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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41)

기계가 번호를 보내오지 않았음에도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도 생길 수 있구나, 엉뚱하긴 해도 감탄을 금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애용하는 보드판에는 전문 사진작가가 북극에서 찍은 고래 사진이 한 장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리스는 사진 하단부로 보드마카를 사용해「흰수염 고래」라고 적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고른 사진 속 고래가 실은 밍크 고래라는 건 미처 모르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리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같은 걸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TV 시청조차 즐기지 않는다. 라디오 방송으로 스포츠 중계를 듣는게 전부 - 오프라 윈프리나 데이비드 레터맨 쇼가 뭔지도 모를 거다.

그래봤자 사람 얼굴을 찍은 사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핀치는 오류로 점칠된 정보를 일절 무시하고 - 리스는 자신의 행동이 일종의 장난으로 여겨진게 은근히 분한 눈치였다 - 흐릿한 바탕에 사람 인영으로 보이는 시커먼 그림자가 전부인 CCTV 캡춰 사진을 셀로판테이프를 사용해 추가로 그 옆에 나란히 붙였다.

할 말이 있다는 투로 빤히 쳐다보는 리스를 모르는 척하고 핀치가 안경을 고쳐 썼다.
결론, 자료랍시고 붙인 사진은 두 가지 종류 모두 쓸데없었다.

『좋아요, 천천히 따져봅시다.』
책상으로 돌아온 핀치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의 지휘자처럼 양손을 모두 들었다.
수수께끼의 이 남자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있다. 사망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킬링 체크-인 게임에 개입하여 장난감이 아닌 진짜 총으로 사람을 쏘고 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다친 사람만 나왔지만 멀잖아 사망자가 나오리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하여 사건 성격상 핀치는 이 남성의 정보가 FBI쪽으로 넘어갔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여전히 흰수염 고래 사나이는 무탈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 소거법을 사용해볼까요, 미스터 리스. 그럼 첫 번째...』
『기계의 하드웨어에 문제가 생겨 작동이 불완전하게 되었다.』
리스는 그의 고용주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예의 주장을 다시 꺼냈다. 이른바, 정교한 기계가 그만 더위를 살짝 잡수셨어요 - 라는 얘기다.
투덜대며 뺨에 바람을 집어넣는 고용주를 향해 리스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압니다. 당신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며 단정하여 말하겠지요, 그렇지만 말예요. 나는 기계에 대해 자세한 걸 모릅니다. 핀치, 당신이 많은 부분을 나에게 솔직히 말을 해주지 않고 숨겼기 때문이에요.』
애매한 뉘앙스의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리스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허나 그가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자 몸서리치게 만들던 냉기는 흔적도 없이 조용히 물러갔다.
『매우 건강한 사람도 가볍게 감기를 앓곤 하잖습니까. 잘 만들어진 기계 장비라는 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노후화 되면서 각종 문제가 생길 겁니다. 아무리 좋은 노트북도 5년이면 고물이 되잖아요. 어쩔 수 없이 엔지니어들이 그때마다 문제가 생긴 장치를 새 것으로 재빠르게 교체를 해줘야 할텐데 요즘 미국 경기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나사 과학자들까지 실업자로 전락하는 마당에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SSN 번호만 뽑아내는 기계에 거금의 예산을 투입하긴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워싱턴 DC에서 관련 예산을 삭감하라 지시했다고 가정하면...』
이쯤해서 핀치가 손바닥을 펼쳐 일단 멈추시오 싸인을 보내왔다.
『기계를 위해 나사의 예산을 삭감한 겁니다, 미스터 리스.』

몰랐던 얘기다. 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이를 설명하는 핀치의 표정도 썩 편치는 않았다.
『언론은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폐지가 금융위기와 재정난 탓이라고 설명하지요. 하지만 진실은 달라요. 우주왕복선의 1회 발사 비용은 평균 15억달러(1조6,000억원)입니다. 정부는 차라리 이 돈으로 재사용 궤도선을 근거리 우주로 날려 보내는 대신 테러를 방지하는데 도움을 줄 기계를 운영하자고 결정했어요. 인류의 꿈과 희망을 팔아 안전을 구입한 겁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히, 우주왕복선.

