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아아!! 어서 빨리 심즈 해야 하는데 아직 택배 포장도 못 뜯고 이게 뭐야~!! 건전을 지향하는 (농담인게지)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이런 지렁이 토악질하는 속도라면 20번대 진입은 숙명일 듯... 망했다. 귀찮기도 하거니와 제가 워낙에 컴맹이라 왼쪽 마우스 버튼 사용 금지 어쩌고 등등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아무나 다 가져가쇼~ 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
생긴 건 투실한 곰인 주제에 사고방식은 계집애 같은 자식.
코인 세탁장에서 막 건져올린 온 푸른색 셔츠에 팔을 꿰어 넣으면서 딘은 바가지로 욕을 퍼부어댔다. 그것은 용접기에서 발사되는 화염의 강도와 비슷했다. 최소한 불 뿜는 용의 콧김 정도는 되었다. 아무리 껍질이 두꺼운 타조알이라도 거기로 가까이 들이대기만 하면 5분 안에 완숙 요리를 즐길 수 있을 거라 감히 자신한다. 『샘! 내 자동차 열쇠 돌려줘!』 『싫어.』 전설의 용사 지그프리드는 불사의 약을 온 몸에 발랐다고 한다. 그깟 화염이 다 뭐라냐. 공룡이 악을 쓰며 울부짖어도 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샘의 얼굴은 발그스름했다. 얼핏 보자면 인터넷으로 야한 그림을 들여다본 탓에 잔뜩 흥분한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무허가 의사로부터 지방제거 수술을 받은 여자 허벅다리에 반응하느라 그런 것은 아니었고, 실상은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나머지 열이 올라 그랬다. 바이러스나 세균 때문이 아닌, 순전히 긴장을 견디지 못한 신경줄이 무너진 탓이다. 새벽 무렵엔 37.1℃, 지금은 그보다 약간 더 올라 37.4℃다.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 덕분에 모니터 속으로 떠오른「생략된 검색 결과를 포함하여...」라는 문장이 하얀 공백에 그려진 초현실적 그림으로 보였다. 그것이 글자라는 자각은 한참 후에야 머리를 노크했다. 이 말인 즉, 아침 나절에 삼킨 두 알의 아스피린은 결국 효과가 하나도 없었다는 거다. 꼼짝 앉고 바닥에 엎드린 어항 속 금붕어가 된 듯한 느낌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무채색의 감옥에 갇혔다. 샘은 자신이 뿌리부터 망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퀴살이 죄다 빠진 채 덜컹거리며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마차가 따로 없다. 조만간 가루가 되어 박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염세주의자의 종말적 예감이라니. 과장되게 인상을 찡그리며 땀투성이의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았다.
당연히 딘은 그런 샘을 잡아먹으려 들었다. 『멍청한 자식! 네가 지금 학교 가기 싫다고 떼쓰는 여덟 살 어린애냐?!』 이럴 적에 어른들은 답답한 맘을 견디다 못해 천장을 응시하며 다음의 고전 문구를 암송한다. 노트 페르, 키 에트 오 시외... 옮겨 적자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고 이게 뭐야! 지금 나더러 걸어서 점심을 사가지고 오라는 거냐?!』 『운동도 할 겸 좋잖아. 그래봤자 왕복 20분인데 뭐.』 『캭! 내 자동차 열쇠~!!』 『못 줘.』 그렇게 대꾸한 샘은 쉐비 임팔라의 키를 안전핀을 제거한 수류탄인양 주먹으로 꼭 쥐었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걸 빼앗기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내려다보니 주먹쥔 손의 관절마디가 새하얗다. 그걸 깨닫자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 했다. 지금의 자신이 구제불능의 의처증에 걸린 못된 남편처럼 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이건 완전히 젖먹이 자식놈을 무기삼아「네년이 바람이 나서 가출해봤자지」협박하는 꼬락서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남편은 = 샘은 버리고 갈 수 있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은 = 임팔라는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 무기물에 불과한 차가운 강철 쇳덩어리보다 자신의 가치가 형편없음에 눈물이 쏙 나왔지만... 그것이 진실로 사실일 거라 믿은 샘은 죽자 살자 자동차 열쇠를 사수했다. 잠자리에 들 적에도 딘이 몰래 가져가지 못 하게끔 은밀한 곳에 잘 숨겨두었다. = 그가 누운 이불 아래였다. 화장실에 갈 적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딘이 눈물로 애원하고 협박해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고 대꾸했다.
참다 참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형이 팔을 들어올리고 손찌검 직전까지 간 것만 세 번이다. 그래도 샘은 눈 딱 감고 때리라면 때리라는 식으로 손바닥으로 귀를 막은 채 상체를 둥글게 구부리곤 했다. 폭력 남편에게 골백번은 맞아봤다는 그 모습에 차마 딘은 주먹질까진 하지 못했다. 만약 동생이 이참에 맞장 떠보자며 덤벼들었다면 얘기는 달라졌다. 망설이지 않고 멋지게 밟아댔을 거다. 그치만 바들바들 떨면서「칼로 찔러도 좋아요. 맘대로 하세요. 하지만 이혼 서류에 도장은 못 찍어요」라고 하는데엔 천하의 딘이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 화상아! 이 형은 그저 밥 사러 나가는 것뿐이다! 누가 도망이라도 간다냐!』 벗어놓은 샘의 바지를 거꾸로 뒤집어 털면서 딘은 다시금 악을 썼다. 그래봤자 떨어지는 건 가벼운 먼지와 모래 약간 뿐이다. 원하던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진 딘은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동생이 벗어놓은 겉옷을 난폭하게 뒤지기 시작했다.
