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리는 리나 인버스의 리... 절대로 그럴 리 없다의 리...♬ ※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과 귓청을 찢는 시끄러운 실내 음악에도 불구하고 세 발의 총성은 너무나도 그 존재감이 뚜렷해서 도저히 무시를 할 수가 없었다. 놀란 사람들이 저마다 대화를 중지한 채 몸을 사렸고, 샘은 불가항력적으로 입안에 물고 있던 음료수를 바닥을 향해 세차게 뿜었다. 「형?!」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서 다트 게임을 즐기던 남녀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게중에 제일 나이가 많아보이는 남자가 공중전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짧은 단어를 외쳤다. 아마도 경찰에 빨리 신고하라는 뜻일게다. 동시에 일행으로 추정되는 남자 둘이 불안한 기색으로 창문 밖을 기웃거렸다.
술김에 허공을 향해 무작정 발포하는 바보들이 종종 있다. 네모난 보자기를 목에 매달고 정의의 용사 흉내를 내며「나는 배트맨이다~!」를 외치는 얼간이들이다. 이 경우엔 입에 쓰고 몸에 좋은 교훈의 의미로 녀석들의 목덜미를 붙잡은 뒤, 따끔하게 엉덩이를 걷어차주면 된다. 그러나 취객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못되먹은 파락호가「가지고 있는 지갑을 이리로 던져!」라는 의미로 방아쇠를 당겼다면 함부로 나서지 않는게 상책이다. 시골이라고 해서 강도가 없겠는가, 살인자가 없겠는가. 게다가 최근들어 두 명의 술주정뱅이가 공중으로 사라진 일도 있다. 유리창 너머를 살피던 남자는 전언판에 붙은「사람을 찾습니다」포스터를 힐끗 본 다음, 범인이 돌을 던질 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것처럼 창가로부터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내의 표정은 버터 나이프로 깨끗하게 자른 치즈 덩어리의 절단면처럼 날이 서있었다. 무어라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지만 파울 플레이*를 염두에 두는 듯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과 외침이 시끄러웠다. 샘은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 쪽으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한손에는 휴지를, 다른 한손으로는 바지춤을 허겁지겁 움켜쥐고「샘! 너, 괜찮니?」를 외치며 뛰쳐나오는 인간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소식이었다. 설령 굵직한 변비가 복병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지라도 그의 형은 동생의 안전부터 확인하고 나서야 커다란 똥 덩어리를 변기 속으로 떨어뜨릴 위인이다. 항상 그래왔다. 그는 샘이 괜찮다고 대답하기 전까지는 지구의 자전마저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만약 샘이 도리질하며 괜찮지 않다고 하면 우주는 딘의 의지에 따라 그 운행을 당장 멈추어야 했다.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느님! 나는 엄마를 잃었어요. 제시카도 잃었고요. 아빠도 돌아가셨어요. 그런 나에게서 딘마저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요? 제발 아니라고 하세요.」 의자를 뒤로 쓰려뜨렸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그냥 멍했다. 허공으로 붕 떠올라 활동사진 속의 사람이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를 물끄러미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똑바로 서서 걷고는 있는지, 아니면 옆으로 누워 헤엄을 치는 건지 의식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샘의 뇌가 기억하는 이후의 30초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 공장에서 막 출시된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공CD였다.
신의 말씀이 선포되기 이전의 대지, 그 생명 없는 혼돈 속에서 시그널이 울렸다. 「형이 신호를 보냈어!」 연옥 가장자리로 발을 헛디딘 샘을 현실로 불러들인 건 짧게 울리다 금방 끊긴 핸드폰 소리였다. 퍼득 깨닫자 무채색이던 세상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다. 죽었다 되살아난 기분이다. 파란색 에러 화면을 내보내던 망할 놈의 컴퓨터가 재부팅되었다. 샘은 핸드폰 액정 화면에 찍힌 익숙한 숫자에 감사하며 임팔라를 세워둔 곳으로 종종 걸음으로 서둘러 갔다. 그리고 잰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뛰는 것으로 바뀌었다.
