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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까지나 건전을 지향하는 (응?)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저장고를 뒤져봐도 해당 문서가 없길래 죄다 날렸나 아침부터 울부짓고... 휴. ※


1분은 60초다. 1부터 60까지의 숫자를 또박또박 헤아리면 1분이 된다.
그렇게 따지면 참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60이라는 숫자는 결코 작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1분이 얼마나 짧은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졸린 눈을 부비며 하품을 지긋이 하고, 코를 만지고,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봤다가, 발을 꼼지락거리면 어느새 1분이 흐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서 목깃을 세운 회색 코트 차림새의 수상한 사내가 남의 호주머니를 뒤져 몰래 훔쳐간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60의 숫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송두리째 증발하고, 그런 까닭으로 당신의 수명은 방금 전에 1분이 줄었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샘은 넋을 잃었고, 무릎의 휘청거림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에 그는 60초와 1분의 시간이 아닌 나머지 수명 전부를 한꺼번에 도둑 맞았고, 그 탓에 떡갈나무를 닮은 추레한 노인이 되었다. 모든 생명력은 고갈되었다. 머리는 백발이 되었으며, 홍채는 탄력을 잃어 뻣뻣해졌다. 좁아지고 흐려진 시야는 오로지 그의 낡아빠진 신발만을 비췄다. 바짓단 사이로 드러난 마르고 덧 없는 발목이 조소를 자아냈다. 지팡이 없이는 체중을 지탱할 수도 없는 몸은 앞으로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치욕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칼, 살육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은 소멸한다. 정명의 대로에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간다.
『샘! 빨리 와서 날 도와줘!』
날카롭게 울리는 이명. 그것은 끔찍스런 바다의 범람을 닮았고, 들판에서 황충이 날개를 펴고 덤비는 소리와도 같았다.
『샘!』
싫다.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무엇을 도우라는 건가. 박살난 피붙이의 머리 조각을 수습하라고? 시체를 씻기고 염을 하라고? 부릅뜬 눈을 편히 감겨주라고? 관에다 못질을 하라고?! 못 한다. 안 한다. 그런 일을 할 각오따윈 되어 있지 않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나중에까지 그럴 것이다. 물에 젖은 눈꺼풀을 닫은 샘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뿔로 만든 악기를 불어 빨리 달리기를 종용해도 그는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내 이름을 부르지 마요!』
만약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아들은 아버지를 땅에 묻어야 하고, 동생은 그 형의 시신을 물에 띄어 흘려보내야 한다. 소중한 사람들은 언젠가 정해진 수명을 다하고 야훼가 아담을 저주한 바 그대로 흙으로 돌아간다. 장례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들의 육체는 서서히 썩어간다. 싫든 좋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다.
『싫어요! 싫다고요!』
그런 현실따위... 개나 먹으라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불에 태운게 엊그제 같다.
그런데 이번엔 형의 시체마저 태우라는 건가.
『날 그냥 내버려둬요!』

정작 중요한 순간이 되면 요-만큼도 도움이 되어주지 않는 녀석.
끌끌 혀 차는 소리를 낸 리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 확실한 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모두를 대신해서 소매를 걷어올렸다.
교통 사고에서처럼 한 눈에 보기에도 많이 다친 것이 확실한 환자의 경우 섣불리 만지지 않는게 제일 좋다고 전문 응급요원들은 설명한다. 도움을 준답시고 손을 내밀었다가 반대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아주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단순히 눈으로만 보고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최소한 맥을 짚어야 심장이 뛰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낼 수 있고, 눈꺼풀을 뒤집어야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단 손을 대기 시작하면 급한 마음에 애들에게 사탕이나 팔던 구멍가게 주인이 돌팔이 야메 의사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운 교통 사고 현장의 분위기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부채질을 하면 하지, 결코 말리지는 않는다.

아메 의사도 때론 납작한 들창코를 클레오파트라의 코로 만들 수 있다드라. 믿으면서 아멘한다. 최대한 조심해가며 쓰러진 딘의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머리를 받친 손바닥이 피로 흥건히 젖지 않은 걸로 봐선 시작이 좋았다. 그러나 리는 쓸데없는 희망으로 현실을 장밋빛으로 왜곡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22구경 탄환의 경우는 두개골처럼 단단한 뼈를 쉽게 관통하지 못한다. 더듬거려 확인한 뒷통수의 모양새가 온전하다고 좋아하기엔 아직 이르다. 머리 속으로 들어간 총알이 뇌를 고속으로 휘젖다가 부드러운 젤리가 된 덩어리들과 같이해서 가라앉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코나 입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있는 걸 눈여겨 보며 짧게 다듬은 머리카락을 신중한 태도로 위로 쓸어넘겼다. 하지만 검댕이 많이 묻은 탓에 사입구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짐작하는 건 쉽지 않았다. 쳇 소리를 내며 더러운 머리카락을 다시 반대편으로 헤집었다. 동시에 골똘히 생각했다. 총성이 먼저였던가, 아님 딘 윈체스터가 쓰러지던게 먼저였던가. 동시였던 것도 같고, 쓰러지던게 먼저였던 것도 같다. 어쩌면 이도저도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의 감각이라는 건 여차하면 혼동을 일으키고 잘못된 정보를 진짜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일수다. 그러니까 파르르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눈꺼풀도 어쩌면 단순한 시각적 착각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헐떡거리는 입김이 닿아 속눈썹이 살짝 흔들린 것일 수도 있다. 심장이 멎었음에도 시체의 손가락은 꿈틀거린다. 속단을 내리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헤이! 내 말 들려?』
귀에 가까이 대고 이름을 불러보았다. 빌어먹게도 그의 가슴은 아직 따스했다.
『이봐! 딘 윈체스터!』

