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2 : 3 : 4 : 5 : ... 6 : Next »

※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오작동으로 의심했던 화재경종이 영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3학년 3반 수업을 진행하던 지리과목 담당교사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원시용 안경을 벗었다.
옆 반에서는 이미 수업을 중단하고 대피에 들어갔다.
연기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타는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니 두말할 것도 없이 오작동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시설이 낡아가고 고장이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만, 예산부족을 탓하며 제대로 손보는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있어 이런 식으로 수업에 지장이 생기는 일이 간혹 벌어지고 있다. 
그래도 만의 하나라는 것이 있고, 과거 이 학교 미술실이 영문 모를 화재로 피해를 입은 적도 있으니 훈련이라 생각하고 슬슬 움직여야 할 것이다.
벗은 안경을 셔츠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은 교사는 손바닥으로 교탁을 탕탕 때렸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을 쨀 수 있게 되었다며 몇 눈치 없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기뻐했는데 진도를 나가지 못한 부분은 숙제의 형태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터이니 좋아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만 떠들고 일어나 일렬로 운동장으로 이동하도록. 숨어서 자겠다는 놈 있으면 깨워서 데리고 나가라.』
상급반일수록 층수가 낮아 3학년 교실은 1층과 2층에 집중되어 있다.
현관 출입구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3학년 3반 전원이 중앙 출입구 앞에 다다랐을 적에 열다섯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자기들끼리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격렬하게 의사소통을 벌이는 중이었다. 다들 흥분한 상태여서 대화가 아니라 싸움 수준이었다. 더하여 세 명이 동쪽에서 달려 나왔다. 지갑을 두고 나와 교실로 돌아갔다 온 것도 아니다. 시원한 표정이 아닌 것으로 보아 화장실에 다녀온 건 더더욱 아니었다.

학생들을 양몰이 하며 뒤에서 따라오던 교사가 역정을 내며 다가갔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단순했다. 신발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학생들 다수가 실내화를 벗고 실외화로 갈아 신은 뒤였다. 교칙위반이었다.
『야! 너희들. 운동화를 신고 누가 마음대로 복도를 뛰어다니랬-』
『창문으로 나가보자. 가서 걸상을 가지고 와.』
『아니, 멀쩡한 출입구를 놔두고 왜 창문으로 나가려는 거냐고. 너네, 제대로 설명 안 할 거야?!』
『나중에요.』
아이들은 교사의 호통을 대놓고 무시했다.

의자를 밟고 창문을 넘어보자 제안하는 학생은 3학년 5반이었다.
그 옆에서 손톱 거스러미를 잡아 뜯고 있는 여학생은 명찰을 보니 3학년 1반이었다.
『절대 인정 못해! 인정 못 한다고! 나도 콧쿠리님을 모셨단 말이야!』
『거짓말. 언제는 미신이라며 비웃었잖아.』
『기합 넣기 체조가 싫어서 거짓말했어. 그게 내 잘못이야?』
그렇게 외치던 여학생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언저리를 손등으로 마구 문질렀다. 몰래 바른 화장품이 엉망으로 번졌어도 당사자조차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걸상이 준비되자 멋대로 순번을 자처한 여학생이 앉는 부분을 밟고 올라갔다.
운동신경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신중한 성격이었는지 다소 굼뜬 동작으로 다리 하나를 창틀에 올렸다. 그런데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뛰어 넘는다는 다음 행동으로의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더듬거리자 막이 느껴졌고, 주먹으로 치니 출렁거렸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외마디 소리를 지른 그녀는 몸을 던진다는 요령으로 어떻게든 나가고자 했다.
그래봤자 눌린 뺨이 우스꽝스럽게 찌그러질 뿐이었다.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의자에 올라선 상태로 그녀가 악을 써댔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사과할게. 사과한다고! 그러니까!! 당장 그만둬!』

지금도 계속해서 운동장으로의 대피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대다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구를 잘 빠져나왔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오는 게 아예 불가능한 몇몇의 학생들은 뭐냔 말이다.

