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주일엔 교회에서 식당 봉사를 해야 합니다. 제가 할 일은 500개의 밥그릇을 세척기에 넣고 돌리는 거예요. 아무래도 짬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새벽에 올려놓고 자러 갑니다. ※
평소에는 빨리 밥상 차려라, 재털이 대령해라, 리모컨 가져와라 큰소리 뻥뻥 치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마누라에게 쥐어박히고 사는 남자들이 있다. 『리? 나는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어.』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들은 마누라를 목숨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일부러 져주는 거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자녀 교육이나 실내 인테리어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부인이 가지고 있고, 남편은 거기에 대한 발언권이 없다. 부인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상냥하고 순종적인 아내는 알고 보면 남편을 원격 조정하는데 선수다. 남자는 아내의 손바닥 위에서 춤이나 추다가 맥 풀린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여자는 사랑한다며 부드럽게 입을 맞춰온다. 그리고 귓가에 달콤함을 속삭인다. 최소한 TV 리모콘은 당신 손에 있잖아 - 하고. 그러니까 침실 벽을 끔찍한 녹색과 보라색으로 칠해도 찍 소리조차 내면 안 된다.
이슬이 맺힌 차가운 맥주병을 눈앞에서 흔들면서 리는 끌끌 혀를 찼다. 『진짜지 형님의 위신이라는 건 형편 없군.』 남의 시선이 이다지도 괴로운 건지 미처 몰랐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맥주가 목구멍에서 리턴하려 했다. 견디다 못해 딘이 빽 소리를 질러댔다. 『그만 쳐다 봐. 내 머리로 꽃 달렸냐.』 『그래! 머리에 리본 달렸다. 이 버터로 만들어진 몽둥이 같은 놈아!』 『버터? 실례야. 난 그렇게 느끼한 남자가 아니라고.』 『누가 느끼하다고 그랬어? 내 말은 물렁거린다는 거다!』 변명할 말이 없다. 딘은 엉뚱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척했다.
딘은 샘이 변호사 지망생이라는 걸 기억했어야 했다. 잊어선 안 되는 거였다. 「28세가 되도록 일정한 주거지도 없어, 직업도 없어, 우편 사기, 신용카드 사기, 공무원 사칭, 무덤 훼손... 일급 살인에 무장 강도.」 처음엔 누구를 말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다 번쩍 벼락이 꽂혔다. 딘은 몸서리칠 지경으로 꼭지가 돌았고, 화가 났다. 아무리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라 해도 그렇지. 형을 두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샘!」 「그거 알아? 딘은 누가 보더라도 무지 형편없는 놈이야.」 이어 잠시의 틈도 주지 않은 채 통렬하게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형이 어느날 갑자기 없어지면 다들 이렇게 말하겠지. 알게 뭐냐고. 이대로 사라져도 상관 없지 않느냐고. 오히려 잘된 일 아니냐고!」 동생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그 즉시 깨달은 딘은 입이 달라붙었다. 「난 말이지, 형이 말도 없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아마 돌아버릴 거야. 딘이 흡혈귀에게 끌려갔다는 걸 알게 되면 거기서 더 돌아버리겠지. 여기서 누군가《확률상 이미 죽었을테니 포기해》라고 말하면 난 그렇게 말한 녀석을 맹세코 총으로 쏴버릴 거야. 그런 자식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줄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기만 해 보라지. 가만 두지 않아. 엉망이 되도록 주먹으로 패버릴테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들었어?」
알아 들었으니까 리의 충고대로 주 경계선을 넘는 대신 엉뚱한 반대편으로 차를 몰아「칼리아나」술집에서 눈치나 보고 있는 것이겠지. 내용물이 거의 비워져가는 맥주병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렁거린다는 리의 비난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기다 속으로 덩실덩실 춤이나 추고 앉았고... 「그런 자식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하기만 해 봐. 살려 두지 않아.」 얼굴을 쓸어내리며 이 화끈거리는 뺨의 열기는 전부 다 알콜의 탓이라고 변명을 해보았다. 그렇다, 취기 탓이다. 그렇치 않고선 설명이 불가능하다. 병을 기울이고 마지막 한 입 분량의 술을 찾아 입술을 쪽쪽거렸다. 마침내 병은 비었고 현기증과 비슷한 감각이 뒷덜미를 문질렀다. 그게 제법 찌르는 느낌인지라 아파서 신음 소리를 냈다. 지랄한다며 리가 다시 눈을 야렸다. 그녀는 아직 화가 덜 풀린 상태다.
