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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어어~기부터, 저어어어어~기까지.
사실 어느 정도 규모인지 명확치 않다. 그냥 터무니없게 넓다고 보면 되었다. 까마득히 떨어진 강으로부터 너무 멀어 희게 보이는 산까지가 고쿠로쿠치나와님의 영역이라고 했다.
민속학자이자 괴담소설 작가인 이이지마 리쓰가 먼 친척뻘의 손녀 같은 하나에에게 지명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설명을 해주었는데 발음 곤란한 옛날 이름이다보니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아무튼 지도를 펼쳐보면 센다이 중심부가 아닌, 야마가타 현과 더 가까웠다.

「신사 관계자라면 내막을 더 잘 알 것 같구나. 하지만 말 그대로 내부정보라서 우리 같은 외부인에게 결코 알려주려 하지 않지.」
「일본에는 800만이나 되는 신이 계신다면서 뭔 특급 비밀 취급이래요? 할아버지.」
「특급이니까.」

고쿠로쿠치나와님은 천 년은 족히 묵은 토지 신으로 예로부터 치노후부사야 씨 일족의 숭배를 받았다.
강력한 토지 신을 등에 업고 일족도 몇 백 년에 걸쳐 엄청난 부를 누렸던 모양이다. 번성기에는 일족이 궁궐 같은 집에 살았고, 면장이 굽신거리는 등, 공권력도 감히 손댈 수 없는 위엄이 넘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위풍당당도 권력의 뒷받침이 없음 맛있는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
군불에 타들어가듯 서서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다 군부로부터 거액의 사기를 당한 1920년대 후반부터는 지역 유지 타이틀도 빼앗기고 기왓장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이후 온천개발이나 관광산업 등에 투자하여 나름 재기에 분투하였으나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쫄딱 망한 게 쇼와 18년, 그러니까 서기 1943년 9월 14일이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일처럼 멸문 날짜가 명확하게 남은 건 그 날짜에 당주를 포함하여 무려 여덟 명에 이르는 집안사람이 한꺼번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주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의식불명인 채로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아내는 야산에서 목을 맨 상태로 나중에 발견되었다. 장남은 둔기에 맞아 머리가 깨졌고, 장녀와 차남은 각자 자기들 방에서 목이 부러져 사망했다. 장녀는 거의 목이 잘린 상태여서 거죽 하나만으로 목이 몸통에 붙어 있었다. 유모는 우물에 처박혔다. 밖에서 낳아 데려왔다던 양녀는 유모의 시체 아래쪽에 구겨져 있었는데 유모가 다리부터 떨어진 것과 다르게 양녀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물구나무 선 자세였다. 결혼을 하지 않아 같이 한 집에서 거주하던 당주의 여동생도 9월 14일 사망... 특이하게 이쪽은 오래된 지병 악화로 인한 병사다.

그야말로 긴다이치 탐정의 사건수첩에 등장할 법한 미스테리 사건의 향연이라 세간이 시끄러웠을 법한데 보도통제가 있던 시대인 만큼 신문이나 일간지에 일절 내용이 실리지 않고 묻혔다.
수사도 미진해서 이 끔찍한 학살의 주범은 외부인이 아니고 피 토하고 죽은 당주인 걸로 잠정 결론 났다. 일가족 살해 후 음독자살,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사업 실패에 대한 감정적 동요, 대충 그런 모양새로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피 냄새가 났다.

「누가 범인이었던 거에요?」
「긴다이치 탐정이라면 사망 순서부터 조사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뒤에, 사실과 다른 부분을 하나하나 밝히고, 동기가 무엇인지, 사건을 촉발시킨 원인을 유추하고 범인을 상상해보겠지.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탐정이 아니라서.」
「그래도 뭔가 알고 계시잖아요.」
「짐작 가는 건 있지.」
「그게 뭔데요?」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거... 반드시 기억해두렴, 하나에. 삿된 것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거래를 제시하면 결코 응해선 안 되는 거란다. 이 할아버지가 대학생이었을 적에 팥빵을 다섯 개 주면 낙제를 면하게 해주겠다던 툇마루 요괴가 있었어. 어땠을 거 같니.」
「툇마루 요괴가 대학교 리포트도 쓸 줄 안데요? 어우야, 능력 좋은데?」
「그럴 리가 있겠니. 대학 강사를 자동차로 크게 다치게 해서 그 학기 강좌를 통째로 날려버리더구나. 삿된 것과의 거래라는 건 그런 거야. 인간이 생각하는 범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어 버리지.」

