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서가 정리를 시도하던 중에 가지런히 정돈된 책들 속에서 저 혼자 옆으로 벌러덩 드러누운 책 한 권이 눈길을 끌었다. 리스가 이랬을 리는 없다. 그는 못 말릴 정리벽이 있는 사내라서 통조림 라벨까지 모양을 맞춰 식료품을 찬장에 진열하는 버릇이 있다. 총기류는 또 어떻고. 벽장에 용도와 크기별로 보관된 각종 무기들의 모양새는 박물관의 디스플레이를 많이 닮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마트에서 구입해온 달걀에 연필로 1번, 2번 이러고 숫자를 적어놓고도 남는다. 다시 말해 범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핀치라는 얘기인데... 문제의 허름한 책을 손으로 집어 들고 나서야 기억이 살아났다. 표지 모서리가 뜯어져 나간 걸 발견, 풀로 붙여야지 이러고는 일이 바빠 그새 까먹은 거다. 『내 기억력도 한 물 갔군.』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1990년대 무렵에 인쇄한 알베르 까뮈의 문고판「페스트」다. 표지 상태는 상당히 나빴지만 상대적으로 속은 그럭저럭 괜찮게 보였다. 낱장의 이가 빠지지도 않았으며 곰팡이가 먹어치우지도 않았다. 책을 사랑하는 도서관 직원이 이를 발견했다면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대신 접착제와 두꺼운 도화지를 사용해서 상한 부분을 손봤을 거다. 마찬가지로 핀치도 같은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자리에서 빼뒀다. 『가만있자. 가위와 풀은 있는데 표지를 덧댈 종이가...』 그러면서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그게 실책이었다.
리스가 도서관으로 돌아왔을 적에 핀치는 책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자세로 책을 읽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제대로 된 조명이 없어 독서를 즐기기엔 주변이 많이 어둡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눈치다. 등이 눈에 띄게 구부정한 까닭은 상체를 숙여 코가 닿을 정도로 글자를 바짝 들여다보고 있어서다. 낱장을 넘기는 오른손의 동작은 오랜 세월동안 잘 훈련이 되어 한 치의 군더더기도 보이지 않는다. 활극 영화에 나오는 닌자가 목표물을 향하여 날렵하게 표창을 던지는 듯하다. 허나 손가락의 움직임만 제외하면 전체적인 그의 뒷모습은 나긋하고 부드럽고 퇴폐적으로까지 보인다. 이쯤해서 리스는 속눈썹을 꿈뻑꿈뻑 움직였다. 퇴폐적이라... 그 많고 많은 형용사 중에서 하필이면 그 단어가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게 핀치에게 과연 어울리는 말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는 더 이상 젊지도 않고, 군살이 여기저기 붙었고, 얼굴엔 주름이 졌고, 몸은 뻣뻣하고, 다리를 저는 바르지 못한 자세 탓에 체격이 뒤틀렸다. 패션 잡지에 흔히 등장하는, 그리스 조각처럼 근육을 키운 탐미적 모습의 모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따라서 핀치를 설명하려면 원숙미라던가, 고상함 같은 단어를 사용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만지고 싶다」생각이 간절해지는 걸 봐선 핀치에겐 치명적인 퇴폐미가 있는게 분명하다. 볼록한 허리를 따라 통통한 엉덩이 라인을 눈으로 정신없이 핥으면서「내가 아니라 핀치에게 문제가 있는 거야」생각했다.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십시오, 미스터 리스.』 심장마비에 걸리는 줄 알았다며 핀치가 펄쩍 뛰었다. 어느새 리스는 서로의 몸이 거의 닿을 정도로 근접해 있었고, 핀치가 느끼기에 존은 무슨 특별한 전송장치를 사용하여 나타난 것 같았다. 뭐, 엔터프라이즈호에서나 실용되고 있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못했으니 사람을 놀래 키려고 발자국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걸어온게 확실했다. 