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미 윈체스터의 형님 잡아먹기 프로젝트,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2시즌 Hunted 에피소드를 보기 전에 모든 줄거리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 샘은「네 동생을 구할 수 없다면 죽여라」라는 파파 존의 유언을 형으로부터 전해듣지 못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
밥 생각이 하나도 없댄다. 그만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웠더니 욕설일 거라 짐작되는 단어 몇 가지를 중얼거리며 그대로 뒤돌아 누워버렸다. 손가락으로 살짝 뺨을 찔러봤음에도 반응 무,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딘은 시체 놀이를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땡볕에 더위를 먹고 차가운 보도블럭에 납작 엎드린 강아지가 따로 없다. 목줄을 잡아당기면「깔개」모습으로 질질 끌려올지도 모른다.
죽도록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하며 늘 허세를 부리던 형이다. 걱정이 되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어봤다.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뜨겁지는 않고 되려 차가웠다. 『피곤해서 그래?』 『으무... 가... 부.』 바벨탑이 건설되기 전에 사람들이 쓰던 우르 말이다. 적당한 번역기도 없겠다, 현대 미국인의 귀로는 그 뜻이 뭔지 어차피 못 알아 듣는다. 그래서 샘은 목덜미까지 오게끔 이불을 잘 덮어주고 고슴도치를 닮은 형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스탠포드 대학에 재학중일 적에 친구들은 이런 걸 가리켜《전지가 떨어졌다》라고 표현했다.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 내지는 과제물 제출 마감일 다음에 이런 증상을 보이는 학생들이 제법 나왔다. 기숙사 게시판으로《○○○ 아무개는 지금 충전중입니다》라는 쪽지가 나붙곤 했다. 화장실 가는 건 물론이고 먹는 것도 잊버린 채 오로지 잠만 잔다. 장학금을 두고 샘과 경쟁 관계였던 리처드 드렉이 바로 그런 부류였는데 코앞에서 마가렛 펄화이트가 트럼펫을 시끄럽게 불었음에도 그 잘난 친구는 절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니 잠자코 내버려두자. 샘은 햇빛이 방안 깊숙이 들어오지 않도록 커튼을 내렸다. 『그럼 나 혼자 다녀올테니 푹 쉬고 있어.』 『누... 보이호이... 마...!』 눈도 못 뜨는 주제에 잔소리다. 짐작하자면 혼자 밖에 나가지 말고 자기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라는 뜻일게다. 그의 동생이 주먹 하나로 동네 깡패 셋을 일시에 병원 응급실 신세를 지게 만들었다는 걸 알고는 있는 건지. 이건 완전히 기저귀를 찬 아기 취급이다. 그래서 샘은 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제멋대로 해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겉으로만 듣자면 모래 깔대기로 자갈을 와르르 쏟아붓는 소리였다. 나중에 무어라 야단을 치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귀를 후비도록 하자.
여자애에게 정성을 다할 때처럼 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오면서 샌드위치 사가지고 올게.』 드라이빙 식당이 가까운 곳에 있다. 걸어서 약 5분 거리. 가벼운 외투와 약간의 잡동사니를 챙겨들고 모텔방 열쇠를 챙겼다.
하지만 혼자서 먹는 아침은 영 맛이 없었다. 토스트와 커피, 적당한 계란 요리를 주문하고 등허리를 구부정하게 했다. 주방에서 감자를 튀기는 고소한 냄새가 났음에도 식욕이 동하지 않았다. 어쩌면 충전이 필요한 건 딘이 아니라 샘일지도 모른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침 출근 전쟁이 끝난 직후의 한적한 식당 안을 둘러봤다. 모든 것이 정상인데 오직 자신만이 혼자 비정상인 것 같다. 뼛속까지 물에 젖은 솜덩이가 침투했다는 느낌이다. 해변가에서 실수로 깨진 유리조각을 밟았을 적의 아찔함이 등줄기를 꿰뚫었다.
무기력감. 손으로 모래를 잡는다. 손바닥을 펴면 모래는 자연스럽게 다시 흘러내린다. 그걸 도로 주우려 노력한다. 서른 번에 마흔 번까지 똑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모래알이다. 손아귀는 머지 않아 다시 텅 비어버린다. 이것을 다시 일흔 번에 일흔 번을 되풀이한다. 발버둥쳐도 변하는 건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놈의 헌터 생활에 몸과 마음이 동시에 축나고 있다. 괴물은 사방에 우굴거리고, 일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 악마가 마련해둔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이놈 때려잡고, 저놈 때려잡으며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건 마치... 샘은 하아, 하고 숨을 토했다. 세계가 끝나는 장소를 찾아 무작정 날개를 퍼덕이는 갈매기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날아도 날아도 바다는 끝나지 않는다. 회색의 날개는 이미 누더기, 세계가 끝나는 장소라는게 과연 존재는 할 것인지조차 의문이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건지 종말로 답이 없다. 입에 문 토스트는 종이 조각 같았다. 침이 바짝 말라 맛도 모르겠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모텔에서 들고 나온 피카츄 스케치북을 테이블 위로 펼쳤다.
