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대부가 나오는 창고의 문을 박살내고 그 내부로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들어가 어딘가로 숨겨져 있는 유골을 빼내어오는 상상을 해봤다. 전후좌우의 정황을 고려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면 정말로 그곳에 내 뼈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만... 흉악한 몰골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정체가 뭐든 조만간 해결을 봐야 할 것이다. 더하여 나는 내 거처의 지붕 위를 돌아다니는 기분 나쁜 것들의 머리 위로 시퍼런 번갯불을 내리꽂는 장면도 즐겁게 꿈꿨다. 굉음과 같이하여 부정한 것들이 전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이다. 꼴좋다. 상상 속의 나는 벼락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면서 비릿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 안즈는 크게 주눅이 든 채 매번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따라붙는 기척이 두려워 감히 얼굴을 들어 나무 위를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크게 불면 식겁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특이체질이라고 간덩이가 커지는 건 절대 아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지켜봄을 당한다는 건 나머지 한 방울의 피까지 빨리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이었고, 앞으로 몹쓸 죄를 지을 죄인이었다. 이래선 무릎을 꿇고 어서 빌어라 강요받는 기분이었다.
『미간에 또 주름이 졌어, 너.』 『향수병.』 『그런가.』 린청은 향수병을 앓아서 그렇다는 내 설명에 그럭저럭 납득하고 넘어갔다가 돌연 표정을 바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의심은 타당했다. 본국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내가 집이 그리워 향수병을 앓는다는 건 영 어색했다. 『향수병이 아니고 누가 또 괴롭히고 그런 거 아냐? 혹시 송주가 또 못된 짓을 하고 그러든?』 『괴롭힘이라...』 나는 턱받침을 하고 앉아 이글거리는 한 여름의 햇빛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노인네처럼 한숨도 나왔다.
물론 어제도 한바탕 골탕을 먹었다. 물론 그 상대는 송주가 아니다. 녀석은 자기 패거리들과 군무 연습이 바빠 나 같은 건 안중에 없다. 「여어, 꼬맹이.」 다람쥐, 꼬맹이, 도토리, 이런 거 말고 슬슬 이름으로 불러줘도 좋으련만. 최소한 부르는 호칭을 하나로 통일이라도 해주던가. 속으로는 불평했지만 겉으로는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나란 녀석도 참으로 속이 시커멓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래도 억지로 웃는게 티가 역력하니 쓸데없는 짓이었을지도. 「이 녀석은 어찌된게 늘 빈상이야. 마음에도 없는 인사는 되었고 더워 죽겠다. 목도 말라. 냉수를 가져오렴.」 그러니까 내가 왜. 어째서. 당신 주변엔 시중을 드는 이들도 없는 겁니까. 빈사국의 졸부인 우리 아버지도 손바닥만 치면 하인이 다섯은 나타났단 말입니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목덜미를 문질렀다. 왜냐하면 마실 물을 뜰 우물까지 가려면 위치한 자리에서 일각(15분)은 족히 걸어야 했고, 거기다 다시 돌아와야 하니 왕복 걸음이다. 물을 대접에 뜬 상태로 바삐 뛸 수는 없는데다 엎지르면 낭패. 그야말로 고된 심부름이다. 하지만 자손은 정말로 더워보였고 의복은 단정치 않게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땀 냄새에 섞여 말분 냄새도 강하게 풍겼다. 값비싼 좋은 향기 이런 건 맡아지지 않아서 나는 그가 지금껏 뭘 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연무장에서 검술 실력을 닦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군장 차림새도 아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서 무얼 하시었기에?」 「궁금하냐? 엎드려서 나를 모시는 내관이 되겠다고 약조하면 가르쳐주지.」 궁금증이 그 즉시 사라졌다. 「저 같은 하찮은 자에게 마실 물을 구하여도 되겠습니까.」 「그래선 안 되는 까닭을 나열해 봐.」 「행여 물에 이상한게 섞이기라도 하면...」 「왜? 심술이 난 나머지 내게 배앓이가 나는 약이라도 먹이고 싶으냐? 괜찮다. 허락한다. 어지간하면 다 마셔주마. 갈증이 심해서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구나.」 「저어, 그보다 제게는 급히 수업이... 다른 사람에게 시키시면.」 「네놈이 여차하면 땡땡이를 친다는 거 다 안다. 수업 핑계는 안 통해. 맨날 싸돌아다니는 주제에.」 「제가 걸음이 느려서... 오래 걸릴 텐데요.」 「100년까진 안 걸리잖아. 말대답 따박따박 할 시간에 후딱 다녀와!」
