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처 사람들도 잘 모른다. 인버스 포도주 상회의 실질적인 주인은 남작이 아니라 바로 리나 인버스, 그의 첫째 딸이라는 건 말이다.
하긴, 아무도 안 믿을 거다. 억만금을 주물러대는 실세가 타들어가는 저녁 노을의 머리카락을 가진 열 여섯의 애띈 소녀라고 하면 바로 치고 나올 소리는「그거,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
그러나 그것이 한 점 틀리지 않은 진실이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책망하는 목소리로「아빠-」를 외친 그녀가 바로 마다스의 손인 것이다.

어려서 장난감 대신 주판알을 튕긴 천재.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는 질문에「돈이 최고 좋아!」라고 당돌하게 대답한 아이.
침대 머리맡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대신 현금 출납부에다 빨간 밑줄 두 개를 긋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소녀.
모친 사망 이후 싫든 좋든 인버스 가의 마님이 되어버린 조숙한 숙녀.
장래 희망은「인류 최강의 부자」이며, 꿈은「금화로 가득 채운 방에서 헤엄치기」.

『아빠- 자그만치 서른 여섯이나 된다고요. 우리 집 침실 사정으론 이들을 모두 지붕 있는 곳에서 재울 수가 없어요. 후작님이랑 수행원 약간 명에게만 침대를 제공하고 나머지 인간들은 야외로 굴려야 해요. 그러니 당연히 텐트를 준비해야지요. 하룻밤이라 할지언정 적어도 밤 이슬을 피하게는 만들어줘야 불평이 나오지 않을 거 아녜요.』
『그렇구나!』
『그럼 주방쪽 지시는 제가 내릴테니까 텐트 문제는 아빠에게 부탁드릴게요.』
『알았다.』
『아참! 토마스에게 일러서 당장 목욕물 준비부터 하라고 하세요. 법 먹기 전에 일단 기사들의 땀냄새 나는 겨드랑이를 씻겨야...』
『어, 토마스는 지친 말에게 먹일 건초더미를 추스르러 나갔는데.』
『그럼 헉슬에게 말해두면 되겠네요. 야니에게는 목간통을 찾아오라고 하세요. 우리한테 그렇게 많은 목간통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면 쓰다 남은 포도주통이 네 눈엔 뭐로 보이느냐고 혼내키세요. 그게 끝나면 침대 시트를 있는대로 긁어다가 손질하도록 지시하시고요. 줄리에게는 마을로 내려가 품삭은 넉넉하게 줄 터이니 임시로 잔심부름을 할 사람을 너다섯 명 끌고 오라고 시키고...』
줄줄 나온다, 줄줄 나와.
이 똑똑한 딸네미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누. 남작은 감격해서 딸을 손을 잡았다.
『네가 최고다, 얘야.』
『당연한 말씀을.』
겸손의 미덕 따위는 화톳불에 오란도란 구워먹고 그렇게 대답하는 리나 인버스였다.

『아자자자! 내 팔뚝 굵다아~!』
식구들의 안녕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죽도록 몸과 머리를 굴려주마.
남작의 영애답게 꽃단장하는 건 포기. 파이팅을 외치고 감자푸대를 들었다.
무겁지 않았느냐고? 식은땀 나도록 당연히 무겁다.
하지만 그놈의 감자푸대가 후작의 잘난 머리통이라고 생각하면 못 끌고 갈 것도 없다.

