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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눈에 띄지 않게. 얌전히. 존재감 없도록. 사고치지 않고. 기타등등.
아침마다 정해진 구호를 외쳐가며 각별히 행동을 조심한 탓에 주변 인식도 그럭저럭 바뀌기 시작했다. 외진 창고에서 빈대 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거야 변함이 없었지만「사고뭉치」로서의 등급은 하락을 계속해 삼주 가량의 시간이 흐르자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은 채 복도를 똑바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허벅지가 땅에 끌릴 정도로 비대한 몸이었다가 체중 조절에 성공하여 정상 체중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쪼는 듯한 시선에서 벗어나자 그늘진 곳으로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있으면 아무도 내가 그곳에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저승대부가 나오는 창고에서 청소를 한게 좋은 경험이었던 거에요.』
숙사감대부는 대단히 만족스런 눈치였다.
『어쩐지 린청 님은 역효과가 난 듯하지만.』
당지 없이 길게 풀어헤친 머리로 곳곳을 돌아다닌게 화근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모양을 한 이사실의 아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형상을 한 그를 보고 낄낄거리며 웃느라 바빴다. 하필이면 그게 또 머리카락에 대한 놀림이라서 린청도 사정 봐주지 않고 꼭지가 돌아버렸다. 결국 매일같이 주먹질이 오고갔는데 그것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입장이라 평판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쓸데없는 도전의식을 불러 일으켜 상급생까지 손을 봐주겠다고 벼르고 있는 판국이라 조만간 사달이 날 상황이었다.
『이쪽은 얌전해져서 그나마 다행이지.』
칭찬을 받으니 속이 불편해지려 했다. 따지고 보면 다 내가 원흉 아닌가.
『아무튼 앞으로도 잘 해나가리라 믿어요, 안즈 님.』
여기에 격려까지 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어쨌거나 하품이 나올 것만 같은 지루한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인생사, 내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날 가만두지 않는 인간이 있으니 문제다.
『여어~ 도토리.』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뺨에서 경련이 일어나려 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억지로 참고 뒤돌아 얌전히 예를 갖추었더니 신경질을 부린다.
『그거 참 지루한 인사법일세. 답지 않게 평범하잖아.』
진짜지 이해를 못 하겠다. 성인이 된 황족의 남자가 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느냔 말이다. 내가 가진 보따리 속엔 황금처럼 비싼 물건은 안 들었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 같은 것도 없고, 내 엉덩이엔 꼬리도 안 달렸고, 이마엔 뿔도 안 돋았다. 그런데도 일부러 찌르고 건드리면서「재밌는 반응을 보여봐」이러고 있으니 진짜 감당이 안 된다.
나는 어중간한 미소를 지으며 비굴할 정도로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그냥 제 가던 길 가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보기와 달리 바쁜 사람이에요.
그래봤자 자손은 손가락을 까딱거려 이리 가까이 오라고 명령했다.
아... 진짜 엮이기 싫은데.

『발칙한 녀석,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기냐.』
이쪽에서 좀처럼 경계심을 풀지 않자 그 또한 다소의 불쾌감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 맘대로 되는 일도 아닌데다가 지금 그의 복장이 평복이 아닌 것도 영향이 컸다. 그는 당장에라도 말 위에 올라타 전장으로 떠나도 되는 정식 군장 차림이었고, 그리고 혼자도 아니었다. 붉은색의 갑주를 걸친 사내가 뒤로 세 명이나 서있었는데 하나같이 표정들이 얼음으로 깎아 만든 것처럼 냉기가 솔솔 풍겼다. 여기서 궁금한 건 저 차가움이 나 때문이냐 하는 거였는데... 셋 중 가장자리에 선 남자를 바라보니 마누라를 겁탈한 파락호를 앞에 두고 있다는 식으로 적개심까지 드러낸게 제법 알쏭달쏭하였다.
『어디를 보고 있누? 꼬맹아. 나는 이쪽에 있어.』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며 자손이 다소 성가신 얼굴로 일침을 놓았다.
나는 다시 손바닥을 마주비비며「그러게나 말입니다」엉뚱하게 대꾸하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처럼 기계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눈 하나는 여전히 뒷 배경으로 선 남자들을, 다른 눈으로는 자손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사팔뜨기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알이 쏘는 듯 아파와 결국 눈꺼풀을 비비고 시선의 초점을 조정해야 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저를 불러 세우셨잖습니까. 용건이 있으신게 아니옵니까?』
『아, 그거.』
깜빡했다며 자손이 둥그런 뭔가를 내밀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내려다보니 그 정체는 잘 익은 복숭아였다. 아니, 그래서요. 이걸로 뭘 어쩌라고요. 나는 당황하여 얼어붙었다.
황족의 남성이 변방국에서 온 어린아이에게 손수 복숭아를 하사하시었다 - 라는 줄거리는 어딘지 모르게 함정이 있을 법해서 순진하게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과일을 받기가 두려웠다. 그렇다면 뒤로 다른 속셈이 있다고 가정을 해봐야 할 터인데 내가 받은 건 비밀 교지도 아니고 일반 복숭아다.
『...... 잘 익었네요.』
『창리궁 마마에게 인사드리고 나오는 길에 먹음직스럽게 생겼기에 내 하나 따왔다.』
그러니까 맛있어 보여서 하나 챙겼는데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손에 들고만 있었다는 거? 결국 나더러 기미를 보라는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손의 안색을 읽으려 노력했다. 허나 글러먹었다. 내 재주로는 저 사내의 속내를 짐작하기란 무리였다. 아... 정말이지. 답답할 따름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군장 차림새의 사내 셋은 왜 아까부터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거냐곳.