운동장 밖으로 이미 대피를 완료한 학생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쪽을 쳐다봤다.
본능적으로 창가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의자 위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애를 강제로 끌어내렸다.
얼굴색을 바꾸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하하 웃었다. 경련하듯 입술이 떨렸지만 웃었다.
인정하면 진짜가 되어버린다. 저주라는 건 그런 것이다.  
『출구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다른 곳으로 가보자.』
『어,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럼 우린 구름다리 쪽으로 가볼게.』
그러면서 그들 중 몇은 1학년의 콧쿠리님과 2학년의 콧쿠리님이 몇 반이었는지를 곰곰이 떠올렸다.
그게 지푸라기이든, 썩은 동아줄이든, 잡아야 했다.

이이지마 하나에는 신발을 양손에 쥐고 양말 차림새로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이게 최고다. 수업을 몰래 빼먹던 실력은 어디로 가지 않아 계단을 올라오던 상급생이 알아채지 못하고 4층으로 향했다. 납작 몸을 숙였던 이이지마는 속눈꺼풀을 열고 스쳐지나간 3학년을 관찰했다.
머리부터 발목까지는 외관이 멀쩡했지만 발목 아래부터는 형태가 일그러져 잘 보이지 않았다. 부해 찌꺼기를 잔뜩 밟은 탓인지 옮겨 붙었다. 따라가는 일행도 옆구리부터 목덜미까지 먼지에 뜯어 먹힌 형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대화를 나눴는데 「옥상, SOS 글자, 헬기가 오면, 영화처럼」단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골탕 좀 먹겠군, 생각하며 목을 길게 빼고 아래층의 냄새를 맡았다. 상급생 두 명은 재작년 자살소동으로 옥상 출입문을 봉쇄했다는 걸 까먹은 눈치다.
『연기 냄새는 안 나요.』
마찬가지로 코를 킁킁거리던 스가와라 미즈키가 그렇게 말했다. 진짜로 화재가 발생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중이라고 여기고 있기라도 한 건지 집중해서 화재의 징후를 찾고 있었다.
설명이 귀찮았던 탓에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자며 신호했다.

1학년 2반 아이들 중 다수가 부해에 접촉했다.
그중에서 단연코 사정이 월등하게 나빴던 건 머리부터 무릎까지 부해를 왈칵 뒤집어쓴 스가와라 미즈키다.
깨끗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하수구에서 건져 올린 미역다발이라고 오해할 법한 수준으로 더러움이 옮겨 붙었다.
손을 뻗어 검게 얼룩진 미즈키의 뺨을 문질러봤다. 그런들 기름얼룩 같은 종류가 아니니 지워질 리 없었다.
얼굴도 그렇거니와 문제는 입안부터 목구멍까지 새카맣게 변했다는 거다. 아, 하고 입을 벌리면 검댕이 잔뜩 묻은 굴뚝처럼 보였다.

당연히 좋지 않다. 게토 스구루의 말에 의하자면 미술 선생님 다나베 고우지의 몸 안으로 뱀의 모습을 취한 것이 들어가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스가와라 미즈키도 조만간 뱀을 토할지도 모른다. 뱀만 토하면 차라리 다행이고... 몸을 떨면서 우우, 우우우 이러고 이상한 목소리를 내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이이지마 하나에가 가진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걸 어떻게 해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지 짐작이 안 갔다.
조언을 듣기 위해 급히 할아버지 이이지마 리쓰에게 전화를 시도했더니 전파수신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의 막대가 아예 사라져 있었다. 무려 통화권을 이탈했단다.
유선전화가 필요했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허리를 구부정히 숙인 모습으로 5층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내려오던 고죠 사토루는 무진장 저기압이었다.
그리고 그의 불편한 심기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1층에 자리하고 있던 미술 교사 다나베 고우지와 맞닥뜨리고부터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것은 대피하는 아이들을 돕는 척하며 출입구를 한 가운데 자리를 떠억 잡고 있었다.