애도 아니고 말이지 - 비난하는 눈빛으로 쏘아봤음에도 리스는 실실 웃기만 했다. 책을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보다 곱절은 헤픈 웃음이다. 가만 보니 술 냄새도 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핀치는 코를 킁킁거렸다. 위스키다. 『술 마셨어요?』 『아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대답이었다. 완전히 망가졌던 시절의 리스는 급성 알콜 중독으로 죽어 보이겠다며 술병을 주머니에 넣고 살았다. 맨 정신을 유지하기가 싫어서 그랬노라 그 까닭을 설명했는데 굳이 이유를 붙이지 않더라도 노숙인들 전부가 술을 마신다. 한 겨울에 종이로 급조한 잠자리에서 눈을 붙이려면 술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 반대로 동사의 위험은 더욱 커진다.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러시안 룰렛 - 핀치가 처음으로 리스를 보았을 적에도 그가 입고 있던 코트에선 찌든 술 냄새가 진동했다. 『......?』 하지만 리스는 술을 그다지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그가 광적으로 집착하는 건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다. 오죽하면 싸구려 인스턴트 식품으로 가득찬 주방 찬장 맨 앞줄로 세 종류의 고급 원두커피가 채워져 있다.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리스가 가장 먼저 장만한 살림살이 또한 커피메이커, 주전자였다. 또한 가끔씩 기분전환을 위해 술집에 가도 혼자서는 잘 마시지 않으려 한다. 뉴욕에 거주하는 술친구가 딱히 없는 상황에서 이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덕분에 맥주를 사겠다며 핀치를 꼬드끼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불행하게도 내성이 거의 없는 핀치는 술친구 삼기엔 빵점이다.
『무슨 책을 읽고 있어서 제가 오는 것도 눈치를 못 채요? 핀치. 음?』 상체를 교묘하게 비튼 리스가 관절이 불거진 기다란 손을 뻗어 카뮈의 문고판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동작엔 책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거라기 보다는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약간의 동작만으로「거의 닿을 듯 가깝게 접근했다」에서「거의 뒤에서 껴안는 수준」이 되어버리는 걸 봐선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핀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는 책장이 있고 앞에는 고용인의 넓은 가슴이 있다.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어 꼼짝하기도 힘들다. 그 불편한 감정을 알면서도 리스는 핀치의 몸을 누르다시피 하며 천천히 책을 펼쳤다. 『훌륭한 사람, 즉 누구에게도 병균을 옮기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의 긴장을 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합니다... 페스트 증상을 다룬 의학서 치고는 그 내용이 매우 수상하군요. 의사들은 건강을 위해선 긴장을 풀여야 한다 강조하는 법이건만.』 『그거... 농담이죠?』 『당연히 농담입니다, 핀치.』 그의 입꼬리가 당겨 올라가는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정도로 사적인 공간이 결여되었다. 핀치는 팔을 뻗어 리스를 뒤로 떠밀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술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핀치는 존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취했음을 깨달았다.
