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정확히 닷새만에 형제들 앞에 나타난 여자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왜들 그래.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네.』 아닌게 아니라 귀신 맞다.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다. 화장이 들뜬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눈두덩이까지 부어올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입술이 터서 아파 보인다. 길게 기른 손톱 중 세 개가 부러졌다. 커다란 핀을 아무렇게나 꽂은 머리카락은 잔뜩 뒤엉켜 더 이상의 빗질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난리가 난 사막에서 선인장을 마주보고 국민 체조를 열심히 하고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고개를 길게 빼고 굵은 모래가 파우더처럼 뿌려진 신발을 살폈다. 그리곤 다시 턱을 쳐들었다. 설마, 코흘리개 아이들과 어울려 놀이터에서 모래탑 쌓기에 열중했던 건 아닐테고. 구릿빛 피부를 연출하기 위해 플로리다 해변가를 산책했다고 가정하기엔 굽 높은 부츠가 마음에 걸렸다. 저런 부츠를 신고 모래사장을 멋대로 걸어다녔다간 다리가 푹푹 빠져 결국엔「사람 살려!」고함을 지르게 된다.
뭐, 먼지 투성이로 변해버린 멋쟁이 신발은 그렇다 치고. 연극적인 몸짓으로 어깨를 으슥였다. 만사가 수수께끼다. 이곳은 그들이 먼젓번 만났던 동네로부터 약 180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딘은 자신들이 어디로 갈 거라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애쉬나 앨런, 바비 아저씨에게조차 행선지를 말한 적이 없다. 형제들 몰래 위치 추적기를 달아놓았다고 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앞으로 100년 뒤의 미래까지도 예언할 수 있는 용한 점쟁이라면 그 즉시 게임 오버. 하지만 그런 줄거리라면 에르큘 포와르의 조수로 헤이스팅스가 아닌 나이 120세의 중국인이 등장하는 변칙적인 탐정소설이 되어 버린다. 의문을 표현하며 손등으로 테이블을 콩콩 찍었다.
『재주도 좋군.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지?』 『그냥 알았어.』 성의 없게 대꾸한 리는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다며 샘의 뒷통수를 손바닥으로 찰싹 후려갈겼다. 그것도 살짝 때린게 아니다. 눈알이 튀어나온다 싶을 정도로 세게 때렸다. 『아윽!』 쓰라린 뒷통수를 부여잡고 신음을 토했다. 검정색 크레용이 도화지에 새카맣게 발라졌다. 만화책에서나 나옴직한 통통 별이 콧잔등 주변을 팽그르르 돌았다. 그것도 토성처럼 띠를 두른 별이었다. 흉폭한 수탉이 부리로 쪼았다고 해도 이보단 덜 아팠을 거다. 리는 손맛이 대단히 매웠다. 『고백해봐. 너, 자기 전에 양치질도 대충하고 그러지!』 『뜬금없이 그게 뭔 소리예요.』 『게을러 빠진 녀석! 뱀파이어의 코를 속이려면 하루에 한 번은 크림을 발라야 한다고 말했잖아. 그동안 얼마나 발랐어. 앙?! 보아하니 하나도 안 발랐군. 네 형은 제대로 하고 있는데 넌 그게 뭐야. 변한게 전혀 없잖아. 맨손으로 바르는 시늉만 했냐?!』 『.......... 시늉만 한 건 아니예요.』 변명조로 대꾸하는 샘의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았다. 그치만 리의 지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지저분한 고양이 똥을 재료로 해서 만든 크림 따윈 절대로 바를 수 없다 - 아침마다 투덜대며 뚜껑을 열었다 닫은게 전부다. 벼룩의 뒷다리 정도만큼만 덜어 손등에 찍고는 그 즉시 수도꼭지를 열고 흐르는 물로 씻었다. 샘이 그렇게 한 건 일차적으로 혐오감이 컸기 때문이었지만 리에 대한 신뢰가 적었다는 점도 한 몫 거들었다. 그는 여전히 - 아직까지도 리가 달갑지 않았다.
『샘. 지금 리가 한 말이 사실이야?』 추궁하며 쳐다보는 딘의 시선을 애서 외면했다. 손가락으로 귓불을 뭉기적대며 입맛을 다셨다. 궁지에 몰렸다 싶으면 보이는, 어릴 적 버릇 그대로의 행동이었다. 『양이 좀 적었던 것뿐이예요. 음... 앞으론 잘 할게요.』 『후회하면 늦어, 꼬맹아. 젱킨스 영감처럼 되고 싶어?!』 호되게 야단치며 리가 또다시 손을 들려 했다. 이크, 또 맞겠다. 얼른 고개를 가슴팍에 파묻고 소련의 핵 공격시 주민 대피 요령을 답습했다.
