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로만 칼라 덕분에 저는 짐을 신부님으로 착각했습니다. 신부님을 목사님으로 고치려니 예전에 쓴 글까지 모조리 엉겨붙는지라 에라 모르겠다 겔름 누워버렸습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개종하시라 해야겠습니다. /// ※
왜 하필이면 교회인 거지. 딘은 그렇게 생각하며 거친 동작으로 임팔라의 열쇠구멍에서 키를 잡아뺐다. 교회는 진짜 싫다. 체질에 안 맞는다. 코흘리개 시절에 부득이하게 동생과 같이 짐 신부님에게 신세를 졌을 때에도 미사에는 절대로 참석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더랬다. 「어린이를 위한 노아의 방주 이야기」내지는「그림으로 보는 산상 설교」같은 책은 읽었다. 그리고 그걸 샘에게 소리내어 읽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예수님? 하느님? 천사님? 딘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커다란 마리아님 조각 앞에서 예의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째리며 속삭였다. - 당신의 힘은 위대하다면서요. 그런데 어째서 우리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나요.
같은 질문을 짐 신부님에게도 해봤다. - 천사님은 하느님에게 정리 해고라도 당해서 엄마를 지켜주지 못한 걸까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짐은 이마를 한껏 찌푸렸다. 어쩐지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정리 해고라는 어려운 말은 어디서 들었니, 딘.」 「센터에 갔을 적에 급식을 타러 온 아저씨에게서 들었어요. 왜요?」 때마침 샘이 콜록거리며 기침을 터뜨려서 다행이었다. 짐은 샘을 위해 어린이용 감기약 시럽을 가져오겠다고 말하며 황급히 자리를 떴고, 나중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노숙자 보호 센터로 달려가 구직 신청서를 작성하는 애매한 사람을 붙잡곤「아이들 앞에서 장기불황, 사장님, 해고 어쩌고 하지 마시오! 그 아이들까지 상처를 받아서야 쓰겠소?!」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그리고 엉뚱한 사람들을 나무라는 자신에게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짐은 아이들 앞에서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를 꺼렸다.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았던지 짐은 사흘간 금식하며 열성으로 기도했다.
그래봤자 딘에겐 상관 없었다. 그에게는 흔들릴 종교적 신념도 없었고 잃어버릴 믿음도 없었다. 오로지 끈적끈적한 콧물을 달고 있는 어린 동생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샘은 아프다며 자지러지게 울어댔고, 열이 났으며, 끝장으로 칭얼거렸다. 독감이 유행인 계절이었다.
『불은 환하게 켜졌는데 무척 조용하네. 그치?』 『응?』 짧았던 상념에서 깨어난 딘은 턱을 적당한 각도로 잡아당겨 무릎 아래서 얼쩡거리고 있을 코흘리개 동생을 찾았다. 그러다 퍼득 깨달았다. 비누 냄새를 풍기는 꼬맹이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뺨을 비비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1989년은 진작에 끝났고, 여섯 살짜리 아기는 어느새 엠파이어스테이츠 빌딩을 한 방에 초토화시키는 멍키 고릴라가 되었다. 네 살 아래의 동생을 쳐다보는데 눈의 높이를 상향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굴욕감 - 동시에 맨손으로 이렇게나 잘 키워냈다는 흐믓함 -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며 딘은 샘이 건낸 짐 꾸러미를 다치지 않은 손으로 받으려 했다.
『형! 안돼. 그거 무거워.』 『앗차!』 비극을 예감한 샘이 재빨리 주의를 주었지만 늦었다. 권총이니 칼이니 하는 쇠붙이들로 가득찬 가방은 대략 9kg에서 11kg 정도였고, 그 정도의 무게를 오로지 한 손으로 감당하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었다. 물건을 잡기 위해 오무린 손바닥이 민망하게끔 가방은 꽈당 소리를 내며 추락했고, 딘은 모두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쏟아짐에 큰 부담을 느꼈다. 에... 그러니까 말입니다. 인정해야겠군요. 제가 잠시 딴 생각이라는 걸 했습니다.