『에취-』
아마 그 덕분이었나 보다. 저주의 굿판 탓으로 그레이워즈 후작이 가볍게 재채기 했다.
『응? 뭣 때문인지 몰라도 갑자기 뒷 목덜미가 서늘해지는군요.』
『괜찮으십니까.』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되어 두 다리를 쭈욱 뻗은 후작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며 손사레를 쳤다. 재채기 정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이쪽이 되려 피곤해진다. 감기도 아니고, 몸살도 아니며, 악마에 씌인 것도 아니다. 나이 지긋한 하녀가 가지고 온 차가운 음료수로 손을 뻗다 말고 그래서 입술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찾아봤습니까, 죠르프.』
저것은 보물 지도나 비밀의 방 얘기가 아니다.
인버스 가의 아들, 그러니까 여전히 이름조차 불명인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긋이 턱을 괴였다. 이렇게 평안히 눈을 감으면 보인다. 아마 지금쯤 열 여섯의 꼬마는 덜덜 떨며「유모, 나 어떻게 해!」라고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그 작은 머리가 제대로 움직인다면 자신의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렇다, 위기사항이다. 소년은 궁지에 몰린 쥐였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통례상 귀인이 방문하면 저녁 만찬 자리가 마련된다. 그 자리엔 집주인과 그의 아내, 아울러 상속인이 참석을 하게끔 되어 있다. 메인 요리를 손님들 접시로 하나하나 옮기는 것이 집 주인의 할 일이며, 손님은 훌륭한 대접에 대해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내는 걸 잊으면 안된다. 이에 화답하여 유려한 궁중 화술로 손님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여주인의 몫, 반대로 겸손의 미덕으로 침묵을 지키며 포도주를 손님 잔에 채우는 것이 상속인의 할 일이다.
물론... 이쯤해서 후작은 가볍게 콧김을 뿜었다. 그 아들의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니 법적 상속인 자격은 아직 없을 터. 그렇다면 만찬 전이나 후에 간단히 인사를 하러 내려오는게 일반적인 관례이다.
좋다 이거야, 인사를 한답시고 얼굴을 내밀면 그 자리에서 똑바로 쏘아봐주지. 그리고 마음껏 이죽거릴테다. 대 귀족의 얼굴로 손을 올리고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봇장 좀 보자구. 절룩거리며 밖으로 기어나가는 꼴을 반드시 본다. 시골 촌뜨기가 선보이는 외발 기러기라는 걸 즐겁게 감상하겠다.

젖 비린내를 풍기는 소년이 당혹감에 눈물을 쏟아낼 걸 상상하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이 집의 자제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만나는 봤나요.』
그래서 후작의 목소리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무척이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그게 말입니다요. 각하.』
반면 죠르프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기가 죽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겁을 먹고 어딘가로 숨어버렸나 보군요. 그대의 얼굴을 보아하니 말입니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기웃거려도 숨소리 하나 안 들립디다~ 그렇게 말하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내 말이 맞죠? 죠르프.』

아닌데요, 하고 죠르프는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은 그보다 더 심각한 이야길 들었다.

「누구요? 도련님? 우리 집엔 도련님이라는게 없는데요.」

기분 나쁜 땀으로 손바닥은 축축하다. 죠르프의 고개가 바닥 아래로 꺼졌다.
멀리 여행을 갔다더라, 내지는 갑작스런 두통을 호소하며 앓아 누웠다더라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없댄다. 아예 없댄다! 이 집에는 XY의 염색체를 가진 아들이 없단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후작 각하! 제르가디스 도련님의 뺨은 도대체 누가 갈긴 건가요. 지나가는 산들바람이었나요, 아님 호수의 정령이었나요, 그것도 아니면 귀신이었나요. 하여간 산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목이 칼칼했다. 혓바닥이 마른 육포가 되어버렸다.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눈을 흘깃대던 하녀의 얼굴이 뱅글뱅글 돌았다. 그녀는 정육점에서 호박 달라는 사람을 처음 본다고 말했다. 마굿간에서 양상추를 찾고, 해우소에서 장미꽃 향기를 기대해서야 미친 놈 취급이 전부이다. 하녀는 대놓고 죠르프를 정신병자로 여겼다.
「아들도 인버스, 딸도 인버스라며! 그런데 왜 아들이 없어!」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 어디서 정보가 틀렸던 걸까.
후작에게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도 잊어먹고 마른 침만 꼴깍 넘겼다.

