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급형 기계식 키보드 망가짐... 5월 9일에 구입한 녀석인데 F8키가 자동으로 눌려짐... 한글에서 F8키가 눌려진다는 건 자동 맞춤법 검사 진행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망했어요? ※

더위를 식혀줄 한줄기 시원한 비 소식을 기다리는 와중에 집에서 소식이 당도했다.
속으로 가만히 손가락을 헤아린 나는 짐작했던 것보다 무려 엿새나 빨리 도착했음에 깜짝 놀랐다. 에둘러 협박하기가 그렇게도 효과적이었던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아버지 성격과는 안 맞는다. 아무래도 내가 보낸 편지의 답장이 아니라 엇갈려서 먼저 소식하였다 여기는게 옳을 것 같았다. 더욱이 받는 사람이 지리가 안즈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평범하지 않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신 춘부장께서 자식 놈에게 보내야 할 걸 왜 이렇게 보낸답니까.』
정확하게는 자식 놈이 아니고 내재원 부석상위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런데도 숙희 숙사감대부는 그걸 멋대로 뜯어보고 개인 사생활 보호라는 걸 멋지게 뭉개버렸다. 어차피 내 신분이 빈사국에서 보낸 인질이라 할 수 있으니 내재원 담당 관리가 편지를 검열하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었지만 부석상위보다 급이 두 단계 낮은 숙사감이 이를 멋대로 뜯어본다는 건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들 항의할 입장이 아닌 나는 짐짓 뒷짐을 진 자세에서 고개를 길게 빼어 내 앞으로 왔다는 편지를 구경했다.
편지는 연두색 고급 비단지에 포장되어 흡사 높이신 이가 처녀에게 보낸 연서처럼도 보였다.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화려한 걸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봉투만 봤음에도 낯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외관이 화려하다고 구색을 갖췄다고 할 수는 없는데 이 양반은 무릇 귀족이라면 이 정도의 사치가 당연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내용이 뭔지 읽어보셨어요?』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받는 사람이 지리가 안즈님 앞이 아니었다니까요.』
숙희 숙사감대부는「내 탓이 아님!」을 느낌표 붙여 강조한 뒤에 나에게 편지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삐죽삐죽 수염이 튀어나온 아래턱을 쓸었다. 변비에 걸린 표정 또한 빼먹지 않았다. 이는 곧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읽지 않고 무작정 주머니에 넣으려 하자 숙희의 눈썹이 꿈틀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손을 휘저어 주머니에 넣으려는 날 말렸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읽으라고요?』
『아무래도. 받는 이가 안즈 님이 아니라서요.』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뺨 위에 돋아난 거스라기를 손톱으로 뜯었다.

『그럼 읽겠습니다.』
나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었기에 안부를 묻는 내용은 당연히 한 줄도 섞여 있지 않았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무적인 말투였는데 내용 또한 팥 알갱이로 죽을 쑨 것처럼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사실 관습에 대해 아는 내용이 부족하여 일이 서툴렀습니다. 미리 챙기질 못한 것은 제 과오입니다. 요청컨대 나의 아이더러 소극 상은에 들러 필요한 금전을 찾으라 하십시오. 동봉한 것은 증서입니다.