그러다 문득 딘의 오른손으로 시선이 갔다. 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총을 쏘고 자살하려 했다면 손에 총을 쥐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대신 손등으로 빨갛게 눈에 띄는 자국이 보였다. 동전 하나 크기였고 모양은 둥글었다. 마치 날아오는 돌에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리는 돌연 기묘한 운명 같은 것에 사로잡힌 듯한 기분을 느꼈다. 운명은 그들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포위하고 있었고, 강력했고, 사람의 자유의지라는 것 자체를 비웃게 만들었다.
퍼득 어떠한 가설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고,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딘이 떨어뜨린 권총은 5m 앞으로 굴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낯선 물건이 덤으로 하나 더 놓여져 있었다. 묵직한 부피의 남성용 시계, 시곗줄이 망가진... 그녀는 신음했다. 이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았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았음에도 그놈의 망할 시계의 상표가 짝퉁 론진일 거라는데 흔쾌히 100달러를 걸 수 있었다. 예의 브래드 피트를 닮은 뱀파이어 남자가 끼고 있던 바로 그 시계다.

윌리엄 텔은 아들의 머리 위로 사과를 올려다놓고 멀리서 화살을 당겨 단번에 명중시켰다. 일개 산적도 그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상대는 사람보다 감각이 수 십배는 월등한 뱀파이어다.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아이의 머리 위로 올라간게 사과가 아니라 훨씬 작은 포도알이었다고 해도 너끈히 쏘아맞출 수 있다.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남자의 손등으로 손목시계를 집어던져 훼방을 놓는 것쯤은 애들 장난이다.

어둠 속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는 고개를 들어 거기겠거니 싶은 쪽을 쳐다보았다. 허나 모습은 없었다.
《맹세하는데 자비를 베풀려던 건 절대 아니야. 당신도 잘 알겠지만 앞으로가 더 큰일이니까.》
그 존재감은 너무나 작아서 리는 그 목소리가 순전히 환청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 시계는 어차피 수리가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그냥 버린 걸세.》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리는 그가 애매하게 한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수줍어하는 것도 같았고, 필요도 없는 진공 청소기를 실수로 주문하기라도 한 것처럼 난처해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나에게 왜, 내지는 어째서, 라고 묻지 말게.》
촛불이 흔들리듯 점차 말꼬리가 희미해졌다. 자신감 없는 음성은 후~ 하고 숨을 부는 작은 바람에도 갈기갈기 헤어졌다.
《그런데 그 시계는 짝퉁이 아니야. 정말로 밀라노에서... 거금을 주고...》
그 마지막은 거품이 꺼지는 소리를 많이 닮았다. 불이 꺼졌고, 기척은 곧 사라졌다.

이젠 진짜 시간이 없다. 리는 너무나 생생한 꿈에서 방금 깨어난 사람처럼 현실감을 되찾았다. 돌연 복부에서 뭔가가 폭발했고, 모든 지각능력이 신축성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시계는 진짜 론진이고, 빚졌다고 치지.』
물 먹은 솜덩이처럼 축 늘어진 딘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선택은 딱 두 가지다. 나는 네 형을 이대로 편히 죽게 해줄 수도 있어. 그는 아픔은 하나도 느끼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물론 우린 포기하지 않고 딘을 살려낼 수도 있어. 대신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끔찍스럽게 고통스럽다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자! 어떻게 할까. 응?』

한쪽 저울에는 편안한 죽음. 그리고 그 반대편 저울로는 고통스런 삶이 올라가 있다.
무엇을 집어들 것인가. 둘의 가격은 똑같다.
교활한 장사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선택하는 고객의 손을 응시했다.

샘은 손등으로 벌겋게 변한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았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샘은 그 입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그는 살아야 해요.』
「딘이 살았으면 좋겠다」, 내지는「딘은 이대로 끝내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가 아니었다. 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했다. 죽어선 안 된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는 듯한 고통은 알 바 아니다. 육지로 올라온 인어가 겪어야만 했던 처참한 저주따윈 신경 안 쓴다. 샘은 어떻게든 딘이 살기를 원했고, 자신의 옆에 있어주길 바랬다. 행여라도 편안하게 떠나가길 희망한다고 해도 놓아줄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다. 밧줄로 휘감아 끌어당길 것이다. 너무 심하게 잡아당겨 팔뚝 하나가 잘려나간다고 해도 상관 없다. 샘은 모든 비난을 감수할 것이고, 미움받을 준비도 했다.
샘은 선택의 저울에서 전갈의 독이 발리워진 삶을 망설임 없이 들어 올렸다.