『이 멍충아!』 뒷통수를 찰싹 때리며 리가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재수 달아나게 식사 전에 숟가락 떨어뜨리고 막 그럴래?!』 숟가락이라니. 하하하. 귀에 쏙 들어오는 비유이긴 하다만 어쩐지 듣기 민망한 것도 사실이다. 딘은 어색하게 웃으며 땅바닥에 떨어뜨린 가방을 다시 잡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동시에 두 손을 사용하는 걸 무의식중에 꺼릴 정도로 다친 곳이 그렇게나 아팠던가 싶어 당혹스러웠다. 안 된다. 아픈 건 억지로 참으면 되는 것이고, 모두를 걱정시켜선 곤란하다. 딘은 일부러 씩씩하게 움직였다. 『형... 손 많이 아파?』 『괜찮아, 샘.』 곧 죽어도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며 샘이 이죽거렸다. 『맞아. 천지가 개벽하려면 앞으로 일만 년 정도는 더 참고 기다려야 하지.』 『뭐야, 그 까칠한 반응은.』 『머리로 회충이 들어가서 그래.』 그렇습니까. 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거기 있는 총이나 이리 다오.』 샘은 가면을 뒤집어 쓰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이 없었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투도 정나미가 뚝 떨어질 만큼 건조했다. 하지만 샘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일엔 딘보다는 덜 똑똑했고, 그렇기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이 딘에게 어떻게 보일 거라는 걸 미처 모르는 듯했다. 『산탄총은 관둬, 딘. 가급적 반동이 작은 걸로 잡아.』 『어차피 거기서 거기야. 그리고 다친 건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이야.』 『진짜 못 말린다! 가끔은 사람 말도 좀 듣고 그래.』 『멍멍.』
샘이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걱정하는 건 전적으로 그의 몫. 딘은 땀으로 끈적거리는 손바닥을 바지춤에 재빨리 문질러 닦고는 주변을 살폈다. 교회 주변으로 주차된 승용차가 모두 네 대나 된다. 상주하는 관리인의 차가 한 대, 목사가 운전하고 다니는 승용차가 한 대라고 가정하면 단순 계산에 의해 나머지 두 대는 불법주차 차량이라는 얘기가 된다. 우와, 도덕과 양심을 강조하는 교회 앞에서 보란 듯이 경범죄를 저질렀다 이거지. 숏건을 든 딘은 감청색의 혼다를 눈여겨 보며 그 앞을 기웃거렸다. 느낌이 안 좋다. 차체는 어중간한 각도로 세워져 있어 마치 도주 중인 강도가 아무렇게나 버리고 달아난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들이밀고 차량 내부를 살펴봤다. 못난이들이 스테레오를 강제로 뜯어가진 않았고... 플래쉬로 앞좌석을 흝었다. 구겨진 도넛 포장지와 일회용 종이컵이 굴러다니는게 시야에 들어왔다. 핸들에 손가락 모양으로 설탕 얼룩이 남아 있다. 아무래도 혼다의 주인은 그렇게 깔끔한 성격은 아닌 듯하다.
등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걸 봐, 딘. 무전기가 달려있어.』 『나도 봤네요.』 『경찰일까?』 『그건 아닐 걸. 아마 민간 방범대원일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짭새가 안전밸트 미착용으로 딱지 끊는 거 봤니?』 플래쉬가 다시 바닥 한 지점을 비췄고 범칙금 발부 스티커를 본 샘은 짧게 오, 소리를 냈다. 다만 여기서 걱정인 건 민간 방범대원의 신분으론 교통 단속을 피해갈 순 없어도 정식으로 등록된 총은 들고 다닐 거라는 점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탕탕탕 소리를 떠올린 딘은 이마를 찌푸리며 교회 처마를 쳐다봤다. 날카로운 이빨만 해도 충분히 골치아픈데 그것들이 총까지 탈취했다면 정말 골치아프다.
바로 그때 리가 샘의 어깨를 짧게 쳤다. 『친애하는 예비 범죄자 씨들? 아무리 마음에 들었어도 자동차는 나중에 훔쳐.』 그게 뭔 소리라며 샘이 두 팔을 항의조로 활짝 벌려보였다. 그치만 그녀는 벌써 몸을 돌려 교회 정문으로 연결된 계단을 힘차게 밟고 있었다. 싸한 박하 맛의 공기가 그런 그녀의 주변을 에워쌌다. 딘은 그것이 근육통에 바르는 차가운 맨소래담 연고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헤이!』 『왜.』 『안에 얼마나 있는 거지.』 『알고 싶어?』 『뭐야, 그 얼굴은. 저 안에 각다귀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알면 뒤돌아 줄행랑을 치고 싶을 거라 말하고 싶은 눈치군.』 『자기가 질문하고 자기가 답하면 재밌어?』 비웃음을 닮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교회 문을 열었다. 「주님에게로 향하는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딘이 바짝 붙어 따라갔다.
