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
서가 정리를 시도하던 중에 가지런히 정돈된 책들 속에서 저 혼자 옆으로 벌러덩 드러누운 책 한 권이 눈길을 끌었다.
리스가 이랬을 리는 없다. 그는 못 말릴 정리벽이 있는 사내라서 통조림 라벨까지 모양을 맞춰 식료품을 찬장에 진열하는 버릇이 있다. 총기류는 또 어떻고. 벽장에 용도와 크기별로 보관된 각종 무기들의 모양새는 박물관의 디스플레이를 많이 닮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마트에서 구입해온 달걀에 연필로 1번, 2번 이러고 숫자를 적어놓고도 남는다. 다시 말해 범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핀치라는 얘기인데...
문제의 허름한 책을 손으로 집어 들고 나서야 기억이 살아났다.
표지 모서리가 뜯어져 나간 걸 발견, 풀로 붙여야지 이러고는 일이 바빠 그새 까먹은 거다.
『내 기억력도 한 물 갔군.』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1990년대 무렵에 인쇄한 알베르 까뮈의 문고판「페스트」다. 표지 상태는 상당히 나빴지만 상대적으로 속은 그럭저럭 괜찮게 보였다. 낱장의 이가 빠지지도 않았으며 곰팡이가 먹어치우지도 않았다. 책을 사랑하는 도서관 직원이 이를 발견했다면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대신 접착제와 두꺼운 도화지를 사용해서 상한 부분을 손봤을 거다. 마찬가지로 핀치도 같은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자리에서 빼뒀다.
『가만있자. 가위와 풀은 있는데 표지를 덧댈 종이가...』
그러면서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그게 실책이었다.
리스가 도서관으로 돌아왔을 적에 핀치는 책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자세로 책을 읽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제대로 된 조명이 없어 독서를 즐기기엔 주변이 많이 어둡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눈치다. 등이 눈에 띄게 구부정한 까닭은 상체를 숙여 코가 닿을 정도로 글자를 바짝 들여다보고 있어서다. 낱장을 넘기는 오른손의 동작은 오랜 세월동안 잘 훈련이 되어 한 치의 군더더기도 보이지 않는다. 활극 영화에 나오는 닌자가 목표물을 향하여 날렵하게 표창을 던지는 듯하다. 허나 손가락의 움직임만 제외하면 전체적인 그의 뒷모습은 나긋하고 부드럽고 퇴폐적으로까지 보인다.
이쯤해서 리스는 속눈썹을 꿈뻑꿈뻑 움직였다.
퇴폐적이라...
그 많고 많은 형용사 중에서 하필이면 그 단어가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게 핀치에게 과연 어울리는 말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는 더 이상 젊지도 않고, 군살이 여기저기 붙었고, 얼굴엔 주름이 졌고, 몸은 뻣뻣하고, 다리를 저는 바르지 못한 자세 탓에 체격이 뒤틀렸다. 패션 잡지에 흔히 등장하는, 그리스 조각처럼 근육을 키운 탐미적 모습의 모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따라서 핀치를 설명하려면 원숙미라던가, 고상함 같은 단어를 사용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만지고 싶다」생각이 간절해지는 걸 봐선 핀치에겐 치명적인 퇴폐미가 있는게 분명하다. 볼록한 허리를 따라 통통한 엉덩이 라인을 눈으로 정신없이 핥으면서「내가 아니라 핀치에게 문제가 있는 거야」생각했다.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십시오, 미스터 리스.』
심장마비에 걸리는 줄 알았다며 핀치가 펄쩍 뛰었다.
어느새 리스는 서로의 몸이 거의 닿을 정도로 근접해 있었고, 핀치가 느끼기에 존은 무슨 특별한 전송장치를 사용하여 나타난 것 같았다. 뭐, 엔터프라이즈호에서나 실용되고 있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못했으니 사람을 놀래 키려고 발자국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걸어온게 확실했다.