리는 그 선택이 정확한지를 확인해야 했다. 나중에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면 그것처럼 난감할 일은 없을 터. 이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교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너에게 총구를 겨누었다는 걸 결코 잊으면 안돼, 샘. 쉽게 생각했다간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총을 쏘려 했다는 것도...』
채 듣지 않고 샘은 차가운 형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로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쓰다듬고, 호호 입김을 불고, 손가락을 깍지꼈다.
『설명은 됐어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정나미 떨어진다는 눈길로 샘을 내려다보던 리는 이윽고 항복의 의미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알았다. 일단 장소를 바꾸자. 네 형의 머리를 잘 잡아. 그리고 네 형의 혈액형이 뭐지?』
『나랑 같아요.』
『넌 바보냐?! 그건 답이 될 수 없지!』
기다렸다는 식으로 순찰차들이 달려오는 요란한 경적소리, 그리고 구급차들과 소방차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는 어둠을 훼방하는 파랗고 빨간 불꽃들을 향해 힐끔 시선을 주었고, 허리를 굽혀 딘이 떨어뜨린 권총을 찾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차, 잊으면 안 되지.』
그리고 자칫 깜빡 잊을 뻔했다는 투로 박살난 남성용 시계를 따로 챙겼다.

2층의 창문이 쨍그렁 소리를 내며 깨졌다. 샘은 상체를 숙여 혹시라도 모를 파편으로부터 딘을 보호했다. 불길이 사방에서 이글거렸고, 그 모습은 마치 모의 재판과 처형으로 막을 내리는 참회의 화요일 축제 (* 마디그라) 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1년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뛰어 넘도록 하자. 샘은 정신을 잃은 딘의 얼굴과 목, 그리고 어깨를 어루만졌고, 무척이나 작아 보이는 그를 품에 안았다.
『형,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만약 잘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바로잡을 테니까...』
그 난장판 속에서 샘은 놀랍도록 침착해지는 자신을 깨달았다.
『날 믿어.』
단호하게 말한 샘은 커다란 손으로 딘의 뒷통수를 촘촘한 그물처럼 잘 감쌌다.

Posted by 미야

2007/11/04 19:38 2007/11/0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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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수수 2007/11/04 21:52 # M/D Reply Permalink

    와와~~~ ^^ 혹시나하고 왔는데..ㅋㅋ 넘 좋아여~~>.< 근데 우리의 딘.... ㅠㅠ 빨랑 일어나지 못할까.. 새미공주가 울고있잖여...크흑...

  2. 고고 2007/11/04 22:48 # M/D Reply Permalink

    난 정말 미야님의 개그섞인 대화가 너무 좋아요. 위트있는 사람이 멸종하고 있는 이십일세기. 만수무강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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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예상보다 샘은 빨리 깨어났다.
등으로 전해져오는 꿈틀거림에 리는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두 다리가 허공에 붕 떠있음에 불만을 품은 사스콰치는 본능적으로 주먹부터 휘둘러댔다.
발톱을 세우고 버둥대는 고양이도 다루기 힘든 법인데 하물며 상대는 신장이 2m 크기에 육박하는 전설의 몬스터다. 머리를 한웅큼이나 쥐어뜯겼고, 옆구리를 쥐어박혔다. 그러고도 성이 차질 않았던지 샘은 길죽한 다리를 풍차처럼 돌려대며 난동을 부렸다. 여기다 압도적인 신장의 차이까지 더해지자 누가 누구를 끌고가는 것인지 구분을 하기 어려워졌다.
분노의 외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대며 샘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자 한계점에 육박했다. 리의 걷는 모습이 달 표면에 착륙한 우주인들을 닮아가면서 부츠의 한쪽 굽이 지면으로부터 정확히 7cm 위의 지점을 찍었다. 무게도 없는 공기가 발판이 되어줄 리 없는 까닭에 불가항력적으로 몸이 왼쪽으로 쏠렸고, 무게중심을 잃은 등뼈가 듣기 민망한 우득 소리를 냈다.
맙소사. 그녀는 두피로부터 뜯겨나간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는 샘의 주먹을 봤고, 다음으로는 계단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숫사자처럼 달겨드는 걸 봤다. 그로부터 0.1초가 채 되지 않아 두 무릎이 활활 불탔다.

『아윽!』
순간 뇌가 독한 소독액에 담겨져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래도 리는 이를 악물었다. 안 된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한다. 코가 앞으로 붙었는지 뒤로 붙었는지 모를 상황에서도 그녀는 샘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궁리부터 했다. 일단은 강제로 바닥에 앉혀놓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설득의 주먹질이라는 것을...
『케엑!』
애완동물 훈육백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개의 꼬리를 덥썩 잡으면 손등을 물리니 주의하자.
샘은 머리를 잡히자 격렬히 반항했고, 리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뤘다. 쇠사슬이라도 끊어먹을 기운이었다. 뉴욕으로 상륙한 고질라가 브루클린 다리를 엿가락처럼 끊어먹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퍼렇게 힘줄이 돋은 팔뚝으로 다섯 척 높이의 다곤 신상을 단번에 분지를 기세여서 리는 하는 수 없이 꽉 붙잡은 머리를 도로 놓았다. 그러자 샘은 이때다 하고 계단을 네 다리로 기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돌아갈 거예요.』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선 화염과 연기는 그리 신경을 쓸 대상이 아니었다. 저 안으로 아직 딘이 있었고, 맙소사, 샘은 교회에 불을 지른게 당사자라는 걸 떠올리고는 그냥 죽으려 했다. 만약 이대로 딘이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친 형제를 통째로 숯가마에 던져놓고 태워죽인 셈이 된다. 샘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고, 뜨거운 열기로 인해 뒤틀리고 부풀어오른 유리창을 노려봤다. 이럴 수는 없다. 딘은 아기인 그를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줬는데 그 은혜도 모르는 샘은 어른이 된 딘을 화형에 처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있을 수도 없다.
통곡을 닮은, 한 음절로 된 절망의 외침이 목구멍을 꿰뚫었다.

