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리가 편안한 스니커즈를 찾아신고 외출할 기색을 보이자 딘도 눈치껏 셔츠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샘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다음에 던질 공은 타자 왼편으로 바짝 붙여서 직구」를 은밀히 신호하는 포수처럼 굴었고, 마운드에 서서 글러브에 낀 공을 하릴없이 만지작거리던 딘은「10-4 (알았다, 오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딘이 리를 따라나서면 샘은 혼자가 된다. 고도로 훈련된 특수기동대 대원을 맨손으로 제압한 적도 있는 녀석이지만 딘은 그런 것으론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그때는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알게 뭐람. 샘은 의외로 허점이 많다. 겨드랑이를 간지르면 깔깔거리고 웃다가 이내 호흡곤란을 일으키곤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다. 그깟 간지럼 하나만으로 털썩 쓰러지는 약골을 뭘 믿고 내버려둘 수 있느냔 말이다. 딘은 소중한 동생이 맛있게 먹기만 하면 그만인, 차려놓은 밥상이 되는 걸 결코 원치 않았다.
그래도 의리라는게 있다. 딘은 겉옷을 여전히 손에 움켜쥔 채 가만히 제안을 해봤다. 『셋이서 같이 움직이면?』 『man. 나는 지금 24시간 할인 마트로 느긋하게 쇼핑을 하러 가는게 아니거든.』 카메라와 깃발을 든 단체 관광객도 아니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촌스러 - 문 손잡이를 움켜쥔 리는 거절의 의미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갑작스런 돌풍이 유리창을 흔들어댔다. 어쩌면 소낙비가 내릴지도 모르겠다. 음산한 밤이었다. 문단속 겸 배웅을 나서면서 딘은 일부러 목소리를 작게 했다. 『에그 맥머핀 샌드위치와 콜라가 먹고 싶어.』 리는 화를 냈다. 『내가 식당 웨이츄리스로 보이냐! 어디다 대고 주문이야! 항문에 체온계 꽂아버린다.』 그 엄청난 협박을 짐짓 무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음... 그러니까 죽은 자의 피가 필요해서 나가는 거지? 그렇담 병원 영안실보단 차라리 장례식장을 노리는게 나아. 방부처리를 하면서 시신에서 뽑아낸 혈액은 하수구로 그냥 버리지 않고 따로 생물학적 오염 폐기물로 분류해서 모아두거든. 어디에 보관하는지만 알 수 있다면 바로 자물쇠를 따고 갖고 나오기만 하면 돼.』 예기치 못한 훈수에 리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흘겼고, 딘은 그 제스츄어를「너는 지금 나를 한참 아래의 바보로 취급했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긴, 이런 식의 참견은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참치 뱃살의 훌륭한 풍미와 생선회를 제대로 즐기는 법에 대해 일식 요리사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쓸데없었다. 『집이나 잘 보고 있어. 누가 와서「엄마 계시니?」하고 물으면 모른다고 해. 알았지?』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참붕어와 금붕어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게 되면 그때 가서 다시 덤비는게 좋겠다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잠그렴.』 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에 달린 쇠사슬 고리를 채웠다.
이런 것이 가장 싫다. 동이 틀 무렵까지 딱히 할 일이라곤 총의 실린더를 청소하고, 칼날을 닦고, 커튼 너머의 어둠을 노려본 뒤, 다시 총의 실린더를 청소하는 것밖엔 없다.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밤, 그를 에워싼 공기는 유통기한을 넘긴 오래된 곤약처럼 묵직한 무게감을 가졌다. 딘은 탄창을 뺀 권총의 방아쇠를 시험삼아 찰칵 소리내어 당겨보았다. 등이 근질거렸다. 버릇대로 텔레비전을 켜고 싶었다. 그러나 소음 때문에 주의가 흐트러지는 건 위험했다. 이런 때일수록 작은 기척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인내심이 그가 가진 최대의 미덕이 아니라는게 그저 슬플 뿐이다. 한숨을 쉬며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까지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몸을 웅크리려는 충동을 제어하면서 먼젓번 행동을 고스란히 반복했다. 총의 실린더를 청소하고, 칼날을 닦고... 또 일어나 잠에 취한 수험생처럼 방안을 어정어정 맴돌았다. 불안하고 괴로운 마음에 아무래도 침착하게 있기 힘들었다. 오른손에 낀 반지를 무의식중에 빙글 돌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끼워넣었다. 그러고도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자 고개를 들고 망할 인디언이 언제 나팔을 불어가며 습격해오나를 걱정하는 서부시대 개척자처럼 바깥을 살피려 했다.