나는 징징거리며 우물가로 뛰어갔다...가 요구한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황족인데 우물에서 바로 떠서 마실 물을 올려선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허둥거렸다. 그렇다고 정궁까지 가서 높으신 이가 마실 물이 필요하니 달라고 해보랴. 한바탕 곤장질을 당할 터, 그보다 내 걸음으로는 정궁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크아악! 실수했다. 이를 어쩌지! 」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 어지간하면 다 마셔주겠다는 자손의 말을 떠올리고 얼른 손뼉을 쳤다. 「소방! 그리로 가자!」 소방에 이르러 물을 달라 크게 외치니 머리에 두건을 쓴 이가 문간에서 바로 튀어나와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물이 가득 든 죽통을 내밀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미칠 지경이었음에도 궁금한 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너는 천리안이라도 가졌느냐?」 「눈은 안 좋습니다. 대신 귀가 아주 좋지요.」 예의 이가 뾰족뾰족 드러나서 나를 무진장 겁먹게 만들었던 하수였다. 나는 뚫어져라 그 자의 입을 주시했는데 이번에는 특별나게 톱날처럼 튀어나온 건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 자의 이빨 모양에 정신이 팔려 내가 영 움직이려 하질 않자 그는 쓰게 웃으며 채근했다. 「서두르셔야지요. 그분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됩니다.」 「아, 그렇지.」 「피로하실 것 같아 안에 과일즙을 조금 섞었다 고하여 주십시오. 독은 안 들었습니다.」 「설사약을 넣었다고 해도 상관없는데.」 「섞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안 듣습니다.」 사내는 단정히 말하고는 부드럽게 내 어깨를 밀었다.
다시 왔던 길을 힘들게 달려 죽통에 든 물을 자손에게 올렸더니 수고했다는 말도 없이 한 입에 쭉 들이켰다. 그런데 다 마시고 퉷 하고 뱉었다. 「에이. 뒷맛이 달아 영 개운치 않군.」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길게 내밀어 불평하기에 사실을 고하였다. 「죽통을 준비한 자가 말하길 피로하실 것 같아 과일즙을 섞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나는 당황했다. 그 자의 이름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솔직히 소방에서 일하는 자가 맞는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저어... 이름은 잘.」 「짜증나. 그러니까 뭐냐, 방금 이 몸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가 준 물을 마셨단 말이지. 그거 불쾌하군. 나는 네가 뜬 물을 원한다. 차가운 물! 다시 가져와.」 「에엑?!」 「직접 떠와!」 왜 나만 갖고 그래요오오오오~!! 비명을 질러대며 다시 소방으로 차박차박 뛰었다. 어유, 제기랄. 빈사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었는데. 다시 물을 가지고 돌아오니 누구처럼 땀 투성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여 더위를 먹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유, 옷 좀 갈아입고 그래라. 어린놈이 몸에서 쉰내가 막 나고 그럼 되겠냐.」 이게 다 누구 탓인데 자손은 짐짓 자기 코를 막고 나쁜 냄새가 난다며 나를 골렸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뛰어온 걸요.」 「그래서 땀이 났다?」 「예.」 「그럼 나와 같이 사이좋게 목간이라도 같이 할까?」 「......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사양하겠습니다.」 이상. 무릎으로 얼굴을 파묻고「괴롭힘을 당하다」회상을 종결하였다.
오전 내내 달궈진 흙으로부터 비읏한 내음이 피어올랐다. 물을 뿌리면 달군 금속이 내는 치익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너무 뜨거워 풀들도 기운을 잃었다. 이런 비정상적인 열기에 신이 난 건 벌레들뿐이다.
