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쫓겨났다 - 라기 보다는 가는 방향이 엇갈려서 그만 내려야 했다.
『내려! 빨리 내려. 사람이 은혜도 모르고 말이야!』
녀석은 순전히 나를 망신 주기 위해 마부석에 앉혀놓았다는 걸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썩은 사과를 먹으라 주고 맛있었느냐 묻는 격이라 나는 망설임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너야말로 엿이나 먹어!』
그런 우리를 보고 락연은 기분 좋게 싱글벙글 웃었다.
『안즈 님 주변으로 친구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니었군요.』
『에엑? 친구?! 누가.』
『저 송주라는 도련님과 친구 사이가 아닙니까?』
요괴의 눈에는 심한 말다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우리들이 매우 친한 사이로 생각되었나 보다. 인간과 요물은 아무래도 서로 가치관이 달라서 적과 동지의 개념이 혼동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니까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이상 대화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그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격렬한 말싸움과 욕설이 엉뚱하게 우정의 과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녀석의 머리에 말똥을 올려놓았다는 걸 얘기해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요괴의 상식에 따라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한다 주장하진 않을까. 실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쳐다보는 이쪽의 심정도 모르고 락연은 포목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목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정성껏 배웅했다. 희미하게「죽어라, 안즈!」외침이 대답으로 돌아왔음에도 그는 저주의 외침을 애절한 석별의 정으로 착각하곤 좋아했다.
『활발해서 좋은 분 같아요. 다음에 만나면 단청과자라도 선물해야겠어요.』
『친구가 아니라는데 자꾸 그러네.』
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장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쫓기는 것도 아니면서 왜 빠르게 걷느냐고? 그야 이사실 사람들이 워낙에 성마르게 걷기에 서둘지 않으면 옆으로 밀쳐지게 돼서 그렇다. 게다가 호기심 많은 시선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뜨내기라고 생각하고 좋지 못한 것들이 달라붙게 된다. 호객꾼도 그러하고, 또한 장사치도 그러하고 잡꾼과 소매치기도 그러하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냄새를 맡은 무리들이 락연과 내 주변을 포위하며 접근해오고 있는 중이다. 제일 앞줄로 막대과자와 튀긴 밀가루 빵을 파는 장사꾼이 나타나 고소하고 달콤한 향을 풍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설탕을 가득 뿌린데다 참기름까지 바른 과자는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냄새가 났다. 자제력이 없는 어린애라면 이성을 잃은 채 덥썩 쥐고도 남았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입안으로 침이 돌았다. 하지만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려 하며 걷는 보폭을 넓혔다. 하지만 락연은 걸려들었다.
『도련님. 하나 먹고 가죠.』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요괴인데도 단 맛의 간식에 침을 흘리다니. 게다가 살 수 없다 단칼에 잘라 말하자 섭섭한 표정까지 짓는다.
『다섯 개에 1전밖에 안 하는데.』
『거꾸로 들고 흔들어도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 안 나와. 미안해. 정 먹고 싶다면 돌아오는 길에 사줄게.』

