를 응시하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동작 전부가 꾸며진 연극이다. 애초부터 그 머릿속으로 저울질되는 건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메뉴얼엔《예정에 없는 손님들을 응접실로 안내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다. 무작정 현관문을 두들겨 가뜩이나 바쁜 사람을 귀찮게 만든 침입자들은 그 나름대로의 노하우로 곧 처치되어 원래의 장소로 돌려보내질 것이다. 물론 그 침입자들의 직업이 외판원이 아닌 언론인이라는 점에서 평소때보다 곱절의 공을 들이겠지만 말이다.

『제 이름은 힐케마이어라고 합니다. 오겐 맥콰드 선생님의 개인 비서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오겐의 비서는 안쪽으로 열 다섯 걸음만 움직이고 다시 동작을 멈췄다. 사내를 따라 움직이던 윈체스터 형제 또한 싫든 좋든 제자리에 멈추어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신호등에 불이 켜지면서「당신들이 가진 패스워드로는 여기까지만 진입이 가능합니다」라고 알려주고 있음이다. 딘은 손가락으로 콧망울을 만지며 소금에 절인 레몬을 혀 위로 올려놓았다는 식의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에게 집안을 보여달라! 아울러 집안 어딘가에 있을 당신의 주인을 만나게 해달라!
하지만 고개를 길게 빼고 안쪽을 살펴보려고 해도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띈 힐케마이어가 중간에서 이를 가로막아 그의 염탐을 교묘하게 가로막았다. 이거, 쉽지가 않다.

『혹시《헤더의 자녀들》재단 설립을 두고 취재를 나오신 건가요?』
지금은 법으로 제작 자체가 금지된 상아 세공의 초호화 흑단 테이블을 배경으로 하고 선 힐케마이어는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무척 좋은 일이 될 겁니다. 1년에 2만달러씩, 뜻을 같이 하는 서른 아홉 분이 재단 기금을 후원하게 됩니다. 원래 헤더의 자녀분들은 모두 마흔 다섯분이 됩니다만, 지난해 또 한 분이 노환으로 세상을 뜨셔서... 그것으로 교육, 의료, 인권운동 등등을 돕게 되지요. 이미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와도 긴밀한 협조를 맺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할 가치가 충분하며, 오히려 이 일을 시작이 늦었다고 생각하시고 계십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오겐 맥콰드 선생님은...』
성질이 나려 하고 있으니 어서 그 입 다물라.
딘은 펜과 메모지를 요구하며 블라블라 이야기를 늘어놓던 힐케마이어의 말꼬리를 잘랐다.
『길게는 부탁 안 드립니다, 힐케마이어씨. 제가 뭐 하나를 적어드릴테니 이 메모를 댁의 선생에게 보여드리고 우리와 만나줄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그걸 보시고 나서도 돌아가라고 하면 군소리 없이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10달러를 걸고 장담하는데 선생님은 우리를 그냥 돌려보내려 하지 않을 걸요.』
『저어, 스탠리 플레니건씨? 무슨 메모를...』
『댁의 선생이 이 메모지를 들여다 보는 일엔 5초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손바닥을 펴보이며 딘이 강조에 강조를 더했다.
『5초, 딱 5초면 됩니다.』
딘은 비서를 쳐다보았고, 그와 눈싸움을 벌렸다.

헤에, 딘이 이겼다.
실수로 눈을 깜빡인 힐케마이어는 찜찜한 표정으로 딘의 위아래를 쳐다보았다.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던가.「잠시만요」를 말한 그는 이윽고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샘은 불현듯 궁금해졌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살짝 질문했다.
『메모지에 뭐라고 적었어? 딘.』
『쉿! 누가 엿들을 수 있으니까 플래니건이라고 불러. 어쨌든 이 형은 글자는 적지 않았어.』
『뭐?』
『대신 간단한 그림을 그렸지.』
그리고는 오른쪽 손가락 다섯 개를 물고기 지느러미라도 되는양 팔랑팔랑 움직였다.

