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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13

소년의 어머니는 마음 어딘가가 부서진 사람이라서 배 앓아 낳은 자식에게도 그다지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뺨을 쓰다듬거나,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어린 제이크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또래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며 달려가 포옹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이마와 뺨에 키스를 받는 거에 놀랐다.
비교할 대상이 생기고 나서야 아이는 자신의 불행함을 깨달았다.
사랑받지 못함에 절망하고 베갯잇을 눈물로 적혔을 적에 그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특별한 아이입니다. 머리가 좋아요. 하지만 반항적이죠. 아주 끔찍하게 반항적입니다.」
「사내아이잖아요. 다들 그럴 걸요.」
「말썽꾸러기라도 동갑내기 여자애의 뺨을 주먹으로 치는 건 흔치 않죠, 어머님.」
교사는 소년에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는 딱지를 붙여 정신과 상담을 받게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려「싹수 노람」스티커가 100미터 밖에서도 번쩍거리게 만들어 버렸다. 그 동갑내기 여자애가 고슴도치를 연상케 하는 소년의 머리모양이 우습게 생겼다며 강제로 가위질을 했다는 이야기는 쏙 들어간 채였다.

「너는 왜 나가서 놀지를 않니. 뭐가 문제냐, 얘야.」
「날 그냥 내버려 둬요.」
아이는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도서관에서 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 네가 읽고 싶은 책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에 대한 거라는 거지? 어디 보자. 그럼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해 알아야 하겠구나. 그런데 역사는 어디까지 배웠니?」
「장군이 아니고 그냥 한니발이오.」
「장군이 아니라고?」
「제가 원하는 건 역사책이 아니고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책이에요.」
사서는 당연히 기겁을 했다. 열 한 살짜리 애가 식인 살인범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하다니.
두꺼운 안경을 쓴 여자는 눈을 부릅뜨고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흐음, 그 잘난 미세스 모이어즈도 이젠 실업자가 되었겠군.』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1시간가량 전속력으로 밟아야 하는 곳이다. 어렸을 적엔 무리를 해서라도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꼭 들리곤 했다. 뉴욕 시립 도서관이었던 이곳은 제이크의 비밀 아지트였다. 지금은 예산을 이유로 폐관되어 쇠사슬로 입구가 봉인되어 있다. 어른들이 하는 일들은 죄다 이런 식이다.
시험 삼아 쇠사슬을 앞뒤로 잡아당겨 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슬은 제법 튼튼했고 자물쇠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종류였다. 게다가 안쪽엔 두툼한 철문까지 만들어 달았다. 녹의 유무와 관리 상태로 보아 최근에 붙여놓은 것으로 여겨졌다.
쳇, 소리를 내며 구석으로 침을 뱉었다.
어쨌든 해가 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소년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직장 일이 고된 어머니도 아들이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면 이후부턴 아는 체 하지 않는다. 일찍 잠자리에 든 것처럼 꾸미고 밖으로 빠져나와도 단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다. 미리 기름칠을 해둔 현관문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계획대로다. 신발을 손에 들고, 약간의 식료품과 물, 손전등, 무릎담요가 든 가방을 메고는 탈출을 감행, 밤에는 낮과는 달리 기온이 더 내려가니까 모자나 장갑도 챙겨둬야 한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가 가볍다.

