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상태 메롱입니다. 지뢰는 적당히 피해가세요. ※
유감스럽게도 리가 두 다리를 뿌리내린 이곳은 달이 아니라 지구였고, 100kg에 육박하는 몸뚱이는 약간의 에누리도 없이 그녀를 찍어눌렀다. 빠르게 몇 걸음 걸었다가 심호흡을 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섰다. 보통의 여자들은 감히 흉내도 못낼 일을 해내고 있다고 쳐도 무릎과 허리의 관절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더 이상은 무리!」라는 신호를 열심히 보내오는 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머리에 짐짝처럼 이고 있는 샘 윈체스터는 진짜지 지랄맞게 무거웠고, 이대로 가다간 누름돌에 단단히 짓눌려 수분이란 수분은 모조리 빠져나간 오이 짱아찌가 되고 말 터였다. 『망할. 내가 단단히 미친게지.』 아틀라스의 형벌이 대략 어떻겠거니 추측을 해봄직했다.
으샤 기합을 넣곤 정가 100달러짜리 - 싸구려 - 몸뚱이를 잘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샘을 바닥으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약간의 요령을 부렸다. 즉, 자신의 얼굴과 목을 시뻘겋게 만들고 있는 원흉이 사람이 아닌 최신식 평면 플라즈마 텔레비전이라고 상상하기로 했다. 가장 눈에 띄고, 화려한 곳에 진열되어 반짝반짝 조명을 받는 바로 그 꿈의 텔레비전, 카달로그만 봐도 너무나 멋진, 모두가 구입을 하고 싶어 안달을 하는 꿈의 가전 제품... 그러자 약간 기분이 나아졌다. 자신감도 붙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무사할 수 있을 것이고, 일주일 뒤에는 느긋하게 커피 테이블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앉아 쿠바산 시가를 만지작댈 수도 있을 것이다. 지출이 허락되는 수준에서 최고급 바닷가재 요리와 로마네 콩티를 홀짝거리는 호사를 만끽할 수도 있다. 큰 맘을 먹고 2천달러짜리 핸드백을 구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짊어지고 나온 플라즈마 TV는 반 영구적으로 정상 작동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어쨌든 외형만이라도 번지르르하다면 나름 할 일은 다 했노라 자부해도 괜찮지 않을까.
『제기랄!』 고개를 번쩍 들고 악을 썼다. 나름 할 일을 다 한 거 좋아하네. 끊어질 것 같던 어깨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 반동으로 축 늘어진 샘의 한쪽 팔이 거의 바닥에 닿으려 했다. 리는 숙녀라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단어들을 계속해서 중얼거렸고, 입구로부터 이제 열 발자국 남았음에 한 없이 신을 저주했다.
너무나도 가깝고도 먼 걸음이었다. 앞으로 열 발자국. 그 차이는 커서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는다.
새카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창고에서 고스란히 썩어갈 플라즈마 TV를 떠올려봤다. 구속복을 걸친 채 멍한 눈으로 온종일 하얀 벽만 쳐다보고 살아갈 한 남자를 추측했다. 동전을 아무리 잘 던져도 앞면만 나올 일은 없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옳지 않았다. 그치만 리는 뒷면이 나온 동전을 들고 앞면을 보았다고 마지막까지 우겨야만 하는 자신의 입장을 잊지 않았다. 시야를 훤히 밝히며 쏟아져 내리는 불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마침내 그들은 통로로 나왔고, 기억을 더듬어 계단을 찾았다.
지켜야만 할 것이 있다는 것과, 지킬 것이 전혀 없다는 것 중에 무엇이 더 강할까.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둘 다 형편 없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약하다. 때로 그들은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쉽게 포기해 버린다. 마치 모자를 집어 던지듯 자기 목숨을 던진다. 여기서 더 무서운 건 후회마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킬 것이 전혀 없는 자 또한 약하다. 이미 완전히 망해버렸기 때문에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전혀 구분하지 못 한다. 기름통을 들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어도「그게 뭐가 어때서?」라는 태평한 소리를 읊기 일수다. 그것이 한 없이 자살 행위에 가까운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딘은 크롬 재질의 나이프를 꺼내 날이 튕겨나오게끔 스프링 단추를 재빨리 눌렀다. 그러다 실수로 엄지손가락을 베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칼날을 비스듬히 해서 여자의 목으로 재빨리 들이밀었다. 게지나는 딘의 공격을 깨닫고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바로 쳐다보며 몸을 앞으로 더 밀착시켰다. 덕분에 얇고 말랑말랑한 피부를 자르는 촉감이 손가락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선 건 그래서 오히려 딘쪽이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동시에 혹독하고 음산한 섬광이 코앞에서 번쩍거렸다. 딘은 그것이 뾰족하게 날이 선 유리 파편이었다는 것과, 그것이 자신의 쇄골 부근을 제법 깊숙이 찍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상처를 쳐다봤다. 따뜻한 피가 쉬지 않고 솟구치고 있었다.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쉴 적마다 리듬에 맞춰 셔츠가 흥건히 젖어들었다. 딘은 다시 시선을 들어 게지나를 쏘아봤고, 그녀는 마치 그것만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투로 유리 조각을 흔들며 비틀어댔다. 『으아악!』 폐가 고통으로 인해 수축했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코를 찌릿하게 만들었다.