사람을 찾습니다,「칼리아나」의 전언판 한 가운데로 두 장의 전단지가 붙었다. 흑백으로 인쇄된 조 와이저와 다니엘 크로포드의 얼굴은 미안한 얘기지만 흑인인지 백인인지조차 판단을 힘들게 했다. 수 백번씩 복사기기에 대고 찍어낸 탓에 이미지가 뭉개진 탓도 있거니와 원래의 사진도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두운 장소에서 플래쉬도 터뜨리지 않고 찍기라도 했나. 턱 아랫부분이 비정상적으로 시커멓게 보여 누군가 술김에 일부러 연필을 들고 장난을 친 건 아닌가 다시 보게 만들었다. 많고 많았을 사진 중에 하필이면 왜 저 사진을 골랐는지 모를 일이다. 온순하고 멍청한 인상의 조 와이저는 졸려 죽겠다는 표정으로 헤죽 웃고 있었다. 늦게까지 풋볼 중계를 시청하느라 피로에 지친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단순히 간이 나빴을 수도 있다. 그 옆에서 다니엘 크로포드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다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마리화나 한 대를 빨아댔다는 느낌이었다. 전반적으로 둥굴고 펑퍼짐한 조와는 달리 광대뼈가 도드라져 인상이 나빴다.「실종」이라는 글자 대신「이 남자를 발견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경찰에 신고하세요」라는 문장이 더 어울릴 법한 뉘앙스다. 콧잔등을 장식한 흉터로 보자면 거칠거칠한 사내들 틈새에서 주먹질을 제법 하고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직업 권투선수라면 또 모를까, 코뼈가 부러지는 경험은 그렇게 쉽게 겪는게 아니다.
『우리 동네 최고 말썽꾸러기들이지요.』 전언판을 빤히 쳐다보는 딘을 향해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경쾌한 어조로 말을 붙여왔다. 『정말 못 생겼죠?』 그녀는 나지막히 킬킬 웃으면서 음료수가 묻은 엄지손가락을 입속에 넣고 빨았는데 그런 색정스런 행동은 누가 봐도「나랑 같이 놀아요」라는 표현이나 다름 없었다. 『Qui Mariam absolvisti...』 막달라 마리아에게 관용을. 딘의 오른편에 앉은 리가 눈치껏 라틴어로 이죽거렸다.
『저 사람들, 잘 알아요?』 핀볼 머신의 은색 볼이 튕겨오르는 땡그렁 소리가 배경음으로 들려오는 가운데 손가락으로 전단지를 가리켰다. 일단은 정보 수집이다. 딘은 붙임성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는 탄력성 풍부한 살덩이를 흔들며「당연하죠~」라고 대꾸했다. 팬티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난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면서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이 가게 단골이죠. 그리고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적도 있어요. 저 뚱땡이 - (부었다는 표현으로 봐선 조 와이저 쪽이었다) - 가 나랑 데이트 하자고 얼마나 끈덕지게 졸랐는지 몰라요. 엉덩이에 꼬리라도 있음 정신 없이 흔들렸을 거예요. 뭐, 앞쪽으로도 그럭저럭 흔들거리는 물건이 하나 붙어 있긴 하지만... 헤헷, 그게 너무 작아서 말예요. 아무튼 형편 없는 자식이예요. 태엽이 풀려버린 싸구려 회중 시계가 따로 없죠. 소문으론 인터넷으로 여자 속옷을 샀대요. 그것도 한 번 입었던 걸 말예요. 알만 하죠?』
완전히 구제불능의 변태로 찍혔군. 딘은 이도 저도 아닌 불명확한 흐응 소리를 내는 것으로 대략 맞장구를 쳐주었다. 『알만하네요.』 『그렇다니까요. 하여간 여자라면 사죽을 못 쓰는 성격이라... 보나마나 멋 모르고 유부녀를 건드렸다가 된통 당하고 있는 중일 거예요. 무서운 서방이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쫓아오니까 부랴부랴 친한 친구 하나를 끌어다가 줄행랑을 친 거죠. 자동차는 길가에 버려놓고「나는 죽었어요, 그러니까 친애하는 치안 판사님 및 경관 나으리. 그리고 오입질 당한 남편 분께선 더 이상 날 찾지 말아주셨으면 해요」이러는 거예요. 안 봐도 비디오라니까.』 『그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나 보지요?』 『흐음... 고등학교 시절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적이 딱 한 번 있어요. 한 달 뒤에 뻘쭘한 모습으로 돌아와선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뉴욕까지 무전 여행을 하고 왔노라 시시껄렁한 소리를 지껄였지만 그딴 소릴 누가 믿어줘요. 실수로 여자를 임신시켜서 겁에 질린 나머지 달아났었나 보다, 다들 그렇게 짐작했죠. 덕분에 멍청이 같은 조는 한 학년 꿇었고요.』 그리고 더 웃기게도 그 임신시킨 여자가 나라고 소문이 났었지 뭐예요 - 하고 손사래를 쳤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 재미 있는 얘기야?』 반듯하게 허리를 편 샘이 안줏거리용 팝콘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초리는 공격적이다. 이크, 이러다 불벼락 떨어질라. 딘은 여자에게 손가락을 흔들어「즐거웠어요」라고 간단히 인사한 뒤에 샘이 앉을 자리를 서둘러 마련해 주었다. 『별 거 아니었어, 샘.』 『그래? 저쪽에서 언뜻 보기엔 무척 즐거워 보이던데.』 의자에 앉고 나서도 번쩍번쩍 빛나는 크롬 도금과도 같은 샘의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단히 매력적인, 유니크한 멋진 표정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딘에게는 bitch 모드 발동 중인 동생이「나는 형을 걷어차고 싶어」라고 빔을 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 그것은 곧 그로 하여금 몸을 사리게 만들었다. 『글세다. 