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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52)

많은 책에서 총에 맞은 감각은 이러하다 수려한 문장으로 묘사하곤 한다.
숯불에 데인 것처럼 뜨겁게 아팠다던가, 얼어붙은 바다 한 가운데 빠진 것 같았다던가, 악마가 와서 어금니로 살점을 뜯어먹은 것 같았다던가... 그런데 작가들은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었다. 뇌가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치면 과부하가 걸린 신경 세포는 정보를 제 위치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다 주입된 정보를 엉뚱한 곳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러한 신체의 방어 작용 탓에 위기에 처한 사람들 다수가 순간적으로 고통을 잊는다. 때로는 무아지경에 가까운 황홀경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는 듯한데 이를 두고 의학은 신경전달 물질의 교란 탓이라고 해석한다. 요점은 쇼크에 빠지기 전, 아픔을 느낄 경황따윈 없다는 거다.

핀치가 제일 먼저 깨달은 건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는 거였다. 모르는 여자가 그를 향해 팔을 휘저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핀치는 그녀의 무례하고도 과장된 몸짓이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래된 영화「사이코」속의 샤워 씬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공포와 두려움, 놀람, 흥분, 그리고 흑백의 아우라가 그녀의 코 언저리 주변에 가득했다.
「어랍쇼. 지금 내가 소리를 검정과 흰색으로 인식했어. 까닭이 뭐지.」
사물이 뿌옇다. 그림자들이 잔상이 남기며 어지럽게 움직였다.
콧잔등이 허전하다는 것과 같이하여 쓰던 안경을 잃어버렸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방금 전까진 이렇지 않았는데. 안경이 없어졌어.」
납득이 가질 않는다. 얼굴 반쪽이 얼얼했다. 핀치는 흠, 하고 숨을 크게 내뱉었다.

『해롤드!』
내포된 다급함이 헷갈리게 만들긴 했으나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다. 핀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안경이 없으면 사람들의 얼굴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자갈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체격이라던가, 머리모양새가 리스와 비슷하게 보인다는 생각은 들었다.
「존, 당신이에요?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것보다 왜 그렇게 산만하게 뛰고 있어요? 신호등을 잘 살펴요. 그러다 다치겠어요.」
입은 벌렸는데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지 못했다. 그는 엄, 이라는 소리를 냈을 뿐이었고, 그나마 백색 신음에 가까웠다. 그런데 소음이 흑백으로 나뉘어 들리는게 가능한가?
「내 귀. 뭔가 잘못되었어.」
그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전력을 다해 뛰었지만 군중과 거리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핀치가 흘리는 피를 보고 흥분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자 일은 더 고약해졌다. 그를 서둘러 보호해야 했지만 날뛰는 사람들을 밀치고 가까이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제기랄.』
두 번째 장전된 총알이 날아올 즈음이라고 판단되자 저절로 몸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회피, 주의, 방어. 몸의 안전을 추구하려는 본능에 욕지기가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머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했다. 두 번째 저격 성공, 핀치는 죽는다. 닿을 수 없다. 이 거리에선 몸을 날려봤자 저격범으로부터 그를 지킬 수 없다. 이 얼마나 무능한. 입술을 깨물었다.
『해롤드!』
기능을 잃었던 초침이 순간 딸각 소리를 내고 움직였다.
예상과는 달리 두 번째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끝도 없이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수라장.
리스는 가까스로 핀치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움직여요!』
핀치는 멍한 눈빛이었다. 그는 리스와 눈을 맞추는 동작마저 힘들어했다.
『이리와요!』
그의 보스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세를 낮추고 재빠르게 움직인다는 동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리스는 핀치를 거의 짐짝처럼 취급하며 - 그렇다고 해도 성인 남성을 들쳐 메고 옮기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그의 오른팔은 예의 부상이 다 낫지 않았다 - 빠르게 이동했다.

