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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지구를 무려 한 바퀴 반이나 돌은 끝에 가까스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찾았다. 발바닥이 지면에 내려서는 그 안착의 순간, 딘이 느낄 수 있었던 최초의 감각은 우습게도 악취를 닮은 지독한 입냄새였다.
『오랜만이야. 드디어 돌아왔군. 장미꽃은 없지만 귀환을 환영해, 친구.』
누군가 격려의 의미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래봤자 딘은 그것에 반응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지난 밤에 대단한 음주 파티를 벌였던게 분명하다. 입안엔 하얗게 백태가 꼈고, 눈꺼풀 속엔 깔깔한 느낌의 모래가 하나 가득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는 몸뚱이는「네까짓게 아무리 눈앞에서 현찰을 흔들어봤자 나는 오늘 결단코 파업할테다」의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허리가 침대 아래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위스키를 나발로 불었나, 아님 데킬라를 통째로 목구멍에 부었나. 빵빵해진 방광이 변기가 그립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지만 화장실에 가려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할 참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동안 진화를 거듭하여 두 다리로 직립 보행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다던 학자들의 주장은 지금 이 순간엔 하나도 맞지 않았다. 맙소사, 딘은 네 다리로도 걸을 수 없었다. 그 점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저어...』
『왜.』
이불을 코까지 뒤집어쓴 상태에서 딘은 얼굴을 붉혔다. 이름도 잘 모르는 하룻밤 상대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건 노땡큐다. 덕분에 달라붙은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자존심이 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 손을 빌려달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느냔 말이다. 그렇다고 침대에 오줌을 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환장한다. 딘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셨다.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린 여자는 그런 그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냐고 물었잖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흠.』
갈증으로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방광을 비우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상태다. 햇님이 머리 꼭대기 높이까지 떠올랐는데 그는 생판 모를 모텔 침대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나체로 누워 있었다. 조만간 흥분한 동생이 펄펄 뛰면서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들 윈체스터 형제들의 규칙 제8번. 어른의 오락에 심취하는 건 괜찮지만 사전 통보 없이 새벽까지 안 돌아오면 엉덩이를 걷어차인다. 딘은 오늘 그 규칙을 어겼다. 샘에게 전화를 걸어「자기야? 나 오늘 무지 바빠. 그러니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틀에 소금 뿌리는 건 네 몫이다. 알았지?」라는 말을 했던가. 기억에 없다. 고로 고지식의 대명사 샘 윈체스터는 몽둥이를 들고 규칙을 어긴 형을 징벌하려 할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 아니, 넓적다리 높은 곳으로 시퍼런 멍자국이 생기기 전에 서둘러 도망쳐야 한다. 딘은 죽을 힘을 다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내 팬티는 어디에 있지. 내 셔츠는. 내 임팔라 열쇠.

『워워, 진정하라고!』
여자가 다소 강한 힘으로 그의 어깨를 눌렀다.
『이봐. 올해가 몇 년인지 기억은 해? 지금 미국 대통령이 누군지 알아?』
『누굴 바보로 아나.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잖아.』
『억.』
『아님 로날드 레이건... 미안해, 숙녀님. 지금 그게 문제는 아닌 것 같어. 율 브리너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상관 안 할래. 내가 지금 무척 바빠서 말이야.』
나이 든 노파처럼 부들부들 떨며 겨우 한 발을 내딛었다. 순간 뇌리에서 활 시위를 당기는 듯한 핑 소리가 나면서 천장과 바닥이 서로 그 위치를 바꿔버렸다. 역행하는 중력의 법칙 아래선 남성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소용 없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그는 무너지듯 쓰러져 식초의 맛이 나는 액체를 한웅큼이나 게워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 아래로 흘러가는 것.
다시 위로 솟구치며 올라가 모두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둥글게, 둥글게.

그는 샘을 보았다. 초최한 얼굴이었다. 면도를 잊은 뺨은 거뭇거뭇했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 했던지 눈자위가 푹 꺼져있었다. 딘은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신나게 얻어맞은 권투 선수가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켜 가까스로 링 아래로 내려온 듯했다. 무슨 일인가. 샘은 제정신이 아닌 건가. 깍지 낀 손을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어대며 미친 사람처럼 뭔가를 중얼거렸다.

