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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반지 어떻게 해~!! 엉엉. 슬픔에 통곡하며 1시간동안 뚝딱 제조한 정체불명의 날림 글.
전작 <judgment>와 직접 이어지기 때문에 이번 단편만 읽어서는「이게 뭔 소리랴?」가 되어버립니다. 이놈의 술집은 골디와 해왕 다루핀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마족 커피숍의 분점이 아닐까 싶군요. ※


그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문턱 가까이에 이르렀음이다.
주당들의 뺨이 흥분으로 더욱 붉어졌다. 바커신 신 만세.
반복되는 음주 행위 탓에 잉여 지방 축적이라는 고달픈 만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사내들은 몸무게는 그렇다치고 즐거운 표정으로 각자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무리 중 대장으로 여겨지는 자가 입으로 걸죽한 술을 뿜었다.
『이대로 있기는 그렇잖소? 우리, 환영의 파도타기를 신나게 해보십시다!』
『좋소이다!』
『피아첸차의 성 코라도께서 소중한 손님을 보내주셨네~ 사냥꾼의 수호성인에게 감사하라. 감사하라~♬』

이놈의 광경이 다 뭐란 말인가. 기분이 단단히 상한지라 문짝을 거의 부수다시피 해가며 살기등등하게 가게 안으로 진입해 들어온 딘은 단단한 벽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멈칫했다. 임신을 했나 싶을 정도로 배가 부푼 아저씨들이 한줄로 나란히 서서 파도타기라는 걸 해보이고 있다. 몸에 꽉 끼는 하얀 티셔츠 탓에 뱃살이 출렁거리는 모습이 리얼하게 드러났다. 아저씨들이 머리 높이를 맞추어 저마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할 적마다 살구색 피부들의 파도가 일렁였다.
내륙 가까운 바다의 파도 높이는 1에서 3미터. 먼 바다의 파고는 5에서 6미터.
죽은 꽁치가 춤 춘다.

피갑칠을 한 유령들만 무서운게 아니다. 중년의 아저씨들도 때로는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딘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은으로 도금한 휴대용 술통 - 정확하게는 성수통을 꺼내들고 위협의 의미를 담아 빠르게 흔들어댔다.
『성수, 확 뿌려버린다!』
당연히 열정의 파도타기는 당장 중지되었다. 참치 뱃살들은 저마다 목을 웅크리며 딘이 쥐고 있는 물통으로 시선을 모았다. 경험으로 그것이 직접적 살상의 무기가 되어주진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꺼림직스럽다. 뒤집어쓰면 무척 아프다. 하여 무리 중 우두머리가 항의조로 외쳤다.
『너무하잖아! 우린 그저 환영의 제스츄어로...』
『비켜, 살 덩어리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파도타기를 하면 런닝 머쉰과 훌라우프 셋트를 무이자 12개월 할부로 걍 주문시켜 버린다!』
『쳇!』
『어디서 불평이야! 추가로 다이어트 요가 비디오도 주문해 버릴까.』
『알았수! 안 하면 되잖소, 안 하면!』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뱃살들은 강경한 딘의 태도에 항복을 표현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투덜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저 친구는 유머가 부족하군.』
『신경질적이기도 하고.』
『맘에 안 들어. 이게 다 꿈이라는 걸 알면 여유를 부려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나 말일세. 댑다 성수통을 꺼내들고... 버르장머리도 고약해.』
고개 돌리고 수군거려도 다 들린다, 이 자식들아. 딘은 썩은 토마토를 씹었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술집 바빌로니아.
결코 존재할 리 없는, 길 잃은 나그네들의 오아시스.

그렇다고 해도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방에서 풍겨나오는 갗 튀겨낸 팝콘의 냄새는 진짜 뺨친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스포츠 중계방송은 미국 전역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종류다. 뺨을 꼬집으면 아프다. 술을 마시면 코가 알딸딸해진다. 여자들은 통통하고, 치마 아래로 드러난 망사 스타킹은 죽도록 섹시하다. 분홍의 립스틱을 바른 웨이츄리스가 딘을 보고 윙크를 보내왔다.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가슴에 꽂고 - 오빠, 내 가슴 만지게 해줄게 - 벌써 작업 들어가셨다.
『여어, 딘~!! 기다렸네. 어여 오시게.』
오래된 친구인양 생색을 내는 악귀도 있겠다, 이게 꿈이라 설득하는게 오히려 더 어렵다.
딘은 내장이 문드러진다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좀 펴. 그러다 주름살 늘겠네. 가볍게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활달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목소리였다. 흥에 겨운 표정만 봐도 속으로 다른 뜻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딘은 쉽게 이마 주름을 펴지 않았다.
『술 같은 소리! 잠결에 눈을 떠보니 얼토당토않게 넓은 대로변 한 가운데서 머리 꽁지를 박고 있었다 - 라는 줄거리에 화가 안 치밀어 오르면 그건 인간도 아니야. 이게 무슨 짓이야! 덕분에 몽유병에 걸렸다고 착각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찔했단 말이야.』
연보라색 눈동자라는 비인간적 존재를 구태여 숨기지도 않고 상대방 남자는 싱긋 웃었다.
『에이, 듣자하니 차가 망가져 수리소에 보냈다며.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걸어 오라고 한 걸세.』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어라. 그럼 뭐가 문제인가?』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 네마 나타스는 병 뚜껑을 딴 맥주를 슬그머니 건냈다. 어차피 싸우자고 부른 것도 아니겠다, 초반부터 언성을 높이는 건 달갑지 않았다.
『맥주는 싫은가? 아님 동생군과 똑같은 걸로 하던지. 데킬라도 있다네.』