지난 밤, 싫다고 악을 쓰는 걸 살살 달래어 딘이 연필을 쥐게끔 하는 일엔 성공했다. 그렇지만 그 결과물이 너무나 참담하다. 샘은 의미불명의「웁스」소리를 내곤 차가운 바다 한 복판에서 보기 좋게 침몰당했다. 그의 눈매가 실처럼 가느다랗게 변했다. 『이건... 정말이지 맙소사.』 식은땀이 나려고 한다. 이건 흡사《메두사의 뗏목》으로 어뢰를 발사한 격이다. 연약한 통나무에 의지하여 끝까지 살아남은 15명의 생존자들은 이제 곧 폭탄을 맞고 뒤집어질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1819년으로 돌아가 화가 제리코에게 귀띔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붓질로 묘사한 가여운 뗏목은 어뢰를 맞아 박살날 거라고, 그리고 그 어뢰의 정체는 딘 윈체스터라는 이름의 풋내기라고 말이다.
본인 입으로도 크레용을 쥐고 낙서나 끄적이던 시절 이후로 그림이라는 걸 그려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겠다, 푼돈을 받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길거리 아마추어 화가의 실력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동그라미에 검은 점 두 개 찍고「이것은 사람 얼굴입니다」라고 얘기를 꺼낼 수가 있느냔 말이다. 절망감에 빠져 샘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콩콩 찍었다. 화성의 삭막한 바위 산을 찍은 나사의 천체망원경 사진을 보고도 인간을 닮은 코와 입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위대한 상상력이라지만 이건 정말이지 아니다. 반듯하게 내린 앞머리와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더해졌음에도 사람 느낌은 나지 않았다. 웬디스 버거의 로고인 빨간머리 소녀를 딱 절반만 닮았어도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터인데.
폭발적으로 공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새벽 2시가 넘도록 끙끙거렸으면서 나무 막대기처럼 죽 뻗은 다리와 쇠꼬챙이를 닮은 팔을 그려넣은게 전부다. 양말과 신발은 어디로 도망가고 소녀의 몸통은 성냥곽이다. 바지를 입은 건지, 원피스를 입은 건지 구분도 안 갔다. 네 살바기 아이가《우리 엄마》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려도 이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러 질질 흘러나온 눈물을 닦았다. 『우와. 이건 진짜지 걸작이군.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윙크를 하겠다.』 워크맨을 개조해 사제 EMF 미터기를 만들어낼 만큼의 손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사람 얼굴을 묘사하면서 점 두 개 달랑 찍고 끝낼 수가 있는 건지 궁금하다. 아니, 어떻게 보자면 이것도 재주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렇고 말고. 웃다가 딸꾹질이 나오려 했다. 그래서 얼른 커피로 입안을 헹궜다. 『우리 형의 센스라는 건 장난이 아니군.』 그렇게 혼잣말을 한 샘은 정나미가 떨어진 피카츄 스케치북을 옆 자리로 훌쩍 던져버렸다. 겨우 이딴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 가게 다섯군데를 돌며 스케치북을 찾았다니. 미친 짓이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펄럭이는 뒷장으로 낙서가 하나 더 있었다. 샘은 표정을 달리하고 다시금 스케치북을 집어들었다. 성냥곽 소녀의 뒤로 그림이 한 장 더 있었다. 그림 스타일이야 거기서 거기지만 - 성냥곽을 닮은 네모난 몸뚱이는 결코 바뀌지 않았다 - 내용이 보다 풍부하다는 점이 샘의 시선을 끌었다. 남자가 하나, 그 양편으로 여자가 둘이다. 여자 한 명은 젖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짧은 탱크 톱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챙이 넓은 카우보이 모자를 썼다. 차림새로 유추하자면 아마도 파티를 즐기는 도중인 것 같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여자가 남자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 덕분에 친구이거나, 아니면 더 친숙한 사이로 보인다. 생략된 손동작은 어딘지 모르게 애무를 닮았다. 