허겁지겁 무릎을 털고 일어난 리는 재빨리 길을 가로막고 섰다.
『멈춰! 자살이라도 할 작정이야?!』
샘은 대답 대신 리를 옆으로 세게 밀쳤다. 뿐만 아니라 여자를 길바닥에 벌렁 드러눕게 만들고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여자를 밀쳤다는 수치심도 없고, 죄책감도 없었다. 어떻게 보자면 지금의 샘은 오랜 단식과 기도 끝에 무아지경에 빠진 광신도처럼 보였다. 부릅뜬 눈은 정면을 향해 고정시키고, 두 귀를 닫았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아직 죽지 않았을 - 멀쩡하게 살아 있을 그의 형을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의 그는 방향타가 망가져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는 배나 마찬가지였다. 육지가 코앞이라고 할지언정 결코 멈출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배는 연료까지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였다. 끓어오르는 감정이 바로 무한대에 가까운 연료였다.

『오냐~! 이 망할 자식아!』
직업이 직업인지라 별별 험한 꼴은 이미 다 당해본 터다. 떠밀려 넘어졌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바보 짓은 하지 않는다. 이런 것쯤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손을 털고 일어난 그녀는 개구리처럼 점프해서 샘의 등으로 달라붙었다. 날씬한 몸매 말고 자신의 몸무게가 지금보다 10kg 이상 더 나갔음 좋겠다고 생각한 건 맹세코 지금이 처음이었다. 빌어먹게도 샘은 그리 개의치 않는 눈치였고, 달라붙은「길바닥의 껌」은 죽을 힘을 다해 샘의 몸에 다리를 휘감았다.
무작정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 조르고, 감고, 주먹질하며 귀를 물어뜯었다. 그녀는 천안문 광장을 진압하려던 탱크를 맨몸으로 세웠던 한 중국인 남자를 떠올렸고, 그 남자를 당장 성인 반열에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분명 성자다. 사람을 멈추게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돌진하는 탱크를 세웠으니 진실로 위대하지 않은가.

『그만둬!!』
이번에도 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귀찮다는 식으로 리의 턱 아래부위를 손바닥으로 감싸쥐고는 거머리의 머리를 떼어내는 요령으로 힘주어 비틀었다.
그 통증이 상당했기에 그녀는 보복이랍시고 구둣발로 샘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다.
남자의 몸에 눈에 띄는 급소를 만드신 하느님의 선견지명을 찬양할지니. 탱크에서 수상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면서 움직임이 둔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젖먹던 힘까지 더해 샘의 사타구니를 재차 걷어찼다.
되었다. 끄응 신음소리를 흘리며 샘이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분해, 또는 와해. 잘게 부수어지는 정신의 공동.
짜부라지고 깨어진 그곳의 틈바구니로 재빨리 끼어드는 건 하루살이 날벌레다.
원망하는 눈빛이 고개를 들었다.
싫은 표정, 싫은 눈빛. 상처입은 짐승의 으릉거림. 저것은 증오다.
샘의 눈매가 스윽 가늘어졌다. 초록의 눈동자로 번져가는 새카만 감정을 알아차린 리는 아차 싶었다. 방어할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단단한 머리가 전속력으로 리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인공위성이 추락했나 싶었다. 욱씬거리는 흉곽의 통증에 눈물이 쏙 우러나왔다.