《여호와여 그와 다투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내 형제를 도우소서. 창을 빼사 그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딘의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그의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그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기도다. 샘이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촉촉이 젖은 동생의 눈자위에서 맑고도 뜨거운 방울이 떨어졌다. 샘은 훌쩍대며 손등으로 코를 훔치고는, 반 박자 쉬고 난 뒤에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야! 임마! 계집애처럼 훌쩍거리긴 왜 훌쩍거려!』
삿대질을 하며 야단쳤다. 딘은 평소에도 동생을 향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왜 하느냐 타박했다. 그래서 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몰래 숨어 자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 뭐랄까... 민망하다.
『그만해, 새미! 누가 죽기라도 했어?!』
샘은 그가 화를 내며 하는 말을 전혀 못 듣는 것 같았다. 누렇게 타서 속이 텅 빈 잡초처럼 샘의 마음 중심엔 알맹이가 쏙 빠져 있었다. 동생은 바스라졌고, 구부러졌고, 갈라지고 터져 그 바닥을 드러냈다. 뜨거운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들판엔 황폐한 흙먼지만 가득했다. 싱그러운 녹색을 망각한 그곳에서 동생은 말 그대로 넋을 놓고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딘은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너는 죽지 않았어. 너는 죽을 수 없어. 왜냐면 내가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 넌 안 죽어.
차갑게 식은 그 뺨으로 따스한 온기를 후, 하고 불어넣고 싶었다. 샘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 귀를 만지길 간절히 원했다. 목덜미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떨리는 속눈썹을 하나하나. 위로의 말을 속삭이며 그 눈물을 그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졸라댈 것이다. 애원할 것이다. 환하게 웃으라고. 미소를 지으라고. 손바닥으로 계속해서 어루만질 것이다.

그러나 딘은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샘은... 그리고 그는...
- 내가 녀석에게 총을 겨눴어!
깨달음에 감겨졌던 눈이 번쩍 떠졌다.
무방비한 상태로 자신을 쳐다보던 샘이 기억났다! 그는 저항조차 안 하는 동생을 죽일 뻔했다!
1초라도 빨리 딘은 그에게서 떨어져야 했다.
잘못된 자신으로부터 샘을 안전하게 떼어놓아야 했다.

하느님. 딘은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맙소사. 이게 뭐지. 샘은 다른 방에 있어. 난 녀석과 같이 있지 않아! 그런데도 녀석이 입은 셔츠가 얼빠진 분홍색이라는 걸 알 수 있어. 거기다 사흘 내내 단 한 번도 갈아 입지 않았다는 것까지도 알겠어!」
이걸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접신한 무당이라도 된 모양이다. 몸은 이쪽에, 정신은 다른 세상에 절반쯤 걸려 있었다. 콘크리트 벽이 투명하다. 눈이 핑핑 돌았다. 젊은 여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등뒤로 돌려 검은색 브래지어의 훅을 풀렀다. 202호실. 남자가 가방을 꾸리고 체크 아웃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204호실. 미친 사람의 터무니 없는 환상 - 딘은 이것들이 제발 멈추어지길 간절히 원했다. 이건 흡사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몸속의 뼈들, 몸속의 근육들,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사진의 한 부위를 손가락으로 지적한다.
「바로 이곳입니다. 여기에 시커멓게 보이는 부분이 바로 병원(病原)인 암입니다.」
손이 아래로 쑤욱 꺼지는 느낌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짚었던 손을 떼어냈다.

『멈추게 해줘! 이거 싫어! 이 바보 같은 것들이 빨리 사라지게 해줘!』
이것도 꿈인가. 현실이 아니었던 건가. 그는 서둘러 눈을 감았다. 그래봤자 이미 그의 시선은 카펫을 뚫고, 바닥을 지나, 지하실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쥐를 보고 있었다. 그 아래로 얽혀있는 수 많은 파이프, 구정물이 흐르는 하수구... 진저리치며 몸을 떨었어도 보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 생생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숨을 쉬어야 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그런데 그 단순한 동작마저 너무나도 힘들었다.

여자가 손을 잡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세상에. 눈을 어디다 둬야 하는 거야. 맙소사... 당신, 실수로 팬티를 뒤집어 입었어. 그, 그러니까 앞으로 달려야 하는 작은 리본 장식이 엉덩이 쪽으로 있다고. 그, 그리고 당신 음모는... 털 색깔이 검정이군. 뭐야, 머리는 미용실에서 밝게 탈색한 거였어?』
『이 호색한! 어딜 보고 있어! 눈 돌렷!』
『눈을 돌려도 보인다니까! 내 잘못이 아냐!』
그리고 딘은 완전히 오그라들었다. 샘이 하던 기도를 중단했다. 이쪽의 기척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동생이 눈을 크게 치켜떴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겁이 났다. 샘은 아마도 몰랐겠지만 방금 전에 그들의 시선은 벽을 투과하여 서로 마주쳤다. 오, 아직은 안돼. 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허우적거리며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동생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가릴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얇은 홑겹의 천조각에 불과할지라도 딘은 어떻게든 숨어야 했다.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꽉 다문 어금니 사이로 흘러나왔다. 샘이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 곧 문이 열릴 것이다. 딘은 공포에 질렸다.