『딘! 나야. 핸드폰으로 신호 보낸 거 봤어.』 『아아.』 한걸음에 달려온 샘을 흘끔 쳐다보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꽤 바빠보였다. 왔느냐는 말 한 마디 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뭔가를 주섬주섬 태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별수사대가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들이닥치기 전에 회계 장부를 난롯불에 던져넣는 식의 절박함이었다. 물건이 생각대로 잘 타지 않자 조심성 없이 팩에 든 라이터용 기름을 부었고, 확 솟구치는 새카만 불꽃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뜨거운 그을음이 튀면서 손등으로 제법 쓰라릴 것 같은 자국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딘은 뜨거운 열기 속으로 쉬지 않고 뭔가를 집어던졌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에 샘은 그것이 여성용 옷가지라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리고 양말이니 속옷이니 하는 것들이 리의 것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그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여기서 뭘 태우는 거야. 그나저나 형도 들었어? 밖에서 총 소리가 났어. 난 딘이... 젠장맞을. 그러니까 형이 총에 맞았다고 생각했어.』 샘은 우물쭈물하며 눈을 꼭 감았다. 『무서웠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튀어나온 목소리가 엄청난 죽상이어서 샘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약해빠진 푸념은 어린아이나 하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조숙했고, 늘 늠름한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다. 새미라는 애칭으로 부르면 노발대발했다. 그런 주제에 지금처럼 말해서는 결코 안 되는 거였다. 샘은 혀를 깨물며 뼈저리게 후회했고, 어쩐지 부끄러워져 등을 구부렸다. 어랍쇼 하는 표정을 지은 딘 역시 순간적으로 사악한 존재의 개입을 의심했다. 『귀신에게 씌였냐, 아님 외계인에게 몸을 빼앗겼냐. 너, 진짜 새미가 맞니?』 『새미가 아니라 샘이야.』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재빨리 무마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자면 분위기를 180° 바꿔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는 얘기다.
『화장실에 간다고 그랬잖아! 여기가 화장실이야?!』 원숭이를 겁주는 포악한 악어가 된 동생을 보고서야 딘은 긴장하여 꽉 쥐었던 주먹을 도로 폈다. 이제야 제대로 돌아가는군. 아까는 깜짝 놀랐네. 매서운 눈초리로 캐묻는 동생을 외면하고 도로 옷을 태우는 일에 열중했다. 『어... 그게 말이지. 들어보렴, 샘. 자연은 위대하잖냐. 여기를 봐라. 널리고 널린 나무와 풀들 모두가 내츄럴한 변기가 될 수 있는 거란다. 안에서 꼭 줄을 설 필요는 없는 것이지. 게다가 난 제법 급했거든.』 『좋아. 미스터 노상방뇨. 훌륭한 비료를 나무에 기부했다고 치자. 그럼 총은 누가 쏜 거야.』 『그거? 내가 쐈어.』 『왜. 쥐가 거길 물겠다고 덤벼들기라도 했어?』 『아니. 건방지게 핥아주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쐈어.』 그렇게 말하면서 딘은 찢기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여성용 셔츠를 불꽃 가운데로 꾸셔박았다.
딘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샘의 표정은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하아, 그렇게 된 거였군. 이제 알겠다. 그래서 화가 치밀어 형이 그 여.자.를. 총으로 쐈군.』 단정지으며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임팔라의 뒷자석 문이 굉장한 기세로 벌컥 열렸다. 하얗고 매끄러운 여자의 하체가 그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팔을 접고 펴는 자연스런 움직임으로 보아 총에 맞은 건 아니었다.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샘은 그녀가 무사해서 실망이었다. 그럭저럭 건강해 보이는 그녀는 엄청난 노기를 띄고서 뱀의 쇳소리를 내었다. 『듣자 듣자 하니까 아까부터 이것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릴 씨부렁거리고 있어! 내가 쥐냐?! 내가 쥐냐고! 게다가 네 형은 이 몸의 취향이 아니란 말이얏! 아무튼 너희 두 사람은 머리를 썩게하는 살색 드라마* 말고 재치발랄한 코미디 시트콤을 부지런히 좀 봐야겠다. 그런 걸 농담이라고 하고 앉았냐! 듣다가 있지도 않은 틀니가 튀어나오겠다!』
리는 형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샘은 기분이 언짢았다. 리가 형의 지갑을 쥐고 있었다. 샘은 기분이 대단히 언짢았다.
의외로 많은 걸 공유하는 그들이었지만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칫솔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옷과 지갑이 그 뒤를 따랐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는 건 그렇다치고 샘은 딘의 셔츠를 빌려입은 적이 없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노트북을 함부로 다뤄 바이러스에 걸렸네 어쨌네 하며 늘 소동을 일으키는 딘이었지만 동생의 지갑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은 어렸을 적부터 지켜온 그들만의 규칙이었고, 그 기본적인 규칙의 토대를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의 아버지인 존이었다. 아버지를 토템기둥처럼 숭배하는 딘이 그 규칙을 무시할 리가 없었다. 딘은 자기가 입던 옷을 남에게 쉽게 빌려주지 않았다. 지갑을 통째로 건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샘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마음에 드는 청바지를 시시탐탐 노리는 샘을 가차없이 징벌하곤 했다. 샘은 탈모제가 들어간 샴푸통 소동을 떠올리며 - 세상에, 대머리가 될 뻔했다! - 딘의 검은색 셔츠를 맨살 위로 걸친 여자를 부릅뜬 눈으로 쳐다봤다. 일을 공평하게 하려면 저 여자도 탈모제가 들어간 샴푸로 머리를 감아야 한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버티기만 해봐라. 그때는 가위를 들고 강제로 머리카락을 밀어버릴테다.