언덕길의 끝에서 미즈키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 제법 높아!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여요!』

그렇게 스러져 뒤안길로 사라진 치노후부사야 일족의 본가가 있던 자리가 현 카제야마 중학교다.
이이지마 하나에와 스가와라 미즈키가 빗자루니 걸레니 하는 청소도구를 들고 걸어 올라온 산도 원래 치노후부사야 일족의 소유지였다.
소유자가 몇 번 바뀌다가 지금은 시에 매입된 공유지이고, 산의 일부는 잘려져 나와 1979년 카제야마 중학교 부지가 되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의 입구가 학교 체육관 뒷길인 건 그런 까닭에서다.

『선배. 올라왔던 길과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상점가로 빠르게 갈 수 있겠는데요?』
『그건 포기하는 게 좋아, 스가와라. 옻나무 군락을 뛰어넘어야 하거든.』
가파른 외길에 짜증을 느낀 이이지마 하나에가 보다 편한 길을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져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결말은 항히스타민제 연고 처방이었다.
『스가와라는 옻나무가 어떻게 생긴지 알아?』
『전혀요. 그래도 옻이 오르면 밤나무 잎을 끓인 물로 목욕을 하면 좋다는 건 알아요.』
『오. 그래?』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어요, 라며 스가와라 미즈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선배, 청소를 해야 한다는 사당은 어디 있어요?』

사당은 제례를 지내는 곳이다. 따라서 법으로 정해진 크기는 없을지 몰라도 예식에 필요한 물건과 성인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미즈키가 보통의 가정집 크기를 가진 일본식 목조 건축물을 상상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건 상식에 의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겁니다.』
『거짓말?!』
『진짭니다.』
하나에가 어색한 동작으로 뺨을 긁었다.
이해합니다. 나도 처음엔 님과 같은 반응이었어요.

천 년이나 묵었다던, 그것도 속된 표현으로 엄청 강려크 했다는 신을 모신 사당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백엽상 크기라는 건 납득이 어렵다.
열어보면 온도계와 습도계가 들어가 있을 것만 같다. 흰색으로 칠이 되어 있으면 누가 뭐래도 저것은 백엽상이다. 크기와 모양새까지 흡사한데 오로지 색만 검정색이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와줬던 스가와라 미즈키가 지금까지 날 속인 거냐 표정을 짓고 이이지마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맹세코 속인 건 없다. 이이지마 하나에가 1학년이었을 적에도 그것은 백엽상처럼 생겨먹었고, 주물 쇠붙이 고리가 달린 양문을 잡아 열면 그 안에는...
『필~통?!!』
주인을 잃어버린 헝겊으로 만든 빨간색 필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거 농담이죠?!』
『질 나쁜 장난처럼 보인다는 건 나도 인정해.』

원래의 신체주물(神體呪物)이 무엇이었는지 하나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부터 지퍼 달린 평범한 빨간색 필통으로 대체되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물건의 낡기로 짐작해보면 몇 년 내의 최근이다.
콧쿠리님으로 섬김을 받았던 과거 학생이 엿 먹어봐라 이러고 장난을 친 건 아닐까.
필통의 색이 빨간색이니 분명 여학생의 짓일 거다. 남자도 정열의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주장하면 반박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이곳은 이미 오래 전부터 텅 비었다는 점이다.
짐짓 속눈꺼풀을 열고 사당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색이 사라지고, 음영이 반전되어 무슨 현상한 필름처럼 시야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속눈꺼풀을 열었다고 이런 식으로 사물이 뒤틀려 보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속눈꺼풀은 일곱 살이 되면 대부분 저절로 닫힌다. 극소수만이 나이를 먹은 나중에까지 속눈꺼풀을 열어 사물을 볼 수 있었는데 친척 할아버지 이이지마 리쓰의 말대로라면 능력으로 음화 이미지로 바꾸어 보는 일은 하나에가 유일했다.
「요령이 붙기 전까지는 어색해서 엄청 고생했지.」
검정색의 사당은 구름보다 희게 바뀌었다.
그뿐이었다. 요력이라던가 신력이라던가 하는 종류는 터럭만치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분 좋을 정도로 깔끔했다. It's empty.