『넌 죽을 거다.』 여자가 감정이라는게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조곤거렸다. 『누구 맘대로... 난 당신 목을 날릴 거야!』 딘이 지지 않고 응수했다. 그래봤자 게지나는 두려운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편안한 것 같았다. 『그래. 아마도 넌 내 목을 가질 수 있을 거다.』 딘이 휘두른 칼날은 피부를 자르고 이미 근육에까지 닿고 있었다. 깨어진 수도 파이프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물 색깔은 온통 붉었다. 깔깔대며 웃는 소리, 그리고 붉은 물.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딘은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난 네놈의 심장을 찢어낼 거고.』 망할 놈의 유리 조각이 아래로 1cm 내려갔다.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며 몸부림쳤고, 덕분에 상처는 좌우로 각각 0.5cm씩 더 벌어졌다.
『무서운가.』 『무섭지 않아!』 『억지로 참을 것 없어. 나는 네가 무섭다고 울어도 놀라지 않을 거야.』 『울지 않아!』 『과연 그럴까. 넌 곧 혼자가 돼.』 눈의 눈이 황소 만큼이나 벌어졌다. 그녀는 그것이 무시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너 혼자만 남게 돼. 네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어. 그래도 안 무서워?』
숨 죽여 낄낄대는 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딘은 하얗게 눈 내리던 겨울 날의 무시무시한 정적을 떠올렸다. 제설 작업 자체가 포기된 도로 위로는 야생 동물의 발자국마저 남지 않았다. 간혹가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면 샘은 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세상은 이미 멸망해서 샘과 딘, 그들 형제들 단 두 사람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도 둘, 서로를 붙잡은 손도 둘. 싸구려 히터가 말썽을 부린 탓에 코끝이 시렸고, 하루종일 굶어 배가 고팠다. 그래도 딘은 거기서 300년이라도 거뜬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생이 옆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싫어! 난 혼자 되는 거 싫어!』 딘은 자신이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고 여겼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그저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에 질려 애원하는 것에 불과했다. 마치 실수로 접시를 깬 어린애가 잘못했다고 손바닥을 비벼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지나는 푸른 핏줄이 섬세하게 드러난 손가락으로 딘을 세게 붙들고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웃었다. 딘은 붉은 담요가 자신을 둘둘 말았다고 생각하고 몸을 경직시켰다. 『그래봤자 넌 혼자가 될 거야.』 『저리 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래! 왜 나에게 이러는 거야! 지옥에나 떨어져!』 『몰랐어? 깔깔깔! 여기가 지옥이야. 여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아픔이 끝나기를 바라나, 인간아. 내 장담하는데 고통은 지금부터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온 걸 환영한다, 이 바보 놈. 발버둥치다 절망해서 그대로 돌아버리라지. 깔깔깔!』
불타는 유황불. 뜨거운 열기. 머릿속이 완벽하게 투명해졌다. 딘은 또다시 떼쓰는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혼자가 되는 건 싫다. 혼자만 남겨지는 건 싫다. 아버지는 캘리포니아로 사냥을 하러 떠나선 갑자기 연락을 끊고 종적을 감췄다. 샘은 대학에 간다며 나 몰라라 가방을 싸들고 나가버렸다. 엄마는 천장에 달라붙어 뼛가루 하나 안 남기고 불타버렸다.
왜 다들 떠나버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하는 건 하나 뿐인데.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그렇게나 나쁜 어린애인가요. 내가 그렇게 못된 어린애였던가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여자는 유리조각을 쥐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그리고는 일부러라고밖엔 말 못하는 동작으로 스스로 그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칼날이 피부 속으로 완벽하게 파묻혀 사라지면서 역겹고도 뜨거운 액체가 천장까지 튀었다. 딘은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손을 앞으로 무기력하게 내밀었고, 이윽고 생기를 잃어버려 무거워진 몸이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창백한 뺨이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피 묻은 검은 입술이 귀를 스쳤다. 그때 무어라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 이것은 예언이다. 넌 나처럼 될 거야.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단순히 착각이었다. 딘은 진저리를 치며 어떻게든 그 끔찍한 걸 치워버리려 애썼다. - 재밌게 두고 보겠어.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는 여자의 몸을 끙끙대며 체중을 실어 밀었다. - 좋아. 네가 지금부터 무얼 하려는지를 나에게 보여봐. 입술이 반쯤 벌어진 상태로 여자의 얼굴이 땅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닿았다.