핀치는 질질 끌려왔다. 오른발로 간혹 체중을 디디기도 했으나 말썽을 부리는 왼발은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 당연히 미칠 것처럼 무거웠다. 리스는 상처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부득이 오른팔로 핀치의 등허리 옷자락을 붙잡았다. 왼팔은 위로 들어 핀치의 목덜미를 잡았다. 양팔에 핀치의 몸무게가 실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세로 10미터 이상을 뛰었다.

『리스 씨.』
과부하가 걸렸던 신경전달 회로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 건 이쪽인데 헐떡거리는 신음은 핀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도 심상치 않은 헐떡거림이었다.
『우리가... 우리가 총에 맞았어요.』
그의 고용주가 내가,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다.
핀치는 다시 한 번 더 외쳤다.
『우리가 총에 맞았어요!』
리스는 침착해지려고 기를 쓰며 목소리를 낮췄다.
『방금 당신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자꾸 잡아당기지 말아요. 셔츠가 바지 밖으로 빠져 나와요.』
『해롤드. 진정해요.』
『알아요! 난 안경을 잃어버렸어요!』
『핀치. 안경은 다시 구하면 되요.』
『내 귀는요. 귀도 없어졌어요. 그들이 내 귀를 가져가 버렸어요!』
리스는 너덜너덜 헤어진 귀의 잔해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부 없어지진 않았어요. 제대로 꿰매기만 하면 당신 귀는 곧 괜찮아질 겁니다.』
절반은 과장이었다. 하지만 핀치는 솜씨가 뛰어난 성형외과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막대한 돈을 가지고 있어서 수술비와 의료보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핀치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쇼크 증상이다.
『어... 어떻하지. 제가 곧 기절할 것 같습니다, 미스터 리스.』
당연한 반응으로 몸 떨림이 나타났다.
리스는 재빨리 판단했다.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차를 한 대 훔치자.

핸드폰이 울린 건 훔치기 좋은 차를 막 물색하고 있을 때였다.
수신자 번호는 감춰져 있었다.
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맹세코 널 죽여버릴거야.』
《...》
『널 찾아내어 죽일거야, 존슨 클라이너.』
리스는 그대로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때 변조된 기계음으로 클라이너가 말했다.
《나는 경찰은 죽이지 않소.》
『??』
누가 경찰인데?
이쪽에서 되묻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

Posted by 미야

2012/08/13 19:55 2012/08/1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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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51)

테러리스트 하부 조직을 잡으면 고구마 줄기처럼 나머지 것들도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25시간을 고문해봐도 나오는 대답은「다른 사람은 몰라요, 정말입니다」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다. 내내 얻어맞는동안 방광이 터지고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면 사촌 누이 남편의 고모의 오라비가 누구인지까지 술술 털어놓는게 인간이다. 이때 모른다고 하면 정말로 모르는 것이다.
누구에게로부터 돈이 나오는 건지, 누가 작전을 지휘하는 건지, 다른 임무를 맡은 다른 조직원들이 누구인지. 정보는 차단되어 모두 비밀에 싸여있다. 그들이 아는 거라고는 특정 가방을, 어떠한 자동차를 타고, 어느 지역으로 가서, 이러저러한 주소까지 배달하라는 지령밖에 없다. 심지어 그 가방의 내용물이 뭔지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배달물 탓에 하마터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될 뻔했다고 알려주면 눈이 휘둥그레 커지기도 한다. 그러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손사레를 친다. 생물학적 무기를 운반했다는 용의자를 체포해도 이끌어낼 정보가 이 정도다.


