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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49)

순차배열을 하자면 49번은 38번 글 다음입니다. 순서 엉켰음...


일라이어스는 자신의 식사를 직접 조리하는 걸 좋아한다.
전문 요리사처럼 솜씨가 있다거나, 엄선된 좋은 재료로 괜찮은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주 식사 재료는 결혼 경험 전무의 독신 남성이 선택할만한 인스턴트 종류였고, 따라서 포장지에「전자렌지에 3분간 데워 드세요」설명이 적혀져 있는 것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그는 도마 위에 양파와 홍당무를 올려놓고 맵시 있게 썰 줄 알았으며, 냄비 위에 갖은 재료를 넣고 나무 주걱으로 휘젓는 일을 사랑했다. 간을 보고, 양념을 넣고, 고기에 후추를 뿌리고... 그리고 그는 그의 사랑해 마지않던 어머니 멀린 일라이어스가 찬장을 열고 순백의 접시를 꺼내는 광경을 상상했다.
이것은 그의 환타지.
손바닥으로 바람을 일으켜 코로 익어가는 감자의 향취를 들이마셨다.
속눈썹을 붙이고, 눈두덩이에 아이새도우를 바르고 아름답게 치장한 어머니는 얼룩 하나 없는 테이블 위로 나이프와 포크를 세팅한다. 그녀의 옷은 눈부시게 하얗다. 피로 얼룩지지 않았다. 그들은 식탁에 앉을 것이고,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린 뒤 맛있게 먹으리라.

『보스.』
부하의 부르는 목소리에 그의 표정이 굳었다.
이번에도 치즈를 너무 많이 넣은 걸까. 인스턴트 입맛인 만큼 그는 느끼하고 들쩍거리는 걸 좋아한다. 당연히 칼로리가 높다. 살이 찌는 건 물론이거니와 몸에 좋지 않다며 옆에서 타박한다. 그들이 여드름을 고민하던 소년이었던 시절에도
- 한때 같은 위탁 시설에서 자란 적이 있다. 8개월 17일 간이었다 - 탄산 음료를 먹지 못하게끔 형제들을 감시한 사내다. 심지어 몰래 콜라를 마시고 있던 여자 형제의 입에 순전히 토하게 만들기 위해 손가락을 넣었던 적도 있다. 소년은 통제광이었다.
일라이어스는 가스렌지의 화력을 약하게 줄이고 요리 중인 그릇에서부터 몸을 돌렸다.
『치즈 이야기는 아니었음 좋겠는데.』
푸른색 앞치마에 손을 비벼 닦으면서 투덜거렸다.
『나트륨 이야기도 좀 그렇고.』

얼굴에 길게 흉터가 난 사내가 미세하게 몸을 움찔 떨었다.
아, 일라이어스는 눈치 챘다. 그는 말하고 싶어 한다... 두목, 치즈는 더 먹으면 안 됩니다 - 그러나 모든 일에는 중요도에 따른 순서라는게 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하며 당장 보스에게 알려야 할 용건을 입에 올렸다.
『그들이 창고 문을 닫고 예의 게임을 시작했는데요.』
『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10분 뒤에 문을 도로 땄답니다.』
일라이어스는 빙긋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치즈-치즈 이러면서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부하가 재밌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중간한 숫자로는 존을 제압하긴 어려울 거라고 짐작을 했지. 그래... 10분?』
흉터의 사내는 한층 더 기분이 나빠졌다.
그들이 판 함정을 존이 무사히 빠져나갔다는데 그의 보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잘 했어요, 훌륭해요,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기타등등. 부아가 치민다.
『오른팔은 다쳤다더군요.』
『쓸데없어. 그는 왼손잡이야.』
일라이어스가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라디오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그는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최신 유행 음악이 아닌, 박자가 느리게 흘러가는 오래된 노래들은 그럭저럭 들어줄 법하다 여겼다. 마침 라디오에서는 무디 블루스의「하얀 공단에 싸인 밤」이 흘러나왔다. 일라이어스는 질투에 가득차 입술을 질끈 다물고 있는 부하를 향해「이 밴드는 노래가 괜찮아. 그치?」라고 말했다.