빙의했다고 해도 안에 든 내용물이 영 별로인데 확 찌그러뜨릴까.
고죠 사토루가 막 불순한 생각을 품었을 때 다나베 고우지가 대피 중이던 학생 한 명을 끌어당겨 방패처럼 세웠다.
딱 봐도 협박이었다. 네가 뭔 짓을 하면 나도 뭔 짓을 해버리겠다,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확고했다.
보고 있던 고죠 사토루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부해 찌꺼기 주제에 협박까지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당장 찌그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손가락 관절을 우둑 소리가 나도록 꺾으며 계단을 하나 더 내려왔다.
앞으로 다섯 계단만 더 내려가면 반으로 접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 마! 애들이 다쳐.』
다급하게 만류하는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3층에서 게토 스구루가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걸 멈춘 고죠 사토루가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 위쪽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싫은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는 걸로 마음 먹었던 걸 철회했다.
반으로 접어버리려고 했던 것이 다나베 고우지가 아니라 학교 건물이었으니 아직 대피하지 못한 아이들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1/03/31 16:51 2021/03/31 16:51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182

Leave a comment

※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중학생은 위대하다.
화재경종이 울리고 있는데 아무도 대피를 하지 않는다.
교사부터 학생까지, 그딴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모두를 빠르게 대피하게 만들려면 허위신고가 아니라 진짜로 학교에 불을 질러야 하는 거였나.
이동술식으로 옥상으로 자리를 옮긴 고죠 사토루는 발신인이 시금치로 뜬 핸드폰을 쥔 채 아주 작게 망할, 이라고 중얼거렸다.

호우코우(보고), 렌라쿠(연락), 소우담(상담), 앞 글자를 따서 호우렌소우(시금치).
《현4급 현장으로의 긴급 진입을 보고받았습니다.》
나이가 제법 많을 거라 추측되는 전화기 저편의 여성은 자기소개를 생략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술을 육안으로 볼 수 있으나 주술사는 아닌 자들로 이루어진 집단, 창.
평소에는 주술고전 관계자들에게 하인이나 수족처럼 마구 부려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때로 그 힘의 관계는 아주 간단하게 역전되기도 한다.
《주술전문고등학교 1학년 생도는 빠른 퇴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모양은 권고이나 사실상 명령 조처다. 권고에 따르지 않을 시 보조감독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다굴을 쳐서 10년이고 20년이고 못살게 굴겠다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으니 다른 의미에선 협박과도 마찬가지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목소리로 추정하자면 60대, 실력과 능력을 우선시하는 주술계라도 나이를 아주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조직이든지 관록이 붙으면 위로 올라가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정도의 나이면 제법 고위층 관계자일 거라고 합당한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고죠 사토루는 전화기 저편의 음성이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인지 헤아려봤다.
코흘리개 시절 유모로 일하던 여자와 느낌이 흡사하다는 것 말고는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파편이 없었다. 그러니까 심드렁하게「기저귀를 갈아드리겠습니다.」말하던 사용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장소가 장소인데 이대로 후퇴해도 괜찮을까? 아직 하교하지 않은 애들이 바글거리는 중학교라고, 여기.』
《네. 장소가 장소이니까요. 거긴 폐퇴신역(閉頹神域)이잖습니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가 함부로 개입하면 곤란한 곳이죠.》
『하아?』
감정이 일절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여자가 느린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주령이 얽힌 일이 아닐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기이현상은 봉인술식이 오래되어 느슨해진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결계를 보수하신 분이 지금은 고인이라 적임자를 찾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곧 안정화를 시킬 적임자를 파견할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하고 그 장소에서 벗어나기를 권고합니다.》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네. 부해가 살아 움직이면서 사람에 씌는 걸 직접 못 봐서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는 거지. 그 적임자의 파견이라는 거 말이야... 5분 안에 가능해?』

고죠 사토루의 질문에 여자는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화재발생 신고를 받고 소방차가 도착하는 게 5분이지, 적임자 파견은 당연히 5분 내 도착이 불가능하다.
먼젓번 관계자는 고인이다. 세상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새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도 신역봉쇄가 가능한 초특급 봉인술식 실력자를 찾아야 한다. 하루가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외국의 전문가를 모셔 와야 하는 수도 있는데 그 적임자가 한국인이면 케케묵은 국가 간 감정 때문에 초반부터 일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쪽은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해도 자존심을 걸고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5분 내 적임자 파견이 불가능하다고 사실을 넙죽 알리는 건 더 곤란했다.
《최대한 분발하겠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관리용 멘트를 읊었다.