그것은 진실로 마법의 키워드였다. 안쪽에서 제법 커다란 쾅 소리가 나면서 사람이 빠르게 뛰쳐나왔다.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전설의 입구가 활짝 열리면서 흥분한 백발의 마법사가 뾰족하게 생긴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맨발로 달려나왔다. 그런 마법사의 양편으로는 처녀 아닌 자가 부주의하게 손을 댄 유니콘이 반 광란하여 날뛰었다. 주의하라, 벼락이 일직선으로 내리꽂고 있음이다. 방어의 주문을 외울 줄 모르는 일반인들은 그래서 오딘의 아들이자 천둥의 신 토르의 분노 앞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당신들, 도대체 누구야!』
딘이 건낸 메모지를 구깃하게 쥐고 있는 노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혈색이 없어 손등이 파르죽죽하다. 덕분에 피부에 자라난 검버섯이 한층 더 눈에 들어왔다.
『만약에... 만약에... 단순히 장난을 치는 거라면 당신네들, 죽도록 후회하게 될 거요!』
오겐 맥콰드의 짙푸른 눈동자가 경고를 담아 번득였다.
『누구로부터 들은 거요, 젋은이. 헤더의 오른쪽 손가락이 여섯 개라는 건 비밀인데!』

딘은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주간 월드뉴스」신분증을 암행어사 마패처럼 들이밀었다.
『저희들은 기자입니다. 그리고 뉴스 소스는 언제나 비밀입지요. 잘 아시잖습니까. 자... 그러니까 오겐 맥콰드 선생님? 저희에게 잠깐 시간을 내어주시죠.』
발을 구르고, 외마디 분노의 외침을 토해내도 오겐은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골동품 경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침을 흘리며 환호성을 지를 것 같은 오겐의 초호화 응접실에는 이미 윈체스터 형제 말고도 선객이 두 명이나 있었다.
지팡이를 쥔 노부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주색 가죽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갑자기 시끄럽게... 무슨 일이야, 오겐?』
『무슨 일인지는 제가 묻고 싶습니다. 아아, 일어나지 마세요, 스텔라.』
그걸 만류하면서 맥콰드는 두통을 호소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뭔진 몰라도 좋지 않은 일인가 보군. 어떠냐, 오겐. 우리가 잠시 자리를 피해주어야 할까?』
노부인 뒤로는 고급 공무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짐짓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말쑥한 백발에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평생 남에게 굽신거리는 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을 인상이다. 권력이 뭔지를 아는 눈빛이다.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는 것으로 사람 목을 여럿 다치게 했을 것 같다.

샘은 살짝 긴장했다. 두 사람 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다. 노부인의 귀를 장식한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모르긴 몰라도 그들 형제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벌어들인 돈을 모두 모아도 구경도 못 할 비싼 물건임이 확실했다. 짧고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은 분명 유명 헤어 디자이너의 손길을 탔다. 입고 있는 옷은 또 어떻고. 어쩌면 신발 한 켤레의 가격이 자동차 한 대 가격과 맞먹을지도 모른다.
그걸 깨닫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왔다.
단순히 장난을 치는 거라면 죽도록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맥콰드의 발언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 셈이다. 이들은 똑바로 선 삼각형의 맨 윗 부분을 차지한 꼭지점이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권력과 돈의 힘으로 묵사발을 내버릴 것이 뻔하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 윈체스터 형제들이 다루는 유령보다 곱절로 무섭고 잔인할 것이다.