뒷장에 글자가 더 적혀져 있지 않을까 싶어 뒤집어 보았다. 그러고도 소득이 없자 봉투를 거꾸로 들고 흔들어 혹시라도 남아있을 내용물의 추가를 기대하였다. 허나 돌조각이나 먼지 알갱이도 아닌데 글자가 봉투 속에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간결하네요.』
『그러게요.』
편지를 다시 원래대로 접어 봉투에 넣으며 질문했다.
『여기에 적힌 소극 상은이라는 건 뭔가요.』
『소극은 상호명이에요, 안즈 님. 루은에선 그다지 큰 상은은 아닌데... 그 전에 먼저 안즈 님에게 상은이라는 걸 설명드려야 하겠군요. 상은은... 뭐랄까. 많은 금전을 직접 품에 넣고 먼 길을 가야하면 강도에게 빼앗길 염려가 있잖아요? 그래서 갑이라는 마을에 있는 상은에 돈을 맡기고 대신 증서를 받는 겁니다. 그리고 목적지인 을이라는 마을에 들려 거기에 있는 상은에서 소정의 수수료를 물고 맡긴 돈을 찾고. 이해가 가죠? 원래는 대규모 무역 상인을 상대로 은화를 사고파는 거래로 시작하다가 점차 돈을 예치하는 서비스로... 아! 여기서 서비스라 함은 사람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걸 상품으로 판매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거 참, 더 헷갈리겠군. 서비스라는 건 머리에서 지워버리세요.』
동대륙에서 은행이라 불리우는 것과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종류다.
『그렇군... 대금업이군요.』
『맞습니다. 헌데 여기 증서에 대리인을 가정하지 않았기에...』
『제가 직접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직접 가서 돈을 찾아오게 시키다니. 벽서국 인간들은 지독하구먼, 숙희는 혼잣말을 하며 장부를 뒤적거렸다. 나 혼자 내재원 밖으로 내보낼 수 없으니 동행을 시킬 시간이 남는 숙사감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월 축제가 코앞이라 손수건을 흔들며 오늘 나는 무진장 한가해요, 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종이의 낱장을 뒤적거리던 그는 끙 소리를 내뱉고는 다시 내 눈치를 읽으려 했다.
『이거, 당장은 어렵겠는데. 안즈 님.』
『하지만 이 증서에는 유효 날짜가 적혀져 있어서.』
『미친.』
이런 경우는 없다며 숙희는 화를 냈다.
『사람 일이 그렇게 일사천리로 흘러갈 줄 아는 감! 오늘 당장, 내일 당장, 이러면 나더러 어쩌라고!』
같은 말을 그대로 되갚아주고 싶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외출 준비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얼굴을 깨끗하게 씻고 약식 하리건을 모자처럼 머리에 쓰는게 전부, 신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는데 숙사감대부의 명령을 받았다며 내 시중을 들 하수가 문설주를 두드렸다.
『락연이라 하옵니다. 오늘 하루 동행을 명 받았습니다.』
『낯익은 자로군. 그대는 소방의 직원이지 않은가. 밥 준비는 어쩌고.』
저번에 나에게 물이 든 죽통을 건네주었던 자였다. 이빨이 뾰쪽뽀족, 톱니처럼 생겨 아무래도 사람 같지 않은 인상을 처음부터 남겼던지라 나는 그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안으로 들이지 않고 밖에 세워둔 채로 그와 대화했다. 창고라고 해도 엄연히 잠자리로 쓰는 공간인데 그 안으로 요괴라 추정되는 이를 들이기는 죽어도 싫었다.
사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손했다.
『식사 준비는 안 해도 됩니다. 원래 제가 하던 일도 아니었고요.』
『원래 하던 일은 뭐였는데.』
락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수호(守護)입니다.』
『야! 너, 나에게 너무 솔직하게 말하는 거 아냐?! 그런 건 좀 숨겨! 암살자가「제가 원래 하는 일은 암살이에요」이러는 거 봤어? 봤냐고! 이럴 적엔 세탁물을 담당합니다, 이러는 거야. 변명할게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냥 심부름을 합니다, 이래도 되잖여!』
이쪽에서 버럭 고함을 질러대자 락연은 그런가요, 이러며 시치미를 잡아뗐다.
망할 요괴 같으니. 이놈은 나에게 정체가 들켜도 큰 문제가 없다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나를 감시하라고 명 받았냐.』
탈 것을 구할 수 없었던 우리는 내재원 밖으로 나가기 위해 두 다리를 이용해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었다면 오래 걸어야 한다는 내 말에 불만을 표현했겠지만 상대는 요괴라서 무어라 야단하지 않았다. 한 달 내내 걸어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자며 수긍했을 것이다. 인간과 요괴는 체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감시까지는 아니고...』
『왜? 듣자하니 장차 내가 이사실 제국을 멸망시킬 거라던데. 이 소악당이 무슨 작당을 하는 건 아닌가,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감시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말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제국 멸망이요? 음... 그 전에 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남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울컥 감정이 솟구친다.
『게다가 맨날 땡땡이를 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락연은 걸음을 멈춘 채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정색하며 이리 말했다.
『안즈 님은 요괴인 저보다 거짓말을 참 잘 하시네요.』
『이놈이!』
『사람은 원래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거라고 하지만.』
『누가 그딴 말을 하든!』
『누가 그 말을 했는지가 중요합니까?』
내 질문을 회피한 그는 출입구 앞에 선 사물 마차에 시선을 주었다. 사물 마차라는 건 귀족이 사용하는 개인 마차다. 마침 내재원에서 허가를 받아 외출을 하려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물어보고 방향이 같으면 태워달라고 합시다.』
요괴는 나보다 요령이 좋아 얼른 마부가 있는 곳으로 바삐 움직였다.

Posted by 미야

2015/07/15 17:41 2015/07/15 17:41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58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Comments List

  1. 비밀방문자 2015/07/15 18:07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15/07/16 11:08 # M/D Permalink

      그러게 말예요... 뽑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 정도 수준일 거라곤 생각을 못했는데 말입니다. A/S 접수는 해놨지만 업체 신용이 팍 깎이네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296 : 297 : 298 : 299 : 300 : 301 : 302 : 303 : 304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0687
Today:
532
Yesterday:
1861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