주머니란 주머니는 죄다 뒤져보라지. 그걸 고스란히 지켜보며 샘은 강경한 투로 도리질했다. 『그러지 말고 전화로 주문해.』 『피자는 물렸어.』 『중국 음식도 있잖아. 그냥 전화로 주문해. 나가지 마.』 『이놈! 지금 나에게 명령하는 거야?!』 『알았어. 그럼 다시 말할게. 부탁합니다, 딘 윈체스터씨. 방에서 나가지 말아주세요.』 샘은 들은 척도 않고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단순 공식에 의거, 이마에 총상 두 발을 입고 사망한 90대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봐야 이렇다 할 꺼리를 아직 찾지 못했다. 샘은 엄지 손톱을 가만히 입에 물었다가 몇 개의 단어를 추가로 검색창에 입력했다. 강도에 당하고, 암에 걸리고,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보험 사기를 당하고... 틀렸다. 모세가 예언했던 그대로 이집트로 재앙의 검은 비가 내렸다. 하지만 그 많은 사건과 사고 중에서 처형식으로 죽어 장례식장으로 옮겨진 노인의 이야기는 쏙 빠져 있다. 여기서 유추해낼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최근에 이와 같은 사건이 아예 없었거나, 아님 보도 제한에 걸렸거나. 어느쪽이든 샘에겐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여 자판을 눌렀다. 「미하일 요하넨버그」 헤더가 마이클 프레데닉에게 물어봤다던 이름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다. 달랑 이름 하나를 갖고 뭘 찾겠다는 거냐. 이건 미국 전역에서 얼굴도 모르는 마리아, 내지는 안젤라라는 이름의 처녀를 찾는 식이다. 막막하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열이 나서 그런가, 불쾌한 욱씬거림이 양 어깨를 감싸쥐었다. 이런 걸 두고 혹자는 귀신이 어깨 위로 올라탔다고 한다. 틀린 표현은 아닌 듯하다. 식은땀으로 젖은 겨드랑이가 기분 나쁘다. 샘은 한층 더 초조해져 입술을 깨물어댔다. 이거고 저거고 도무지 감정 수습이 되지 않고 있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터질 것만 같은 예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불가항력적이고도, 운명적인 어떠한 일이... 몸부림쳐도 피할 수 없다. 흐르는 강줄기를 일직선으로 곧게 펼 수 없는 것처럼 아무도 그걸 막을 수 없으며, 순서를 밟아 온전히 진행되어질 것이다. 기껏해야 샘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 외엔 없다. 무기력감이 뼈를 흔들어댄 탓에 노트북을 만지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열이 올라 몽롱해진 시야로 짜부라진 글자들이 춤을 췄다.
안 된다. 기억을, 그 모양을 떠올리지 마라. 샘은 까끌해진 눈을 질끈 감았다.
높다란 나뭇가지 위로. 딘이 올라가서. 산산조각난 몸뚱이로 새카만 까마귀가 앉아. 팔은 저리로. 뜯겨진 다리는 아래로. 주렁주렁 매달린 내장을 짐승들이 쩍쩍거리고 뜯어먹고. 그 흉측한 광경이 현실이 되는 날엔. 어쩌지, 어쩌지, 나는 어쩌면 좋지.
『네, 여보세요.』 진동모드로 돌려놓은 핸드폰이 윙윙 거리는 걸 깨닫고 딘이 바지춤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화들짝 놀란 샘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욕실 입구부터 가로막고 섰다. 버릇처럼 화장실로 들어가 은밀하게 전화를 받으려던 딘은 당연히 놀란 표정이었다. 『아, 잠시만요. 아직 말하지 마세요... 샘? 지금 뭐 하자는 거냐.』 그리고 점잖치 않은 행동을 보이고 있는 동생을 꾸짖었다. 『비켜.』 『싫어. 내가 있는 곳에서 통화해.』 『샘!』 『내가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전화해.』 『나는 비키라고 말 했다.』 『못 비켜.』 이번에도 샘은「때리려면 때려」라는 의사를 분명히 하며 귀를 손바닥으로 막은 채 등을 구부렸다.
미칠 노릇이다. 이걸 어쩌면 좋사옵니까. 금방에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전화통과 몸을 웅크린 동생을 번갈아 쳐다보던 딘은 악 소리를 내고 제자리에서 펄펄 뛰었다. 그래봤자 곰을 닮은 몸뚱이가 옆으로 움직일 것 같진 않았다. 『야! 도대체 오늘따라 왜 이러니!』 『누구 전화야?』 『네가 알 바 아니야, 새미. 그것보다 내 질문에 아직 대답 안 했어, 너.』 『무슨 전화인데 왜 매번 숨어서 받아?』 『Shit! 제발 적당히 하자!』 『앨런 아줌마는 아니잖아. 바비 아저씨도 아니고. 이미 확인해봤어. 물어봤더니 두분 다 최근에 형에게 전화를 건 적이 없다고 하더라. 도대체 누구야? 왜 나에게 숨겨?』 『샘! 진짜 이걸...!!』 『때리려면 때려. 그치만 난 계속 물어볼 거야. 누가 그렇게 전화를 걸어대는 거야?』 이번에도 딘은 손만 올렸을 뿐이다. 고집불통에다 막무가내인 동생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충격에 대비하며 이를 꽉 다물었다.