오겐 맥콰드가 피곤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텔라, 그리고 마이클. 미안합니다만 당신들도 같은 자리에 있어주어야 할 것 같군요. 이 친구들은 스탠리 플래니건, 제러미 도핀입니다. 두 사람은 월드뉴스의 기자들이고...』
기자라는 말에 고급 공무원의 냄새를 풍기던 마이클 프레데릭이 벌레 씹은 얼굴을 했다.
『기자들이 왜.』
『이 친구들은 헤더의 손가락이 여섯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것도 정확하게 오른쪽 약지가 하나 더 많다는 걸 메모지에 그림으로 그려 저에게 보여주더군요.』
소파에 파묻혀 있던 스텔라 패리니시가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거짓말!』
그리고는 흥분해서 검은색 지팡이로 대리석 타일이 깔린 응접실 바닥을 콕콕 찍었다.
『절대로 사실일 리 없다. 우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 이야길 입밖으로 꺼낸 적이 없어! 헤더 언니는 자신의 손을 수치스러워 했어! 항상 감추려 했다고! 그걸 잘 알고 있는데 우리들 중 누가 감히 제3자에게 그 얘기를 떠벌린단 말이냐! 이건 말도 안돼!』
정체불명의 발광체가 서쪽 하늘을 일직선으로 날아갔다고 해도 덜 놀랐을 거다. 아니, 달의 뒷면으로 외계인이 세운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고 하는게 차라리 나았다.
스텔라는 딘과 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이것들이 감히 내 앞에서 뭔 수작을 꾸미는 거야?!》라며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러든 말든, 딘은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가까운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요구했다.
『헤더의 이야기를 해주시죠.』
그것이 요청이 아닌 요구였다는 점에서 오겐 맥콰드, 스텔라 패리니시, 마이클 프레데닉은 사이좋게 몸을 경직시켰다.
이런 시건방진 녀석을 다 봤나. 맥콰드의 눈썹이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무엇을?』
『아는 것 전부를.』
『뭘 위해서?』
『헤더를 위해서.』
『그것이 왜 헤더를 위한다는 거지.』
『진실이 뭔지를 알아야 그녀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녀를... 도와? 이보게. 돕고 자시고 헤더는 이미 죽고 없다네.』
어이가 없어진 오겐 맥콰드는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렇다고 해도 딘은 평점심을 잃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질문 한 가지를 하지요. 헤더의 무덤은 어디에 있죠?』
오겐은 쉽게 대답을 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건...』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때 스텔라가 입술을 만지며 뭔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잠깐. 그러고보니 항상 그 점이 이상했었지. 오겐은 기억이 나니? 나는 그 부분에선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스텔라?』
『두 달 전에도 안나 로드리와 언젠가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헤더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 그냥... 넴 나탁이라는 이름의 연합군 장교가 와서 슬픈 얼굴로 헤더 언니가 죽어 유감이라고,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고 얘기해준 것이 전부야.』
『저런... 틀려, 스텔라. 그 장교의 이름은 넴 나탄이었어.』
『그랬던가? 난 분명히 넴 나탁이라고 기억하는데? 마이클.』
『어라. 넨 나르탁이 아니고?』
이들 대화로 오겐이 다시 끼어들었다.

딘은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두통을 참아가며 끄응 신음했다.
넴 나탁도, 넴 나탄도, 넨 나르탁도 아니다.
영문도 모르게 입안에서 뱅뱅 도는 이름 한 가지.
『네마 나타스.』
손짓 발짓을 섞어 말하던 세 사람이 순간 입을 다물고 딘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잔뜩 찡그려져 있던 오겐의 눈이 반가움을 담아 환해졌다.
『이제 알았다! 당신, 넨 나르탁의 가족이었군! 그래서 헤더에 대해 알았던 거고.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리 가까이 오시게. 당신도 우리와 같은 헤더의 형제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같이 헤더의 만찬에 참석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그때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리고 젊은이? 우리들이 저지른 무례함과 실수를 정중히 사과하리다. 댁의 할아버지 이름을 잘못 기억한 우리들을 부디 용서해줘요. 하지만 당시 내 나이가 겨우 여덟이었거든. 그럴 수도 있다는 걸 꼭 생각해줘요.』
얼음은 녹고 꽃이 피어났다. 같지도 않은 오해를 했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한 맥콰드는 뛸 듯이 기뻐하며 딘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와요, 형제! 반갑소, 반갑소!』
노인의 손은 더할나위없이 따스했다.
그래서 딘은 후추통에 든 가루 전부를 일시에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Posted by 미야

2007/02/19 14:53 2007/02/1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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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judgment 05