그 말에 골치가 백 배는 더 아파졌다. 딘은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앞뒤로 쓱쓱 문질렀다.
으아... 새미. 너마저.
샘은 술을 잘 하지 못 한다. 알콜 냄새만 맡아도 말이 많아지고 행동이 수선스러워진다. 한 마디로 실수가 는다. 그 사실을 본인도 잘 알고 있기에 샘은 술을 마시는 일에 대단히 주의를 기울인다. 혼자서는 술집에 가지 않고, 행여 마신다고 해도 낮은 도수의 알콜만 마신다.
그런데 뭐? 데킬라? 이놈이 아주 막 가자는 스토리로 놀고 계시는구먼.
넴은 턱짓으로 정신이 밖으로 외출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웅크린 곰을 가리켰다. 아닌게 아니라 진작부터 뻗어 테이블에 고개를 푹 박고 있다. 중이 염불을 외는 듯한 중얼중얼 소리가 계속되는 걸로 보아 아직 잠들지는 않았다. 눈 감고 주정을 부리고 있다.
『내가 임팔라에 구멍을 뚫어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 씨잉. 눈에 힘주고 형이 노려봐써... 씨잉.』
맑은 콧물을 들이키는 민망한 소리가 보너스로 첨가.
『형은 나만 미워해. 그놈의 똥차가 나보다 소중하냐. 내가 훨씬 소중해! 소중하다고! 쿨쩍.』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떨어졌다. 번개가 치나. 어디선가 우르릉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천둥이 치는 건 딘의 머릿속. 못난 동생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 전에 일단 확인부터 해야만 했다.
『물어보자. 저 녀석, 여기서 모두 몇 잔 마셨지.』
네마 나타스는 민망하다는 투로 멎적게 웃으며 손가락을 세 개 들어보였다.
세 잔 씩이나! 바닥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을 만끽했다.
『젠장맞을! 저 덩치를 무슨 재주로 업고 모텔로 돌아가라고!』
『저 정도로 알콜에 약할 거라곤 짐작을 못 해서... 미안하게 되었네.』
『으이그!』
『걱정 마시게. 여차하면 내가 모텔까지 바래다 주겠네.』
『됐어! 여기다 아예 버리고 갈테야. 빗자루로 쓸어버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오우, 딘 윈체스터가 화났다.』

「딘 윈체스터」라는 이름에 샘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곰이 머리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랍쇼, 형?』
딘을 발견하자마자 좋아서 헤벌레 웃기부터 하고 있다.
역시나 술주정뱅이.
『형아, 형아. 이리 와서 옆에 앉아라. 나랑 노래 부르자. 응? 노래 부르자~』
그리고는 자기가 먼저 큰 소리로 유행가 비슷한 - 그래봤자 그게 노래인지 확신할 수 없는, 하여간 이상망칙한 그 무엇인가를 목 놓아 부르기 시작했다. 후렴구가 후룰랄라 어쩌고다. 설마, 스머프의 요들송인 건 아니겠지... 딘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형, 노래 부르자. 응? 응?』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다. 딘은「저건 나완 상관 없는 놈이예요」라는 표정으로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고 말고. 상관 없는 녀석이다. 모르는 사람이다.
『혀엉~ 왜 그래. 어째서 머리를 그러케 흔들고 이써.』
『안 흔들고 있다! 네 녀석이 몸통을 좌우로 흔들고 있는 거지!』
『히잉. 왜 소리 지르고 그래. 화 내지 마, 화 내면 싫어.』
『징그럽다!』
『기분 안 좋아? 그럼 내가 기분 좋게 해주까? 응? 응?』
『어디다 주둥이를 내밀어! 망할 술주정뱅이! 그냥 엎어져 있어!』
맥주병으로 동생의 정수리를 내려칠 수는 없다. 그래서 주먹으로 때리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따콩.
타격을 받은 곰이 다시 머리를 테이블에 박았다.

『살벌하네.』
동생을 가차없이 응징하는 걸 지켜본 넴이 짤막하게 감상 한 구절을 읊었다.
『흥! 어차피 내 동생이니 당신은 신경 꺼.』
『그래도 형씨가 마구 소리를 질러대니까 조금은 가여워져서...』
다 듣지 않고 딘이 투덜거렸다.
『애시당초 이 녀석까지 불러들인 당신이 잘못한 거야. 거기다 뭐야, 술까지 먹여놓고.』
『그게 막내씨 요즘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형에게 야단을 많이 맞았다고 우울해 하더라고. 우리 예쁜 마누라 탓도 있는데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겠다 싶어서...』
『댁은 사람도 아니잖아.』
『말 하자면 그렇다는 걸세.』
『됐어. 술은 필요 없어. 그러니 괜찮은 여자나 소개해줘.』
『헉!』
『저쪽의 예쁜 언니 이름은 뭐지?』

무서운 놈.
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만지작대는 딘을 쳐다보았다. 장난치고는 진지하고, 농담치고는 뼈가 있다. 가게 안에 있는 자들 대다수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수작을 걸겠다는 건가. 망사 스타킹의 그녀를 곁눈질하며「좋다, 좋다」이러고 있다. 넴은 턱을 괴고 아이고 한탄했다.
『글세. 소개는 해줄 수 있네만...』
『오!』
『관두는게 좋아. 진작에 자네가 권총을 잘못 발사해 머리통을 깨부순 여자가 바로 저 여자야. 지금은 망가진 몸을 버리고 다른 몸으로 갈아탔지. 얼굴이 바뀌어서 잘 몰랐나 보군.』
『윽!』
미안합니다. 예전 발언은 취소하겠습니다. 여자요? 안 필요합니다.
입안이 바짝 탔다. 한 모금의 맥주를 삼켰지만 갈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니. 인간 하나와 악마 하나는 잠시 침묵했다.