그런 샘을 향해 대놓고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남들보다 키도 커서 거인 같은 녀석이「매맞는 아내」흉내를 내는 건 진짜지 꼴불견이었다. 그것도「지금 불륜 상대와 전화하는 거죠, 그렇죠!」라고 닦달까지 해가면서... 살려달라. 『아이고, 내가 졌다, 졌어!』 울화통이 터져 울음소리를 낸 건 오히려 딘쪽이었다. 『누가 전화했느냐니까, 딘.』 『꽤액!』 『형, 나 말이지... 형... 형! 그러지 말고, 그러지 말고...!!』 어쩐지 정신이 불안해 보이는 동생의 상태가 염려가 전혀 안 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성인이었고, 딘이 당장 걱정해야 할 것들은 과부하가 걸릴 만큼 산더미였다. 대놓고 말해 스트레스라는 이름의 고래에게 집어삼키워진 요나에 대해서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외워야 할 수학 공식이 너무나 많은데 중국집 전화번호까지 외우라는 거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샘이 그걸 보고 무의식중에 형을 따라했다. 동생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지켜보던 딘의 눈초리가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약간은 복잡하고, 약간은 미묘한 기분이었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동생의 귓볼을 만지려 했다. 느리게 뛰던 심장이 살짝 빨라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받아들이기 싫고, 동시에 인정하기 어렵고, 위화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경고했다. 딘은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재빨리 질타하며 회색의 블라인드 창을 내렸다.
『가까운 곳에 가서 먹을 걸 사가지고 올 테니 넌 그동안 여기서 머리를 식혀.』 내쳐졌다고 생각한 걸까. 이가 시리다는 투로 샘이 어깨를 움추렸다. 그게 또 엄청 보기가 싫었던지라 딘은 서둘러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집 잘 보고 있어. 돌아올 적에 이 아빠가 인형 사가지고 올게. 오케이?』 일부러 장난처럼 말하며 끈끈이처럼 따라붙는 샘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렸다.
Posted by 미야
2007/02/28 22:31
2007/02/2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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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건전지향이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당했다고 항의하셔도 전 모릅니다. 어익후 싶으면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여 윈도우를 닫는 당신의 멋진 센스를 보여주세요. ※
이름이 베로니카인지 스테파니인지... 하여간 딘이 질색하는 전갈좌의 여자이거나, 감히 얼굴을 쳐다보기가 두려워질 지경의 엄청난 박색인가 보다. 그것도 아니라면 잔인하기로 소문난 마피아 두목의 애인 정도는 되는 모양이라고 샘은 생각했다. 물론 원하지 않았음에도 실수로 여자를 임신시킨 남자의 대부분이 책임을 회피하며「걸음아 나 살려라」를 외치고 달아나곤 한다. 친부 확인을 위한 DNA 검사에 필요하다며 면봉으로 입안을 닦으려는 걸 한사코 거부하며「이건 꿈이야~!」절규한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딘이 보이는 반응은「생화학전 발생시 대처요령」을 너무도 닮아 옆에서 지켜보기가 대단히 민망했다.
한 모텔에서 하룻밤 이상을 보내지 않았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곧바로 결재를 취소하고 다음 모텔로 발걸음을 옮기는 황당한 짓도 두어 번 저질렀다. 그야말로 돈이 썩어나는 짓이었다. 부정 발급받은 신용카드 다섯 장을 산뜻한 마음가짐으로 가위로 잘라버렸다. 사용하던 핸드폰을 정지시키고 배터리를 빼버렸다. 대신 일회용 핸드폰을 현금을 주고 사왔다. 기껏해봤자 콜라와 햄버거를 사러 가는 주제에 허리 뒷춤으로 권총을 끼고 나갔다.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같은 경로로 한 번 이상 걷지 않았다. 자동차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다. 식당 테이블에 앉을 적엔 유리창 가까운 곳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뒷문이 가까우면 더욱 좋다. 이동의 무작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져 다음 목적지를 결정했다.
슬슬 짜증이 치솟았다. 차라리 속 편하게「내가 미워 죽을 지경이라는 거 잘 알거든? 그러니까 날 죽도록 패는 걸로 끝내자. 전치 5주까지 허용해줄게」라고 자수하는게 남자답지 않을까 싶다. 동생이 엿듣지 못하도록 화장실에 꼭꼭 숨어 - 심지어 콸콸 물소리가 나도록 수도꼭지까지 세게 틀어놓았다 - 누군가와 15분여간 전화 통화를 하고 나온 딘을 죽어라 쏘아보면서 속으로 욕이란 욕은 죄다 퍼부어댔다. 진짜지 나쁜 놈이다. 게다가 칠칠맞다. 어떻게 하룻밤 상대와 뒹굴면서 콘돔 끼는 걸 잊어먹냐. 그래, 핸드폰 너머로 무료 법률 상담소의 변호사는 조언이랍시고 무어라 지껄이셨는지? 샘은 넌더리를 내며 허리로 손을 얹었다. 퉁명스런 목소리로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도 않은 채《잘 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계속 달아나십시오》라고 했다면 그 자질이 의심스럽다. 아울러 그 엉터리 조언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딘의 정신 상태 또한 의심스럽다.