Posted by 미야
2015/07/13 19:48
2015/07/13 19:48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57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안즈? 왜 얼굴을 그렇게 있는대로 찡그리고 있어? 혹시 화났어?』 『그다지.』 가뭄에 콩 나는 무료 수업 중 하나인 기본 서대륙 역사학 강좌에 참석하면서 나는 탁상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탁상의 나무 표면은 거칠고 차가웠다. 잘 떠지지 않는 퀭한 눈으로 보니 뾰족한 사금파리 같은 것으로 새긴「현의 + 미각진 = 영원한 친구」라는 낙서가 보였다. 쯧쯧 혀를 차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영원한 우정 그런게 어딨다고. 다 지랄 같은 착각이지. 책이다, 교과서다, 수업이다, 글자다 이러면서 좋아했을 내가 무기력하게 뻗어버리자 린청은 가만히 이마를 만져 열이 있는지 쟀다. 『그럼 아픈 거냐? 너는 진짜지 체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니까. 정 힘들면 숙소로 돌아가서 쉬어. 어차피...』그 뒤로「도움이라고는 쥐뿔도 되지 않는 수업이잖아」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자리에 앉은 학부생들은 저마다 하품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공짜라는 말은 다시 말해 영양가 없다는 소리와 동의어였고, 담당 교수사는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의지를 점심 도시락과 같이 포장을 해 두었다가 매번 집에다 두고 나왔다. 너무 심하다는 하소연이 저절로 나왔는데 그거야 나 같은 사람 사정이고... 여기서「기본」이라 함은 이미「가정에서 이미 배웠다」를 내포하고 있는 거라 가정학습으로 이미 배웠던 내용을 한 번 더 반복하는 교육의 질은 자연스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이 탓에 치아가 부실하여 멋내기용 솜뭉치를 입에 넣고 있던 교수사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교과서를 펼치라고 말했고 제일 앞줄에 앉은 소년을 지목하여 소리 내어 읽으라고 지시했다. 사실상 그게 수업의 전부였다. 부연설명도 없었고, 자료를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지시를 마친 교수사는 다시 솜뭉치를 입안에 넣어 어금니가 전부 빠진 탓에 옴폭 패인 볼의 모습을 바로잡았다. 다시 말해 수업 중에 그가 일부러 입을 열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딴 짓을 하기엔 너무나도 이상적인 분위기라 대다수가 졸거나 무료함에 치를 떨며 딴청을 부렸다. 나는 계속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였고, 린청은 대놓고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느라 바빴다. 맨 뒷줄에서는 사무월 축제를 대비해 쪽지에 적어온 노래 가사를 암기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천마는 하루 삼천리를 달린다던데 달로 떠난 님 소식은 어찌 없는가.
앞에서는 소년이 교과서를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 위수의 공왕은 율령을 정비하고 중앙행정구역을 기존의 여든아홉에서 쉰다섯 주로 재정리를 하였다. 또한 관료제를 강화하였으며 관개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켜 소하의 물을 끌어올릴 용수로를 만들었고 남쪽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개축하였는데 이는 읍성으로의 도적 침입이 끊이질 않아 민심이 나빠졌기 때문으로 남문성을 구축하길 명하고......』 몹쓸 수질성 전염병이 돈 건 왜 빼먹어 -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투덜거렸다. 『그해 니월에 남문성 흥라문을 완공하면서 외호(아치)의 상인방 중석을 끼워넣는 마무리 작업을 마침에 있어 석수 마장부리를 아래 세워두고 장석돌을 빼내기로 하였는데 평소 감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소문이 있기에 마장부리 외에도 다섯의 관리를 아래에 세워두기로 하였다... 이때 상인방 돌이 하나 떨어져... 설계가 잘못되었다는 판단 하에 유배를 보내고...』 외호가 뭔지 모르는 린청은 무슨 이야긴지를 이해를 못했다. 『뭔 소리야, 저게.』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흥라문의 모양을 네모반듯한 모양새가 아닌 뒤집어진 밥사발 둥근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걸 최종 마무리로 지지대를 빼내기에 앞서 아래로 사람을 세웠다. 행여라도 무너지면 책임을 지고 거기서 죽으라는 얘기다. 그런데 공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목수나 석수와 같은 기술자들 말고 감리감독관까지 세워뒀다. 당시에 전염병으로 사회가 혼란했기에 공사 진행 또한 엉망이었다. 오죽하면 왕조차 부실공사를 염려했을까.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붕돌 하나가 제 위치에서 빠져나와 떨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전부 사형이지만... 가엾게 여겨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목숨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환수했다. 재산몰수는 당연했고 살던 집도 빼앗겨 빈 몸으로 내쫓았으니까.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집은 헐려 밭이 되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위수는 물론이고 오성에서도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메뚜기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원래는 전염병을 피해 도망친 난민이었지만... 먹을게 없어 결국은 한데 모여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그래서 성곽을 쌓았는데 이는 노역의 증가라 동원된 농민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공사는 덕분에 날림이었고, 흥라문 건축은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사건이 차곡차곡 무게를 더해 위수의 난을 촉발시킨다...