자, 그런데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의 조직 운영 원리의 원조가 사실은 CIA라면 어떨까.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현장에서 암약하는 CIA 요원들은 자신들이 쓴 보고서를 누가 읽게 되는지 정확히 모른다. 심각해지면 월급을 누가 주는지도 불명확하게 된다. 다리 하나만 건너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워싱턴 정가에서 대통령과 독대하는 최고 책임자 인간이야 오픈되어 있지만 나머지는 검은색 매직으로 찍찍 그어지는 자료들이다. 조직은 각각 단절되어 있으며, 연결 고리는 너무나 느슨하여 여차하면 끊어져 소실된다. 전체 그림은 절대로 알 수 없다.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매번 그 모습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마크 생각이 나는군.」
도로가 내뿜는 아스팔트 열기를 피해 가로수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아 시원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수은주가 갑자기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여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플랑카드를 휘날리며 성급하게 반팔 옷차림으로 나온 사람들도 등장했다. 검정 코트 차림새의 리스와는 대조적이다. 그들은 웃고 있었고, 노래를 불렀으며, 강아지처럼 바빴다.
「마크는 저런 사람들 속에 있는 걸 대단히 싫어했지...」
우리는 전쟁 중이다.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루는 중이다. - 그게 마크의 입버릇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로운 거리의 모습에 진심으로 반발했다. 산책하는 개를 싫어했고, 어린아이가 웃으면 질겁했다. 공원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 모양이 가늘어졌다. 음료수를 마시며 걷는 사람들은 혐오스런 돼지와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들을 봐, 존. 그들은 아무것도 몰라. 나태하게 늘어져 지금이 평화 시기라고 믿고 있어. 저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그렇게 희생하며 싸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괴로워질 때가 있어. 조국을 사랑하지만 저 사람들까지는 사랑할 수가 없어.」마크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성품인 존은 마크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을 가진게 없다. 외모가 아름다웠던 캐라에 대해 감정을 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마크는 연락책이고, 캐라는 같이 일하는 파트너였다. 그들을 서로를 알고 지낸게 몇 년이었어도 개인적으로는 아는 내용이 거의 없다. 그들의 가족? 생활수준? 종교적 가치관? 글쎄. 전부 불투명하다.

리스는 다시 존슨 클라이너라는 자를 생각했다.
비뚫어진 CIA. 저격 전문.
마크라면 그를 강제로 은퇴시켰을지도 모른다. 마크는 제멋대로 구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존슨 클라이너의 연락책은 누구였을까. 얼굴이라도 알던 사람일까. 그의 파트너는 누구일까. 여자일까, 아님 남자일까. 나이가 많은 사람일까, 아님 젊은 사람일까. 그는 파트너인 존슨 클라이너가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마도 알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의 잘못을 묵살하고... 어째서 그런 짓을. 모르겠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이해도 되지 않는다. CIA는 독자 행동을 묵인할 정도로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순간 흠칫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핀치다.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감청색 양복을 입었다. 검정색 서류 가방을 들고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 밤엔 수면을 충분히 취했는지 오늘은 다리를 저는게 그렇게 심하지 않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하다. 좌우를 살피는 것도 여전하다. 안경알은 먼지 하나 없이 반짝거린다. 또한 신사는 공단의 포켓치프를 잊지 않는다. 신호를 기다리다 말고 시계를 내려다본다. 그 까닭을 리스는 잘 알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손해보험사 사무실에 들려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전에 가판대에 들려 일본식 녹차를 살 수 있을지 가늠해보고 있는 것이다. 입술을 가늘게 안쪽으로 빨아들이고 불편해 한다. 저런, 녹차를 사러 가기엔 시간이 충분치 않은가 보다. 마음을 굳혔는지 자세를 바르게 한다. 실망한 표정이다. 아니면 짜증을 내고 있다. 그리고 언짢은 얼굴로 군중들 속으로 몸을 숨긴다.

마음 같아선 녹차를 사서 사무실로 배달을 시켜주고 싶지만 리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핀치가 싫어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핀치가 화내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핀치의 시야각에서 벗어난 장소를 찾는다. 그는 계속해서 관찰만 할 것이다. 오늘은「좋은 아침입니다」인사가 없는 날이었고, 만남이 없는 날은 매번 이런 식이다.

신호가 켜졌다. 사람들이 보도에서 도로로 쏟아져 내려온다.
그들과 섞여 핀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탕-

총성은 멀리서 들려왔다. 그것도 꽤 높은 것에서 들려왔다. 소음은 고층 건물에 몇 차례 반사되어 지면에 가까이 서있는 사람들 귀엔 공허하고도 아련하게 느껴졌다. 천둥인가? 커다란 가방을 옆구리에 멘 여자가 궁금해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력이 난무하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녀는 총성이 실제로 어떻게 들리는지 전혀 몰랐다.
「그들의 순진함을 목격할 적마다 나는 증오를 느껴.」

핀치가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한쪽 뺨 가장자리가 매우 붉다.
왜. 어째서.
그의 눈썹이 활처럼 구부러진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다.