『뭐? 내가 뭘 잊었다고?』 수도꼭지를 도로 잠구고 화장실에서 나온 딘은 냉장고에서 나물 반찬이 구더기와 합창하며 썩어간다는 투로 인상을 찌푸렸다. 길거리에서 좋아라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남녀 커플만 보고도 부끄럽다고 귀가 벌겋게 변하곤 하던 동생이 무슨 까닭인지 정색해가며 대놓고 콘돔 운운하고 있음이다. 침대 매트리스 위로 일회용 핸드폰을 훌쩍 던지다 말고 딘은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저 놈이 뭔가를 잘못 먹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자놀이 부근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너, 지금 살짝 돌았냐.』 『머리가 돈 건 딘이지 내가 아니야.』 『아니. 내가 보기엔 네가 돌았다. 뜬금없이 콘돔 이야기를 왜 꺼내는건데.』 『실수했다며.』 『내가?』 『임신시켰다며.』 『뭐?! 누구를?! 외계인을? 말도 안 돼. 어쩌다 고무 모자 쓰는 걸 잊었다 해도 난 항상 버릇처럼 빼고 나서 사정한단 말이다. 그러고도 임신할 수 있으면 성처녀 마리아님인게지. 제발이지 웃기는 소리는 하지 말아줘, 새미.』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해 죽겠는데 엉뚱한 쪽으로 비난까지 들었다. 블라블라 행성인의 짬짜 소린 더 이상 듣기 싫다는 걸 명확히 하며 딘은 손사레를 쳤다.
그런데도 동생은 의심의 눈초리를 한사코 거두려 하질 않았다. 『정말 아니야?』 『쯥! 건방지게 네 살이나 위인 지 형에게 도끼 눈깔 치껴뜨는 거 봐라. 이봐! 그렇게 날 애기 아빠로 만들고 싶어? 미안하지만 난 아직 스물 여덟밖엔 안 됐어.』 『스물 여덟씩이나 된 거지. 우리가 만년 청춘인 줄 알어? 어쨌든 아니라는 얘기 맞지? 잘 알았어. 그럼 한 가지 더 묻자. 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도망다니는 거야? 이건 마치 프로급 추적자가 붙었다는 식이잖아.』
그의 형은 아직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고 있다. 그것이 샘의 신경줄을 야금야금 갉아댔다. 헤더라는 이름의 나치 헌터가 소리내어 읽는 것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주문을 손에 넣었다. 하루라도 빨리 빼앗긴 물건을 회수해야 한다. 자칫하다간 많은 사람이 희생당할 수 있다. 방송용 마이크에 대고 만장하신 가운데 그녀가 죽음의 주문을 읽어버리기라도 하면 이건 완전히 대 재앙이 되어버린다. 전화기를 사용하는 건 또 어떻고. 문제의 비디오를 본 사람은 일주일만에 반드시 죽게 된다는 일본 공포 영화의 줄거리가 곧 현실로 닥쳤다. 무심코 빨간 불이 들어온 전화 응답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녹음된 메시지를 듣자마자 숨이 덜컥 멎어버린다고 해보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우려할만한 사태다.
이쯤해서 샘은 두 팔을 활짝 벌려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헤더의 뒤로 따라붙고, 그녀가 도망을 쳐야 맞는 거 아니야?』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다. 헤더의 뒤를 쫒는 건 뒷전이다. 반대로 꽁무니로 불 붙었다는 식으로 달아나고 있다. 『그런데도 형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있잖아. 이제 슬슬 나도 한계야.』
그러신가요. 한계라굽쇼.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은 딘은 한숨과 같이하여 짧게 다듬은 고슴도치 머리를 위 아래 방향으로 싹싹 문질렀다. 내심 당황했을 적에 곧잘 보이는 그만의 독특한 버릇이다. 손바닥으로 옮겨진 자신의 머리카락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아보는 - 조금은 더럽다 싶은 버릇 역시 마찬가지다. 자, 이제 뭐라고 해보시지? 샘은 어깨를 바짝 세운 채 그가 무슨 말을 할지를 기다렸다.
『있잖아, 새미.』 『응.』 『내가 밖에 나가서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너 혼자서라도 재빨리 장소를 떠야 한다. 날 기다린답시고 시간을 낭비하면 결코 안 된다.』 이게 무어라 씨불렁거리고 있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딘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의자 다리를 찼다. 『샘! 얌마!』 『아까 한 말은 안 들은 걸로 할테니 다시 시작해봐.』 『젠장... 그러니까 혼자가 되면 날 찾을 생각은 말고 바비 아저씨에게 가 있으란 말이다.』 그래? 살짝 걷어차는 것으로도 안 된다면 힘 주어 걷어차는 수밖에. 아까보다 흔들리는 충격이 곱절이었다. 의자 채 몸이 뒤로 벌러덩 넘어갈 뻔했다. 날뛰는 야생 버팔로 등짝에 올라타 굴러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던 신참 카우보이씨는 단박에 안색이 퍼래졌다. 『샘! 형에게 이게 무슨 짓이야!』 『다음 번엔 의자 다리가 아닌 딘을 직접 찰 거야. 신중하게 생각하고 다시 말해봐.』 착해빠진 샘이 거칠게 나오는 건 어디까지나 보통 일이 아니다. 덩치와는 달리 묘하게 계집애 같은 구석이 있어 술취한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와도 거기에 응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는게 그의 특기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온다는 건 그의 머리가 짜증으로 가득 찼다는 증거... 딘은 신중해지기로 했다. 『알았어. 그럼 다시 말할게. 이 형이 용돈 줄테니 좋은데 가서 여자랑 일주일만 놀고 와.』 참으로 신중해졌다. 이번엔 딘이 아니라 샘의 안색이 검게 변했다. 『정말로 발로 찬다... 딘.』 『말로만 재잘재잘 떠들지 말고 진짜로 덤벼보시지, 재키 찬. 하지만 그랬다간 알지? 곱절로 두둘겨주마.』
형제는 장난이 아닌 얼굴을 하고 서로를 죽을 기세로 응시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귀신처럼 변한 형에게 반죽음 당할 것을 각오하고 - 주여, 어린 양을 보호하소서 - 오른발을 들어 딘의 다리를 거세게 찼다. 신장의 차이가 있으니 당연히 다리 길이에서도 차이가 난다. 이쪽에서 맞았다고 반사적으로 다리를 뻗어봤자 샘의 몸뚱이까지 닿지 않는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는 딘은「오른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때린다 - 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준다」라는 작전은 진작에 포기하고 의자를 뒤로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이 긴장하여 권투 선수의 가드 자세를 취하는 걸 노려보며 소매춤을 걷어 올렸다.