보다 먼저 기운을 차린 건 핀치 쪽이었다.
『그럼 두 번째 가정으로 넘어가보죠. 소프트웨어이든 하드웨어이든, 기계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흰수염 고래」를 파악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기계는 사전에 계획된 범죄만 감지한다. 그래서 홧김에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하거나, 과도하게 어린애를 흔들어 영유아 돌연사를 일으켰다거나, 교통사고, 비행기사고 등등에 대하여선 감지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 모두 여섯 명이 총에 맞았는데 이는 사전에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모두 우발적 충동 범죄였다는 겁니다. 모조리 우연에 불과한 것으로 어쩌다보니 총 맞은 사람 전부가 킬링 체크-인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거구요.』
그런게 과연 가능한가. 우연이 중첩되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억지다.
하여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며 핀치는 세 번째 손가락을 접으며「다음 가정으로 건너뜁시다」말했다.

『해당 SSN이 관련 정보 부서에 통보되는 프로트콜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봅시다.』
『연방수사국 후버빌딩 1층으로 번호가 도착했는데 책임자가 일부러 묵살했다는 건가요.』
『또는 필연적으로 묵살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미스터 리스.』
『글쎄요... 그들은 해당 SSN의 인물이 이미 사망한 것처럼 나왔다고 해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역시 묘지에 묻혀 있던 테레사 휘태커를 살아있는 모습으로 찾아낸 적이 있잖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었다면 그쪽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막대한 자원과 조직력으로 더 훌륭하게 처리하겠죠.』
사망자, 혹은 위장 사망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상대가 여행을 온 외국인이었다면 어떨까.
이번에는 핀치가 도리질을 했다.
『내국인 테러행위만 적발이 가능했다면 기계는 반쪽 불량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스. 행정력이 있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모양과 형식은 달라도 자국의 시민에게 식별이 가능한 숫자 코드를 제공합니다. 관광객으로 위장했다고 놓치는 일은 없습니다.』

이제 리스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다 틀린 건반을 누른 피아노 연주자처럼 양손을 어지럽게 흔들어댔다.
『OK. 슬슬 알 것 같네요.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겠죠. 교통신호를 무시한 차량을 붙잡아 세웠는데 주차위반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았어요. 교통 경관이 왜 그랬을까요.』
『외교관 차량이어서?』
『상대가 똑같이 경찰관이었다는 가설은 어떻습니까.』
『오.』
핀치는 두 눈을 깜빡였다. 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떴다.

Posted by 미야

2012/07/19 21:40 2012/07/1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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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40)

이야기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져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점심으로 먹은 치즈버거가 아무래도 문제를 일으키는 듯했다. 배가 살살 아팠다.
그렇기는 해도 카터 형사가 이마를 찌푸린 건 소화기관의 아우성 탓만은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대놓고 총질한 혐의로 멍청한 놈팽이 하나를 신나게 잡아놨더니 자기가 가지고 있던 건 페인트탄이 장전된 애들 장난감이었다고 우겼다. 그 장난감 총은 그럼 어디다 곱게 모셔두었느냐 추궁했더니 어렸을 적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력이 나빠 잘 모르겠단다. 자기가 총을 쏘았다는 걸 보았다는 목격자도 있다 으름장을 놓았는데 아뿔싸, 기껏 확보한 목격자가 저 사람이 맞는지 안 맞는지 헷갈린다고 딴 말을 시작했다. 거기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흉기가 안 나왔다.

『화약잔류 테스트는요.』
『양성이었어요, 후스코.』
『제가 맞춰보죠. 전날 사격장에 다녀왔다고 하죠?』
『아니면 슈퍼마켓을 털었을 수도 있죠.』
『호오, 전과가 있는 놈인가요?』

후스코가 그녀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자기 책상 서랍을 열고 닫았다.
그는 컴퓨터 암호를 포스트잇에 적어 서랍 안쪽에 붙여두고 있다. 참으로 확실한 보안 태도이다. 게다가 문제의 책상 서랍에 열쇠도 안 채운다. 본인 말로는 서랍 안엔 필기구 외엔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다고 했다. 중요한 사건 파일을 복도에 흘리고 다닐 것만 같은 사람이다.

카터는 어느날 갑자기 전근을 온 그를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일단 소문이 좋지 않았다. 체포된 불량배 몇 명이 그를 알아보고 더러운 부패 경찰이 어쩌고 저쩌고 말을 흘렸다. 카터에게 조심하라 사적인 언질을 준 동료도 있다. 뇌물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의 전 파트너 스틸스는 생사도 모르는 채 행방불명이다 등등의 이야기가 추가로 더 흘러 들어왔다. 같은 경찰관 입장으로 뒷조사는 불가능했어도 카터는 후스코를 경계했다. 그가「우리가 같이 일한지도 꽤 되었잖아요. 친한 사람들은 저를 라이오넬이라고 불러요. 형사님은요?」물어봤을 적에 냉랭한 목소리로 함부로 이름 까지 말라 주의를 주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뭐, 정작 후스코는 그녀의 싸늘한 태도를 싱글 맘인 직장 동료가 이혼 경력이 있는 싱글 대디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으로 이해한 듯했지만...