『못 들어오게 해! 못 들어오게 하라고! 제발! 이러면 나 죽어! 나 죽는다고! 새미가 나에게 가까이 오지 못 하게 해! 문 잠궈! 닫아! 막아!』
『딘. 침착해. 괜찮아.』
『아냐.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 내가 샘에게 총을 겨눴어. 녀석을 죽이려 했어! 최악이야!』
『넌 총을 쏘지 않았어.』
『쏜 거나 마찬가지야! 난 새미에게 위험해. 제발 문을 잠궈. 녀석이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해줘. 저 아일 데려가. 멀리 데려가! 나에게서 새미를 데려가! 이렇게 빌게. 부탁할게!』

달그닥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불에 덮힌 몸이 움찔 움직였다.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은 우우 소리는 더욱 커졌고, 리는 그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어린애처럼 몸을 앞뒤로 마구 흔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드레날린이 피부를 통해 빠져나오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그는 절망적인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부탁할게요! 제발 새미가 나에게 가까이 오지 않게 해줘요!』

어쩔 수 없었다.
리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 그가 애원한바 그대로 문이 열리지 않도록 등을 대고 막았다.
《리? 딘이 정신을 차렸나요?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녀는 어두운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정신을 차렸어.』
달각달각 소리가 다시 들렸다. 샘이 손잡이를 돌려대고 있었다.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적잖게 당황한 것 같았다. 그 까닭을 묻는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리? 들여보내줘요. 왜 이래요. 딘이 정신을 차렸다고 했잖아요! 안에서 뭘 하고 있죠? 왜 막는 거예요! 리! 문 열어! 우우... 당장 열어! 이년아! 열어! 안 그러면... 경고하는데...》
『샘. 화내지 마. 딘은 지금 널 보기가 괴롭다고 했어.』
리는 일부러 교과서를 읽는 목소리를 냈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뭐요?》
『딘은 괴롭다고 했어.』
《뭐라고요?!》
『지금 널 볼 수 없다고 했어. 그러니까 샘... 마음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서.』

샘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싫어! 열어! 당장! 사흘이나 기다렸어! 사흘이나! 뭐가 문제야! 수작부리지 말고 당장 열어!》
『샘!』
리가 부드럽게 나무랐음에도 불구하고 흥분한 샘이 주먹으로 쾅 하고 문을 세게 때렸다.
《열어! 몽땅 죽여버리기 전에 열어!》

이불을 뒤집어쓴 딘은 까무라쳤다.

Posted by 미야

2007/11/25 21:05 2007/11/25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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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와.. 2007/11/25 23:51 # M/D Reply Permalink

    이제 이 편은 연재 안하시는줄 알고 내심 뒷편이 넘후 궁금했는데,
    이렇게 올라와서 넘후 조아요.

    정말 뒷편이 넘후 궁금하네요....

    계속해서 건필하세요.

  2. 미야 2007/11/26 08:48 # M/D Reply Permalink

    제가요, 자기 무덤을 팠어요. 줄거리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도중에 잘라먹고 다른 걸로 튈 수가 없어요. 시럭~! 비명을 질러봤자 윈체스터 브라더스를 굴리려면 연중은 불가능하다는...;; 내가 왜 이랬나 모르겠어요.
    BB는 하나, 내지는 둘 정도 남아서 이제 마무리 단계이고요, 다음은 먼젓번 예고와는 다르게 길이가 짧은 <All Wet>이 될 거예요. 문라이트-로드는 다다음으로 밀려났고요, 베리알 차일드는 볶아먹거나 삶아먹게 생겼어요.
    속도... 무진장 느리죠. (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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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길바닥 정키들도 그보단 훨씬 잘 하겠다. 샘은 신음했다.
장님이 지폐를 세는 것처럼 엉망이었다. 더듬거리던 허벅지 안으로 바늘로 찔렀다 도로 뺐다 하길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자 가뜩이나 얇아진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는 걸 느꼈다.
이년이 지금 우리 형을 고문하는 거야, 뭐야.
경황이 없다보니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게 아니라 그걸 크게 소리내어 외쳤다.
『이년아! 너 지금 우리 형을 고문...』
『닥쳐! 옆에서 자꾸 성가시게 굴면 천당까지 한 번에 날려버린다!』

기진맥진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기온이 높지도 않건만 콧잔등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휴식이라는 걸 구경도 못한 다리가 통증을 호소했다. 푹신한 소파에 누워 발가락으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조작했음 소원이 없겠다. 그럼 뚱뚱한 남자가 훌라후프를 돌리며 참치 뱃살을 요란하게 흔들어대는 저질 시트콤을 보며 마구 웃어버릴테다.
『그냥 팔에다 시도하면...』
『그래선 대량 수혈을 못 견뎌.』
리는 어금니를 갈아대며 그 길이가 무려 15cm에 이르는 링겔 바늘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눈앞으로는 속옷 차림새의 남자가 정신을 놓은 채 뻗어있었고, 그녀는 어떻게든 수혈용 카테터를 삽관하는 일을 성공시켜야 했다. 정맥내 공급선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맙소사.
감기는 저절로 낫지만 - 가끔은 그마저 저절로 낫지 않는다 - 뱀파이어 오리진의 피에 오염된 이상 색색의 항생제를 하나 가득 입안에 털어넣는 것 정도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이것이 최선책은 아니었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은 뭐라도 해야만 했다.
시간이 더해질수록 침침해지는 시야가 그저 원망스럽다.
「하느님, 의사 놀이는 세 살 무렵에 이미 졸업했단 말입니다. 그것도 전 가운을 입은 환자 역이었지 새드 기질이 있는 미치광이 간호사 역은 한 번도 안 했다고욧~!」
리는 작은 기적을 빌며 두툼한 대퇴부 혈관을 찾아 말 그대로 혈안이 되었다.

