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17

같이 살아요.
거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그 짧은 대사를 한 삼천 번 정도 연습해본 것 같다.
하지만 막상 핀치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두꺼운 고무마개가 목구멍을 틀어막곤 했다.

나와 같이 살아요. 당신을 혼자 살게 해서는 내 마음이 놓이질 않아요.
그래봤자 아래턱이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같, 같, 같, 같이. 이런 젠장.」중얼거리곤 혀를 깨물었다. 내일은 오천 번 연습해보자.

『미스터 리스? 왜 그래요. 커피에 설탕 말고 소금이라도 들어갔어요?』
핀치가 테이크-아웃 커피 컵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찌그러진 철판에 사람의 눈코입을 대충 그려놓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스는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이정도로 의사표현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커피를 끔찍스럽게 여기는 그의 고용주는 지금이야말로 향긋한 카모마일 차를 구제불능의 커피중독자에게 권유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할 거다.
아닌게 아니라 핀치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영국에서 건너온 좋은 물건을 구했어요. 같이 마셔볼래요?』
『괜찮아요.』
『후회할텐데.』
흥이 깨졌다며 얼른 돌아선다.
그 뒷통수에 대고 리스는 다시 염불을 외웠다.
나와 같이 살아요.
으잌. 안 된다.
리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뱃가죽에 총알이 수십 발 박히고 나서야 유언으로 동거 제안을 가까스로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음. 미래는 대단히 암울.

핀치의 상태는 그럭저럭 좋아졌다. 길을 걷다가 현기증을 일으키는 일도 줄어들었다. 혼자서 다이너에 들어가 음식 주문도 한다. 단, 식사량은 예전의 절반 수준이다. 그래서 살이 빠지고 있다. 기존 옷들이 헐렁해진 덕분에 핀치의 전용 재단사는 일감이 늘어나 기뻐하는 눈치다. 재단사는 미스테리한 갑부를 위해 부지런히 새 옷을 지어다 바쳤다. 더하여 새 와이셔츠와 넥타이, 커프스 단추의 숫자가 늘어났다.
「오늘의 커프스는 못 보던 종류네. 체크.」
긴장증은 본인도 의식하는 문제라서 핀치는 틈이 날 적마다 보드판에 붙여놓은 루트의 사진을 향해 눈싸움을 걸곤 한다.
당신은 나를 상처 입히지 못했어요. 난 두렵지 않아.
이런 속도라면 조만간 원래대로 회복될 것도 같건만.
리스가 갑자기 인기척을 내며 다가오자 놀라서 심장마비를 일으키려 한 적이 있다.
「아아아, 해롤드! 숨 쉬어요! 해롤드!」
「존. 난 기절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제 뺨은 그만 툭툭 치세요.」
「넥타이를 풀게요. 계속 심호흡해요.」
「잠깐만요. 왜 셔츠 단추까지 푸는 겁니까. 잠깐 잠깐!」
이후로 리스는 가급적 핀치의 뒤편에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신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뒤뚱뒤뚱 걷는 그의 고용주와 동작을 맞추려 했다.
효과는 좋아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적마다 핀치는 곁눈질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불필요한 동작을 하지 않았다. 표정도 훨씬 부드러웠고,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건 리스 또한 마찬가지라 스치듯 가까워지면 불붙는 듯한 초조감이 진정되곤 했다.

이걸 뒤집어 말하면,
업무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 다가오면 리스의 털은 완전히 거꾸로 곤두섰다. 핀치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베어의 목줄을 잡아당기는 그의 손은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이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아.」
그렇다고 한들 자신의 영역에 타인을 들이지 않는 핀치의 오랜 습관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다.
문제는 이것이다.
급작스럽게 덤벼들어선 안 된다. 천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길들여야 한다.

『날 집으로 초대해줘요.』
『다시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미스터 리스?』
얘기를 잘못 들었다며 핀치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그는 손으로 귀를 만지기까지 했다. 여기서 단계가 더 나가면 귀에 물이 들어갔다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청력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따라서 핀치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가식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이것이 싫은 상황에 처했을 적에 핀치가 보이는 제1단계 회피 동작이다.
『생닭을 한 마리 샀어요.』
『이야기의 흐름이 영 이해가 안 가네요.』
『혼자서는 전부 먹을 수 없어요.』
『아하.』
단계를 몇 빼먹었지만 핀치는 머리가 좋다. 그래서 리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정확히 이해를 했다.
알아들었기에 반응한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허리로 손을 올렸다.
『무슨 이야기인가 했네. 푸스코 형사님의 레시피로 만든 찜닭 이야기군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전 제가 사는 집으로 다른 사람을...』
『초대가 어렵다면 박스터 스트릿의 우리 집으로 올래요?』
『오! 그런 거라면야.』
처음부터 식사 초대를 했다면 다음으로 미루자며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는 꾀를 부려 싫은 카드를 내밀었다가 다시 좋은 카드를 내미는 작전을 썼다. 전직 CIA 요원이 부리는 심리 트릭에 넘어갔다는 것도 모르고 핀치는 흔쾌히 저녁을 먹으러 - 그의 요리 실력을 조롱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겠노라 약속을 했다.
『와인을 한 병 가지고 갈게요.』
『좋아요.』
리스는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Posted by 미야

2012/11/06 10:51 2012/11/06 10:51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712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revious : 1 : ... 504 : 505 : 506 : 507 : 508 : 509 : 510 : 511 : 512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19695
Today:
1401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