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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주는 월급은 쥐꼬리고, 닳아 헤어진 관복의 소매를 몇 번이고 수선해서 입는 가난뱅이가 대역죄인...
처음엔 질 나쁜 농담이라 여겼다. 일용할 양식을 염려하는 입장에서 왕위찬탈, 반역, 모략 이런 걸 궁리한다는 건 사치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나서야 딴 생각을 품는 법이다. 복잡한 권력투쟁이 묘사된 300년 전의 왕실 비화록을 오늘날의 문체로 옮겨 적는 일은 곧잘 했지만 내가 직접 왕을 독살할 계획을 세운 적은 맹세코 없다. 그리고 작년 시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벽은국 왕의 사인은 지병 악화가 원인이지 독살 같은게 아니다.
아니, 것보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내가 모종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치자. 설령 그랬다 쳐도 이사실 제국에서 군대를 보내 왜 나를 직접 처단하려 하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쏟아질 것처럼 짙은 회색이던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나는 의자를 발판 삼아 올라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리비단을 덧댄 엄청난 고가품 의자를 끌어다가 발판으로 써먹었다는 건 비밀이다. 어차피 지금은 발도장 찍힌 국보급 의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 정신 나간 미친놈들아~!」
그저 분에 겨워 발악을 해봤을 뿐으로 대답이 돌아올 걸 기대하진 않았다.
서둘러 의자에서 내려와 중앙 계단 방향으로 달음박질하여 달렸다. 사방에서 불과 재의 냄새가 났다. 매캐한 연기가 이미 3층까지 올라오고 있었고, 일종의 굴뚝 역할을 하고 있는 중앙 통로로는 내려가는 것도, 올라가는 일도 쉽지가 않게 생겼다. 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지만 금방 목과 가슴이 답답해졌다. 매워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러다 질식사 하겠구나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시오재 서리!」
살집이 있는 사내가 몸을 야단스럽게 흔들며 뛰어왔다. 얼굴을 두꺼운 천으로 칭칭 감고 있어서 그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뜬금없게도 그는 양팔에 백과전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김으로 만드는 요리 백과전서였고, 하나는 두부로 만드는 요리 백과전서였다.
「콜록콜록... 화재가 번지기 전에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서둘러 대피시켜야 할텐데. 댁은 누구요.」
「젠장맞을! 이 마당에 농담이 나와요?! 접니다, 아평소요. 저 무식한 천벌 받을 놈들이 바깥에서 1층 출입구를 도끼로 부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자칫하면 갇힐 거야. 서둘러 불을 꺼야... 아니다. 이미 늦었나.」
「2층은 불바다에요! 콜록. 불쏘시개를 집어넣은 것처럼 타고 있다고요.」
「이 안에 지금 누구누구가 있나.」
「사리와 진수리는 방금 전까지 봤는데 나머진 모르겠습니다. 아예는 이성을 잃고 3층에서 뛰어내렸고요!」
「맙소사, 이 높이에서?」
「이성을 잃었다니까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연기 때문에 아래가 보이지 않아요.」
「큰일이군. 자네도 사리와 진수리를 찾지 말고 여기서 빨리 나가게.」
「시오재 님은 어쩌시려고요.」
「사람들을... 책들이...」
「아니, 이 양반아!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면 떨어져요!」
잡으려는 손길을 뿌리치고 난간에서 몸을 한껏 내밀어 아래층을 쳐다보았다. 붉은 앙점이 저 아래서부터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중이다. 그것은 찰라의 힘을 다하고 일순간 온기를 잃었다가 나무나 천자락에 들러붙는 순간 밝은 귤색으로 변해 세차게 번져나갔다. 흡사 숯가마의 안쪽을 가늘게 실눈을 뜨고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열기가 미처 뺨이 후끈거렸다.