『우리 못난이 그만 괴롭혀.』 『쳇! 앞으로 동생 감독을 더 잘 하셔야겠어, 딘 형씨. 용변 후에 변기 물을 잘 내리는지만 살피지 말고 다른 것도 꼼꼼이 보고 그래.』 『동생아? 지금 여사님께서 하신 말씀 잘 들었냐. 속옷은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는 거다.』 『형! 무슨 소릴 그렇게 해! 딘보단 내가 더 자주 갈아 입...』 휙 소리가 나게끔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리의 얼굴은 창백하고 진지했다. 그리고 딘은 그보다 열 배쯤 더 심각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죄인입니다. 지금은 잠자코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할 시간이었다. 샘은 미처 소리내어 발음하지 못한 나머지 단어들을 잘 녹지 않는 사탕인양 혀로 감싸 한참을 입속에서 우물거렸다.
남의 머리통을 울퉁불퉁한 자갈밭으로 만드는 건 도중에 때려치웠다. 대신 그녀는 나무 의자를 끌어다가 옆으로 해서 앉았다. 그리고는 중요한 거라며 날짜가 제법 지난 신문을 한 부 던졌다. 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기사는 제5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문제. 가방끈이 짧아 슬프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와 보름달처럼 살집이 통통하게 오른 여자의 증명 사진 위로 인쇄된《desaparición》라는 단어를 뭐라고 발음해야 좋은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 어림짐작 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으로선 손을 무릎 위로 올려놓고 얌전히 추가 설명을 기다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중고차를 세일즈하던 안토니오 구데라토와 그의 아내 세릴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기사야. 주변 사람들 말로는 4월 13일이 그들의 결혼 기념일이었대. 그래서 저녁 6시 무렵에 4살짜리와 두살바기 아들을 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외식을 하러 나갔다고 하더군. 그걸 마지막으로 이들 부부는 실종되었어. 폐차 직전의 고물 자동차는 외딴 마을 국도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로 발견되었고.』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아니, 방금 전에 동생에게 설명한 사건과 완전히 똑같다. 『뭐, 치안이 극도로 나쁜 나라인만큼 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외계인 납치 부대가 도시의 스모그 구름 위로 상주하고 있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을 정도니까.』 여기까지 말한 리는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람들이 경악한 건 다른 문제 때문이야. 차량 트렁크에서 아이들이 허기져 잠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거든.』 순간 윈체스터 형제들의 얼굴이 굳었다. 딘과 샘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쪽 지역은 전반적으로 기온이 높으니까 찜통 같았을 트렁크 속에서 의식을 잃는 건 잠깐이지. 미리 말해두겠는데 공식적인 아이들의 사망 원인은 탈수증이야.』 『부모들은?』 『요술처럼 휘리릭. 글세다. 어린 자녀들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도망쳐버린 걸까?』 그녀가 여기서 의문형을 사용한 건《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이다.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등받이로 몸을 기대면서 리는 단호하게 주장했다. 『낙태를 죄악이라 믿고, 자녀를 신이 주신 크나큰 축복이라 믿는 사람들이야. 핏줄이라면 꿈뻑 죽지.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팔 다리를 잘라버릴 인간들이 사방에 널렸어. 부모가 일부러 아이들을 트렁크에 가둬둘 리가 없다고.』 『그렇담 제3의 인물이군.』 『악질적인 제3의 인물이지. 그리고 대단히 유능해. 운전 중인 차를 세우고, 그 속에서 부모를 끌어내고, 아이들을 트렁크에 가두면서 어떠한 흔적도 안 남겼어.』 『기관총으로 위협했나 보지.』 『농담이 아냐, 딘 윈체스터! 이들 부부는 솔직히 하층 부류였고 결혼 기념일에 겨우 햄버거를 사먹을 수준이었단 말이야. 그런 사람을 뭐하러 기관총으로 위협을 하지?』 『고물차 판매는 표면적인 직업이고 마약과 관련된 일에 손을 댔을 수도 있잖아. 자동차 실린더에 코카인을 가득 채워 콜롬비아까지 배달했다면 어쩔래. 자동차 바퀴에 공기가 아닌 하얀 가루를 주입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구먼.』 『아닌게 아니라 멕시코 경찰은 이들 부부가 마약 거래상에게 처형된 거라 추정하고 있더군.』 이쯤해서 눈치 빠르게 샘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마약이 아닌 거지요?』 『마약 운반책이었다면 왜 그들 부부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거지? 만약 그랬다면 결혼 기념일에 최소한 통돼지 바비큐는 뜯었어야지.』 그거 말 된다.
리는 공책에서 찢어낸 것처럼 보이는 종이를 세 장 꺼냈다.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걸 감안하고 이걸 한 번 봐주겠어?』 근육질의 흑인 남자가 하나, 백인 여자가 둘. 아마추어 실력으로 그린 몽타주였다. 길거리 초상화가를 데려다 돈을 주고 설득해 한 번 그려보게 한 모양이다. 나름대로 애는 썼는데 결과물은 영 탐탁치가 않아 어딘지 모르게 만화 분위기였다. 입술에 피어싱을 세 개나 한 흑인 남자는 다음 페이지에서 스파이더맨과 정식으로 한 판 붙게 생겼다. 말풍선을 구석에 그려넣고「뉴욕이 어둠에 잠기는 건 잠깐이다.」라는 협박성 발언을 적어놓으면 딱일 것 같다. 나머지 여자 둘 역시 의상을 벗고 편안한 청바지로 갈아입은 캣 우먼이었다.