한참만에야 딘이 입을 떼었다.
『설마, 저 망할 여자의 새 몸뚱아리를 감상하라고 이리 부른 건 아니겠고...』
『아, 그건 아닐세. 이걸 꼭 보여주고 싶었거든.』
넴은 품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딘에게 건내주었다.

수 십명의 노인들이 정장으로 차려입고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다. 게중엔 아는 얼굴도 몇 있었다. 지긋이 뒷짐을 지고 선 노인은 마이클 프레데닉이다. 지팡이를 쥔 노파는 스텔라. 넥타이를 과감히 생략한 오겐도 보였다. 예술가라 이건가. 양복 속에 입은 건 우습게도 검정색 T-셔츠다.
그들 한 가운데로 감청색 드레스를 입은 10대 소녀가 샴페인 잔을 쥐고 서있다. 긴장을 해서 그런가, 표정이 뻣뻣하다. 그래도 아주 어둡지는 않다. 눈빛이 밝다.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는 귀중한 소녀는 금방에라도 불쑥 얼굴을 돌리고 야릇하게 미소를 머금을 것처럼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해 친척들이 모두 모였구나 싶은 광경이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실상은 이 소녀가 모인 사람들 중에 가장 연장자다. 그녀는「어머니」다.

『행복해 보이는군.』
어쩐지 안심한 것 같은 딘의 말에 넴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좋아하는 자식들 앞에서 기쁘지 않을 어미는 없지 않겠는가.』
『아아. 잘 되었군.』
정말이다. 잘 되었다.

사진을 도로 치우면서 넴이 가볍게 하아 호흡했다.
『진짜야. 자네에게 신세를 졌네, 딘 윈체스터.』
『쉿쉿~ 신세를 졌다는 걸 안다면 다신 우리들 형제 앞에 나타나지 마.』
『흥! 차갑긴.』
『우리가 헌터라는 걸 잊지 말라구. 여차하면 이곳을 쓸어버릴 수도 있어.』
『헤에,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못 할 것 같냐!』
『쯧쯧... 진정하라고, 형씨. 저기서 잠들어 있는 동생이 깨겠어.』

여기까지 말한 넴은 곱게 두 번 접은 메모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건?』
『일종의 보답이라 생각하게.』
『어엉?』
『미래를 위해 읽어두는게 좋아. 보고 나선 찢어버리게. 내가 일러바쳤다고 알려지면 곤란하거든. 그럼... 난 다른 볼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네. 돌아가는 길은 알지? 오늘 마시는 술은 내가 사는 거니까 맘껏 즐기게. 자, 그럼.』

의심하며 메모지를 펴보았다.
- 뱀파이어 루더의 가족이 복수를 하고자 한다
흥 소리를 내며 딘은 악마가 찔러준 메모지를 박박 찢어 버렸다.

『야, 새미! 일어나!』
『나, 무지 졸린데...』
『이 형님이 흥이 깨졌다. 퍼질러 자지 말고 노래 불러, 자식아.』
『엉. 무슨 노래 부를까.』
『스머프 주제곡이라도 괜찮으니까 불러.』
『요르레이 요르레이 후~』

Posted by 미야

2007/04/10 19:10 2007/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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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애플밀크 2007/04/11 07:30 # M/D Reply Permalink

    골디와 해왕 다루핀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마족 커피숍의 분점 ... (푸푸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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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judgment 21

※ 드디어「던진다, 크앙~!!」엔딩입니다. 생각보다 곱절로 길어진데다 이야기가 엉망으로 꼬여서 머리를 들 수가 없네요. 그래도 도망은 가지 않았잖습니까. 저로선 많이 노력한 겁니다.
후기는 나중에 몰아서 쓰도록 하지요. 다음편은<A signal for help>입니다. ※


그 딱딱하게 생긴 장난감은 더 이상 가지고 놀지 말아주세요.
긴장감 제로의 자세로 손을 내밀어 채근하는 딘의 모습에 헤더는 킥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의 그는 권총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뜨려 흙 묻은 막대 사탕을 어서 내놓으라 야단을 치는 엄마 같았다. 엄마는 - 딘은 딸 아이의 부주의함에 질색하며 그런 걸 입에 넣으면 결국엔 배가 아파질 거라며 무언의 경고를 보내왔다. 덕분에 헤더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자신의 진짜 나이를 잊고 정말로 코흘리개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이제 그만하자, 헤더. 광대 노름은 충분하지 않아?』
『아직 안 끝났어... 아니, 이대로 끝낼 수 없어.』
『답답하긴! 계속 그래봤자 고통받는 건 너 자신이야.』
『시끄러! 나에게 설교하려 들지 마! 네가 뭘 알아!』
어리고, 새되고, 그리고 절박함이 한껏 담긴 목소리로 그녀가 외쳤다. 금속으로 코팅된 유리를 세로로 길게 찢는 쩌렁쩌렁한 비명이 병실에 가득 찼다. 아울러 그 목소리 만큼이나 헤더의 얼굴 역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농락당하고 있단 말이다! 무엇 하나 내 맘대로 흘러가는 건 단 하나도 없어! 신도, 악마도, 운명도... 모든게 나의 뜻과는 상관 없이 결정되어져 버리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두 손을 놓고 얌전히 당하는 것밖엔 없단 말이다! 이게 말이나 돼?! 이런 걸 참을 수 있겠어?! 내 인생을 봐. 내 꼬락서니를 봐! 그런데도 넌 이런 나에게 훈계를 늘어놓을 참이냐?!』
딘도 지지 않고 버럭 외쳤다.
『그래! 다 큰 어른으로서 훈계할란다. 세상을 헛 살아도 유분수지. 이 어린 계집애야, 세상에서 너 혼자만 비참한 것 같냐?! 제일 불행하다고? 그게 뭐. 웃기지 마!』
냉정하고 차가웠다. 어쩐지 쌀쌀맞기까지 했다. 사실 그것은 속에 든 그의 진심이었다.
『인생이 맘대로 안 굴러가서 속 상한 사람이 세상에서 오직 너 하나 뿐일 것 같냐! 놀고 있네! 밖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과연 몇 명이나 자기 운명을 쥐락펴락 하면서 뜨뜻한 뱃가죽을 두드릴 것 같냐. 다들 꾹꾹 참고 살아가고 있는 거란 말이다! 힘들다고 내색 안 하고, 가식되게 웃으면서 숨 쉬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 징징거리지 마!』
 