카터는 짐짓 시선을 들어 후스코를 쳐다보았다가 보고 있던 자료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잡범이에요. 주차된 차량에서 오디오를 훔치고 빈집털이를 하고... 에스컬레이터(* 좀도둑이 갑자기 강도 살인을 벌이는 걸 일컬음)를 할 녀석으로는 안 보이지만 사람은 항상 예상이라는 걸 뛰어넘는 법이죠.』
『골목길에서 강도질을 꾸민게 잘못된 것 같습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본인은 강도가 아니라고 일관되게 우기고 있잖아요, 카터. 게다가...』
무슨 영문에서인지 병원에서 깨어난 피해자마저 입을 다물었다.
구체적으로는「충격을 받아 상세한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누가 나에게 총을 쏘았는지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했다나.
후스코는 이런 건 좋지 않아, 좋지 않아 혼잣말하며 체중을 의자 등받이에 실어 속칭「앉은뱅이 기지개」를 켰다. 낡은 스프링이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굉음을 냈지만 두 다리를 쩍 벌린 채 고개를 뒤로 젖히는 동작을 멈추지는 않았다.
『상황이 별로네요. 그죠?』
하여간 얄미워 죽겠다.

리스는 도와줄 수 있다, 없다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았다.
솔직히 카터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생리주기에 휩쓸려 답지않게 우는 소리를 해봤을 뿐이고, 쌓이는 업무 스트레스에 불평을 늘어놓았던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카터는「당신네들 능력으로 사라진 증거를 찾아줬음 좋겠어요」직설적으로 부탁하는 부끄러운 짓은 절대 안 했다.
그런데 은근히 그가 전화를 걸어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사실이다.
「형사님, 익명으로 신고할게 있어요.」
이렇게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약해졌다, 예전의 나는 이렇지 않았는데 - 씁쓸하게 웃으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슬슬 붙잡아둔 용의자를 풀어주어야 할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안녕하세요, 카터 형사님. 지금 형사님 책상으로 올라간 사건과 관련하여 좋지 않은 소식과 더 좋지 않은 소식이 있어요.》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리의 미스터 수트가 아니고 안경을 쓴 교수였다.
《어떤 소식을 먼저 들으실 건가요.》
교수는 차분하게 - 혹은 감정을 배제한 채 그녀의 의견을 구했다.
카터는 정말로 배가 아팠다. 으, 어쩌면 이건 망할 치즈버거 탓이 아니고 생리통일지도.

『잠깐만요. 보통은 좋지 않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잖아요.』
《보통은 그렇죠.》 
『저는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다고요.』
《유감이지만 불가능합니다. 지금 선택이 가능한 건 좋지 않음, 그리고 더 좋지 않음 두 가지밖에 없거든요.》
주먹으로 벽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넘기고 카터는 가까스로 대꾸했다.
『하아... 좋아요, 그럼 좋지 않은 소식부터요.』

전혀 미안해하는 구석을 보이지 않으며 핀치가 말했다.
《용의자를 잘못 체포하셨습니다. 그를 풀어주세요. 그 사람은 더스틴씨를 총으로 쏘지 않았습니다.》
장소와 통화 내용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뭐라고 떠들었느냐 버럭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카터의 눈이 충혈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를 훔쳐보고 있는 후스코는 그녀가 아들이 다니는 학교 생활지도부 상담사로부터「댁의 자녀분이 왕따를 당하고 있어요」내용을 통보받았다고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카터는 눈치껏 벽을 향해 돌아서며 휴대폰을 부러져라 움켜쥐었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어요.』
《압니다.》
『그런데 범인은 아니라는 건가요.』
《그는 정말로 장난감 권총만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총격 사건이 벌어지자 겁을 집어먹고 갖고 있던 장난감 총을 빗물 통로에 버렸어요.》
『그걸 왜 치운다는 거죠. 그건 자기가 사람을 쏘지 않았다는 직접적인 증거물이잖아요.』
《병원에 실려간 피해자가 아는 내용이 없다 입을 다문 것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무슨 이유요.』