문드러지는 비극의 냄새를 맡은 샘은 머리를 놓고 울부짖었다.
『이러지 말고 가까운 진료소에라도 가는게 좋겠어요. 제발!』
『좋아. 딘을 들쳐메고 가자고. 가서 뭐라고 설명할래. 뱀파이어에게 물렸습니다?』
『차에 치었다고 하면 되잖아요! 아님 나무에 올라가려다 사다리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되요!』
『멍청아. 이 사람의 머리가 깨졌으니 몸속에 있는 혈액 5리터를 최단시간 내에 몽땅 갈아주세요, 하면 그 사람들이「아,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당장 실행에 옮기도록 하죠」라고 대꾸할 것 같아?! 것보단 경찰에 신고해서「우리 진료소로 방금 전에 대단히 수상한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교회의 방화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이러고 떠들어댈 걸.』

물론 그럴 것이다. 의사들은 수상한 환자들이 내원하면 반드시 경찰에 신고할 의무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샘은 차갑게 말했다.
『총으로 위협하면 되요.』
『뭐?』
『총으로 모조리 쏴죽이겠다고 하면 된다고요.』
『너... 진심이냐.』
『제대로 된 의료 장비도 없이 무작정 덤비는 당신보단 제정신입니다.』
『지금 누가 더 미쳤는가에 대해 시합이라도 해보자고? 관둬. 네가 짱 먹었어, 미스터 콜롬바인.* 난 근처도 못 가. 그러니 우승 트로피는 네가 가지렴.』
신경질적으로 맞받아치는 것과 동시에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제발 이번엔 성공했기를, 그러나 리는 쳇 소리를 내며 어렵게 찔러댄 바늘을 도로 뽑았다.

「젠장! 어쩌면 포기하는게 나을지도.」
그들은 병균 덩어리인 싸구려 모텔 방에서 20분째 전쟁을 치루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도구라곤 주사기와 바늘, 튜브, 소독용 알콜과 솜, 그리고 수혈용 팩이 전부였다. 이래서는 도중에 쇼크가 와도 전문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혈관으로 자칫 기포가 들어가는 날엔 치명적인 심장마비가 온다. 뿐만 아니다. 백혈구 응집소에 대한 항체 때문에 폐가 급속히 망가질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4시간 내에 딘은 죽을 것이다. 세균 감염, 빈맥, 알레르기 반응... 넘어야 할 고개가 너무 많았다. 리는 주먹으로 자신의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설령 이 모든 어려움을 운 좋게 뛰어넘었다고 쳐도 어림짐작만으로는 정맥으로 주입되는 혈액의 량을 정확히 조절할 수 없다는 문제도 컸다. 과다하게 쏟아져 들어가는 혈액은 모자름만 못 하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가뜩이나 약해진 딘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안 되겠어. 샘의 말대로 총으로 의사들을 위협해서...」

바로 그때 움찔, 하고 딘이 반응을 보였다. 깜짝 놀란 샘은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딘? 정신이 들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어? 딘?』
『그게 아냐! 이 멍청아! 비켜!』
샘은 잠자는 공주님이 눈을 뜨는 장면 같은 걸 연상했을 것이다. 의식이 없던 사람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깨어나서는 텁텁한 목소리로「목이 말라요, 물을 주세요. 여긴 어디죠?」라고 말하는 것 따위를 말이다. 그러니까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형의 이름을 불러댄 것이리라.
하지만 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알았다. 맹세코 자신하며 말하건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제물로 바쳐진 어린 자녀들의 몸이 산채로 불살라지는 광경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샘! 저리 비키라고 했잖아! 저리 가!』
지금 이 행동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잠시 잊기로 했다. 그녀는 딘의 몸 위로 재빨리 올라탔고, 엉덩이를 아래로 내려 그의 배를 묵직하게 눌러댔다. 그리고 양 손으로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딘. 부탁이니 너무 멀리 가진 마라.』
죽을 힘을 다해 누르며 그녀가 말했다.

처음에는 눈앞이 흐렸다. 그러다 점차 말갛게 변하면서 어지러움이 사라졌다.
「몸이 가볍다. 와우, 깃털처럼 가벼워!」
딘은 자신이 똑바로 서서 벽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너머로 거울을 보면서 숱이 많고 뻣뻣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사내가 있음을 깨달았다. 남자는 올해로 마흔 두 살이었고, 눈과 입가에 생겨난 잔주름이 인상을 중후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고, 이번에 독신자 클럽에서 만난 여자가 그런 그의 모습을 칭찬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래된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빗질에 열중하던 남자는「예이~예」후렴구 부분에서 거울을 보며 윙크했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되려나. 주책맞은 영감탱이.」
딘은 인상을 찌푸렸고,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문이 열렸다.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무언의 안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딘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부인이 파스타를 삶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스렌지의 불을 중에서 약으로 조절해야 할 것이다. 다른 냄비에선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맛있는 냄새가 나는 토마토 소스가 익고 있었다.
주방을 가로질러 책가방을 든 아이가 뛰어갔다.
《학교 양호 선생님이 피임 법에 대해 가르쳐 주셨어요.》
《카페테리아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합시다.》
《컴퓨터로 옛날 자료들을 분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물건 값은 30달러 50센트요.》
환한 아침, 그리고 느긋한 오후, 개가 컹컹 짖었다. 어느새 저녁.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 딘은 맨발 차림으로 높은 건물의 옥상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서있었다.
구름이 휙휙 지나갔다. 시야가 더욱 확장되었다.