최근에는 문을 닫은 도서관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 세상에 유령 따위가 어디에 있다고.」
인기척이 없음에도 가느다란 불빛이 종종 창밖으로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은 야간 공사의 불빛이 밖으로 보이는 거지. 하지만 이 경우는 아니야. 공사 안내판 같은 건 어디에고 없었어. 그러니까 갈 곳이 없는 노숙자가 꼬여든 거야.」
노숙자는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지하철 내부에도 있다. 햇빛이라고는 요만큼도 들지 않는 곳에서 시궁창 쥐와 같이 어둠 속을 살아간다. 그러니 그들이 홀딱 망해버린 도서관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들어갈 구멍이 있다면 기어코 들어갔을 것이다.
「구멍, 구멍, 구멍... 어디에 있는 거지.」
제이크는 다섯 바퀴 째 건물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낮에 자물쇠를 잘라낼 수 있는 톱을 사려고 공구를 파는 철물점에 들렸다.
생각보다 가격이 좀 쎘다.
것보다 주인이 물건을 안 팔았다.
「네 아버지와 같이 오거라.」
「심부름을 왔다니까요.」
「보호자와 같이 오라니까. 몇 살이지? 열 살? 열 두 살?」
「짜증나네. 제가 그걸로 강아지 뒷다리라도 썰 것 같아요?!」
「보.호.자. 이걸로 대화는 끝이다.」
집에는 공구상자가 없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톱이니 망치니 하는 것들과는 담 쌓았다.
「망할 자물쇠.」
벽을 타고 2층까지 기어 올라가 창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 볼까 생각도 해봤다. 제이크는 키가 작은 편이지만 몸은 민첩하다. 그러나 대리석으로 치장된 미끄러운 외벽을 타고 3미터 가량을 수직으로 올라갈 능력은 되지 않는다. 그러려면 감마선에 오염된 독거미에게 물렸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초능력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이제 여섯 바퀴 째 돌았다.
제이크는 다시 출입구를 막은 자물쇠와 쇠사슬을 노려보았다.
영화에서 보면 머리핀이나 클립을 가지고 자물쇠를 열던데.
되던 안 되던 에라 모르겠다 심정이 되어 클립으로 자물쇠 구멍을 쑤셔봤다. 한 5분 정도 그래봤다.
『역시 드라마와는 다르구나.』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봐야겠다. 클립으로 열쇠 여는 법. 자물쇠 따는 법.
짜증을 내며 클립을 내동댕이쳤다.
그와 동시에 소년은 이리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흠칫해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만 돌렸다.
검은 얼굴에 눈만 반짝인다. 제법 크다. 소년의 몸집과 비교하면 저쪽이 더 클 것도 같... 아니, 아니. 이런 도시에 이리가 있는 건 반칙 아니야? 게다가 광견병에 걸린게 분명하다. 입에서 침이 뚝뚝 흘러내린다. 뛰어서 도망가? 무리다. 두 다리로 달리는 건 네 다리로 달리는 것보다 속도가 느리다. 그럼 어쩐다.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무기로 써먹을 종류는 손전등이 유일하다. 아울러 손전등으로 이리의 머리를 때리기 전에 뼈까지 물어뜯길 확률이 더 높다.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되는구나.』
짐승 뒤편으로 인영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는다.
제이크는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손전등을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혹시 길을 잃었니?』
불빛을 비춰보았다.
양복을 입은 커다란 키의 남자가 눈이 부신지 인상을 찡그렸다.

『상관하지 마요.』
남자는 큭, 하고 웃었다. 이쪽은 무서워 죽을 지경인데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재밌다 생각하는 눈치다.
『상관을 안 할 수가 없겠는데. 방금 전에 네가 자물쇠를 만지는 걸 봤단다. 그리고 이곳은 출입 금지 지역이거든.』
오, 봤다고? 그러셨어? 소년은 즉석에서 거짓말을 지어냈다.
『누가 이곳으로 들어가는 걸 본 것 같아서요. 그래서 확인하려고요.』
『누가 들어갔다고.』
『어쩌면요. 확실하진 않아요. 제 착각일 수도 있죠.』
『그래서 1시간 넘게 건물 주위를 계속 살피고 있었던 건가?』
대꾸하지 않고 손전등을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짐승이 왕왕 울부짖었다. 남자가 외국말로 무어라 하자 곧 그치긴 했지만 - 모자가 바람에 날려갈 정도로 달음박질 중이던 제이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 * 미국은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네 고등학생들처럼 도서관을 일반 독서실 대용으로 사용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든 말든 도서관이라면 정기적으로 방문했을 이용자들이 있었을텐데 그냥 빈 건물로 언제까지나 내비둬 - 게다가 밤중에 불빛이 새어나와 - 왜 그런 거지 궁금해할 사람이 분명 생길 겁니다. 비밀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의 아지트라고 하기엔 너무 눈에 틔어요. 뭐, 뉴욕에는 배트맨식 동굴이 없엉 - 네엥.
몰래 침입한 노숙자가 핀치와 마주치고 서로를 향해 놀라 으아악 비명을 지르는 장면도 있을 법하죠.
거꾸로 핀치가 기절하거나. (웃음) 인공호흡 리스라던가. (폭소) 그리고 우리의 좐 리스는 인공호흡이라고 하면서 포동포동한 사장님의 뱃살을 조물거리겠지. 제길, 부럽다.

어쨌거나 엘리멘트리 자막이 안 나오네...

Posted by 미야

2012/10/31 11:30 2012/10/3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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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12

내키는대로 자유롭게 끄적거리고 있는 낙서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걸 번호를 붙여가며 계속 하고 있는 거지. 일부는 드라마 설정과 맞지 않습니다. 잘 모르겠는 건 지어냅니다.


