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수십 겹의 이불 아래로 깔린 딱 한 알의 강낭콩이 거슬려 도무지 눈을 붙일 수가 없게 된다. 밤새 뒤척거리다가 결국 취침을 포기하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으아, 아침이잖아!」탄식한다.
- 강낭콩 싫어. 내 침대에서 그거 꺼내서 없애줘, 형.
- 이놈의 자슥! 무시하고 쿨쿨 자면 그만이잖냐!
딘은 그런 동생이 늘 못마땅했다. 예민하고 까탈스런 강낭콩 공주는 무덤덤하고 우직스런 텍사스 카우보이로 어떻게든 개조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동생의 성격을 바꿔보고자 나름 연구도 많이 해봤다. 아쉽게도 땅바닥에 네 발로 엎드려 말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밧줄을 - 정확하게는 면 소재의 커튼 끈을 던지는 놀이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는게 문제지만.
아무튼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비난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나름 할 말은 있다. 결과적으로 샘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딘이다. 샘을 힘들게 만든 강낭콩의 실제적인 정체가 바로 딘인 것이다. 다짜고짜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하는 사람을 옆에 세워두고「저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지」질문을 반복 3천만 번만 해보라지. 행여라도 말 실수를 했나, 불쾌한 행동을 저질렀나, 아님 어젯밤에 야참으로 먹은 참치 샌드위치가 상해 급성 배앓이라도 났나, 별별 가능성을 하나씩 곱씹다보면 부처님이 아닌 이상 겹겹의 비단 아래로 숨은게 강낭콩이 아닌 미세한 겨자씨 한 알이라고 해도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샘은 맑은 하늘에 대고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무엇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느냐고 물어보면「아무 것도 아니야, 새미」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큰코 다친다. 딘은 뼈가 부러져도 별 거 아니라고 대답하는 말종 인간이니까. 뿐만 아니다. 메탈리카의 음악을 귓청이 떠나가라 크게 틀어놓곤 「피곤하니까 음악이나 듣자」라고 말하며 남들과 대화하려는 노력 자체를 회피했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는 진짜지 최악이었다.
- 형은 괜찮지 않아. 우린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이야기를 해봐야 해.
- 난 괜찮아! 괜찮다고! 나더러 괜찮냐고 또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맹세코 패버릴테야!
그래서 턱이 돌아가게끔 한 방 멋지게 맞았다.
언뜻 보기에 딘은 저속한 농담 따먹기나 즐기는, 행실이 헤프고 보푸라기보다 더 실속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술집에서 아가씨를 꼬실 적의 그는 한 없이 가벼운 입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거야 꾸며낸 거짓을 줄줄 늘어놓을 때만 그랬고 성서에 손을 얹은 채 진실만을 얘기하겠습니다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는 180도 돌변해서 헌법이 보장한 묵비권을 철저하게 행사하고 보았다. 꼬집고, 달래고, 윽박질러도 소용이 없다. 그는 망할 대가리 윈체스터 가의 장남이었다.
한숨이 푹푹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가끔씩 샘은 같이 여행하는 사람이 한 배에서 나온 형제가 아니라 콘크리트 벽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지곤 했다. 그 벽은 두꺼웠다 그리고 단단했다. 높이 또한 이루말할 수 없이 높았다. 한참을 올려다 보고 있노라면 힘껏 당겨진 목이 아파왔다. 그래서 벽 너머로 숨은 딘을 찾는 일은 능숙한 헌터의 실력으로도 쉽지 않았다.
「비단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잖아. 지금은 사냥 중이야. 집중해야만 해, 샘 윈체스터.」
따지고보면 딘의 기분이 좋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애지중지해 마지 않는 그의 베이비는 끔찍한 오물을 뒤집어쓴 상태 그대로였고, 멍든 몸은 아프지, 머리는 구둣발에 밟혔지, 한숨도 자지 못해 눈은 깔깔하지, 억지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상황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인상을 쓰는 것도 당연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것도 당연하다. 동생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당연... 이쯤해서 으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씹었다.
당연하긴 뭐가 당연하냐! 왜 나랑 시선도 안 마주치려고 하는 건데?! 샘은 탁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지도를 무릎 위로 놓았다.