맨 처음, 딘은 정육점 뒤에 있는 쓰레기통의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코가 거부하는 그런 악취였다. 다음으로 그는 문 위로 적갈색의 - 그리고 끈적거리는 점액질 물질이 사선 모양으로 번져 있는 걸 보았다. 얼룩은 흡사 유치원생 아이가 음악에 춤추며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내린 듯한 형상이었다. 그리고 문 바로 앞으로도 거무스름한 빛깔의 액체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피다 - 상당한 량이다 - 그런데 우습게도 시체는 없다. 그리고 시체를 질질 끌고간 흔적도 없다. 중앙 복도를 따라 방울방울 떨어진 갈색의 얼룩만이 그 자리에서 뭔가가 일을 헤치우고「떠나갔다」라는 걸 알려주었을 뿐이다. 『젠장. 아주 제대로 해놓으셨구먼.』 신성모독의 살인 현장으로 첫 걸음마를 뗀 리는 퉷 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다. 가까운 곳으로 커피 음료 자판기가 있었고 신자들을 위한 소책자가 진열된 책장이 몇 개 보였다. 낡은 의자도 있었다. 핏자국은 그곳으로까지 마구 이어져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인 잭슨 폴록의 멋진 현대적 그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바닥과 천장, 그리고 벽까지 오래되어 부식된 철의 냄새를 풍겼다. 그걸 가만히 코로 맡고 있자니 샘은 속이 메슥거렸다.
왼편으로는 성가대 연습실과 화장실이 있었는데 거기는 불이 꺼져 있었다. 리는 계속 가자는 신호를 하며 연습실을 지나쳤다. 하지만 딘은 그 안에 누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스름하게 사람 그림자처럼 생긴 걸 분명 봤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창문을 1cm 가량 열고 기웃거리며 내부를 살폈다. 있다. 누군가 책상에 엎드려 있다. 춘곤증에 못 이겨 잠시 조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저건 시체야. 나라면 시간 낭비는 하지 않아.』 돌아보지도 않고 리가 말했다. 딘은 우거지상을 하고 열었던 창문을 다시 닫았다.
예배당 앞에선 두 명의 여자가 똑같은 자세로 문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언뜻 봐선 추위를 피해 모닥불을 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편안함과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중 하나는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었다. 딘이 가만히 쳐다보는 사이에 멍하니 벌려진 입술 틈새로 커다란 붉은 거품이 밀려나왔다. 색색 숨소리가 거칠었다. 샘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내는 감각으로 두 여자의 목을 쳤다. 그 즉시 귀로는 들리지 않을 비명이 천장을 후려쳤다. 그것이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샘은 움찔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통통 튀며 머리통이 굴러갔고 딘은 문을 가로막고 선 여자들의 몸뚱이를 치웠다.
『저 안은 확실히 다를 거야.』 손잡이를 잡은 채 리가 말했다. 『안전은 보장하지 못 해. 각오는 된 거지?』 딘과 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고 말고. 당신은 뱀퍼이고 우린 헌터야.』 『좋아, 베이비. 그럼 한바탕 날뛰어 보자고.』 리는 두 팔에 힘을 주고 문을 힘껏 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9/09 21:01
2007/09/0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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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수십 겹의 이불 아래로 깔린 딱 한 알의 강낭콩이 거슬려 도무지 눈을 붙일 수가 없게 된다. 밤새 뒤척거리다가 결국 취침을 포기하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으아, 아침이잖아!」탄식한다. - 강낭콩 싫어. 내 침대에서 그거 꺼내서 없애줘, 형. - 이놈의 자슥! 무시하고 쿨쿨 자면 그만이잖냐! 딘은 그런 동생이 늘 못마땅했다. 예민하고 까탈스런 강낭콩 공주는 무덤덤하고 우직스런 텍사스 카우보이로 어떻게든 개조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동생의 성격을 바꿔보고자 나름 연구도 많이 해봤다. 아쉽게도 땅바닥에 네 발로 엎드려 말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밧줄을 - 정확하게는 면 소재의 커튼 끈을 던지는 놀이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는게 문제지만.
