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 of interest (41)

기계가 번호를 보내오지 않았음에도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도 생길 수 있구나, 엉뚱하긴 해도 감탄을 금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애용하는 보드판에는 전문 사진작가가 북극에서 찍은 고래 사진이 한 장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리스는 사진 하단부로 보드마카를 사용해「흰수염 고래」라고 적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고른 사진 속 고래가 실은 밍크 고래라는 건 미처 모르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리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같은 걸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TV 시청조차 즐기지 않는다. 라디오 방송으로 스포츠 중계를 듣는게 전부 - 오프라 윈프리나 데이비드 레터맨 쇼가 뭔지도 모를 거다.

그래봤자 사람 얼굴을 찍은 사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핀치는 오류로 점칠된 정보를 일절 무시하고 - 리스는 자신의 행동이 일종의 장난으로 여겨진게 은근히 분한 눈치였다 - 흐릿한 바탕에 사람 인영으로 보이는 시커먼 그림자가 전부인 CCTV 캡춰 사진을 셀로판테이프를 사용해 추가로 그 옆에 나란히 붙였다.

할 말이 있다는 투로 빤히 쳐다보는 리스를 모르는 척하고 핀치가 안경을 고쳐 썼다.
결론, 자료랍시고 붙인 사진은 두 가지 종류 모두 쓸데없었다.

『좋아요, 천천히 따져봅시다.』
책상으로 돌아온 핀치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의 지휘자처럼 양손을 모두 들었다.
수수께끼의 이 남자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있다. 사망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킬링 체크-인 게임에 개입하여 장난감이 아닌 진짜 총으로 사람을 쏘고 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다친 사람만 나왔지만 멀잖아 사망자가 나오리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하여 사건 성격상 핀치는 이 남성의 정보가 FBI쪽으로 넘어갔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여전히 흰수염 고래 사나이는 무탈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 소거법을 사용해볼까요, 미스터 리스. 그럼 첫 번째...』
『기계의 하드웨어에 문제가 생겨 작동이 불완전하게 되었다.』
리스는 그의 고용주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예의 주장을 다시 꺼냈다. 이른바, 정교한 기계가 그만 더위를 살짝 잡수셨어요 - 라는 얘기다.
투덜대며 뺨에 바람을 집어넣는 고용주를 향해 리스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압니다. 당신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며 단정하여 말하겠지요, 그렇지만 말예요. 나는 기계에 대해 자세한 걸 모릅니다. 핀치, 당신이 많은 부분을 나에게 솔직히 말을 해주지 않고 숨겼기 때문이에요.』
애매한 뉘앙스의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리스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허나 그가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자 몸서리치게 만들던 냉기는 흔적도 없이 조용히 물러갔다.
『매우 건강한 사람도 가볍게 감기를 앓곤 하잖습니까. 잘 만들어진 기계 장비라는 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노후화 되면서 각종 문제가 생길 겁니다. 아무리 좋은 노트북도 5년이면 고물이 되잖아요. 어쩔 수 없이 엔지니어들이 그때마다 문제가 생긴 장치를 새 것으로 재빠르게 교체를 해줘야 할텐데 요즘 미국 경기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나사 과학자들까지 실업자로 전락하는 마당에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SSN 번호만 뽑아내는 기계에 거금의 예산을 투입하긴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워싱턴 DC에서 관련 예산을 삭감하라 지시했다고 가정하면...』
이쯤해서 핀치가 손바닥을 펼쳐 일단 멈추시오 싸인을 보내왔다.
『기계를 위해 나사의 예산을 삭감한 겁니다, 미스터 리스.』

몰랐던 얘기다. 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이를 설명하는 핀치의 표정도 썩 편치는 않았다.
『언론은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폐지가 금융위기와 재정난 탓이라고 설명하지요. 하지만 진실은 달라요. 우주왕복선의 1회 발사 비용은 평균 15억달러(1조6,000억원)입니다. 정부는 차라리 이 돈으로 재사용 궤도선을 근거리 우주로 날려 보내는 대신 테러를 방지하는데 도움을 줄 기계를 운영하자고 결정했어요. 인류의 꿈과 희망을 팔아 안전을 구입한 겁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히, 우주왕복선.

보다 먼저 기운을 차린 건 핀치 쪽이었다.
『그럼 두 번째 가정으로 넘어가보죠. 소프트웨어이든 하드웨어이든, 기계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흰수염 고래」를 파악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기계는 사전에 계획된 범죄만 감지한다. 그래서 홧김에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하거나, 과도하게 어린애를 흔들어 영유아 돌연사를 일으켰다거나, 교통사고, 비행기사고 등등에 대하여선 감지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 모두 여섯 명이 총에 맞았는데 이는 사전에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모두 우발적 충동 범죄였다는 겁니다. 모조리 우연에 불과한 것으로 어쩌다보니 총 맞은 사람 전부가 킬링 체크-인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거구요.』
그런게 과연 가능한가. 우연이 중첩되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억지다.
하여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며 핀치는 세 번째 손가락을 접으며「다음 가정으로 건너뜁시다」말했다.

『해당 SSN이 관련 정보 부서에 통보되는 프로트콜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봅시다.』
『연방수사국 후버빌딩 1층으로 번호가 도착했는데 책임자가 일부러 묵살했다는 건가요.』
『또는 필연적으로 묵살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미스터 리스.』
『글쎄요... 그들은 해당 SSN의 인물이 이미 사망한 것처럼 나왔다고 해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역시 묘지에 묻혀 있던 테레사 휘태커를 살아있는 모습으로 찾아낸 적이 있잖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었다면 그쪽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막대한 자원과 조직력으로 더 훌륭하게 처리하겠죠.』
사망자, 혹은 위장 사망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상대가 여행을 온 외국인이었다면 어떨까.
이번에는 핀치가 도리질을 했다.
『내국인 테러행위만 적발이 가능했다면 기계는 반쪽 불량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스. 행정력이 있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모양과 형식은 달라도 자국의 시민에게 식별이 가능한 숫자 코드를 제공합니다. 관광객으로 위장했다고 놓치는 일은 없습니다.』

이제 리스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다 틀린 건반을 누른 피아노 연주자처럼 양손을 어지럽게 흔들어댔다.
『OK. 슬슬 알 것 같네요.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겠죠. 교통신호를 무시한 차량을 붙잡아 세웠는데 주차위반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았어요. 교통 경관이 왜 그랬을까요.』
『외교관 차량이어서?』
『상대가 똑같이 경찰관이었다는 가설은 어떻습니까.』
『오.』
핀치는 두 눈을 깜빡였다. 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떴다.

Posted by 미야

2012/07/19 21:40 2012/07/19 21:40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551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637 : 638 : 639 : 640 : 641 : 642 : 643 : 644 : 645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2242
Today:
64
Yesterday:
213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