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걸어 발바닥이 화끈거릴 무렵에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소극 상은은 그 명칭에 깨어날 소(蘇)에 이길 극(剋) 글자를 사용했는데 어쩐지 그 직관적 인상은 작을 소(小,) 적을 소(少,) 그것도 아니면 푸성귀 소(蔬) 글자와 많이 흡사했다.
간판만 컸지 건물은 세로로 길죽한 2층이었다. 과거에 동대륙에서 거래하던 오남 상회와 비슷한 걸 상상했다가 직접 눈으로 그 크기와 규모를 보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물론 나의 잘못이다. 사과를 손에 들고 자두의 맛을 상상해서야 쓰겠는가. 두 가지 과일 모두 붉은 껍질을 가졌지만 크기도 다르고 그 향과 달기도 차이가 있다. 값비싼 비단을 필두로 각종 장신구와 금붙이를 다루던 오남은 큰 배만 세 척을 소유한 거대 상회였는데 그 역사만 300년이 넘었다. 그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상회를 떠올리며 지역 상은의 번지르르함을 기대했으니 전부 나의 불찰이다.
『이곳인가요?』
『맞는 것 같아.』
나는 증서에 적힌 이름과 건물 규모와는 맞지 않는 덩치 큰 간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리 말했다.

그래도 돈을 거래하는 장소인 만큼 출입구와 창문에는 단단한 쇠붙이로 두껍게 격자 장식을 만들어 달아 금품을 노리는 자들로부터 내부를 지키고 있었다. 사설 경비원으로 짐작되는 자도 한 명 있었다. 다만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자는 아니어서 덩치만 컸지 물렁살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자세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법이다. 경계하며 출입구 주변을 계속해서 왔다갔다 움직이는데 걸을 적마다 어깨가 크게 흔들거리고 보폭도 크기가 제멋대로다. 뒷꿈치를 끌고 걷는 버릇도 있었다. 건달이 달려들면 그럭저럭 힘으로 제압할 수는 있겠으나 그 이상은 무리다. 옆구리에 찬 검은 그저 장식이다. 뽑아서 실전으로 휘둘러본 적도 없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이쪽에서 먼저 눈인사를 하자 긴장하여 험악해졌다.
『무슨 용무요.』
그러면서 내가 아니라 락연을 주시했다. 여차하면 어떻게 요리하여 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눈빛이었다. 이 자는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고객이 아닌 강도라고 가정하라 사전 지시라도 받았나? 그렇지 않고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의 옷차림이 거부감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락연은 아무리 봐도 귀족이 아니었고, 재산이 많은 중인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며, 나야 빌려 입은 옷이라 그 형상이 몹시 꾀죄죄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는 계속해서 락연을 물고 늘어졌다.
『무슨 용무라고 묻지 않았소! 대답하시오.』
『말씀하시는 대상이 틀렸습니다. 이자는 동행하는 입장일 뿐이고 용건이 있는 쪽은 접니다. 본가에서 맡긴 돈을 찾으려고요. 그러니 저를 보고 말씀하시지요.』
그제야 남자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내 말을 전부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보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더러운 벼룩을 찾으려 했다. 그나마 손에 증서를 꺼내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후딱 내쫓으려 하였을 것이다.
『이름을 말하시오.』
여기서? 길바닥 한 가운데서? 그런 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니던가.
나는 의아해하며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렸다.
『지리가 가의 안즈라고 하는데요.』
가만가만 눈치를 보다 다음으로는 머리에 쓴 약식 하리건을 벗어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 찰라, 사내가 턱짓으로 위층으로 올라가라 시늉을 해보였다.
나와 락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좁게 솟은 건물의 2층을 주시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요? 엄청 갑갑하게 만들었네요.』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게 만들어진 문을 열자 마찬가지로 비좁은 비탈 통로가 나타났는데 경사가 가팔라서 계단이라기 보다는 흡사 사다리를 연상시키는 구조였다. 거기다 양팔을 조금 펼쳤을 뿐인데 양쪽 벽이 모두 만져졌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내려오는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낭패다. 한 명은 벽에 코를 대고 서서 까치발을 한 뒤에 최대한 숨을 들이마셔야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봤자 엇갈려서 지나간다는 건 무리다.
『돈 찾으러 왔다가 성질을 내고 다 부수고 가겠어요.』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안 좋아. 비움토에 있는 유명한 공성이 이런 구조를 하고 있었지.」
그곳은 공략이 불가능한 불패의 요새였다. 올라가는 통로가 비정상적으로 좁아터진 관계로 병사가 한 명씩 진입해야 했는데 방어하는 입장에선 올라오는 족족 기다란 창으로 찌르기만 하면 되었으니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나중엔 쌓인 시체 때문에라도 내부 깊숙한 곳으로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나가려면 동료의 시신부터 치워야했다. 그러다 뒤에서 출입문이 닫기기라도 하는 날엔 좁은 통로에 낀 병사들은...
『덫 안에 갇힌 쥐 신세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예의 물렁살 경비원이 등 뒤에서 쿵 소리가 나게끔 출입문을 걸어 잠궜다.
《빈사국에서 온 손님이다! 손님 맞아라!》
락연이야 사람이 아니니까 얼굴색이 변할 일이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달라서 그 즉시 하얗게 질려버렸다.