나는 저 아래까지 단숨에 뛰어내려야 한다. 그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어슴푸레한 저녁 햇살 아래서 콘크리트 건물들은 흡사 말라빠진 해골처럼 보였다. 진작에 멸망당한 고대 바빌로니아, 앗수르, 이집트, 메소포타니아... 손바닥을 활짝 펴서 달을 가렸다. 갑자기 낄낄 웃음이 터져나왔다. 달빛은 그의 손바닥을 고스란히 통과해 망막에 닿고 있었다.
그럼 하나, 둘, 셋. 뛰어내리자.

『돌아와!』
누군가 그를 애타게 불렀다.
『형?! 형! 내 말이 들려?』

들리지 않는다. 그는 딱히 어디로 가야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저 불빛이 호소하는 바에 따라 넓은 마당 너머의 도시를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상한 냄새가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간혹가다 자동차가 교차로를 지나갔다.
딘은 보도블럭이 깔린 길을 따라가면서 구름다리 밑을 보았고, 거기서 카드 놀이를 하는 부랑자를 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끼고 자기네들끼리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패를 돌리면서 살짝 눈속임을 부린 사내가 엄마의 이름과 예수를 거들먹거리며 동료들을 설득했다. 딘은 고개를 길게 뺐다.
게중에 담배를 이 틈새에 문 남자가 인기척을 깨닫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아, 유령이다. 이번엔 젊은 남자로군.》
《제발 겁 주지 마! 데니스! 이런 계절엔 오싹해진단 말이야!》
《그럼 자네가 가진 스페이드 에이를 이리 내놓게.》
《네놈 마누라 찌찌를 빨게 해주면 고려해보지.》
《망구 찌찌 따위가 뭐가 좋다고. 그런데 진짜야.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의 유령이...》
다 듣지 않고 딘은 삐죽삐죽 튀어나온 언덕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유령이래. 어쩌지. 아무래도 나... 죽은 모양인데.」
방광의 압박감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그는 오줌을 쌌다.

누군가 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몸무게가 줄어들어 어느새 풍선보다도 가벼워진 딘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발이 위로 들렸고, 그는 잘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왜 떨어지는지를 납득하기 힘들어졌다. 중력은 검정으로, 무중력은 흰색으로 뒤집어졌다.
『딘!』
이대로 둥둥 떠서 날아가면 다음으로 내가 갈 곳은 어디지 - 딘은 근심에 잠겼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 천국에 가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그리고 그곳으로 갈 자신도 없었다. 그는 너무 많은 것들을 죽였다. 너무 많은 것들을... 그의 새미까지 포함해서.
『돌아와!』
목소리가 외쳤다.
『돌아오란 말이야! 제발!』
하지만 어떻게? 무슨 재주로? 그는 어린애처럼 훌쩍거렸다.

도와주세요, 엄마. 도와주세요, 아빠.

비정상적인 힘이 그의 목을 거머쥐고 무서운 힘으로 들어올렸다. 헝겊 인형처럼 그는 시키는대로 얌전히 끌려갔다. 눈앞으로 섬광이 번쩍였고, 복부와 머리로 무딘 통증이 왔다.
논리정연한 설명까진 필요 없었다. 딘은 자신이 천장에 매달려 배가 갈릴 거라는 걸 알았다.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남동생의 여자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그는 형벌을 받을 각오를 다졌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나의 죄를 압니다. 인정합니다. 나는 유죄입니다.

동생의 초록색 눈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땅에서 부르는 목소리, 동생이 흘린 피. 신은 묻는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고.
딘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복부가 가로 방향으로 당겨졌다. 홍해를 둘로 쪼개는 의지는 그의 몸을 삼켰다. 당기는 힘은 점점 강해졌고, 마침내 한계점에 도달했다. 돌아버릴 것 같은 아픔에 뒤이어「뚝」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저 아래서 쏟아지는 오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동생이 무아지경에 빠져 두 팔을 벌렸다.
샘이 손으로 밖으로 꺼내어진 분홍색의 내장을 쥐었다.
「날 죽여서 속이 시원해? 딘.」
동생의 목소리는 병적으로 무미건조했다.
「날 죽여서 속이 시원하냐고.」
딘은 기운이 다 빠져 기진맥진한 눈동자로「결코 그렇지 않아」라고 속삭였다.
샘의 얼굴로 비웃음이 떠올랐다.
「형은 늘 나에게 거짓말만 했지. 정말이지 형은 인간 쓰레기야.」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투로 팔을 양쪽으로 힘껏 당겨 딘의 내장을 둘로 끊었다.