※ Tall Tales 에피소드를 보고 마구 뒹굴었습니다. 형은 동생을 구제불능으로, 그 동생은 형을 말썽쟁이로 보고 있군요. 크아앙! 이거 무지 귀엽잖아! 샘이 심즈처럼 블라블라 대사를 퍼붓는 장면에서 웃느라 정신 없었어요. (동생의 잔소리는 알아서 블라인드 처리가 되는 거냐?) 덕분에 힘들었던 만두 빚기도, 화장실 청소도, 설겆이의 고통도 잊었습니다. ※


숨기고 있는 비밀이 서른 한 가지나 되면 무얼 먼저 실토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요컨대 골라 먹는 재미가 붙는다.
마음 속으로 모 유명 아이스크림 선전 문구를 무단 카피한 딘은 추위에 건조해져 딱지가 앉은 입술을 어루만지며 쓴 웃음을 지었다. 맙소사, 숨겨둔 비밀이 물고기 비늘 숫자만큼이나 되어 무엇부터 고백할지가 걱정이 될 지경이라니. 자신의 인간성이 어떻다는게 이참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어쩐지 슬퍼졌다.

『고백합니다. 전 세 살 적에 엄마의 분홍 립스틱을 훔쳐서 입술에 발라봤습니다.』
이제 그가 숨겨둔 비밀은 서른 개로 줄었다.
『또 한 가지를 고백할까요. 여섯 살 적에 실수로 침대에 오줌을 지렸음에도 동생인 샘이 쌌다고 아빠에게 거짓말했습니다. 반성합니다.』
다시 줄어 스물 아홉 개.
『보너스로 하나 더 불어보지요. 어젯밤 전 터미네이터와 섹스하는 꿈을 꾸면서 팬티를 더렵혔습니다. 웁스, 깨어나서 돌이켜보니 완전 미친 짓이었습니다.』
이제 스물 여덟 개.
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 난 숨기는게 진짜지 없습니다 -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당연히 고해성사실의 신부님은 냉정한 목소리로 신자를 야단을 치며 책상을 거꾸로 뒤집었다. 죄를 깊이 뉘우치는게 아니라 단순히 장난을 치고 있음이다. 부르르 고개를 흔들면서 창처럼 생긴 십자가를 높게 들었다. 회개하라, 신부는 울부짖었다. 심판의 날이 임박하였음이다.
『그 세 가지 중에서 영양가 있는 건 하나도 없잖아!』
남자애들도 종종 엄마를 흉내낸다. 거울 앞에서 화장품도 발라보고 팬티 스타킹도 신어본다.
오줌을 쌌다는 걸 동생에게 뒤집어 씌웠다? 누구라도 해봤음직한 여섯 살 어린애의 거짓말이다. 아빠가 속아 넘어갔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하찮은 것에 일일이 토를 달고픈 맘은 들지 않았다.
형이 꿈에서 터미네이터와 섹스했다는 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다만서도... 샘은 잠깐 반대편 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경직된 얼굴을 하곤 다시금 딘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형이 방금 말한 그거, T-X 모델*인 거지?』
반짝이는 금발에 기름을 발라 바짝 뒤편으로 빗어넘긴, 라이징 오브 머쉰 편에 등장한 무표정의 여성형 기계 전사를 떠올렸다. 몸매가 비록 환상적이라고 해도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는 단어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다. 눈꺼풀 하나 안 움직이고 남성의 고환을 잡아 뜯어버릴 것 같은 이미지다. 그런 여자를 바닥에 눕혀놓고 원초적 바디 토크를 즐겼다고? 순전히 꿈속에서였다지만 샘은 그의 형이 제국의 역습을 당해 되려 무참히 당했을까봐 걱정이었다.