억지로 수학 공식을 푸는 기분이 들었다. 딘은 가렵지도 않은 머리를 만졌다. 『상태 정말 안 좋네. 사진은 없는 거야?』 『없어.』 딱 부러지는 대답에 한숨을 내쉬며 딘은 다시 그림 감상에 몰입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게중에 한 여자가 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이는 약 30대 초반. 눈매가 날카롭고 계란형의 얼굴이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깡마른 어깨를 덮었는데 미용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인다. 인상이 나쁘다. 표정이 신경질적이다. 크게 휘어지게 해서 그린 가느다란 눈썹은 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염병할.』 제대로 미술 공부를 하지 않은 화가의 투박한 표현력은 그렇다치고 이미 아는 얼굴이다. 더 보시고 할 것도 없었다. 딘은 몽타주 그림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해서 리에게로 다시 돌려주었다.
『루더의 짝짓기 암캐잖아.』 『바로 맞췄어. 이 여자의 이름은 카밀이야. 안토니오 구데라토와 세릴냐 구데라토의 살해 혐의를 받고 지금 멕시코의 뱀퍼 그룹이 열성으로 추적 중이지.』 『에엑?』 그림들을 도로 주섬주섬 치우며 리가 말했다. 『죄질이 나빴어. 어른들은 먹이로 잡고 아이들은 죽게끔 내버려두다니. 애들을 그딴 식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이미 사형 선고는 내려진 셈이야. 최소한 한 달 뒤엔 목이 잘릴 걸. 감정적으로 분노한 뱀퍼가 많아서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달아나긴 힘들 거야. 멕시코와 콜롬비아쪽의 뱀퍼들은 미국 뱀퍼와는 차원이 달라. 실력이 아주 좋지. 그리고 자비심이 없어. 무지막지하지.』 『잠깐만!』 『끝장났대도, 윈체스터. 이 여잔 미국으론 다신 못 돌아와.』
의외의 소식이었다. 딘은 잠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타임 아웃을 외쳤다. 『안토니오 부부가 뱀파이어에게 붙잡힌게 4월 13일 밤이지? 그렇다면 그때 카밀은 - 루더의 암캐는 멕시코에 있었다는 거잖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러고보니 너희들, 루더의 가족이 노린다는 경고는 언제 받았나.』 『올해 2월 중순. (* night-traveling 편 참조)』
이래선 순서가 거꾸로 뒤집힌다. 사람을 잡아 죽인다고 해놓고 외국으로 날랐어?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리와 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끄응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릴 수 있는 합당한 결론은 둘이다. 루더의 가족이 그들 형제들을 노린다는 정보는 애초부터 틀렸다. 그게 아니라면 카밀 말고 루더의 다른 가족이 남았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알아봐야 한다.
『이상하네. 젱킨스 영감이 루더의 가족을 모조리 잡아죽인 걸로 알고 있는데.』 리는 후자가 아닌 전자 쪽으로 무게를 두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엘 젱킨스와 루더와의 악연은 제법 알려진 편이다. 그들 패밀리는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이었고, 안달한 만큼 양편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젱킨스가 루더의 아버지를 죽였고, 루더의 어머니가 젱킨스의 누이동생 둘을 죽였어. 젱킨스는 다시 루더의 어머니를 잡았고, 루더의 형이 사촌 다섯을 참살했지. 그 형을 10년에 걸쳐 추적하여 죽였고, 루더는 부리나케 달아났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복수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았던 건 루더가 의식적으로 친형의 복수를 포기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의 짝짓기 상대였던 카밀이 젱킨스의 목을 가져갔고, 너희들 아버지가 루더에게 콜트를 쐈어. 아이고, 복잡해. 자, 그럼 다음 순서가 어떻게 되는 거지?』 딘은 눈을 뒤집었다. 『내가 알게 뭐야. 카밀 말고 생존한 다른 식구는 없나.』 『내가 알기론 없어. 카밀이 아니라면 도대체 너희들을 노린다는 건 누구지?』
Posted by 미야
2007/06/20 14:03
2007/06/2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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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뱀파이어는 언제 나오냐고요? 어레? 아직 한 번도 안 나왔습니까? 이, 이럴 리가 없는데... ※
리가 가져다 준, 이름을 무어라 붙이기 대단히 난감한「크림」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피부에 빨간 반점이 생겼다는 건 아니다. 척 보기에도 무지 가려워 보이는 어우러기가 돋지도 않았다. 단지... 『어라. 딘이 어디 갔지.』 구제불능의 칠푼이라도 된 기분이다. 외계인이 그의 뇌를 꺼내 초강력 세척액에 넣고 한참을 흔들고는 껍데기만 남은 걸 제자리에 억지로 끼워맞춘 건 아닐까 돌연 의심스러워졌다. 1976년에 초판 인쇄된《악마와 기호학》책을 옆구리에 끼고는 걷는 속도를 한층 더 높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샘의 표정이 굳었다. 좌우를 열심히 두리번거렸음에도 딘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건물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 헷갈린 거 아니냐고? 설마. 이곳은 대형 할인 마트가 아니라 거미줄이 천장에 들러붙어 있어도 하나도 안 어색한 지역 도서관이다. 평일 대낮부터 열람실에 죽치고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질 수 있는 팔자 좋은 인간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낡은 건물을 불도저로 깨끗하게 밀어버리고 차라리 휘트니스 센터를 새로 짓는게 지역 주민에게 이득일 거라고 주장하는 일부 정치가의 발언이 폭 넓은 지지를 얻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평일 낮 무렵의 이곳의 이용률은 진짜지 형편 없었다.