우린 조 와이저가 한 학년 유급하게 된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 그치?』 『우리라는 표현은 빼, 딘 윈체스터. 그 이야긴 너만 듣고 있었어.』 얄밉게도 리는 가라앉으려 하는 배에서 재빨리 몸을 뺐다. 헤엄에는 자신 있으니 SOS 신호를 발신하는 배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겠다는 속셈이었다. 덕분에 팝콘 접시는 쾅 소리를 내며 하강했고, 바짝 긴장한 딘은 무릎 위로 가지런히 두 손을 얹었다. 지상을 싹쓸이 하는 허리케인이 다가왔을 적에 풍향계는 230m의 최고치를 기록한 뒤에 갑자기 그 눈금을 제로로 떨어뜨리는 법이다. 지금의 샘이 딱 그거였다. 『누구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누구는 여자랑 히히덕거렸다 이거지...』 얼음 송곳처럼 날이 선 녹색의 눈이 찌를 듯이 응시했다. 딘은 여기서 더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더 이상의 설명은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니까 냉장고에서 갗 꺼낸 맥주를 나에게 주세요. 팝콘도 같이요.
쥬크박스에서 시끄러운 컨츄리 노래가 터져나왔다. 『그래, 뭐라도 건졌니?』 입에서 병 주둥이를 짐짓 떼어내고 리가 질문했다. 『한 바퀴 돌아봐도 별 거 없네요. 다니엘 크로포드는 최근 인터넷 포커에 혈안이 되어 있었대요. 빚이 감당할 수 없게끔 많아지니까 도망친 거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예요.』 『어쩐지 사람들 눈치가 심각한 것과는 거리가 멀더라니.』 『그러게요...』 샘은 살짝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그래도 사람이 둘이나 없어졌는데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실종 소식을 전해들은 누이조차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했다 - 라고 손님들이 먹어치운 빈병을 치우던 바텐더가 말해주었다. 비극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실종은 비웃음거리였고, 조롱거리였다. 석 달 정도 후에 아무 일 없었다며 다시 나타나 인디언식 이야이야호 노래를 부를 거라 호언장담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곤 외계인에게 납치당했다 풀려났다며 거짓말이나 할테지.」 평소 행실이 무지 엉망진창이었던 거다.
『그런데 우리 말고도 다니엘과 조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 있대요.』 리의 눈이 슬그머니 날카로워졌다. 『이 동네 사람은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뭐랄까... 느낌이 차갑고 깡마른 남자였대요. 바텐더 말로는 사립탐정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것저것 쑤시다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같이 꼬셔대던 검정 머리의 여자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곤 진토닉을 주문했다더군요.』 그리고 미남이라고 합디다 - 라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뭐? 미남이라는게 정보야?』 그때까지도 잠자코 듣기만 하던 딘이 기가 막히다는 투로 팝콘을 쥔 손을 흔들어댔다. 『미지의 사립탐정 씨는 코가 오똑하고 눈썹이 영화배우처럼 짙었어요 - 그게 정보냐고.』 샘은 더 들어보라는 식으로 테이블에 바짝 붙었다. 『피부가 대단히 하얗더군요, 햇볕을 전혀 쬔 적이 없는 사람처럼요 - 라고 하면 어때.』 『어, 그건...』 그 즉시 딘은 성가시게 흔들어대던 손동작을 멈췄다. 숨을 들이마신 뺨이 훌쭉해졌다.
Posted by 미야
2007/07/01 04:21
2007/07/01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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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시체는 물론이고 신발 하나 나오지 않았으니 경찰관들로서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었을게다. 조 와이저의 차는 일찌감치 견인된 상태였고, 술주정뱅이가 둘씩이나 땅으로 꺼진 장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를 마쳤다. 주의깊게 좌우를 살피던 샘이 이쯤이라고 미리 언질을 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나칠 뻔했다.
차에서 내린 딘은 무슨 의식을 치루듯 주머니에서 꺼낸 코인 하나를 던졌다가 손등으로 그걸 받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자유의 아줌마가 - 여신이 위를 향해 있었다. 우리에게 행운을. 아무 것도 아닌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도로를 따라 100m 가량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간선 도로의 평범한 일상은 끝도 없이 길게 펼쳐졌다. 담배 꽁초와 같은 약간의 쓰레기, 그리고 흙먼지가 전부다.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을 따라 한동안 빗물 구경을 못해 누렇게 타들어간 잡풀들이 제풀에 지쳐 벌러덩 누웠다. 간혹 녹색을 띄고 있는 부분도 보였지만 상태는 그리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죽어가는 풀에서 자동차 배기 가스 냄새가 심하게 났다. 아무래도 부근으로 비 소식이 끊긴게 제법 지난 모양이었다. 씻겨 내려간게 없을 터이니 증거를 찾는 사람 입장에선 반가운 소식이었다. 딘은 동생에게 계속 걷자는 신호를 했다.