낭독하여 읽는 소년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듣는 입장에선 완벽한 자장가가 되어버렸다. 『저어, 목이 너무 아픈데요.』 교수사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뒷자리를 고개 짓으로 가리켰다. 그게 대단히 모호해서 여러 명이 동시에 외쳤다. 『네? 저요?』 교수사도 어쩐지 정신 줄을 놓은 눈치다. 누가 읽어도 상관없다며 또 목을 움직여 막연히「너」라고 했다. 개운치 않은 뒷맛을 느끼며 그중 한 명이 이어 읽기에 자진했다. 『중앙에는 국가 기구로서 각 방면의 정무를 관장하는 구경을 두고, 그 위에 정치를 담당하는 승상을,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를, 감탈 역할의 어사대부 삼공을 두었다... 주례에서 맹약할 적에 삼공이 모여 소를 서른셋을 잡아 제사를 지내며 다음의 내용을 낭독하였는데 첫째, 왕은 용신이 내려주시는 것으로 충성을 다할 것. 둘째, 덕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노약자를 존경 애호할 것. 세째, 관직은 세습할 수 없으며 왕은 대부를 재판 없이 죽일 수 없다. 넷째, 나라는 재황을 막고 제방을 쌓을 것. 다섯째, 매점매석하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릴 것... 승상 현공이 죄수들을 조사하여 가벼운 죄를 지은 자를 사면하였는데...』 위수의 난이 방금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삼공 정치가 나온다? 나는 모래가 발리기라도 한 것처럼 깔깔해진 눈꺼풀을 꿈뻑꿈뻑 움직였다. 모르는 사이에 졸았던 것 같다. 시대가 200년 가량 흘렀다.
방금 전까지도 하품을 심하게 하길래 졸고 있을 거라 짐작한 린청은 나와 달리 어느새 집중하여 책을 보고 있었다. 다만 보고 있는 낱장이 낭독되고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훨씬 뒷부분이었다. 이쪽에서 보내는 시선을 알아차렸던지 책을 비스듬히 세워 내게 읽던 부분을 보여주었다. 변방의 작은 나라가 마흔 삼주 벽은이 되어 이사실에 어떻게 편입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그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여기, 그거야, 그거.」 그리고는 흥미가 동했는지 다시 교과서 읽기에 몰입했다. 벽은국 부서고서리 시오재를 피투성이 괴물로 인식한 그에겐 상당히 재밌는 이야깃거리로 느껴졌으리라.
어이- 그거 순전히 뻥이다, 린청. 교과서라고 반드시 진실을 적어놓는 건 아니더라고?
거짓들. 침도 바르지 않고 내뱉은 가식의 언어들. 집어치워.
나는 부스스 일어나 뒷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명색이 수업인데 교수사의 허락 없이 교당을 박차고 나가는 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다. 옆에 앉은 린청도 당황했지만 뭐니뭐니해도 입에 솜을 넣은 교수사가 제일 많이 놀라 잔뜩 물을 먹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이오에. (이보게) 앙자 어이 가느가. (갑자기 어딜 가는가)』 나는 나흘간 지독한 설사병에 시달렸다는 식의 초췌한 안색으로 변명했다. 『몸이 아픕니다.』 린청이 주섬주섬 물건을 정리하고 내 뒤를 따라오려 하자 나는 눈짓으로 만려했다. 지금은 그저 혼자이고 싶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09 19:48
2015/07/09 19:48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55
Trackback URL : http://miya.ne.kr/blog/trackback/1955
밤새도록 긴장하고 뜬눈으로 지새운 탓인지 목이 붓고 미열이 났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십니까?』 남들보다 한 발 빠르게 조반을 먹으러 가니 밥 하던 하수가 가만히 손을 모으고 서서 내 안색을 살폈다. 그만큼 내 얼굴색이 안 좋았나 보다. 나는 아무래도 여름 감기인 것 같다며 나오는 대로 대충 둘러댔다. 『그럼 따로 만든 죽을 올릴까요.』 여기서 따로 만든 죽이라 함은 밥을 푸고 남은 솥에 약간의 야채와 물을 붓고 소금간을 하여 한소끔 끓인 걸 의미한다. 소화능력이 떨어지는 환자를 위한 식사 대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남은 재료들을 활용하여 소방 하수들이 먹을 음식을 자기네들끼리 만든 것이다. 음식 재료를 다듬고 아궁이에 솥을 거는 하수들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고, 이들이 정식으로 아침을 먹는 시간은 800명에 이르는 학부생들이 식사를 다 마친 직후다. 당연히 일하는 도중에 배가 고플 수밖에 없어 남는 부스러기 재료들을 모아 죽을 끓여 먹기 시작했는데 이게 어느새 의례적으로 굳어져 주방 구석으로 따로 큰 솥을 걸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평민이 아닌 학부생에게 정겹게 먹어보라 권할 음식은 아니다. 나는 친절에 난처해하며 에둘러 거절했다.