『환장하겠군.』 짧게 다듬은 고슴도치 머리통을 찾아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기웃거렸다. 딘은 샘과 헤어지기에 앞서 지역 신문을 모아두는 코너에 먼저 가 있을테니 용무가 끝나면 그쪽으로 오라 미리 말해두었다. 그러니까 딘은 신문들 틈새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종류별로 묶어둔 신문은 보였어도 예순 살 영감님처럼 그걸 한가롭게 뒤적거리고 있어야 마땅한 인간은 시야에 안 들어왔다는 거다.
초조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러댔다. 평소엔 눈을 감고 있어도 딘이 대략 어디쯤에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흡사 머릿속에 고성능 레이더라도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불이 켜지면 - 레이더가 작동하면 잠자코 그리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딘은 샘을 위해 일부러 손을 높게 들어 흔들거나, 깡충깡충 뛰지 않아도 되었다. 등 돌리고 숨어 손가락으로 은밀히 코를 후비고 있기만 해도 되었다. 거기에 있고, 그저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샘은 자신의 피붙이를 인식할 수 있었으니까. 차량 500대를 동시에 세워둘 수 있는 대형 주차장에서 임팔라를 콕 찝어 찾아내는 건 힘들었지만, 그 속에 딘이 앉아만 있으면 헤매지 않고 일직선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냄새 제거제 - 정확하게는 냄새 변화제이지만」를 사용하고부터는 눈에다 가리개를 씌워놓기라도 한 것처럼 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가 10m 반경으로 들어오기만 해도 고개를 번쩍 들던 시절이 모두 거짓말 같다. 악질의 장난꾸러기 요정이 수작을 부리고 있는게 확실하다. 머릿속 레이더가 비 맞은 고물이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얼씨구? 저 바보가 지금 장난하나.』 잿빛으로 변해선 허둥대며 자신을 두 번이나 지나쳤다. 그런 동생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던 딘은 팔꿈치를 괴고 이걸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를 궁리했다. ① 샘을 끌고 가까운 안경점을 방문하도록 하자. ② 눈이 침침해졌을 적엔 소의 간을 먹이면 좋다고 들었다. 싫다고 해도 억지로 먹이는 거다. ③ 책은 30cm 이상, TV는 2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봐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자.
이제 동생은 복도쪽을 살피며 손바닥을 바지춤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딘이 화장실에 간 것이 틀림 없다고 애써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들어버린 시금치가 되어선 시계를 한 번 쳐다봤고, 길게 목을 빼고 신문 거치대 쪽을 다시 보았다. 아랫입술을 신경질적으로 깨무는게 금요일 저녁 데이트를 바람맞은 한심스런 여자의 모습이어서 딘은 화를 내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멍청아.』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서야 샘은 우뚝 멈추어 섰다. 『나는 세바스찬 카인 (*영화 할로우맨의 주인공) 이 아니란다. 어딜 보고 있어.』 샘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잠시 후엔 얼굴을 붉히고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딘은 처음부터 그의 바보 짓을 죄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표정만 봐도 알겠다. 벼락이 치기 전의 어두컴컴한 하늘이었다. 어쩌면 피뢰침을 꽃 대신 머리에 꽂아야 할지도. 그랬다간 십중팔구 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숯검댕이 되느니 차라리 외모쪽을 포기하는게 낫다.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면서 딘이 말했다. 『훈련이 필요한 거니, 아님 안경이 필요한 거니.』 『몰라.』 어렸을 적에 딘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동생을 훈련시키기 위해 빛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새카만 방에서「술래잡기」게임을 하곤 했다. 불을 끄고 커튼을 내린다. 그 속에서 딘은 기척을 죽이고 숨는다. 샘은 숨 소리도 내지 않으며 민첩하게 돌아다니는 형을 붙잡기 전까진 방에서 나갈 수도, 잠을 자러 갈 수도 없었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이런 건 싫다고 울부짖어도 그놈의 망할 게임이 도중에 중지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중에 그만두기는커녕 그의 형은 벌벌 떠느라 바쁜 샘의 등을 아프게 꼬집곤 했다. 소리를 지르면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머리카락을 뽑아 달아나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딘에겐 한 없이 장난에 가까웠을지 모르지만 샘에겐 안 그랬다. 지금도 그걸 하자고 하면 당장 100리 밖으로 달아날 거다. 샘은 여전히 어둠이 끔찍이 싫었고, 어둠에 숨은 딘도 싫었다.