그걸 일종의 신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어둠이 깔린 도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던 딘이 겁나게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샘. 이번 갈림길에서 우회전이냐, 아님 좌회전이냐.』
『그놈의 망할 장난감 폭탄을 갖고 레몬이라 떠들어댄 이야긴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딘. 내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뭐?』
딘은 정말 놀랐다. 자애의 교회로 가는 길이 어느 방향이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레몬이다.
샘이 그토록이나 간절히 원한 것이 그저 형과 눈을 마주하는 거였다면 그렇게 말한 건 대박의 성공이었다. 다친 손목이 쓰라려 한 손으로만 핸들을 조작하던 딘은 사고의 위험성도 망각한 채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은 동생을 빤히 쳐다봤다. 기가 막혔던지 입도 헤 벌려져 있었다.
『이놈이 지금 콜라 마시고 딸꾹질을 하고 있어! 어느 쪽이냐고. 왼쪽이야, 아님 오른쪽이야.』
『주리를 튼다고 해도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맹세해. 맹세한다고.』
『뭔지도 모를 맹세는 나중에 해, 인석아. 처음부터 지도는 네가 들고 있었잖아! 졸려서 눈 뜬 채로 꿈 꾸고 있냐?! 뚱딴지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나 말해. 빨리!』
가짜로 화를 내는 척하는 거라고 하기엔 눈빛이 표독스럽다. 차를 세우곤 여기서 당장 내리라고 윽박지르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래저래 마음 상한 샘은 풀 죽은 모습으로 다시금 지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좌회전.』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귀찮게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뒤로 넘겼다. 사흘 내내 비만 내렸다는 식의 우중충한 기분을 바꿔보자. 샘은 코피를 흘려가며 기말시험에 몰입하던 기억을 더듬었고, A+ 성적을 받았던 성취감을 떠올렸으며, 그때의 감각을 일깨워 자신이 알고 있는「뱀파이어에게 대항하는 법」을 하나하나 열거해 보았다. 햇빛에 강한 화상을 입지만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마늘이나 십자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목을 베면 죽는다. 죽은 자의 피는 맹독과 같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있잖아, 딘. 형은 나에게 화가 나면 말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거 알아?』
『뭐?』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던 건 그저 재수가 좋아서 그랬던 거였다고밖엔 말 못 하겠다. 옛날에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새까맣게 손때가 탄 강의 노트를 열심히 들춰봐도 글자가 머리에 하나도 안 들어올텐데 말이다. 샘은 무의식중에 네 개의 손톱을 입에 대고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뱀파이어가 다 뭐라냐. 고운 먼지가 된 지식은 하얗게 날아갔다.
이런게 제일 싫다. 딘은 덩치에도 어울리지 않는 강낭콩 공주를 연기하는 동생을 힘껏 노려본 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bitch 같은 놈이라 욕했다. 이 마당에 싸움질이냐 - 뒷자석에 앉아있던 리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백미러를 통해 견제에 들어갔다. 그걸 모르지 않은 딘은 최대한 점잖케 동생을 나무랬다. 다시 말하자면 달리는 차밖으로 밉꼴맞은 동생을 뻥 걷어차진 않았다는 얘기다.
『이 자식이 진짜지 누굴 엿 먹이려고... 뭐가 불만이야. 너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 몸이 좇 같은 수다를 떨기를 원해?』
『형... 제발.』
『좋아. 소원대로 해줄게.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딘 윈체스터입니다. 미모는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제 특기는 자물쇠 따기와 신용카드 사기입니다. 아참, 깜빡했군요. 은탄환 만들기도 참 잘 해요. 취미는 바닷가에서 해가 떠오르는 걸 보는 겁니다. 이때 C컵의 호리호리한 예쁜 아가씨가 맥주랑 육포랑 같이 해서 옆에 있어주면 금상첨화죠. DVD나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해요. 액션, 스릴러, 가족 드라마, 포르노, 가리는 것 없어요. 줄거리는 시시해도 배우만 잘 생기면 그만이죠. 어때요. 나랑 같이 맷 데이먼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갈래요? 대신 콜라와 팝콘은 그쪽에서 사요.』
『그만해, 딘.』
『남말하고 앉았네. 똑바로 앉고 손톱은 그만 깨물어!』
딘은 자신의 나쁜 버릇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동생이 미웠다.