『그럼, 실례하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한 입 베어 물고 잘 씹었다. 달콤한 육즙이 상등품 이상이었다. 입안을 후리는 상큼함에 더 많이 먹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잘 참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소인, 맛을 보니 독은 없는 것 같사옵니다. 이제 안심하고 드시옵소서.』
하여 나름 최대한 공손하게 복숭아를 도로 바쳤더니 이 인간 반응 봐라.
『와하하하하~! 하하, 아하하하!』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배를 쥐고 웃음을 터뜨리는게 아닌가.

『기특하다. 네 녀석의 엉뚱함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원하신게 이게 아, 아닙니까?』
『멀쩡하게 생겨서 말은 왜 더듬누. 아니다. 잘 하였다. 넙죽 받아먹지 않고 나를 위해 기미를 보다니. 다른 놈들에게 따라 배우라 강요하고 싶을 지경이야. 그래, 맛을 보니 독은 없다고?』
나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옛말에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글쎄요, 일단 혀가 얼얼하다거나 손끝이 저리지는 않는데요.』
『흐음... 독에 대해 잘 아느냐?』
『그렇게까지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무취에 무색, 무향의 독이 있다는 건 모르겠네?』
『에?』
『섭취하고 보름 뒤에야 증상이 나타나는 독도 있는데.』
『에?』
『심지어 사내를 고자로 만드는 독도 있단다.』
『에?』
『나야 여러 가지 독에 면역이 워낙에 잘되어 있어서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너는 아닐텐데. 아이고, 불쌍해서 이를 어쩌나. 우리 다람쥐, 복숭아를 덥썩 베어물고 그만 고자가 되어버렸네.』
『뭐라고요?!』
『괜찮다. 남자로서의 기능을 잃으면 정궁으로 들어와 내 밑에서 일하는 내관이 되렴.』

아마도 농담이었을 것이다. 듣는 순간 소름이 돋은 걸 봐선 농담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뺨을 꾹꾹 누르더니 단 세 입 만에 복숭아를 씨만 빼고 전부 먹어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5/06/29 14:16 2015/06/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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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소년이 햇빛에 닿은 광견병 환자처럼 덤벼들자, 이사실 굴지의 명문 이운가(家)의 열 한 번째 아들 숙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로 도망쳤... 그랬으면 오죽 좋았겠느냐만.
이 남자의 정체가 사실은 만성피로에 찌든 관리가 아니고 자객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반응 속도는 남달라서 눈을 깜빡이고 보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쪽은 공격을 당한 숙사감대부가 아니라 린청이었다.
『천 년은 빨라!』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의 남자 형제들은 무려 스물네 명에 이르러 고위관직자의 자제 어쩌고를 떠나 형제들끼리 어릴 적부터 경쟁과 시기질투를 일삼아 엄청나게 살벌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뒷간에서 바지를 내리려는데 화살이 날아드는 일도 일반사, 덕분에 기습적 공격을 회피하고 상대방의 어깨 부위의 급소를 눌러 순식간에 제압하는 일 정도는 식은 떡먹기가 되어 무예를 배운 적이 없는 몸으로도 주먹으로 얻어맞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나, 뭐라나.