『네가 모르면 나는 어쩌면 좋냐. 몸이 둔해진 거야, 아님 눈이 나빠진 거야. 어느 쪽이야.』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흐응... 그러실라우? 참으로 잘 나셨습니다, 한 때 변호사를 희망했던 나으리. 맘대로 하쇼.』 그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구부려 소매에 앉은 귀찮은 진드기를 짓눌러 죽이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는 곧장 시선을 내리깔고 거치대에서 끌어내린 지역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딘의 관심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굴고 있는 샘이 아니라 오늘자 뉴스로 온통 쏠려 있었기 때문에 샘이 안경을 사야 한다고 말을 꺼냈어도 대충 넘어갔을게 뻔했다. 뭔가를 애타게 호소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다니엘 크로포드와 조 와이저. 29세와 30세.』 볼펜 뒷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딘이 말했다. 『누구야, 그게.』 『사흘 전부터 집에 안 돌아왔대. 경찰은 어제 오후에야 한적한 지역 도로에서 조 와이저의 포드 승용차를 발견했고, 그제서야 가족들의 불평처럼 그들이 술에 찌들어 들판 한 가운데로 널부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고약한 상황에 처한 것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어. 그런데 그게 말이야, 지갑이나 신분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몸싸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는군. 차는 고장난 곳 없이 멀쩡했고, 도중에 기름이 바닥난 것도 아니었대. 도움을 구하러 가까운 주유소까지 덜렁덜렁 걸어갔을 리는 없다는 거지. 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칼리아나」라는 이름의 술집이고, 둘이서 같이 한 검정머리 여자를 두고 집적거렸다는군.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아서 여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다니엘과 조는 그로부터 30분 정도 서로 가볍게「네 탓이네」공방을 했어. 그리고 음주운전이라는 끔찍한 범행을 마지막으로 이 두 사람은 공중으로 휙~ 하고 사라졌어. 신문에 실린 기사의 내용은 이게 전부야. 어때, 네 생각은?』
샘은 잃어버린 점수를 만회하고자 최대한 신중해지기로 했다. 『그야... 그 두 사람의 평소 품행이 어땠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지지. 한 여자를 두고 같이 작업에 들어갔다며. 삿대질로 시작했다가 싸움이 거침 없이 커졌을 수도 있어. 게다가 두 사람 다 술에 취했다며. 사소한 시비 끝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총으로 위협해서 차에서 내리라고 윽박지르진 않았을까. 내 생각은 그래.』 『그럼 최소한 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어야지. 하지만 꽤나 가능성은 높은 얘기야.』 시작은 좋았다며 딘은 눈을 가늘게 떠보였다. 그리고 더 계속해보라는 식으로 볼펜을 까작거렸다. 샘은 용기를 얻어 자신이 생각해낸 그림 퍼즐을 하나 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동차 안에서의 다툼 흔적은 없었다고 그랬잖아? 그럼 밖에서 싸웠겠지. 총이 무서워서 일단 조수석에서 사람이 내렸어. 그치만 대단히 열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엿이나 먹어라 심정으로 자동차 바퀴를 발로 걷어찼어.』 『흐응. 네가 내 임팔라에게 하던 것처럼?』 그 즉시 샘은 기겁하곤 숨을 멈췄다. 그걸 봐, 봤구나! 전기 자극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불알이 콩 크기로 오그라들었다. 『나, 나는...』 그래봤자 딘은 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호흡에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샘은 그게 더 무서웠다. 차라리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며 호통을 치면 덜 무서웠을 거다. 속에선 용암이 끓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건 나찌의 히틀러가 뒷짐을 지고 베를린 올림픽 대회 개최를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늘 높이 평화의 비둘기가 날아다니면 뭐 하누. 폴란드는 머지 않아 쑥대밭이 될 터인데.
『계속해, 새미. 그러니까 자기 차를 걷어차자 격분한 조가 다니엘 크로포드를 따라 운전석에서 내려선 제발 침착합시다 애원하는 친구를 향해 총을 쐈다?』 『저, 저기... 이, 이건 짚고 너, 넘어가자. 혀, 형도 나를 총으로 쏠 거야?』 『어허! 샘! 여기서의 문제. 조 와이저는 다니엘을 총으로 쏘지 않았어. 근방에서 혈흔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거든. 뭐, 허공으로 총알을 발사해서 겁만 줬다고 쳐도 조에겐 총기를 구입한 기록 자체가 없었어. 그렇다면 겁 대가리 없게 불법 무기를 손에 넣을 정도로 조 와이저가 막 나가던 사내였던가? 그건 아니라고 봐. 쬐끔 탈선의 기질이 있던 동네 술주정뱅에 불과했다고. 따라서 총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봐도 괜찮을 거다. 아쉽지만 네 추측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어. 그리고 여기서 신문 기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딘은 겁에 질린게 분명한 동생을 흘끔 쳐다봤다. 『난 너를 총으로 쏴죽이진 않을 거야. 달랑 한 방으로 끝내는 건 결단코 내 스타일이 아니잖냐. 그치?』 『그, 그래.』 샘은 그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만족하며 딘은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좋아. 그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이들「술만 먹음 망나니」새끼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다툰 흔적도 없어, 접촉 사고가 발생한 것도 아니야... 그럼 뭘까?』 『글세. 노상강도?』 『지갑이 없어졌으니까? 그래, 네 말대로 강도를 당했다고 치자. 그럼 그 두 사람은?』 『강도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체를 치웠을 수도 있잖아.』 『그 강도는 시간이 남아 돌았다든? 보통은 지갑만 잽싸게 챙겨서 달아나는게 정상이야.』 『그렇다면 형의 생각은 그들이 강도에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딘은 그 즉시 자세를 낮추고 샘과 눈을 맞췄다. 기묘한 긴장감이 그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었다.