아무튼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비난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나름 할 말은 있다. 결과적으로 샘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딘이다. 샘을 힘들게 만든 강낭콩의 실제적인 정체가 바로 딘인 것이다. 다짜고짜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하는 사람을 옆에 세워두고「저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지」질문을 반복 3천만 번만 해보라지. 행여라도 말 실수를 했나, 불쾌한 행동을 저질렀나, 아님 어젯밤에 야참으로 먹은 참치 샌드위치가 상해 급성 배앓이라도 났나, 별별 가능성을 하나씩 곱씹다보면 부처님이 아닌 이상 겹겹의 비단 아래로 숨은게 강낭콩이 아닌 미세한 겨자씨 한 알이라고 해도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샘은 맑은 하늘에 대고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무엇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느냐고 물어보면「아무 것도 아니야, 새미」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큰코 다친다. 딘은 뼈가 부러져도 별 거 아니라고 대답하는 말종 인간이니까. 뿐만 아니다. 메탈리카의 음악을 귓청이 떠나가라 크게 틀어놓곤 「피곤하니까 음악이나 듣자」라고 말하며 남들과 대화하려는 노력 자체를 회피했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는 진짜지 최악이었다. - 형은 괜찮지 않아. 우린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이야기를 해봐야 해. - 난 괜찮아! 괜찮다고! 나더러 괜찮냐고 또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맹세코 패버릴테야! 그래서 턱이 돌아가게끔 한 방 멋지게 맞았다. 언뜻 보기에 딘은 저속한 농담 따먹기나 즐기는, 행실이 헤프고 보푸라기보다 더 실속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술집에서 아가씨를 꼬실 적의 그는 한 없이 가벼운 입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거야 꾸며낸 거짓을 줄줄 늘어놓을 때만 그랬고 성서에 손을 얹은 채 진실만을 얘기하겠습니다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는 180도 돌변해서 헌법이 보장한 묵비권을 철저하게 행사하고 보았다. 꼬집고, 달래고, 윽박질러도 소용이 없다. 그는 망할 대가리 윈체스터 가의 장남이었다. 한숨이 푹푹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가끔씩 샘은 같이 여행하는 사람이 한 배에서 나온 형제가 아니라 콘크리트 벽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지곤 했다. 그 벽은 두꺼웠다 그리고 단단했다. 높이 또한 이루말할 수 없이 높았다. 한참을 올려다 보고 있노라면 힘껏 당겨진 목이 아파왔다. 그래서 벽 너머로 숨은 딘을 찾는 일은 능숙한 헌터의 실력으로도 쉽지 않았다.
「비단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잖아. 지금은 사냥 중이야. 집중해야만 해, 샘 윈체스터.」 따지고보면 딘의 기분이 좋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애지중지해 마지 않는 그의 베이비는 끔찍한 오물을 뒤집어쓴 상태 그대로였고, 멍든 몸은 아프지, 머리는 구둣발에 밟혔지, 한숨도 자지 못해 눈은 깔깔하지, 억지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상황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인상을 쓰는 것도 당연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것도 당연하다. 동생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당연... 이쯤해서 으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씹었다. 당연하긴 뭐가 당연하냐! 왜 나랑 시선도 안 마주치려고 하는 건데?! 샘은 탁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지도를 무릎 위로 놓았다.
그걸 일종의 신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어둠이 깔린 도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던 딘이 겁나게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샘. 이번 갈림길에서 우회전이냐, 아님 좌회전이냐.』 『그놈의 망할 장난감 폭탄을 갖고 레몬이라 떠들어댄 이야긴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딘. 내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뭐?』 딘은 정말 놀랐다. 자애의 교회로 가는 길이 어느 방향이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레몬이다. 샘이 그토록이나 간절히 원한 것이 그저 형과 눈을 마주하는 거였다면 그렇게 말한 건 대박의 성공이었다. 다친 손목이 쓰라려 한 손으로만 핸들을 조작하던 딘은 사고의 위험성도 망각한 채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은 동생을 빤히 쳐다봤다. 기가 막혔던지 입도 헤 벌려져 있었다. 『이놈이 지금 콜라 마시고 딸꾹질을 하고 있어! 어느 쪽이냐고. 왼쪽이야, 아님 오른쪽이야.』 『주리를 튼다고 해도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맹세해. 맹세한다고.』 『뭔지도 모를 맹세는 나중에 해, 인석아. 처음부터 지도는 네가 들고 있었잖아! 졸려서 눈 뜬 채로 꿈 꾸고 있냐?! 뚱딴지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나 말해. 빨리!』 가짜로 화를 내는 척하는 거라고 하기엔 눈빛이 표독스럽다. 차를 세우곤 여기서 당장 내리라고 윽박지르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래저래 마음 상한 샘은 풀 죽은 모습으로 다시금 지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좌회전.』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귀찮게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뒤로 넘겼다. 사흘 내내 비만 내렸다는 식의 우중충한 기분을 바꿔보자. 샘은 코피를 흘려가며 기말시험에 몰입하던 기억을 더듬었고, A+ 성적을 받았던 성취감을 떠올렸으며, 그때의 감각을 일깨워 자신이 알고 있는「뱀파이어에게 대항하는 법」을 하나하나 열거해 보았다. 햇빛에 강한 화상을 입지만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마늘이나 십자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목을 베면 죽는다. 죽은 자의 피는 맹독과 같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있잖아, 딘. 형은 나에게 화가 나면 말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거 알아?』 『뭐?』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던 건 그저 재수가 좋아서 그랬던 거였다고밖엔 말 못 하겠다. 옛날에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새까맣게 손때가 탄 강의 노트를 열심히 들춰봐도 글자가 머리에 하나도 안 들어올텐데 말이다. 샘은 무의식중에 네 개의 손톱을 입에 대고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뱀파이어가 다 뭐라냐. 고운 먼지가 된 지식은 하얗게 날아갔다.