양손을 뻗어 권총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텅 비어버린 침대를 향해 그 총구를 돌렸다.
『도망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다고 절망까진 하지 말아. 대신 정면에서 한 방 날려.』
헤더의 눈이 휘둥굴 벌어졌다. 그러든 말든, 딘은 헤더의 팔을 움직이게 해 정확히 베개맡을 조준했다. 억눌린 짧은 신음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걸 무시하고 탄창을 갈아끼우는 요령으로 손바닥으로 탁 쳐서 올렸다. 그 그 반동으로 방아쇠에 걸린 헤더의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고, 화약이 폭발하는 굉음에 세 사람 모두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딘!』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샘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큰일이다. 병실에서 총을 쏘다니. 빨리 빠져 나가야 한다. 총성을 듣고 사람들이 부랴부랴 이리로 몰려올 것이다. 이미 당직자가 경찰을 호출하는 단축 번호를 눌러대고 있을 터, 1초가 급하다.
『난리 났군. 여기서 나가야 해. 뭐 하고 있어?! 딘!』
하지만 동생의 성난 재촉에도 딘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구멍이 난 베개를 응시하며 여전히 헤더의 작은 손을 꼭 모아쥐고 있었다. 섬세하고도 단호한 의지가 깃들인 입술을 움직여 마침내 그가 길었던 고통에 종언을 고했다. 전쟁은 - 요란하게 일었던 소음과 비명들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재앙과 저주로부터 침범당했던 삶은 겨우 일상으로 돌아오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끝을, 그 마지막을... 피를 담은 잔은 그 살과 같이 하여 목구멍을 넘어갔다.
그는 죽었다. 신이 그를 죽였다.
그의 영혼이 최후의 날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 그분의 뜻대로.
마지막 날에 그 행위대로 심판 있으리.

참았던 오열이 별이 죽고 태어나는 그 시간을 맞이하여 목구멍 속에서 튀어나왔다.
『어떻게 해! 그는 죽었어!』
『그래, 울어. 차라리 속 시원하게 울어버려.』
『다 끝났어!』
『어쩌겠냐...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거야. 어때. 이참에 속 시원하게 한 방 더 날릴 텨?』
그녀의 눈썹이 거의 이마 끝까지 올라갔다.
『.......... 심술궂어.』
『미안. 이런 남자라.』
약간은 민망했던지 복도 걸레질을 하던 더러운 손으로 눈물 투성이의 얼굴을 훔쳤다. 덕분에 소녀의 얼굴로 길게 검은 궤적이 생겼다. 그걸 본 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다행히 새롭게 펑펑 솟구친 눈물이 그 흔적을 지우며 먼지 얼룩을 희석시켰다. 하지만 두 눈두덩이만 하얗고 새카만 구정물로 얼룩이 진 뺨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어쩐지 그 모습이 색깔이 거꾸로 박힌 희귀 팬더곰 같은지라 딘은 부랴부랴 시선을 돌렸다.

『딘! 헤더! 제발. 나가야 한다니까!』
『알았어. 가자. 헤더도 이리와.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나쁜 아저씨들이 잡으러 온다.』
형님은 좌우로 얘들을 끼고 복도 양편을 두리번거렸다. 빨리 생각해내야 한다. 1층 로비로 내려가기 위한 최단 코스와,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을 코스를 두고 저울질했다. 덕분에 오른발과 왼발이 따로 놀았다. 오른쪽 다리는 왼편으로 가자고 성화였고, 왼쪽 다리는 그러지 말고 뒤돌아 뛰어가는게 낫다고 충고했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된 몸뚱이가 갈지자로 비틀거렸다.

『틀려, 윈체스터. 옥상으로...』
어딘지 넋이 나간 듯한 헤더가 꽉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옥상?』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샘과 딘은 화재시 대피 통로인 비상계단 쪽을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몸을 경직시켰다. 머리에 시커먼 총알 구멍이 뻥 뚫린 노인이 이쪽이라고 손짓했다. 빨리 오라는 것 같다. 서두르라고 입 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그게 누군지 알 것 같다. 귄터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하는 것도 같고, 원망하는 것도 같다. 제법 깊어보이는 상처로 누런 뇌조각과 피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노인의 형체가 점점 더 희미해졌다. 딘은 이게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역시나 착각이다. 눈꺼풀을 닫았다 다시 뜨자 피투성이가 된 노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래도 같은 걸 목격한 모양이다. 옆에서 샘이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형. 있잖아. 나 방금 전에 말이지...』
『그래, 나도 봤어. 내 덕분에 정식으로 이승에서 추방당했다 이건가.』
아무튼 608호실의 유령은 더 이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 없을 것이다.
딘은 이를 악물고 좌우로 꽉 붙든 두 아이들을 세게 끌어당겼다.
『서두르자, 새미. 헤더. 올라간다!』