『뒷정리가 지저분해졌어요, 두목.』
『예상했던 거잖나. 우리에 집어넣은 짐승은 난폭해지는 법이니까 원 없이 날뛰었겠지. 아무렴 어떤가. 죽고 다친 사람이 우리 가족도 아닌데 뭐. 정리할 적에 요긴히 사용하라고 5만 달러를 보내줬음 됐지.』
『그 5만 달러, 존의 고용주라는 자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렸다던데요.』
『그런 건 몰라. 나는 분명 뒷정리에 보태라고 돈을 보냈어.』
슬슬 하던 요리로 돌아가도 될까, 이러면서 일라이어스가 가스렌지 쪽을 가리켰다.
『이야기가 지겹군. 것보다 접시를 꺼내주지 않겠어? 넘버원. 식사를 같이 하자고.』
부탁에 흉터의 사내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뭐랄까. 마치 지상 최대의 미녀라도 쟁취했다는 식이었다. 콧대가 높아졌고, 가슴이 늠름해졌다.
『예, 보스.』
그것이 쥐약이 뿌려진 구운 감자라고 할지언정 그는 황송해하며 맛있게 먹을 것이다.

『존.』
가방을 든 핀치가 뒤뚱뒤뚱 다가왔다. 평소보다 더 비틀거리는 걸음이었다. 그리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쳤군요.』
리스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상처를 감추었다. 그리고 기뻐하며 웃었다.
해롤드다. 그의 고용주다. 괴짜이고, 혼자 있기 좋아하고, 머리가 좋고, 희귀한 책을 수집하고, 비밀스럽고, 설탕 한 스푼을 넣은 녹차가 취향인, 그리고, 그리고, 정말, 정말, 많이 보고 싶었던 사람이다.
『해롤드. 오랜만입니다.』
『지금 그렇게 웃을 땝니까. 오른팔을 이리 내놓으세요.』
『보기에는 흉해도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잖아요. 애처럼 굴지 말고, 빨리.』
그렇게 말한 핀치는 서류가방을 열고 의료용 붕대가 아닌 1달러 50센트짜리 다용도 닥트 테이프를 꺼냈다. 붕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리스는 놀랐다. 동시에 누구에게서 저런 조언을 구했을지 매우 궁금해졌다. 의외로 닥트 테이프는 급히 출혈을 막는데 요긴히 사용된다. 붕대는 멸균처리가 되어 있다는 점이 우수할 뿐, 피를 흡수하는 재질이라는게 문제가 된다. 이물질과 병원균 침입을 막는데 효과적이겠으나 지혈은... 글쎄.

『제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연방법을 위반하는 여러 행위를 저질러서요.』
테이프를 자르다 말고 핀치가 고개를 들어 리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걸리면 가석방 없는 25년형은 받을 겁니다. 뭐, 그 점에 대하여 당신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니까요.』
『핀치.』
『후스코가 당신이 함정에 빠졌다며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핀치.』
『그러니까,.. 나는.』
『핀치.』
『미안합니다, 미스터 리스. 내 손이 많이 떨려서요.』
『진정해요. 나는 당신 앞에 무사히 있어요.』
리스는 팔을 뻗어 가냘프게 떨고 있는 핀치의 손을 붙잡았다.