이런게 제일 싫다. 딘은 덩치에도 어울리지 않는 강낭콩 공주를 연기하는 동생을 힘껏 노려본 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bitch 같은 놈이라 욕했다. 이 마당에 싸움질이냐 - 뒷자석에 앉아있던 리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백미러를 통해 견제에 들어갔다. 그걸 모르지 않은 딘은 최대한 점잖케 동생을 나무랬다. 다시 말하자면 달리는 차밖으로 밉꼴맞은 동생을 뻥 걷어차진 않았다는 얘기다. 『이 자식이 진짜지 누굴 엿 먹이려고... 뭐가 불만이야. 너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 몸이 좇 같은 수다를 떨기를 원해?』 『형... 제발.』 『좋아. 소원대로 해줄게.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딘 윈체스터입니다. 미모는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제 특기는 자물쇠 따기와 신용카드 사기입니다. 아참, 깜빡했군요. 은탄환 만들기도 참 잘 해요. 취미는 바닷가에서 해가 떠오르는 걸 보는 겁니다. 이때 C컵의 호리호리한 예쁜 아가씨가 맥주랑 육포랑 같이 해서 옆에 있어주면 금상첨화죠. DVD나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해요. 액션, 스릴러, 가족 드라마, 포르노, 가리는 것 없어요. 줄거리는 시시해도 배우만 잘 생기면 그만이죠. 어때요. 나랑 같이 맷 데이먼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갈래요? 대신 콜라와 팝콘은 그쪽에서 사요.』 『그만해, 딘.』 『남말하고 앉았네. 똑바로 앉고 손톱은 그만 깨물어!』
딘은 자신의 나쁜 버릇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동생이 미웠다. 날아드는 벼락에 머리카락을 태운 샘은 무릎을 쥐었다 폈다 했다. 표정이 시무룩하다. 『나는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한데.』 『그건 나도 몰라.』 몰라? 지금 모른다고 말 했어? 딘의 눈이 더 커졌다. 『맙소사, 샘.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넙죽 사과부터 하냐?! 이거, 이거, 네 머리에 아무래도 회충이 들어갔나 보다. 잊지 말고 내일 아침에 약국에 들려 구충제를 꼭 사도록 하자. 알겠지?』 정말이지 나쁜 놈! 딘은 운전석의 창문을 적당히 내리고 새벽의 찬 바람을 맨 얼굴로 맞았다. 이러면 뺨이 일그러져도 바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리가 차가워지면 홧김에 남의 집 거실에 차를 처박는 사고를 저지르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발치만 쳐다보던 샘이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 하지만 이 말만 할게. 나 때문에 형이 기분 나빠 하는 건 싫어.』 더는 못 참겠다며 딘이 말을 막고 나섰다. 『그게 바로 네 문제야, 샘.』 샘은 정확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성격이 워낙에 예민하다보니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뿐이다. 그래서 착한 어린이는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합니다, 이러고 고개부터 숙인다. 그런데 빌어먹을 동생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자기가 접시를 깬 건지 아님 금방 세탁한 바지를 찢어먹은 건지 구분도 못 한다. 그저 상대방이 화를 내는게 싫어서 어떻게든 그걸 무마하고 싶을 뿐이다. 결국 그건 죄의식을 모면하려는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사과도 아닌 것이다. 『진정한 사과라는 건 말이다, 새미.「접시를 깨서 미안합니다. 빗자루를 나에게 주세요. 이걸 치우겠어요. 다음엔 이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너처럼「뭐가 잘못되었는진 모르지만 아무튼 나에게 화를 내는 건 잘못된 거니까 내 사과를 받고 빨리 기분 풀어요」라고 말해선 한참 틀렸다고 할 수 있지. 내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가 가니?』
빌어먹을. 말을 내뱉고 나서야 후회가 되었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이 원흉이다. 딘은 손바닥으로 수염이 자라 깔깔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옆에서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샘도 싫었고, 뒤에서 철부지 어린애를 야단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도 싫었다. 모든 걸 잊고 당장 쓰러져 팔베개를 하고 코를 골고 싶었다. 심호흡을 했다. 감정이 흔들리는 건 약해졌다는 증거. 아빠가 호되게 야단친다.