느릿느릿 일어나자 무릎이 한심할 정도로 떨렸다. 바싹 마른 목이 빌어먹게 아팠고, 이가 덜덜 떨렸다. 딘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그가 해야만 할 일」을 떠올렸다. 『제기랄. 머리가...!!』 선명한 글씨로 단호한 명령이 적혀 있었다. 메모지는 식탁 위에 사탕봉지와 같이 하여 얌전히 놓여져 있었다. 딘은 그 글자를 소리내어 읽었다. 지렁이가 상한 진흙을 먹고 토악질이라도 해놓은 것 같은 아버지의 글씨체였다. - 총을 찾아라. 존은 집안 구석구석에 총을 숨겨두었다. 자녀들이 총을 가지고 놀다 끔찍한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존은 틈틈이 주의를 주었고, 우습게도 그것은「너는 어리니까 총을 만져선 절대로 안 된다」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 총을 잡아. 침실 서랍장 맨 윗칸에 웃기는 스웨터 아래로 권총이 한 자루 들어가 있었다. 딘은 발돋음을 해서 서럽장을 열고 총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가 깜짝 놀랄 정도로 뜨거워서 얼른 손을 떼어냈다. - 괜찮으니까 어서 총을 들어. 썩 내키진 않았지만 시키는대로 했다. - 어서 네 동생을 찾아. 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방아쇠를 당겨.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목소리는 침착하게 다음으로 그가 해야만 할 일을 지시했다.
Posted by 미야
2007/10/14 23:04
2007/10/14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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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저는 시카고에 바다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체력이 모자라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입니다. 이게 아니다 싶어도 가뿐히 넘겨주는 센스~ ※
고통은 늘 가까이에 있어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분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마니암은 뱀파이어도 고통을 아느냐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 길이가 무려 30cm에 이르는 송곳으로 등과 어깨를 사정없이 찔러대면서 그런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옳지 않았다. 그녀는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지르던 날들과 참기 힘든 갈증, 발목에 채워진 족쇄, 마른 나뭇가지를 닮은 노인의 피부와 창백한 박하 냄새를 기억했다. - 그대는 사탄의 시민이며, 불온한 오류다. 회개하라! 그는 두 여자의 시체를 뜯어먹고 피를 마셨던 이탈리아의 빈센트 베르치니가 그녀의 사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마찬가지로 1878년에는 에우세비우스가 여자 여섯 명을 도륙하고 피에 탐닉하자 그 책임이 전부 그녀에게 있다는 투로 물푸레나무로 만든 십자가로 밤새 두둘겨 패기도 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부위를 촛대로 찌르고 참회를 강요한 적도 있었다. 망할 놈의 성직자는 강간만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1897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서공회에서 발행한 모든 성경을 금지시켰다. 같은 해 교황청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대자선 바자회를 축복했지만 우습게도 5분이 채 못되어 바자회는 저주받은 불바다가 되었다. 유럽의 왕족과 150여명에 이르는 상류층 인사들이 한순간에 화마에 당했다. 사실상의 종속 맹약이나 다른 없던 대 뱀파이어 협정을 주도했던 아나그노리시스 주교는 재가 되었다. 사절단 임원이었던 로마의 잡종견 그마니암도 끔찍한 화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심판. 하느님의 섭리. 게지나는 부드러운 어둠에 몸을 맏기고 차분한 마음으로 성경을 펼쳤다. 그리고는 태고적 목소리로 시편 143편의 말씀을 소리내어 읽었다. -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들을 다 멸하소서 원한을 품은 오리진의 목소리는 땅을 진동시켰고 마침내 상황은 역전되었다. 새디스트였던 그마니암은 숨이 붙어있는 채 구더기에 살을 뜯겨먹히는 바알세붑의 형벌을 받았고, 1899년 봄엔 결국 죽어 선별된 묘지에 묻혔다.