딘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실실 웃었다.
멍청하니 강물의 흐름을 따라 표류하는 쓰레기 스티로폼 같은 가벼운 미소였다.
『걱정도 팔자다. 음... 그리고 넌 오해하고 있어. 실은 내 꿈에 나온 건 T-800 모델*이었어.』
패닉에 빠진 샘은 입을 쩍 벌렸다. 크리스티나 고켄이 아니라 아놀드 슈워제네거라고?
『잠깐, 잠깐!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딘의 취향이 아니잖아.』
『미안해, 새미. 어제부터 내 취향이야. 아무래도 네 형은 맛이 간 욕망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모양이야.』
동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 말고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분노가 치솟는다. 뭐야, 결국은 죄다 꾸며낸 거짓말이잖아. 차라리 콩으로 카카오 버터를 만들 수 있다고 할 것이지. 두개골을 둘러싼 가죽이 지나치게 팽창되어 팔뚝 아래까지 질질 늘어져버린 끔찍한 느낌이었다. 자동적으로 목소리가 올라갔다.
『제발~!!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진지해질 순 없어?!』
『그 무슨 섭섭한 말씀! 이거 억울해 미치겠구먼. 나는 항상 진지해. 네게 감추는 것따윈 하나도 없단 말이다. 아, 물론 내가 머리가 나빠 본의 아니게 미리 말하지 못한 것들은 있어. 예를 들자면 엊그제 우리가 들렸던 식당에서 웨이츄리스가 네 전화번호를 살짝 물어봤을 적에 이 형은 네가 여자라면 질색인 게이여서 대쉬는 곤란하다고 말했어. 하지만 그렇게 한 건 널 물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 두꺼운 안경을 쓴 웨이츄리스가 너완 너무 안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오케이?』
그리고는「동생이 이렇게나 착한 날 의심하다니. 이런 취급은 정말 억울해」타령을 반복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억울할 것도 없다. 하얀 날개를 가진 가브리엘 천사가 지금의 딘이 하는 푸념을 들었다면 말도 안 된다며 팔을 엑스 자로 교차시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암반 3,000미터 아래로 파묻혀 있는 그의 묵직한 비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그럼 저것은 산타클로스의 선물 보따리라는 거냐?」하고 무서운 표정을 지었을 거다. 당연히 그것들이 선물 보따리가 아닌 만큼, 딘의 억울하다는 주장은 씨도 안 먹혀 들어간다. 그가 동생에게 숨기고 있는 진실은 모리아의 심연보다 더 깊었고, 모르도르의 용암보다 더 악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선과 거짓으로 흐려진 자신의 어두운 눈동자가 방금 전에 비누로 세척한 유리보다 더 투명하다고 우겼다.
나는 형이다, 형은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 고로 약간의 거짓말을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동생을 위험한 지경에 빠뜨리게 될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
『진짭니다. 숨기는게 없습니다, 형사님. 제발 절 믿어주세요.』
취조실의 차가운 의자에 앉은 용의자는 손바닥을 펴보이며 자신에게 씌워진 모든 혐의를 부정했다.

이쯤해서 베테랑 형사는 감히 부정 못할 명백한 증거물을 눈앞으로 흔들어보일 필요성을 느꼈다.
잠시 한 호흡 멈추고.
딘의 죄책감을 자극하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후,후,후, 웃었다.
『저기 말이야. 형은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전등을 뒤로하고 선 샘은 흡사 소낙비를 뿌릴 검은 구름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멀리서 우릉 하고 하늘이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딘을 영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우스 버튼을 눌러 인터넷 창을 재빨리 닫았다는 것 정도로 안심하면 안돼. 그런 걸로는 증거 인멸이 되질 않아. 그거 알아? 컴퓨터에는《Temporary Internet Files》이라는게 있어서 인터넷으로 보여지는 문서나 그림이 임시로 저장되는 공간이 있어. 약간의 수고만 하면 열어본 페이지 목록도 너무나 쉽게 확인해볼 수 있지.』
『뭐얏?!』
『펄쩍 뛰어봤자 한참 늦었어. 그러니까 형은 범죄 현장에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도 모르고 도망쳤다는 얘기야. 알아 들었어?』
시퍼렇게 날이 선 얼굴로 샘은 딘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인터넷 페이지를 그대로 복구시켜 죄인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형이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아낸 뉴스의 제목은《헤더의 자녀들,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소외계층을 돕는 후원회를 조직하다》이다. 그 기념비적인 결성일은 1월 26일이 될 거라고 적혀져 있었다.
오른편으로 한눈에 척 봐도 출중한 예술가처럼 보이는 백발의 한 신사가 팔짱을 끼고 이쪽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눈빛이 맑고 뚜렷해 칠순이 넘은 나이라는게 안 믿어진다. 지적이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사진 속의 남자는 마스키요트의 거장으로 이름은 오겐 맥콰드, 미국보단 유럽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명한 보석 세공사라고 한다. 영국 왕실과 네덜란드 왕실로부터 주문을 받고 왕관을 제작한 적도 있다니 상당한 실력가인 듯하다.
기사의 하단부로는 그가 만들었다는 정교한 까메오 작품 사진이 첨부로 실렸다.
보석 전문가들 사이로 걸작으로 칭송되는 그의 기념비적인 까메오 조각의 제목은「헤더」다.