그리 정색하여 말하고 큰 대로에서 좁은 골목을 끼고 도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상은에 간다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책방 골목으로 들어와 버렸다. 잠재의식 속에 기억하고 있는 길을 따라 예전에 다니던 단골 가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락연은 눈에 들어오는 간판을 하나하나 관찰하다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이런 좁은 골목으로 상은이 있나요?』
있을 리가. 쓰게 웃으며 그 길로 돌아 나오려는데 그늘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장소로 방풍 중인 책들을 보자 이성이 절반은 날아가 버렸다. 해벌죽 웃으며 달라붙으니 오랜만에 물건 좀 팔아보겠구나 분위기 알아차린 주인이 한걸음에 달려 나와 흥정에 들어갔다.
『보는 눈이 있으시구먼. 50전만 내시게, 도령.』
전문가를 비웃는 거냐, 이 서면악달숙 궤보는 아무리 쳐도 30전이면!
『그럼 48전만 내고 가져가. 이거 보라고. 상태가 엄청 좋아요.』
쓰윽 훑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물에 젖은 얼룩이 있는데 상태 좋긴. 42전!
『과자 사먹을 동전 한 닢조차 없다는 양반이 어느 주머니에서 42전이 나옵니까. 정신 차려요~!』
뒤에서 락연이 손바닥을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 안즈가 아닌 시오재가 단골로 다니던 책방은 이미 상호가 바뀌어서 모르는 사람이 주인으로 앉아 있었다.
저번에도 노인이었는데 이번에도 주인은 노인이었다. 나는 찾아가야 할 소극 상은의 위치를 묻는 척하다 예전 주인의 안부에 대해 넌지시 물어봤는데 노환으로 몸져눕고 치료비가 다급해 결국 가게를 팔았다는 것 정도만 겨우 알 수 있었다. 노인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슬슬 흐려지기 시작한 기억을 힘겹게 더듬다가 결국 회색의 두터운 벽에 가로막혔던지 나에게 해줄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제가 마흔 두 살 되던 해에 이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이야기네요.』
『먼저 주인에게 재처가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였죠. 남편이 죽자 재산을 정리하고 동네를 떠났어요.』
『손님이 주문해놓고 찾아가지 않은 책이오? 글쎄... 안 찾아갔다면 결국 다른 사람이 구입해서 가져갔겠지.』
『도령께서 뭘 찾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 집은 그렇게 비싼 고서는 취급을 안 해요.』
『그러고 보니 먼저 주인이 북대륙이나 동대륙에서 온 귀중한 책들을 소량 취급하긴 했지. 지금은 한 권도 없다우. 그런 책은 요즘 팔리지도 않아요.』
『것보다 도령, 이거 안 살래요? 싸게 드릴게. 다른 세계에서 온 모험자의 여행을 다룬 소설책이야.』
현기증이 생기려 했다. 이들 전부가 언제까지고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일상을 반복하여 살아가고 있음에도 결국 모든 건 제자리에 그다지 머물지 못한 채 어디론가 움직여 사라지고 만다. 아름답던 나무는 썩어 밑둥만 남는다. 처녀는 노파가 되고, 번영하던 도시는 몰락한다. 물이 솟던 샘은 어찌하여 마르느냐, 초원은 왜 사막으로 변하느냐, 안타까움에 현을 튕겨 음률을 연주하지만 그런들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빛바랜 과거, 그리고 낯선 얼굴들. 나는 그 안에서 미아가 되고 만다.

『혹시 예전 주인과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게우?』
슬슬 눈치를 보는 주인장을 향해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기억하는 이가 없다면 그 사연은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미심장에게 한 마디 툭 던져놓고 간단히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좀 천천히 걸어요. 그러다 넘어집니다.』
『서둘지 않으면 늦어, 락연. 소극 상은은 여기서 한참 떨어져 있다고.』
『그럼 또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 타면 되죠.』
『이야... 락연, 넌 성격이 느긋하구나.』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법이죠.』
실언이나 마찬가지다. 살아온 햇수만 계산하면 내 쪽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피식 웃는 나를 보고 락연이 화제를 돌렸다.
『혹시 그 죽었다던 노인장과 친구였습니까?』
나는 계속해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인위적으로 입 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려니 근육이 얼얼하니 아파왔으나 이런 경우 별 걸 다 궁금해 한다며 짜증을 내봤자 상대방에게 먹혀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충 둘러대고 애매하게 매듭을 지는 것이다.
『그냥 단골손님이었어.』
『그래도 일부러 찾아와서 그 사람에 대한 안부를 물었잖아요.』
어쩐지 그 목소리에 날카롭게 가시가 돋았기에 나는 짐짓 걷는 속도를 줄이며 건물 벽으로 붙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야. 굳이 일부러 라고는...』
『어쩌다보니?!』
여전히 나는 가면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뭘 묻고 싶은데, 락연.』
『당신은 폐하와 친구잖아요. 그렇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왜 폐하의 안부를 단 한 번도 묻지 않아요? 어떻게 책방 주인에 대한 궁금증이 폐하에 대한 궁금증보다 더 클 수가 있죠.』
『자손과 친구였던 건 시오재, 나는 안즈.』
『그래서 하나도 안 궁금하다?』

이제 우리는 제자리에 멈추어 선 상태였다.
『당신... 전생했다며. 죽었다가 예전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그러면 이전 생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많이 있었을 거 아녜요. 아내가 나중에 어찌 되었는지 확인해봤어요? 자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해봤냐고요.』
『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단칼에 잘라 말하자 락연의 표정이 나빠졌다. 아마도 저건 비난의 의미이리라.
『냉정하네요.』
『현실적인 거지.』
『전혀요. 당신은 요괴보다 더 요괴 같아. 그것도 질 나쁜 요괴!』
매섭게 쏘아붙인 락연은 기분이 상했던지 나를 그대로 지나쳐 골목을 빠져나갔다.

Posted by 미야

2015/07/21 12:59 2015/07/21 12:59
Response
No Trackback , a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61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Comments List

  1. 비밀방문자 2015/07/21 14:01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293 : 294 : 295 : 296 : 297 : 298 : 299 : 300 : 301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13281
Today:
307
Yesterday:
37

Calendar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