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와서 붙인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중학생은 위대하다.
화재경종이 울리고 있는데 아무도 대피를 하지 않는다.
교사부터 학생까지, 그딴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모두를 빠르게 대피하게 만들려면 허위신고가 아니라 진짜로 학교에 불을 질러야 하는 거였나.
이동술식으로 옥상으로 자리를 옮긴 고죠 사토루는 발신인이 시금치로 뜬 핸드폰을 쥔 채 아주 작게 망할, 이라고 중얼거렸다.

호우코우(보고), 렌라쿠(연락), 소우담(상담), 앞 글자를 따서 호우렌소우(시금치).
《현4급 현장으로의 긴급 진입을 보고받았습니다.》
나이가 제법 많을 거라 추측되는 전화기 저편의 여성은 자기소개를 생략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술을 육안으로 볼 수 있으나 주술사는 아닌 자들로 이루어진 집단, 창.
평소에는 주술고전 관계자들에게 하인이나 수족처럼 마구 부려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때로 그 힘의 관계는 아주 간단하게 역전되기도 한다.
《주술전문고등학교 1학년 생도는 빠른 퇴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모양은 권고이나 사실상 명령 조처다. 권고에 따르지 않을 시 보조감독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다굴을 쳐서 10년이고 20년이고 못살게 굴겠다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으니 다른 의미에선 협박과도 마찬가지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목소리로 추정하자면 60대, 실력과 능력을 우선시하는 주술계라도 나이를 아주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조직이든지 관록이 붙으면 위로 올라가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정도의 나이면 제법 고위층 관계자일 거라고 합당한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고죠 사토루는 전화기 저편의 음성이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인지 헤아려봤다.
코흘리개 시절 유모로 일하던 여자와 느낌이 흡사하다는 것 말고는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르는 파편이 없었다. 그러니까 심드렁하게「기저귀를 갈아드리겠습니다.」말하던 사용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장소가 장소인데 이대로 후퇴해도 괜찮을까? 아직 하교하지 않은 애들이 바글거리는 중학교라고, 여기.』
《네. 장소가 장소이니까요. 거긴 폐퇴신역(閉頹神域)이잖습니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가 함부로 개입하면 곤란한 곳이죠.》
『하아?』
감정이 일절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여자가 느린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주령이 얽힌 일이 아닐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기이현상은 봉인술식이 오래되어 느슨해진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결계를 보수하신 분이 지금은 고인이라 적임자를 찾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곧 안정화를 시킬 적임자를 파견할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하고 그 장소에서 벗어나기를 권고합니다.》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네. 부해가 살아 움직이면서 사람에 씌는 걸 직접 못 봐서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는 거지. 그 적임자의 파견이라는 거 말이야... 5분 안에 가능해?』

고죠 사토루의 질문에 여자는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화재발생 신고를 받고 소방차가 도착하는 게 5분이지, 적임자 파견은 당연히 5분 내 도착이 불가능하다.
먼젓번 관계자는 고인이다. 세상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새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도 신역봉쇄가 가능한 초특급 봉인술식 실력자를 찾아야 한다. 하루가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외국의 전문가를 모셔 와야 하는 수도 있는데 그 적임자가 한국인이면 케케묵은 국가 간 감정 때문에 초반부터 일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쪽은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해도 자존심을 걸고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5분 내 적임자 파견이 불가능하다고 사실을 넙죽 알리는 건 더 곤란했다.
《최대한 분발하겠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관리용 멘트를 읊었다.

『주술고전 1학년생이 아니고 고죠가(家) 당주대행으로 다시 물어도 같은 대답일까?』
《저어, 그건.》
당주대행 카드를 내밀었더니 상대가 당황했다. 그래서 살짝 더 압박해봤다.
『고죠가(家) 당주대행이면서 최강의 주술사 자격으로 다시 물으면 이번엔 뭐라고 할래? 있잖아, 내 입으로 말하기가 쬐꼼 부끄럽지만, 고죠 사토루님은 지구 뿌셔 최강입니다.』
여자는 이쪽의 소리가 전달되지 않도록 핸드폰의 스피커 부분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른 채 가만히 욕을 했다. 썩을, 빌어먹을, 얼어 죽을, 귀가 좋은 고죠 사토루가 알아듣기로는 대충 그 셋 중 하나였다.