「저래선 못 내려갑니다. 올라가야 해요!」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엉뚱하게도 서쪽 통로를 향해 뛰어갔다.
틀린 건가. 전부 불타버리는 건가. 내가 모은 책들, 그리고 내가 번역한 수천, 수만 권이... 모조리?
그 와중에 아래층에서 소름끼치는 굉음이 들려왔다. 백병전의 대가인 이사실의 군인들이 쇠로 감은 1층 현관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는 신호다. 비명 소리도 들렸다. 그들이 애꿎은 사람들을 베어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지만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내 재주로는 알 길이 없다. 3층 통로의 거대한 주 출입구를 몸으로 밀어 닫으며 나는 신물을 토했다.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더라... 분명 내가 뭘 잘못하긴 했을텐데.

검댕이 옮겨 붙은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가며 나는 중앙 서궤가 있는 안쪽으로 향했다.
사리와 진수리는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열린 창문으로 책들을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있었는데 밖에 선 군인들의 머리를 노리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한 권이라도 책을 살려보고자 하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사리가 창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시오재 님.」
「나도 거들겠네.」
모든 책은 소중하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의 차이는 없다. 나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진수리와 같이 무거운 궤짝을 들어 창가로 옮겼다. 창 앞에 앉은 사리는 궤짝 안의 내용물을 하나 둘 집어 가냘프고 부러질 것 같은 팔로 바깥을 향해 힘껏 던졌다. 대다수는 지난 20여년에 걸쳐 코피 흘려가며 직접 번역한 책들로 평범한 문학작품부터 진귀한 자연과학 도서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제대로 된 사전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던 벽은국 도서관을 풍족하게 만든 건 나... 진수리가 참지 못하고 엎드려 통곡했다. 주먹으로 바닥도 쳤다. 그는 분했던 것 같다.
「울지 말게.」
「하지만 억울합니다! 원통합니다! 어째서, 왜!」
「미안허이. 나도 왜 이렇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어.」

꽉 닫은 문으로 연기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이 더욱 번지는 듯했다. 열기는 둘째고 수상쩍은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이 난 건 아닐테니 건물 기둥이 쓰러지는 충격이 여기까지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사리는 겁에 질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반복해서 외쳤다. 그러더니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원래부터 얌전하고 깜짝 놀라기를 잘하던 아이다. 측은한 마음에 사리의 머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 되었다.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도망가.」
「도망갈 곳이 없어요.」
「포기하면 안 된다. 위층까지 불은 안 번졌을 거야.」
「그냥 여기서 죽을래요.」
「안 돼. 도망쳐. 이건 부서고서리로서의 명령이야.」

살아다오, 사랑스러운 생명들아.
사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오늘은 지나갈 거야. 너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힘 내. 불행은 온전히 내 몫으로 가져가마.

멍한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보니 선명한 피의 색, 귤색의 불 찌꺼기들이 꽃잎처럼 휘날렸다.
나는 여전히 책들을 옮기려고 기를 쓰고 있는 진수리의 팔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보게. 사리를 부탁함세.」
「싫습니다. 사리보다는 이 책들이 제겐 더 소중합니다.」
나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네 이놈! 일생일대의 내 부탁을 그딴 식으로 매몰차게 거절할 건가!」
진수리의 눈이 접시처럼 벌어졌다.
「그, 그런게 아니옵고...」
「부탁할게. 이렇게 부탁할테니... 동쪽 계단은 아직 괜찮을 걸세. 자, 방석으로 코와 입을 막도록 하게. 도중에 절대로 멈추지 말고. 뒤돌아봐서도 안 돼.」

그렇다면 시오재 님도 같이 가요. 여기서 도망쳐요.
진수리가 내 팔을 잡았다.
아니다. 이 손은 작아서... 어린아이의 손이다. 그리고 붓을 잡은 손도 아니다. 이토록 작은 주제에 못이 박혀서...
시오재 님. 연기가 가득 찼어요. 이리로 지나갈 수 없어요.
누군가 내 뺨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쳤으면 잇몸까지 얼얼하다.
손을 이리로. 제발 저와 같이. 아아악. 아악. 손을 놓지 마소서. 어디에 있으신가요?!
눈을 떠야 하는데 눈꺼풀이 무겁다. 그게 아니라면... 사방이 어둡고 흐리다. 보이지 않는다.
건물이 흔들려요. 기둥이, 지붕이! 거기서 물러서요! 거기 서있지 마세요!
『안즈!』
번쩍 눈을 뜨자 내 머리를 향해 똑바로 곤두박질하는 거대한 대들보가 보였다.