날아드는 벼락에 머리카락을 태운 샘은 무릎을 쥐었다 폈다 했다. 표정이 시무룩하다.
『나는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한데.』
『그건 나도 몰라.』
몰라? 지금 모른다고 말 했어? 딘의 눈이 더 커졌다.
『맙소사, 샘.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넙죽 사과부터 하냐?! 이거, 이거, 네 머리에 아무래도 회충이 들어갔나 보다. 잊지 말고 내일 아침에 약국에 들려 구충제를 꼭 사도록 하자. 알겠지?』
정말이지 나쁜 놈!
딘은 운전석의 창문을 적당히 내리고 새벽의 찬 바람을 맨 얼굴로 맞았다. 이러면 뺨이 일그러져도 바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리가 차가워지면 홧김에 남의 집 거실에 차를 처박는 사고를 저지르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발치만 쳐다보던 샘이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 하지만 이 말만 할게. 나 때문에 형이 기분 나빠 하는 건 싫어.』
더는 못 참겠다며 딘이 말을 막고 나섰다.
『그게 바로 네 문제야, 샘.』
샘은 정확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성격이 워낙에 예민하다보니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뿐이다. 그래서 착한 어린이는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합니다, 이러고 고개부터 숙인다. 그런데 빌어먹을 동생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자기가 접시를 깬 건지 아님 금방 세탁한 바지를 찢어먹은 건지 구분도 못 한다. 그저 상대방이 화를 내는게 싫어서 어떻게든 그걸 무마하고 싶을 뿐이다. 결국 그건 죄의식을 모면하려는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사과도 아닌 것이다.
『진정한 사과라는 건 말이다, 새미.「접시를 깨서 미안합니다. 빗자루를 나에게 주세요. 이걸 치우겠어요. 다음엔 이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너처럼「뭐가 잘못되었는진 모르지만 아무튼 나에게 화를 내는 건 잘못된 거니까 내 사과를 받고 빨리 기분 풀어요」라고 말해선 한참 틀렸다고 할 수 있지. 내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가 가니?』
빌어먹을.
말을 내뱉고 나서야 후회가 되었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이 원흉이다. 딘은 손바닥으로 수염이 자라 깔깔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옆에서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샘도 싫었고, 뒤에서 철부지 어린애를 야단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도 싫었다. 모든 걸 잊고 당장 쓰러져 팔베개를 하고 코를 골고 싶었다.
심호흡을 했다. 감정이 흔들리는 건 약해졌다는 증거.
아빠가 호되게 야단친다.
보다 안전한 도피처가 필요했다. 딘은 백미러를 쳐다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헌팅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교회 안으로 찌꺼기들이 많이 깔려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리.』
『어쩌긴. 쓸어버려야지.』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 샘이 옆에서 움찔거렸다. 그걸 모르진 않았지만 딘은 일부러 무시했다.
다행이라면 리도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는 거다.
『도착하자마자 정면으로 들어갈 거지?』
『당연히 정면이지. 그럼 툼 레이더의 라라처럼 옥상에서 밧줄 감고 뛰어내릴까?』
『라라 흉내를 내기엔 언니 가슴은 보통이잖아.』
『시끄러! 내 가슴은 천연! 그 여자는 실리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흥! 천연이라고 해도 원더브라 찼으면서.』
『@&#@)!_#(*!』
찢어지는 비명 내지는 항의에 딘은 짐짓 귀가 아프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진정하고 가운데손가락은 그만 내려.』
이상한 일이다. 영양가 하나 없는 저속한 농담을 지껄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바짝 올라갔던 어깨가 도로 편안해지려 했다. 핸들을 쥔 손가락으로 전해져오는 차체의 덜컹거림도 더 이상 지옥의 품바야 합창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돌아왔다. 레몬 주스로 쓰여진 글자가 촛불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게 선명해졌다. 딘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정면을 주시했다.
어두운 생각들은 매듭으로 잘 묶어졌다.
이제 다 괜찮아.
내일 아침엔 약국에 들려 샘에게 먹일 회충약을 살 거고.
그렇고 말고. 모든게 정상.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