설마 이대로 발품을 팔아 주 경계선을 벗어나려는 건 아니겠지. 임팔라에 기댄 채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돌리던 리는 그들이 생각 외로 꽤 먼 곳까지 걸어가자 지친 듯한 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들~!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 여기선 히치하이크가 위법이라우~』 간혹가다 딘은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뭔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했는데 그때마다 강아지처럼 따라붙은 샘이 쭈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흙을 만졌다. 의견을 교환하며 주의깊게 돌을 고르는 모습이 어쩐지 바닷가에서 조개 껍질을 줍는 아이를 연상시켰다. 두 사람 다 표정이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한낮의 소풍을 즐기는 정겨운 가족이었다. 리의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샘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스프링 장치가 달린 장난감 목각 인형처럼 갸웃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어쩐지 손을 흔들어 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리는 본능에 따라 재빨리 팔을 들었다. 허나 괜한 짓이었다. 그 즉시 샘의 표정이 잇몸을 드러낸 살쾡이가 되었다. 행실 고약한 의붓 엄마따윈 필요 없다며 얼른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기 형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라요. 나는 마음씨 고약한 신데렐라 계모예요. 맘대로 미워하라지.』 어색하게 팔을 내리면서 리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덤불 속으로 몇 발자국 들어갔다 나온 딘이 겉옷 주머니 속으로 깊숙이 손을 찔러넣었다. 『어디를 봐도 급정거를 한 흔적이 안 보여. 공갈 자해단처럼 지나가는 차량 앞으로 무작정 뛰어들지는 않았나봐.』 계속해 보라는 시늉을 하며 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딘은 그녀가 의외로 담배를 자주 피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틴의 악취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점에 놀랐다. 달콤한 화장수를 아무리 많이 뿌려도 체취에 섞인 담배 냄새는 그렇게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녀의 살 냄새는 맑았다. 『왜 빤히 쳐다보는...』 『미안, 리. 별 것 아니야.』 딘은 서둘러 대꾸하고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흡혈귀 서너마리가 합동해서 길을 가로막은 것 같지도 않아. 시골에선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도시보다 되려 더 강하지. 술에 엉망으로 취하긴 했어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몰랐을 리 없으니까 차에서 결코 내리려 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눈치껏 후진해서 뒤로 내빼려 했을 걸. 그랬다면 어느 정도의 실랑이가 있었을 것이고, 세워진 차는 문짝이 박살났어야 옳아. 하지만 발견된 차량의 외견은 깨끗했지.』 『좋아, 탐정 나으리. 지금까지 추리한 내용을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만 지적해줘.』 『사내 자식 둘이 자진해서 차에서 뛰어내릴 일이 뭐가 있겠어. 뻔하잖아. 여자야.』 미인계... 꽤나 고전적인 방법이다. 동시에 실패할 확률이 적은 작전이기도 하다. 리는 동의를 표시하며 연기를 깊게 빨았다.
딘이 반대편 차선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본네트 뚜껑을 올리고 선 가공의 차량을 상상해보는 것 같았다. 설명하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내지는 기름이 떨어진 것 같다 하면서 수척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도와달라고 하는 거야. 조 와이저는 별 생각 않고 차를 세웠고 여자에게 접근했겠지. 여긴 외지고 어두운 곳이니까 곤경에 처한 아가씨를 순수하게 도우려는 선의만이 아니라 나쁜 마음을 먹고 다가갔을 수도 있어. 십중팔구 전화가 있는 주유소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하면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문질렀을 걸.』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여자의 얼굴에서 겁에 질린 표정이 사라지고 대신 교활한 사냥꾼의 본성이 드러난다. 아차 하는 사이에 분위기 역전이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공격 자세를 취하는 뱀파이어 앞에선 키와 몸무게의 이득은 그다지 도움이 되어주지 않는다. 술에 취해 반사신경이 느려졌다는 핸디캡도 있겠다, 혼비백산한 다니엘 크로포드와 조 와이저는 그리 멀리 달아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압당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홈런 한 방 치려다 졸지에 저승 사자와 통성명 절차에 들어간다.