『형.』 그 부산한 행동을 부드럽게 나무라며 샘이 부르자 딘은 얼른 허리를 숙이고 쓰레기통 속에 들어간 피자 배달 영수증을 쳐다보는 척했다. 하지만 샘은 그런 단순한 연극엔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제발. 동이 틀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침대에 누워 조금이라도 쉬는게 어때.』 싫어 - 딘은 입을 앙 다물고 샘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원래 소리내어 말을 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한 그들이다. 고갯짓이나 약간의 움직임, 이를테면 속눈썹의 미세한 떨림만 갖고도「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책의 줄거리를 설명할 수 있었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는 시늉만 해도 마시고 싶은게 그냥 물인지, 뜨거운 커피인지, 아니면 차갑게 식힌 맥주인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샘은 그것이 일종의 축복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입을 열어 대화를 시도할 적마다 쌓이는 미묘한 엇갈림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딘... 불안해?』 『아니.』 『긴장한 것처럼 보여.』 『설마.』 『멍든 곳은 어때.』 『이제 다 나았어, 새미. 하나도 안 아파.』 『그러지 말고 약 바르자. 아까도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잖아.』 『오해야. 싱크대 위를 기어가는 무지하게 큰 바퀴벌레를 봐서 그런 거라고.』 어째서 우리 형은 머리로 생각하는 거랑 소리내어 말하는게 완전히 딴판인 걸까. 척 봐도 아니라는 걸 알겠는데 고집스럽게 거짓말만 줄줄 늘어놓는다. 샘은 기분이 언짢아지는 걸 느꼈다. 『딘! 형 앞에 서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 하나뿐인 피붙이라고. 앨런 아줌마나 바비 아저씨가 아니야. 그냥... 뭐랄까, 있는 그대로 솔직해질 순 없어?!』 딘은 눈을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동생의 원망 섞인 시선을 성공적으로 되받아쳤다. 『얌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곰이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이라도 된 기분이 되잖냐.』 『틀려. 그 이야기에 나오는 건 곰이 아니라 늑대야.』 곰이 아니었던 건가. 내심 당황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평점심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나도 알아, 샘. 하지만 늑대만 양을 잡아먹는게 아니야. 곰도 양을 잡아먹는다고.』 『누가 뭐랬어? 형의 말대로 안전한 우리에서 침묵하고 있는 얌전한 양들을 습격하는 건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은 한니발 렉터 박사지.』 차라리 입을 다무는게 낫겠다. 샘은 체념했고 대화는 어색하게 다시 끊겼다.
하지만 샘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딘이 솔직한 태도로「맞아, 난 지금 불안해 미치겠어」라고 대답했다면 자신은 그 사실을 결코 못 견뎌했을 거라는 걸 말이다. 딘은 병에 걸려도 아파해선 안 되었다. 겁에 질렸어도 무섭다고 내색해선 안 되었다. 그는 형이었고, 어른이었고, 샘의 보호자였으며, 정신적 지주였다. 샘은 거대한 지진이 발생해서 로스엔젤레스가 둘로 쪼개어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지언정 자신을 꽉 붙잡고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줄 든든한 존재를 원했다. 기둥을 희망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딘이 해주길 바랬다. 어둠이 결코 무섭지 않다고 큰소리치는 딘은 괜찮았다. 하지만 좁은 어깨를 덜덜 떨어대는 딘은 절대로 괜찮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형은 형 답지 않아.」 「형 답다는 건 그럼 뭐지.」 「깨진 무릎에서 피가 나도 절대로 울지 않는게 우리 형이지.」 결과적으로 딘이 체질적으로 허세를 부리게 된 건 다 샘 때문이었다.
강렬한 후회와 죄책감에 사로잡힌 샘은 진심으로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 딘. 정말 미안해... 다 내가 잘못했어.』 그걸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한 딘이 버럭 화를 냈다. 『이 자식! 역시 날 속였군. 양떼를 습격한 건 곰이 맞았던 거야. 늑대가 아니고!』 아무도 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지 않았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양치기 소년은 밤마다 창틀과 문틀에 뿌려져야만 했던 소금보다 못난 존재였다. 존은 큰 아들에게「거짓말쟁이 소년은 마을에서 쫓겨났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항상 정직해야 하는 거예요」라고 교훈적인 이야기의 결말을 말해준 적이 없다. 대신「동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 샘을 잘 지키고 있거라. 어둠을 주시해라」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것이 존의 굿나잇 인사였다. 동화책은 없었다. 곰이란다. 샘은 그 흔한 동화책의 내용조차 제대로 꿰고 있지 못한 형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측은했고 애처로웠다. 가슴 아팠다. 동시에 배가 뒤틀리게 웃음이 터져나오려 했다. 세상에... 딘은「재크와 콩나무」에서 황금알을 낳은게 거위라는 걸 알고 있을까? 오리나 닭이라 착각하고 있을 거라는데 한 표. 타이틀이 콩나무 이야기라면서 나무 이야긴 속 빼고 어떤 새가 알을 낳았는지를 왜 따져야 하는 거냐 불평을 퍼부을 거라는데 다시 한 표. 내용을 적당히 각색하여 올빼미가 황금알을 낳았다고 둘러대도 딘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적당히 기회를 보아 은밀히 물어올 것이다.「새미, 우리 둘이서 그 미친 올빼미를 잡아 죽이자. 네 생각은 어때. 은탄환을 쓰면 될까?」샘은 형이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야! 웃던가 찡그리던가 둘 중에 하나만 해라. 갑자기 그러니까 무서워진다.』 스냅용 짚백을 던지면서 딘이 다시 야유를 보냈다. 샘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역한 냄새를 풍기는 기름걸레를 마구 흔들어댔다. 『딘은 진짜지 멍청이야.』 『그러는 너는 계집애고.』 딘은 쌍심지를 곤두세우며 양쪽 발목으로 단도를 숨겼다. 그리고 같은 크기의 칼을 동생을 향해 훌쩍 던졌다. 샘은 익숙한 모습으로 무기를 받아들었고, 잘 손질된 칼은 좁은 소매 속으로 순식간에 쏙 들어갔다. 움직임엔 불편함이 없는지 시험삼아 주먹쥔 팔을 안으로 구부렸다 도로 폈다. 생각만큼 편안하지 않았던지 부스럭대며 밸트의 길이를 매만졌다.