『주술고전 1학년생이 아니고 고죠가(家) 당주대행으로 다시 물어도 같은 대답일까?』
《저어, 그건.》
당주대행 카드를 내밀었더니 상대가 당황했다. 그래서 살짝 더 압박해봤다.
『고죠가(家) 당주대행이면서 최강의 주술사 자격으로 다시 물으면 이번엔 뭐라고 할래? 있잖아, 내 입으로 말하기가 쬐꼼 부끄럽지만, 고죠 사토루님은 지구 뿌셔 최강입니다.』
여자는 이쪽의 소리가 전달되지 않도록 핸드폰의 스피커 부분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른 채 가만히 욕을 했다. 썩을, 빌어먹을, 얼어 죽을, 귀가 좋은 고죠 사토루가 알아듣기로는 대충 그 셋 중 하나였다.

아무튼 중학생은 위대하다.
화재경종이 울리고 있는데 아무도 대피를 하지 않는다.
고작 한 뼘 너비밖에 되지 않는 4층 창틀 턱 위로 닭둘기인양 쭈그리고 올라가 앉은 게토 스구루는 이걸 어쩌나 싶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몸과 정신의 성장이 심한 불균형을 이루게 되어 천상천하 유아독돈, 망상에 가까운 자기도취에 빠진다. 오죽하면 세간에서 중이병이라는 표현을 쓸까.
게토 스구루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먼 시선으로 자신의 지난 행적을 더듬어봤다.
「뭐, 나도 만만치 않은 과도기를 보내긴 했지.」
외벽을 타고 올라온 수상한 사람을 향해 중학생이 용감하게 실내화를 집어 던졌다.
궤적을 그리며 1층으로 떨어지는 실내화를 보았을 적에 게토 스구루의 뇌리로 딱 떠오른 단어가 그거였다.
중이병.
상대방의 정체는 안 궁금하고 일단 때리고 보겠다는데 그게 중이병이 아니면 뭐겠느냔 말이다. 앞뒤 가리지 않는 그 만용이 무섭다. 오늘만 살고 뒷일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눈치다.
드르륵 소리를 내어 창문을 열고 칠판 정면에 붙은 급훈을 쳐다봤다.
액자 속 내용은 제법 멀쩡해서「성실한 오늘, 더 나은 미래」라고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페이크일 수도 있다. 뒤집어보면「죽어보자!」글귀로 바뀌는 건지도 모른다.

『불이야, 소리가 들리면 밖으로 대피하라고. 그 정도는 상식 아니야?』
그런데 옆 반에서 외치는 비명은 약간 다르긴 했다. 뱀이야.
따져 묻는 중학생들의 시선을 회피하며 게토 스구루는 성큼 걸음으로 둥글게 부푼 부해 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부해가 일종의 장막처럼 기능하는 건 처음 봤다.
질감은 고무풍선 같았는데 두께가 얇아도 안이 비처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손목까지 주력을 두르고 시험 삼아 톡 건드리자 태동하는 태아처럼 꿈틀거렸다.
『선배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그 말을 듣고 바람이 든 비닐 풍선을 잡아 뜯는 요령으로 거죽을 찢었다.

안에 갇혔던 이이지마 하나에를 끄집어냈을 적에 맛이 간 중학생은 회까닥한 눈빛으로 언령부터 날리고 보았다.
팡, 하고 높게 세운 교복의 목깃이 풀어헤쳐지면서 단추가 날아갔다.
손가락을 집게처럼 사용해서 입을 다물게 하지 않았더라면 다음으로는 뭐가 날아갔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진짜지 못 말린다, 중학생.