Posted by 미야

2007/11/11 21:16 2007/11/1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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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고 2007/11/11 23:25 # M/D Reply Permalink

    어이구우....딘. 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네요. 저 뱀파이어 연대기 진짜 좋아하는데, 그래서 더욱더 미야님 글이 재밌네요. 아무튼 드라큘라들이...출연하면 그저 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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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마우스를 움직여 윈도우를 닫아주세요. 제가 워낙에 까칠한 성격이다보니 글의 성격도 덩달아 신경질적입니다. 이걸 못 받아들이고 화내는 분이 간혹 계신데 그것에 대한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내가 알 바 아녀」라는 거예요. 으허허, 미안혀요! ※


그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적에 제일 먼저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몸이 좁은 철제 침대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는 거였다.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허리를 가로질러 여러겹으로 꽁꽁 동여맸다.
더러움이 섞인 회색의 벽과 냉골인 바닥.
눈치껏 보자면 아무래도 일반 병원은 아닌 것 같고.
피가 잘 통하지 않은 손목이 쓰라려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딘은 턱을 최대한 안쪽으로 바짝 당겨 자신을 묶은 끈의 매듭 모양이 어떤지부터 확인했다. 빌어먹게도 묶은 솜씨가 전문가다. 무작정 세게 흔드는 것 정도로는 쉽게 풀리진 않을 것이다. 거기다 요행을 바라기엔 줄의 굵기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변태 쌩쇼 플레이야... 거기 누구 없어요?!』
꽉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외쳐봤자 누가 알아줄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딘은 억지로 침을 삼킨 뒤에 다시 한 번 더 도움을 간청했다.
『샘! 거기 있니? 새미?!』
서늘한 촉감의 고요함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추측하자면 샘은 가까운 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딘은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를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억지로 치켜들었던 머리를 도로 내팽개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뭐, 행운인 걸로 치자고. 샘이 이런 기분 나쁜 곳으로 어슬렁거려서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녀석에게 당장 도움을 못 받게 생긴 건 상당히 끔찍하지만, 저 멀리 밖에서 샘이 안전하게 있다면야 나야 따따봉이지.」
그리고 딘은 샘이 자신을 찾으러 오기 전에 마술사 후시디처럼 쨘 하고 탈출할 작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형이었고, 그 사실은 딘으로 하여금 단단한 쇠붙이도 위장에서 거뜬히 소화시키게 만들었다. 그는 불을 토할 것이고, 하늘을 펄펄 날 것이다. 아울러 결박의 구속도 끊을 것이다. 가죽끈을 내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두 다리로 걸으리라. 일곱 번째 날에 일곱 바퀴, 커다란 나팔 소리. 딘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흉터를 만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목을 계속해서 비틀어댔다. 참아라.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아리하의 성은 무너질 것이다. 그리하면 그는 성벽의 잔해들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칠 것이다.
- 나는 형이다, 이것들아! -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가 하나 있다. 그 대단하신 형님께서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미친 사이코 흉악범들을 가둬두면 딱일 것 같은 장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의식이 끊기기 전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모텔 방에서 특대 사이즈의 피자를 주문했고, 샘이 실수로 방귀를 껴서 난리가 났고, 훔친 신용카드를 긁어 임팔라에 기름을 채워넣었고, 괜찮은 외모의 술집 바텐더에게 지분거렸다. 뭐야, 이거. 딘은 허리가 개미처럼 날씬했던 섹시한 바텐더의 이름이 파멜라였다는 것까지 기억해낸 뒤에 끅끅거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딘이 더듬어야 할 부분의 기억은 여자 화장실에서 부랴부랴 치뤄낸 파멜라와의 스탠딩 섹스가 아니라 그보다 한참 나중에 위치하고 있었고, 지랄맞게도 그 중요한 부분의 레코드는 불가사의한 세력에 의해 이미 깨끗하게 말살되어 있었다.
완전한 공백. 표백제를 붓고 뜨거운 물로 한바탕 삶아낸 행주처럼 깔끔했다.

만약에 두 손이 자유로웠더라면 수염이 자라난 얼굴을 북북 문질렀을 것이다.
납득할 수 없었다. 최소 하루, 최대 일주일치의 기억이 날아간 듯했다. 앞뒤가 맞지 않다. 누군가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은 거라면, 그 이전에 거친 몸싸움이 있었을 것이고, 딘은 다섯 방 가량의 주먹을 날렸을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기억했을 것이다. 싸움... 있었던가. 헤집어봐도 수줍게 웃는 샘의 얼굴밖엔 안 떠올랐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에게 몰래 약을 먹인 건가. 아님 전기 충격기를 사용해 기절시켰나. 모르겠다. 샘과 같이 공원에서 구운 소시지를 먹었던 기억밖엔 안 났다. 둘은 매운 겨자 소스를 발랐고, 그 유명한 입맛 깍쟁이 새미가 맛있다고 말했다.
동생의 그 말에 어쩐지 즐거워져서 딘은 충동적으로 풍선을 사고 싶어졌다. 샘은 소시지를 베어물다 말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고, 풍선은 자신들과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더듬거리는 어투로 필사적으로 주장했다. 그건 모르는 소리, 해봐야 알지. 딘의 강압적인 요구로 빨간색 풍선을 억지로 쥐고 있었던 샘은 정말이지 깨물어주고 싶도록 깜찍했다.