『아무튼 그 양치기 소년이라는 아이도 그래. 곰이 나타났으면 얼른 산탄총을 쐈어야지.』 저게 실 없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려지는 거다. 『디-인. 그 발언은 문제가 커. 어린애가 제대로 총질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랑스러워하며 - 정말로 자랑스러워하며 딘은 코를 높게 으쓱였다. 『할 수 있고 말고. 난 열 두 살에 아빠가 보는 앞에서 빈 맥주 깡통을 전부 명중시켰어.』 『그야 형은 특별하니까.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샘은 단어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특별하다는 말에 딘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무려 석 달이나 앞당겨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점수로 치자면 10점에 9.8점이다. 흥분한 나머지 나무 꼭대기까지 단숨에 기어올라간 고양이처럼 입술을 당겨 씨익 웃었다. 벼락이 마을회관을 장식한 시계를 정면에서 때렸고, 맛이 간 시곗바늘이 연기를 뿜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칭찬하려던게 아니다. 원래는「열 두 살에 맥주 깡통에 총질하는 건 정상이 아니잖아」라는 의미로 말을 꺼냈던 것뿐이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였다. 그걸 바보처럼 오해한 딘은 부끄럽다며 시선을 내리깔았고, 헛기침을 했다. 처음으로 무도회장에 나온 소녀처럼 볼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이래선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정정할 수도 없다. 덩달아 샘의 얼굴도 새빨개졌다. 실수로 구멍난 양말을 신었을 때처럼 화끈거리는 열기가 몸을 수직으로 꿰뚫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살았다. 만약 그게 아니었더라면 민망해서 죽었을 것이다. 도어 미러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면서 샘은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을 느꼈다.
『샘.』 도망치듯이 문가로 향하던 동생을 딘이 재빨리 붙잡았다. 설마, 이 마당에 감격의 포옹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겠지... 딘이 몸을 확 잡아채며 안쪽으로 끌어당기자 샘은 숨을 멈췄다. 놀라기도 했거니와 몸을 가까이 밀착시키는 이런 식의 접촉은 낯설었다. 코로 향긋한 비누 냄새가 올라왔다. 그것이 참으로 달다고 느껴져 샘은 당황했다. 『형?』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게 봄날의 풋풋한 설레임을 닮았다는 건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왜 그래.』 딘은 눈을 부릅뜨고 머리뚜껑 열고 정신을 탈출시킨 바보를 야단쳤다. 『이 멍청이! 지금은 새벽 3시야. 이런 야밤한 시각에 노크를 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 밖을 향해「거기 누구세요」라고 물어보려던 건 아니겠지. 아예 날 죽여주세요 노래라도 부르지 그러냐. 불 꺼! 그리고 짐 챙겨! 우린 지금 여기서 당장 나가야 해!』
Posted by 미야
2007/08/04 20:48
2007/08/0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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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엉겹결에 팩스 용지를 두손으로 공손히 받아든 딘은 안구 뒤쪽에서부터 머리 전체로 신속히 퍼져나갈 두통이란 이름의 골칫거리를 확신했다. 하얀 건 여백이고 나머지 까만 건 글자다. 아니, 그 이전에 이거... 글자 맞아? 제일 먼저 떠올린 가능성은 자료 전송 중에 오류가 발생했다는 거였다. 셋팅된 감열지가 구겨졌거나, 전선을 쥐가 이빨로 쏠아대었거나, 아니면 팩스가 삶은 달걀을 잘못 삼키고 딸꾹질을 했다던가, 블라블라. 그러니까 알파벳 A가 Λ처럼 보이게끔 뭉개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ꁂ는 원래 B고, Γ로 보이는 검정의 작대기 선은 C다. 딘은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꺼리며 눈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이건 예전엔 미처 몰랐던 일이다.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등이 땀으로 흥건히 젖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음... 딘은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어쩌면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추정에 의거하여 슬그머니 방향을 돌려 다시 쥐어보았다. 옳거니, 그럼 옆으로 누운 エ는 H다.