Posted by 미야

2012/08/07 23:02 2012/08/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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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48)

앵앵거리며 하소연을 퍼붓다가 빨리 꺼내달라고 난리다.
《처음엔 신호위반이라더니 이 짭새들이 이젠 내가 음주운전을 했다는 거야. 그래서 내 입 냄새를 맡아보라고 하아~ 입김을 불었어. 그랬더니 씨발, 코를 움켜쥐곤 경관 폭행죄를 추가하겠다며...》
속으로 생각했다.
술은 안 마셔도 코크는 자주 하잖아.
『혈액 검사에 응하겠다고 해, 데상트. 혈중 알콜 농도 확인해보자고 하면 되잖아.』
《미쳤어?!》
역시 약은 빨았나 보다. 빨리 변호사 내놔라 감 내놔라 난리를 치는 걸 봐선 그의 집 소파 아래로 숨겨져 있는 건 감기약이나 두통약 같은 걸 섞어 만든 칵테일*보다 더 쎈 종류다. 라비니에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비비며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부류의 맞장구 - 응, 이라던가, 과연, 이라던가 식의 모호한 말들을 흘렸다.
변호사? 지금 그게 문제냐. 정작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약 15분 전 그의 계좌에서 정확히 9,999 달러가 인출되어 사라졌다.
수취인은 세이브더칠드런 이라는 이름의 단체다. 생판 모르는 단체다. 것보다 그들이 왜 남의 피 같은 돈을 허락도 받지 않고 가져갔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은행의 단순 착오라고 판단, 아까부터 접속을 시도했으나 유효한 인증키가 아니라며 반복하여 튕기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은행에 직접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영업점 업무 시간이 아니다.
《이봐, 라비니에. 서둘러 변호사를...》
『시끄럿! 닥쳐! 제발 입 닥치라고!』
여전히 속수무책인 와중에 모바일 뱅킹 안내 메일이 다시 도착했다.
이마가 땀으로 젖어 기분 나쁘게 축축했다. 라비니에는 말 그대로 펄쩍펄쩍 뛰었다.
『동남아프리카 기아구제 협회?! 말도 안 돼! 이건 또 뭐야!』
다시 9,999 달러가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패닉 상태에 빠진 라비니에에게 누군가 전화를 걸어온 건 다시 15분이 지난 후였다.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죠. 이제 우리 두 사람이 협상을 할 시기인 것 같은데요.》
『당신 누구야.』
으르렁거리는 라비니에와는 대조적으로 상대방 남자의 목소리는 어려운 내용의 교과서를 지루해하는 학생들 앞에서 낭독하여 읽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분했다.
《제가 누구인지를 아는게 중요합니까, 아님 당신 계좌에 남아 있는 돈이 중요합니까.》
『썩을! 어디에 사는, 뭐 하는 놈이냐고!』
《알겠습니다.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가 중요하고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군요. 그렇다면 이번엔 국경 없는 의사회로 기부를 해보도록 할까요. 따로 생각해둔 단체가 있음 미리 알려주셔도 됩니다. 음...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영국의 NESTA는 어떻습니까. 아님 그린-야뜨라 환경보호 단체도 있어요. 터키 인권단체인 인류구호협회 IHH도 양호합니다. 모두 당신의 돈을 좋은 뜻으로 잘 써줄 곳들입니다.》
『잠, 잠깐잠깐 기다려! 그러지 마, 그러지 말라고!』
《9,999 달러를 이체하겠습니다.》
『스탑, 스탑! 알았어! 내 돈! 당신에게 관심 없어! 그러니 내 돈은 그냥 내버려... 으악!』
다시 계좌 잔액이 9,999 달러 내려갔다.
남자가 핸드폰 저편에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합니까.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돈 전부를 말려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 그럼 저와 협상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여기는 이스트 사이드.
리스가 카운터의 눈알을 후벼 파는 것과 같이하여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들 우르르 뛰었다. 걸음아 나 살려라 입구를 향해 달아나는 자들도 있었다. 가방에 든 무기를 잡기 위해 그쪽으로 몰려가는 이들도 있었다. 프랭키와 산발타는 상의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리스는 카운터의 몸을 붙잡고 재빨리 그의 몸을 방패처럼 이용했다.
프랭키가 쏜 두 발 중 하나가 레게 머리의 복부를 휘저었다. 그는 만세 동작을 취하더니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맞은 각도가 나빴던지 그 다음부터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
동료가 쓰러지자 크로우가 고함을 질러댔다.
『하지 마! 구석으로 몰고 아직 쏘지 마!』
그 말이 유언이 되었다. 크로우가 떨어뜨린 데저트 이글을 집어든 리스는 반동에 주의하며 크로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삽시간에 그의 머리 절반이 없어졌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총이 아니라 흡사 대포다.
『히익, 히이익!』
턱뼈와 치아 조각이 안개처럼 휘날리자 산발타가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며 네 다리로 바닥을 기었다. 똑바로 서기엔 허리에 힘이 풀린 듯했다.
리스는 그의 등을 조준했다.
그러다 도중에 마음을 고쳐먹고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반응이 느린 노인은 입을 벌리고 제자리에 서있었다. 현실감도 없었고, 귀는 멀었다.
『영감! 뛰어! 뛰라고! 죽고 싶어?! 뛰어!』
누군가 악을 쓰며 그에게 어서 움직이라 외쳤다.
겁에 질린 노인의 눈이 리스와 마주쳤다.
『바닥에 엎드리시오.』
리스의 명령에 노인은 군소리 없이 꾸물꾸물 움직여 자세를 낮췄다.