『얏호! 청소하자~!! 다 끝나면 먹고 싶은 거 사줄게, 후배님. 라멘 먹을까? 아님 아이스크림?』
빗자루를 움켜쥔 미즈키가 태세를 바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오로보로당의 꿀빵!』
집에서 돼지라고 불리는 건 다 까닭이 있는 거였다.

Posted by 미야

2021/03/10 13:36 2021/03/1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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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술회전과 백귀야행의 설정을 대충 가져왔고 등장인물 또한 오리지널 캐릭터가 거의 전부입니다. 주술회전은 애니 초반부만 감상한 상황이라 원작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이 글의 배경은 2004년으로 고죠 사토루와 게토 스구르는 주술고전 1학년입니다. 주인공 이이지마 하나에는 중학교 2학년, 스가와라 미즈키 및 하시모토 리코는 1학년입니다. 손가락 대마왕님 료멘 스쿠나는 간접적으로 등장할 예정입니다.


혼란된 혼돈속의 혼미한 정신.

2학년인 이이지마 하나에가 1학년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반장이 이성을 잃고 괴성을 질러댔다.
상의 탈의 중 신체 건장한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이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질러댄 터라 옆 반에서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며 웅성거렸을 정도다.
『왜 이라 캅니까, 선배! 이러는 거 아닙니다!』
평소의 고급 외제승용차 이미지를 순식간에 말아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삑사리가 났다.
분명 표준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빠른 걸음으로 교실 안으로 난입한 이이지마 하나에가 손가락을 쭉 뻗어 반장의 코로 딱밤을 먹였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딱밤이었음에도 상대방은 무릎의 힘이 풀렸는지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다리를 오므릴 힘도 없어 벌려진 스커트 사이로 속옷이 훤히 드러났는데 창피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깊은 산속에서 동면에서 깨어난 곰과 마주쳤다. 숲이 침묵했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전부 사라졌다. 하시모토는 시야가 어두워지고 있다고 착각했다. 여전히 하늘 위로 빛이 있음에도 맹렬하게 땅을 잠식하고 들어오는 저 공포스러운 것의 정체는 어스름이다.

이이지마가 팔짱을 낀 자세로 딱 한 마디만 했다.
『팬티 보인다.』
『히익!』
할 말은 제법 있었다. 솔직히 화도 좀 난 상태였다.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지만 콧쿠리님 모시기는 끝이라고 그렇게 강조를 했으면 들어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귓등으로 들은 척도 안 하고 멋대로 1학년의 콧쿠리님을 모셔?!
앙화는 이제 없노라 (※ 殃禍 지은 죄의 앙갚음으로 받는 온갖 재앙)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
전교 10등 안에 든다는 잘난 머리라면서 그 말을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츳, 하고 혀를 찼다.
그렇다고 1학년 후배를 겁먹게 만들어 가랑이를 벌린 채 교실 바닥을 기게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어서 곧 표정을 풀고 기운을 갈무리했다.
게다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반장이 이번 일의 주동자인 것도 아니다.
엄연히 따지자면 1학년 2반 전원이 피해자여서 이런 식으로 성을 내봤자 엄한 곳에 화풀이가 될 뿐이었다.

「하아.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지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정작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이 굴고 있고... 나 혼자서 열 내고 있는 기분이잖아.」
얼쯤하여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쓸어 넘겼다.