리가 담배를 든 손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오케이. 만약 네 말대로라면 공격에 가담한 그룹의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았을 거야. 여긴 사방이 확 트여서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몸을 낮추고 매복하기엔 그리 썩 좋은 장소는 아니거든. 도로 가장자리로 배수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풀로 뒤덮힌 가파른 비탈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미끼 역할의 여자 말고 기껏해야 두 명 정도 더 있었을 거야. 그보다 숫자가 많으면 바로 의심을 샀을테니 상대를 속이기 어려웠을 거다. 뭐, 그래봤자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이 모든 건 정황에 불과한 것이고... 이빨은 찾아봤어?』 바야흐르 숙제 검사의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필통에서 빨간 색연필을 꺼내들었고, 딘은 이거겠거니 하고 모은 잡동사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여주었다. 두 개는 짙은 갈색이었고, 나머지 셋은 밝은 황색이었다. 모양은 모두 뾰족하고 단단했다. 딘의 얼굴로 얼핏 불안의 빛이 스쳤다.
그녀는 립스틱이 가장자리에 묻은 담배를 구석으로 던지며 짧게 말했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가 꽝이라는 소식에 딘은 아무 말 없이 손바닥을 털었다. 그의 아버지가 순찰차가 우굴거리는 장소를 더듬어 뽀얗게 빛나는 이빨을 찾아냈던게 생각났다. 날고 기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걸 가리키는 것일지도. 딘은 손바닥으로 콧잔등 아래를 문지르며 애써 실망감을 감췄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집중력? 판단력? 그것도 아니라면 압도적인 경험의 차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뱀파이어 이빨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하는데 과연 샘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수 있을까.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샘을 지키는 건 온전히 그의 일이다. 지금과 같아선 안 된다. 보다 더 잘 해야 한다. 정말 잘 해야 한다.
리가 은근슬쩍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 정도로 실망할 건 없다. 제대로 하고 있어, 넌.』 짐짓 밀어내며 강하게 반박했다. 『멋대로 짐작하지 마. 내가 언제 실망했다고 그래.』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Good. 좋은 자세다.』
뾰족한 부츠 뒷굽으로 땅바닥을 푹푹 헤집으며 밝게 말했다. 『어쨌거나 이게 다 흡혈귀들의 소행이라고 치자. 녀석들이 이곳에서 한 탕 해치우고 다른 주로 떠났다면 그건 곧 나의 일이지. 반대로 놈들이 버려진 농장 같은 곳으로 숨어들어가 한동안 은둔을 하려 한다면 그건 너희들과 어떻게든 관련되었을 일이 되어버려. 자, 어떠냐, 샘? 넌 어느 편이 마음에 들지?』 샘은 아빠가 좋으냐, 아님 엄마가 좋으냐는 질문에 단호히《럭키 참스》라고 대답할 아이다. 그리고 엘모와 빅 버드 (*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 중에 뭐가 더 마음에 드냐는 질문엔《형》이라고 답할 거다. 딘은 동생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대답이 무슨 내용일지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샘은 배반하지 않았다. 『둘 다 싫어요. 전 이게 정신 나간 술주정뱅이가 도랑에서 굴러 다리를 분질렀다는 줄거리였음 좋겠어요.』 리는 흙을 이리저리 걷어차는 동작을 멈추고 쯧쯧 혀를 찼다. 고의는 아니겠으나 얼마쯤 비꼬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거 미안하게 됐군, 샘. 네 희망은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거든.』 허리를 짐짓 구부리고 진한 홍차 빛깔의 작은 조각 하나를 주워들었다. 햇살에 이리저리 돌려보자 뱀의 독니처럼 반투명하게 자르르 윤기가 돌았다. 가운데로 구멍을 뚫어 줄에 묶으면 그대로 장신구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그 전에 기분이 나쁘다는게 문제겠지만 말이다. 『가엾은 술주정뱅이들... 어딘가에서 피를 좍좍 빨리고 있겠군.』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리는 종업원에게 팁 건내어주듯 발견한 이빨을 샘의 셔츠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피해자를 살려두는 건 아무리 길어봤자 사나흘이다. 피에 대한 갈증과 굶주림이 심하면 짧게는 하루만에 시체로 만들기도 한다. 리는 가만히 날짜를 헤아렸고,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그 모습에 샘은 안달이 났다. 『잠깐만요. 그러지 마요. 우리가 서두르면 구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샘? 이걸 아셔야지. 우리는 왕 모기를 때려 잡는게 아니야.』 『왕 모기가 아니니까 그러는 거예요. 아직 그 두 명은 살아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라고요. 그러니 어서 뱀파이어 소굴에서 무사히 구해낼 궁리를 해야죠!』 『이봐. 넌 그 두 사람의 목숨이 네 목숨보다 소중하든? 꼬맹아,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것 하나를 반드시 지켜야 해. 그게 뭔지 알아? 그건 내가 위험에 처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남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내가 굶주려서야 되겠니.』