『해롤드!』
군중을 밀치며 달려나간다.
하지만 느리다.
너무 멀다.
닿을 수 없다.
재조준까지 1.5초.
『해롤드!!』

핀치가 뛰어오는 리스를 발견한다.
그는 웃지 않는다.
울지도 않는다.
그저 넋을 잃고 멈춰 서있다.
정지.
시계의 초침이 움직임을 멈춘다.
『해롤드!』
핀치의 눈꺼풀이 깜빡인다.
영원에 가까운.
찰라?
설마.
핀치의 입 모양이 한 단어를 만든다.

존.

Posted by 미야

2012/08/10 14:18 2012/08/1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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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of interest (50)

일상은 급격히 복구되었다.
핀치는 어질러진 책들을 정리하는 척하며 - 어쨌든「현대 의학에서의 티타늄의 활용」이라는 제목의 도서는 이쪽으로 들어가는게 맞았으니까 - 600번대 서가를 기웃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서가의 세목, 의학이라 정의된 푯말은 그닥 눈여겨 보지 않았다. 멀리 나가 있는 리스가 순간이동 마법을 부려 갑자기 돌아올 일은 없지만, 하여간 좌우를 잘 살핀 후 미닫이 형식으로 된 아래 칸을 열었다.
텅 비어있던 곳으로 탄창과 수류탄이 돌아왔다.
무기를 혐오하는 핀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활짝 웃었다.

《핀치.》
어디다 몰래 카메라 설치라도 해뒀나.
절묘한 타이밍에 리스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핀치는 질겁했다. 놀라서 허리를 삐끗했다. 이래선 진열대에서 사탕을 도둑질하다 들킨 어린아이 같지 않은가. 초소형 카메라 렌즈가 있음직한 선반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전기라도 흐르는 것처럼 찌릿거리는 허리를 천천히 세웠다. 이런 건 싫다. 어른을 놀려서야 쓰나.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사다리를 가져와 천장부터 구석구석 뒤져보아야 할 것이다.
『어디다 숨겨뒀습니까, 리스.』
《뭘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기였다면 핀치는「저렇게 순진한 목소리로 반문하는 걸 보니 카메라따윈 애초부터 없었고 내가 그냥 과잉 반응을 한 모양이다」라고 여겼을 거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미묘한 어조 - 재밌어 하는, 제기랄. 시치미를 잡아떼며 이쪽의 반응을 즐기고 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핀치는 이곳인가 싶은 곳으로 손가락을 깊게 찔러 넣어 보았다. 아쉽게도 금속성의 물체는 느껴지지 않았다. 좋다, 이거야. 승부욕을 느꼈다. 카메라가 무선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 시그널을 포착하여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왼손을 허리에 올린 자세를 취하며 핀치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보다 아까 제가 뭘 숨겨뒀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어디에요? 미스터 리스.』
상대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이야기를 돌린다. 그 까닭을 알기에 저편에서 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큭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치의 어디냐는 질문에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고츠 씨의 저택 앞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관찰 중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당신이 고용했다는 사립탐정이 일을 설렁설렁 해치우는 바람에 빠진 퍼즐을 끼워 넣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지요. 음... 그들 부부는 지금 물건을 던져가며 말다툼을 하는 중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 핀치가 고용한 탐정은 불륜 전문이었고, 핀치는 그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아무렴, 미국 전 지역과 전 시민을 감시, 감청하는 놀라운 기계가 있는데 그 기계가 사전에 계획된 음모를 포착하고 프레드릭 고츠의 번호를 토해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탐정은 언제나처럼 그들 부부의 사생활 - 특히 아랫도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샅샅이 캤다. 남자는 비서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여자는 정원사와 놀아났다. 낯 뜨거운 정사 장면을 찍은 사진들이 매일같이 수십 장씩 쌓여갔다.
《정원사 말고도 부인이 남편의 사업 동업자와도 같이 잤네요.》
『그 남편은 동업자의 전 부인을 건드렸고요.』
《부부가 나란히 정력이 좋군요. 나는 흉내도 못 내겠어요.》
『동감입니다, 미스터 리스.』
사생활이 문란하면 적들도 많이 생긴다. 탐정은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이혼 소송이 가능하다고 짐작했지만 - 가십거리 신문에 오른다는 얘기다 - 남편과 아내 중 한 명은, 또는 두 명 모두가, 어쩌면 그들의 정부가,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이혼 소송을 하느니 차라리 상대를 죽여버리자 작정했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금 거래 내역 조사에 의하자면 이 건은 청부 살인으로 막을 내릴 가능성이 컸다. 부부가 모두 교묘하게 돈을 빼돌렸는데 일부는 그 내역이 불분명했다. 남편을, 혹은 아내를 살해하기 위한 댓가로 지불되었다? 흠, 적어도 핀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빨리 끝내고 존슨 클라이너 조사로 돌아가죠, 핀치. 솔직히 이들 부부는 절 짜증나게 해요. 두 사람 모두 발가벗겨서 요트에 실어 바다로 흘려보냈음 좋겠어요.》
존 프라이드로 며칠을 살았다고 그새 과격해졌다. 발가벗겨 바다로 흘려보내?
핀치는 해석이 불가능한 요상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서두른다고 될 문제는 아닙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CIA 요원을 조회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퇴직한 군인들 정보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칩니다.』
《하지만 당신은 펜타곤도 해킹했던 사람이잖아요.》
『그거야... 음. 젊은 혈기에 저질렀던 일이죠. 아주 옛날 일입니다.』
《얼마 전에도 털지 않았던가요?》
『음? 제가요?』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요. 괜찮아요, 해롤드. 신경 쓰지 마요. 그때 당신 컨디션은 최악이었거든요.》