Posted by 미야

2015/06/23 10:35 2015/06/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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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僻銀)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 유희 산맥 구석진 곳으로 은이 나왔는데, 그 토산품이 금이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가끔 해보았다.
귀금속이라고는 해도 가치가 떨어진다. 세공을 하면 그럭저럭 값을 올려 받을 수는 있지만 수요는 그리 크지 않다. 통화 화폐로 만들자니 대량유통 시 물가가 엉망이 되고, 게다가 해마다 산출량도 줄어 왕실과 신료들은 근심이 한 가득이었다. 그런 마당에 교역의 불균형을 두고 잦은 다툼이 벌어졌다. 무역 상인들의 농간으로 은은 곱게 가루로 빻아져 지나치게 싼 가격으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도 부자가 되는 건 타국의 상인들이라 백성들은 불만이 많았고, 편입된 외지인들은 은의 가격을 덜 치기 위해 저마다 딴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품고 있었다. 바람 잘 날이 없어 자고 일어나면 은괴를 빼돌린 관료가 감옥에 갇히거나, 상회의 주인이 거래 장부를 찢고 야반도주하는 식의 사건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사람들은 피해망상에 빠져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만 믿지 않은게 아니다.
오백년 간 신으로 모시던 용신 명라각희의 은총마저 믿지 않기에 이르렀다.
빠르게 신앙심은 붕괴되어「세수 부족에 따른 자금난」을 이유로 벽은국의 국왕은 용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마저 넌지시 그만둬버렸다.

「하는 일도 없는 빈둥신 용따위 알게 뭡니까. 지난 200년간 용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덕분에 꼬인 일을 나서서 푸는 건 전부 우리들 몫이잖아요. 광산에서 낙반사고가 벌어지면 명라각희가 짠, 하고 나타나 토사를 치워주던가요. 쓸데없이 돈이나 발라먹는 명라각희의 사당은 전부 없애버려야 해요.」
가명은 입버릇처럼 그 말을 달고 살았다.
부유한 상인 출신인 그는 다소 냉소적인 성격이었는데 어디서 명라각희 용신 이름만 들렸다 싶으면 만사 제치고 달려와 깎아내리는 말을 신랄하게 퍼붓곤 했다.
「저처럼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사람은 다리를 보다 튼튼하게 건설할 궁리를 하면 했지 사나운 폭풍우가 빨리 진정되도록 신룡에게 빌거나 하지 않는 법이라서요. 돈이 아깝단 말입니다.」
결국 쪼들려가며 은광 하나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미래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이미 한참 전에 그 방향이 정해져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해는 여름이 짧았다. 매미 우는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아 어쩐지 나쁜 일의 징조처럼 느껴졌다.
「없애버려야 한다니까요. 시오재 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죠?」
「틀려, 가명 군. 나는 명라각희 사당을 전부 헐어 없애자는 쪽이 아니야.」
읽던 책을 무릎 아래로 내려놓은 나는 그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설마, 그럼 스승님은 사당을 없애면 국토 수호신이 진노해 재해가 일어난다고 믿는 쪽인가요?」
나는 정색했다.
「그건 아니지. 사당을 없앤다고 재해가 일어난다는 근거는 없어. 자네는 흥악 상선과 연줄이 있을테니 동대륙에서 일어난 재해에 대해 들은 내용이 있는 것 같군. 허나 그건 사건이 잘못 전해진 걸세. 아리구스 이스타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은 그들이 용신을 배격한 탓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고 비교적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용이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격발된 자연재해라고 하는 것이 맞아. 비유하자면 이런 걸세. 여기에 똑바로 작동하는 평형추가 하나 있네. 수평을 맞추기 위해 양쪽에 무거운 물이 든 양동이가 달려 있어. 그런데 어느 날 한쪽에 든 양동이의 물을 전부 빼버린 거야. 그러면 평형추는 어떻게 되지? 요동치다 격렬하게 뒤집히겠지. 그거와 비슷해.」
아리구스 이스타는 현재 항구 도시다. 그들의 왕이 죽자 국토의 절대 다수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나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어쨌든 지도의 모습이 현저하게 바뀌어 예전에는 갈색으로 묘사되던 부분을 지금은 파랗게 칠해야 한다.