순간적으로 얼굴을 어찌나 찡그렸던지 샘의 얼굴이 주름 투성이로 변했다. 『그게 어떻다는 거죠. 우리들이 하는 일은 푹신거리는 방석에 앉아 달콤한 과자를 먹는 종류의 일이 아니예요. 제기랄! 우린 헌터라고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늘 그렇게 해왔어요.』 『오호, 그러셔.』 대꾸하는 리의 목소리가 협박조로 낮아졌다. 뱀이 머리를 쳐드는 속도로 손가락을 세웠다. 너무 빨라서 움직임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신장이 거의 2m에 달하는 샘을 노려보며 지시하는 태도를 갖췄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하시겠다?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안돼. 잊지 마. 뱀파이어에게 보복 위협을 받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너희 두 사람은 지금 당장 차를 몰고 주 경계선을 넘는게 좋겠다. 나는 하루나 이틀 정도 이곳에 남아 다른 뱀퍼에게 이곳의 일을 인계하기 전까지 상황을 살피마. 자! 빨리 움직여!』
행동의 차이는 두드러졌다. 딘은 명령에 반응하여 곧장 임팔라를 향해 돌아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샘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제 자리를 지켰다. 이마 정 중앙엔 푸른 힘줄이 사정없이 솟아 있는 상태였다. 딘은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동생을 향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샘.』 『어째서야? 왜 형은 저 여자가 하자는대로 하는 거야?』 『그녀가 전문가니까.』 『형! 우리도 전문가야!』 『그만 둬. 확률적으로 그 두 사람은 이미 시체가 되었을 거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그까짓 숫자로 그들의 생사 여부를 성급하게 결론짓지 말아. 게다가... 이런 말 하긴 진짜 싫지만 형은 산수도 잘 못 하잖아.』 산수도 못 한다는 말에 딘은 울컥했다. 『왜 이래. 5 더하기 8의 답이 13이라는 걸 내가 모를 걸 같냐?! 이러지 마.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게 좋겠다는 리의 말은 대단히 합리적이야.』 『흥. 그럼 내 행동은 비합리적이고?』 『새미! 그렇게 똥 밟은 소처럼 뒷걸음질 치지 말고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네가 위험에 빠진 사람 전부를 구원하고 싶어 안달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난 이건 아니라고 봐. 일에는 우선 순위라는게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다 듣지 않고 샘은 악을 썼다. 『형에게 실망이야!』
딘은 심한 불쾌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나에게 실망이라고? 지금 나에게 실망했다고 그랬어? 판단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딘은 동생을 다그쳐 보기로 했다. 『샘! 닥치고 차에 타. 빨리!』 여기서의 문제. 샘은 그 대단한 존 윈체스터마저 어쩌지 못한 고집불통 아들이라는 거였다. 역시나. 동생은 도리질했다.
Posted by 미야
2007/06/28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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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생일 기념으로 어제 안경을 새로 맞췄습니다. 세피아색 안경테를 하고 싶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색이 와인색이라고 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푸른빛이 도는 회색으로 타협봤어요. ※
그로부터 불편한 침묵이 약 5분간 계속되었다. 샘은 귀를 긁었고, 딘은 책상을 더듬거리며 없어진 볼펜 뚜껑을 찾는 시늉을 했다. 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각자 딴 짓을 하는 척하며 상대의 분위기를 탐색했다. 그리고 자진하여 뭔가를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깊은 명상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리가 고개를 들었고,「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의 의미로 마스카라를 짙게 바른 속눈썹을 깜빡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 세 명은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라 직업적 헌터였다. 수십 겹의 껍질을 벗겨봤자 어제와 똑같은 양파 껍질이었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봤자 소득 하나 없을 거라는 걸 깨닫자 리는 탐색하는 시선을 곧 거두어 들였다. 포기는 산뜻했다. 대신 극단적 동작으로 - 마치 2만 볼트의 전기 충격기라도 꺼내는 식이었다 -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렸고, 그 짧은 사이에 준비 자세를 갖추며 단숨에 숨을 들이마셨다. 시작! 키프리아누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배운 그대로 뱀을 역사했다. 깐따삐아 까죠봉 어쩌고.《여보세요?》이후로 리가 신나게 떠들어대는 말들은 신들린 제사장들이 발로 땅을 박차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부르는 노래 가사와 비슷했다.