닭 싸움의 첫 번째 공식,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상대를 기를 꺾어라. 『넌 오늘 나에게 죽었어, 새뮤얼 윈체스터.』 빠르게 간격을 좁히면서 샘의 옆구리를 향해 주먹을 찔러넣었다. 그걸 샘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무릎을 올려 막았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들어올린 동생의 다리를 재주껏 잡아챈 딘은「뛰어봤자 네놈은 벼룩이다」라는 표정으로 장딴지를 교묘히 끌어올렸다. 한쪽 다리로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된 샘은 당연히 비틀거렸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딘은 동생의 왼뺨을 향해 펀치를 찔러넣었다. 아파하는 표정이 상당히 맘에 안 들지만. 꾹 참고 팔꿈치로 다시 샘의 가슴을 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한 박자 숨을 몰아쉰 샘은 뜻밖의 괴력으로 딘의 오른팔을 움켜잡았다. 깜짝하는 사이에 등뒤로 팔이 돌아갔다. 독특한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면서 아이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 있으면 형의 체면이 살지 않는다. 봉쇄당한 팔은 냅두고 발을 뒤로 걷어차 샘의 정강이를 때렸다. 동생이 악 소리를 냈다. 붙잡힌 부분이 느슨해졌다. 기세를 몰아 체중을 실어 동생의 발을 다시금 짖밟았다. 죽을상을 하고 있는 샘이 이번에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위쪽에서 아래로 왼팔 스트레이트 펀치를 길게 찔러넣었다.
『이 나쁜 놈아! 아빠보다 더 나빠! 형은 나빠! 진짜 진짜 고약해!』 맞은 부위를 움켜쥐고 샘이 악을 썼다. 『그래! 난 동생이나 패는 나쁜 놈이다! 그래서 뭐. 코피 나게 다시 맞아볼텨?』 『왜 나에게 말을 안 해주는 거야~!!』 이럴 적엔 왜 때리는 거냐고 말해야 앞뒤 문맥이 맞는 거 아닐까. 딘은 주먹을 휘두르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대학에서 공부까지 한 놈이 틀린 문장을 뱉고 있다. 왜 때리느냐고 항의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아래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나쁜 놈아! 나쁜 놈아! 말을 왜 안 하느냐고~!! 왜 나에게 말을 안 해!』
맞아서 억울한게 아니다. 그까짓 것, 침을 살짝 바르고 하룻밤 자면 그만이다. 코를 훌쩍이던 샘은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는 딘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생각해봤다. 그들이 도망치는 까닭을. 그 첫 번째. 그들 형제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 증거 인멸을 하고자 죽이려 들고 있다. 「뭐 하러?」소리가 나왔다. 그들이 재판장에 나가 증인석에 올라가 성서에 손을 올릴 것 같냐. 그럴 일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라고 애원해도 못 한다. 딘은 현재 살인 용의자로 경찰에 수배되어 있다. 증인석에 올라가려다 감옥부터 가게 생겼다. 다음으로 생각해낸 것은「복수」였다. 『그치만 우린 나찌가 아니잖아.』 하여 두 번째 가설은 두고 볼 것도 없이 기각. 세 번째로 생각해낸 것은... 샘은 딘을 벽으로 몰아붙였다. 『원하는게 아직 우리에게 있는 거야. 그렇지? 오쿠림바의 주문... 아직 형이 갖고 있는 거 맞지.』 『어허라, 샘. 진작에 빼앗겼다고 내가 말 안 했던가.』 『그렇다면 전부를 빼앗긴게 아니라 일부만 빼앗긴 거야. 내 추측이 맞지? 그렇지? 그렇잖아!』
여기까지 몰아붙이는데「절대로 그건 아니란다」라고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딘은 옷깃을 붙잡은 샘의 팔을 뿌리치며 억지 웃음을 지었다. 『널 위해서야.』 그리고 세 살짜리 아기처럼 울먹거리는 동생을 설득하려 했다. 『널 보호하기 위해서야.』 순간 팍,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딘은 눈을 휘둥글 떴다. 동생의 주먹이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똑바로 박혀 있었다.