『마스키...요트?』
솔직히 보석이니 금조각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입장인지라 그게 무얼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발음을 해보려 해도 혀가 구제불능으로 꼬이려 했다.
친절하게 덧붙인 기자의 부연 설명에 의하자면 마스키요트는 히브리어로 쟁반, 장식, 조각을 뜻하는 단어란다. 그쪽 말로 미세 조각 장식을 뜻한다고 한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사람 손으로만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있음에 기가 막힌다. 누구는 동그라미에 겨우 점 두 개 찍고「이것은 사람 얼굴입니다」라고도 했는데, 누구는 길이 5cm의 갸름한 타원형 안으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을 마법처럼 묘사해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양쪽으로 땋은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다. 꽃이 없어도, 나비가 없어도 우아하다. 금으로 만든 프레임 속에서 그녀는 홀로 아름다웠다. 다만 푸른 빛깔의 아게이드 위로 떠오른 그녀의 생생한 표정은 너무나도 슬픔에 잠겨있어 일반적인 장신구로의 기능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죽음, 공포, 슬픔, 강제로 헤어짐,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제작자인 오겐도 모두 다섯 점에 이르는 그의 대표작인「헤더」연작을 남에게 팔겠다고 내놓은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조차 싫어해서「헤더 - 강제로 헤어짐, 1971년작」의 공식적 사진 공개는 이것이 최초라고 한다.

1931.12.7 ~ 1945.1.26

헌신을 바쳐 모두 마흔 다섯의 아이들을 살려놓았으나 정작 본인은 열 네 살의 꽃다운 나이로 해방을 맞지 못한 채 유태인 포로수용소에서 비극적으로 사망.
덧붙이자면 아우슈비츠의 해방일은 1월 27일이다.

이쯤해서 샘은 다시 무릎을 구부려 의자에 앉은 딘과 눈높이를 나란히 했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이걸 보고도 형이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 못 챘을 것 같어? 그놈의 바보 같은 스케치북 낙서도 그렇고, 형이 찾아낸 이 뉴스도 그렇고, 하나 같이 말이 안 되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일관된 뭔가를 가리키고 있잖아. 답답해 미치겠어. 이제 눈 똑바로 뜨고 다시 말해봐, 딘. 나에게 숨기는 건 하나도 없다고.』
『어흠. 그러니까 이건 말이다. 자고 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계시가 뚝 하고 떨어... 으악!』
『나에게 거짓말은 하지 마.』
무섭게 다그치며 형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나는 형이 유리겔라의 뒤를 잇는 초능력자가 되었다는 주장은 안 믿어.』
끔찍스럽게 아팠음이다. 새파랗게 질린 딘은 아가미를 파닥대는 물고기처럼 뛰기 시작했다.
『아파, 아파, 아파! 제발, 아파 죽겠어! 임마!』
『하늘에서 계시가 떨어져? 운석이 떨어졌다고 말하는게 더 신빙성 있어.』
『으갹! 진짜야! 아프다니까!』
『사실대로 안 말하면 더 괴로워질 거야. 내가 누르고 있는 건 제일 아픈 부위거든?』
『망할 새디스트! 이게 진짜! 으아, 으아~!!』