딘의 셔츠를 손가락질하며 샘이 눈을 빨갛게 번쩍였다. 『어떻게 된 일이죠.』 『눈빛이 그게 뭐야. 내가 우주전쟁에 나오는 문어 대가리 괴물이라도 되는 줄 아니. 부정한 피를 뒤집어 써서 급히 옷을 갈아입은 것뿐이야. 닥치고 가게로 돌아가 보드카 한 병을 사오도록 해.』 샘은 거부의 의미를 담아 가슴 위로 단단히 팔짱을 꼈다. 『그럴 수 없어요. 그 지갑은 딘의 것이예요.』 『오냐. 지갑은 네 형의 것이지만 그 속에 든 돈은 내 꺼야.』 『언제부터요.』 『지금부터.』 샘은 리의 막무가내식 논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웃기지 말아요. 그런게 어딨어요!』 『그렇게 찡그린 얼굴로 추파를 던지지 마. 그러다 반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리는 비꼬는 미소를 지으며 벗어둔 카디건을 샘의 얼굴을 향해 똑바로 던졌다. 『빨리 가서 술 사와. 내가 결혼해달라고 매달려도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않지요!』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표정은 짓지 말아. 말해두는데 난 화내는 남자가 좋아.』 『윽...!!』 일단은 피하고 볼 일이라고 판단했다. 샘은 딘의 지갑을 들고 가게를 향해 부리나케 달아났다.
한숨을 내쉬며 딘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옷가지에 다시 기름을 뿌렸다. 『여어, 잘 태우고 계십니까?』 리는 어느새 학교 선생님처럼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뱀파이어가 냄새를 맡기 전에 뱀파이어의 피가 묻은 옷을 서둘러 소각해야 했다. 무리를 짓는 뱀파이어는 동료 의식이 매우 강하다. 동료가 다쳤다는 걸 알면 죄다 몰려올 터다. 리는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팬티까지 벗어던졌고, 딘은 자신에게 그 남자의 피가 튀지 않았음에 내심 감사했다. 길바닥에서 허겁지겁 속옷을 내리는 걸 상상해봤다. 으아, 끔찍하다. 『더 태울 건 없나, 리.』 『다 벗었어.』 『여기에 소금은 안 넣어도 괜찮아?』 『역시나 썰렁한 농담일세. 지금 우리는 계란 후라이를 만들고 있는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샘에게 보드카를 왜 사오라고 시킨 거지.』 『혹시라도 남았을 피냄새를 감추려고. 알콜을 머리에 확 부어버리는 거야. 효과 있다고.』 그러면서 그녀는 정수리 부근을 손바닥으로 둥글게 문지르는 동작을 해보였다. 그게 비누로 머리를 감는 시늉이여서 딘은 조금 피곤해졌다.
『그나저나 그 남자에게 총을 발사한 건 어리석은 짓이었어, 딘 윈체스터.』 리의 목소리는 쌀쌀맞았다. 『열심히 얻어터진 주제에 말이 많다.』 『근접전을 위한 포석이었다고. 칼을 쓰려면 가까이 접근해야 하니까 일부러 주먹에 맞아준 거야. 네놈이 오지랖 넓게 참견만 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한 마리 잡았어.』 『그랬수? 내 눈엔 일부러 맞아준 것처럼은 안 보이던데. 뼈는 안 부러졌나.』 『내 갈비뼈는 튼튼하우. 가짜로 맞아주는 것처럼 보이면 뱀파이어가 속아주겠냐.』 『그래서 죄다 연기였다고?』 『당연하지.』 그렇게 주장하며 리는 가방에서 꺼낸 남성용 트렁크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보였다. 딘의 안색이 단번에 확 나빠졌다. 『이거 괜찮네. 심플한 파랑. 반바지처럼 입으면 되겠다. 그치?』 『이봐!』 자신의 속옷이 싫어하는 여자의 반바지가 되었다는 걸 알게되면 샘은 무장 궐기를 할 것이다. 딘은 바로 그 점이 걱정이었다.
Posted by 미야
2007/07/12 10:59
2007/07/1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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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도저히 피할 짬이 없다고 판단하자 딘은 일부러 무릎의 힘을 빼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주먹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싸한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동시에 합판을 덧댄 벽이 천둥치는 굉음을 내며 안으로 함몰되었다. 그렇다면 답은 둘이다. 저 자의 주먹이 단단한 강철로 되어있거나, 아님 싸구려 합판이 건축물자재법 기준을 크게 위배했다. 딘은 후자이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뾰족한 모양새의 파편으로 미루어 보자면 가벼운 스티로폼에 그럴싸한 색을 입혀「페인트로 묘사한 이 나무테 모양을 보세요. 감쪽 같죠?」식의 사기를 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얇아도 나무는 나무, 그걸 맨주먹으로 뚫었으니 일단은 피하고 볼 일이다.