자신의 까막눈은 무시한 채 대신 팩스를 보낸 사람의 특별난 괴발개발을 비난하고 보았다. 『이래선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못 알아보겠다. 악필도 보통 악필이 아니군.』 『악필? 고문서 필사가 취미인 안젤로 신부님께 그 말을 전해드리면 무어라 하실지 대단히 궁금하군. 노인네가 쇼크로 심장마비를 일으키면 곤란한데... 그거, 루베 문자야. 읽을 줄 모르나?』 딘은 사막의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처럼 경쾌하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이건 루베 문자지.』 『잘 안다면서 그걸 옆으로 해서 틀리게 들고 있냐?』 리는 그가 글자를 올바른 방향에서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종이의 위치를 고쳐주었다. 이런 제기랄, APPLE의 철자를 처음 배우던 시절로 돌아간 딘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질문을 하나 할게, 딘. 만약에「당신은 바지를 내리고 도로 한 가운데서 신나게 춤을 추어댈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정말로 춤 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 『그야... 지금쯤 라스베가스에서 자기 이름으로 된 쇼를 진행하고 있겠지.』 완전히 정신 나간 대답이었다. 리는 대니 갠슨 극장 무대에서 단체로 바지를 내린 채 마카레나 춤을 추는 관광객들을 상상했던 것 같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자! 한 바퀴 신나게 돌아봅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크게 흔들릴 하얀 엉덩이의 모습까지 떠올린 그녀는 입가를 가리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의 뒷끝은 그리 개운하지 않았다. 현실은 그렇게 우스꽝스러울 리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뻔하지 않겠는가. 음악이 멈추자마자 제정신으로 돌아온 관광객들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른 채 기를 쓰고 쇼의 진행자를 붙잡으려 할 것이다. 난투극을 예감한 그는 마이크를 내던지고 재빨리 달아나려 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흥분한 군중에게 붙잡힐 거다. 주먹이 날아다니고, 총알이 휘고... 그래서 입가를 가린 손을 도로 아래로 내렸을 때엔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머리에 닿았다는 식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인간은「특별한」존재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신에게 택함을 입은 우월한 존재로 숭배받는 경우도 없진 않겠으나 일반적으로 별종은 무섭게 박해받는다. 『나와는 다르기 때문에 무서운 거야. 같지 않기 때문에 없애버리고 싶어하지. 외눈박이만 사는 섬에선 두 눈이 멀쩡한 자는 한쪽 눈이 뽑히게 되어 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도, 동물도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그「특별한 별종」중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딘은 애써 평정심을 가장했지만 눈빛이 흐려지는 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든에게 붙잡혔을 적에 그가 지껄여대던 말이 떠올랐다.
「루이지애나에서 엑소시즘을 하고 있었네. 10대 소녀였지. 뻔한 일이었어. 급 낮은 악마의 짓이었지. 그런데 그 망할 것이 머리를 흔들면서 다가올 전쟁 이야길 하더군. 처음엔 별로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 그냥 멋대로 떠들어대는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거슬리는게 있었어. 그래서 진실을 말하게끔 도구를 갖고 고문해봤네. 덕분에 여자아이는 죽고 말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흥미롭게도 그 악마는 다가올 전쟁에 쓰여질 인간의 병사가 있다는 이야길 털어놓더군. 악마의 편에 서서 싸우는 인간들... 믿겨져? 초능력을 쓰는 놈들이니 정확하게는 인간도 아니겠지만... 하긴 어떤 놈들이 자기 종족을 배신하겠어. 그런데 여기서 가장 재미있는게 뭔지 아는가, 딘 윈체스터. 그 악마가 말하길 내가 그들 중 하나를 알고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샘 윈체스터라는 거였다네.」
주먹이 쥐어졌다. 그 망할 것은 - 고든은 샘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려 했다. 그 순한 사슴 같은 녀석을 폭탄으로... 순간 제어가 되지 않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틀려, 틀려, 내 동생은 정상이야. 착하다고! 무지 예쁘고 귀엽단 말이야! 초능력이 있지만, 괴짜이긴 하지만, 사람 속 터지게 만드는 재주꾼이긴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리의 표정은 한층 더 으스스해졌다. 『하물며 인간도 그런데 뱀파이어라고 다를까?』 인간이나 괴물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며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통칭 오리진이라 불리우는 뱀파이어들은 최초의 뱀파이어인 아세베스와 에티온의 직계라고 믿어지지. 그게 신화이든 전설이든 이들이 매우 특별한 존재인 건 확실해. 하늘을 날거나, 시간을 멈추게 하거나, 축지법을 쓰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들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들의 어머니야. 그들이 명령을 내리면 싫든 좋든 그 누구도 거스를 수가 없어. 