어쩐지 이번 1학년의 콧쿠리님은 매우 둔한 성격인 것 같았다.
반 아이들의 따돌림으로 친구를 사귀지 못한 1학년의 콧쿠리님이 야외용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모습은 제법 여러 번 목격되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측은하기 짝이 없건만 당사자인 미즈키는 어째서인지 따끈해진 봄볕을 기분 좋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따분하고 졸린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심지어 발목으로 영 좋지 않은 걸 주렁주렁 매달고도 그늘이 없었다.
체육복을 입고 비뚤 걸음으로 걸으며 천연덕스럽게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미즈키를 보고 그래서 놀랐다.
아, 뭐라더라... 이런 걸. 마이 웨이라고 하던가.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릴 거라고, 귀신으로 변해 보란 듯이 저주를 내릴 거라 맹세하던 3학년의 콧쿠리님과는 양상이 180도 달랐다.

「발목의 붕대는 어쩌다 그런 거야?」
자판기에서 잘못 나온 우롱차를 핑계로 말을 걸어보았더니 발랄하게 대답했다.
「덜렁거리다 계단에서 굴렀어요. 뛰거나 하면 아직 욱신거리고 아프지만 거의 다 나았어요!」
뱀 한 마리가 송곳니를 박은 채 발목을 칭칭 감고 있는데 금방 낫겠니.
「괜찮아요. 이따~만한 바늘로 주사도 맞았거든요.」
아픈 발목을 앞뒤로 까딱거리며 미즈키가 말했다. 그때마다 피부에 이를 박고 있는 뱀도 마찬가지로 까딱까딱 흔들렸다. 두 눈이 퇴화하고 없는 눈 먼 뱀이었다.

지금도 그 뱀은 스가와라 미즈키의 발목을 물고 늘어져 땅바닥에 꼬리 일부가 닿아 질질 끌리는 중이었다.
불쾌하게도 땅에 끌린 흔적이 꼭 음식물 쓰레기 국물이 흐른 자국을 연상시켰다. 악취가 날 것 같아 코를 쥐어 막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칠 지경이었다.
「얘는 진짜지 어쩌다가 이런 음식물 쓰레기를 달 게 된 거람.」
눈이 퇴화한 뱀이니 분명 통할 거라 여기며 재빨리 발로 지려 밟으려 했다.
얄밉게도 그것의 반응이 빨랐다. 이이지마 하나에가 발로 밟으려는 것과 동시에 삿 하고 뱀이 꼬리를 위로 올려 피했다. 기분 탓일까, 눈이 퇴화해서 없는 주제에 뱀이 이쪽을 노려보며 눈싸움을 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욱 힘주어 미즈키의 발목을 칭칭 감았다.

『에고... 곤란하게 됐네.』
『아니오! 전혀! 전혀! 보기에만 그렇지 걷는데 크게 지장 없어요.』

스가와라 미즈키는 맹세코 사실이라며 붕대를 감은 다리를 척 들어보였다. 전혀 안 아픈 건 아니지만 빠르게 걷거나 뛰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았다. 의사도 뼈에 금이 간 건 다 나았다고 장담을 했고, 일주일 정도 뒤에 붕대를 풀기로 되어 있었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속도가 느린 건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고 숨이 차서다. 생각보다 길이 가팔랐다.
『학교 뒤쪽으로 이런 길이 있는지 몰랐어요, 선배.』

클린업 클럽, 일명 청소 부는 카제야마 중학교에 존재하는 다수의 유령 부와 마찬가지로 부원도 딱히 없고 부실도 없었다. 감독하는 선생님도 부재다.
그런데 부 활동은 엄연히 있댄다. 그것도 무려 1945년부터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학교가 생기기도 전이다. 부활동이 아니라 당시에는 동네 행사처럼 행해졌던 듯하다.
손가락을 접었다 펼쳤다 반복하며 년 수를 헤아리던 미즈키는 진심으로 놀랐다. 자그마치 59년 전에도 양동이와 빗자루, 걸레와 같은 청소도구를 들고 이 길을 걸어간 학생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때 미즈키의 부모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체육관 뒤쪽으로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철문이 있고, 녹슬어 뻑뻑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뒷산으로 이어졌다. 그곳이 카제야마 중학교 부지의 연장선인지, 아니면 개인 사유지인지 알 수 없었다. 담장도 안 보였고 안내 표지판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빗자루를 꼭 쥐고 가면서 미즈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흡연금지, 버섯채취 금지, 대충 이런 문구를 적은 표지판 대신 돌을 쌓아 만든 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는 크기 않아 한 자에서 두 자 정도였고 특이하게도 돌의 색이 검었다.
점판암? 글쎄다. 수업시간에 봤던 암석 샘플을 떠올려 봐도 종류를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돌은 표면이 거칠었고 색이 일정했다. 표면에 칠을 해서 인위적으로 색을 입힌 것일 수도.