『이런 씨팔!』 욕지기를 퍼부으며 부랴부랴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반동의 힘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면서 허리춤에 찔러넣은 권총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익숙한 무게감과 친밀한 차가움, 그것에 반응하여 심장 고동이 리듬감을 타고 빨라졌다. 지금처럼 불빛을 등지고 선 위치에선 다이아몬드 반지의 주인을 확인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주변에 깔린 어둠이 제법 방해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엉뚱한 사람의 엉덩이로 바람 구멍을 뚫어놓는 끔찍한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사격에는 꽤 자신이 있었고, 공식화된 숫자로 기록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명중률은 높았다. 은으로 만든 총알을 최대한 아끼려면 - 은은 고가품이다 - 단 한 방으로 괴물의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어야 했다. 빠른 속도로 총구를 움직이면서 방아쇠에 걸린 검지손가락을 긴장시켰다. 다만 후욱, 후훅하고 들려오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무척 성가셨다.
『리! 대답해. 괜찮아?!』 『썩을 해태 같으니!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그랬잖아! 보청기를 집에다 두고 왔냐?!』 잔뜩 격앙되어 포악한 목소리로 꽥꽥거리는 모습으로 보자면 그리 크게 다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딘은 자존심 강한 헌터들이 제3자 앞에서 종종 허세를 부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숨이 끊어질 정도는 아니니 괜찮은 거다」- 상처를 입은 존은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었고, 그때마다 딘은 부러진 갈비뼈, 이상한 각도로 돌아간 팔, 퉁퉁 부운 발목, 찢겨진 팔뚝, 퍼렇게 멍든 옆구리 등등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는 헌터들의 말은 절반도 믿어선 안 된다 - 그렇게 판단이 서자 딘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리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했다. 『헤이! 말해봐. 다쳤어?』 리는 날 길이가 15cm에 이르는 칼을 꺼내들고는 목이 대단히 아픈 듯 감싸쥐고 있었다. 목을 졸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옷의 단추도 엉망으로 뜯겨져 나갔다. 성가시다는 투로 손을 내리자 붉게 멍울진 다섯 개의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리는 여자다. 딘은 바로 그 점이 걱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으슥한 곳에서 재수 없게 강간범이라도 만난 거야?』 끔찍한 소리 말라며 리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강간범이라니. 글자를 이루는 알파벳을 하나씩 혀로 굴리다가 그 역겨운 맛에 신물을 토하려 했다. 『하.하.하! 강간범! 나도 그렇지만 저쪽 역시 대단한 모욕감을 느낄 발언이군.』 아닌게 아니라 새카만 어둠 속에서 훅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기척이 들렸다. 딘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그쪽으로 돌림과 동시에 귀를 쫑긋 세웠다. 허나 황당하게도 얼어붙은 공기는 기척이 들린 쪽과는 정 반대쪽에서 침입해왔다.
『어처구니가 없군. 누구더러 그런 파렴치한 놈이라는 거지.』 남자는 이런 일쯤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총신을 덥썩 붙잡았고, 딘은 그 사실에 기겁했다. 상대방의 동작이 너무 빨라서 좀처럼 대응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힘도 무지하게 셌다. 다 같이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봅시다. 나도 부를테니 당신도 부르는 거요. 총을 쥔 팔이 순식간에 위로 당겨 올라가면서 등뼈가 일직선으로 곧게 뼈졌다. 딘은 이 황망한 사태에 어찌할 바 몰라 눈을 부릅떴다. 푸줏간에 매달린 돼지고기가 되어선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총을 놓자니 자살 행위가 따로 없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낯선 사내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훤히 드러난 무방비 상태의 복부를 향해 팔꿈치를 찔러넣었다. 압력을 받은 내장이 뒤편을 향해 일시에 이동을 실시했다. 그 결과는 대단히 참담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폐가 마비라도 되었는지 숨을 쉴 수 없었다. 벌려진 입을 통해 공기가 들어가지도, 빠져나오지도 못 했다. 고통스러워하며 이마를 찡그리자 이번엔 턱을 겨냥해 훅이 날아들었다. 『윽!!』 손아귀의 힘이 저절로 풀리면서 쥐고 있던 총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망할 놈의 권총! 망할 놈의 숨구멍!」 지금으로서는 떨어뜨린 총을 도로 주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일단은 정상적으로 호흡하는게 먼저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허권이 부여된 병조림 마개로 목구멍을 단단히 밀봉이라도 한 것 같았다. 가슴 통증은 끝내줬고, 코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말도 안돼! 이대로라면 질식하게 된다! 얼굴이 납덩이처럼 회색으로 변한지 이미 오래였다. 딘은 성능이 지나치게 탁월한 병조림 마개를 제거하기 위해 턱이 가슴에 닿도록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기침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먹을 꼭 쥐고 어린 새미에게 숟가락 사용법을 가르치던 것보다,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던 것보다 더 노력했다. 꼴사납다. 눈물이 가득찬 시야가 흐릿했다.