애도 아니고 말이지 - 비난하는 눈빛으로 쏘아봤음에도 리스는 실실 웃기만 했다.
책을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보다 곱절은 헤픈 웃음이다.
가만 보니 술 냄새도 났다. 인상을 찌푸리며 핀치는 코를 킁킁거렸다. 위스키다.
『술 마셨어요?』
『아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대답이었다.
완전히 망가졌던 시절의 리스는 급성 알콜 중독으로 죽어 보이겠다며 술병을 주머니에 넣고 살았다. 맨 정신을 유지하기가 싫어서 그랬노라 그 까닭을 설명했는데 굳이 이유를 붙이지 않더라도 노숙인들 전부가 술을 마신다. 한 겨울에 종이로 급조한 잠자리에서 눈을 붙이려면 술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 반대로 동사의 위험은 더욱 커진다.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러시안 룰렛 - 핀치가 처음으로 리스를 보았을 적에도 그가 입고 있던 코트에선 찌든 술 냄새가 진동했다.
『......?』
하지만 리스는 술을 그다지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그가 광적으로 집착하는 건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커피다. 오죽하면 싸구려 인스턴트 식품으로 가득찬 주방 찬장 맨 앞줄로 세 종류의 고급 원두커피가 채워져 있다.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리스가 가장 먼저 장만한 살림살이 또한 커피메이커, 주전자였다.
또한 가끔씩 기분전환을 위해 술집에 가도 혼자서는 잘 마시지 않으려 한다. 뉴욕에 거주하는 술친구가 딱히 없는 상황에서 이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덕분에 맥주를 사겠다며 핀치를 꼬드끼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불행하게도 내성이 거의 없는 핀치는 술친구 삼기엔 빵점이다.
『무슨 책을 읽고 있어서 제가 오는 것도 눈치를 못 채요? 핀치. 음?』
상체를 교묘하게 비튼 리스가 관절이 불거진 기다란 손을 뻗어 카뮈의 문고판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동작엔 책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거라기 보다는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약간의 동작만으로「거의 닿을 듯 가깝게 접근했다」에서「거의 뒤에서 껴안는 수준」이 되어버리는 걸 봐선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핀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는 책장이 있고 앞에는 고용인의 넓은 가슴이 있다.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어 꼼짝하기도 힘들다. 그 불편한 감정을 알면서도 리스는 핀치의 몸을 누르다시피 하며 천천히 책을 펼쳤다.
『훌륭한 사람, 즉 누구에게도 병균을 옮기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의 긴장을 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합니다... 페스트 증상을 다룬 의학서 치고는 그 내용이 매우 수상하군요. 의사들은 건강을 위해선 긴장을 풀여야 한다 강조하는 법이건만.』
『그거... 농담이죠?』
『당연히 농담입니다, 핀치.』
그의 입꼬리가 당겨 올라가는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정도로 사적인 공간이 결여되었다.
핀치는 팔을 뻗어 리스를 뒤로 떠밀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술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핀치는 존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취했음을 깨달았다.
『어느 쪽이죠?』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말이죠, 핀치. 어느 쪽이라뇨.』
『글쎄요... 존. 왜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하죠. 사람을 죽일 용기가 필요해서 술을 잔뜩 마시거나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 전에 술을 마신다고.』
『음... 그걸 묻는 거라면 둘 다요.』
『What?』
『있잖아요... 핀치. 로건 피어스, 그 녀석을 죽여도 될까요. 허락해주세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잖습니까. 안 됩니다!』
『그럼 살짝 손을 봐주는 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옥상에 거꾸로 매달아두고 싶은데요.』
『그것도 안 됩니다!』
모르긴 해도 조증의 IT 천재에게 된통 당한 모양이다.
분이 터졌는지 리스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거 알아요? 그 녀석, 손 버릇 무지 나빠요... 무지 나빠.』
『리스?』
『남의 엉덩이를 막 조물거리고...』
『뭐라고요?』
『제기랄, 덕분에 흥분했어.』
책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손이 급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