달리는 버스 앞으로 몸을 내던져라 명령하면 그대로 하게 되지.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뛰어내려야 하는 거야.』 딘은 심각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종의 최면술 같은 건가.』 『마술 박사의 최면술이면 박수 두 번 짝짝 치면 깨어나게. 그보단 훨씬 더 심각하지. 자아라는게 깡그리 묵살되버리니까. 아까 우리를 습격하던 뱀파이어들의 표정 봤지? 뇌가 얼마나 휘저어졌음 그 망할 것들이 자기 팔이 떨어져도 아프다는 감각조차 못 느끼잖아. 나중에 깨어나서「이런 씨팔!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내 팔이 갑자기 어디로 갔지?!」이럴 걸 생각하면 끔찍스럽지 않냐.』 딘은 끝내주게 단 사탕을 한꺼번에 다섯 봉지나 먹어치운 듯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 소동이 전부 다...』 『맞아.』
이쯤해서 리는 딘이 쥐고 있는 감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리진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혈통이야. 그래서 한 가계에서 오리진이 나타나면 그 집안은 지속적인 감시 및 관리를 받게 되고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지. 태어나자마자 죽이거나 그 능력을 신속히 봉인해야 하니까. 즉, 필요에 의해 족보를 가지게 되는 거야. 네가 지금 보고 있는 루베 문자는 기원 전부터 내려온 뱀파이어들의 문자이고, 그건 한 집안의 가계도 사본이야. 설명을 듣고보니 느낌이 딱 오지? 첫 번째 줄이 아버지와 어머니라면, 두 번째 줄은 아들과 딸, 세 번째 줄은 손녀와 손자들, 네 번째 줄이 증손자와 증손녀뻘이 되는 거야. 비유하자면 위로 가면 갈수록 관뚜껑 안에서의 세레나데이고, 아래로 가면 갈수록 슈퍼마켓에 진열된 신선한 등 푸른 생선인 셈이지.』 맨 아랫부분을 보라며 그녀가 눈짓했다. 『그 중에 네가 아는 이름이 하나 보일 거야.』 『설마...』 『응. 그 설마야.』
순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손이 감열지를 잽싸게 채갔다. 『이게 루더의 가계도라고요?』 『샘!』 『이상하네요. 루더에겐 형이 하나만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걸 보면 하나가 아니라 둘이네요. 그에겐 형제가 둘이예요.』 『샘!!』 샘은 자신의 이름이 왜 반복하여 불리워지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훔쳐온 옷가지와 구두, 장난감을 마당에다 잔뜩 쌓아놓은 개가「내가 뭘 잘못했는데요?」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 같아 딘은 기운이 빠졌다. 이래선 커피 탁자를 거꾸로 뒤엎고도「무슨 문제라도?」반문하는 격이었다. 그는 철부지 대형 강아지의 목걸이를 잡아당겨서 뒷뜰에 단단히 묶어둘 필요성을 느꼈다. 『귀 뒤로 비누 거품이 그대로잖아! 제대로 씻어야지. 거기다 왜 물기도 안 닦고 나온 거니. 너 때문에 바닥이 젖고 있잖아. 맙소사, 걸레... 아니, 그보단 다시 욕실로 들어가야겠다.』
트렁크 팬츠 차림새의 강아지는 불만에 차 컹컹 짖는 소리를 냈다. 『빨리 나오라고 바깥에서 아우성을 칠 때는 언제고! 덕분에 씻는둥 마는둥 했단 말이야!』 『누가 그런 식의 아우성을 쳤다는 거니. 이 형은 제대로 씻으라고 말했어.』 『그게 아니라「서둘지 않으면 엉덩이를 차주겠다」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아예 각색을 해라.』 어쩐지 약이 바짝 올라 동생의 넓은 등짝을 팡 소리가 나게끔 해서 때렸다. 그리곤 곧 후회했다. 등쪽에도 비누 거품이 남았던지 미끌거리는 것이 손바닥으로 옮겨왔다. 『이걸 봐!』 딘은 너 때문이라며 소란을 피우며 비누가 묻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끄러! 너희들 나이가 일곱 살이냐?!』 물기로 젖은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카펫을 노려보던 리는 이를 악물었다. 『싸우려면 나 죽고 난 뒤에 해! 난 지금 폭발 직전이야. 둘 다 욕실로 들어가!』 아기였던 시절에 메리를 잃은 샘은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없다. 하지만 딘은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걸 기억했다. 반사적으로 딘은 고개를 움추렸고, 내리꽂는 벼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자 얌전히 바닥을 기었다. 『이 말썽꾸러기!』 엄마의 화장품을 서랍에서 꺼내 몰래 입술에 발라봤을 적에 엄마 메리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립스틱 맛은 무지 이상하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아들을 화난 눈초리로 쳐다봤었다. 딘은 화장대를 어지럽혀 미안하다고 서둘러 사과했지만 메리는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뭐라고 대꾸할 짬이 없던 거였지만 딘은 너무 어려서 그걸 몰랐다.
그가 샘의 팔을 꼭 잡고 욕실로 향했을 적에 샘은 적잖게 놀란 듯 짧게 아 소리를 냈다. 그리고 딘이 문을 잠그지도 않고 옷을 훌렁 벗기 시작하자 더욱 놀라서 앗 소리를 또 냈다. 어디다 시선을 두면 좋을지를 몰라 한참을 난감해하던 샘은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어쨌거나 곳곳에 남은 샴푸의 거품을 다시 닦아낼 필요성은 있었고, 샘은 형의 나신을 보는게 아버지의 나신을 보는 것처럼 불경스러운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고, 다시는 예전처럼 머리를 똑바로 들지 못할 거라는 바보스런 생각이 들었다. 혁대를 끄르고 바지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샘은 물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기세로 세면대로 아예 얼굴을 박아댔다.