『애쓰면서 침이라도 삼켜보지 그래.』 남자가 비아냥거리는 것과 같이하여 가까스로 가냘픈 풀피리의 곡조로 피이~ 소리가 났다. 한줌의 공기를 갈구하며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걸 비웃으며 남자가 총을 집어들었다. 뭐랄까,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 브래드 피트 같은 남자였다. 피부가 놀랍도록 창백했고, 하느님 맙소사, 대단히 훤칠했다. 콧날이라던가 입술선이라던가 하는게 날카로우면서도 지적이었다. 딘은 콜록거리며 기침을 터뜨리는 와중에도 가게 안에서 샘이 언급한「미남 사립탐정」이야기를 떠올렸고, 그것이 딱 부러지게 요점만 찝어 묘사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 오래된 흑백 영화속의 멋쟁이 탐정들처럼 어떤 일에도 - 심지어 갈기갈기 찢긴 시체가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진다 해도 대단한 흥미를 느낄 수 없다는 식의 무덤덤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어머니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떨굴 것 같은 비인간적인 외형은 색소가 엷은 북유럽의 귀족적 외모와 화합하여 대단히 견고한 금속의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플래티넘 화이트. 이쯤해서 딘은 가볍게 실소했다. 차라리 강간범이었음. 저래서야 강간범따위일 리 없다. 남자가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연히 악수를 청하는 식의 우호적인 동작은 아니었고, 딘은 자신이 평소 신경써서 기름칠한 25구경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도구로 변질되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저 아이에게서 떨어져!』 딘의 눈에는 이 모든게 비현실적으로만 보였다. 껑충 걸음으로 뛰어오른 리가 테니스 선수 마리아 샤라포바가 라켓으로 강 서브를 넣는 동작으로 칼날을 휘둘렀다. 잘 벼려진 날은「비인간적 외모의 브래드 피트」의 오른쪽 손목을 수직으로 찍었고, 솔직히 말해 그건 단단한 생선의 몸통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토막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저 속도에 저 힘이라면 뼈까지 끊고도 남는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하도 끔찍해서 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움추렸다. 그러나 째앵~ 하는 의외의 소리가 귀를 자극하면서 양상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시곗줄이다!」 메탈 재질의 손목 시계에 칼날이 충돌하면서 어둠속에서 노랗게 불꽃이 튕겼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고 총을 떨어뜨렸다. 이건 거의 기적이라고 딘은 생각했다. 우유로 반죽한 밀가루를 오븐에 넣어 구웠는데 성 테레사 수녀와 닮은 모습으로 빵이 나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 정확히 시곗줄을 노리고 칼로 후려친 거라면?
그렇게 생각한 까닭이 있었다. 남자는 아픈 듯 손을 움츠리면서 고함을 질러댔는데 그 내용인 즉「밀라노에서 산 론진이란 말이야! 이게 얼마짜리라고 생각하나!」였다. 여기에 맞대응하는 리의 대꾸 또한 걸작이었다.「어딜 봐서 그게 론진이냐?! 뉴욕 뒷골목에서 산 짝퉁이잖아!」두 사람 다 하마터면 손이 잘릴 뻔했다느니, 목표가 빗나가서 유감이라느니 식의 대화는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리는 손목 시계를 노렸던 것이 분명했고, 남자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콧잔등으로 땀이 송글 맺혔다. 도끼로 찍는다는 감각으로 칼날을 휘둘러 1.5cm 너비의 시곗줄을 칠 정도라면 그 실력이라는 건 과연 어느 정도인 걸까.
얼얼한 손목을 움켜쥐고 남자가 이를 갈았다. 『과격하군.』 『흥! 시작은 그쪽이 먼저 하셨수.』 『내가? 이거 억울한데.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들입다 무기를 꺼내든 건 그쪽이었어. 그거 아나? 지금까지의 내 행동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라고.』 『하! 아무 짓도 하지 않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잖아.』 『그 논리대로라면 눈 뜨고 돌아다니면 그때는 기관총에 맞아도 싸겠군.』 리가 어깨를 약간 들썩였다. 『지당하신 말씀. 먹이를 찾는 뱀파이어라면 눈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총살해야 마땅하지.』
남자는 불쾌한 기색으로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했다. 『내가 뱀파이어라고? 폭언이 따로 없군. 내 어딜 봐서 흡혈귀라는 건가.』 그래봤자 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발뺌해봐야 소용 없어. 내 귀는 못 속이니까.』 『눈이 아니라... 귀?』 『그래. 당신의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또렷이 말해주고 있다고.』 남자의 태도가 살짝 달라졌다. 이제 와서 아닌 척해야 소용 없다는 걸 깨달은 듯하다. 『호오. 그게 당신인가.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귀가 매우 좋은 뱀파이어 헌터가 있다고. 10리 밖에서도 사람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유럽에 있지 않았나. 바로셀로나에 적을 두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보를 업데이트 하라고, 선생. 그건 11년 전.』 그리고 곧바로 비난했다. 『이 살인자! 조 와이저와 다니엘 크로포드를 먹어치운 건 너지?』