『어느 쪽이죠?』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말이죠, 핀치. 어느 쪽이라뇨.』 『글쎄요... 존. 왜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하죠. 사람을 죽일 용기가 필요해서 술을 잔뜩 마시거나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 전에 술을 마신다고.』 『음... 그걸 묻는 거라면 둘 다요.』 『What?』 『있잖아요... 핀치. 로건 피어스, 그 녀석을 죽여도 될까요. 허락해주세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잖습니까. 안 됩니다!』 『그럼 살짝 손을 봐주는 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옥상에 거꾸로 매달아두고 싶은데요.』 『그것도 안 됩니다!』 모르긴 해도 조증의 IT 천재에게 된통 당한 모양이다. 분이 터졌는지 리스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거 알아요? 그 녀석, 손 버릇 무지 나빠요... 무지 나빠.』 『리스?』 『남의 엉덩이를 막 조물거리고...』 『뭐라고요?』 『제기랄, 덕분에 흥분했어.』 책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손이 급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Posted by 미야
2013/02/2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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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만 정보를 취득하는 것과 귀로 정보를 취득하는 것 중에서 어느 방식이 더 효과적일까. 반반의 가능성이었다. 스피커가 꺼져 있는 텔레비전 화면으로 뉴스를 보는 것과 라디오 채널로 뉴스를 듣는 것의 차이다. 솔직히 말해 이것도 답답하고 저것도 답답하다. 그래도 딱 한 가지 방식만 선택하라면 핀치는 두고 볼 것도 없다며 라디오를 고를 거다. 현장의 모습은 상상력만으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은 사귈 친구를 잘못 골랐어요, 마이클.》 《친구? 누가 친구인데요. 로건을 말하는 거요? 그 녀석은 친구가 아니라 웬수요.》 《으하핫핫핫~!!》 《피어스 씨. 당신더러 웬수라는데 왜 그렇게 기분 좋다는 듯이 웃는 겁니까.》 《기분이 좋으니까 기분 좋게 웃는 거죠. 친구라는 건 지루해요, 존. 하지만 웬수는 재밌는 관계죠. 내 말이 맞지? 마이클.》 《꺼져라, 졸부!》 《거봐요. 맞다잖아요.》 《끄응...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군.》 세 명의 술주정뱅이가 삿대질을 서슴지 않으며 드잡이를 하는 광경이 그려졌다. 물론 그들 중 알콜을 섭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 명의 목소리가 커진 건 단순히 아드레날린의 증가 탓이다. 《당신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싫은데.》 《권고하는게 아닙니다, 피어스. 자, 그만 차에서 내려요.》 《어, 어, 어! 실수하는 거요, 존. 나 같은 히든카드를 그냥 버릴 작정입니까?》 《누가 히든카드라는 겁니까. 카드로 치면 당신은 조커요. 그리고 골칫덩이요!》 리스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음... 이쯤해서 핀치는 방어하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흥미롭다는 표현은 이럴 적에 사용하기엔 적절하지 않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각은 뭐랄까... 딱 꼬집어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리스는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가 화를 내는 방식은 매우 독특해서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것과 비례하여 목소리가 착 가라앉는다. 그리고는 거대한 아마존 비단구렁이가 바닥을 소리 소문 없이 기어가는 그런 느낌으로 상대를 위협한다. 나에게 목이 꺾여 죽고 싶은 거냐 - 앵앵거리며 고함을 지르는 법이 결코 없다. 여자처럼 고음을 내는 건 쓸데없는 허세에 불과하니 오히려 적에게 얕잡아 보이기 십상이다, 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소리를 낼 일이 없었어요. 죽기 싫으면 꺼져라 위협하기 전에 방아쇠를 당기던게 제가 하던 일이었죠. 움직이면 쏜다 경고하는 건 경찰이나 하는 거잖아요?」 그들이 의견 다툼으로 몇 번 싸웠을 적에도 두 사람이 내는 목소리는 조곤조곤 속삭이는 어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핀치 역시 감정적으로 변해 고함을 질러대는 걸 무척이나 혐오하는 편이었고... 솔직히 말해 무기를 가진 전직 CIA 요원을 향하여「계란에 소금을 너무 많이 뿌렸다니까요!」