22구경 권총을 들고 있던 젊은 남자는 리스를 쳐다보곤 오줌을 지렸다. 뿐만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기 전, 질끈 눈을 감았다. 그 틈을 타 오른손으로 총신을 붙잡고 왼팔의 팔꿈치로 그의 머리를 쳤다. 깨어나면 지독한 숙취를 닮은 고통을 느끼겠지만 어쨌든 죽지는 않았다.
시야각에서 인간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빼앗은 22구경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타겟 포착. 두 발 속사. 머리숱이 적은 사내가 자신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무너져 내렸다. 그가 지르는 비명은 밀폐된 공간에서 사방으로 반향 되어 더욱 크게 울렸다. 순간 공포가 솟구친다. 리스는 어렵지 않게 감정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훈련을 받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에겐 그런 건 불가능했다. 누군가 철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있다. 나가게 해줘. 이곳에서 도망치게 해줘. 리스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진다. 그는 옆으로 달린다. 누군가가 쏜 빗나간 총알이 팔뚝을 긁는다. 뛰는 속도를 높인다. 이곳은 엄폐물이 적은 곳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숨지 못한다. 그리고 적 역시 그의 시야로부터 달아나지 못한다. 적은 사방에 있다. 아니, 적은 그의 마음 안에 있다. 규칙적으로 뛰는 그의 심장이 요구한다. 머리를 노려. 움직이는 것들 전부를 노려.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리스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아아, 가까이 오지... 캊!』
총신으로 사람의 목을 노리고 내려친다. 뼈가 안쪽으로 무너져 내리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후두부가 망가진 그는 호흡을 하지 못한다. 커다랗게 벌려진 눈동자가 나를 어떻게 한 것이냐 묻고 있다. 리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온전히 귀를 열고 발자국 소리를 탐색한다. 왼편 측면으로 몸을 돌려 발사, 응사하려는 적의 오른쪽 가슴을 명중시킨다.

돌아가야 하니까.
핀치가 있는 곳으로 무사히 돌아가야 하니까.
억눌러왔던 짐승이 단호한 어조로 명령한다.

죽여.

Posted by 미야

2012/08/06 19:15 2012/08/0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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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47)