신경의 급소를 정확하게 눌러대는데 눈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기다랗고 굵은 손가락은 사정 안 봐주고 딘의 살갗 안쪽으로 갈고리인양 깊게 파고들었다.
『아프다니까! 당장 멈춰, 이 머저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동생에게 박치기를 시도했다.
불꽃이 튕기면서 따악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딘과 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굵게 신음했다.
그리고 나란히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에 몸서리쳤다.
동생이, 형이, 몰라도 사람 마음을 너무도 몰라준다.
『바보 동생.』
『얼간이 형.』
눈물을 글썽거리다 말고 두 사람은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오겐을 직접 만나보는게 좋겠다는 의견엔 두 사람 모두 반대가 없었다.
맨하탄에서 약 2시간 정도 거리.
조용한 전원 도시이면서도 품위가 있는 상류층 거주 지역이었다.
갓길에 차량을 세우면서 샘은 고개를 옆으로 길게 빼면서 빳빳한 50달러 지폐가 가로등마다 하나씩 붙어있다는 식으로 두리번거렸다. 아르데코 분위기의 지붕 처마가 시선을 끌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푸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면 딱일 듯한... 그러나 막상 그들 앞을 지나가는 건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뱃살 가득한 사내였다. 그래도 후후 거칠게 숨을 불고 있는 사내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진품 롤렉스다.

추위를 느끼면서 샘이 질문했다.
『연락은 된 거야?』
『선생님은 무지무지 바쁘시댄다, 샘. 잠시 시간을 내달라는 요청을「정중히」거절하더군. 전화도 비서가 받았지, 본인은 코빼기도 안 비치더라.』
『후우... 그래도 여기까지 일부러 왔는데 문은 두드려 봐야겠지?』
『그래야겠지.』
거기까지 대답한 딘은 딘은 포장지를 벗기지도 않은 윈스턴 담배를 품속에서 꺼내들고 쓴 웃음을 지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애지중지하는 임팔라의 열쇠를 동생에게 빼앗긴 딘은 지금 대단한 저기압 상태였다. 숨기고 있는 것 전부를 말해줄 때까지 자동차 키를 압수하겠다니, 그런 억지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서둘러 엔진을 끄려던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담배 케이스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형이 품속에서 수류탄을 꺼냈다는 식이다. 익숙한 동작으로 그가 포장지를 벗기자 안전핀이 제거되기라도 했다는 식으로 움찔거렸다.
『아항...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냐. 이건 담배라고 하는 거란다, 아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왜 놀라는 건데. 명색이 신문 기자라면서 담배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냐. 그러니까 적당히 꾸며줘야지. 어때, 너도 한 개피 피울래?』
달라고 해도 줄 것도 아니면서 딘은 격렬하게 쏘아붙였다.

대단히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다말고 조수석 앞 선반 뚜껑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벌컥 하고 헐렁한 커버가 입을 벌렸다.
잡동사니로 가득찬 선반 속에서 딘은「주간 월드뉴스 - 스탠리 플래니건 기자」,「주간 월드뉴스 - 제러미 도핀 기자」라 적혀진 위조 신분증 두 개를 꺼냈다.
『이거나 받으세요, 제러미.』
기자의 체취를 꾸며내기 위한 가식된 회색의 연기를 뿜으면서 동생을 향해 제러미 도핀의 신분증을 던졌다.
『자, 멋지게 사기나 쳐보자고요.』

Posted by 미야

2007/02/17 22:56 2007/02/17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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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l 2007/02/19 03:07 # M/D Reply Permalink

    캘리포니아 주지사 보고 한참 웃었습니다.이런 미묘함 너무 좋아요^^. 수퍼내츄럴으로 검색하다가 이렇게 미야님의 서관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즐거움을 만끽하고 그냥 가기 그래서 불쑥 글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2. 마리 2009/05/07 21:39 # M/D Reply Permalink

    오늘도 미야님글을 한바탕 읽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라니... 빵 터져버렸어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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