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에게서 별도로 연락이 온 건 없었다.
개의치 않고 리스는 습관처럼 림보로 향했고, 짐작했던 바 그대로 도서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리스는 쥐고 있던 테이크 아웃 커피를 일단 핀치의 작업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황동 장식이 달린 옷걸이에 대충 걸어 놓았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다.
그러나 핀치는 전직 CIA 요원 모르게 순간 이동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핀치가 애용하는 사서 전용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손가락을 삼각형으로 모은 리스는 속으로 숫자를 다섯까지 세었다. 하나, 둘, 셋... 림보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리스는 살짝 실망감을 느꼈다.
어쩌면 핀치는 양치질을 끝마치고 마른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는 중일 수도 있다. 시계는 이제 오전 7시 10분을 가리켰다. 그만하면 이른 시각이다. 물론 그들의 삶이라는게 규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일반인의 생활패턴 공식에 대입하여 추측하는 건 쓸데없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부짖는 자명종과 씨름 중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일찍 문을 여는 다이너에 앉아 좋아하는 에그 베네딕트를 주문했을 수도 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일 수도 있으며, 이웃집 강아지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중일 수도 있다.
리스는 손톱으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신경질적으로 톡톡 쳤다. 말 그대로 상상은 자유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추측도 사실은 아니었다.
욕구불만 비슷한 것을 느끼며 맨 앞에 놓여진 자판의 엔터키를 검지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대기 화면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화면으로 모양이 바뀌었다.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관리자 로그인 암호는 특수부호를 포함하여 모두 여덟 자리의 글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핀치는 주기적으로 암호를 갱신한다. 뿐만 아니라 제3자의 접속 시도를 탐지하기까지 한다. 어깨 너머로 훔쳐본 암호를 외워뒀다가 시험 삼아 입력했을 적에 - 당연한 얘기지만 유효하지 않은 접속이라며 경고 메시지가 떴다 - 낯빛이 달라진 핀치가 꾸중하는 태도를 취하며 도서관 안으로 불쑥 걸어 들어왔던 적도 있다. 엑서스 거부시 시스템은 핀치의 핸드폰으로 알림 메일을 자동 발송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제불능의 편집광은 오류 입력이 3회가 넘으면 하드 드라이브에 자기 파괴 바이러스가 설치되게끔 카미카제 세팅까지 해뒀다.
「신중해야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미스터 리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순간 과전압 유입으로 기계를 토스트처럼 바짝 구워버리는 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지금 그가 테이블 아래로 허리를 굽혀 보고 있는, 어른 주먹 크기의 네모난 검정 박스가 바로 그 흉악한 임무를 맡았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 디자인은 염두에 두지 않은 탓에 단추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특대 사이즈의 레고 블록처럼 보였다 - 시퍼런 번개가 번쩍일 거다.
「전부 파괴되는 겁니까.」
「네.」
「도서관에 불도 지를 기세군요.」
「필요하다면요.」
책을 그렇게나 사랑하는 남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쉽게 나올 줄을 몰랐다.
인류문화의 보고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넉 달과 일곱 밤낮을 불타오르는 걸 지켜보던 광신도 칼리프 우마르야 아무렇지도 않았겠으나 핀치는 휘날리는 재와 티끌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아니, 제정신을 유지하기는커녕 이미 살아있는 몸이 아닐 것이다.
리스는 그 점이 염려스러웠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핀치는 그게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필요하다면, 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스터 리스.」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머지않았을 수도 있다는 식이었다.
「것보다 당신이 실수로 이곳을 날려버리는게 먼저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무기고를 정리하고 수류탄은 제발 다른 곳으로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수류탄이 아니라 소음탄인데요.」
「어쨌든 핀을 뽑으면 터지는 거잖아요.」
그런 대화가 오고 간지 벌써 2개월...
격정을 닮은 충동이 일어 무작위로 키보드의 자판 하나를 꾹 눌렀다.
예상 외로 컴퓨터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3분이 더 지나면 오전 8시 정각이 된다.
h a r o l d w h e r e a r e y o u n o w
그의 보스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림보는 고요하다.
컴퓨터는 묵묵부답이다.
차가운 물이 목 부근까지 차올랐다는 감각에 리스는 진저리를 쳤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