핸드폰 저편에서 핀치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쯤해서 형사님, 제가 보다 좋지 않은 소식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핀치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 그러나 흡사「영주님이 방금 운명하셨습니다」소식을 고하는 듯이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예의 킬링 체크-인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억하시죠? 당국에서 불법으로 금지한 길거리 서바이벌 게임이오. FBI는 게임을 주관하던 오너, 자칭 사탄을 체포하고 케이스를 종결시켰습니다만... 아쉽게도 게임은 끝나지 않았어요. 누군가 서버를 열었고, 다시 킬링 체크-인 게임을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문제인데... 질이 매우 좋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형사님도 이 남자 이야기에 대해선 아실 겁니다. 그 사람은 장난감 페인트 탄이 아니라 실제 총을 들고 게이머들 틈새에 몰래 끼어들어 사람들을 일부러 다치게 하고 있지요. 양상으로 보아 우린 이 범인이 곧 FBI에게 체포될 거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와 통화를 하고 있던 건 핀치 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부터 우린 그 사람을 흰수염 고래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카터.》
갑자기 리스 목소리가 튀어나와 카터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것보다 흰수염 고래라고?!
『뭐라고요?』
반문하던 목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구석에 몸을 감추고 카터를 훔쳐보던 후스코는 그녀의 아들 테일러가 학교 라커룸에서 치어리더와 키스하다 걸린게 맞다고 확신했다.

Posted by 미야

2012/07/18 16:11 2012/07/1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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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39)

세상에는 도움을 거부하며 망가진 채로 있는 사람들도 있다.
「저도 그런 사람을 좀 알죠.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까 남의 도움을 받는 대신 벌을 받아야 할 것 같았대요. 그래야 공평하다고요. 어때요, 당신도 그런 종류의 사람인가요?」
리스는 경찰서에서 맨 처음 카터 형사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정확히 같은 대사를 흉내내어 읊었다.
『당신도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까.』

상대는 큰 혼란에 빠진 듯했다. 표정으로 봐선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 제3세계 난민처럼 보였다. 그리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땟국이 줄줄 흐르는 행색 또한 난민을 연상시켰다. 그가 입은 셔츠와 바지는 최소한 6개월 이상 비누와 물 구경을 못 해봤다. 악취는 당연히 코를 찔렀다.
『무슨 종류?』
이라크에 다녀왔던 군인 - 현재는 무직 - 넝마주이가 된 예레미야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내가 벌을 왜 받아야 허우?』

그의 이름은 예레미야다.
물론 당연히 본명은 아니다. 평소 횡설수설해 하는 그를 일컬어 주변에서 우스개 소리로 예언자라고 부르곤 한다.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데 원인은 놀랍게도 두부 총상에 의한 후유증이다.
아, 실례. 총상이라고 하기는 좀 그런게 그의 머리에 박혔던 건 실제로 총알이 아니고 폭발로 날아간 동료의 정강이뼈 파편이었다. 음속으로 튄 작은 뼛조각이 하필이면 그의 머리를 휘젖고 망가뜨린 것이다.
뼛조각이 워낙에 미세해서 다행히 예레미야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로부터 그는 온전한 제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수시로 유령들과 말을 나누게 되었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령한 음성을 들었다.
이를테면 43번가 주택가 골목의 쓰레기통을 뒤지면 누군가가 버린 총이 나타날 것이다 - 너는 그 즉시 총을 들고 사람 많은 장소로 내려가 야훼의 말씀을 선포하라 - 대략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니느웨(고대 앗수르의 수도이자 상업도시)의 멸망이 목전에 임박한 가운데《회개하라! 너희는 모조리 흰수염 고래에게 잡혀 먹힐 것이다!》라고 담대히 선포하였다.

《니느웨에 고래... 그건 예레미야가 아니고 요나잖아요.》
『저 사람에겐 디테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핀치.』
두 팔을 가볍게 벌려「나를 쏘지 마시오」의사를 표현한 리스는 예레미야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그와의 거리를 약간 좁혔다.
곤란하게 되었다. 그가 쥐고 있는 글록의 안전장치가 풀려 있다.

《대화를 해요, 리스. 그와 대화를 해보세요.》
핀치의 요구에 리스는 난감함을 느꼈다. 악당들의 쓸개골을 망가뜨리는 일을 수행함에 있어 쌍방간 대화는 그다지 필요가 없다. 눈짓하고, 움직이고, 바닥에 쓰러뜨린다, 끝. 상대의 감정에 호소하거나, 감언이설로 설득하는 일은 그다지 잘 하는 편이 아닌데다가 해본 적도 많지 않다.