신선하고도 차가운 바깥 공기를 접하자마자 맨 처음 보인 헤더의 반응은 지나치게 교과서적이었다.
『우엑~!!』
허리를 굽혀 역류하여 올라온 신물을 게워냈다.
아이고, 이런. 딘은 술주정뱅이를 돕듯 하여 얼른 손바닥으로 헤더의 등을 쓸어내렸다. 생각과 달리 쏟아내는 량이 영 만만치 않음이다. 이러다 피까지 토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며 헐떡거리는 그녀를 도왔다.
『괜찮아?』
『괜찮을 것 같나. 죽을 맛이다.』
달걀처럼 갸르스름한 얼굴 양쪽으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속눈썹의 음영이 도드라졌다. 몇 번을 더 힘겹게 콜록거리며 누런 빛깔의 오물 섞인 타액을 뱉어냈다.
『기분은?』
『최악이야.』
물에 빠진 사람이 그러하듯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며 딘의 옷깃을 꽉 붙들었다.
『식중독과 독감, 유행성 이하선염과 홍역을 같이 앓는 듯한 기분이군.』
독특한 비유였다. 딘은「그걸 다 같이 앓는다면 의식불명인 건 둘째고 상당히 꼴불견이겠네」라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건물 귀퉁이 쪽으로 향했다.
행여 따라오는 사람은 없는지 틈틈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그렇다고 해도 딘의 눈빛은 어두웠다. 누군가의 시커먼 그림자가 따라 달려오기라도 한다는 투로 녹 슬은 철제 문짝을 노려보았다. 연보라색 눈동자의 키 커다란 누군가를 봤다는 기분도 들고 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건 같이 어울리기 싫은 악귀와 동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저쪽으로 비상대피용 계단이 있어. 내려다 보기가 꽤나 아슬아슬하지만 그리로 내려가면 된다.』
『역시 여러 번 와봤군.』
『도주로 확보는 기본이야.』
『그럼 빨리 그리로...』
『아직은 안 돼.』
『응?』
『모든 일에 결말이 있는 거라면, 그 마지막 때라는 것도 분명히 정해져 있는 거겠지. 안 그런가, 윈체스터.』
『오, 이런 제기랄.』
이제 그녀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침착함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고집을 부리는 기미를 보이지도 않고 담담히 요구했다. 마치 이 행동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정당하다는 걸 알리려는 듯이 턱을 바짝 치켜 올렸다. 딘은 그녀의 자세에서 뒤틀린 무기력감과 같이 하여 격렬한 에너지를 느꼈다.
『나는 감히 요청하겠다. 그 인간에게 마지막을 준 것처럼, 나에게도 최후라는 걸 줘.』
『헤더!』
『이대로 내가 계속 살아간다는 건 부자연스러워. 죽음의 주문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거지? 그렇지? 그걸 나를 위해 읽어주지 않겠나. 잘못된 것을 한 번에 바로잡는 거야.』
『이봐!』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딘은 머리를 쓸었다.
『진짜지 제멋대로야.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비 내리는 창문 앞에서 청승을 떤다면야 모를까,「날 끝장내 주세요」라고 말하기냐. 앞으로 널「리틀 새미」라고 불러도 되겠다, 야.』
딘의 그 말에 진짜 새미가 꿈틀 몸을 떨었다. 당황한 것도 같다. 동시에 화도 내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딘은 손가락까지 헤아리며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나섰다.
『앞 뒤 안 보고 달려드는 점이라던가, 자기만 편해지면 그만이라는 부분이라던가, 다른 사람에게 무신경한 점이라던가... 진짜지, 너희 둘은 많이 닮았어.』
듣다 듣다 샘이 발끈했다.
『딘?! 그 말 취소해. 난 무신경하지 않아!』
『아냐, 새미. 너도 엄청 무신경해. 너, 지금 나에게「그녀에게 오쿠림바의 나머지 주문을 건내줘. 불쌍하잖아. 그녀가 자살할 수 있도록 도와줘」라고 설득할 생각이었지? 네놈 얼굴만 봐도 뭔 소리가 나올지 훤히 다 보여.』
그걸 야단치며 눈을 매섭게 야렸다.
『둘 다 똑같아. 뒤에서 울게 될 다른 사람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잖아. 무신경해.』

바로 지금이다. 품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딘은 찰칵 소리를 내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놀랍게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음악이 아니었다. 마치 장례식 도중인 듯한 서러운 울음 소리... 코를 훌쩍이며 수십 명이 펑펑 울어대고 있다. 그것도 황당하게 죄다 노인들이다.
뺨을 맞은 표정이 된 헤더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딘을 응시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미리 말해두는데 이건 내 아이디어가 아니야. 마이클 프레데닉 영감이 결정한 거야.』
『설마!』
『다들 한 자리에 모여서 이걸 녹음했어. 그리고 너에게 꼭 전하라는 메시지가 있어. 잠깐 기다려. 일단 들어보지 않을래?』
일시 중지 버튼에서 엄지손가락을 떼었다. 그러자 너무 울어 코맹맹이가 된 노인이 울먹이며 속삭이는 소리가 나왔다.
《어머니, 부탁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헤더의 입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뜨거운 바람을 맞아 바스라진 관엽식물처럼 누렇게 변했다. 피를 들끓게 하는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러갔다.
『오겐! 마이클! 아아, 내 아이들!』
《우리들을 잊지 말아주세요.》