윈체스터 형제들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문화인의 에티켓은 단돈 25센트에 팔아치운게 분명하다. 조곤대며 설명하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악을 쓰는 것처럼 커졌다. 발음 또한 곱절로 빨라졌다. 안단테에서 메조 포르테의 박자로, 부드러운 알토 하모니카에서 마침내 트럼펫으로 악기 품목이 변경되었을 즈음의 그녀는 강 건너편으로 옮겨간 사공에게 잃어버린 봇짐 내놓으라 호통을 치는 마쿰 도깨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화성인과 텔레파시 교신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캘리포니아 아에테리우스회 중간 간부의 발악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저 여잔.』 『글세다, 샘. 아마 아프리카에 사는 전 남편에게 이번 달 이혼수당을 독촉하는 모양이다.』 귀는 열려져 있는지라 리가 경고조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나는 아무 말 안 했어요. 샘은 퉁퉁 불어터진 표정으로 펼쳐놓은 신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넋 놓고 있지 말고 빨리 소지품이나 챙겨, 형.』 『왜?』 『휴우... 장담하는데 앞으로 1분 뒤에 우린 여기서 쫓겨날 거야.』
침묵의 미덕을 모르는 자는 지식의 방주에서 메뚜기처럼 뛰어내릴지어다. 열람실을 잔잔한 호숫가처럼 완벽하게 통제하기 원하는 도서관 직원이 이를 수수방관할 리가 없었다. 테가 검고 네모난 안경을 쓴 관리자가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달려나와 세 사람을 노려봤다. 거만하면서도 음침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38인치 허리로 - 어쩌면 복부일지도 모르는 장소로 손을 얹었다. 리는 잘못했다는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그녀는 수화기 저편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손가락으로 출구를 가리킨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따라서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 사과하는 일은 온전히 윈체스터 형제들의 몫이 되었다. 『억울해요. 난 아니예요. 내 핸드폰은 진동 모드로 되어 있단 말예요!』 『시끄럽소! 공공장소에선 휴대폰 사용 금지라는 것도 모르오?! 닥치고 세 사람 다 퇴실하시오.』 직원은 샘의 정중한 사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안녕히 가시라 인사했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쫓겨난 뒤에도 뱃속이 뒤틀리는 감각은 계속되었다. 용케 살아서 위장에까지 도달한 오징어가 빨판이 달린 여덟 개의 다리를 휘둘러대며 난동을 부려댔다. 딘이 자동차 키를 들고 임팔라의 잠금 장치를 풀자마자 리는 이때다 하고 샘을 옆으로 밀쳤다.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조수석 쪽으로 냉큼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문을 잠궜다.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 샘은 격노하여 소리쳤다. 『이봐요!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리는 계속해서 전화통에 대고 억양이 괴상한 외국어로 떠들어댔다. 시선은 정면으로 고정된 채였다. 자동차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어뜯으며 끙끙대는 샘은 관심 밖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텅 빈 일회용 컵을 내밀며 신호 대기 중인 차량을 향해 구걸하는 사람 취급이다. 샘이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두드려도 못 본 척했다.
『형! 저 여자에게 뭐라고 해줘!』 그렇게 요구해봤자... 딘은 난감했다. 내리라고 해서 내릴 여자가 아니다. 당연하다며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막무가내다. 잠시 통화를 중단한 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 걸 봐라.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출발 안 해?』 『아직 동생이 차에 타지 않았어.』 『굼벵이처럼 꾸물거리긴. 서두르라고 그래.』 첩첩산중이다.
힘껏 붙들린 조수석 손잡이가 위태로운 달각달각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딘은 동생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기 자리를 빼앗은 리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싶어 안달이라는 것도 알았다. 샘이 유리창 너머로 호소하는 눈빛을 발사했다. 차마 마주 쳐다볼 용기가 안 난다. 묵직한 돌에 등짝이 짓눌리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달걀에서 살아있는 병아리를 튀어나오게 만들 수 없다. 차에 치어 죽은 강아지를 되살려낼 수도 없다. 역겨운 콩 스프를 달콤한 럭키 참스의 맛으로 바꿀 수도 없다. 헌팅밖에 관심이 없는 아버지를 구슬러 침대 머리맡에서 매일 밤 동화책을 읽어주도록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샘은 형이 마법을 부려주길 원했고, 눈부신 기적이 일어날 걸 믿으며 조용히 숨을 죽이곤 했다. - 나는 멀린의 후계자가 아니란 말이다.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할 수는 없다고 - 내부에서 바퀴벌레를 닮은 혐오스러운 뭔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튕겨오르려 했다. 딘은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었다. 아더는 반석에서 보검을 뽑아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샘... 제발.』 『딘은 알잖아. 그치? 알잖아.』 『그래. 나는 알아.』 그렇게 말하며 허벅지를 탁탁 소리내어 두드렸다. 『그치만 난 지금 시동을 걸었고, 너는 여기서 이런 식으로 나를 추궁해선 안돼. 알겠니?』 딘은 다시 한 번 더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어떠한 애원도, 부탁도 담지 않고서 말이다. 『샘.』 급기야 뒷자석 문이 벌컥 열렸고, 날카로운 가시를 잔뜩 세운 샘이 그 커다란 몸을 구겨 넣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리가 폴더를 닫고 길었던 통화를 끝냈다. 솔직히 말해 일부러 그랬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딘은 냉담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우간다에 사는 남편이 이번 달 양육비를 보내주겠대?』 