『어, 어떻게 한... 우욱.』
아무리 기를 써도 책상에 박은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나 보다. 팔로 무게를 지탱하려 해보았지만 팔뚝 근육만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킬 뿐, 노력해서 겨우 얇은 책 두께만큼만 상체를 세울 수 있었다. 언뜻 보이는 소년의 목덜미로 파랗게 핏줄이 곤두섰다.
『숙사감대부! 나에게 뭔 짓을 저지른 거요?!』
『별 거 아니오, 린청 님. 귀신산발한 채 달려든 죄 값이라 생각하소. 일각 정도 뒤에 마비가 풀릴 겁니다. 것보다 제가 과로사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이제 나흘밖엔 안 지났는데 잊어버리신 겁니까?』
『잊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죽게 생긴 건 바로 나지, 당신이 아니잖아!』
『말씀드렸잖아요. 마비는 곧 풀려요. 것보다... 사내 머리 꼬라지가 그게 뭡니까. 단정치 않게.』
긴 머리를 지적당하자 린청은 대놓고 짜증을 부렸다.
『저리 가! 내 머리를 만지면 반드시 죽인다.』
손을 대어 직접 만져보려던 숙희는 얼른 팔을 올려 만세 자세를 취했다. 죽이겠다는 협박이 마음에 걸려서라기보다는 그렇게나 싫어하는데 일부러 만질 까닭이 없어서였다. 으르렁거리는 개는 쓰다듬지 않고 그 성질이 한풀 꺾이게끔 내버려두는 법이다. 대신 사내는 짐짓 나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안즈 님은 어떠셨나요?』
대답은 린청이 해주었다.
『저 녀석, 기절했었어. 전부 당신 책임이야!』
『그래요? 수업 중인 교당 안으로 냄새나는 말똥을 들고 오신 분이 의외로 담이 작군요.』
보일락 말락 빙긋 웃던 그는 팡 소리가 나도록 내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격려인 것도 같고, 야단을 치는 것도 같고, 달라붙은 귀신을 내쫓기 위한 행동인 것도 같고... 아무튼 가뜩이나 얇은 등가죽이 매운 고춧가루로 문지른 것처럼 화끈거렸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그 유명한 유령대부를 직접 보니.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말썽은 피우지 말아야겠다, 착하게 살자, 싸움질 하지 말자, 이런 신박한 결심이 막 솟구치지 않던가요.』
악령을 내세워 계행을 실천하는 교육자는 이 세상천지에 당신밖에 없을 거다. 이 빌어먹을 인간아.
그래봤자 비난하는 이쪽의 눈초리는 개의치 않아하는 눈치다. 둔한게 아니라 뻔뻔했다.
『뭐, 괜찮아요. 외모가 무섭게 생긴 것과는 달리 실제로 해코지를 하는 분은 아니라서. 그냥 겁을 줘서 벌 받는 아이들을 밖으로 내쫓기만 하지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데 방해를 받으면 싫은 거겠지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한 번 봤던 사람은 잘 기억해뒀다가 같은 얼굴이 두 번 연속해서 계단을 올라오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진짜로 화를 낸다고 그럽디다. 다음번엔 곱게 안 끝나요.』
곱게 안 끝나면 어쩔건데. 그 유령의 정체가 바로 난데! 나는 격심한 두통을 느꼈다.