녹음기를 도로 끈 딘은 담담하게 말했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그녀의 좁은 어깨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오쿠림바의 주문? 죽음의 여신이 남긴 저주? 엿이나 먹어. 넌 아직 정신을 덜 차렸어, 헤더. 아니, 리틀 새미. 너의 아이들이야. 네가 전쟁터에서 살려낸 아이들이라고. 그런 아이들의 부탁을 저버릴 수 있어? 계속 울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마이클 프레데닉이 말했어. 손꼽아 널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겠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헤더? 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아니, 살아야만 해. 죽긴 왜 죽어.』
『나, 나는...』
더는 듣기 싫다며 딘은 비상 계단으로 몸을 절반이나 내렸다.
행여나 딘 혼자 떠나갈까봐 두려워진 샘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러고도 계속 죽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날 찾아와도 좋아. 하지만 아마 그때도 난 호락호락 네 부탁을 들어주려 하진 않을 거다. 자! 이제 그만 작별하자. 넌 그만 돌아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웃는 모습으로 암호를 외워. 그게 뭔지는 알고 있지?「뾰족 구두」와...』
『아아...!!』
『네가 외쳐야 할 건「녹색 구름」이야. 그러니까 헤더?』
마지막으로 옥상 바닥에서 발을 떼기 전에 딘은 천진난만함을 가장하며 손을 흔들었다.
『콜 투브. 안녕히... 내 생각이 맞다면 우린 아마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야.』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만을 기억하겠다.
행운의 주문을 살짝 혀를 굴려 발음해 보았다.
녹색 구름.
어쩐지 밝고 시원한 맛이 느껴진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딘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오열하는 소녀의 모습을 뇌리에서 강제로 지워버렸다.

어물쩍거리며 따라오던 동생이 이제는 더 못 참는다며 손을 잡아왔다.
『형...』
『오냐.』
그 손가락을 깍지끼며 밝게 웃어주었다.
『우리도 이제 그만 갈까?』
『응.』

뭐, 천장에 구멍 뚫린 임팔라를 보고 폭발한 형을 피해 샘이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났다는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웅성거리며 모여든 사람들 눈을 피하느라 두 사람 모두 정신이 없었으니까. 정문 바깥까지의 거리는 아직 멀었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경비원들도 장난이 아니었음이다. 공기가 추웠음에도 등이 뜨거웠다. 입술을 깨문고 구부정한 동생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걸 신호삼아 샘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딘과 손을 잡은 채로.

Posted by 미야

2007/04/08 15:25 2007/04/0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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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차원의마녀 2008/05/29 17:21 # M/D Reply Permalink

    아잉~ 손 잡기라니..
    본편에서 저런 장면이 나왔드라면 아마 캡쳐해서 프린트 한뒤 액자로 걸어뒀을꺼에요
    ㅎㅎㅎ(이래서 팬픽이란 장르의 묘미가 있는듯)
    저 형제는 넘 애정표현에 매말랐어요..

  2. 언니햐 2010/02/16 14:31 # M/D Reply Permalink

    으헝헝 ㅠㅠㅠㅠㅠㅠ어제 이 픽 정독했는데
    대박이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 저도 샘처럼 헤더가
    불쌍해서 자살해도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기적이었군여...
    역시 딘은 어른스러우면서도 생각이 깊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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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judgment 20

※ 사람 100명이 모이면 그중에 80명은 대체로 무해합니다. 유해한 인간은 20명인데 이중 5명은 대단한 악질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의인은 100명 가운데 모두 몇 명일까요 한 명도 없답니다.?
왜들 그러고 사나 싶지만 그게 인간이라니 어쩌겠습니까.
다음이 마지막입니다. 진짜지 오래 끌었군요.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미친 영감의 헛소리였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여 이마에 총알 두 발을 박으러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도대체 평소에 무슨 내용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건지를 진지하게 묻고 싶어졌다. 육체적 고통이 극심하여 머리가 살짝 돈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며 총을 꺼내어 노인이 가까이에서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귄터의 표정에는 공포라는 것이 쏙 빠져 있었다. 애초부터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이다. 피아노 건반을 아무리 힘주어 눌러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물기를 잃어버린 먹먹한 눈으로 죽음의 도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부탁합니다. 이제 그만 나를 보내주시오.』
그건 무리한 주문이었다. 헤더의 표정이 확 나빠지면서 얼굴로 피가 확 몰렸다.
『뭐야?! 이대로 끝내자는 거냐! 그런 뻔뻔하기 짝이 없는! 네가 한 짓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딴 소리를 입에 담는 거냐! 너로 인해 고통받은 나는 어쩌고! 양심도 없는 놈! 너 혼자만 편해지겠다는 거냐! 용서 못해! 절대로 나는 너를 용서 못해! 신은 자비로우시니 아마도 네 기도에 응답하여 널 용서할련지 모르겠다만, 인간인 나는 널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없단 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야 맞았다. 아직은 죽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야 했다. 그걸 비웃어주며 지옥으로 어서 빨리 떨어지라 저주를 퍼부울 작정이었다. 꼴 사납게 엉엉 울면 더욱 보기 좋을 것이다. 아니면 벌컥 화를 내도 좋았다. 신경질적으로 울부짖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든 말든 심판할 것이다. 공포에 질린 표정을 만끽하며 관자놀이에 총구를 바짝 들이댈 생각이었다. 이건 아니다. 그는 궁지에 몰린 쥐가 되어야 옳았다.