보다 안전한 도피처가 필요했다. 딘은 백미러를 쳐다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헌팅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교회 안으로 찌꺼기들이 많이 깔려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리.』 『어쩌긴. 쓸어버려야지.』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 샘이 옆에서 움찔거렸다. 그걸 모르진 않았지만 딘은 일부러 무시했다. 다행이라면 리도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는 거다. 『도착하자마자 정면으로 들어갈 거지?』 『당연히 정면이지. 그럼 툼 레이더의 라라처럼 옥상에서 밧줄 감고 뛰어내릴까?』 『라라 흉내를 내기엔 언니 가슴은 보통이잖아.』 『시끄러! 내 가슴은 천연! 그 여자는 실리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흥! 천연이라고 해도 원더브라 찼으면서.』 『@&#@)!_#(*!』 찢어지는 비명 내지는 항의에 딘은 짐짓 귀가 아프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진정하고 가운데손가락은 그만 내려.』
이상한 일이다. 영양가 하나 없는 저속한 농담을 지껄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바짝 올라갔던 어깨가 도로 편안해지려 했다. 핸들을 쥔 손가락으로 전해져오는 차체의 덜컹거림도 더 이상 지옥의 품바야 합창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돌아왔다. 레몬 주스로 쓰여진 글자가 촛불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게 선명해졌다. 딘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정면을 주시했다.
어두운 생각들은 매듭으로 잘 묶어졌다. 이제 다 괜찮아. 내일 아침엔 약국에 들려 샘에게 먹일 회충약을 살 거고. 그렇고 말고. 모든게 정상.
Posted by 미야
2007/09/02 14:17
2007/09/02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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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어쨌거나 말인데... 큼!』 존재가 불확실한 투명한 생선가시가 내부 점막을 자극했다. 몸에 해로운 담배 같은 걸 입에 달고 사니까 아무래도 목이 안 좋아지는 거다. 신경질이 나는 걸 느끼며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까칠한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진실이 뭔지 깨달았다. 지금 맛보고 있는 이 껄끄러움은 니코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끔찍하게 싫어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암에 걸린 아이에게「넌 곧 건강해질 거다. 내년에는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같이 축구도 할 수 있을테니 기대하렴」라고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곧 건강해진다고? 웃기는 소리다. 3개월 뒤면 한줌의 가루가 되어 슬퍼하는 부모에게 돌아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방정맞은 입은 잘도 거짓을 나불거린다. 그렇게 해서 위통이 생기고, 만성 두통이 도지고, 스트레스가 커지고, 쓸데없이 군것질에 손을 대 다이어트에 실패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일부러 금연을 각오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군 - 쓰게 웃으며 리는 살인 현장으로 파견나온 경찰관인양 바지 뒷주머니로 손을 꾸셔넣었다.
『이쯤해서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친애하는 로마 병정 씨. 총독 빌라도 말고 로마에 대항하는 열심당원 쪽으로 붙지 않으실라우?』 손을 뒤로 감추는 건 공격의 의사가 없음을 의미하는 행위다. 로마 총독은 뭐고 열심당원은 또 뭔지. 짐작도 못해본 행동에 덤으로 제안까지 더해지자 남자의 입술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오로지 서로를 죽이는 일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뱀퍼가 뱀파이어와 협상을 하려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숫자로 따지면 비행기가 추락하는 100만분의 1이라는 확률보다 약간 낮다 - 남자는 최근들어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뉴스를 TV로 본 적이 있던가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보니 일주일 전인가 해서 어디선가 경비행기가 떨어져 4명이 죽었다고 들은 것도 같다. 따지고 보면 100만분의 1도 아주 작은 숫자는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미안하지만 어렵게 비유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돌려 말했나. 오케이.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우리에게 협조해.』 『이봐. 나는 뱀파이어야. 뱀퍼에게 협조라니, 그런게 가능할 리 없...』 『그쪽에서 보호하고 있는 미친 공주님은 누가 뭐래도 통제 불능이다. 당신은 가급적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어하는 눈치던데 은혜를 모르는 망할 년은 일부러 끝장을 보자는 식으로 일을 크게 키우고 있다고. 원수인 존 윈체스터의 가족을 처리하면 모든게 잘 해결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은 버려. 지금의 상황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끝장을 단 하룻밤 사이에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졌어. 뚜껑을 그냥 덮기엔 냄비 속의 죽이 지옥의 불가마니인양 펄펄 끓고 있다고.』
일순 표정이 굳은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미친 공주, 망할 년」의 표현이 리의 입에서 나온 순간 남자는 압정을 밟기라도 한 것 같은 날카로운 충격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까지 왔으면서 자제력을 잃고 흐트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자는 재빨리 표정을 바꿔 생전 처음으로 에펠탑을 본 촌뜨기처럼 굴었다. 와, 저게 말로만 듣던 파리의 명물인가. 지나가는 사람더러 기념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야겠군. 그런데 내가 불어를 할 줄 알던가. 실례합니다, 마드모아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거리며 무슨 소린지 전혀 못 알아 듣겠다고 딴청을 부렸다.