『만지지는 말고.』
『네.』
방금 전 뱀 소굴에 손을 대려 했다는 것도 모르고 스가와라 미즈키가 밝게 대답했다.

「으, 진짜지 뱀 투성이! 온 동네가 뱀!」
지금도 스윽 소리를 내며 뱀이 땅바닥을 기어갔다. 탁하고, 물기가 있고, 꿈틀거린다.
처음에는 진짜 뱀이라고 착각해서 미친 듯이 발을 굴렀더랬다. 만약 그게 진짜였다면 자기 몸을 방어하려던 뱀으로부터 엄청나게 물렸을 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체가 없는 종류여서 「버려진 사탕 봉지를 먹바퀴로 착각한 이이지마 하나에가 킹콩처럼 발을 굴렀다」로 마무리가 되었다.
먹바퀴는 옥외 서식 습성이 있고 주택 부근의 숲이나 옥상 텃밭에서 잘 발견되는 종류다. 마침 창궐하는 뱀에 패닉을 일으켰던 장소가 수풀이 우거진 곳이어서 다행히 먹바퀴 핑계는 잘 먹혀 들어갔다.

『이 돌탑들은 누가 쌓은 걸까요?』
꿈틀거리는 뱀들이 먼지처럼 쌓인 수풀 앞에서, 발목에 눈먼 뱀을 매달고 있던 미즈키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두 눈을 반짝거렸다.
『하나같이 다들 올망졸망해서 귀여운 느낌이에요!』
『......』
『에엣? 선배는 아니에요?』

걸레를 담은 양동이를 휘둘러 망할 뱀 구덩이 돌탑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싶은 걸 시몬, 너는 아느냐.
해탈한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배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Posted by 미야

2021/03/09 13:48 2021/03/0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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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 2학년에 엄청 멋진 연예인 선배가 있어~!!』
견학 도중 땡땡이를 치고 달아나 반 아이들 전부를 기합 넣기 체조로 몰아넣은 주제에 목소리가 엄청 컸다.
몇몇 아이들의 표정이 대놓고 일그러졌다.
하지만 복잡하기 짝이 없는 그들만의 비밀스런 사정 탓에 스가와라 미즈키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눈에 힘을 주는 학생은 없었다.
대신 그들은 다음 수업 준비를 하거나 까먹고 있던 과제를 벼락치기 하며 각자 바쁘게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1학년의 콧쿠리님, 그러니까 일종의 카페인 과다섭취 비슷한 상태가 되어 남의 얼굴에 뜨거운 콧김을 뿌리고 있는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콧쿠리님을 응대하는 건 온전히 반장 하시모토 리코의 몫으로 떨어졌다.

「원래 대화 금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몇 번이고 말상대를 해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피곤에 찌든 콜 상담센터 근로자의 표정을 지으며 반장은 미즈키를 향해 빙글 돌아섰다.
『누구 얘기? 우리 학교는 외부활동 전면 금지야. 심지어 아르바이트도 금지거든. 연예인 지망생이면 우리 학교가 아니라 세-메이 학원으로 갈테지.』
『그렇지만 분위기가 딱 연예인이던데? 이름이 이이지마 하나에라고 했어. 2학년!』