『으븝!』
『패닉 상태라는 건 이해하지만 진정해줬음 좋겠는데.』
『으븝, 으븝!』

이이지마 하나에의 눈이 빠르게 왼쪽으로 향했다. 대가리 터진 뱀 시체 없음.
이번엔 반대편 오른쪽으로 향했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쥔 1학년 2반 학생들이 보였다.

마침내 주둥이가 자유를 찾았을 적에 하나에는 외쳤다.
『제기랄, 올해가 몇 년이지?!』
게토 스구루의 반응이 싸했던 걸로 보아 시간의 오차는 염려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저기, 혹시 본인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던가, 집 주소를 잘 모르겠다던가...』
『기억상실증 아니거든?! 진짜로 올해 몇 년인데.』
『헤이세이 16년.』
『조상님, 감사합니다!』

그보다는 상황정리가 우선이다.
계속 버티면 정학 조처를 취하겠다고 윽박질러 마침내 교실 문을 열어젖힌 선생님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건물 전체로 화재 경종이 귀청 따갑게 울리고 있는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뭐하고 있었어. 싸웠어? 학폭이야?! 패싸움 중이냐고. 저 커다란 남학생은 뭐야. 교복이 우리 학교 교복이 아니잖아! 거기 책상 위로 올라간 너, 당장 내려오지 못...』
눈을 살벌하게 부릅뜬 하나에가 팔을 옆으로 휙 움직여 문을 닫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정말로 탕, 굉음을 내며 저절로 문이 닫혔다.

『성질부리지 마. 그러다 봉인술식 터진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다다미방을 돌아다니면서 손도끼를 들고 따라오는 여자랑, 사람을 먹으려고 하는 뱀과 싸워보지 않았으면 입 다물어.』
진실로 중학생은 위대하다. 구해준 사람에게 입 다물라 하는 패기 좀 보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토 스구루는 이 맛 간 중학생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Posted by 미야

2021/03/29 12:33 2021/03/29 12:3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181

Leave a comment

※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근육이 거의 없는 여자여서 그런지 움직임이 둔했고 속도도 매우 느렸다.
발동작이 전통 무용을 닮아 궤적을 예상하고 움직이면 중학생이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들고 있는 것이 손도끼다. 상대가 날붙이를 들고 있으면 비벼볼 꿈은 꾸지도 말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쳐야 하는 법, 도주할 방향으로 몸을 튼 다음 검지와 검지를 붙이고 호령했다. 개(開).

탕, 탕, 탕, 소리를 내며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장지문이 일시에 열렸다.
현실에서 이런 구조의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면 빌 게이츠 부럽지 않을 갑부일 거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져 백 명 연회가 가능하다고 선전하는 료칸도 맞거울에 비친 형상처럼 되는 일은 없다. 따라서 공간이 기형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추측하는 편이 타당성 높았다.

뒤에서는 여전히 손도끼를 든 여자가 비틀거리며 따라오는 중이었다. 손도끼 무게가 버거웠던지 걸음을 옮길 적마다 좌우로 크게 휘청거렸는데 덕분에 문설주에 스스로 머리를 박는 꼴사나운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보는 입장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진 이가 출근 중인 샐러리맨이 아니고 요코즈나 스모선수라고 해보자. 아무도 안 웃는다.

『이유나 말해주고 쫓아오던가!』
여자가 신음소리 하나 없이 다시 몸을 추슬렀다.
이상하게 표정이 없어 인형 얼굴을 오려내어 가면처럼 씌워놓은 것 같았다. 덕분에 국화로 치장한 관속에 누워있는 송장 느낌이었다.