「형!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게이처럼 보이잖아!」
「난 마음에 들어. 정말 멋져.」
「그럼 형이 풍선 들고 있어!」
「어허라, 새미. 소리 지르지 마. 다람쥐들이 놀라잖아.」
「형은 내가 소중해, 아님 다람쥐들이 더 소중해?! 지금 다람쥐를 걱정할 때야?!」
「다람쥐는 걱정 안해. 하지만 네가 막 성질을 부리고 그러니까 아기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아줌마들이 다들 까무라치고 있잖니. 오, 부인. 염려 마세요. 얜 그냥 풍선이 좋을 뿐이예요. 흥분해서 그러는 거니까 무서워하지 마세요. 운동하기엔 좋은 날씨죠? 안녕히 가세요.」
샘은 벌 받는 기분으로 풍선을 두 시간이나 들고 있었고, 결국 처치 곤란의 골칫덩이를 나무에 매달고 도망쳤다.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별 생각 없이 맥주 캔을 땄을 적에 딘은 솟구치는 내용물을 머리 위로 홀딱 뒤집어 써야만 했다.
 
『아냐, 아냐. 그 일로 싸운 건 바비에게서 책을 빌려오기 전이라고.』
그들은 바비 아저씨의 오두막을 방문했고, 반나절 가량을 머물렀다. 이거, 느낌이 좋다. 딘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해보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샘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났다. 산더미처럼 책을 골라 임팔라 트렁크에 실었고, 출발할 무렵엔 해가 져서 어두웠다. 그랬다. 밀려오는 땅거미들을 보고 불안감을 느낀 바비가 어차피 서둘러봤자 거기서 거기니까 내일 아침에 떠나는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만사가 느긋한 딘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샘은 고개를 부드럽게 가로저었다. 그들에겐 할 일이 많았고 - 읽어야 할 책들이 넘쳤고 - 바비네 오두막엔 침실이 딱 하나였다. 덩치 커다란 사내 셋이서 발을 뻗고 눕기엔 좁아도 너무 좁았다.
「왜? 난 맨 바닥에서도 잘 수 있어, 새미. 쿠션만 있음 된다고.」
딘은 툴툴거렸다.
「알아. 하지만 바비 아저씨는 쿠션이 빠진 매트리스에서 주무시기엔 허리가 안 좋아.」
그걸로 끝. 딘은 운전대를 잡았고, 바비는 허리가 나빠 보인다는 샘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나서는? 딘은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내가 졸음 운전을 한 건가. 아닌데. 분명히 모텔에서 체크 인을 하고 트렁크에서 꺼낸 책을 샘과 같이 안으로 옮겼단 말이야.』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기억은 다시 쳇바퀴를 돌았다. 그러니까 모텔 방에서 특대 사이즈의 피자를 주문했고, 샘이 뿡 소리를 내고 방귀를 껴서 난리가 났고, 셀프 주유소에 들려 임팔라에 기름을 채워넣었고, 괜찮은 외모의 술집 바텐더에게 발정하여 지분거렸다. 뭐야, 이건. 딘은 끙 소리를 내곤 결박된 손을 당겼다 놓았다 했다. 마음에 안 든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껏 힘들게 머리를 굴려 제자리냐. 이럴 수는 없다. 더 중요한게 있다.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새미...』
입술이 탔다. 속이 바싹 말랐다.
『제기랄,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짜증에 겨워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를 억지로 버둥거렸다. 덕분에 끈이 힘껏 당겨졌고, 살갗이 쏠려 무척 아팠다. 그리고 그 아픔이 그를 더욱 환장하게 만들었다.
『새미, 새미, 새미~!! 날 여기서 나가게 해줘. 날 풀어줘~!! 샘~!!』
그리고 네 웃는 얼굴을 보여줘.
아마도 그럼 난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질 거야.