『답답한 자로군! 다시 말해줄까. 돌았다니까!』 리는 관자놀이에 대고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댔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여겼던지 맛이 간, 완전히 돌은, 제정신이 아닌 등등의 험악한 표현이 굵은 글씨체로 첨부되었다. 그걸 본 남자는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리의 행동은 언뜻 봐선 지능이 모자란 멍청한 바보를 골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리는 어디까지나 진지했고, 곱절로 심각했다. 『내가 지금 개념 없게 장난이나 치고 있는 것 같아? 응?』 마약에라도 취한 것처럼 사고 능력을 잃고 바깥을 떠도는 마을 주민의 수가 단 하룻만에 무려 열 여덟을 넘어갔다. 그것도 트럭에 받혀도 절대로 죽지 않고 - 허리가 90도 각도로 뒤로 꺾어진 채 걸어다니고 - 때 이른 할로윈 분장치고는 너무가 기괴스러운 -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났음을 짐작한 마을 보안관이 탱크와 미사일을 동원해달라고 주 방위군에 연락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간 문제 - 광장 한 가운데로 장작더미를 하늘 가까운 높이로 쌓아두고 모조리 불질러버린다 해도 과연 해결이 될까 의심스럽고 - 원망. 원망하고 있다. 적의를 드러낸다. 분노. 모두 죽어버리길 바라고 있다.
『우물에서 썩은 쥐가 떠오를 거야. 수레엔 눈 뜨고 죽은 시체가 가득이고. 벌려진 입으로 튀어나온 시퍼런 혀를 벌레가 씹어대겠지.』 근처로 쓰러진 세 구의 시체, 내지는 시체로 짐작되는 몸뚱이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이제 알겠어? 열 여덟에 다시 셋을 더해 스물 하나다.』 『잠깐. 이곳에 드러누운 세 명은...』 『도중에 말을 자르지 말고 들엇! 도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이런 경우는 금시초문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일이 이지경인데 다들 손가락만 빼물고 있을 것 같아? 장담하는데 외국에서까지 뱀퍼들이 장비를 챙겨 달려와선 얼씨구나 해가며 대규모 사냥을 준비할 거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가축의 피를 빨며 조용히 숨 죽이고 사는 뱀파이어들까지 모조리 잡아 목을 베어라 - 학살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악다물고 턱을 치켜올렸다. 실제로 남미쪽의 혈기왕성한 뱀퍼들이 미국행 비행기 티켓 가격을 흥정하기 시작했고, 소문은 이미 퍼졌다. 그들 중 하나가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치~즈를 외치게 되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휩싸여 나도, 나도 소리를 지를 사람은 최소한 수 십 명에 이른다. 엎친데 덮쳤다고 콜롬비아나 멕시코 쪽의 뱀퍼들은 자비심이라는 걸 모른다. 맥거번이나 피어스, 고든 같은 소문난 강경파도 감히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거칠고 막무가내다.
남자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이미 씻어낸 듯 침착함이 사라져 있었다. 『기다려. 모두 열 여덟이라는 건 지어낸 거짓말이지?』 『열 여덟이 아니다. 피 값의 계산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해야지. 스물 하나야.』 『제기랄. 저기 있는 세 명은 빼. 그들은 원래부터 내가 부리던 종이다.』 그래봤자 열 여덟이나 스물 하나나 거기서 거기다. 대충 얼버무릴 숫자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화성으로 탐사선을 착륙시키는 2007년이고, 치명적 전염병 내지는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독소 운운하기엔 사람들 머리가 지나치게 똑똑해졌다. 세계 곳곳으로 연결된 인터넷은 또 어떻고. 예고도 없이 가까이 접근해오는 족쇄의 찰그당 소리를 들었다. 초조한 기색으로 손가락을 깨물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불현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남미의 뱀퍼들이 살육의 냄새를 맡고 흥분했다는 리의 이야긴 단순한 허풍은 아닐게다. 하룻밤 사이에 열 여덟.
- 책임을 져줘. - 나에겐「앞으로」가 없어. 왜냐하면 내 미래는 동생 루더와 같이 죽고 없으니까. - 괜한 분풀이가 아니야. - 두고 봐. 귀가 아플 정도의 정적을 선사해 주겠어.