아무튼 중학생은 위대하다.
화재경종이 울리고 있는데 아무도 대피를 하지 않는다.
고작 한 뼘 너비밖에 되지 않는 4층 창틀 턱 위로 닭둘기인양 쭈그리고 올라가 앉은 게토 스구루는 이걸 어쩌나 싶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몸과 정신의 성장이 심한 불균형을 이루게 되어 천상천하 유아독돈, 망상에 가까운 자기도취에 빠진다. 오죽하면 세간에서 중이병이라는 표현을 쓸까.
게토 스구루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먼 시선으로 자신의 지난 행적을 더듬어봤다.
「뭐, 나도 만만치 않은 과도기를 보내긴 했지.」
외벽을 타고 올라온 수상한 사람을 향해 중학생이 용감하게 실내화를 집어 던졌다.
궤적을 그리며 1층으로 떨어지는 실내화를 보았을 적에 게토 스구루의 뇌리로 딱 떠오른 단어가 그거였다.
중이병.
상대방의 정체는 안 궁금하고 일단 때리고 보겠다는데 그게 중이병이 아니면 뭐겠느냔 말이다. 앞뒤 가리지 않는 그 만용이 무섭다. 오늘만 살고 뒷일은 전혀 생각을 안 하는 눈치다.
드르륵 소리를 내어 창문을 열고 칠판 정면에 붙은 급훈을 쳐다봤다.
액자 속 내용은 제법 멀쩡해서「성실한 오늘, 더 나은 미래」라고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페이크일 수도 있다. 뒤집어보면「죽어보자!」글귀로 바뀌는 건지도 모른다.

『불이야, 소리가 들리면 밖으로 대피하라고. 그 정도는 상식 아니야?』
그런데 옆 반에서 외치는 비명은 약간 다르긴 했다. 뱀이야.
따져 묻는 중학생들의 시선을 회피하며 게토 스구루는 성큼 걸음으로 둥글게 부푼 부해 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부해가 일종의 장막처럼 기능하는 건 처음 봤다.
질감은 고무풍선 같았는데 두께가 얇아도 안이 비처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손목까지 주력을 두르고 시험 삼아 톡 건드리자 태동하는 태아처럼 꿈틀거렸다.
『선배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그 말을 듣고 바람이 든 비닐 풍선을 잡아 뜯는 요령으로 거죽을 찢었다.

안에 갇혔던 이이지마 하나에를 끄집어냈을 적에 맛이 간 중학생은 회까닥한 눈빛으로 언령부터 날리고 보았다.
팡, 하고 높게 세운 교복의 목깃이 풀어헤쳐지면서 단추가 날아갔다.
손가락을 집게처럼 사용해서 입을 다물게 하지 않았더라면 다음으로는 뭐가 날아갔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진짜지 못 말린다, 중학생.

『으븝!』
『패닉 상태라는 건 이해하지만 진정해줬음 좋겠는데.』
『으븝, 으븝!』

이이지마 하나에의 눈이 빠르게 왼쪽으로 향했다. 대가리 터진 뱀 시체 없음.
이번엔 반대편 오른쪽으로 향했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쥔 1학년 2반 학생들이 보였다.

마침내 주둥이가 자유를 찾았을 적에 하나에는 외쳤다.
『제기랄, 올해가 몇 년이지?!』
게토 스구루의 반응이 싸했던 걸로 보아 시간의 오차는 염려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저기, 혹시 본인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던가, 집 주소를 잘 모르겠다던가...』
『기억상실증 아니거든?! 진짜로 올해 몇 년인데.』
『헤이세이 16년.』
『조상님, 감사합니다!』

그보다는 상황정리가 우선이다.
계속 버티면 정학 조처를 취하겠다고 윽박질러 마침내 교실 문을 열어젖힌 선생님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건물 전체로 화재 경종이 귀청 따갑게 울리고 있는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서 뭐하고 있었어. 싸웠어? 학폭이야?! 패싸움 중이냐고. 저 커다란 남학생은 뭐야. 교복이 우리 학교 교복이 아니잖아! 거기 책상 위로 올라간 너, 당장 내려오지 못...』
눈을 살벌하게 부릅뜬 하나에가 팔을 옆으로 휙 움직여 문을 닫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정말로 탕, 굉음을 내며 저절로 문이 닫혔다.

『성질부리지 마. 그러다 봉인술식 터진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다다미방을 돌아다니면서 손도끼를 들고 따라오는 여자랑, 사람을 먹으려고 하는 뱀과 싸워보지 않았으면 입 다물어.』
진실로 중학생은 위대하다. 구해준 사람에게 입 다물라 하는 패기 좀 보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토 스구루는 이 맛 간 중학생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Posted by 미야

2021/03/29 12:33 2021/03/29 12:3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181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88 : 89 : 90 : 91 : 92 : 93 : 94 : 95 : 96 : ... 1972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0772
Today:
229
Yesterday:
182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