박살난 것이 분명한 시계를 풀면서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시끄럽다. 정녕 흙으로 돌아갈 여인에게서 난 자야! 뱉는다고 다가 아니니 말을 삼가게. 내 말해두지만 나는 그 두 남자가 흘린 피에 대해선 깨끗하다고.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아.』 『악을 짓기를 물 마심과 같이 하는 자의 말을 어찌 믿으랴.』 『믿지 아니함은 그 마음이 풀과 같이 연약함 때문이지.』 어둠 속에서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해보게. 내가 모처럼 성찬 중이라면 뭣하러 마을에 내려와 어슬렁거리지? 잔뜩 부른 배를 두드리며 새로운 희생자를 찾으러? 농담 말게. 내가 그런 멍청이였다면 18세기에 이미 붙잡혀 화형대에 올랐을 걸. 난 다른 일 때문에 이곳에 들린 거고, 자네 일과는 결단코 상관이 없는 종류지. 맹세하지만 이 마을에서 행방불명된 두 얼간이와는 관련이 없네. 그러니 나에게 그 두 사람의 피 값을 청구하면 곤란해.』 『어머머, 그랬어? 그런데 이걸 어쩌나. 미처 말을 하지 않았는데 사실 나 또한 그 두 사람의 일로 조사에 임한게 아니라서 말이지...』 『어?』 『지금으로선 당신이 방금 전에 말한 그「다른 일」이라는게 더 신경 쓰인다고나 할까.』
몸을 기울인다 싶더니 체중을 실어 그를 세게 밀쳤다. 남자는 갑작스런 공격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리는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과일을 자르는 경쾌한 사악, 소리와 함께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동시에 분노의 외마디 외침이 들려왔고 주먹이 리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리는 낙서투성이의 벽까지 곧바로 튕겨나갔고, 뱀파이어는 빠른 속도로 다시금 달려나와 리의 몸뚱아리를 패대기친 후, 힘주어 발길질했다. 『리!』 딘은 주섬주섬 손바닥으로 바닥을 더듬어 권총을 찾았다. 있다. 탕, 타앙, 탕 하고 세 발의 총성이 밤을 찢었다.
* 이 와중에 샘은 형이 화장실에서 돌아오길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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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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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양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의지한 리가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런데 미남이라고 하면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종잇장처럼 하얀 남자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해변가를 돌아다니는 건 질색인데.』 약 3초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자, 잠깐만요!』 토네이도급의 돌풍을 맞은 풍향계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붉은색 화살표가「정신 나갔음, 나사 풀렸음, 이대로라면 난장판임」을 가리켰다. 배가 노를 저어 바위산으로 올라갈 기미를 보이자 샘은 서둘러 이야기를 끊으려 했다. 그렇지만 매번 도움이 되어주지 않는 그의 형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초를 쳤고, 상황은 곧바로 통제불능으로 치달았다. 『그런가? 난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가 검정색 레이스 브레지어를 벗는 걸 보면 아랫도리가 금방 단단해져. 반면에 태닝한 여자는 솔직히 말해 매력 없다고. 공들여 훅을 벗겼는데 등은 진한 카라멜 색이고 젖꼭지 부근만 둥그런 접시 모양으로 하얗게 번들거려봐. 속옷 라인을 손가락질하며 웃을 수도 없고 한 마디로 기분 잡치는 거지. 유부녀의 웨딩 링 자국이 난 손가락을 보는 것 같기도 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적도 있다니까.』 자! 올라가는 거다, 아라라트 산으로. 눈에 띄게 당황해하는 샘을 뒤로하고 배가 모래사장 위로 한쪽 발을 척~ 걸쳤다.
『어랍쇼. 의외네. 댁은 여자랑 하면서 불 켜고 그러우?』 몸을 앞으로 기울여 네 번째 맥주의 병뚜껑을 돌려 따던 리는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속으로 흥분한만큼 목소리 역시 흥분했다. 이제 그들은 철부지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이마에 여드름이 돋은 인기 만점의 여학생 흉을 보는데 재미를 붙였다. 팝콘으로 3층 석탑을 쌓는게 가능한지를 나름대로 연구 중이던 딘은 열렬히 반응했다. 『불 끄고 하는게 더 이상하지 않아?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더듬거리는 건 바보 같다고. 그래선 안경 없이 영화관에 가는 것과 똑같지.』 『난 싫다. 몰래 감춰두고 있던 비밀스런 뱃살이 고스란히 드러날 참인데 침대 머리맡 조명이 반가울 리 없잖아. 그쪽은 아무래도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이군. 하지만 촉각이라던가 미각 같은 건 어둠 속에서 더 짜릿하게 느껴지는 법이야. 새카만 어둠 속에서 엉덩이 라인을 따라 허벅지까지 혀를 가져가면...』 『그래봤자 속이 울렁거리는 바디 오일 맛만 느껴질 뿐이라고.』 『으악!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니까!』 제발 좀 닥쳐. 행여나 누가 엿들을까 겁이 난 샘은 아랫입술을 떨며 언짢은 소리를 냈다.