게지나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무사히 달아났다. 기적적으로 딸을 되찾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유럽을 떠나자고 마음을 먹었다. 미국과 스페인이 한참 전쟁을 치루는 중이라서 밀항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은 배에 올랐다. 빈털터리였으나 행복했고, 식구가 온전히 모였다. 그들은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새 삶을 찾았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1904년엔 엡실링이라는 이름의 골동품 상점을 열고 훔쳐낸 출생신고서로 사람처럼 살았다. 세금도 내봤다. 어머니는 햇빛 가리개와 모자로 무장하고 은행에 가는게 신기한 경험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사는게 재밌다고도 했다. 고통은 잠시 그녀의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럭저럭 행복했다. 인간들처럼 돈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조촐한 유희는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곧 시들해졌지만 1915년에 가게를 정식으로 처분하고 나서도 어머니는 암시장에 뛰어들어 톡톡히 재미를 봤다. 사람들은 단 한 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는 깐깐한 그녀더러 잔혹한 흡혈귀라고 불렀는데 그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뼛속까지 뱀파이어였으니까!
막내 루더가 떠돌이 집시처럼 굴던 카밀과 눈이 맞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에브는 카밀의 신분이 낮다고 흉을 봤다. 카밀은 술을 잘 마셨고 언행이 남부의 흑인 계집종 같았다. 유럽의 귀족들과 종종 사귀던 에브의 눈엔 카밀은 종잡을 수 없는 쌍 것이었다. 그치만 섹시했다. 형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영 미더워하자 루더는 카밀을 데리고 달아났다. 이후로 소식이 없다가 1975년이 되어서야 어머니 날에 축하 카드를 보내왔는데 우체국 소인이 루이지애나였다. 에브는 그 다음 날로 기차를 타고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즈로 날아가 우물쭈물해 하는 루더의 귀를 때렸다. 형제는 이후로 다시는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다. 「그 녀석, 시커먼 흑인들 사이에서 재즈를 연주하고 있더군.」에브는 씩씩대며 말했다. 게지나는 사람들 틈새에 당당히 섞여 암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웃었다. 아버지 역시「나는 재즈가 좋아」라고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키 세프의 색소폰 연주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젱킨스에게 살해당했다. 1979년의 일이다. 시신은 수습도 못했다. 젱킨스 일족이 임의로 들판에 눕혀두고 불태웠기 때문이다. 젱킨스는 순전히 망자를 모욕하기 위해 아버지를 발가벗겼다. 성기를 잘랐다는 말도 들렸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탄식했다. 아담이 그 권리를 상속받은 땅에선 뱀파이어는 머리를 누일 장소를 찾을 수 없다 - 그때부터 고통은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그들 가족에게로 다시금 돌아왔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보복으로 젱킨스의 누이동생 둘을 죽였다. 꼭지가 돈 젱킨스는 히틀러마저 어찌해보지 못한 어머니를 붙잡아 대들보에 매달았다. 에브는 젱킨스의 사촌 다섯을 붙잡아 옷을 벗기고 성기를 잘랐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젱킨스는 허벅지에《DOOM》이라는 네 개의 문자를 새겼고, 에브를 십 년에 걸쳐 따라다녔다. 안달이 난 뱀퍼들을 그럭저럭 잘 따돌리는 것처럼 보이던 에브도 결국 1996년에 목이 잘렸다. 가족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게지나는 울먹이며 다시금 시편 143편의 말씀을 암송했다.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들을 다 멸하소서, 멸하소서, 멸하소서! 어째서일까. 인간도 가축의 피와 살을 먹는다. 돼지와 소, 그리고 양을 죽인다. 그렇다면 뱀파이어도 인간을 먹고 살 권리가 있지 않은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오로지 아담에게만 이르렀다면... 그 나머지 생명들은 살육당하고 멸망당해야 한다는 건가! 그것이 신의 섭리던가. 틀리다! 그럴 리 없다. 세상은 이름다웠고, 반대로 인간은 추악했다. 혐오스러웠다. 그들에게 발판을 만들어주기 위해 궁창이 갈라졌다는 그마니암의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다. 인간들의 창세기는 왜곡되었다. 낙원 에덴은 모든 생물과 정령들에게 공평한 삶을 약속했을 것이다.