으스스하다. 저걸 정통으로 맞았다간... 샘의 어두워진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보며, 절대로 쫄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딘은 또 한 번 주장했다. 『이봐, 날 보라고. 새미? 날 봐. 난 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한단 말이다.』 『이건 날 보호하는게 아니야. 말려 죽이는 거지!』 『날 믿어.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다. 넌 잠자코 있기만 하면 된다고.』 『어떻게 형을 믿어! 모르는 여자랑 하룻밤 자면서 콘돔도 안 쓰는 형인데.』 『썅! 빼고 나서 사정한다니까!』 『칠푼이!』 『멍청이.』 딘은 길고, 길고, 기다란 숨을 내쉬며 동생의 잘난 머리를 손바닥으로 찰싹 후려갈겼다. 『알았어. 다음부턴 꼭 콘돔 낄게. 맹세하마.』 뭔가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울기 직전의 동생을 달래고자 그렇게 말하고 보는 딘이었다.
Posted by 미야
2007/02/24 20:49
2007/02/24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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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딘 윈체스터 러브에 몸부림치는,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도 살짝 눈 감아주는 당신의 멋진 센스~!! 크아냥! ※
응접실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마이클 프레데닉은 기습적으로 주먹을 쥐고 딘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아직 외치지 않았는데 권투 글러브를 낀 팔을 휘두른 격이다. 아니면 휘슬을 불기 전에 프리킥 공을 찼다. 반사신경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이런 건 못 피한다. 미처 대처하지 못한 딘은 코를 움켜쥐고 아이쿠 소리를 냈다.
『이봐요!』 비틀거리는 딘을 재빨리 자기 등뒤로 감춘 샘은「우리 형은 당신이 때려도 되는 동네 북이 아니다」라는 걸 명확히 하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 번 더 손찌검을 하는 날엔 맹세코 죽여버리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는 일국의 장관이나 대통령을 장기말처럼 손에 쥐고 들었다 놓았다 하며 가지고 놀던 인간이다. 기껏해봤자 가짜 기자증이나 들고다니는 애송이의 협박에 기가 죽을 리 없었다. 샘의 키가 자칫하다간 천장에 닿게 생겼다는 건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는 눈치다. 흥분한 곰이 씩씩거리며 독선적 분노를 드러내든 말든, 혐오감에 가득차 더러운 걸레 쳐다보는 듯한 시선은 마지막까지 바뀌지 않았다.
『젠장... 더럽게 아프네!』 생각보다 노인의 주먹이 매웠다. 얼얼한 콧잔등을 어루만지다 말고 딘이 푸념했다. 『나이가 칠순이면서 평소에 무슨 운동을 하는 거요. 두 번 쳤다간 사람 잡겠수.』 그 말에 갸름하고도 거만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경멸의 눈초리가 노골적으로 딘을 향해 쏟아졌다. 『입 다물 기회를 놓치지 말게. 정말로 사람을 잡는다는게 어떤 건지 보여줄까. 저 두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네! 나아가 당연히 몰랐어야 했고! 그걸 단박에 망쳐놓다니. 자넨 생각이 있는 건가, 아님 없는 건가! 할 얘기와 하지 말아야 할 얘기가 뭔지 구분도 못 하나?!』 그리고는 혀를 사용해 먼젓번의 주먹질보다 훨씬 더 무서운 타격을 가했다. 『후레자식 같으니!』
듣고 있던 샘은 움찔 몸을 떨었다. 저질스런 쌍욕을 곧잘 입에 달고 다니는 딘이지만《후레자식》이라는 욕 만큼은 결단코 입에 담지 않았다. 아울러 누군가 그 욕을 퍼붓기라도 하는 날엔 눈이 뒤로 돌아간 모습으로 광분하여 날뛰었다. 실제로 그들은 엄마 없이 홀애비 밑에서 자랐고, 따스함을 잃어버린 가정에서 엉망진창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로 그 객관적인 사실이 날카로운 갈고리 발톱이 되어 가슴을 후벼팠음이다. 상처가 견딜 수 없이 쓰라려 견딜 수 없었다. 정학 3주가 다 뭐라냐, 입이 걸었던 체육 교사가「후레자식」운운하자 들입다 발길질을 날려 쓰러뜨린 적도 있다. 딘에게 있어 그것은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성당 담벼락에「당나귀 자지, 너네 엄마 보지」라고 낙서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누군가 그 말을 꺼내기라도 하는 날엔 이유 불문하고 가차없이 응징하고 보았다.
이번에도 나이 칠순의 노인을 거꾸로 들어 패대기질을 치지는 않을까 싶어 샘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정말로 던진다면... 크아, 후환이 두렵다. 하지만 딘은 묵묵히 참았고, 그 사실이 샘을 놀라게 했다. 흘깃 옆을 보니 형의 코가 루돌프 사슴코처럼 새빨갛다. 그런데도 딘은 자기가 맞은게 별 대수롭지 않다는 투다. 여기서 유추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 한 가지. 딘이 드디어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가 아니라, 샘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이리로.』 마이클 프레데닉은 잠자코 자기 뒤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남의 집이었음에도 여러 번 방문하여 내부 구조가 어떻다는 걸 훤히 꿰고 있는 듯했다.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는 일 없이 곧장 움직였다. 일본 우키요에 스타일의 화려한 붓꽃 그림이 그려진 색 유리창을 지나 좌측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부채를 쥐고 있는 로코코 풍의 그림 접시가 일렬로 놓여진 장식장을 똑바로 보며 계단턱을 밟았다. 그 와중에도 집안은 기이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뭐랄까, 모두가 숨 죽여 그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방해받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가세.』 독촉을 받은 형제들은 어느새 잰걸음이 되었다.