그런 싸구려틱한 도발은 어금니로 두 번 씹어 목구멍 속으로 삼키면 그만이었다.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줄넘기를 하는 것처럼 쉬웠다. 리는 땀도 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지금 조 와이저와 다니엘 크로포드 행방불명 사건을 살피러 갈 거지?』 딘은 능숙하게 거짓말했다. 『아니.』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며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리는 표지판을 살피며 다음 번 갈림길에서 좌회전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풀밭에 떨어진 뱀파이어 엄니는 초보자가 발견하긴 힘들어. 요령이 필요하거든.』 『그리로 가는 거 아니래도.』 『언뜻 봐선 끝이 뾰족하게 잘려나간 조약돌로 착각하기 쉬워. 잘게 부숴진 짐승의 배설물처럼 보일 때도 있고. 뱀파이어 엄니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황갈색으로 변색되니까.』 송곳니가 변색한다는 건 처음 듣는다. 딘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피에 담궜다 빼내면 일시적이긴 해도 도로 하얗게 반짝거려. 며칠 지나면 다시 땀에 절은 런닝 셔츠 색깔이 되어버리지만. 아마 그래서일 거야. 속설에 뱀파이어의 잿가루에 피를 뿌리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이 있잖아? 세인트 자일즈에서 매장된지 80년이 된 뱀파이어의 뼈를 파낸 적이 있는데 여기다 피가 뿌려지자 도로 하얗고 말랑말랑한 상태가 되더군. 되살아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거나 그건 무척이나 인상적인 광경이었어.』 『뭐? 소금은 안 뿌리고 피를 뿌렸어?!』 『오해하진 마, 딘.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사고였어.』 그렇게 대꾸하며 리는 팔 안쪽으로 길게 그어진 흉터 자국을 가리켰다. 성형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쳐 지금은 그 모양이 희미했지만 당시엔 꽤나 심각했을 거라는 걸 짐작해볼 수 있었다. 길이가 거의 12cm에 이르는 자상이다. 출혈이 만만치 않았을 거다. 『일을 마무리하는 도중에 습격을 받았거든.』 『뱀파이어에게?』 『차라리 뱀파이어였다면 모조리 잡아 죽였지. 우습게도 귀부인의 무덤에서 귀금속을 파헤치려는 도굴꾼 일당이었다우. 젠장이었지. 그래선 목을 베고 싶어도 자를 수가 없잖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내쪽이 죽을 뻔했다고. 아, 다음에 잊지 말고 좌회전.』 딘은 영리하게도 하고자 하는 말을 자제하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제 그들은 시의 외곽지역에 도달했다. 깜빡거리는 신호등 불빛을 확인하고 좌회전했다. 이후로부터는 한참동안 잡목림 지대다. 마지막 문명의 흔적이랍시고 찌그러진 맥주 깡통이 타이어에 밟혔다.
『리, 당신은 우리와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없어요.』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앉은 샘이 무서운 기세로 으르렁댔다. 『다음 휴게소까지 데려다 줄게요. 거기에 가면 얻어탈 수 있는 차편이 분명 있을 거예요.』 리는 가소롭다는 식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봐? 너희들이 아직 안전한지 아닌지 정확히 판명이 나지 않았어. 나는 엉터리 의사가 아니란다, 꼬맹아. 환자가《기분이 좋아졌어요. 이게 병은 다 나은 것 같아요, 선생님.》 이렇게 꼬장거렸다고 퇴원 허가서를 낼름 써줄 것 같아? 바랄 걸 바라.』 샘은 물러서지 않았다. 왕년에 존에게 대들던 실력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당신, 돈 때문에 그러는 거죠. 그래서 시간을 질질 끌고 있는 거예요.』 돈 귀신 취급에 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까지는 낮고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빛났다. 『유치하게 굴지 마, 샘. 내가 지금 치료비를 더 받으려고 아프지도 않은 환자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고 있다는 거니?』 『글세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당연히 아니지! 넌 나를 삼류 취급하고 있는데 말이야...』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리는 손가락을 뚝뚝 소리내어 꺾었다. 『솔로몬의 잠언엔 이런 말이 있지. 미련한 자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이런 말도 있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훈계받기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교만이 오면 욕도 올 것이라.』 상대가 누구던지간에 말다툼에서 지려 한 적이 없는 녀석이다. 고집불통인 녀석은 한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딘은 속으로「아이고 맙소사」를 외쳤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건너편 차선으로 두 대의 트럭이 연거푸 지나갔다. 그리고 리는 육중한 트럭의 엔진 소리 이상으로 커다랗게 씩씩거렸다. 『딘!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을 내가 잠깐 손 봐도 괜찮을까.』 『폭력으로 설득하려고? 관둬. 해봐서 아는데 그건 그다지 효과가 없어.』 『알았어. 그럼 펠라치오를 하는 건?』 『될 거 같냐~!!』 제발 사이좋게 좀 가자. 딘은 신경질적으로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쾅쾅거리며 시끄러운 전자 기타 연주가 들려오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 본문에 나온 잠언입니다. *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언 18 : 6)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오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 : 16) *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은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잠언 15 : 32) *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1 : 2)
Posted by 미야
2007/06/2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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