『샘!』
『내 다리를 잘라가고 싶다면 잘라가. 하지만 날 말리려 하진 말아!』
『그게 소원이냐?! 오냐! 네놈 다리를 확 분질러주지!』
『맘대로 해! 하지만 맹세코 난 혼자의 몸으론 돌아가진 않을 거야.』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냐?! 이것아. 딘은 네가 그렇게 하길 원치 않아!』
『알아! 하.지.만. 내.가. 그.러.길. 원.해!』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울컥하는 마음에 리는 샘의 멱살을 움켜잡고 그냥 메다꽂으려 했다.
이런게 제일 짜증난다. 리의 목소리엔 그래서 시퍼렇게 날이 서있었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그랬어. 뭐라고 했느냐고! 네 형을 쓰레기로 만들 작정이냐! 널 위하는 그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짓밟을 거냐고!』
그런다고 샘이 움추려들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그는 오냐오냐 키워진 윈체스터 가문의 막내둥이였고, 그 고집불통 존 윈체스터가 항복을 선언하고 두손을 번쩍 들어버린 아들이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드는 건 그만의 전매특허였다.
『그럼 형이 내 마음을 짓밟는 건 괜찮고?! 누구는 그래도 되고, 누구는 그래선 안 된다고 차별하는 거야?! 이거 왜 이래!』
『샘!』
『닥쳐! 아버지나 형이나 말로는 나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내 의견은 물어본 적도 없다고! 웃기지 말라고 그래! 진실로 날 위한다면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나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나도 형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 그는 그걸 알아야 해! 어미새가 알을 보호하듯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그걸 바라지도 않아. 나, 나도 형을 보호해줄 수 있어. 난 더 이상 아기가 아니야. 나도... 있... 할... 수 있다고. 제기랄.』
마지막 말은 거의 흐느낌을 닮아서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샘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고,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높은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눈물의 짠맛이 섞인 호흡이 반 박자 쉬고 코를 통해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샘은 그게 어쩐지 자신의 영혼이 아닐까 싶어 더럭 겁이 났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영혼이라면... 재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그는 더 이상 샘 윈체스터라는 이름으로 불리울 수 없을 것이다.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샘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맘대로 하라지. 다리를 잘라가도 된다고 말했던 건 결코 거짓이 아니다. 차라리 그녀가 빨리 일을 해치우고 그를 보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깟 팔 다리 하나쯤, 딘과 비교하자면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니까.
그래서 샘은 리가 신경질적인 표정이 되어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내들었어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반항도 하지 않았다. 곧 닥쳐올 무시무시한 통증따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다 끝내고 형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리는 무저항의 샘은 그대로 놔두고 허겁지겁 등을 돌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굉장했다. 샘이 서있는 위치에선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볼 수 없었고, 리는 일부러라고밖엔 볼 수 없는 태도로 팔을 좌우로 크게 벌려 샘의 시야를 차단했다.
『뭐예요, 갑자기. 지금 무슨...』
『얌전히 있어. 침착해야 한다, 샘.』
샘의 질문을 도중에 가로막은 그녀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가운데 통로를 주시했다.
무대의 막이 올라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유령이 등장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오싹한 기운이 뺨을 스쳤고, 공기가 크게 술렁였다. 흡사 얼음 위로 세찬 바람이 한바탕 흝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 창백한 기운에 샘도 덩달아 흠칫거렸다.
『제기랄! 뜨거운 물에 튀겨져 털 뽑힌 닭 같으니!』
리의 얇은 등가죽이 도마뱀의 그것처럼 물결치는 것과 동시에 한 방의 총성이 위협조로 울려퍼졌다. 귓청이 날아가는 굉음에 샘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팔을 들어 얼굴을 방어했다. 코앞에서 불꽃이 번쩍이면서 깨어진 콘크리트 돌조각이 높게 튕겨올랐다.

『리!』
『됐어! 안 맞았어. 안 맞았다고! 넌 맞았냐?!』
『괜찮아요.』
도망가야 하는 상황인가. 아님 맞서 대항해야 하는 상황인가.
샘은 어중간한 자세로 계단 하나를 내러갔고, 잠시 생각한 뒤에 도로 두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등짝으로 여섯 개의 눈이 달린 리는 그런 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칫 잘못되었다간 흥분한 상대에게 다시 방아쇠를 당기게 하는 신호가 되어줄 수 있었다. 얼레리꼴레리, 날 쏘아죽여라, 맞출 순 있겠냐, 이런 거 말이다. 돌진하는 황소의 눈앞에서 붉은 기를 흔들면 좋을 거 하나 없다. 리는 그 점을 분명히 했다.
『내 말 못 들었어?! 함부로 움직이지 마!』

하지만 그녀는 샘에게 일부러 주의를 줄 필요도 없었다.
놀란 샘의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맙소사. 딘?』
늘어뜨린 왼쪽 팔은 힘없이 흔들렸다. 심하게 다쳤는지 소매 아래가 온통 붉었다. 반면에 총을 움켜쥔 오른손은 리와 샘이 서있는 방향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여차하면 쏠 태세였다.
처음엔 질 나쁜 농담이라 여겼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끝장나게 화가 났어도 그의 형은 동생에게 총구를 겨눈 적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장전되지 않은 빈 총이었어도 말이다.
샘은 믿을 수 없다며 자신에게로 겨누어진 총구와 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 돌았어?!』
정말로 돌은 건지도.
어쩐지 어린애의 칭얼거림을 닮은 목소리로 딘이 작게 웅얼거렸다.
『아빠. 부탁할게요. 제발 나에게 이러지 마세요.』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아빠? 지금 아빠라고 그랬어?
『딘?!』
『제발 저에게 새미를 죽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내가 잘 보살필 수 있어요. 정말이예요. 약속할게요. 새미가 얼마나 착한지는 아빠도 잘 아시잖아요. 가끔씩 말 안 듣고 망나니 짓을 하지만 본심은 정말 착한 아이예요. 어쩌다 삐딱하게 굴면 제가 책임지고 엉덩이를 따끔하게 때려줄게요. 그러니까 나더러 새미를 죽이라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빌게요. 아빠...』
그을음과 검댕이 잔뜩 묻은 뺨 위로 눈물이 하얗게 흘러내렸다. 딘은 창피한 것도 모르고 코를 훌쩍거렸고, 그런 그의 모습은 샘의 이성을 솥단지 안에서 온갖 야채들과 뒤섞여 펄펄 끓게 만들었다.
딘 윈체스터가 울고 있다.
차라리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타이타닉호가 조류에 휩쓸려 저절로 떠올랐다고 말할 것이지.