이러고 말싸움을 거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안경을 벗고 뻣뻣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리스는 이미 핀치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먹은 눈치다. 와와 이러고 세 명의 사내가 언성을 높이고 있다. 새내기 대학생들이 대마초를 피우고는 어디로 놀러갈까 이러고 다투고 있는 것처럼도 들렸다. 《당신까지 안전가옥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습니다, 피어스.》 《이거 참 답답하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잖수. 당신 파트너에게 내가 찾아낸 용의자 사진을 보내드릴까 하는데 번호 좀... 응? 애인 번호 따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왜 그렇게 정색하는 거요. 그 안경 쓴 아저씨 번호를 불러달라니까. 안 돼? 진짜로? 이거 너무하네.》 《이봐요. 것보다 내 담당인 애나가 걱정할 거예요. 그녀에게 연락하고 싶습니다만.》 《마이클... 쯧쯧.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치만 갑자기 내가 없어졌다고 해봐. 난리가 날 걸세, 로건.》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 그만 징징거려. 그럼 내가 대신 문자할게. 마이클과 로건은 라스베가스로 놀라갔음. 사흘 정도 카지노에서 질퍽하게 놀다오겠삼. 굿 럭 애나.》 《야, 이 자식아~!! 날 그냥 망나니 인간으로 만들어라, 만들어!》 이쯤해서 리스가 뱃가죽에 힘을 잔뜩 넣고 고함을 질러댔다. 《모두 입 다물어요~!!》 그래봤자 다들 한 고집이라 배경으로 꺄륵꺄륵 싸우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바로 그때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의 존경하는 해커 씨.》 핀치는 메마른 눈을 꿈뻑거렸다. 리스가 하던 방식으로 로건 피어스 또한 리스의 핸드폰을 성공적으로 블루재킹한 모양이었다. 이가 다 빠진 사람처럼 입술을 안쪽으로 오물거리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젊은 천재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자신의 개구쟁이 짓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전혀 모르고 있다... 돌연 위가 쓰리고 아파왔다. 온 방안이 붉은 빛을 내뿜는 경고등으로 가득 찼다. 위험, 위험, 위험.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주제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리고 간절히 빌었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라고 해줘요.」 모았던 손을 뾰족이 세워 코로 가져갔다. 옆에서 보면 콧물을 푸는 동작과 똑같아 보일 거다. 그 상태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미스터 피어스.』 《어~흥.》 주저하며 대화를 시도했을 적에 그는 호랑이를 흉내를 내며 괴상하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당신 친구는 우리가 돌보겠어요.』 《음... 그러니까 날 돌봐줬던 것처럼 말이죠.》 지금 누구와 통화하고 있는 겁니까, 이러며 짜증을 부리는 리스의 목소리가 배경음으로 같이 들렸다. 핀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미스터 피어스.』 《넵.》 『경고하는데... 나와 다시금 연락하기 위해 일부러 당신 친구를 위험에 빠뜨린 거라면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을 겁니다. 부탁이니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아요.』 《이크! 무서워라. 최종 보스님이 화내니까 소름이 돋는군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아침에 눈을 떠보니 침대 위에 댕겅 잘려진 말 대가리가 올라가 있더라」영화 장면이 재현되는 겁니까? 그거 무섭네... 그런데 각하. 틀린 가정 하에 이루어진 협박은 그다지 재미없으니 관두죠. 난 내 친구를 일부러 위험에 빠뜨리지 않아요. 것보다 우리 세 명이 요트 타고 바다로 나가도 될까요?》 『네?』 《제 개인 요트에 내 친구를 태우고 바다로 달아나고 싶습니다만. 거기라면 이상한 놈들도 따라오기 쉽지 않죠. 당연히 존은 동석할 수 있구요.》 『그! 기, 기다려...』 《오케이. 존~!! 최종 보스님이 허락하셨다! 하던 거 멈추고 요트로 갑시다~!! 할렐루야~!!》 피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핀치를 뒤로 떠밀어버리고 그만의 자리를 꿰찼다. 싸악, 이러고 온몸의 피가 아래로 쏠리는 감각이다. 『미스터 피어스!』 상대가 제멋대로라서 화가 치미는게 아니다. 그런 것과는 약간 달랐다. 《존, 요트를 조정할 줄 아나요? 흠?》 이러면서 슬그머니 리스에게 어깨동무를 할 그가 너무나 미운 것이다.