식욕이 없었어도 기계적으로 수저를 들고 조식으로 나온 미역냉국과 쌀밥, 볶은 소고기 반찬에 호박나물 찬을 억지로 꾸셔 넣었다. 목이 아팠기에 두어 번 씹은 뒤 억지로 꿀꺽꿀꺽 삼켰더니 그 미련곰탱이 같은 식사 모습에 쟁반을 들고 나온 하수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진짜로 싫은, 변방인, 천박한, 등등의 몇몇 단어들이 귀에 들려왔다.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몸에서 요구하는 필요 열량을 어떻게든 섭취해줘야만 한다. 없는 식욕을 탓하며 먹기를 게을리 하면 나처럼 약한 몸은 금방 축난다. 『우우욱!』 어쨌거나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치밀어 오른 걸 엉겹결에 손바닥에 뱉고 보니 밥알 모양이 그대로였다. 결국 밥을 대다수 남기고 냉국으로 위장을 달랬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수북히 남은 잔반을 보고 따로 만든 죽을 권했던 하수가 또 질문을 던졌다. 이쪽에서 밥을 곱배기로 먹든, 절반만 먹든 그다지 신경을 쓸 입장이 아닐텐데 오늘따라 같은 질문을 계속 하고 있으니 신경이 곤두섰다. 신경과민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상대의 얼굴 모양새와 눈빛을 찬찬히 관찰했다. 『왜 그러시나요. 제 얼굴에 구멍이 뚫리겠습니다.』 사내의 눈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밝아 옅은 갈색에 가까웠는데 그것만으로는 사람인지 요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것도 아니겠다, 입이 옆으로 찢어진 것도 아니겠다, 증거라고 할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쓸데없이 앞머리를 매만졌다. 이래선 혼자서 설레발이다. 마음이 불안하니 다가오는 사람 전부를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된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제가 잠시 딴 생각을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적당히 사과하고 지나치려는데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씨익 웃었다. 어쩐지 웃는 남자의 벌려진 입 안으로 뾰족한 톱날처럼 생긴 치아가 여러 개 보인 것 같아 흠칫했지만 아마도 빛과 그림자의 농간일 거다. 사람의 치아가 저렇게 길고 날카로울 리 없다. 나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 식인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이빨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조심하세요. 딴 생각이 지나치면 길을 걷다 넘어질 수도 있답니다.』 불안해하는 걸 알아차렸던지 하수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얼른 가렸다.