여자는 갑자기 분노에 휩싸여 주먹을 쥔 손을 높게 들었다. 『너희는 날 죽일 권리가 없어! 그 누구도 나와 내 가족을 해칠 권리는 없었다고!』 딘의 멱살을 움켜쥐고 똑바로 그 눈을 쳐다봤다. 가슴이 타들어갔다. 독이다. 그녀가 삼킨 건 무엇보다도 쓴 포도주였다. 죽은 자의 피.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피. 저승의 냄새가 나는 음료. 여자는 사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무례하고 이기적인 인간아! 신을 멸시하고 악마의 재주에 신나게 놀아난 인간아! 그릇된 방법으로 파멸당할 영혼을 가까스로 보전한 주제에... 주제에! 내 말이 맞지?! 악마와 계약하고 머잖아 지옥으로 떨어질 놈아! 너야말로 악의 씨앗이고, 불온한 오류가 아니더냐!』 『되게 시끄럽네. 입 닥쳐, 잡년아!』 같이 데굴렁 쓰러지면서 딘은 무릎으로 게지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환각 상태에서 외쳤다. 『누가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거야. 뒈지기 전에 우리집에서 당장 나갓!』
소금 결계는 대단히 강력하지만 무적인 건 아니다. 아버지 존은 제법 많은 종류의 악령들을 가르쳐 주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꾀가 있는 것들은 돌이나 나뭇가지를 반복하여 던져 단단한 소금 결정들을 흩뜨려버리곤 했다. 심지어 개과 동물을 닮은 파탈룹스 같은 녀석들은 뜨거운 커피를 식히는 것처럼 숨을 후후 불어대기까지 했다. 그렇게 결계가 깨지면 마물은 안으로 쉽게 침범해 들어올 수 있었고, 이는 곧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의미했다. 다수의 마물들은 인간을 먹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들에겐 금기라는게 없었다. 본능에 충실했고, 그렇기에 자신과 같은 힘 없는 어린이들은 차려진 밥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딘은 얼굴에 묻은 거추장스런 피를 닦아냈다. 목숨은 그리 아깝지 않았다. 허나 침실에 누웠을 코흘리개 동생을 생각했자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냥 당할까보냐! 내가 네년 혼구멍을 내줄테다!』 그리고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우리 아빠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 세상에서 제일 강해! 암염탄으로 귀신을 잡는다고! 아빠가 이 일을 알면 널 가만 안둘 거야. 죽일 거라고!』 그 강하다던 존이 이미 고인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딘은 자신이 존의 자랑스런 에이스라는 것만 기억했다. 게지나는 계속해서 토혈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딘은 두손으로 그녀의 양쪽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고 힘을 가했다. 꿈틀대던 팔꿈치가 방향을 잃은 나머지 그의 턱을 강타했고, 그 즉시 눈앞에서 태양계의 도표가 춤을 추며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아니, 사실 그놈의 망할 도표는 진작부터 딘의 코앞에서 뱅글뱅글 돌며 난리 굿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딘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초현실적인 침입자를 붙잡고 늘어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노력은 하고 있었으나 그가 벌 수 있는 실제적인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고, 체중으로 게지나를 깔아뭉겠다. 그것이 최선이었고, 한계에 임박하자 아랫배를 잡아당겨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동생아~!! 달아나! 명령이다! 힘껏 달아나!』
샘은 딘이 소리를 질러대는 걸 들었다. 그러나 그의 명령대로 할 수는 없었다. 기침이 터져나왔고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듬더듬 바닥을 매만지며 앞으로 전진했다. 죽을 똥을 싸도 같이 싸자고 다짐했다. 이 상황에서 혼자 나 몰라라 달아날 거라면 법학 공부를 때려치고 헌터 생활에 발을 담구지도 않았다. 『딘! 어딨어!』 눈이 무용지물이 되면 다른 감각을 동원하라고 배웠다. 샘은 새카만 방안에서 숨박꼭질을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냄새와 기척, 그리고 육감이라는 걸 사용해 계속해서 예배당 안을 흩었다. 그러다 쾅 소리를 내고 종아리로 나무 의자를 걷어찼다. 욕지기가 나왔다. 이번에는 장애물을 피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허리를 구부렸다. 아니다. 서로의 옷을 잡아당기며 밀어대는 소리가 멀어졌다. 그럼 다시 반대편으로 가서...
