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가 워프를 해야 정상입니다만, 애초부터 시간의 순서따윈 무시하고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귀차니즘에 굴복하야 37번으로 표기합니다. 내용은 9번, 10번과 연결되지만 리스가 고민하는 내용은 40번대 이후로 넘어가야 나옵니다. 그니까니 내용이 진작부터 엉켰다니까효.
미치광이의 나라 엘리스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러나 갈수록 의식은 흐려졌다 또렷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시간의 흐름은 왜곡되곤 했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흑과 백이 동전의 양면처럼 간단하게 뒤집혔다. 엘리스는 어둠을 노려보았고, 다시 빛을 노려보았다. 영원을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는 갈기갈기 찢어져 보잘 것 없는 먼지와 다를 바 없는 잔해를 남겼다. 눈꺼풀 안에서 혼란된 혼돈은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악몽과도 같은 감옥, 오늘도 여전히 그녀는 보이지 않는 줄로 병상에 결박된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당신 면상, 역겨워.』
그의 이름은 존이다.
의사는 아니다. 그는 의사 가운을 입지 않았다. 넥타이를 매지도 않았다. 의사와 같은 행동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오늘은 기분이 어때, 엘리스?」이러고 친근하게 묻지 않는다. 솔직히 엘리스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알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는다. 모두 지옥으로 꺼져버렸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그 이전에 몸을 움직여 뒤돌아 눕고 싶었다. 감정을 담아 쳐다보는 시선이 싫었다.
『미안. 이런 얼굴이라.』
존은 파리하게 수염이 자란 뺨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 동작이 꼭 세수라도 하는 것처럼 보여 엘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 안색이 나쁘네. 그렇다고 내 앞에서 불쌍한 척 유세를 떨기만 해봐. 힘껏 저주할테니.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망자의 계곡으로 함몰되었던 기억이 일부 돌아왔다.
- 아, 그래... 제이크가 죽었구나. 저 남자가 제이크를 총으로 쏴서 죽였다고 말했어.
다시금 혼란된 혼돈이 찾아왔다.
- 아니다. 이제 그가 내 오빠의 유언을 말할 차례이다.
〈사랑하고 있다, 이 말을 누이인 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받았다.〉
과거의 일인가, 아님 현재의 일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인가.
뇌가 스펀지로 변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엘리스는 끙끙거리며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붕괴의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글세...』
존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얼굴은 자주 봐왔다. 아끼던 게임 CD를 망가뜨렸다고 제이크가 고백했을 적에도, 여자 친구가 화가 많이 났는데 화해를 하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겠으냐 조언을 구했을 적에도, 미성년인 여동생에게 마리화나 피우는 걸 들켰을 때에도... 맙소사. 전신 마비 환자 앞에서 이게 무슨 지랄이야. 엘리스의 파란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그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다지. 그건 잘못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귀여운 강아지를 실수로 차로 치어 죽이기라도 했어?』
『아니.』
『그렇군. 강아지는 아직 무사한 거군. 괜찮아, 말해봐. 나는 당신의 죄를 죽어도 용서하지 않을테니 비밀을 말해도 괜찮다고.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딴 거 없거든? 그러니까 속 시원하게 털어놔. 보답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줄게.』
욕을 퍼붓겠다는 말에 남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실수하는 거다. 지금 그의 행동은 현명하지 않다.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뒷꽁무니 빠지게 도망쳐, 불운한 처지에 놓은 소녀를 상대로「나, 지금 무지 겁 먹었어」고백하는 건 누가 봐도 넌센스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상냥한 위로가 아니다. 지혜로운 충고 또한 아니다.
술에 잔뜩 취해 주먹으로 흠씬 두둘겨 맞고 싶다고나 할까.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와 마찬가지일지언정,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이 한탄스럽다. 존은 다시금 손바닥을 들어 거칠어진 뺨을 문질렀다.
『내 소중한 사람이 위험에 빠졌어.』
『그게 당신을 두렵게 하나.』
『두려워.』
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 사람을 위험하게 만든게 바로 나니까.』
그리고 창피스러워 아무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진실된 사실을 꺼내놓았다.
미치광이 나라의 엘리스가 기침을 터뜨렸다. 아니, 탁한 기침을 닮은 웃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여왕은 아마 깔깔 웃었으리라. 하지만 이내 호흡이 곤란해졌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녀의 몸에 매어달린 각종 기계들이 경고의 의미로 붉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존은 위치를 바꿔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간호사를 부를게.』
『꺼져. 당신, 역시 역겨워.』
『엘리스. 숨 쉴 수 있어?』
대답할 기력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엘리스는 오로지 한 가지만을 염원했다.
저 화약 냄새 진동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벽을 향해 돌아눕고 싶었다.
영혼을 댓가로 걸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였으리라.
그러니 악마는 어서 오라.
그녀는 서명하리라.
잠시 붙이는 이야기 : 누구는 리스를 예수님(카비저스?)으로 보았지만 누군가는 그를 악마와 계약해서라도 면상을 안 봤으면 하는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야기가 엉뚱한 순서로 붙어버렸는데요... 워쨌든 엘리스를 만나러 간 리스는 패닉 상태였다는 거. (웃음)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