그는 깜짝 놀라 외쳤다.
「용도 죽습니까?」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무슨 엉뚱한 질문인가. 그들도 생명체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가까스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럼 평형추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명라각희 사당을 앞으로도 계속 내버려둬야 한다는 건가요.」
「아닐세. 사당이야 인간이 용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세운 것이니 없애버려도 무관하지. 허나 명라각희 자체는 우리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세. 용은 그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힘이야. 우리가 이 땅에서 용을 내쫓고 말고 자시고를 논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걸세. 그건 우리 앞에 태산이 있는데 햇빛을 가리는게 싫으니 없애버리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자네는 산을 들어 옮길 수 있는가?」
가명은 뒷통수를 긁었다.
「허어, 기도도 안 하는 양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러니까 착각이라는 걸세. 단지 내가 충성을 맹세한 신이 명라각희가 아니라서 그녀에게 기도를 하지 않는 것뿐이야. 그 탓에 신룡의 은총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버렸지만 나처럼 용신의 은총을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도 없을 걸세,」
「그래요? 그렇담 시오재 님이 섬기는 용신은 누구인데요.」
「비밀이야.」
「설마, 적룡?」
「전혀 아닌데. 하지만 그렇게 소문이 났나?」
「시오재 님은 이사실의 황제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니까요. 1년에 한 번씩 그 먼 길을 돌아 이사실의 수도 루은을 방문하기도 하고.」
「부서고서리의 입장으로 필요한 책을 사오는 것뿐이다.」
「황공하옵게도 거기 황제가 스승님께 추파를 던진다는 말도 있고.」
「맙소사... 20년 우정에 금 가는 소리 들린다. 둘이서 비역질을 한다며 수군거리진 않던?」
나는 재밌어 했는데 가명은 심각했다. 그는 자기 옆구리로 양팔을 대고 이렇게 말했다.
「한가롭게 웃을 일이 아니에요, 스승님. 실제로 이사실의 황제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잖아요.」

연애편지.
벼락같이 화를 내던 글인데 그게 왜 연애편지.
나는 허허 웃어댔다.
「요즘 젊은 것들은 애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죽여 버린다, 이런 살벌한 표현을 적는단 말이냐? 너는 그러하냐?」
「물론 저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만.」
어쩐지 그는 회피해버렸다.
「그나저나 스승님. 이사실에서 온 병사가 자살하겠다며 대들보에 목을 매려고 하던데요. 슬슬 그가 가지고 귀국할 답장 편지를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여기서 내 기억은 갑작스럽게 뚝 하고 끊겼다.

멍한 눈을 힘들게 올려 뜨자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작은 얼굴이 보였다.
『이게 누구야. 린청이잖아... 왜. 무슨 일 있어?』
어리둥절하여 묻자 소년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안즈. 너, 의식을 잃었었어.』
그런 거 모르겠고 어쩐지 졸립다. 온몸이 나른하여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머리가 울리고 쿡쿡 쑤신다.
그나저나... 가명 이 녀석은 나와 말하다 말고 어디로 갔노.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뿐인데 주변의 모습이 다시 바뀌었다.

사람 키 높이의 격자 창문 너머로 군대가 진열해있다. 온통 붉은 깃발, 그리고 붉은 갑주...
「대역죄인 시오재는 어서 나와 오라를 받으라!」
애나 어른이나 가릴 것 없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전형적인 반역자의 최후였다.