『어머나, 해롤드!』
여자는 무섭다. 반갑다며 방긋 웃어도 어쩐지 여자는 무섭다.
속으로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저 여자는 루트가 아니다. 저 여자는 루트가 아니다.
리스만큼이나 키가 커도 그녀는 7cm 굽의 힐을 신고 있었다. 평균치 신장의 핀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아야 한다. 굴욕감 그런 건 모르겠고 척추 고정술을 받은 뒷목이 땡기며 아파왔다. 통증은 필연적으로 그의 뺨 근육을 굳게 만들었다.
어색하게 굳은 핀치의 표정에 훤칠한 키의 숙녀가 멈칫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쪽의 눈치를 살펴왔다.
『저 매그예요. 기억 안 나세요? 같은 회사에서 9년간 같이 근무했었잖아요.』


물론 기억하고말고. 위장취업을 했었던 IFT 산하의 서버관리 업체에서 책상 두 개 건너편에서 일하던 여자다. 자녀가 두 명 있고 남편은 갑상선 암으로 3년간 투병하다 사망했다. 간병일도 그렇지만 사별 경험이 워낙에 끔찍스러워 사귀는 남자가 있어도 재혼은 아예 생각을 안 했다. 불치병을 앓던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상당히 괴롭다. 그리고 그 죽음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매그는 거의 지옥 밑바닥 근처까지 내려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핀치는 매그가 복도 구석에 숨어 울음을 삼키는 걸 훔쳐 본 기억이 있다. 마스카라가 번져 그녀의 눈물은 새카만 빛깔이었다. 어쩐지 그런 그녀의 처지가 불쌍하게 생각되어 회사 차원에서 아이들 교육비를 지원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애들은 크게 말썽 부리는 일 없이 잘 자랐다. 여자 아이의 이름은 도로시, 남자 아이의 이름은 스티브다. 그들이 키우던 개의 이름은 맥스다.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치는 건망증 핑계를 댔다.
『아, 매그. 이제 생각납니다. 제가 기억력이 형편없어서. 이거 정말 우연이군요.』
핀치가 반색을 표현하자 매그 또한 손뼉을 쳤다.
『그러게요. 이렇게 만나기도 하네요. 잘 지냈어요? 해롤드. 그만둔다는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모두 걱정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 좋네요. 안색도 더 좋고. 건강이 나빠져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때요? 이제 좀 괜찮아진 거예요?』
『뭐,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위장취업을 나갔을 적에 핀치는 일부러 직장 동료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컴퓨터나 좋아하는 괴짜 - 사람과 친해지는 걸 좋아하지 않고 - 카달로그 쇼핑이나 즐기고 - 울증이 있는 병신 같은 상관에게 맨날 야단만 맞고 - 술도 못 마시는 샌님 - 매력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독신남 - 스스로 더러워진 팬티를 세탁하는 구질구질한 남성 - IT 찌질이라는 이미지는 굳건해서 친구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책상 칸막이는 높았다. 점심은 늘 혼자서 먹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목례로 인사를 하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 - 쉬우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주변 동료들의 얼굴들은 하나 둘 변해갔고, 적당한 시간을 채우면 다른 장소로 옮겨갔다. 가끔 사귐성이 좋아 같이 야구 경기를 보자며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적마다 핀치는 미스테리한 권한을 행세하여 상대의 부서를 재배치시켰다. 그는 상륙이 불가능한 독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접을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순수한 마음으로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안부를 걱정하는 사람은 늘 있어왔다.
『해롤드, 건강해보여서 정말 기뻐요.』
그들의 선의는 해롤드에겐 언제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다.


「헤이, 버디. 인간은 모두 별이야.」
「별?」
「최신형 로켓을 타고 평생을 가도 절대로 닿을 수 없지. 모두가 외롭고 고독해.」
「음...」
「하지만 쓸쓸해하지 마. 너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면 된다고. 별은 모두 저곳에 있고 너는 그걸 언제나 볼 수 있어. 별들은 모두 반짝반짝 빛나면서 나는 이곳에 있어요, 잘 있어요, 당신은 어때요, 나도 사랑해요, 이러고 신호를 보내지. 그래서 저건 카시오페이아.」
「것보다 추워 죽겠어, 네이슨.」
「.......... 넌 정말 분위기 깨는데 일가견이 있구나, 해롤드.」

별이다.
닿지 않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이번만큼은 가식을 접고 환하게 웃었다.
『당신이 건강해 보여서 나도 기뻐요, 매그.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Posted by 미야