긴장한 채 빳빳하게 얼어붙은 샘을 뒤로하고 리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쉬이... 그만 울고 날 봐. 딘? 우리가 누군지 알아 보겠어?』
완전히 생기를 잃은 눈동자가 목소리에 반응하여 진흙 뻘에서부터 천천히 떠올랐다.
『누...구?』
『천천히 총을 내려놓고 잘 생각해봐.』
딘은 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정과 거부, 그리고 불확신에 찬 행동이었다. 게다가 우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콧물을 들이키며 정신없이 흐느꼈다.
『아빠.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모두 내 잘못이야. 난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는데... 세상엔 노력만 갖곤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
리는 어떻게든 설득하려 애썼다.
『딘.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제발. 총 내려놔.』
『미안해요. 모두 다 내 잘못이예요. 정말 미안해요!』
목 놓아 엉엉 울던 딘은 눈을 불끈 감았고, 두 번째 총성이 공기를 찢었다.
샘은 여전히 입을 벌린 채였다. 그의 마음은 그놈의 빌어먹을 솥단지 속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고, 충격이 바지를 축축하게 만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리는 반사적으로 몸을 엎드렸고 또다시 노란 불꽃이 푸지직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딘이 눈을 감고 총을 쏘았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중 하나는 머리가 송두리째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딘은 사격 솜씨가 매우 좋았다.
『젠장! 저게 완전히 맛이 갔어. 이봐, 딘 윈체스터! 깨어나! 당장 눈 떠!』

후후, 하고 거칠게 숨 뱉는 소리만 들려왔다. 가슴에 든 공기를 모조리 토해내는 모양이었다.
딘은 눈을 내리깔았다. 고개를 가로저어 싫다고 하는 의사 표시를 계속 했다.
『아빠. 도저히 못 해요. 못 하겠어요. 내겐 샘이 너무나 소중해요. 나는 녀석을 못 죽여요.』
『딘? 아무도 안 죽여도 돼. 다 괜찮아. 진짜야. 그러니 제발 현실로 돌아와.』
『좋은 아들이 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아빠, 아빠...』
바들바들 떨리던 총구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섰다.
『새미... 형은 너랑 꼭 축구하고 싶었는데. 날 용서해라.』
리와 샘은 동시에 훅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세 번째 총성이 공기를 찢었다.

Posted by 미야

2007/10/27 21:05 2007/10/27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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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수 2007/10/28 12:52 # M/D Reply Permalink

    안되여~~~~으흑.......ㅠㅠ

  2. 고고 2007/10/29 09:48 # M/D Reply Permalink

    안되여~~~~~ 으흐흑. 절단마공. 너무 강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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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내용의 설정이 2시즌 중반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새미는 아직 파파존의 유언을 전해듣지 못했고, 드라마의 줄거리를 따라가려면 무지하게 읏샤읏샤를 해야할 판국입니다. (싫엇!)
본인의 취향과 그 내용에 따라 언짢을 수 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 마우스를 움직여 윈도우를 닫고 과감한 레드썬을 외쳐주세요. ※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전등일 것이다. 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멀미가 나려 했다. 기분이 나빠진 딘은 손을 뻗어 술 취한 닭처럼 헤롱거리고 있는 전등을 똑바로 고정시켜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두 팔은 맹한 허공을 흝었고, 주황색의 밝은 빛을 뿜는 성가신 전등은 발이라도 달렸는지 삽시간에 십 리를 달아났다. 움직임이 무섭게 빨랐다. 공을 물고 반대편으로 죽어라 도망가는 강아지 뺨쳤다.
『쳇! 전등 주제에 나를 약올려.』
망할 놈의 전등, 망할 놈의 두통.
손가락을 들고「거기에 얌전히 있어!」라고 고함을 지르면 꼬리를 내리고 도로 얌전해질까. 아쉽게도 당장은 그럴 가능성이 적어보였고, 딘은 바로 그 점에 짜증이 치솟았다.

영리한 개들은 순전히 사람을 골탕먹이기 위해 귀가 먹은 척한다. 이웃집 말썽꾸러기 암캐 롤리는 몰래 훔쳐간 남의 운동화를 배 밑에 깔고 앉아선 늘어지게 하품을 하곤 했다. 딘이 눈썹을 위로하고 신발을 돌려달라 진지하게 요구하면「네 신발은 여기 없다니까 그러네」구라를 쳤다. 주둥이를 잔디밭에 처박고 지나가는 개미들의 행렬을 장시간 구경했다.
개에게 놀림을 당하는 기분은 진짜지 더럽다. 하물며 상대는 전등이다. 딘은 언젠가 롤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전등 위로 후추 가루를 살살 뿌려보면 어떨까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코가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 제법 고소할 것도 같다. 다만 마음씨 착한 동생 새미는 계집애처럼 또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형, 후추는 안돼. 전등을 괴롭히지 마. 그건 나쁜 짓이야.」
딘은 투덜거렸다.
전등이 그를 괴롭히는 건 그럼 괜찮고? 그래선 차별이라고, 샘.