『나를 봐! 그리고 손을 올려 눈을 가려! 겁에 질려 비명을 질러대란 말이다!』
무덤은 그대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구더기는 그대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맹세코 피 묻은 시트를 쓰레기장에 버려 떠돌이 개들이 핥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너는 이런 나를 기다렸다고?! 거짓말이다. 그건 거짓말이다!』
총을 쥔 오른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모든 것을 불투명한 색유리를 통해 쳐다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다. 빨강이 빨강이었던가, 아님 보라색이었던가. 기분이 나빠졌다.
『죽기 싫다고 빌엇!』
목 안쪽으로 피맛이 느껴졌다.
아니, 이미 알고 있다. 그 뜨겁고도 비릿한 것은 피 섞인 가래 같은 것이 아니다. 탯줄이 붙은 채 죽어버린 갗난 아기처럼 더 원초적이고도 터부스런 것이다.
왼손을 높게 들었다.
『돼지!』
노인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기려는 걸 샘이 나서서 정중히 말렸다.

격심한 증오로 한껏 달아오른 목소리가 잘 갈린 칼날처럼 쨍쨍 울렸다.
『왜 막는 거야, 윈체스터.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거냐! 날 비난하려는 거냐!』
『침착해. 그리고 제발 목소리를 낮춰. 우리가 이 안에 몰래 들어왔다는 걸 잊지 말아.』
바깥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샘은 재빨리 왼편으로 움직여 조화가 꽂혀진 싸구려 꽃병을 들었다.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간 채 조용히 문 손잡이를 잡았다. 혹시 들킨 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뒤돌아 헤더에게 눈짓했다.
『쉬잇. 일이 시끄러워지면 너나 나나 똑같이 곤란해져.』
이대로 화병의 물을 바꾸러 화장실로 가는 척하자. 놀란 직원이 눈을 똑바로 치켜 뜨고 안에서 무슨 일 있느냐고 질문하면 멎적은 표정으로「조카 녀석이 할아버지를 문병왔다가 많이 아프신 모습을 보곤 감정이 격앙된 모양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싸움? 욕설? 고함? 죄다 착각이었다고 우기자. 그것으로 최소한 5분의 시간은 벌 수 있다. 짧으면 짧은 시간이지만, 반대로 길다고 하면 길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샘은 소동이 커지지 않기를 희망하며 흰옷을 입은 직원을 찾아 고개를 길게 뺐다.

오, 있다. 하얀 실내화를 신은 남자가 대걸레를 들고 무심한 태도로 바닥을 쓱쓱 닦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는 청소가 힘들어서 그런지 허리를 구부정히 한 채 도통 이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건만 청소 이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되었다. 별 것 아니었다. 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아무 일도 아닌 척하자. 느릿한 걸음으로 조화가 꽂혀진 꽃병을 들고 걸레질을 하는 남자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세면대는 저쪽에 있다.
그러다 얼씨구. 뭔가를 깨달았다며 뒤로 턴, 빠른 걸음으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기, 있잖아. 복도를 청소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지 않아?』
『......』
비난 아닌 비난에 남자가 걸레질을 하는 동작을 딱 멈췄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자신의 것과 흡사하게 생긴 짙은 초록의 눈동자가 보였다.
순간 미움에 겨워 생닭의 모가지를 붙잡고 와지끈 비틀고 싶은 욕구와, 반가움에 사무쳐 으스러져라 포응하고 싶은 두 가지의 상반된 욕구가 펄펄 솟았다. 그러나 두 가지 행동 모두 딘을 필연적으로 죽게 만들 것이 뻔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샘은 형과의 거리를 지금과 같이 유지하며 필사적으로 힘내어 냉정함을 가장했다.
그럼 죽도록 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히 숫자를 세도록 하자. 열 다섯, 백만 마흔 둘, 일흔 여덟에 다시 아홉... 영 엉망이었지만 샘은 그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 했다.