그녀가 말한 정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는 눈꺼풀을 누르며 쥐어짜는 어조로 간신히 대답했다. 『앞으로 사흘의 시간을 벌어주게. 그러면 협조하겠어.』 리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72시간은 어려워. 남미쪽 뱀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개인 플레이어들이야. 내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봤자 그렇게까진 시간은 못 벌어줘. 약속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38시간이다.』 『38시간... 맙소사. 그건 너무 짧아!』 『모두에게 경고를 보내기엔 부족하다 싶겠지만 나로서도 그게 한계야. 자, 어떻게 할래?』 『알았다. 그녀는 이곳으로부터 10km가량 떨어진「자애의 교회」에 있다.』 『오케이. 그럼 그 약속의 증표로 당신이 부리는 종 세 마리를 내가 데려가겠다.』 『맘대로 하시게.』
리는 빠르게 움직이며 총에 맞아 널부러진 세 구의 시체들을 살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활력 저하에 빠진 뱀파이어지만, 어쨌거나 얼굴 정면으로 총을 세 방이나 맞은 여자는 쇼크가 커서 호흡이 완전 정지된 상태였다. 되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고, 설령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해도 턱 아랫부분이 완전히 날아간 상태로 얼마나 버틸지는 의문이다. 그녀는 번득이는 스네이크 나이프를 꺼내들었고, 짤막하게 아멘을 외친 뒤에 목을 깊게 베었다. 남자는 배에 총상 두 발. 하나는 폐를 관통한게 분명하고 다른 하나는 출혈의 양을 봐선 내부 장기를 단단히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의식은 멀쩡해 눈을 빤히 뜨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위로 바짝 당겨올렸다. 차가운 칼날이 목에 닿자 남자의 동공이 확 좁아졌다. 싫다고 저항하는게 느껴지자 힘이 더 들어갔다. 귀 아래로부터 칼날을 깊게 쑤셔넣고 쇠고기를 도마에 올려놓고 으득으득 썰 듯이 해서 잘랐다. 귀로 들리는 비명은 없었지만 그 몸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넋 놓고 보고 있기엔 그리 썩 좋은 광경은 아니어서 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치만 이것이 그녀의 직업이다. 그리고 일이다. 샘은 잠시 생각해봤다. 다른 사람도 샘을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끼곤 할까. 그러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헌터라는 직업은 정말이지 엿 같다. 『딘...』 슬그머니 형의 어깨에 기대려고 했다. 딘은 조용히 그 몸을 빼고 동생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형이 왜 그러지 걱정하며 팔꿈치가 닿도록 다시 형에게 바짝 붙어 섰다. 이번에도 딘은 또 옆으로 한 걸음 옮겨갔다. 그가 피하고 있다 - 그걸 깨닫자 샘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이제 리는 쓰러진 아이에게로 접근했다. 그러다 멈칫했다. 어린아이여서 목을 베기를 주저한게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뭐야. 총에 맞은 것도 아닌데 상태는 셋 중에서 제일 나쁘잖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손으로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세게 얻어맞은 자리엔 선명하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래봤자 피멍 정도로 뱀파이어의 맥이 끊길 리 없다. 그런데도 이 아인 사흘간 땡볕에 노출되어 푹 곪은 고기처럼 완전히 맛이 갔다. 코와 턱을 덮은 다량의 피도 마음에 걸렸다. 삼킨 건지 뱉은 건지 모호하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입안에 고여있던 피가 벌려진 입을 통해 주룩 흘러나왔다. 이가 부러져 흐르는 피라고 하기엔 양이 많다. 거기다 코로도 약간의 피가 흘러나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어 손가락을 넣어 아이의 입을 크게 벌려봤다. 그러자 제 기능을 잃은 송곳니가 먹다 남긴 박하사탕처럼 아래로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리는 인상 쓰던 걸 풀고 손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다고 내심 얕봤는데 아주 엉터리는 아니잖아.』 『응?』 『잘 처리했어, 딘 윈체스터.』 무거운 가방을 들어올리자 다친 팔목이 욱씬거렸다. 딘은「내가 뭘-」이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채 캐묻기도 전에 리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그 모습은 설명이란 단계를 여차하면 생략하곤 했던 존 윈체스터와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익숙하니까 그게 왜 나쁜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편하기까지 하다. 이따금씩 자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입에 집어삼키던 질문 - 그게 뭔대요, 아버지 - 를 자연스럽게 혀 밑으로 잡아당긴 딘은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뒤에서 샘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 그는 이런 식으로 앞뒤를 뒤섞는 것이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7/08/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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