『틀려. 루더에겐 형만 둘이 있었던게 아니야. 기록을 보면 형이 하나고, 누나가 하나야.』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온 샘이 꽥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벌컥 열어젖힌 문 가장자리에서 리가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샤워기를 틀고 있는 딘의 뒷모습에로 꽂혀 있었다. 『무, 무, 무슨...!! 문 닫아요!』 『반응이 그게 뭐니. 어린애들 벗은 몸에 발정할 정도로 난 막 나가지 않았어. 그나저나 얘기를 계속할까.』 이쪽의 동의를 채 구하지도 않고 리는 하던 말을 맘대로 계속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샘을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곤 활짝 열려진 문에 등을 기댔다.
『열 두 살 위의 형의 이름은 에브. 젱킨스 영감네 일족이 10년에 걸쳐 추적하여 잡아죽인 바로 그 뱀파이어겠군. 그런데 여기에 보면 그 에브 말고 삼 십년 터울의 누나가 하나 더 있는 걸로 나와. 와우, 서른 살이나 위야. 이름은 게지나고 이게 맞다면 그녀가 이 가계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핏줄일 거야. 거기다... 흐음, 이름 위로 봉인을 의미하는 기호가 그려져 있어. 그녀가 바로 너희들을 노리는 뱀파이어고, 오리진이야.』
머리에 비누를 문지르다 말고 딘이 에취 재채기를 터뜨렸다. 총성이라도 들었다며 그 앞에서 샘이 펄쩍 뛰었다. 『정확히「봉인」은 어떤 걸 의미하지?』 리는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죽이지는 않고 능력을 내지 못 하게끔「처리」를 했다는 의미지.』 『처리라고 하면?』 『글세. 직접 본 적이 없어 무어라 하진 못 하겠군. 말을 하지 못 하게 성대를 잘랐을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협적이다. 그리고 봉인은 완벽하지도 않았다. 딘은 정신이 번쩍 들게 찬물을 틀었다. 순간 멍자국 선명한 가슴이 욱씬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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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9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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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그의 인생은 화약 냄새 자욱한 연옥이었다. 매일이 투쟁의 나날이었다. 상대방이 주먹을 날리면 딘은 그때마다 발끈해선 맞은 것 이상으로 때리고 보았다. 상대가 노인이든 마피아든 입장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보복은 철저하게 하고 보는 것이 철칙이었다. 왼뺨을 맞으면 상대의 오른뺨을 올려붙였다. 엉뚱하게도 그는 이것이야말로 정의라고 생각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하룻밤 자고나선 훌훌 털고 다 잊어버려야지」생각하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끙끙 앓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거의」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고함을 지르며 덤벼든 인간이 제3자가 아닌 샘이었을 경우엔 세 번에 한 번 꼴로 눈 감아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제끼리의 주먹다짐을 빼고나면 그가 맞대응을 포기한 적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그치만 여자가 따귀를 때린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폭력이라기 보다는 감정의 빅뱅에 더 가까운 그 행동 앞에선 이거다 싶은 답이 없었다. 여자들은 얻어맞은 당사자보다 더 아픈 얼굴로 흐느껴 울었고, 몸을 시계추처럼 흔들어댔고, 수그리고 앉아 입술을 깨물곤 했다. 아무리「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지만 그런 여자를 상대로 손찌검을 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어깨를 뒤로 떠미는 것 정도밖에 - 그것도 힘 안 주고 살살 미는게 전부였다. 그러면서 딘은 그녀들이 스스로 울음을 그치기를 간절히 바랬고, 기적은 모세가 홍해를 둘로 가르는 빈도로 일어났다. 다행이라면 태어나 지금까지 감정적으로 격앙된 여자로부터 따귀를 맞은게 딱 여섯 번밖에 없... 아니, 방금 전의 것까지 횟수로 넣어 딱 일곱 번밖에 없다는 거랄까.