순간 퍼렇게 날인 선 정적이 몰아쳤다.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미즈키에게로 향했다. 하던 동작을 모두 멈추고, 심지어 책상에 엎드려 토막잠을 취하던 남학생조차 졸음이 싹 달아난 표정이 되어 스가와라 미즈키를 쳐다봤다.
모두가 일제히 숨을 죽였다는 것도 모른 채 미즈키는 두 팔을 붕붕 흔들어댔다.
『2학년의 콧쿠리님이라고 했어! 꺄아~ 혹시 그 선배 2학년 몇 반인지 반장은 알아?』

인위적으로 꾸며낸 접대용 표정이 삽시간에 무너질 뻔했다.
하시모토 리코는 속으로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고 교복의 깃을 잡아당겨 정리했다.
은행원인 어머니가 진상고객을 응대할 적의 몸가짐을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자세가 똑바르면 졸음도 달아나고, 허리통증도 완화되며, 마음의 동요도 곧 멈추는 법이다.

『미안. 아무래도 한 학년 위의 선배는 잘 몰라.』
잘 모르긴. 이 동네에서 이이지마 하나에를 모르면 외계인인데. 속으로 중얼거렸다.
칼빵 자국 선명한 야쿠자들도 슬슬 피하고, 심지어 정신 나간 개도 이이지마 하나에 앞에선 꼬리를 감춘다. 아무나 찔러 죽이겠다며 공원에서 칼을 소지한 채 난동을 부리던 괴한이 우연히 편의점에 가던 중이던 이이지마와 정면으로 마주치고는 곧바로 전의를 상실하여 무릎을 꿇었다, 카더라 소문이 돈 적도 있다.
단순 헛소문으로 치부할 얘기가 아니다. 이이지마 하나에라면 일개 여중생이 온전히 기백 하나만으로 예비 살인마를 찍어 누르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2학년의 콧쿠리님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뿐인데도 팔뚝의 털이 곤두서려 했다.
그 선배는 멋진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
새 지저귀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으슥한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갑자기 큰곰과 맞닥뜨렸다. 그것도 방금 동면에서 깨어나 심한 허기 상태인 곰이다. 대략 그런 느낌이다.

이쯤해서 하시모토 리코는 의아해졌다.
연예인 같은 멋진 선배? 그거 도대체 누구?

『근데 콧쿠리님이 뭐야? 반장.』
워, 잠시만. 깜빡이는 켜고 들어와라.
『우리 중학교에선 인기투표 1위를 콧쿠리님이라고 불러?』

때마침 예비종이 쳐서 정말 기뻤다.
영혼 없이 빙긋 웃던 반장은 간절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미즈키를 나 몰라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곤란하게 그런 거 묻지 마. 차라리 완전제곱식을 물어보라고.

이어지는 수업시간 내내 미즈키는 샤프를 윗입술에 올려놓고 딴생각에 빠졌다.
「2학년의 콧쿠리님이라. 흐응~ 분명 2학년 넘버원이라는 거겠지?」
초등학교 시절엔 인기투표 1위의 슈퍼스타들을 가리켜 멧챠라고 했다. (※한국식으로는 짱)
남자는 멧챠맨, 여자는 멧챠걸.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울트라 빔을 발사하는 흉내를 내던 동급생이 멧챠맨이었고, 분홍색 스커트를 나폴거리며 애니메이션 프롱프리걸즈 주인공의 동작을 따라하던 아이가 멧챠걸이었다.
멧챠맨은 축구를 정말 잘했기에 운동신경이 뛰어난 소년을 마음속으로 크게 동경했던 미즈키는 쉬는 시간에 멧챠맨과 같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일기장에 기원하는 심정으로 적었을 적에 선생님은 여자애가 남자화장실에 멋대로 들어가려 하면 안 된다며 야단을 쳤다.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은, 미즈키의 흑역사 중 하나다.