열이 나는 것도 같다.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딘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고 자신의 체온을 짐작해보려 했다. 나는 감기에 걸린 건가? 콧잔등이 보일러가 고장난 집안처럼 냉골이었다. 딘은 납득했다. 감기가 맞다. 만세. 그럼 병을 핑계삼아 학교를 빼먹어도 괜찮겠지.
독후감 쓰기 숙제를 혼자서만 빼먹었다고 제임스 선생이 일주일 내내 도끼눈을 뜨고 있는 판국이다. 제임스는 쓰디 쓴 몰약이라도 마신 듯한 표정으로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직접 그려가며 사흘의 말미를 주었다. 사실상 그것은 최후통첩이었다. 존은 아들의 성적이 바닥을 기고 있어도 그다지 개의치 않았지만 학부모 입장으로 학교를 방문하는 일 만큼은 대단히 싫어했다. 결국 딘은「자꾸 이러면 아버지를 모셔와야 할 거다」라는 교사의 협박에 못이겨 몇 개의 글자를 종이에 적을 것이다. 허나「하퍼 리가 쓴 그 책은 정말이지 두껍더군요. 어쨌든 저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 착한 앵무새를 죽인 범인을 꼭 조지고 싶습니다. 애완동물 학대는 나쁩니다. (To Kill A Mockingbird - 1960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고전이며 1962년에는 그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딘이 막연히 추측한 것처럼 앵무새를 보호하자는 내용이 아니라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흑인 남성을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의 이야기다)」라고 쓰는 건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되었다. 딘은 정해진 시간보다 기한을 더 벌었음에 기뻤고, 다리가 엇지자로 자꾸 꼬이려는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숙제는 귀찮다. 학교는 엿이다. 빨리 졸업하고 아빠랑 같이 헌팅이나 하러 다녔음 좋겠다. 나쁜 도깨비들을 잡아 죽이고, 사악한 귀신들을 박살내는 거다. 딘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꼭 감았고, 처음으로 유령을 향해 암염탄을 발사했을 적의 쾌감을 떠올렸다. 그 총성을, 그 반동을, 그 화약의 독특한 내음을...

「난 사냥이 싫어, 딘.」
어둑어둑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 무릎을 세우고 앉은 새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헌팅을 하러 다니는 건 결코 내 운명이 아니야.」
동생의 목소리가 마치 여자와의 첫 경험을 떠벌리는 것인양 은밀하게 낮아졌다.
「형은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없어?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아? 나는 대학에 가고 싶어.」

토기가 올라왔다. 딘은 바닥에 토하면 결국 그 징그러운 오물을 치워야 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가까스로 상기하고 참았다. 의지가 내부에서 작동하여 경련하는 위장을 약간 진정시켰다.
아침으로 먹은 참치 샌드위치가 상했던 걸까. 그러고보니 랩 포장을 벗겼을 적에 코를 자극하는 불쾌한 냄새가 났던 것도 같다. 유통기한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문제의 샌드위치는 가게 직원인 버크가 공짜로 준 것이었고, 버크는 딘이 그걸 가져가도록 허락하기에 앞서 샌드위치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 않았다는 걸 점장이나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는 점을 단단히 주의시켰다. 이를 다시 해석하자면 그걸 먹고 설사병이 나도 겉으로 내색을 하지 말라는 얘기다. 딘은 신성한 보이스카웃 맹세를 했고, 때문에 고통을 참고 동생을 향해 억지로 웃었다.

「나는 억지로 아빠를 따라다니는게 아니야. 난 사냥이 좋아, 새미.」
「새미가 아니라 샘이야.」
「하하하. 어쨌거나 꼬맹아, 우리가 그 문제를 얘기하기엔 너무 빠른 것 같다.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고추에 털도 안 났잖아. 넌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공부를 무지 잘 해도 최소한 고추에 털이 나야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어른들이 법으로 그렇게 정해놨다고.」
점잖치 않은 이야기에 새미가 얼굴을 찌푸렸다. 샘은 음담패설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어.」
「이눔이 쥐약이라도 삼켰나.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네. 넌 너무 어려서 대학엔 못 가.」
「거기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대.」
「이 바보 멍청아! 형이 하는 말 못 들었냐. 아니라니까! 넌 그냥 내 옆에 있는 거야. 오줌싸개인 주제에 어디를 가겠다는 거니.」
초록의 눈동자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딘을 응시했다.
「형이 이해를 못 한다면 할 수 없지. 난 오줌싸개가 아니야. 난 어른이고, 곧 집을 나갈 거야.」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제 딘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벽에 몸을 기대고 중심을 잡아야 했다.
- 난 집을 나갈 거야. 안녕.
손바닥이 축축하다. 전등이 빙글빙글 돌았다. 손바닥이 네 개로 보이고 바닥이 물결쳤다. 싫은 느낌, 싫은 감정, 가슴을 쇠격자로 마구 조여대는 듯한 독특한 고통... 그 아픔은 높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고 넘어졌을 때의 욱씬거림을 많이 닮아 있었다.
「별난 녀석. 넌 슬프다는 걸 그런 식으로 느끼냐?」
비에 젖은 탓에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린 가죽 구두를 손질하던 케일럽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더러워진 기름 걸레를 옆으로 치우고 진지하게 물었다.
「죽을 상이군. 어떤 여자가 널 찼지? 말해봐, 속을 끓일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어?」
모르겠다. 딘은 대답할 수 없었다.
「오우, 딘 윈체스터가 운다. 사진으로 찍어놔야 할텐데 이놈의 사진기가 어딨더라.」
- 망할. 케일럽, 입 다물어. 당신은 메그에게 목이 잘려 죽었잖아.