얼얼한 통증을 호소하는 뺨을 감싸쥐고 펄쩍 뛰었다. 손바닥 도장이 찍힐 거라곤 짐작도 못했기에 놀라움은 컸다. 불온한 공기를 눈치챈 샘이 비누를 들고 욕실에서 뛰쳐나올까봐 큰 소리도 못 내고 그저 도둑이 개 꾸짖듯 입만 뻥끗거렸다. 《왜 때려!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이 병신 같은 새끼. 그걸 몰라서 되물어?》 동시에 짝 소리가 나게끔 두 번째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반대편 뺨이었다.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맵고 활활 달아서 눈물이 찔끔 새어나왔다. 《아읏! 이게 무슨 짓이야!》 《정신 차리라고 때렸다. 이제 정신이 좀 드냐? 아님 더 때려줘?》 《망할 년. 내가 언제 흰자위를 드러내놓고 기절이라도 했다든?!》 《눈 뜨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그럼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이리 가까이 와. 이참에 내가 확실하게 정신 번쩍 들게 해줄게. 손가락 마디 두 세 개 정도 부러뜨리면 되겠지. 싫든 좋든 머리에서 스파크가 확 튈 거야. 어디보자. 오른손을 망가뜨리면 당분간 곤란하겠지? 자! 그러니까 왼손으로 타협을 보자고. 오케이?》 《리!》 《얼른 목소리 낮춰, 이 등신아! 샘이 안에서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무엇입니까. 수학입니다. 그녀가 일반론에 의거하여 눈짓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그 의견을 결코 묵살할 수 없었던 딘은 울분을 억지로 삭히며 짐짓 뒤돌아 섰다. 『샘! 대충하지 말고 빡빡 잘 씻어! 알았냐?!』 안쪽에서 무어라 빠르게 말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코흘리개 어린애인줄 아느냐, 짜증나게 굴지마라 등등의 내용인 듯 싶었다. 확신은 할 수 없었다. 귀 기울여 들은 것도 아니거니와, 타일이 부착된 매끄러운 벽면에 여러번 반사된 단어들에선 자음이 죄다 빠져 있었다. 따라서 의미불명의 웅웅웅, 왕왕왕에서 약간 사정이 괜찮았을 뿐이었고, 그 결과 워너 브라더스의 벅스 버니 만화에 출연하는 멍청한 오리 대피 덕이 비음을 섞은 특유의 목소리로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과 매우 흡사했다. 별 재주가 없는지라 딘은 텔레비전 만화채널로 시선을 고정시킬 때마다 그랬듯이 그게 무슨 뜻인지를 해석하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했다. 설령 지금 샘이 한 말이「형이 아침에 먹은 베이글은 실은 땅바닥에 떨어졌던 걸 내가 3초만에 도로 주웠던 거야」라고 했어도 확인 불가다. 지금으로선 샘이 딴 짓을 않고 - 이를테면 문에다 귀를 바짝 대지 않고 착실하게 머리를 감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족했다.
걱정과는 달리 국냄비가 끓어 넘치지 않았음이 확인되자 딘은 다시 리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알콜 중독자인 남편에게 별거를 선언한 여자처럼 침대 위로 중간 크기의 여행가방을 가볍게 던지고는 옷가지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바쁘게 움직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구겨진 스커트는 그대로 놔두고 벽에 붙여둔 종이들을 모조리 뜯어 한꺼번에 쓸어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그것은 폭풍이었다. 가구에서 서랍을 빼내어 거꾸로 뒤집었다. 포장을 뜯지 않은 콘돔, 헤어 브러쉬, 립스틱 같은 것들이 가방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태고적 홍수가 나서 모조리 쓸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보고 있자니 범람한 미시시피 강물로 익사한 소의 거대한 몸뚱아리가 흙탕물 속에서 뜨고 가라앉았다가 다시 뜨는 걸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머뭇거린 뒤에야 딘은 입을 열 수 있었다. 『저어...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거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올리며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번들거리는 리의 눈빛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어서 역설적으로 그 의중을 읽어내리기가 불가능했다. 다만 확실한 건 푸른색에서 시커먼 검정색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라는 거였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이다. 『내 내답이라면 네 뺨따구 양쪽으로 새빨갛게 잘만 찍혀져 있구먼. 거울을 들여다 봐, 딘 윈체스터. 그게 네 요구에 대한 나의 답이야.』 다시금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것 같다. 리는 애원과 갈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비닐이 뜯겨진 담뱃곽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피워도 돼」허락만 해준다면 그 댓가로 에덴 동산에 숨겨진 생명 나무를 향해 망할 제초제를 트럭으로 뿌려대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칼을 든 천사따윈 문제가 아니었다. 영겁의 저주는 무섭지 않았다. 필더에 이를 박고 회색의 연기를 폐로 하나 가득 빨아대야 했다. 지금 당장!
『아악, 짜증나!』 패스받은 농구공을 드리볼하며 뛰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는 식으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리의 판단에 의하자면 경기 분위기를 훼방놓은 심판은 어떻게든 자신의 바보 천치 같은 행위를 설명해야 옳았다. 지금처럼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머리를 만지며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미모의 치어리더에게 엉뚱하게 시선을 주어선 안 되는 거였다. 『뭐야, 진짜~!! 갑자기 겁이라도 집어먹은 거냐? 흡혈귀 녀석들이 떼를 지어 덤벼드는 걸 보니 그렇게 무섭든? 피를 봤더니 세상이 당장 끝장날 것처럼 보였냐고. 법적인 효력을 발휘할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지 않은게 걱정이야? 어디 말해봐, 딘 윈체스터 씨.』 그녀는 눈을 부릅떴고, 성질이 난다며 리바이스 청바지를 바닥에 던졌다. 그 모습은 영화「사랑과 영혼」에서 귀신과 접신하고 경련을 일으키던 우피 골드버그처럼 희극적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디서 유추해낸 결론이냐.「이젠 끝장인가봐요, 난 이제 죽음을 각오했으니 대신 내 동생을 잘 부탁해요」라니. 앙?!』
딘은 가렵지도 않은 팔꿈치를 반복해서 문질렀다. 그는 한 여름에 두꺼운 겨울 솜바지를 입은 듯한 어색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뒤로 도망갈 문은 굳게 닫겨 있었고, 앞에선 빗자루를 쥔 분노의 여신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 상황에선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입술을 비틀어 억지로 웃었다. 그러나 눈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리가 다시 재촉했다. 『입이 달라붙었냐!』 『말 할게. 말 한다고! 머리에 세 방이나 총을 쐈어. 무려 세 방이었어. 제기랄, 세 방이나 명중시켰다고. 머리의 반은 날려버렸단 말이다!』 그러고도 사내는 꿈 꾸는 표정으로 똑바로 달려와 임팔라의 지붕을 두드려댔다. 주먹을 마개로 삼아 신음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걸 강제로 억눌렀다. 그러나 어디로도 고정할 수 없는 시선이 불안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까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런 녀석들이 지천에 깔렸다고 생각해봤어. 결국 난 싫든 좋든 냉정하게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러니까 우리가 이 상황에서... 이, 이 상황에서...』 목이 메였다. 딘은 그러길 원하지 않았음에도 말을 더듬었다. 『만약,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하, 하지만 나에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내 동생, 나에겐 무지 소중해. 소중하다고. 아아, 이런 젠장.』
참을 수가 없어져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혓바닥이 콕콕 쑤셨다. 아버지와 약속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동생을 구하라고 하셨다. 그 아버지가, 그 존 윈체스터가 눈물을 보였다. 충격을 받은 아들은 망가진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네, 아버지... 네, 아버지... 약속해요, 약속해요, 내 전부를 걸고 약속할게요.