『조촐한 자리오나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집은 쓸데없이 강해서 후작은「아들 없다~」얘기는 일단 강하게 부정하고 보았다. 대신 기대에 가득차 남작의 아들이 턱을 덜덜 떨며 인사하러 나타나길 학수고대 하였다.
아들이 없어? 그럴 리 없다. 본 부인이 생산하지 않았다면 하녀라도 꼬셔 하나 낳았겠지.
인버스 부인의 평소 입버릇이「여보, 바람 피면 내 손에 죽어」였고, 마지막 유언 또한「내가 죽는다고 재혼하거나 하면 한 방에 뒈질 줄 알아」라는 걸 제3자인 후작이 알 길이 없다. 따라서 후작의 신념 - 어쨌든 뒷구멍으로라도 아들은 있다 - 은 굽혀지지 않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감사합니다, 인버스 남작. 예고도 없이 불쑥 쳐들어온 불청객을 이다지도 환대하시니...』
남작의 인사치례에 후작은 아찔한 미소로 대답의 마침표를 대신했다.
이야. 끝내주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천상의 하모니다. 눈이 부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어진다. 남작은 그레이워즈 후작의 머리로 황금빛 후광이 비친다고 착각했다.
「그래봤자 가짜 부처니까 문제지.」
그 옆에서 로머디스와 죠르프는 바늘 방석의 따가움을 원 없이 만끽했다. 불편하지 않다면 공갈이다. 로머디스는 묵묵히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틀이나 절식한 탓에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으나 식욕은 이미 산 너머로 달아난 뒤였다. 이 마당에 밥이 다 뭐라냐. 따가운 땡볕 아래서 말라죽은 해바라기 생각이 절로 났다. 그냥 차가운 냉수나... 바로 그 순간 위가 찌릿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물론 코앞으로 차려진 밥상의 훌륭함을 보자면 이들의 식욕 저하와 위통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후작도 내심 놀란 눈치다. 왕성식 상차림과 비교하자면 절대적으로 허름하지만 그거야 비교 대상의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고... 그의 입술이 굳었다.
전반적으로 시골풍이다. 그렇다고 해도 품위는 잃지 않았다. 꽃과 야채로 장식한 테이블 센스가 일품이다. 과하지 않은 꾸밈이 아름답다. 하얀 식기에, 정갈한 포도주, 향신료가 마음껏 들어간 메인 요리... 거위의 간을 버터바른 감자와 같이 찌고, 색이 멋진 소스를 둘렀다. 풍성해 보이는 양고기 구이는 그저 맛있게 먹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반나절 사이에 이런 요리가 가능한건가. 누군가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댄 건 아닌가 싶다. 요리 나와라, 이얍. 빳빳한 테이블 시트 나와라, 이얍.

기교적으로 윗 입술만 들짝 움직인 후작이 죠르프에게 귓속말을 던졌다.
「이 사람들, 우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군요.」
「에이, 나리도 참. 이 사람들이 무슨 초능력자라도 되나요. 설마요.」
「하지만 이걸 봐요, 작정했다는 듯 차려놨잖습니까. 누군가 기밀을 누설한 겁니다.」
즐거운 계획 하나 와장창.
시간에 쫓기고 당혹감에 허둥대다 최악의 저녁상을 내놓으면「역시나 시골뜨기~」라며 손가락질 해주려고 그랬는데. 먹을게 부실하면「야박한 인심~」이러면서 싫은 소리 해주고, 내온 식기가 조금이라도 촌스러우면「졸부다운 끝장인 취향~」이러고 콧방귀 뀌려 했는데... 이야, 이거 멋지게 한방 먹었다. 이래서는 욕하는 사람이 비정상이다.

가볍게 눈웃음으로 모두에게 인사하며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욕하는 건 나중에.
대신 후작은 대단히 불편해하고 있는 부하 로머디스의 옆구리를 향해 춉을 넣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0 09:44 2008/03/2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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