『샘!』 얼굴이 파랗게 변한 리가 샘의 어깨를 붙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터뜨렸고, 숨이 막혀 죽기 전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콜록! 아직 딘이 저 안에 있어요!』 『나랑 같이 나가자. 불이 더 번졌어! 더 이상 머뭇거리면 죽어!』 『알아요. 하지만 혼자서는 갈 수 없어요!』 리의 손이 샘의 가슴에 닿았다. 『알아! 그치만 넌 그래야만 해.』 『뭐요?!』 『나는 지금 당장 여기서 널 데리고 나갈 거야, 샘 윈체스터. 네 형은 나에게 네 보호를 의뢰했고, 나는 그 일을 승낙했어. 둘 중에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딘이 아니라 널 살리겠다고 사전에 약속했다.』 『뭐요?!』 『어린애처럼 굴지마! 지금이 퇴장할 시간이라는 거다! 멍청아!』
샘은 이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싫어! 딘은 어쩌고~!!』 리는 딱딱한 표정이 되어 뒷걸음질 치려는 샘을 단단히 잡았다. 『미안하다. 네 형의 일은 유감이다.』 『아냐! 이런게 아냐!』 『이 자식! 나로 하여금 네 갈비뼈를 부수게 만들지 마.』 『이러지 말아! 난 갈 거야! 형에게 갈 거야! 그리고 일러바칠테야! 두고 봐! 딘! 딘!』 『제기랄... 샘 윈체스터! 그래도 여자인데 나에게 이런 중노동을 시키다니!』 칼날처럼 예리한 어둠이 그의 시야를 스쳐갔다. 샘은 숨통이 꽉 막히는 감각에 숨을 훅 들이켰고, 거짓말처럼 그의 두 다리가 번쩍 들렸다. 리는 이런 것쯤이야 문제 없다며 레스토랑용 대형 냉장고를 머리에 이고 가는 공룡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반쯤 감겨진 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물방울이 목덜미에 닿아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망할. 기분이 찝찝하다. 리는 짜증이 치솟았고, 단돈 100달러에 이런 부탁을 당부한 딘이 조금은 지나쳤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Posted by 미야
2007/10/07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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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본문 중에 그리 심각한 건 없지만 노파심에 안내문 들어갑니다.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 한다?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여 익스플로러 창을 닫는다. 눈이 썩는다 싶으면 어떻게 한다? 마우스를 붙잡아 고양이 앞에 던진다. 오케이? 오케이. ※
흑백 영화속의 흡혈귀는 박쥐를 많이 닮아 있었다. 숱이 적은 머리카락은 포마드 기름을 듬뿍 발라 뒤로 넘겼다. 당시에는 끝내주는 신사들의 최신 헤어스타일이었겠지만 유행이 지난 오늘날에 보기엔 대단히 어색했다. 얼굴과 손바닥엔 가는 주름이 졌고, 눈빛은 야광으로 번들거렸으며, 손목은 막대기처럼 야위었다. 쿵쾅대는 시끄러운 배경 음악이 불길한 죽음을 암시하는 가운데 비단으로 만들어진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면 그때마다 분칠을 한 여자들이 픽픽 쓰러졌다. 딘은 단 한 번도 그것이 무섭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곧 아침의 눈부신 태양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마늘을 끔찍이 싫어하던 백작의 가슴으로 굵은 말뚝이 박힐 터였다. 영화의 결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한결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아빠의 모습을 닮은 영웅은 십자가를 높이 들었고, 그러면 흡혈귀는 바로 끝장났다. 주인공들은 기뻐하며 서로 입술을 포갰다. 버터에 튀긴 팝콘을 하나 가득 입에 꾸셔넣은 채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딘은 키스씬에 매우 흡족해하며 이불 속에 숨어 오돌오돌 떨고 있는 어린 동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봤냐, 새미. 마늘을 싫어하면 저 아저씨처럼 가슴에 말뚝이 박힌다. 알겠어? 편식은 나빠. 그러니까 먹기 싫다고 접시 밖으로 얌체같이 골라놓으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샘은 발끈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딘! 내가 오늘 저녁에 먹기 싫다고 한 건 양파였지, 마늘이 아니었어!》 《흐음. 그랬던가. 그럼 마늘은 먹을 수 있다는 거군. 좋았어.》 《뭐, 뭐가 좋다는 거야?》 《내일 아침을 기대해라, 샘. 이 형아가 마늘 범벅 스페샬 팬케이크라는 걸 만들어주마.》 《형, 미워!》
여전히 겁이 나서 이불에서 눈만 빼꼼 내어민 주제에 샘은 형의 목을 조르려 했다. 그런다고 해봤자 샘의 손은 고사리 사이즈였고, 반대로 동생의 옆구리를 간질거리는 딘의 손은 파리채 정도는 되었다. 덕분에 호흡곤란으로 죽어가는 까르륵 소리가 약 5분간 이어졌고, 새미는 참다 못해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걸 능숙하게 엉덩이로 깔고 앉은 딘은「어랍쇼, 내 동생이 갑자기 안 보이네. 이 자식이 갑자기 어디로 숨었지?」능청을 떨며 계속해서 팝콘을 주워먹었다.
그런데 샘의 걱정은 자신을 묵직하게 누르고 앉은 형이 이대로 영원히 안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게 아니었다. 저급한 패스트푸드를 좋아하던 딘이 결국은 펑퍼짐한 궁댕이를 고민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역시 아니었다. 새미의 근심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아기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끙끙거렸다. 《있잖아, 딘.》 《오냐.》 《흡혈귀에게 물린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돼? 몇일 밤 자고 나면 도로 괜찮아진대?》 《음?》 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중한 드레스 차림새로 밤마다 묘지 주변을 배회하던 가엾은 희생자들은 과연 안식을 찾았던가? 글쎄다. 주인공들의 달달한 키스 장면에 정신이 팔려 그런 건 생각도 못해본 딘은 말 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와 마늘로 무장한 영웅의 행보를 감상하던 그에게 온몸의 피를 빨려 죽어간 희생자들의 뒷 이야기를 묻는 건 반칙이었다. 죽어라 역사 과목을 공부했더니 오늘의 쪽지 시험은 수학이다? 염병할.