Posted by 미야

2015/06/21 19:54 2015/06/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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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22 06:16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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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침착함을 잃으면 평소에 안 하던 바보짓도 곧잘 저지른다.
『문이 열리지 않아! 이놈의 망할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이곳의 출입문은 안에서 잡아당겨야 한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린 송주는 실성한 채 울부짖었다.
『이건 분명 저주야~!! 살려줘~!!』
린청 또한 그 옆에서 눈이 뒤집힌 채 들입다 문짝을 걷어찼다.
그래봤자 두꺼운 나무문은 활처럼 휘어지지도 않았고, 경첩을 튕겨내지도 않았다. 겅중 뛰며 다리의 아픔을 호소해봤자 깃털로 코끼리 피부에 구멍 뚫기다. 정교한 방식의 열쇠까지 달아놓았는데 어린애 발길질 정도로 구멍이 나게끔 싸구려 합판으로 문짝을 달았을까. 기본적으로 왕궁의 건물 출입문은 2문(60미터) 거리에서 궁수가 화살을 쏘았을 적에 그 촉이 뚫지 못하는 걸 최소 규격으로 삼는다. 무게와 실용성을 고려하다보니 규격에 한참 미치지 못해 문짝의 두께가 얇아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그런 경우 단단한 물푸레나무 소재를 사용하여 약탈자를 방어하고 있다. 더하여 창이나 도끼 같은 물리적 공격을 고려하여 놋으로 만든 장식을 덧댄다.
그러니 발로 걷어차서 열겠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노력한들 가엾게도 발목뼈에 금만 갈 뿐이다.

만류하며 뜯어말리자 린청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어쩌라고. 여기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도 그럴 것이 불에 그슬리고 머리가 박살난 남자는 계단을 타고 느린 속도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올려다보니 전체 윤곽은 어둠에 잠긴 상태이고 단화를 신은 발 정도는 그럭저럭 또렷하게 보였다.
마지못해 걷는다며 그것이 계단 하나를 어렵게 내려왔다. 좌우로 어지럽게 흔들거리는, 불안정한 행보였다. 걸음마를 갗 배운 아기처럼 아장거리더니 한참동안 제자리를 지켰다. 이윽고 다리 하나를 들어...
『꺄아아악!』
문에 등을 대고 돌아선 송주는 산 채로 끓는 기름 속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굴었다.

『당겨.』
『뭐?』
『그 출입구는 안에서 당기는...』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송주와 린청 두 사람은 손잡이를 세게 잡아당겨 열었다.
그리고는 서로 경쟁하듯 어깨를 겹쳐가며 열린 문으로 허푸덕 탈출했다.
『닫아, 빨리 닫아! 열쇠는 어딨어!』
『소, 손이 떨려서 꽂을 수가 없어!』
『아니, 그걸 땅바닥에 떨어뜨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 병신아!』
버럭 대마왕이 화가 잔뜩 나 고성을 질러대자 송주는 더 허둥거렸다. 희한하게도 열쇠는 지느러미가 달렸다며 사람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항 속의 금붕어를 뜰채로 떠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만 힘든게 아니었다. 겨우 붙잡은 열쇠가 또다시 손바닥에서 제멋대로 튕겨 올라 탈출을 감행했다. 잡으려 하자 주룩 미끄러진다. 아니, 그놈의 쇠붙이에 언제 누가 돼지비계라도 발라두었단 말인가.
보다 못해 내가 직접 나서 떨어진 열쇠를 집어 거침없는 동작으로 구멍에 꽂은 다음, 비틀어 돌렸다.
살았다... 찰칵 쇠 물리는 소리가 나자 안도감 이전에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엎어진 김에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나는 땅과 하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바, 방금 전의 그건 도대체 뭐였어?』
마찬가지로 주저앉은 송주가 넋 나간 소리를 하자 린청은 재차 격분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잖아~!! 어이, 송주... 슬금슬금 도망가지 마시고 이리 오게. 알고 있는게 조금이라도 있음 지금 전부 털어놓는게 신상에 좋을 거야. 너, 방금 전엔 무슨 까닭으로 2층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버틴 거냐.』
『왜 엄한 사람을 의심하고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가 보겠다고 한 너희들이 이상한 거지!』
『벌건 대낮에 저런 흉악한 것이 돌아다닐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으니까 그렇지! 너처럼 미리 알았으면 나도 저 위로는 안 올라갔어!』
『나도 나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던 건 아니야! 다만...!』
송주는 겁에 질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한 방 날리겠다고 주먹을 들어 보인 린청보다 훨씬 더 두려운 존재를 염려한 소년은 대드는 목소리도 더욱 작게 하여 거의 속삭이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나올 수도 있겠다 생각한 거지.』
캐묻는 린청의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뭐가 나오는데.』
『유령대부.』
『그게 누군데.』
바짝 마른 아랫입술에 침을 바른 송주는 영험한 북어포를 무기처럼 내밀었다.
『마흔 삼주 변방인 문장박사 시오재.』