『숙희 님도 그 유령을 직접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럴 리가. 저는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잘도 그랬겠다.』
『못 믿는 눈친데 진짜입니다. 그래도 제 일곱 번째, 아홉 번째 형님께서 벌을 받고 그곳으로 올라가신 적이 있지요. 우리 어렸을 시절엔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없을까, 서로 즐겁게 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소문에는 거기 다락으로 수상쩍은 유골함이 있다고도 했고. 그래서 형님들은 유령을 피해 도망치며 기를 쓰고 4층까지 올라가 보셨다고 했지요. 막상 올라가보니 하품이 나올 지경으로 별 것 없었다고... 그러면서 왜 창문으로 뛰어내려 종아리뼈를 분질러먹었나 몰라. 떠올리니 그립군요.』
『진짜로 유골함이 그곳에 있습니까?』
허리를 으쓱으쓱 흔들던 숙사감대부는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
『없어요.』
더 놀라운 발언도 했다.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저요.』
실제로 가본 적도 없다면서 그렇게까지 장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거든요. 법전에는 사람의 유골을 취급함에 있어 반드시 매장하라 되어 있습니다. 고인의 유골을 상자나 병에 넣어 건물의 벽이나 바닥에 숨기거나 하면 허락받지 않은 주술을 행한 죄와 고인에 대한 모욕죄를 물어 편격형으로 다스립니다. 이때 쓰는 채찍엔 구리로 만든 심지가 박혀 있지요.』
편격이라 함은 사람을 기둥에 묶은 뒤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을 일컫는다.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라 착각하기 쉬우나 때리는 도구가 살을 후벼 파는 종류라서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형 집행이 끝난 뒤 독이 올라 죽는 사람도 다수다. 이를 방지하고자 사흘 간격으로 열 대씩 나눠서 때리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벌이 무서워 아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얘긴데.
그런 이치라면 이 세상에 강간, 살인, 폭행이 여전히 만연하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두 팔을 마주 걸어 팔짱을 낀 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걸 반대로 돌려 해석하면 누군가 허락받지 않은 주술을 행하기 위해, 혹은 고인을 모욕하기 위해 유해의 일부를 그 건물 어딘가에 숨겨뒀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이사실 수도 루은에서, 그것도 황제폐하와 신룡이 코앞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잘도 그딴 짓을 저지르겠군요. 정말이라면 목숨이 여덟 개라도 부족할텐데?』
이런 종류의 대화가 불쾌하다는 걸 숨기지도 않은 그는 얼른 열쇠나 돌려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열쇠따위 알게 뭐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적손 본인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그 즉시 숙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종류로 바뀌었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군.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은 거냐, 지리가 안즈.』
집안 이름까지 포함하여 내 이름을 부른 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얘기다. 정말로 죽게 된다는 경고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열쇠는 린청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요. 꺼내 가지세요」라고 얌전히 말한 뒤 무릎을 구부려 예를 올렸다.

그날 저녁, 본국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낼 장문의 편지를 썼다.
평범한 문안 인사부터 시작하여 편지의 중간까지는 단순한 내용으로 덮었다. 하지만 안녕하셨어요, 용건만으로 붓을 잡은 것이 결코 아니었기에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주의하여 문구를 골랐다. 여행길에서 나를 죽이려고 시도한 미리노와 타평의 이름도 언급했다.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단지「그들이 나에게 해준 여러 고마운 말들이 참 많았는데 잊으려 해도 내 힘으로는 잊혀지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아버지에게 꼭 전하고 싶다」식으로 빙빙 돌려 적었다. 저지른 죄가 있는 아버지는 이 말을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결론 부분에 이르러선 옷을 빌려 입는 어려운 처지라는 걸 강조했다. 수업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편안하게 자식 시집보냈다 생각하라는 말도 썼다.
「우아하게 협박하는 것도 쉽지는 않군.」
쓰던 붓을 입술과 코 사이에 끼어 넣고 엉덩이를 긁었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당신이 날 죽이려 한 걸 폭로할 수도 있으니 입막음 돈을 부치세요, 날 시집보내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배가 덜 아플 거에요. 돈을 받으면 얌전히 꺼져줄게요 - 라는 것이 줄거리였다.

15세가 되면 성인이 되어 그 누구의 간섭 없이 내 결정에 따라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작정이다. 대신 다른 나에게 가서 준시를 치룰 생각이다. 여성도 관리가 될 수 있는 나라가 몇 있으니 자세히 알아본 뒤 그곳의 말단관리가 되어 편안한 노후를 노려보도록 하자.
5년... 앞으로 5년 남았다.

편지봉투에 보내는 이 이름을 적는데 지붕 위에서 새가 내려앉은 듯한 작은 소리가 났다.
바람에 기왓장이 흔들렸구나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그 기척은 모두 셋... 그들 전부가 사람이 아니었다.
이를 악문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때에는 생각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일이 더 복잡해지고 꼬인다.
5년이다. 5년만 버티자.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다.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 주문처럼 반복하여 외웠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잃어버린 왼쪽 신발 한 짝이 깨끗하게 손질된 모습으로 돌아와 문밖에 가만 놓여있었다.