사나운 개들이 그들을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그들을 둘러 수족을 찔렀도다. 실제로 으르렁대며 뼈를 씹어대는 개들의 외침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샘... 이걸 봐. 이걸 보라고. 드디어 녀석들이 왔어, 이들은 뱀파이어에게 납치당한 거야. 그들이 데려간 거라고. 내 직감으로는 그래. 아빠가 설명하던 걸 떠올려 봐. 뱀파이어는 여덟에서 열 명이 무리를 이루고, 그 무리가 몇 갈래로 나눠져 인간을 사냥한다. 그리고 사냥한 인간을 산 채로 소굴로 데려가선 몇 일이나 몇 주에 걸쳐 피를 빨다가 결국 죽게 만든다.』 『나도 그건 잊지 않았어, 딘. 하지만...』 그와는 달리 이게 뱀파이어의 짓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샘은 상체를 최대한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너무 앞서가진 말자. 알고 봤더니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잖아. 뱀파이어 엄니가 근방에서 나온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멋대로 추측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옳으신 말씀!』 그런 샘의 어깨를 누군가 강하게 찍어 눌렀다. 샘은 화들짝 놀라 얼른 뒤를 돌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붙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센지 목을 돌리는 동작 자체가 쉽지 않았다. 『신께서 욥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독수리는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여.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리?!』 놀란 건 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는 소식을 손에 쥔 창백한 유령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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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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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3시즌 스포를 접하고는 드라마 시청 자체를 포기하는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짜게 식었습니다만, 주살(呪殺)을 희망한 CW 관계자에게 심각한 설사병 저주를 내리는 것으로 충격을 극복하고자 나름대로 애쓰고 있습니다. ※
목숨이 경각에 걸린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사람을 아예 망쳐버린다. 덕분에 야성에 가깝다는 시베리아 벌목꾼들이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정도로 대다수의 헌터들은 성격이 아주 거칠다. (존 윈체스터가 그랬다) 순전히 제멋대로라서 남들 배려하는 일엔 꽝이다. (딘이 그렇다) 고집도 무척 강하고, (샘이 그 대표격이다) 폐쇄적인 교우 관계로 주변으로부터 별종 취급을 받기도 한다. (바비의 오두막은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줘도 폭탄 테러범 유나바머의 은신처다) 물불 안 가리고 만사를 폭력으로 해결하기도 하고, (뱀파이어 헌터 고든) 특정 무기류 - 이를테면 칼 같은 물건에 눈이 뒤집혀 탐닉하기도 한다. (조) 따라서 딘은 상대가 어떠한 돌출 행동을 보여도「저 사람은 헌터니까」이 한 마디로 모든 걸 납득하곤 했다. 물구나무를 서서 밥을 삼켜도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치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충격과 당혹스러움이 밀물이 되어 무릎 높이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바위는 바닷물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아니, 가라앉는 것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은 대륙 아틀란티스다.
『항상 하던대로 해, 항상 하던대로. 휴가를 즐겨도 괜찮고, 하와이나 알라스카로 헌팅을 나가도 상관 없어. 다만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각자 행동하는 일만 없도록 해. 자동차를 훔쳐도 꼭 둘이서 같이 훔치고, 행여나 일이 잘못되어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도 팔짱을 끼고 부부처럼 나란히 입장하는 거다. 내 말이 무슨 소린지 알겠지?』 말이 되는 소릴 해요! 『난 지금부터 따로 조사에 들어갈테니 그리 알아. 뱀파이어 루더의 생존한 가족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볼게. 아울러 그들의 현재 위치도 추적할 거야. 아참, 비용은 하루에 400달러고 오로지 현금만 받는다.』 그건 또 뭔 소리랴. 돈을 받겠다고?! 딘은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죽일 기세로 노려봤다.
『어머? 왜 이러시나. 난 흙을 파먹고 살진 않아. 대신 빵과 와인, 그리고 최고급 스테이크를 먹으며 살지. 열심히 일을 하면서 그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설마, 전문가의 도움을 날로 먹자는 건 아니겠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딘이나 샘은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금전적 보상을 요구한 적이 결코 없다는 거였다. 존도 그 점에 대해선 마찬가지였고, 옆에서 오랫동안 그런 모습을 지켜봤던 딘은 헌터라면 으레 그렇게 하는 거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뭐? 돈? 샘도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눈치다. 하루에 400달러?! 경악스럽다. 일주일이면 가뿐하게 2,800달러가 된다. 여기서 다시 일주일이 지나면 5,600달러로 껑충 뛴다. 그만한 액수의 현금이 형제들 수중에 있을 리 없다. 여차하면 노트북을 팔아야 한다. 내 노트북! 샘의 안색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정 뭐하면 20년 할부로 갚아도 괜찮아. 머리에 모가지가 제대로 붙어만 있으면 돈은 언제든지 갚아나갈 수 있지. 그러니 이참에 적금을 깨야 하나 걱정하진 말아. 하하하!』 속으로 아라비아 숫자를 정신없이 헤아리는 샘을 바보 취급하면서 그녀는 웃었다. 그것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어린애처럼 해맑은 미소 덕분에 구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원래 사람들은 마누라의 처진 젖가슴을 두고 우스개 소리를 즐겨도 돈 문제로는 농담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어쩌다 웃자고 말을 꺼내도 우울증에 걸린 왕자 햄릿의 독백이다. 황금은 친어머니마저 원수로 만들고도 남는다. 돈이라는 건 어금니 사이에 물린 위험한 유리 조각이나 마찬가지다.