『함정이었어! 락연! 도로 내려가야 해!』
『에?』
내 뒤에 선 락연은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도련님, 저 위에서 용무를 보셔야 하잖아요.』
『함정이라니까!』
망할 놈의 아버지. 역시 내 편지를 읽고 거기에 대한 답장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덫으로 유인하고는 날 잡으려 한 거였어 - 뒤돌아서 락연의 머리와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서둘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악, 악! 서둘지 말아요, 그러다 넘어진다니까요.』
『불평할 때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서둘지 않으면 죽어!』

빈사국에서 온 손님이라는 말을 듣고 2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가 통로의 끝자락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광 탓에 새카만 윤곽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오른손에 식칼을 들고 있다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식칼?!」
이 상황에서 식칼은 또 뭐냐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 자가 식칼을 쳐들고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쿵쾅거리며 계단이 울리는 소음과 신음, 심장이 뛰는 소리, 삐이 하고 울리는 이명 - 찰라와도 같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을 삼킨 채 어둠 속에서도 반짝임을 보이는 금속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생선을 다듬는 칼이다. 시장에서 싼 가격으로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허접한 물건이었다. 단, 사용한 적이 없는 새 칼이었다. 손잡이에서 나무향이 진하게 났다. 그건 비릿한 생선기름이 묻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의미했다.
여전히 식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어둠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잔뜩 일그러지고, 눈은 크게 벌어졌고, 잔뜩 주름이 졌고... 소금기가 번져 입술은 타버렸다.
『타평... 너냐.』

한심한 기분이었다.
왜 도망치지 않은 거냐. 어째서 그 숲에서 숯을 굽는 마을을 향해 도망치지 않은 거냐.
여전히 너에게 사명이 남았느냐.
아버지의 명령 따위가 뭐라고. 종놈이면 종놈답게 다 내려놓고 도망쳐도 되는데. 왜 너는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야. 지리가 가문에서 넌 쓰고 버리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아버지도, 핏방울 하나 섞이지 않은 어머니도, 배다른 동생도 네게 이걸 강요할 권리는 없어.

하지만 넌 기쁜 마음이겠지.
주인나리께 충성을 바치는 네 자신을 그토록이나 자랑스러워하면서.
쓸.데.없.어.

『안즈 도련님!』
나를 보호하기 위해 락연이 내 몸뚱이를 밟고 뛰어넘으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의치 않자 락연은 팔을 길게 뻗어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 그걸 나로부터 밀어내려 기를 썼다.
『안즈 님!』
사람의 체중까지 실린 칼날이었다. 근육과 신경이 잘려 순식간의 락연의 손은 너덜너덜해졌다.
체액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머리와 얼굴을 향해 확 흩뿌려졌다.
『넋 놓고 있지 마! 넋 놓고 있지 말라고! 안즈 님!』
그곳은 이미 훌륭한 개미지옥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7/25 11:07 2015/07/2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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