짐승처럼 낮게 으릉거리며 방안을 다시 살폈다. 가로 세로 약 5미터. 무척 좁았다. 창문엔 블라인드가 내려져 이렇다 할 정보를 주지 않았다. 밤인지 낮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딘은 고개를 옆으로 하고 베개의 냄새를 맡았다. 눅직하게 습기를 머금은 천에서는 희미하게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런데 깨끗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더럽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뭐랄까, 죽음의 천사가 내뿜는 호흡 같아서 딘은 얼른 베개로부터 코를 떼어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야... 절대로 아니라고 해야 해.』
무서워졌다.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는 사람을 무작정 납치해서 장기를 떼어간다고 한다. 노숙자나 부랑자, 가출한 어린이들은 쉬운 먹잇감이다. 사람을 팔고 사는 조직은 거대해서 때로는 경찰도 한통속이다. 제일 인기 있는 부위는 신장이다. 다음이 간, 그리고 심장, 눈알, 허파... 모든게 다 돈이다. 심지어 그들은 피부도 벗겨간다. 뼈마저 뜯어내 이식용으로 팔아치운다. 당신이 페니스를 크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주입하는 지방은 죽은 자들로부터 추출해낸 기름이다. 의사는 혹시라도 모를 수술 후 부작용에 대해서는 기꺼이 설명을 해주겠지만, 당신 몸에 집어넣는 부드러운 물질이 어디서부터 왔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할 것이다. 어차피 당신은 진실에 직면하긴 싫을테고, 의사 또한 하체를 드러낸 환자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걸 원치 않을테니 말이다.
『싫어! 난 장기 이식에 동의를 하지 않았다고!』
신장은 온전히 두 개 다 있어야 한다.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맹장을 떼어가겠다고 해도 남에게 공짜로는 주지 않겠다. 딘은 호흡했다. 호흡해야만 했다. 이건 위기다. 딘 윈체스터가 위기에 처했다. 그는 뱃가죽에 힘을 주었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제발 풀려나라. 바둥대며 몸을 뒤집으려 기를 썼다. 철제 침대가 달카당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그러나 그를 묶은 매듭은 느슨해지기는커녕 되려 바짝 조여졌다.
샘이 음흉한 목소리로, 순전히 딘을 겁주기 위해, 그런다고 누가 반응을 할 것 같냐, 신문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1992년 3월, 콜롬비아에서 오스카 라파엘 헤르난데즈라는 이름의 넝마주이가 바랑키야 자유 대학교의 경비들이 작당하는 바람에 해부 실습실 실험 재료로 팔릴 뻔했...

《그렇게 억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돌연 하얀 마스크를 쓴 남자가 물끄러미 눈을 맞춰왔다.
한참을 발버둥치다 말고 딘은 질겁했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당신, 누구야!』
남자는 침착한 태도로 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딘은 멀리 달아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재갈은 물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당신, 누구냐니까!』
《하는 수 없군요. 당신은 너무 시끄러워요. 아래층에서 항의가 들어오면 곤란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소독한 거즈 - 아마도 그럴 거라 짐작되는 - 가 입안으로 돌진하여 들어왔다. 딘은 그 재수 없는 걸 어떻게든 뱉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남자는 꽤나 노련했고, 천 덩어리를 쉬지않고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역겨운 천조각은 금새 목구멍을 틀어막았고 딘은 이러다 질식사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었다. 아니, 상황을 직시하자. 사실 그보다 천 배는 더 심각한 요소가 있었다. 하얀 마스크의 남자는 척 보기에도 날카롭게 생긴 손도끼를 들고 있었다.

「맙소사. 그걸로 나에게 뭔 짓을 하려고?!」
딘은 지금처럼 겁에 질린 적이 드물었다. 동공이 바늘처럼 오그라들었다. 그는 남자가 든 손도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금방 끝납니다. 긴장 푸세요.》
그러니까 뭘 시작하려는 거냐고!
두려움에 끙끙거리는 그를 향해 총알과도 같은 속도로 도끼가 내려왔다.

하느님.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딘의 오른쪽 허벅지를 향해 흉기를 휘둘러댔다. 퍽 소리가 나면서 피부와 근육이 동시에 쪼개졌다. 가닥가닥 헤어진 신경과 살점이 매끄러운 절단면을 따라 해초처럼 흔들렸다. 딘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발 멈춰! 제발!」
도끼날이 천장 높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으악!」
그것은 드러난 뼈를 힘껏 찍었고, 앞뒤로 흔들었고, 벌겋게 드러난 생살을 엉망으로 후벼팠다.

그만두라고 애걸하며 울었다.
아프다.
딘은 있는 힘을 다해 결박된 팔을 흔들어댔다.
제발 놓아줘. 나를 그만 보내줘.
어째서야?! 이렇게나 아픈데도 왜 나는 기절할 수 없는 거지?

《왜냐하면 이것은 꿈이기 때문입니다.》
도끼를 든 남자가 높낮이가 없는 이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제정신을 놓고 있어요. 알고 있나요? 여기는 현실이 아닙니다.》
마스크를 쓴 그가 몸통에서 떨어져나간 남의 허벅지를 무슨 보물인양 품에 안았다.
《엄중히 경고합니다. 당신은 죽어가고 있어요. 속히 돌아가는게 좋을 겁니다.》

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설명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남자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다시금 도끼를 휘둘러댔고, 돼지를 도살하듯 내리치는 동작은 정확히 열 여덟 번 반복되었다.

Posted by 미야

2007/11/07 20:08 2007/11/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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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잉 2007/11/08 02:11 # M/D Reply Permalink

    저는 따뜻하고 막 푸근한 글보단 신경질적인 글이 좋아요! 저도 꼬였나봄ㅋㅋㅋㅋ
    근데 딘 도끼로 맞다니..... 불쌍하잖아ㅜㅜ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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