말도 안 돼. 경악하여 손바닥으로 뺨을 감쌌다.
불에 탄 흔적. 망가진 두부. 맙소사... 저 흉칙한게 바로 나였어? 내가 원념이 되었다고?!
가만 있어봐.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잖아. 이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 거야?

그 이름을 듣고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지금의 마흔 삼주 벽은은 원래 은이 채굴되던 작은 나라로 이사실의 주로 편입되기 전에는 왕이 다스리는 왜소한 변방국가 중 하나였다.
원래도 바람 잘 날이 없는 나라였는데 왕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뜨자 새로운 왕을 옹립하자는 독립파와 제국 이사실과 병합하자는 제국파 사이에 격렬한 내분이 벌어졌다. 내전까지도 불사하겠다는 불온한 분위기 속에 하루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새해가 지나 열 칠일. 벽은국 부서고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다수의 서적 소실은 물론이고 문장박사 시오재가 변사했다. 불을 놓은 건 독립파였던 은서, 가명, 민정악 이 세 사람으로 후에 방화 혐의로 재판을 받은 후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 사건을 계기로 벽은국은 끝내 나라로서의 기능을 잃고 이사실의 마흔 세번째 주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잠깐만.』
맹세코 이건 내가 아는 줄거리가 아닌데.

『넌 무식해서 모르겠구나. 교과서에 나와.』
숨을 헐떡거리는 이쪽의 상태는 눈치 채지도 못하고 송주가 말했다.
『시오재는 황제폐하와 막역지간 관계로 사적으로 총애한 인물이었거든. 독립파에서 눈엣가시처럼 여겼지.』
『총애?!』
나는 이제 거의 울먹거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응. 그래서 유골을 수습하여 일부러 이사실로 가져왔어.』
남의 나라에 적룡군을 보내 부서고를 불질러놓고, 내가 죽자 그 뼈를 수습하여 여기까지 가져왔다고?
그런 주제에 총애?!
그리고 뭐? 방화의 죄를 물어 세 명을 교수형에 처했어?! 은서, 가명, 민정악 그들은 내 제자들이었다!

어느 순간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피는 싸늘하게 식었음에도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없었던 눈물은 그 온도가 매우 뜨거워 나는 얼굴이 다 타버리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슬퍼하며 오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놓아버린 과거, 돌아봐서는 안 되는 나의 전생이 아니던가.
왜 오늘에 이르러.
원망 따윈 몰랐는데.
그런 꺼림직스러운 건 나와 관계없다 여겼건만.
지금 선명하게 되살아나, 저 아래에서 껍데기를 깨부수고 용암처럼 치솟는 이 불쾌한 감각이.
마구 소리쳐, 외쳐.
증오라 이름 붙을 이 생생한 감각이. 아아...

꽉 다물린 어금니 틈새로 인간의 말이 아닌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Posted by 미야

2015/06/19 15:13 2015/06/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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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19 17:07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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