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18

정확히 약속된 시간에 초인종을 눌렀음에도 어떠한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목을 길게 빼고 주변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건물 내부는 전반적으로 고요했다.
「뭐, 때마침 화장실에 갔을 수도 있지. 그럼 벨 소리를 못 들었을 거고.」
옆구리로 와인 병을 끼고 있던 핀치는 느긋하게 조금 더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베어가 - 훈련받은 군견이라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다 - 망할 똥강아지 - 현관문을 앞발로 파바바박 긁어가며 끄엉끄엉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것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그도 눈치를 챘다.
그 잘난 네덜란드어는 집어치우도록 하자. 핀치는 영어로 명령했다.
『베어, 뒤로 물러나렴.』
이놈이 네덜란드어만 알아듣는다고 누가 그랬나.
그 즉시 베어는 귀를 쫑긋 세우고 늠름한 차렷 자세를 취했다.
『2개 국어를 하는 건 좋아. 하지만 언젠가 우리 둘이서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구나, 베어.』
열쇠구멍과 씨름하다 말고 핀치가 투덜거렸다.
언젠가 리스는 핀치에게 범핑 키를 만들어준 적이 있다. 톱날 모양으로 다듬은 열쇠를 구멍으로 집어넣은 뒤 좌우로 흔들어주다 망치 같은 것으로 충격을 주면 내부 핀이 밀려 올라가면서 우연히 쉬어라인이 형성되는 순간 열쇠가 돌아가게 된다. 망치는 수중에 없는지라 궁여지책으로 핸드폰으로 열쇠 머리를 두어 번 찍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경쾌한 찰칵 소리가 났다.

『미스터 리스?』
문을 열자마자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핀치는 조심성이 많은 사내다. 10초 정도 일부러 뜸을 들였다가 문의 좌우 면으로 수상한 기운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성한 오른발을 먼저 움직여 집안으로 들어갔다.
『존?』
아파트 안엔 회색 연기가 자욱하다. 코가 매캐하다. 실수로 연막탄이라도 터뜨렸나.
『존!』
이대로 뒷걸음질로 빠져 나가야 하나, 아님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어딘가로 쓰러져 있을 존을 찾아야 하나. 결정을 선뜻 못 내리고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연무 탓에 눈이 따끔거리고 아팠다. 기침도 나왔다. 콜록거리며 눈물을 닦느라 잡고 있던 목줄을 놓쳤다. 그걸 신호라고 착각한 베어는 쏜살같이 주방 쪽을 향해 뛰어갔다.
『베어! 어디 가는 거니! 베어!』
놀라서 개의 이름을 불렀는데 손바닥으로 연기를 내쫓으며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아아, 괜찮아요. 핀치. 아니다. 이건 괜찮은 것과는 거리가 멀군. 이를 어쩐다. 쿨럭.』
그러니까 닭이 오븐 안에서 화형 당했다.

『다행이라면 불타오르기 전에 이미 닭은 죽어있었다는 거죠.』
매운 연기에 장사 없다. 핀치와 마찬가지로 눈물을 글썽거리던 리스는 창문이라는 창문은 전부 열고 다녔다. 그동안 핀치는 혹시라도 불씨가 남아 화재로 번지는 건 아닌가 싶어 주방을 기웃거렸고, 연기의 진원지인 오븐을 열어보는 실수도 저질렀다. 진정될 기미를 보이던 연기가 다시 확 솟구쳤다. 덕분에 고통스러운 기침소리가 더욱 커졌고, 창문을 열던 리스는 만사를 뒤로 미루고 돌아와 헐떡거리며 우는 핀치의 팔꿈치를 잡았다.
『물러서요.』
『혹시 소방서에 신고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콜록.』
『그 정도는 아니에요. 켁.』
『콜록, 켁!』
『물수건을 줄테니 코와 입을 막고 있어요. 그럼 진정될 겁니다.』
이후로 약 5분간에 걸쳐 두 사람은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콜록거렸다.

연기가 어느 정도 잦아들자 리스는 허겁지겁 사과부터 했다.
『정말 미안해요 핀치. 미안해요.』
하지만 사과는 뒷전이고 핀치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웃느라 바빴다. 세상에. 그러니까 새카맣게 태웠다는 거지. 요리가 아무리 서툴러도 이런 식의 대재앙은 흔치 않은데. 눈치는 멀쩡해서 그가 기침을 참고 있는게 아니라 키득거림을 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존은 풀죽은 표정으로 망할 행주를 집어 던졌다. 전의를 몽땅 상실한 고용인의 몸짓을 보고 핀치의 눈자위가 더욱 붉어졌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어디에 털이 난다고 했는데. 알게 뭐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동시에 히히 웃어버렸다. 천하의 존 리스가 빵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와서 허탈해하고 있다. 다시는 구경하지 못할 광경이다.

여전히 헐떡거리면서 핀치가 질문했다.
『레시피가 잘못된 거였나요.』
『모르겠어요. 온도와 시간 조절을 가르쳐준 대로 했거든요. 그런데 왜 불이 나는 거지.』
『짐작이 가는게 하나 있긴 합니다만. 아마도 우리 형사님은 냉동 닭을 주로 애용하시는 듯하네요.』
『냉동?』
『냉장 닭보다 냉동 닭이 더 싸요. 게다가 조리법만 완벽하면 맛은 별 차이가 없죠. 영양은 냉장 닭이 더 훌륭하긴 합니다만... 보관의 편이함까지 고려하자면 출퇴근이 일정하지 않은 강력계 형사에겐 재빨리 조리해서 먹어야 하는 냉장 닭보다는 냉동실에 두고두고 얼려뒀다가 필요할 적에 해동하여 먹는 편이 더 매리트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리스 씨는 냉장된 닭을 샀죠? 왜냐하면 그게 더 비쌌을테고, 당신은 비싼게 좋은 재료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손님을 초대한 마당에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어. 그게.』
『얼린 닭은 해동을 해도 냉장 닭보다 더 차갑습니다, 미스터 리스. 그래서 오븐 온도가 더 높아야 하지요.』
다시 한 번 핀치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유쾌하군요. 어쨌든 저녁은 물 건너갔으니 피자라도 주문하죠? 이참에 기름덩어리 불량식품으로 배를 채워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제가 가지고 온 와인은 나중으로 미루고... 냉장고에 맥주는 있나요? 안주거리도 있음 찾아봐요.』
『정말 미안해요, 핀치. 미안해요. 이렇게 망치고 싶지 않았는데.』
사과는 그만하라며 손가락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페페로니 피자요, 미스터 리스.』

Posted by 미야

2012/11/07 11:23 2012/11/0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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