《그 여자들, 어떻게 되냐니까. 응?》 알게 뭐람! 당황하여 동생의 몸에서 서둘러 내려온 딘은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콜라를 찾는 척하고 주방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혀~엉. 어떻게 되냐고.》 《시끄, 시끄! 인석아, 저건 그냥 영화일 뿐이라고. 감독이 컷, 소리를 지르면「아아, 연기하느라 힘들었다」이러면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주문한 피자를 먹어댈 거다. 저 여자들은 네가 걱정한다고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죽은 것도 아니야. 저것들은 죄다 가짜란 말이야. 특수 효과라고.》 그런다고 해봤자 누구보다 영리한 동생이 뒤로 물러설 리 없었다. 《물론 저건 영화지, 딘. 누가 그걸 모를까봐. 하지만 우리 둘은 어딘가에 저런 나쁜 놈이 있다는 걸 잘 알잖아. 아빠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저런 놈들을 잡고. 안 그래?》 그리고 샘은 콜라를 홀짝거리는 칠푼이 형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불안한 듯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냉장고 속으로 흡혈귀 한 마리가 몰래 숨어들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형, 창틀에 소금 뿌렸어?》 《뿌렸어.》 《문가에도 소금 뿌렸어?》 《응, 거기도 뿌렸어. 덧붙여 우리 새미 얼른 잡아가라고 우편함에 쪽지 붙여놨어.》 《아, 그 쪽지? 내가 먼저 보고「딘을 먼저 잡아가세요」라고 고쳐놨어.》 《하하하! 보기와는 달리 약싹빠른 걸. 역시나 내 동생!》 그래봤자 재미라곤 하나도 없는 농담이었다. 샘은 딘의 허리를 끌어안고 칭얼거렸다. 《그 여자들, 도로 건강해졌음 좋겠어. 정말이야.》 딘은 떼쟁이 동생이 울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걱정 마. 네가 염려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여자들은 예전처럼 혈색 좋은 모습으로 돌아갈 거야. 통통한 비둘기처럼 사방을 뛰어다니다가 나처럼 잘 생긴 남자 친구를 만나는 거지.》 《그걸 딘이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 영화 속편을 다시는 못 만들잖아.》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딘은 샘의 머리카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 영화 속편... 진짜로 만들어지긴 했던가.
여전히 어려보이는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냉장고에 흡혈귀 숨었다고 끙끙대던 모습 그대로여서 딘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맨날 코흘리개 취급한다고 발끈하지만 저렇게 물벼락 맞은 강아지 표정을 지으면서 한 사람 몫을 하는 남자 취급을 해달라 졸라대는 건 넌센스다. 딘은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여전히 애 맞잖아. 조금 있으면 이불 뒤집어쓰고 덜덜 떨겠구먼. 그래서 딘은 시시껄렁한 공포 영화는 그만 보는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새미. 내가 리모컨을 어디에 두었는지 아니? TV는 이제 그만 끄자.』 딘의 그 말에 샘은 이마를 찡그리며 전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리둥절한 건 오히려 이쪽이다. 시야가 여전히 흑백이다. 거기다 비오는 하늘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기까지 했다. 집안 청소를 게을리 하는 편이었어도 보름에 한 번씩은 잊지 않고 걸레질을 했다. 저 정도로 텔레비전 화면이 흐릿하려면 짐작컨대 10년은 넘게 먼지가 쌓여야 할 터다. 허나 윈체스터 집안의 남정네들은 한 장소에 그렇게 오래 머무른 적이 없다. 짧게는 1개월, 아무리 길어봤자 2년이었다. 턱으로 손을 가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설마, 이사를 와서 단 한 번도 청소를 안 했을 리는 없고... 아항, 그렇구나.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깨달음의 미소가 입술을 타고 희미하게 번져갔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텔레비전은 누군가 내다버린 고물이었고, 돈 벌었네 좋아하며 옳다꾸나 주워왔더니 고장난 흑백 TV였다. 『뭐야, 간단한 거였네.』 납득하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딘은 꾸벅꾸벅 졸면서 이놈의 꼬진 전자제품의 전원 스위치가 어디에 붙었는지를 잠시 고민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번쩍 들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손바닥 탁탁 털고 느긋한 기분으로 침대로 돌아가는 거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아버지는 오늘도 집으론 돌아오지 않는다.