『일단 이 말부터 해두지. 승자는 50,000 달러를 가져가게 될 거요.』
불온한 압력을 받아 일그러지던 분위기가 꿈틀거리며 요동을 쳤다. 가파른 급경사의 벼랑 아래로 무너져 내리던 토사가 도랑을 만나 갈피를 못 잡고 몇 갈래로 퍼져 휩쓸려 내려가는 모양새였다. 난잡하기도 하거니와 한치 앞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격류는 무거운 통나무를 수면 위로 들어 올려 교각의 가장자리를 쾅쾅 들이받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돈의 위력이었다.
『5만 달러?!』
여섯 자루의 권총을 보고 질겁을 하던 젊은이가 삽시간에 만개한 벚꽂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섹시한 여성을 찬미하듯 휘파람을 부는 자도 있었다.
존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백발의 노인 쪽을 쳐다봤는데 이쪽은 거의 목이 졸렸다. 혼전임신한 딸이 집안의 저축한 돈을 몽땅 들고 라스베가스로 날랐다는 식이어서 가뜩이나 주름지고 멍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꼴딱꼴딱 침 삼키는 소리만 들리니 조용해져서 좋군. 그럼 이쯤해서 게임 룰을 설명드려도 될까요?』
레게 머리가 썩은 과일에 탐닉하는 파리처럼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자, 자. 이번 게임은 배틀로얄 입니다.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위험수당으로 기본 2,000 달러 팍팍 쏩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카운터는 빛나는 구슬 조명과 요술 커튼이 있는 무대로 올라와 세계적인 마술사를 소개하는 진행자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순간 박수라도 쳐야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살아남지 못 하면요.』
『정 무서우면 로그-오프하고 집으로 그냥 가던가.』
삐약 뺙뺙 이러고 암탉 울음소리를 흉내내던 그가 팔을 뻗어 출입구를 가리켰다. 무리 중 절반 가량이 그의 화려한 손동작을 따라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알거지가 되긴 하겠지만 몸에는 긁힌 자국 하나 안 생길 겁니다. 게임 난이도를 고려하여 이번 한 번만 서비스로 기브 업 기회를 드릴테니 포기하실 분은 포기하십쇼. 괜찮아요. 안 붙잡아요. 헤코지도 하지 않습니다. 나가실 입구는 저쪽입니다.』
『알거지...?』
『이보쇼, 선생. 당연한 거 아뇨. 병아리 치킨에겐 땡전 한 닢 없는 거예요.』

여섯 명의 남자들이 각각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서로를 훔쳐보며 치열하게 눈치를 살폈다.
최악의 경우 재수 옴 붙으면 죽게 된다. 과다 출혈로 저승 구경이 코앞임에도 병원 구경조차 못할 수 있다. 핸드폰을 사전에 압수당해 통신 수단도 없거니와 설령 외부로의 연락이 가능하다고 해도 범죄 현장으로 구급차를 부를 사람도 없다.
하지만 5만 달러는 대단히 유혹적이다. 어차피 인생은 한 방이라고 하지 않던가.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나이가 가장 어려 보이는 사내가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맹렬하게 엄지손톱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나는 포기하도록 하지.』
존은 홀가분하게 선언했다.
『그럼 남아서들 재밌게 놀아.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마음의 동요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함, 통신 판매업자의 권유 전화를 거절하는 식의 산뜻한 마무리는 모두를 펄쩍 뛰게 만들었다.
『어이, 형씨? 꼼짝 말고 거기 서! 가긴 어디를 가!』
『왜 인상 구기고 화를 내나. 기브 업 기회를 준다며. 그건 거짓말이었어?』

동요.
술렁거림.
존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음절을 강요하여 말했다.
『기브 업.』