예레미야가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혓바닥이 모래를 핥기라도 한 것처럼 까끌거렸다.
『총을 바닥에 내려놓으세요.』
핀치가 엿듣고 아우성을 쳤다.
《그건 대화가 아니고 명령이잖아요! 미스터 리스.》
『핀치? 조용히 하세요. 그리고 예레미야? 총을 바닥에 내려놓으세요. 당신은 누군가가 다치길 원하지 않아요, 내 말이 맞죠?』
『이상한 사람일세.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내가 사람을 헤친다는 거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그는 권총을 흉기로 인식조차 못 했다. 예레미야의 눈이 커졌다.
『나는 사람을 헤치지 않소.』
『하지만 당신은 총을 들고 있잖습니까.』
『총? 그건 먼 과거의 일이오. 그리고 나는 그 일에 대하여 이미 댓가를 치렀소.』

세계는 이미 붕괴하였기에 그 폐허의 파편 속에서 발버둥을 친다는 건 전부 무의미했다. 다시 적응해야 할 세계따윈 없었다. 다시 붙잡아야 할 세상도 없었다. 삶의 가치, 마주잡을 손, 살아갈 이유, 타인의 체온... 예레미야는 그 전부를 바람에 실어 날려 보냈다. 그리고 멸망한 세상에 홀로 남아 싸늘한 유령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머리를 뉘였다.
『육신은 늙고 병들었소. 힘들고 괴롭지. 그래도 난 불평따윈 하지 않아.』
그리하여 한 인간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댓가는 정당하게 치러졌다.
『나는 핏값을 전부 치렀소. 그러니까 나는 자유요.』

저승에 속한 예언자는 다시금 타락한 도시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오른손에 쥔 글록을 위태롭게 흔들어대면서 무지몽매한 인류를 향하여 설교했다.
『담배를 피우면 싫든 좋든 폐가 나빠지게 되어 있지. 담배를 끊으시오. 어서 끊으시오!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자주 먹으면 싫든 좋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오! 성인병과 비만으로 고통 받기 싫다면 야채를 섭취하도록 하시오! 비타민을 먹으시오! 만약 비타민을 먹지 않는다면~!!』
예레미야의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흰수염 고래가 머지않아 너희를 심판하리라! 아멘, 아멘!』

핀치와 리스는 나란히 궁금증을 느꼈다.
《왜 하필이면 흰수염 고래인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핀치. 혹시 고래가 도시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에 대해 알아요?》
《바다에 사는 고래가 도시를 멸망시킬 정도로 그렇게 재주가 뛰어났던가요. 것보다 리스 씨, 저 권총이 살인 사건의 중요한 증거물이니 돌려달라 설득을 하여야 합니다. 앞으로 2시간 내로 증거물이 확보되지 않으면 카터 형사가 붙잡은 용의자가 풀려나게 되요.》
『압니다, 알아요. 하지만 저 사람은 증거물을 모세의 지팡이로 착각하고 있다고요.』

갑자기 예레미야가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내며 리스에게 질문했다.
『난 봤다. 당신, 지금 누구와 속닥속닥 이야기를 하는 거요?』
리스는 여전히 두 팔을 벌린 안정적인 자세를 취한 채 대답했다.
『들켰군요.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눈 상대는 내 오른편 어깨에 앉은 천사입니다.』
예레미야의 표정이 어린애처럼 밝아졌다. 목소리도 어린애처럼 높아졌다.
『천사! 천사라고?! 아, 천사구나. 나도 그와 대화할 수 있을까?』
리스는 거부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그는 내 천사이지 당신의 천사가 아니니까요.』
『쳇. 뭐여... 치사하게.』
『실망시켜서 미안합니다. 천사와 대화하기 위해선 특수한 장비가 필요해요. 그리고 이 천사는 뭐랄까... 고집이 강하고, 추측이 되질 않고, 낯을 가리고, 성격도 좀 이상하거든요. 직접 말을 나눠봤자 당신이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를 거예요. 오, 잠깐만요. 핀치... 이건 그냥 비유라고요. 흥분하지 마세요.』
『그렇군. 천사 이름이 핀치입니까?』
『진짜 이름은 아니지만 나는 그를 핀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양반... 자기가 왜 괴짜냐며 펄펄 뛰고 있어요, 아, 기다려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예레미야. 저에게 그 이유를 알려줄 수 있습니까? 천사가 무척 궁금해 하는게 있는데요. 어째서 흰수염 고래입니까?』

예레미야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즉답했다.
『그는 고래 로고가 인쇄된 스포츠 가방을 들고 있었소. 머리는 짧았지만 수염을 지저분하게 길렀지. 수염 색깔이 가로등 아래서 하얗게 보였다오. 천사님께 말하쇼, 그가 위험한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렸소.』
찰나와 같았자먼 그 사실을 고하는 예레미야는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제정신으로 보였다.

Posted by 미야

2012/07/17 15:59 2012/07/1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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