『저어, 진짜로 20년... 할부?』 걱정하며 재차 묻는 샘을 향해 리는 다시금 빙긋 웃었다. 맙소사. 비행기를 타고 가다 갑자기 난기류를 만났다. 땅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비행기 속에서 샘은 험난했던 인생을 비관하며 눈을 감았다. 날개가 와지끈 부러지고 엔진이 꺼졌다. 동체가 빨래처럼 뒤틀렸다. 갈기갈기 찢어진 쇠붙이 사이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비행기라면 질색인 딘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척 보면 모르냐?! 우리에게 뭔 돈이 있다는 거야아~!! 이건 갈취야, 갈취!》
가난뱅이의 아우성엔 관심 없다며 핸드백을 고쳐취며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가볼게. 연락은 항상 내쪽에서 먼저 할테니 염려는 말아. 지옥에서라도 전화한다. 그러니 내 핸드폰 번호가 뭐냐고 묻지 말도록.』 그런 법이 어딨어. 이제 딘은 발을 밟힌 개처럼 굴었다. 『말도 안 돼! 막대한 위기가 닥쳤을 시 SOS 신호는 어떻게 보내라는 겨. 초능력으로?』 『초능력까진 필요 없지. 간단해. 해변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저번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니까 외딴 섬에서 조난당한 사자도 그렇게 하더라.』 『우리더러 마다가스카 흉내를 내라고?!』 『뉴욕 동물원 출신 사자가 할 수 있으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뭐가 어렵다고 그렇게 울상이야? 쉬워. 야자 나무를 묶어 글자를 만들어. HELP. 그리고 불을 붙여.』 진짜지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샘은 신음했다.
『으아. 애시당초 애쉬에게 부탁한게 실수였던 거야.』 딘 또한 최악의 경우 임팔라를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운전을 하는 내내 불타는 석탄을 배에 품었다며 저리도 괴로워하는 것이리라. 핸들을 불규칙적으로 똑똑 치다 말고 옆으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있잖아, 샘...』 임팔라를 못 팔면 노트북도 못 파는 거다. 샘은 재빨리 허리를 틀어 먹잇감을 노리는 흉폭한 눈빛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런 동생의 발 빠른 행동에 딘은 마음 깊숙이 상처를 입었다.
『이 자식! 내가 무슨 날강도라도 되냐?! 태도가 그게 뭐야.』 『난 잊지 않았어. 형은 예전에 내 전자 사전도 맘대로 팔아치웠잖아.』 『얼씨구? 그걸로 네 한 달치 급식비를 냈다는 건 까먹었냐.』 『차라리 밥을 굶으면 굶었어.』 『이 바보야! 해골처럼 말라서 갈비뼈로 기타를 연주하는 꼴은 난 못 봐. 넌 먹어야 했어.』 『전자 사전을 팔아서?』 『전자 사전이 없었다면 내 몸이라도 팔았어.』 회전하는 선풍기 날개 틈새로 발가락을 들이밀었어도 이보단 덜 아찔했을 거다. 단단한 쇠몽둥이로 뒷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이 샘의 등줄기를 훑었다. 덕분에 말이 더듬더듬 튀어나왔다. 『마, 말도 안돼. 아, 아빠가 아셨으면... 혀, 형을 죽이려 했을 거야.』 딘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응. 실제로도 죽이려 하셨어.』 샘은 움찔해서 그 즉시 입을 다물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집들과 상점들이 뒤로 미끌어져갔다. 고개를 들어 콘베어벨트에 묶여 빠르게 이동하는 건물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엄지손가락 사이로 얼른 시선을 내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의 가식된 표정을 짓기 위해 정말로 노력했다. 그치만 그건 너무나 힘들었고, 샘은 자신이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라는 걸 마지 못해 인정해야만 했다.