새미가 대학에 간다. 새미가 떠난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샘은 덩치가 곰처럼 커졌고, 더 이상 형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동생이 혼자서 수저를 들고 밥을 먹었던 날을 기억한다. 스스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던 밤을 기억한다. 넘어지지 않게끔 붙들어주지 않아도 뛸 수 있게 되었고, 자전거를 탔고,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코를 으쓱이며 망나니 마이크를 성공적으로 때려줬다고 알려왔다. 딘은 웃었다. 그러나 미소는 촛불처럼 금방 꺼졌다. 이제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내 동생 괴롭히면 나한테 죽어~!」라고 외치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딘은 당혹스러웠다. 샘은 부엌에 앉아 숙제를 하고,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를 했다. 빨래와 청소도 했다. 맙소사, 샘은 색 빨래와 흰 빨래를 구분할 줄 알았다! 덕분에 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방안을 속수무책으로 어질러놓는 것밖에 안 남았다.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지독하다고 생각한다.
이 형은 아직 널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날 위해 계속 아기로 있어줄 수는 없는 거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들로 범벅이었다.
『제기랄! 아프단 말이야~!!』
욱씬거리는 불량품 심장따윈 몸에서 파버렸음 좋겠다.
잔인한 샘. 이기적인 녀석.
동생은 자신의 인생에서 서서히 딘을 몰아냈다. 착실하고도, 확실하게. 그리고 빈틈없게.

문을 열고 닫는 커다란 쿵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돌아오셨다. 아빠가 돌아오셨다.
딘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아빠!』
현관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선 존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은 온통 붉고 파랬다. 이마가 찢어졌고, 턱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옷도 엉망이었다. 딘은 크게 놀랐고, 트럭에라도 치인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추렸다.
『아빠...? 무슨 일이예요. 괜찮으신 거예요?』
존은 오랫동안 집을 비워왔고, 딘은 그가 무사한지 알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굴러댔다. 절망한 딘이 시체 공시소를 뒤져야하나 고민을 시작할 즈음에야 존은 예의 정나미 떨어지는 무뚝뚝한 말투로 캘리포니아 제리코로 떠날 거라 그 행선지를 짤막하게 알려왔다. 제리코시 외곽에서 남자들이 연달아 실종되고 있었고, 문제의 2차선 도로에서 사람이 없어진게 20년간 무려 10건이나 되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았다.
『아빠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들었어요.』
존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위험」을 경고했다.
『제리코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맙소사.』
통상적으로 사냥은 항상 위험했다.
그렇다고 해도 존이 이렇게 크게 다친 걸 보는 건 흔치 않았다.
그는 너무나 엉망진창이어서 거의 죽었다 기적처럼 겨우 되살아난 사람처럼 보였다.
딘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존이 무기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늙어보였고, 다르게 보자면 낙심한 것처럼도 보였다.
「정말로 트럭에 치었단다, 에이스.」
『예?』
「나는 제리코에서 돌아온게 아니야. 표정이 왜 그러니. 기억이 나지 않느냐? 너랑 샘. 그리고 나... 셋이서 같이 교통 사고를 당했잖니.」
『언제요.』
사고? 무슨 사고. 딘은 지상 최대의 멍청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샘은 대학에 갔다. 집을 나갔다. 그렇지 않은가? 샘은 부지런히 가방을 꾸렸고, 존과 심각하게 말다툼을 벌렸으며, 이렇다 할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다. 그러니까 셋이서 나란히 자동차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했다는 건 질 나쁜 농담이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딘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싫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똥강아지는 팔로알토에 있어요, 아버지.』
딘의 그 대꾸에 존은 어이가 없는 듯했다.
「기억해내라, 에이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지금이 몇 년이지?」
『나는...』
「우린 지금 병원에 있다. 너는 큰 부상을 입었고, 혼수상태에서 방금 깨어났다.」
『그럴 리 없어요. 봐요, 아버지. 여긴 병원이 아니라 우리 집이고, 난 다친 곳이 하나도 없...』
아니다. 뭔가 아구가 맞지 않았다. 딘은 피로 젖은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 보곤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다친 곳이 없다고? 그게 아니잖아! 맙소사. 이 상처는 당장 꿰매야 할 것처럼 보여! 지금이 몇 년이지? 샘은 어디에 있지? 삽시간에 모든게 엉망으로 뒤섞였다.

『아버지! 샘은 무사해요? 많이 다친 건 아니죠?!』
「마음을 가라앉히거라.」
『녀석은 무사하냐고요!』
「이 애비가 널 대단히 자랑스러워 한다는 걸 꼭 알았으면 한다.」
『아빠!』
「두려워 말거라... 만약에...」
『아빠!』
「.......... 한다면...」
『제발!』
「네 손으로...」
『안돼!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지평선으로 눈부신 열 다섯 개의 태양이 쏟아졌다.

Posted by 미야

2007/10/20 22:38 2007/10/20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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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고 2007/10/20 23:27 # M/D Reply Permalink

    으음...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란걸 보여주는 백일몽이군요. 딘의 현실세계는 어떨지.....꿈이란 현실을 반영하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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