『어흠!』
수업에 영 집중하지 못하는 미즈키가 거슬렸던지 2차방정식을 칠판에 풀어나가던 선생님이 헛기침을 했다.
『거기 너! 나와서 문제 풀어! 아까부터 계속 딴 짓이나 하고!』
『제가 풀어보겠습니다.』
교사의 말을 끊은 하시모토 리코가 냉정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방금 지목한 건 네 녀석이 아니다. 하시모토!』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의 고충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미즈키는 입술에 올려놓았던 샤프를 이번에는 손가락에 끼고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시선은 여전히 수업진도가 아닌 엉뚱한 페이지에 고정된 채였다.
「헤에. 그런데 좀 의외네. 중학생씩이나 돼서 멧챠코챠 부르는 거, 무지 촌스럽다는 건 알겠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카제야마 중학교 넘버원을 콧쿠리님이라 부르는 것도 좀 아니지 않아? 콧쿠리님은 그거잖아. 여기로 와주세요 하는 그거. 미래의 애인 이름을 알려주는 엔젤님.」

세 명의 사람이 연필을 같이 쥐고 종이에 가져간다. 여기로 와주세요, 여기로 와주세요, 여기로 와주세요 세 번을 말하고 숨을 계속해서 참고 있으면 콧쿠리님이 현신하여 미래의 애인 이름을 적어주기 시작한다.
주의사항, 숨을 참지 못하고 뱉으면 콧쿠리님이 곧바로 자리를 떠나니 최대한 참는다.
「숨 막혀서 뒤지는 줄 알았지.」
콧쿠리님을 불러내는 건 매우 간단했다. 숨을 참고 있으면 어느새 쥐고 있던 연필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으니까. 다만 그 애인들 이름이 하나같이 찌그러진 동그라미에 갈지자인 건 심히 유감이었다.
노골적으로 실망을 드러낸 아이들을 향해 콧쿠리님을 부르는 방법을 알려줬던 멧챠걸이 변명조로 말했다.
엔젤님은 원래 서양인이야. 그래서 히라가나를 잘 몰라.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콧쿠리님은 영 인기가 없었고, 오래지 않아 장난도 하지 않게 되었다.

「뭐,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건...」
수업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교과서를 탁 소리 나게 덮어버렸다.
『야! 인석아! 거기 너! 아직 종 안 쳤다! 왜 교과서를 덮는 거야!』
「2학년의 콧쿠리님이 몇 반인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거지!」
선생님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든 말든 결심부터 하고 보는 미즈키였다.

2학년의 콧쿠리님은 우롱차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니 우롱차가 나오는 자판기 앞에서 무작정 잠복하고 기다리는 거다. 그러다 선배가 나타나는 순간,「어머, 이런 우연이!」공갈치고 덮치는 거다.
「그런데 우리 학교 자판기가 모두 몇 대지. 매점을 제외하고도 여섯 군데가 넘잖아.」
틀렸다! 이 방법은 닌자 분신술을 먼저 익히지 않는 이상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게다가 발목이 다 낫지 않아 여기저기 뛰어다닐 수도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얼굴에 철판을 깔고 2학년 교실을 돌아다녀볼까. 덕질은 원래 뻔뻔하게 하는 거다.

뺨에 열이 오르면서 확 붉어졌다.
날 좋은 때 옥상에 올라가 직접 만든 도시락을 하나에 선배와 같이 먹고 싶다.
참고서 골라달라고 부탁도 해보는 거다. 주말에 약속을 잡아 같이 서점을 방문하고, 시간을 내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를 드린 후에 케이크 가게로 가서 끝내주는 디저트를 대접해야지.
캬아~!! 좋구나. 미인이 케이크를 먹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아랫배가 욱씬거려!
그대로 전화번호 교환도 하고 - 방과 후 클럽활동도 같이 하자고 졸라야지.

『같이 부 활동?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만... 괜찮겠어? 후배님. 나, 청소부야. 이름하야 클린업 클럽. 빗자루와 걸레, 양동이를 들고 고쿠로쿠치나와님 사당을 청소해야 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가와라 미즈키가 2학년 교실을 순례하기 전, 머리카락에 잎사귀 하나를 머리핀처럼 달고 나타난 이이지마 하나에가 1학년 2반 교실에 먼저 난입했다.

Posted by 미야

2021/03/07 00:17 2021/03/0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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