Posted by 미야
2013/02/2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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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글쟁이다. 지금까지 머리로 오만가지 내용을 상상해봤다. 숲속에서 살인곰을 만나면, 절벽에서 추락할 위기에 처하면, 무인도에 고립되면, 공룡을 닮은 악어에게 쫓기게 되면, 외계인과 조우하면, 그리고 흉악한 범죄자와 마주치면 - 이렇게 움직여 위기에서 벗어나야지. 머리로 장면을 그려보았을 적엔 제법 그럴 듯해 보였다. 그는 몽둥이를 휘둘러 살인곰을 때려잡을 수도 있었으며, 날카롭게 다듬은 돌조각으로 작살을 만들어 무인도에서 물고기 사냥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총을 든 악당 앞에선 끝내주는 뒤돌려차기를 선보였다. 그러니까 생각으로는 그게 가능했다. 자, 이제 실제 상황으로 돌아와서. 『......』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졌다. 아뵤~ 이소룡의 기합을 넣어 흉기를 쥔 손모가지를 비틀어버린다는 웅장한 계획 어쩌고는 사막의 열기에 노출된 잡초처럼 금방 시들어버렸다. 그럼 공격은 관두고 도망치는 건 어떨까 - 그것이야말로 웅대한 포부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다만 평소에도 무모한 짓을 곧잘 하는 그의 친구는 잽싸게 잘도 움직여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총구에 노출되었다는 것 정도로는 그를 겁먹게 만들 수 없다. 위대한 천재는 협박을 무시한 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리고는 - 『에헤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설은 거짓이다. 검정의 양복 차림새의 악당이 화를 벌컥 냈다. 『로건 피어스! 당신~!! 계속 우리 일을 훼방 놓을 작정입니까! 도대체 무슨 속셈이죠.』 『무슨 속셈이라니... 음. 덧셈?』 『나눗셈이고 뺄셈이고 지금 농담 할 기분이 아닙니다!』 권총을 든 왼손을 뒤로하고 주먹을 쥔 오른손이 앞으로 빠르게 튀어나왔다. 얻어맞는다고 생각한 로건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사내의 주먹은 콧잔등 바로 앞에서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멈췄고,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로건은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건만 풍압에 떠밀려 뒤로 휘청거렸다. 이딴 광대극은 그만하자며 양복의 사내가 정색했다. 『저 사람을 때리려니 내 주먹이 아깝군요. 자! 마이클. 갑시다!』 『아니, 저, 그.』 몸만 굳은게 아니다. 혀도 굳었다. 지금 날 납치하려는 건가요 - 라는 질문이 목구멍 안에서 빙빙 맴돌았다. 겨드랑이를 꽉 붙잡힌 상태에서 간절히 애원하는 눈빛으로 로건을 돌아다보았다. 살려줘, 로건! 지금 날 도와주면 평생 노예처럼 부려 먹겠다 해도 불평하지 않겠어! 어버버 입을 움직이며 식은땀을 흘려댔다. 판단력은 이미 제로 상태, 눈가리개를 한 것도 아닌데 시야가 캄캄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로건이 그들 뒤를 졸졸 따라왔다. 무슨 영문에서인지 양복의 사내는 촐랑거리는 로건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 못 하겠다. 마이클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로건! 설명 좀 해봐! 로건!』 그런데 패닉에 빠진 당사자는 내버려두고 둘이서만 대화하기 시작했다. 『당신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어요, 피어스.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는데 교묘한 타이밍에 항상 마이클을 빼돌리더군요.』 『그야 적을 혼란시키려고 그랬죠.』 『보디가드인 즈비를 시켜 우리가 설치한 도청기를 전부 수거해간 것도 적을 혼란시키기 위해선가요? 음?』 『그걸 누가 달아놓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아무런 표식도 없는데. 정 뭐하면 거기에 이니셜이라도 써놓지 그랬수. 그럼 댁들의 노력을 충분히 배려했을 겁니다.』 『참말로 그랬겠다.』 『얼씨구? 그 의심하는 눈초리가 뭡니까. 그렇게 노려보면 상처받는다고요, 존. 날 그렇게 못 믿어요? 중국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우리는 평생 서로를 돌봐줘야 하는 사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농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소름 돋습니다. 