혀로 입술을 축인 딘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자식아, 얼굴 당장 펴. 그건 농담이었어.』 『응.』 『농담이었대도, 새미.』 『알아.』 『그럼 시커먼 구정물 속에서 헤엄친 사람처럼 굴지 마. 거머리가 거기에 붙었냐?』 『미안...』 『얼씨구? 농담한 건 난데 왜 네가 사과하는 거야.』 조수석에 앉은 샘을 흘끔 쳐다보는 딘의 눈매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했다. 『닥치고 여기에 뭐가 들었는지 꺼내봐, 줄리엣. 떠나기 전에 리가 나에게 주고 간 거야. 썩은 짐승 가죽을 태우는 것보단 뱀파이어의 코를 속이는데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더구나. 만드는 방법이라던가 재료들을 조목조목 알려줬어. 글씨가 적혀진 종이가 있을테니 찾아봐. 이걸 다 쓰면 다음부턴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할 거래.』 그렇게 말하고 쇼핑용 비닐 백을 동생의 무릎 위로 던졌다.
비닐 백을 열자 휴대용 샴푸통처럼 생긴 플라스틱 병이 나왔다. 이게 뭔가 싶어 좌우로 힘을 주어 흔들어봤다. 액체가 움직이는 찰랑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바디 로션처럼 보였다. 제법 걸죽한 반 투명한 놈이 절반 정도 담겨져 있다. 뚜껑을 비틀어 열고 그 속에 든 내용물을 한쪽 눈으로 들여다 보았다. 얼핏 보기엔 제시카가 밤마다 얼굴에 바르던 것과 아주 흡사하게 생겼다. 화장품인가?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인지라 킁킁거리고 냄새부터 맡아보았다. 『어때? 샘.』 『잘 모르겠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자극적인 악취는 나지 않았다.
동봉되어 있던 메모지를 팔랑거리며 거기에 적힌 내용을 소리내어 읽었다. 『올바른 사용법, 세안 후 일정량을 덜어 하루에 한 번 목멀미에 발라줍니다.』 진짜로 화장품인가 보다. 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메모지와 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주의사항, 능력치가 높은 뱀파이어는 속지 않습니다. 효능을 맹신하진 마십시오. 이것은 완벽하게 당신을 커버해주진 않을 겁니다.』 그 즉시 비밀스러운 걸 묻기라도 할 것처럼 딘이 조용히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자외선 차단 효과는 됐어. 보습 효과는 어떻다든.』 『그 이야긴 안 적혀져 있어, 형. 대신 이런 문구가 있어. 붉은 반점 및 가려움이 느껴지면 그 즉시 사용을 중지하십시오...』 『어쩜, 친절하기도 하지.』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서늘한 곳에 보관하십시오.』 『맙소사.』 『유아의 손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슬슬 지겨워지려 하고 있다. 오른손 두 손가락을 위로 들어올리며 딱 소리를 냈다. 『오케이, 새미. 다 읽고 신호만 해줘. 언제 웃으면 되는 거지? 지금? 아니면 1분 더 있다가?』 『글세. 내 생각엔 지금 웃어도 될 것 같아.』 『하.하.하. 대단히 재밌구나.』 하지만 입으로 뱉은 말과는 달리 딘은 그렇게 썩 재밌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위장에 가스가 가득 차서 괴롭다는 식으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어쨌든 샘은 용기를 내어 크림 약간을 손가락으로 덜었다. 약간은 미끌거린다. 면도할 적에 쓰는 비누 거품처럼 말이다. 그리고 처음 느낌대로 그렇게 희지도 않았다. 『후우...』 그걸 딘의 목덜미에 대고 - 정확히 맥박 치는 부분에 대고 가만히 문질렀다. 임팔라가 끼익 소리를 내고 옆으로 굴러가 가로수를 들이받으려 했다. S자 곡예 운전을 마치고 가까스로 제 차선으로 돌아온 딘은 발을 난폭하게 굴러대며 화를 냈다. 『샘! 이 미친 자식!』 『왜 그래. 난 여기에 적혀진 그대로 했을 뿐이야.』 『그럼 내 목이 아니라 네 목에다 발랐어야지! 까무라치는 줄 알았어. 놀랐잖아!』 『그치만 어쩐지 꺼림직스러워서...』
샘은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크림의 제조법과 그 재료에 눈길을 돌리자 식은땀이 나려 했음이다. 꿀과 버터, 말린 장미꽃. 마조람(허브의 일종)의 잎사귀. 회향의 줄기.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서른 두 번째 줄에 적혀진 재료 목록에 이르면 그 누구라도 안색이 돌변할 것이다. 고양이 똥. 여기서 다시 마흔 일곱 번째. 여자의 머리에서 떨어진 비듬. 쐐기를 박는 쉰 여섯 번째. 개구리의 생식기. 괄호하고 수컷. 자신이 그의 목에 무엇을 묻혔는지를 깨닫자 머리가 핑글 돌려고 했다. 깨끗한 손수건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샘은 정신 없이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딘? 솔직히 난 이 여자를 못 믿겠어. 그냥 예전처럼 우리끼리 해결할 수도 있잖아. 정 뭐하면 바비 아저씨의 도움을 얻을 수도 있어. 난... 그러니까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딘은 대답을 회피하고 핸들을 오른편으로 돌렸다. 『우리 둘이서 할 수 있다고. 우리 둘이서... 응?』 애원하다시피 해가며 눈꼬리를 내렸다. 아무리 그래봤자 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라디오를 틀고 오늘의 날씨를 체크하면서「오후엔 제법 덥겠구나」라고 의미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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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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