내가 언제 그랬는데?! 그렇게 말하면 신경이 더 쓰이잖아!
라고 해도. 힘에 부친다고 말한 건 겸허한 표현이 아니다. 오죽하면 이참에 일라이어스에게 더 빌붙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봤을 정도니까 말이다. 책들이 늘어선 서가에서 몸을 돌려 작업 테이블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핀치는 그들의 우수한「적」을 떠올리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일라이어스가 가진 막대한 정보 소스를 상상하면 소름이 돋는다. 어디까지 선이 닿아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막대한 재력도 이미 소유했다. 그리고 그 재력으로 사람을 산다. 그 남자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꽤 높은 곳까지 잡아당길 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자를 그저 조직 범죄자라고 일컫는다면 폄하 발언이 아닐까. 어떤 마피아가, 어떤 조직 폭력배가 일탈한 CIA 요원의 이름을 그다지도 쉽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뭘 생각하는지 그 방향이 훤히 보인다며 리스가 건너뛰기를 했다.
《CIA 요원은 국내에서 방첩 활동을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다른 일들을 하기도 해요. 예를 들자면 마약 밀매로 인한 자금 모집 같은 거죠. 예의 L.O.S.를 떠올리면 될 겁니다. 그리고 대략 그런 부분에서 일라이어스와 접점이 있었던 걸 거예요.》
『네, 기억합니다. L.O.S. 말이죠... 나라 세금으로 그런 사람들 활동하게 만들었다는데 기가 차고 코가 찼지요. 그런데 리스 씨. 은퇴한 요원으로서 이런 현장 요원들을 추적할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음.』
《하지만 우린 그 인물의 이름도 얻었잖아요? 그러니 울적해하지 말아요, 핀치. 이런게 바로 시작이죠. 우린 해낼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리스는 일방적으로 연결을 끊었다.

그렇다. 이런게 바로 시작이다.
핀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고, 느린 타자 속도로 유효한 시스템 접속 암호 여덟 개의 글자를 입력했다. 그러자 저 너머의 세계가 문을 열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그러나 모든 것을 품은 그런 곳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2/08/09 11:37 2012/08/0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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