도둑은 물럿거라. 악령은 썩 달아나라. 대천사 미카엘의 수호를 구하는 간단한 라틴어 기도문을 외우며 창문의 걸고리가 제대로 잘 닫겼는지를 확인했다. 로즈마리 부적을 창틀에 올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단속을 마치면 동생더러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화장실에 가라고 단단히 일러두어야 할 것이다. 그놈의 골칫덩이가 한밤 중에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와 도움을 구하는 건 정말이지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형. 흡혈귀에게 물린 사람들은 어떻게 돼?》 하얀 여자... 딘은 눈앞으로 보이는 거짓말 같은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문 밖으로 웨딩 드레스 차림새의 여자가 목 놓아 흐느끼고 있다. 아까 봤던 영화 속 장면이다. 신랑을 맞지 못한 신부의 베일이 밤이슬로 축축히 젖어들었다. 딘은 표정을 달리하고 재빨리 소금으로 만든 결계가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빠에게서 받은 암염탄을 어디에 감춰두었는지를 하나 둘 헤아렸다. 서둘러야 했다. 언제부터 워싱턴 슬럼가의 골목길이 공동묘지로 바뀌었을까. 검은 새의 둥지 속으로 마른 뼈가 가득하다. 누렇게 죽은 잔디 위로 누운 비석들이 차갑다. 《몇일 밤 코~ 자고 나면 도로 괜찮아져?》 괜찮다. 저 망할 것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 한다. 절대로 못 들어온다. 《그 여자들, 건강해질 수 있어?》 설령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다고 해도 그는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다.
결혼식을 맞이하지 못한 신부가 축복받지 못할 부케를 높게 던졌다. 저승에서부터 날아든 꽃이 그가 서있는 유리창에 탁 소리를 내고 부딪쳤다. 피처럼 빨간 장미... 피처럼 빨간... 퍼득 현실로 돌아왔다. 몸이 허공 위로 붕 떠있다. 아니, 떠있다기 보다는 옆으로 드러눕는 중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쿵 소리가 나면서 어깨부터 바닥에 부딪쳤다. 『크흑!』 아픔은 나중이었다. 딘은 방금 전에 장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로맨틱한 종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둥근 모양새로 사방으로 신선한 핏방울이 번져 있다. - 부탁이니 저게 내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고 좀 해라. - 진땀이 눈으로 흘러내렸고 숨이 가빠졌다. 뜨겁고도 굵은 바늘로 찔린 목덜미가 활활 달았다. 저릿거리는 통증이 급격히 어깨를 타고 가슴까지 내려왔다. - 하느님! - 딘은 여자에게 실연당한 머저리처럼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여기까지 와서 쪽팔리게 울 수는 없단 말입니다! - 그치만 이미 그의 눈은 눈물로 범벅이었고, 전혀 감춰지지 않은 신음소리가 벌려진 이 틈새로 새어나왔다. 통증이 어찌나 격렬하던지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된 건 아닌가 걱정이었다. - 정말로 그런 거라면 어쩌지. - 손가락을 까딱거리려 노력하며 눈을 아래서 위로 굴렸다. 가느다랗게 기침이 터져나왔고, 배가 아팠다.
그 못지않게 고통스럽게 콜록이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새미...?』 딘은 동생이 감기에 걸린 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샘? 괜찮아? 너 어디 아파? 지금... 어딨니? 화장실에 있어?』 옆으로 누운 딘은 자신의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점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또 텔레비전이다. 누가 리모컨 버튼을 자꾸 만져대는 건지 모르겠다. 화면이 바뀌었고, 레드삭스 팀이 나오는 야구 중계를 보고 싶었던 딘은 슬슬 신경질이 났다. 『너어~!!』 손가락이다. 하얀 손가락이다. 이번에도 무덤가를 방황하는 신부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입으로 피를 한웅큼이나 뱉어냈다. 그때마다 머리가 흔들렸고, 얼굴에서 모든 활력이 씻겨나가 버렸다. 발작하듯 걱걱대며 가슴을 움켜쥐자 콧구멍에서도 핏덩이가 쏟아졌다. 큰일났다 싶을 정도로 많은 피였다. 『아파! 아파!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네놈! 이 피는 도대체 뭐야! 콜록!』 기침소리는 더욱 격해졌고 그때마다 깨알처럼 작은 붉은 반점들이 딘의 얼굴로 튀었다.
아아, 시끄러워 죽겠다. 딘은 잠이나 실컷 자게 누군가 작은 친절을 베풀어 텔레비전의《음-소거》버튼을 지긋이 눌러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Posted by 미야
2007/10/0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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