실실 웃음을 쪼개던 리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리며 반항을 시도했다. 『자고로 미남의 조건은 뭐니뭐니해도 구릿빛 피부...』 다 듣지 않고 샘이 한 손가락으로 딘과 리를 번갈아 가리켰다. 『입에 재갈을 물리긴 싫습니다. 두 분, 이야기를 바른 방향으로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모두 정숙하도록. 방망이를 들고 법정 모독죄를 경고하는 판사 앞에서 더 이상의 입씨름은 무모한 짓이다. 검사와 변호사는 사이좋게 엉덩이를 내려 착석했고,「미남의 기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에 대한 주제 토론은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배심원에게로 넘어갔다.
의자 등받이가 영 불편하다며 리가 몸을 바로 잡았다. 『미안. 조금 헷갈리네. 방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던 것이 미남의 기준이었어?』 전후좌우 방향 감각을 상실한게 분명한 여자의 멱을 붙잡고 오리털을 마구 뽑고 싶어졌다. 『그새 술 취했어요? 당연히 아니죠!』 『그럼 뭐였는데.』 『왜 이래요. 얼굴이 대단히 창백한 수상쩍은 남자에 대한 거였잖아요!』 『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못 살아! 시선을 피하면서 딴청부리지 마요. 도대체 맥주 뚜껑을 얼마나 딴 거예요!』 『네 생각처럼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어. 어... 잠깐만. 화장실, 화장실.』 갈색 머리카락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창백하게 반짝거렸다. 리는 방광이 금방이라도 터질 사람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고, 샘은 커다란 한숨과 함께 그녀가 통로로 빠져나갈 수 있게끔 재주껏 몸을 비틀어야 했다. 술집 칼리아나의 내부는 대단히 협소했고, 해가 저뭄과 함께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세 좋게 의자를 밀어젖히면 필연적으로 맞은편에서 비명이 나오게끔 되어 있었다. 광란의 미식 축구가 막 끝난 홈그라운드 경기장 같았다. 밀고, 찌르고, 엉겨붙고. 어쩔 수 없이 샘은 자신의 앉은 키가 남들보다 곱절인 걸 저주하며 리의 작은 엉덩이를 거의 떠다밀다시피 해야 했다.
플로어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끔찍한 살사 댄스곡이었다. 저편 어딘가에서 누군가 굵게 신음하며「도대체 어떤 놈 취향이야?!」라고 불평했다. 샘 또한 그 투덜거림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지친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가 몸 단장을 하듯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어휴... 형도 많이 마셨어?』 『많이 마시긴. 이제 두 병 째야.』 『그럼 그만 마셔. 우린 휴식을 취하려는게 아니라 일 하는 중이잖아.』 『걱정 붙들어 둬. 네가 일부러 주의를 주지 않아도 충분히 조절하고 있어.』 모르긴 몰라도 그건 리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딘은 생각했다. 숙녀용 화장실은 통로로 나가서 오른쪽이다. 그런데 리는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는 곧 그녀가 소변을 보러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님을 암시했다. 물론 가게 밖으로 나가 노상방뇨를 시도하려는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길바닥에서 바지를 내리지는 않는 법이다. 아울러 허리춤으로 칼을 숨겨두지도 않는 법이고.
존은 식당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려가면 버릇처럼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곤 했다. 그러면서 딘에게 은밀히 눈짓하며「동생을 잘 보고 있거라」매번 다짐을 주었다. 그러면 딘은 운동화를 신은 발에 힘을 주고 샘의 손을 꼭 붙잡곤 했다. 존이 탐색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기까지는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고, 긴장을 풀고 식욕을 느낀 딘이 물을 마시는 건 항상 그 다음이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딘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손목 시계의 분침을 확인했다. 뱀 한 마리가 소리도 내지 않고 스르륵 미끌어져 내려갔다. 그럼 앞으로 5분이다.
『왜... 맘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그의 형이 손가락만 꿈틀거려도 대단한 의미가 있을 거라 착각하는 샘은 어쩐지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딘은 시계에서 얼른 시선을 떼고 눈치가 귀신 삼단인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팝콘이 생각보다 짜.』 그 대답에 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그야 쉬지 않고 계속 집어먹으니까 그렇지.』 『젠장. 이 동네에선 공짜 안주로 땅콩은 안 주는 거야?』 샘은 예의 계면쩍은 표정으로 돌아와「그만 좀 먹어」라고 잔소리했다. 그러면서도 접시를 형에게로 밀어주고 있으니 몸 따로, 마음 따로다. 녹화 중인 카메라처럼 눈동자가 딘을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의 움직임, 팝콘을 쥐는 동작, 아삭 소리를 내는 턱, 소금기가 묻은 입술을 혀로 축이는 모습까지 세심하게 지켜보았다. 딘은 정말이지 게걸스레 먹어댔고, 샘은 소리내어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 모습이 좋았다.