『음... 당신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구먼요.』 딘의 물음에 마호가니 재질의 서재 문을 한쪽 팔로 밀다 말고 그가 눈을 흘겨떴다. 『지금 농담하나, 이 사람아! 그걸 내가 어떻게 다 아나. 남들보단 조금 더 알고 있을 뿐으로 일의 진상은 나 역시 모르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 찬 방이었다. 구석으로 서가 높은 곳을 사용할 적에 이용하는 발판이 보였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여러 개 놓여졌다. 다만 채광을 위한 창이 대단히 작아 방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편에 속했다. 책장에 빽빽이 꽂힌 책들은 실제로 사람 손을 타며 읽혀지는 것들이라기 보다는 수집의 의미로 한 곳에 모아둔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서적 특유의 희미한 방부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게중에서 자주색 가죽으로 정장된 몇 권의 책들은 대단히 진귀해 보였다. 화려한 금박은 기계로 찍어낸 것이 아니고 장인이 손으로 손수 금물을 붓으로 찍어 그린 것들이었다. 분위기로 보아 대단히 난해한 철학 서적이거나 어려운 인문학 책이려니 생각한 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제목을 읽었다. 그리고는 곧 짜게 식었다.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워터십다운의 토끼들》이었다.
마이클은 자기집 서재인양 익숙한 몸동작으로 달각 소리를 내어 스탠드 조명의 줄을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조명이 팽팽하게 날이 선 신경을 다소 완화시켜 주는 느낌이었다. 가까운 걸상을 턱짓으로 가리킨 뒤, 가까운 쪽의 의자를 끌어당겨 본인부터 앉았다.
『신분상 모사드와 CIA에 연줄이 있어. 싫든 좋든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게끔 되어 있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실크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며 괴로운 얼굴을 했다. 『나보다 세 살 어렸던 알렉스 루치노바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해였으니 1971년이군. 당시에 시몬 비젠탈 센터(국제 유대인 인권단체) 쪽으로 이상한 소문이 돌았는데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는 나치 헌터 중에 현상금엔 일절 관심을 드러내지 않고「처형」을 하는 자가 있다는 거였어.』 손가락으로 이마 중앙을 가리키는 동작은 아마도 그곳에 구멍이 뚫렸다는 의미일 거다. 그것도 두 번을 연달아 찍었으니 총알 구멍도 나란히 두 개라는 소리다. 확실히 처형식이다.
『나치... 헌터요?』 그들에겐 다소 생소한 단어였다. 알아듣기 귀찮은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겠거니 지레짐작한 딘은 아예 귀를 막아버렸고, 샘은 손바닥을 마주비비며 우물거렸다. 전범 재판은 어쩌고? 마이클 프레데닉은 그런 샘을 보리차를 맥주로 알고 마시는 얼간이로 취급했다. 『이래서 철부지 코카 콜라 족속들은 맘에 영 안 든다니까. 이보게! 죽음의 천사라고 불리웠던 요제프 멩겔레*가 교수형을 받았던가? 아니잖아. SS장교 중에 재판을 피해 달아난 자가 모두 몇인지 아나. 마틴 보르만*이나 하인리히 뮐러* 같은 자는 여전히 그 행방을 몰라. 독일이 분할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난민 행렬에 교활하게 끼어들어 신분을 감춘 자들만 수 천이 넘어.』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이들을 사냥하는 팀이 결성되었다. 사재를 털어 나치 헌터의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도 생겨났다. 후원금을 모으기도 했다.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이를 독려하는 자들도 나왔다. 단, 사적이고 개인적인 복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 룰이었다.
『서른 여덟의 가족을 한꺼번에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손에 칼을 쥐고 싶어하는 법이지. 그러나 너도 나도 칼을 잡고 원수의 목을 치면 사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말아. 증오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코앞에서 봤던 우리들일세. 똑같은 일을 역사적으로 고스란히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피곤한 표정을 하고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노인은 뒷짐을 지고 서가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그의 눈 높이에 꽂혀진 책은《마농레스꼬》가 되었다. 곰삭아 퀴퀴한 맛이 나는 로맨스 소설에 관심을 둔 것도 아니면서 그는 지은이 아베 프레보의 이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룰이 깨졌으니 이목이 집중되었지. 그래서 모사드가 개입했네.』
특수 요원이 망원 렌즈를 사용해서 룰을 어긴 나치 헌터의 모습을 찍어 상부에 보고했다. 별 감흥 없이 사진을 들쳐보았던 마이클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극도의 어지럼증에 굴복하여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비서가 큰일 났다고 소리를 지르며 한 걸음에 달려왔다.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 사진! 결코 남에게 보여서는 안되는! - 그래서 의사를 부르겠다는 걸 억지로 만류하고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손바닥으로 부채질부터 했다. 모두에게 나가라고 야단을 쳤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다섯 잔을 마셨다. 맙소사.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덥지도 않은데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고개를 비스듬이 돌린 채 엉뚱한 곳을 응시하던 사진 속의 여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얼굴이었다. 『사진을 처음 본 날짜까지도 잊혀지지가 않아. 1972년 2월 8일, 시각은 17시 5분이었어.』 정말로 그녀가 헤더일 리 없다고 되풀이하여 되뇌였다. 비슷한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헤더의 생존한 가족들과 친척들을 일일이 머릿속에서 떠올려봤다. 그러길 1시간, 그는 사진 속의 소녀가 헤더와 혈연 관계에 놓인 다른 사람이라는 가정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외모가 쌍둥이처럼 똑같았다는 점과는 별개로... 여자의 오른손은 손가락이 여섯 개였다.