마주대고 있던 검지와 검지를 안으로 구부렸다. 폐(閉).
손도끼를 든 여자의 코앞에서 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장지문이 닫혔다.
토지신의 몸으로 쓸 수 있는 술(術)이 겨우 열려라 참깨, 닫혀라 참깨, 딱 두 가지라는 건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럽다.
하지만 나름 할 말은 많다. 새로 태어난 토지신은 아주 맛있는 영약이다. 먹고 싶다며 잔칫상 차려놓고 요리할 궁리를 할 신들이 일본에 무려 800만이나 있다. 지금까지 기척을 숨기는 데 기력을 집중하다보니 몸을 지킬 비기를 익힐 짬 같은 건 없었다. 맹물을 술로 만드는 잡술 정도나 겨우 해봤다고 할까... 사실은 보리차로 맥주를 만들려고 시도한 게 전부다. 그리고 성공도 못했다.
후회가 되지 않느냐고? 지금에 와서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좋았을까 가정을 해보는 건 전날 야식으로 먹은 라면을 후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얼굴은 땡땡 부었다.

술을 이용해 강제로 닫은 장지문이 달각달각 흔들렸다.
그래봤자 종이를 바른 장지문이다. 무겁고 단단한 서양식 문과는 애당초 기능 자체가 달라 공간을 분할한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문 뒤에 숨어 몸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거는 자체가 어리석다.
도끼질 한 방에 장식용 살이 떨어져 나가고 그 틈새로 이쪽을 응시하는 여자의 눈과 제대로 마주쳤다.
순간 찌릿하는 전기가 이이지마 하나에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샤이닝이냐! 맛 간 잭 니콜슨이냐고!』

옆으로 달아날 수 없다면 위를 노린다.
다시 검지를 마주대고 이번에는 머리 꼭대기를 향해 외쳤다. 개(開).
지붕 뚜껑이 날아갈 거라고 계산했는데 너무 얕봤나 보다.
팡, 하고 떨어져나간 반자의 장식판자 너머로 다다미가 보였다. 그러니까 꺼풀을 벗겨낸 천장 너머로 지붕을 지탱하는 대들보가 드러난 게 아니라 거울로 반사된 이미지의 방 구조물이 나타났다. Ctrl+C 복사하여 Ctrl+V 붙여넣기 하면서 위아래를 반전시킨 거다.
저릿한 느낌이 다시 척추를 타고 머리꼭대기로 향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과연 탈출이 가능한가.

인외세계의 시간은 인계와 다르게 흐른다. 제 마음대로라서 느리게 흘러갈 수도, 빠르게 흘러갈 수도 있다.
하나에와 비슷하게 저쪽의 토지신에게 붙잡혔던 이이지마 카이는 무려 20년이 지나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경계의 덤불숲에서 이쪽의 사람들이 카이를 성공적으로 낚아챘을 적에 그는 놀랍게도 실종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학생의 말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저 며칠이 흘렀을 뿐이었다며 카이는 말을 잃었다. 그동안 대학교 동기들은 결혼도 하고, 승진도 하고, 집도 샀는데 본인은 대학중퇴 이력을 가진 거주지 불명자 신세로 전락했다. 집 거실에 놓여 있던 버튼식 전화기를 한참이나 응시하던 카이는 그 전에는 다이얼식이었노라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일곱 살 무렵에 토지신에게 납치되었던 하나에는 5분 안팎의 시간을 그쪽에서 보냈다.
어렸기 때문에 더 길게 느꼈을 뿐으로 어쩌면 그 절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둥근 도넛 모양으로 양 갈래 머리를 묶은 동자가 작은 다과상을 가져왔고, 하나에는 잘 먹겠습니다 인사하고 떡을 집어 먹었다. 콩알 크기의 떡을 먹는데 몇 초가 걸리겠는가. 뒷맛이 떫어 몇 번 씹지도 않았다. 절반은 삼키고 절반은 뱉었더니 밖은 이미 6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안 돼. 절망하기엔 아직 일러. 무사히 빠져나갔더니 10년 뒤였습니다, 꼭 이렇게 될 거라는 보장이 어딨어. 여기서 30년을 보냈는데 바깥은 3초 뒤일 수도 있잖... 거헉!」
무릎을 꿇었다.
이곳 인외세계에서 배가 고파진다거나, 잠이 온다거나, 소변이 마려워지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다고 30년의 세월을 이딴 장소에서 낭비한다면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린다. 30년은 고사하고 정신 줄을 놓아버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다.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과학적으로 설계된 특수한 방에 들어간 인간은 40분 이상을 참지 못했다.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들으면서 종국엔 감각 소실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이이지마 하나에도 그와 비슷한 과정을 겪다가 종국엔 완전히 망가져버릴 거다.