Posted by 미야

2015/06/27 11:25 2015/06/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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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을 잡힌 채 비틀비틀 끌려갔다.
걷고 있었지만 스스로 인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머리의 절반이 방금 전 충격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두개골은 박살났고 좌뇌의 전부와 뇌량 일부가 소실되었다. 남은 뇌조각도 밖으로 노출되었기에 색이며 냄새가 빠르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충격으로 뽑혀나간 안구는 시신경이 끈 역활을 해줘 턱 아래까지 늘어져 매달렸다가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하나 남은 눈은 눈꺼풀이 뜯겨나가 싫든 좋든 앞을 봐야 했으나 망막에 투영된 사물은 죄다 흐리멍덩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피부는 연기에 그을렸고, 몸 안 장기는 오그라들었고, 인생은 풍비박산.
이것이 몇 번째 맞이하는 죽음이던가. 차근차근 헤아리다 지쳐 금방 포기했다.

『똑바로 걸어. 그러다 넘어진다.』
시체가 되고 나서도 신기하게도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있군. 안 죽었어. 기력이 약한 탓에 잠시 기절했을 뿐이야. 설마, 눈 뜨고 자는 거냐. 안즈!』
그 이름은 생소하다. 내 이름은 안즈가 아닌데.
『자기 이름도 모른댄다. 환장하겠네.』
가볍게 뺨을 톡톡 치고 피부를 꼬집어댔다.
『정신차려! 자꾸 이러면 현선당 앞 못 안에 처박는다? 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린청은 나를 연못 안에 거꾸로 집어던지는 대신 두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물가로 내려가 손을 충분히 적신 후, 물기가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가져와 내 이마를 덮어주었다.
차가움도 차가움이지만 거슬리는 물비린내에 저절로 코가 실룩거렸다. 썩어가는 식물 뿌리 냄새와 살아있는 잉어의 비늘 냄새가 뒤섞여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래도 찌는 무더위가 며칠 계속되면서 수량이 줄어 못의 수질이 나빠진 모양이다.
『우어... 구려.』
그래도 싫은 냄새를 맡자 후각과 촉각을 포함해 여러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주변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이름은 지리가 안즈다. 올해 열 살 계집아이로 고향은 빈사국 남리향 천의. 아버지는 지리가 위복천, 모친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복동생 이름은 리세리, 내가 현재 머무르고 있는 곳은 제국 이사실의 수도 루은, 사친 대상으로 뽑혀 이곳으로 공부하라고 보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먹물이나 붓은 구경도 못한 채 남의 집 마굿간을 청소하고, 귀신 나오는 창고도 청소했다...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도로 폈다. 더위를 먹어서 그런지 입안에서 소금 맛이 났다. 뒷통수를 만져보니 여전히 둥글었고, 신발을 잃어버린 왼발은 발바닥에 상처가 생겨 쓰라리고 아팠다.
발가락을 꼬물거리다 말고 이마를 찌푸렸다.
머리가 박살났을 그 당시에는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이 정도의 피부가 베인 상처엔 콕콕 쑤시는 통증을 느껴야 하다니.
발을 살짝 뒤집어 보니 상처 입은 곳으로 가볍게 피가 베어 나왔다. 편모암의 일종인 암강석을 돌로 깨어 만든 편돌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장식재지만 맨발로 밟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종류다. 내리막길을 정신없이 걸어오면서 아무래도 튀어나온 모서리를 잘못 밟았던 모양으로 뒤꿈치로 길게 붉은 줄이 그어졌다. 가볍게 상처부위를 누르자 핏물이 다시 올라왔다. 따가움은 배가 되었다.