게다가 나와 당신은 중국인이 아니잖습니까.』 『그런가? 하지만 차이니스 레스토랑에 가서 볶음밥을 자주 먹는데.』 『볶음밥을 100만번 먹는다고 중국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피어스.』 『에이, 그러지 말고 로건이라 부르... 아얏!』 이해한다. 거기서 주먹이 나가는 건 폭력 말고는 저 주둥이를 닥치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행이 지하주차장까지 내려왔을 적에 로건이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즈비가 프론트 입구에서 두 명을 막았어요, 존.』 『나머지 한 명은?』 One Lost 라고 글자가 박힌 핸드폰을 흔들어대며 로건이 대답했다. 『놓쳤다네요.』 『그 사람에게 보너스 지급은 하지 말아요. 전직 모사드 요원치곤 실력이 영 꽝이군.』 어미가 새끼 고양이를 옮기는 요령으로 마이클의 목덜미를 붙잡은 존은 서둘러 자동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는 마이클이, 뒷좌석에는 로건이 허겁지겁 자리를 잡았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던 찰나 대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의 음영이 정면에서 어른거렸다. 사내는 매우 빠르게 움직였고 이어서 쾅쾅 대포 터지는 굉음이 들렸다. 가뜩이나 소리가 울리는 장소에서 총성이 반사되니 영화에서 듣던 것과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대형 폭죽이 코앞에서 날뛰고 있다는 감각이다. 대머리 사내의 손끝에서 노란 불꽃이 점멸했다. 운전대를 잡은 사내는 겁도 없이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자칫하면 사람을 자동차로 치겠다」걱정하던 찰나 존이 오른팔을 들어 마이클의 머리를 눌렀다. 『숙여요.』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아대던 괴인이 다이빙을 하는 자세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사람을 스치고 지나간 자가용은 출입구를 방향을 향해 그대로 질주했다. 『소, 속도를 낮춰요. 이러다가 벽에 박겠어요~!! 으다다다다~!!』 겁에 질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쨌든 존의 운전 실력은 제법 상당했다. S자 곡예를 보이고도 속도는 전혀 안 줄었다.
『당신 책 말입니다.』 『내 책?!』 『실제 사건을 취재해서 소설에 적용시켰죠?』 『어, 그, 뭐... 그런데 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마이클의 뒤통수를 향해 로건이 팔을 뻗었다. 『이 친구는 의외로 바보라서 자기 작품이 왜 인기가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존. 칼에 찔려도 죽지 않고, 쿵푸를 하는 여자 형사가 등장해서 과연 인기였을까? 그건 아니지. 실감나는 악당이 묘사되고, 억울한 피해자가 등장하고, 이를 끝까지 추격하는 자경단이 있으니 짜릿했던 건데 말예요. 게다가 설명되는 사건들 다수가 실제에 가까우니 현실감 쩔어주지. 마이클? 본인은 쓰레기라고 여겨도 자네 책은 무지 재미있다네.』 『그, 그래?』 『주인공 일케드가 경찰과 줄이 닿은 인신매매단을 파헤치는 이번 시리즈는 더더욱 근사하지.』 『어? 아직 아무에게도 내용을 공개 안 했는데 어떻게...』 로건의 얼굴 위로 슬그머니 자만심이 떠올랐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이 친구야. 나는 컴퓨터를 잘 만지는 천재야.』 결국 마이클의 노트북을 (불법으로) 해킹했다는 얘기다.
어느 정도 안전해졌다고 판단했던 걸까, 리무진에 탄 것도 아닌데 두 팔을 벌리고 다리를 꼬았다. 조수석에서 바라보았을 적에 그 자세를 취한 로건은 흡사 암흑가 최종 보스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게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는 거지. 조사한 내용을 기사로 작성하지 않고 그걸 낼름 소설 줄거리로 쓰다니, 자네도 참 이상한 사람이야, 마이클. 거기다 책에 실명까지 언급해? 그래서야 범인들에게 날 잡아다 죽이쇼~ 무릎 꿇고 비는 꼬락서니지.』 『교정 작업에 들어가면 다른 이름으로 바꿀 예정이었어.』 『아서라, 자네는 게을러서 나중에 바꿔야지 이러고는 금방 까먹잖아.』 로건이 앞좌석을 발로 툭툭 걷어찼다. 존과 마이클은 동시에「그만둬!」고함을 질러댔다.
Posted by 미야
2013/02/2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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