「밖에서 인외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건 쉽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건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까득 어금니를 씹었다. 어떻게든 돌아간다. 포기할까보냐.

수직으로 떨어지는 손도끼를 피해 옆 구르기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인을 맺었다. 개(開).
여자의 기모노 앞섶이 좌우로 벌어졌다. 속안까지 전부 풀어 헤쳐져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열.어.라. 여자의 배가 위아래 방향으로 벌어졌다. 찢어진 틈새로 대장에 소장에 위까지 장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아직이다. 열.어.라. 이제 여자의 등이 갈라졌다. 여자의 뒤편에 있던, 도끼질에 부서졌던 장지문까지 벌컥 열렸다. 주인을 잃은 손도끼가 바닥을 찍었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사람 모습을 한 뭔가를 고깃덩이로 갈아버렸다.
꿈에 보일까 걱정이 될 지경으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래도 갈라진 여자의 몸에서 피보라가 날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출혈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생생하게 피를 쏟은 건 이이지마 하나에다. 뜨끈하고 비릿한 액체가 인중을 타고 턱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점막까지 부어오르는 건지 곧 숨 쉬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답답함을 못 견디고 코를 푸는 요령으로 킁킁거렸다. 그 즉시 쏟아지는 코피의 량이 배로 늘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지금부터가 진짜야. 소리가 들린다.」
손바닥에 피을 뱉고 손도끼를 집어 들었다.
스윽, 스윽, 다다미를 빗자루로 쓰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누군가 빗자루로 방안을 청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채 귀를 쫑긋 세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짐작해봤다. 도끼를 내려칠 준비를 하고 문설주 옆으로 기대어 섰다. 스윽, 스치는 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독이 오른 그녀는 발을 쿵 내딛고 선공을 시도했다.

《□□□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천장으로부터 구렁이 몸집의 큰 뱀이 뚝 떨어졌다.
어리석은 것, 이럴 줄 알았다, 기습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대충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기겁을 한 이이지마 하나에는 손목 스냅을 사용해 뱀의 머리부위를 향해 손도끼를 휘둘렀다.
아쉽게도 살을 가르는 대신 막대로 목탁 때리는 소리만 났을 뿐이다.
『이거 뭐야, 날이 없는 도끼야?!』
기술이 부족했던 건지, 아님 단순히 힘이 부족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거나 큰 뱀의 몸에는 생채기도 안 생겼다.

《●□□□ ○■■■, □□□□◆□□.》
어차피 해석되지 않는 말이니 귀에 담지 않았다.
보나마나 맛있게 먹어주겠다느니, 반항은 그만두라느니 식의 승자선언 발언이었을 거다.
『開 열어라!』
죽을힘을 다하면 죽는다. 이이지마 하나에는 평소에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라는 말을 엄청 싫어했다.
하지만 맹세코 지금만큼은 죽을힘을 다했다.
『開 열어!』
뱀의 입이 벌어졌다. 먹이를 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구를 사용해 강제로 잡아 벌린 모양새가 되었다.
그것의 눈에 감정이 실렸다. 아마도 당혹감 비슷한 거였을 거다.
멈추지 않고 세 번째로 호령했다.
『開 열어라~!!』
《■■■ ◆○■■■■■■■□!!!》
멧돼지도 삼킬 수 있을 정도로 뱀의 입이 벌어졌다. 전후좌우로 부드럽게 움직임이 가능한 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계는 존재한다. 결국 약간의 턱 아래 조각만 남기고 뱀 주둥이가 전부 찢어발겨졌다.

Posted by 미야

2021/03/25 13:43 2021/03/25 13:4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180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2 : 3 : 4 : 5 : ... 6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35707
Today:
6
Yesterday:
14

Calendar

«   2021/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