그 동생이 슬그머니 어깨를 붙여왔다. 『저기 있잖아, 만약에 그 미지의 사립탐정이...』 『샘, 샘! 네가 말한 그 남자는 불륜 전문 탐정이라서 조 와이저가 치근거렸다던 여자쪽을 쫓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랬다면 밤 나들이를 밥 먹듯이 했을 것이고, 올빼미 생활 3년이면 누가 봐도 병자 안색이 되겠지. 어쨌든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니까 판단은 유보할래. 너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말아. 이것저것 머리에 지나치게 많은 걸 담고 있으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법이야.』 『응.』 샘은 쉬이 수긍하며 팝콘 접시로 손을 넣었다. 그러나 손으로 옥수수 튀긴 걸 만지작거리기만 했을 뿐, 딘과는 달리 그걸 집어 입속으로 넣으려곤 하진 않았다. 그러다 그릇 속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마주 닿았다. 샘은 얼른 손을 뺐다.
『바텐더가 동네 사람들과 한바탕 내기를 걸고 있었어. 다니엘 크로포드가 도박 빚을 피해 도망을 치려 했다면 어디로 갔을까 하고 말이야.』 『예멘이나 짐바브웨로 갔을 거라고 하진 않든?』 『그렇게까지 멀리 달아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지. 여권도 필요하고.』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한 말인데 샘은 더할나위없이 진지하게 응수했다.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버터 냄새가 스며든 손가락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던 딘이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내기에서 배당이 제일 높은 곳은 어디래.』 『지미 스코트라는 사람이 말하길,「등잔 아래」라고 했어.』 재치 있는 말이었다. 딘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거 말 된다!』
그렇다고 등잔 아래라는 곳을 실제로 뒤질 수는 없는 것이고. 캠핑 도구를 챙겨 근방 야산으로 올라갔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했다. 여름의 폭우가 오기 전이니 각다귀떼 걱정만 덜면 보름 정도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하, 정말로 빚쟁이들을 피해 달아난 거라면 말이지.』 문제는 그들이 흡혈귀에게 아낌 없이 헌혈 중이라는 점이다. 하여 캠핑 어쩌고는 기각. 『버려진 헛간 얘기도 나왔어. 가출한 아이들이 여차하면 임시 잠자리로 이용을 하던 곳이래.』 『그렇담 뱀파이어도 이용할 수 있겠군. 내일 오전에 가보자.』 『오래된 공동 묘지에도 들려야 할 거야. 거기 납골당 자물쇠는 진작에 망가졌대.』 『음, 납골당이라... 알았다. 그럼 거기도 들리자.』 『그리고 여기서부터 20km 정도 동쪽으로 가면 망해버린 사과 농장이...』 『또 있어? 뭐야! 온 동네 투어라도 해야 되는 판국이냐?!』 가라앉은 딘의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무래도 장난삼아 하는 내기의 판돈이 커지는 모양이다. 아무 곳이나 꾹꾹 찔러보자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건가. 이래서야 유용한 정보를 주겠다는 건지, 아님 막노동을 시켜먹겠다는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젠장, 알았으니 이참에 다 나오라고 그래. 또 없대?』 대단히 미안해하며 샘이 대답했다. 『재작년 허리케인에 박살나 수리를 포기하고 버려진 집이 두 채...』 화장실에나 다녀오는게 좋겠다. 딘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딘. 어디 가려고?』 『수분을 빼러.』 『그럼 나도 같이 가.』 『아서라, 새미. 유치원생도 아닌데 손 붙잡고 나란히 화장실에 가는 건 쪽팔려.』 리가 자리를 비운지 이제 막 5분이 넘었다. 슬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딘은 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 통로로 나왔다. 글세다, 별 일이야 있겠느냐만은... 『금방 올게, 동생아.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너, 지금 무지 웃겨 보여.』 『몰라!』 『계집애.』 『얼간이.』
삐진 어린애마냥 입을 삐죽거리는 동생에게 웃어보이며 사람들 틈새로 재빨리 섞여 들어갔다. 뒷통수로 따라붙던 샘의 시선이 다트 게임을 하려는 손님들 탓에 분산된다 싶자 EXIT 화살표를 따라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양손으로 술병을 들고 뛰어다니고 있는 직원을 피해 구석으로 붙었다. 딘의 발걸음이 한층 빨라졌다. 대략 눈대중으로 훑어본 결과 실내엔 리가 없었다.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새의 사내가 악을 쓰고 있는 공중전화 쪽으로 시선을 준 뒤, 창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술통을 굴리느라 팔뚝으로 퍼렇게 힘줄이 돋은 사내가「침침한게 글자가 잘 안 보여요」라는 표정으로 매출 전표에 싸인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뒷문은? 별 생각 없이 손을 내밀어 손잡이를 돌렸다.
그때였다. 『빌어먹을! 나오지 말고 안으로 도로 들어가!』 비명을 닮은 필사적인 외침과 같이하여 눈앞으로 뭔가가 확 달려들었다. 반짝이고, 노랗고, 환하고... 그것이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를 낀 주먹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0.2초 가량 소요되었다.
Posted by 미야
2007/07/04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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