두 명의 사내가 - 프랭키와 산발타였다 - 억누른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 떠들고 펄떡 뒤돌아.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거야. 하지만 댁은 아니야.』
그들은 위협적인 몸짓을 보이며 존에게로 빠르게 접근했다. 두 명 모두 호주머니로 손을 넣고 있었다. 점퍼 주머니가 볼록하게 늘어진 모양새로 보아 안쪽으로 무겁고 커다란 걸 감추고 있는 건 확실했다. 존은 싸움을 원치 않는다는 우호의 동작 - 양팔을 가볍게 벌린 자세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들 두 명 말고도 카운터가 턱을 앞으로 내민 채 다가왔다. 그의 키가 존보다 두 뼘 가까이 작았기에 싫든 좋든 올려다 보아야 하는 각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카운터 입장에선 내심 그게 불만인 듯했다. 그러니까 허리춤에 차고 있던 데저트 이글을 꺼내 눈앞에서 마구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리라. 전체 길이가 무려 45cm가 넘는 크기다. 존은 그 무식함에 혀를 찼다. 어쩌면 그는 음경이 작은 콤플렉스를 그런 식으로 극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게임 룰 설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수다, 아저씨.』
그런다고 해봤자 그는 그 정도로 겁을 내지 않는다. 총구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심장 박동 수는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배틀로얄이라며. 하나가 살아남을 때까지 싸우라는 거 아니야?』
『맞아. 바로 그거야. 배틀로얄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지. 그런데 우리의 게임 룰은 조금 달라요. 혹시라도 저작권 어쩌고 그럴까봐 약간의 독창적인 변형이라는 걸 가미했거든. 듣고 보면 아주 재밌을 거야.』
다소 희극적인 몸집으로 그가 제자리에서 반 바퀴 빙글 돌았다.
존은 개의치 않고 계속 해보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여기 여섯 명의 출전자들이 널 쫒을 거다. 네놈은 맨 몸으로 달아나는 거야. 여기 이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널 죽이러 갈테니. 어때?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시나. 하나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반드시 하나가 죽어야 하는 게임이야. 꽤 괜찮은 아이디어지?』
존은 그다지 감명을 받은 눈치가 아니었다.
『흠... 그건 몹시 비겁한 행위 같은데.』
그의 주장에 카운터의 표정이 으스스하게 변했다. 목소리 톤도 올라갔다.
『비겁? 지금 비겁하다고 했어? 천만에! 비겁한 건 당신 쪽이지.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이 잘난 정부 요원 나으리. 어째서 가석방된 범죄자로 위장하고 우리 같은 착실한 납세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건데. 원래는 이란이나 북한에 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연쇄 살인마를 잡거나, 테러리스트들을 혼내주던가!』
그가「다들 들어봐」큰 소리로 외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놈 정체는 CIA야. 나라에서 녹을 받는 귀신이지. 존 프라이드라는 이름도 가명이야. 전부 가짜야. 그런데 이놈은 나라에서 잡으라는 알 카에다는 안 잡고 뭐가 그렇게 심심한지 미국 길거리에서 사람들 엉덩이를 재미삼아 쏘고 돌아다녀. 완전히 맛이 간 또라이야! 재수 없어! 』
45구경이 리스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리스는 은색으로 번쩍이는 금속을 쳐다보았다가 남자의 얼굴로 다시 차분하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재미로 사람 엉덩이를 쏘고 돌아다닌 적이 없어, 핀레이.』
15년 전에 지워버린 본명으로 불리우자 그는 소스라치게 깜짝 놀란 눈치였다.
『거, 거짓말.』
『진짠데.』
『어... 아니, 것보다 어떻게 내 이름을...』
도중에 말을 끊어먹었다.
『이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현 CIA 요원이 아니고 은퇴한 전직 CIA 요원이야. 그건 차이가 있지. 사실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어.』
『뭐?』
『아까부터 놀라기만 하고 왜 그러나. 그건 그렇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가르쳐주지 않겠나. 자네에게 돈을 주고 배틀로얄 어쩌고 계획을 세운 사람이 그 또라이 CIA 요원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이름을 뭐라고 하던가.』
『뭐?』
『이름.』
완전히 분위기에 휩쓸린 남자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클라이너. 존슨 클라이너 라고..』
바로 리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성가시게 해준 건 이걸로 용서해주지. 알려줘서 고맙군, Thank's 일라이어스.
갈무리해둔 엄지손가락을 뻗어 상대의 왼쪽 눈에 쑤셔넣었다. 통조림을 따는 요령으로 손톱을 들추자 눈알이 거의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크아아아!』
기습의 원칙은 최소의 동작만으로 최대의 데미지를 입히는 것이다.

Posted by 미야

2012/08/03 21:59 2012/08/03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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