나는 결코 입이 헤픈 자가 아니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서「사실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랍니다. 불의의 사고로 숨통이 끊어져도 원래의 기억과 인격을 갖고 다시 돌아옵니다, 쨔잔.」이러며 자랑할 성 싶으냐. 단 한 번도 사실을 고백한 적이 없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처음은 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면서 물그러미를 만났을 때였다. 어부들은 방언으로 물그라미라고도 부른다. 요컨대 물 아래 그림자라는 의미다. 수면 밖으로 나오는 일 없어 뱃일을 하는 사람들 눈에는 고래를 닮은 시커먼 그림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간혹 흉악한 놈들 중에는 고의로 자신의 몸무게를 실어 어선과 몸통박치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만, 대다수는 사람과 거리를 두고 깊은 먼 바다에서 오롯이 활동했다. 마물이 아니라 단순히 큰 해양 생물체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그래서 있다. 나는 물그러미가 심해 오징어의 먼 사촌이라고 씌어진 책도 읽었다. 물론 그 책을 쓴 학자가 농담 따먹기를 했을 수도 있다. 나처럼 바다라는 걸 잘 모르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그렇다고 강하게 주장하면 그런가보다 가볍게 판단하는 법이다. 망할 학자는 잘들 속는다며 속으로 웃었을지도. 어쨌거나 대형 물그러미가 내가 탄 배와 충돌했고, 그 충격으로 밑바닥으로 균열이 생겼다. 나는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 계집애를 옆구리에 꿰찬 채 무작정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아무래도 배라는 건 격벽을 많이 둘러 그 내부가 거대한 미로처럼 되어버리는지라 우리는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쿵쿵 바다가 울기에 아이가 겁을 먹자 나는 소녀를 달래려고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거 아니? 아저씨는 원래 새끼용이었단다.」 「거짓말.」 「진짜야, 지금은 배 나온 뚱뚱보 아저씨지만 원래는 새끼용이었어. 용주(龍珠)라고 하는, 네 주먹보다 더 작은 구슬에서 태어났단다. 처음엔 날개도 있었어. 색은 푸르덩덩해서 어디를 봐도 내놓을 수준은 아니었지.」 아이는 약간 기운을 차렸다.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기에 나는 슬슬 아이를 안아 올려야 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아저씨가 되었어?」 「밥을 너무 먹어서.」 「아니, 배가 왜 그렇게 많이 나왔느냐고 물어본게 아니라.」 「도망치는 재주가 없어 그만 잡아먹혔단다.」 「뭐?! 새끼용을 아저씨가 잡아먹었다고?! 너무해! 당장 뱉어내!」 우리들의 대화는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아수라장 가운데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나는 뱉어내, 뱉어내 반복하여 외치며 나를 때리던 그 고사리 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봤자 우리들은 갑판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소녀와 나는 가라앉는 배에서 끝내 탈출하지 못했고 침착함을 잃은 수많은 이주자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술에 취해 아내에게 말했던 것도 같고.」 부부사이에 숨기는 건 없어야 한다며 고백을 했던 것도 같다. 솔직히 기억은 흐릿하다. 나에게는 제법 되는 수의 아내들이 있었고 - 남편들도 있었다. 결코 행복하지 않은 결말로 치달았지만 시오재 또한 아내를 맞이했다. 「사실 나는 사악한 악귀였다오. 용주(龍珠)를 주제도 모르고 한입에 꿀꺽 삼켰지.」 「어머나, 술을 꿀꺽꿀꺽 드시면 나빠요.」 「부인, 혹시 용주라는 걸 아시오?」 「그건 오징어 호롱이라고 하는 거랍니다. 용주가 아니에요. 맛있어 보이기에 시장에서 샀어요. 가격도 참 착해요. 다섯 마리 한 접시에 닷푼밖에 하지 않았어요.」 「그랬구려. 그런데 여기엔 왜 세 마리밖에 없을까?」 「한 마리는 오는 길에 참지 못하고 제가 먹었어요. 미안해요. 화났어요?」 「음... 다섯 빼기 하나면 몇이지?」 「셋이잖아요. 설마, 그 정도도 제가 모를까봐요.」 시오재의 아내는 처녀 시절에 사고로 머리를 다쳐 반 백치였다. 하지만 천성이 착했고 순박했다. 나는 영원히 소녀와도 같을 그녀를 사랑했다. 백발 꼬부랑 노인네가 되어 한 날 한 시에 나란히 죽자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시큰거리는 콧잔등을 얼른 눌러대며 정신을 추슬렀다. 《실은 오래전부터 저희들 사이로 그런 얘기가 은밀하게 돌았습니다. 나리는 죽어도 계속하여 강생하신다고...》 누군가에게 내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기억을 못 한다. 《인간의 몸으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 계속해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제대로 죽지도 못하고.
으슬으슬 추워왔다. 열이 더 오르는 듯하여 양팔을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도대체 누구에게 말을 했지?」 발가벗겨져 만장하신 가운데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덮쳤고, 이어 돌아가는 상황을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07 13:52
2015/07/07 13:52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5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Recent Comments
Site Stats
- Total hits:
- 1013166
- Today:
- 192
- Yesterday:
- 37
Calendar
«
2024/11
»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