소독도 할 겸 침이라도 발라둘까 하여 손가락을 입에 무는데 린청이 자기 머리카락을 묶은 푸른색의 당지를 풀어 내게 주려 했다.
『이걸 써.』
나는 깜짝 놀랐다. 고급 비단에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금박을 입힌 당지는 그 가격이 매우 비싸다. 상처가 난 발을 묶는 일에 써먹기에는 부담스러운 물건이라 나는 손을 어지럽게 휘저으며 극구 사양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던 물건이다. 비유하자면 모자를 신발로 쓰겠다고 하는 격이라서 나는 직설적으로 거절의 말을 건넸다.
『아서라, 나에겐 갚을 능력 없어.』
『그걸 누가 모른대?』
올려 묶었던 머리를 어깨 아래 길이로 늘어뜨린 소년은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도 내가 한참을 주저하자 차라리 본인이 직접 해주겠다며 허리를 낮추고 자리에 앉았다.
민폐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나에게 잘 대해줘서 그저 미안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부끄럽기도 하여 상처가 난 왼발을 짐짓 뒤로 감추었는데 그 모습에 짜증이 치솟았는지 버럭 대마왕은 도망간 발목을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진짜지 배려하는 것 같으면서도 섬세한 구석은 요만큼도 없는 녀석이다. 덕분에 균형을 잃은 나는 뒤로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수그리고 앉은 린청의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남들이 이런 우리를 보면 뭐라고 그럴까. 암만 생각해도 모양이 그다지 보기 좋을 것 같진 않았다.

『발이 참 작군.』
그 비싼 당지를 붕대처럼 사용하여 칭칭 감으면서 린청이 쓸데없는 말 한 마디를 흘렸다.
『꼭 여자아이의 발처럼 생겼다.』
말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걸 얼른 정정했다.
『별 뜻은 없어. 네가 여자 같다는 건 아니고. 어... 그건.』
나는 얼굴이 시뻘개졌다. 새삼스럽게 깨달음이 와서 우리들의 관계가 남자와 남자아이가 아닌, 남자와 여자아이라는 걸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을 깨닫는 순간처럼 그 심장의 고동이 귀여웠겠구나 착각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보다는 몰래 단맛 나는 조청을 핥아먹고 뚜껑을 다시 닫아놓았을 때의 두근거림이었다. 아니면 길고양이 새끼를 방에 숨겨두고 어른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는 심정이었다. 이제 귀까지 열이 올라 화끈거렸고, 죄인이나 다름없는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여자아이인데.
한 살 많은 남자아이에게 맨발을 아무렇게나 보여주고.
반성하도록 하자. 이대로는 큰일 나겠다. 말투도 소녀처럼 조신하게 바꿔야지.

매듭을 꼼꼼하게 묶은 뒤, 이만하면 다 되었다는 신호로 가볍게 툭툭 쳤다.
『문제는 네 발이 작아 내 신발이 너에겐 맞지 않을 거라는 점이지. 남는 걸 한 켤레 주려고 생각했는데.』
『그거 참... 마음을 써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으응?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목소리도 간드러지게 내리깔고.』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갑자기 여자애처럼 말하는 건 영 어색하다. 아니면 입고 있는 옷 탓일까, 색깔부터가 소년다워서 무의식중에 남자 어린이의 말투가 툭툭 튀어나간다. 발은 여자아이의 것이지만 - 글쎄, 이러한 성정체성의 혼란이 보다 깊은 부분으로 그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만... 모르겠다. 것보다 만사 귀찮다. 다시 손목을 잡힌 채 억지 걸음을 강요당하면서 나는 아래로 주저앉으려는 무거운 눈꺼풀을 손등으로 비볐다. 정신적 피로감이 드디어 육체의 피로감으로 성격을 바꾼 듯하다. 두통도 생겼다.

『송주는?』
『네 상태가 좀 이상해지자 북어포를 앞세우고 재빨리 도망쳤어.』
『아이고.』
『어떤 의미에선 크게 출세할 녀석이야. 나는 새삼 녀석의 약삭빠름이 존경스러워졌어.』
돌아보는 린청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화가 치미는 단계를 한참 지난 나머지 그저 헛웃음만 나오게 되었나 보다. 그런데 그게 잘 생긴 미소라서 바보처럼 나도 모르게 헤실거리고 따라 웃고 말았다.
『성공할 거야.』
『성공하겠지.』
『저... 그런데 열쇠는?』
『나더러 반납하라며 던져주고 가던데.』
『진짜 약아빠졌어... 어쩔 수 없군. 그럼 돌아가서 숙희 님 방부터 들려야겠네.』
『물론.』
소년은 이를 드러내며 또 개구지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맹세했다.
『두고 봐, 안즈. 나, 지금 각오를 다지고 있어. 이 열쇠로 숙사감대부의 콧구멍을 뚫어버릴 거야. 기대하라고?』

Posted by 미야

2015/06/24 21:40 2015/06/2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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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6/25 11:40 # M/D Reply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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