리의 표정이 굳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선 그녀로부터 뜨거운 콧김이 확 뿜겨졌다. 그들은 거의 키스할 정도의 거리로 밀착되어 있었다. 『이 멍청아. 최악의 경우라는 건 말이다...』 리의 손가락이 딘의 목덜미에 닿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접는 그 순간부터가 최악이 되는 거다. 대신 죽겠다는둥, 이 한 몸 희생하겠다는둥 같잖은 헛소리는 집어치워.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죽게 되어버린다고. 그 작은 마음의 틈새가 적으로부터 공격당할 허점을 만드는 거야. 몸에 빈틈이 있으면 그건 커버할 수 있어. 하지만 마음에 빈틈이 있으면 그건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어. 바늘이 들어갈 틈이 있으면 칼이 들어오는 거야. 나는 죽어도 괜찮다고? 웃기지 마. 절대로 아니야.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 그리고 그건 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려는 그 사람에게도 절대로 괜찮지가 않은 일이라고!』 이제 그녀의 손가락은 옷자락을 세게 틀어쥐었다. 『내 말 들어. 고참 선배가 하는 말을 들으라고! 반칙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강하게 생각해. 살겠다고 생각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과 같이, 둘이서 같이! 남극 바다에 빠져도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란 말이다. 암벽 등반을 하면서 밧줄을 놓아버리는 바보 짓은 정상에까지 다 올라가고 난 다음에야 하라고. 절벽 중간에서「도저히 무리인 것 같으니 난 그만 포기할래요」하고 끈을 놓으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76kg짜리 성인 남자를 산 꼭대기에서 미친 듯이 잡아당겨야 하는 내 팔뚝이 너무 불쌍하잖아 - 라고 말을 맺으며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몸을 뒤로 밀쳐내기 전에 쪽 하고 입술이 먼저 부딪쳐왔다. 『내가 못 살겠다. 다 커다란게 징징 우는 소리나 하고 앉았고.』 코흘리개 어린애 취급이 영 껄끄러웠지만 딘은 내색하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코까지 풀어줘야 하나 속으로 무지 쫄았다구.』 농담을 농담같지 않게 한 그녀는 등을 돌리고 다시 가방 꾸리는 일로 돌아갔다.
『오리진을 상대하다보면 누구라도 질려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 말이야, 너희들을 끌고 무사히 가나안 평야를 넘어야 하는 내 사정도 생각해주기 바라.』 오리진? 처음 듣는 얘기다. 나프탈렌 냄새가 진동하는 옷장을 열고 여권으로 보이는 수첩을 챙기던 리는 손가락을 빙글 돌려보였다. 『그래, 오리진... 성경에 보면 최초의 인간은 아담과 하와라고 하지? 그리고 아담은 신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동방으로 에덴이란 이름의 동산을 만들고 사람을 그곳에 두고 그것을 다스리게 했어. 그리고 하느님은 흙으로 만들어진 들짐승과 각종 새들을 에덴 동산으로 끌고와 아담으로 하여금 그들의 이름을 짓게 했지. 네 녀석도 헌터니까 이름을 짓는다는게 상징적으로 무얼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거야.』 『그야 명령을 내리고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는 뜻이지.』 『바로 그거야.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건 말이야, 딘. 일반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았지만 뱀파이어들도 나름대로 이와 비슷한 전설을 갖고 있다는 거야.』 『에?』 『최초의 뱀파이어의 여자는 아세베스,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지. 최초의 뱀파이어 남자는 에티온, 흐려진 물에서 스스로 기어나온 존재야. 처음에는 형체가 없었지만 신을 닮은 아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생각했기에 그 그림자를 훔쳤어. 그리고 아담이 들짐승의 이름을 지으면 가만히 외워두었다가 남몰래 그 이름을 호명하여 짐승들을 꼬여냈지. 이들이 기원, 뱀파이어들이 숭배해 마지않는 오리진이야.』 여기까지 말한 리는 딘에게 팩스로 들어온 감열지를 들이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7/2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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