2012/10/30 09:32 2012/10/3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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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상생활11

오랫동안 파트너로 같이 일해 온 캐라는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병맛이어서 그녀가 총에 맞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캐라는 결코 부러지지 않는 막대기와도 같았고,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날과 닮았으며, 때로는 미친 야생동물처럼 보였다.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 떨어뜨려 놓아도 어떻게든 오아시스가 있는 곳까지 기어나올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리스는 어쩌다 파트너가 뒤로 처지는 일이 생겨도 그녀의 생존 여부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 내가 구덩이에 빠지면 날 구하러 오지 않을 거예요?」
「임무를 망각하고 뒤돌아 당신을 구하러 가면 화를 낼 거잖습니까.」
「물론 내 앞가림은 알아서 할 거예요. 그래도 빈말이라도 좀 할 것이지.」
2천 달러짜리 명품 구두에 발을 밀어 넣으며 캐라가 투덜거렸던 말이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과 임무를 같이 한 경우는 많지 않았... 아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던 풋내기 종군기자를 끌고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팔루자에서 빠져나왔던게 거의 유일했던「일반인과 함께하는 명랑한 총알 피하기 투어」가 아니었나 싶다. 무자헤딘 소속의 과격파가 미군의 시체를 유프라테스강 철교 위에 거꾸로 매달아 두었던 장소에서 겨우 1km 떨어진 곳이었다. 펜이 총보다 강하다고? 사진 찍다 얼굴에 총알이 박히면 그런 얘긴 쏙 들어간다. 종군기자의 목덜미를 쥐고 위아래로 탈탈 흔들면서 리스가 했던 말도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죽으면 버리고 갑니다.」
총도 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한다는 건 일종의 책상을 복도로 내다놓기, 내지는 강제된 은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품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민간인과는 얽히지 말 것.」
살아남으려면 그 편이 좋다고 리스는 깨달았다.

자! 이제 핀치로 돌아와 보자.
다리가 불편해서 달리기가 안 된다.
총을 사용할 줄 모른다.
헤엄은 칠 줄 안다. (본인 주장)
사과를 깎다 손가락을 베였다.
현장에 나갔다가 주먹으로 얻어맞기도 했다.
결론 : 도서관 의자에 그냥 앉혀놔야 속이 편하다.


스턴건을 하나 샀다. 작동법을 숙지시키며 시험 삼아 버튼을 눌러보라고 시켰다. 핀치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제기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잘도 천하통일을 하겠다. 결국 리스가 장만한 스턴건은 서랍 어딘가로 처박혀 그대로 영수증 처리가 되어버렸다. 들고 설치다가 오히려 상대에게 뺏겨버릴 것 같아서 - 마지못해 리스는 핀치의 의견에 동의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핀치는 호루라기를 불다 호흡곤란을 일으킬 스타일이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말아요. 그래도 제가 조심성 하나는 많답니다, 미스터 리스.』
어느 정도 인정을 할 부분이라고 리스도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존은 핀치가 살고 있는 집이 어디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완벽하진 않아서 미행을 하면 다섯 번에 세 번 정도는 눈치를 못 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르는 녀석이 강제로 껴안고 입을 맞추는데 눈을 감는 사람이 어딨어요.』
『맹세하는데 눈 안 감았습니다.』
『그럼 눈 뜨고 고스란히 당했단 말예요?!』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고요.』
『그럴 적엔 상대방의 발잔등을 있는 힘껏 짓밟아버리라고 가르쳐 주었잖습니까.』
『당황해서 잊어버렸어요.』
그런 기억력을 가지고 MIT는 무슨 재주로 졸업을 한 거야 - 버럭 고함을 지르려다 숫자를 하나부터 다섯까지 헤아렸다. 침착, 침착하게. 화내지 말고. 어쨌든 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런데 점점 더 발끈하고 있는 까닭을 모르겠다. 잔뜩 부어오른 핀치의 입술은 언뜻 보기에도 색정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열 받았다. 나라면 저렇게 무식한 짓을 하지 않아. 최초의 접촉은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며 부드럽게 해야... 이쯤해서 리스는 으르렁대며 발을 굴러댔다. 그것도 이성을 라면 국물에 말아 잡수시고 쿵쿵 굴러댔다.

『밟아요. 밟는 겁니다. 이렇게, 이렇게! 꼭 기억해둬요.』
『아, 네. 네.』
박력에 밀려 핀치가 말을 더듬거렸다.

Posted by 미야

2012/10/29 11:15 2012/10/2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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