손깍지를 끼고 그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난 연락을 받았단 말이야.』 『연락이오.』 의외다. 개인적으로 연락까지 받았다니. 딘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마이클 프레데닉은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줄줄 외웠다. 『1972년 8월 23일, 수요일. 14시 20분. 우리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를 적었네.「뾰족 구두」와「녹색 구름」... 그건 배급용 빵을 훔칠 적에 서로 주고 받았던 암호일세.』 껌을 짝짝 씹던 길거리 처녀가 봉투를 은근슬쩍 자동차 유리창 속으로 들이밀었다. 암호를 한 눈에 알아본 그는 크게 당황하여 누가 보낸 거냐고 물었다. 여자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곤 너무 높아 위태로워 보이는 빨간색 하이힐을 따각거리며 고층 건물의 그늘 속으로 총총 사라졌다.
즉석에서 뜯어본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노출된 자신에 대한 정보를 그가 가진 권한으로 모두 지우라는 부탁이었다. 핏기 가신 고개를 들자 먼 발치에서 그녀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여름의 햇살 아래서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입속으로 정제되지 않은 소금의 맛이 느껴졌다. 무섭게도 헤더는 수용소에서 보았던 열 네 살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이를 전혀 먹지 않았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하지만 언 데드가 되었다고 하면 설명되어지긴 한다. 그렇다고 해도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로 서있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태양을 전혀 거리끼지 않는 언 데드라... 매우 특수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설과는 달리 언 데드가 햇빛을 보고 타죽는 일은 없다. 그래도 작렬하는 태양 아래선 천 년의 수명을 누린 뱀파이어도 똑바로 서있지 못 하는 법이다. 『틀려, 새미. 주술로 되살아난게 아니야.』 샘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를 단박에 꿰뚫어본 딘이 고개만 살짝 돌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잔 새파랗게 살아 있었다고.』
이쯤해서 딘은 가장 궁금해하던 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자주 연락을 했던 거죠.』 『자주? 자주라는 말을 쓸 수는 없지. 1972년부터 2006년까지 모두 합해서 겨우 다섯 번이었어. 매번「뾰족 구두」라고 발송인을 밝힌 봉투가 왔고, 안에는 이쪽에서 답장을 부칠 사서함 주소가 들어가 있었네. 사서함 주소는 매번 달랐고 요구하는 것도 그때그때 달랐네. 괜찮은 정보국 요원을 소개해달라는 것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거액의 돈을 부쳐달라고도 했네. 난 아무 소리 않고 시키는대로 했지.』 『헤에, 당신... 직책을 이용해서 그녀의 나치 헌터 일을 도왔군요.』 『닥치게! 내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했을 걸세! 나, 나는... 나는!』 노인이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안색이 창백했다. 그리고 이마가 여전히 번들거렸다.
『화낼 것 없어요. 당신을 비난하려는게 아니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연락이 온 것은?』 『2006년 12월 28일.』 『이번엔 무엇을 요구하던가요.』 『미하일 요하넨버그라는 사내의 사회보장 번호와 주소. 그리고...』 『그리고?』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용무라고 하면서 딘 윈체스터라는 자에 대한 정보를 정중히 부탁했네. 내가 어떻게 자네의 본명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응? 자칭 주간 월드뉴스의 스탠리 플래니건 기자 나으리?』 딘은 당황해서 한 박자 느리게 호흡했다. 『겍!』 『그래서 말인데...』
표정을 바꾼 그가 딘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여 이리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딘은 쓴 표정으로 얌전히 시키는대로 했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두 사람이 입술만 움직여 무어라 소곤거렸다. 제법 심각한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놀란 표정의 딘이 잠시 고개를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요?!』 마이클이 쉬, 소리를 내며 도둑이 개 꾸짖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맞댄 두 사람의 소곤거림이 재차 이어졌다. 뒤에서 멀뚱 보고만 있던 샘은 울컥해서 호주머니로 손을 넣고 뺨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러든 말든 딘은 경직된 표정으로 마이클 프레데닉과 눈을 맞췄다. 『그게... 진짜요?』 『진짜일세.』 『.......... 이런 미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딘의 모습은 5층 베란다에서 추락한 사람처럼 흉흉했다.
『딘? 딘! 왜 그래. 그가 뭐라고 말했어? 무슨 내용이었는데 그래?』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치는 딘의 옷자락을 붙잡고 샘이 질문했다. 그런 동생을 죽어라 쏘아보며 딘이 펄떡대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옆에서 쫑알거리지 좀 마랏!』 『딘? 그가 뭐라고 했냐고. 응? 뭐라고 했어?』 『젠장! 말해줘? 말해줘?! 오리건주에서 만난 베로니카라는 이름의 하룻밤 불장난 상대가 내 아이를 덜컥 임신해가지곤 나라는 인간을 찾는답시고 사방을 쑤셔대고 있댄다!』 『에엑?! 그, 그...!! 그런!』 뿌리 깊은 혐오감과 즐거운 기대감이 엉망으로 뒤섞여 샘은 억 소리를 냈다. 형이 곧 아빠가 되어요. 나는 삼촌이 되는 거예요. 어쩌죠. 우린 제대로 된 직업도 아직 없는데. 『멍청아~!! 거짓말이다! 그런 뻔한 바보 같은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거냣?!』 흥분한 것이 분명한 딘은「어디라도 좋으니까 핵폭탄아 떨어져라!」식의 얼굴로 집밖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07/02/22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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