『딘. 언제부터 이곳에 취직했어?』
취직은 무슨.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딘은 하느님부터 찾았다.
『반나절 전부터. 오, 하느님 맙소사. 새미.』
『오, 맙소사. 딘.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샘은「제임스 브리스콧」이라 적혀진 이름표를 앞뒤로 뒤집어보며 콧방귀를 내뀌었다.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가 다 시들어빠진 할머니들이 득시글거리는 요양원에서 일용직 잡부나 마찬가지인 청소부로 취직한다는 시나리오가 과연 일반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인지는 둘째다. 싱크대 위로 더러운 양말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는 지저분한 남자가 복도를 반질반질하게 잘 닦아낼 것 같은가. 아닌게 아니라 딘이 헤집어 놓은 복도는 누가 오줌을 질질 싸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물기 투성이다. 요령도 부족하거니와 상식도 꽝.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빙긋 웃었다. 그러나 거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웃음이었기에 가뜩이나 굳은 그의 입술 모양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딘. 이런 곳에선 물 걸레질은 하지 않아. 기름 걸레질을 해야지.』
『응?』
『형이 청소 도구함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는 소리야. 보나마나 제일 앞에 놓여있는 것들 중에서 아무거나 들고 나왔겠지. 칠칠맞게... 내 말이 틀려?』
『그래서 뭐. 어차피 난 진짜 청소원이 아니라고. 이야, 하여간 너 답다. 보자마자 잔소리냐.』
딘은 환하게 웃으며 피를 나눈 친형제의 팔뚝을 툭툭 쳤다. 어쩐지 흐믓한 표정이다. 역시 샘이다. 말 위에 올라탄 김유신 장군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간장의 맛이 어제와 변함 없으니 오늘도 집안은 평온하겠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 온도에 반응하여 모양과 색상이 달라지는 신소재 금속도 아니면서 다채로운 표정을 지었다.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 퍼머를 망친 아줌마처럼 화를 냈다가, 빌라의 열쇠를 잃어버린 부동산 중개업자처럼 당황해 했다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다 실수로 개똥을 밟은 대학생처럼 마구 짜증을 부렸다. 갈피를 잡지 못해 변덕을 부리는 사월의 날씨처럼 엉망이었다. 근심으로 인해 그의 눈동자 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 자식! 지금 나에게 그딴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가 아니잖아! 샘! 엉뚱하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바비 아저씨에게 안 갔어?!』
『안 갔어.』
『잘라 말하면 다냐! 하여간 형의 말은 죽어도 안 들어요! 시키는대로 하면 그 밉상 엉덩이로 뿔이라도 돋냐?!』
『돋아.』
『으이그! 알았어. 돌아서서 팬티 내려. 그놈의 망할 뿔, 내가 톱으로 썩둑 잘라줄게.』
한참을 으르렁대며 동생의 두꺼운 어깨를 미움을 담아 밀었다. 도대체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황소 고집인 건지. 그렇다고 해도 팔뚝 두께만 딘의 딱 두 배 사이즈인 동생이다. 밀었다고 움직이면 샘이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딘이 밀친 정도로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턱을 치켜들며 대들 듯이 해서 샘이 외쳤다.
『딘! 지금은 내 팬티 내리는게 먼저가 아니야.』
『그럼 뭐가 먼저인데. 똥구멍에 난 털부터 족집게로 뽑아야 하냐?』
『헤더가 이곳에 있어! 나랑 같이 왔어!』
『아앙?』
그게 뭔 소리냐며 딘이 커다란 의문부호를 그렸다.
『미하일 요하넨버그! 본명은 귄테 베르겔트래. 그 자를 죽이러 지금 헤더가 이곳에 와 있단 말이야. 나랑 같이 저 방에 들어갔었어. 608호실, 바로 저기! 지금 그녀가 나치를 죽이려고 총을...』
『워워, 새미. 진정해.』
『진정하고 자시고 할게 뭐가 있어? 608호실이라니까! 이러지 말고 둘이서 같이 가자.』
『아니, 넌 진정해야만 해. 새미?』
딘은 동생의 팔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탐색하는 시선으로 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에게 듣고 내가 이미 다 확인한 거야. 네가 말한 미하일 요하넨버그는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 고인이라고.』
이제는 샘이 깜짝 놀랄 차례였다.
『뭐?』
『위암으로 2004년에 그는 죽었어. 격심한 고통으로 마지막은 모습이 대단히 흉했다더군. 네가 말한 608호실은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빈 방이야.』

그건 바보 같은 소리였다. 샘은 믿을 수 없다며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잘못 알았겠지. 형이 실수한 거야. 바짝 말라버린 노인이 저 방 침대에 누워 있었어. 말도 했다고. 그 할아버지, 눈도 깜빡였어. 난 봤단 말이야. 바깥쪽 명찰에도 이름이...』
『이름? 진짜로? 내 눈엔 안 보이는데?』
『하아?』
속눈썹을 깜빡였다. 딘의 지적이 옳다. 동시에 틀리다.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다본 그곳으로는 명찰이 붙어 있지 않았다. 사라졌다. 환장하겠다. 라벨을 붙였다 도로 떼어낸 흔적 같은 것도 안 보인다.
흐트러진 머리를 한 손으로 허둥지둥 쓸어 올렸다. 한쪽 뺨에 달라붙어 있던「미치겠군!」문구가 덕분에 다른쪽 뺨으로 옮겨 붙었다. 그 탓에 간지러워진 양쪽 뺨을 두 손으로 쥐어뜯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형. 이건 진짜로...』
『됐네, 멍청아. 네가 살짝 돌은 건 결코 아닐게다. 누구에게는 사실이고, 누구에겐 사실이 아닌 것뿐이지. 우리가 이런 걸 어디 한 두 번 당해봤냐. 그러니 바보처럼 굴지 좀 마.』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런 동생을 한심하다며 쳐다봤다.

실례하겠습니다. 딘은 방문을 노크하고 손잡이를 단번에 덜컥 돌렸다.
서늘하고 어두컴컴한 방으로 한 걸음 내딛자 알싸한 먼지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스위치를 만져 어두운 방안의 불부터 켜려 했다. 그래봤자 진작부터 망가진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달각 소리를 내며 다시금 위아래로 스위치를 조작했다. 저런, 안 되는 건가. 딘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어슴푸레하게 물체들의 형상을 긴장하여 관찰했다.
음, 네모낳게 생긴 저것은 침대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저것은...

『어이. 아직 이곳에 있는 거 맞지?』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것에 반응, 좁은 어깨를 추은 듯이 움츠렸다. 차갑고도 텅 비어버인 눈동자가 딘을 돌아다 보았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무기력하고 힘을 잃은 모습이 왠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형처럼 보였다.
『헤더...』
처음에는 행여 덤비진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 강렬한 연민으로 바뀌어갔다. 증오심 하나만으로 버텨온 인생, 그 대상을 영원히 잃어버렸으니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가 - 원수가 죽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 유령이라도 죽이고 싶어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늘로부터의 심판이 아닌가.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자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자들에겐 천상에서의 빛이 닫지 않는다.
『그 총을 내려놔.』
딘은 부드럽게 명령했다.

Posted by 미야

2007/04/01 19:09 2007/04/0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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