딘은 얼굴이라 짐작되는 동그라미 속으로 옆으로 누운 바나나를 덧붙여 그녀들이 싱글벙글 즐겁게 웃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림의 주제는《딘 윈체스터의 좋았던 시절 - 여자를 양 옆에 둘이나 끼고 - 얼씨구나》라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꽤나 오래 전 이야기다. 그림 속의 남자는 지금의 딘이라고 하기엔 머리카락이 제법 길다. 체격도 어쩐지 안 맞는 것 같다. 남자는 여자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크다. 신장만 갖고 따지자면 오히려 이 남자는 샘과 닮았다. 하지만 맹세코 그는 아니다. 남자는 손으로 술병을 들고 있다. 샘은 술을 잘 못 하는 편이다. 조금만 마셔도 취해 정신 없이 종알대는 버릇이 있다. 청소년 시절에「우리 아빤 독재자, 하이 히틀러~」라고 술김에 떠들었다가 엄청나게 화난 딘에게 반죽음 당한 적도 있겠다, 자신이 알콜에 약하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는 샘은 술 마시는 일에 굉장히 주의하는 편이다. 여자들을 상대하면서 알콜을 입에 대는 일은 그래서 드물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건 누구일까나. 둘로 갈라진 아랫턱을 어루만지며 도대체 이 그림이 무슨 뜻인가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특히나 신경쓰이는 부분... 바로 이거다. 딘은 연필을 똑바로 세워 사내의 얼굴이 안 보이도록 벅벅 그어놓았다. 격앙된 감정, 그리고 깊은 분노가 느껴지는 굵은 선들이었다. 더하여 힘주어 쓴 욕설. Fuck. 뜸을 들여가며 천천히 버터를 바른 토스트 한 조각을 베어물었다. 『까닭을 모르겠군. 뭘 말하고 싶었던 거야, 딘?』 햇빛에 비춰보면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스케치북을 높게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멀리서 커피를 서빙하던 웨이츄리스가 그런 샘을 이상하다는 투로 쳐다봤다. 어린애 장난 같은 그림을 갖고 위조 지폐인지 아닌지를 검별하는 연방요원처럼 굴고 있으니 우스울 법도 했다. 그러든 말든, 샘은 딘이 그린 낙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헤에, 너울을 쓴 이시스다. 구석으로 연필로 썼다 지운 희미한 자국이 있다. 눈가에 가까이 가져갔다 떼어놓았다 하면서 유심히 보았다.
영어 대문자 J와... 26... 1월 26일이다. 『두 여자와 더블 데이트에 성공한 날? 이런 제기랄.』 진짜지 형의 여성 편력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샘은 콧방귀를 뀌고 다시금 스케치북을 던졌다.
『더블 데이트? 물론 그것이 진정한 남자의 로망이긴 하지. 하지만 난 한 번에 두 여자랑은 자지 않아. 오른쪽으로 쪽쪽, 왼쪽으로 쪽쪽... 나중엔 헷갈려서 못 해먹는다고.』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 모르게 해서 식사를 대충 끝내고 모텔로 돌아오니 침대에서 일어난 딘이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샘의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포르노를 보고 있다, 그랬다간 절교다, 라고 생각한 샘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먼저 봤던 그림 - 양편으로 여자를 나란히 끼고 - 의 인상이 제법 컸음이다. 그래서 버럭 고함부터 지르고 보았다. 『그딴 변명을 누가 믿어줄 거 같냐! 내 노트북 당장 내려놔, 이 호색한!』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힌 동생을 눈앞에 두고도 딘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파서 그런지 조금은 흐리멍텅한 시선으로 키를 한 자나 크게 하고 있는 샘을 올려다 보았다. 어떻게 보자면 따로 할 말이 있는 것도 같다. 한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이 그 증거다. 아니나 다를까, 딘은 짜증스럽다는 투로 손가락을 흔들며 동생을 혼내기 시작했다. 『샘, 이 멍청아. 내가 혼자선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이 형이 하는 말을 썩은 세숫대야의 구정물인양 무시할 거냐?! 내가 나가지 말라고 하면 나가지 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어? 아까 무어라 중얼거렸던 거... 샌드위치 사가지고 오라는 말 아니었어?』 『썅!!』
머쓱한 얼굴로 가게에서 사가지고 온 포장된 샌드위치를 들어보이는 동생을 보고 딘은 이리 가까이 오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척 하면 삼천리다. 샘은 몸을 뒤로 빼며「이리 오세요」라는 형의 요청을 거절했다. 『싫어. 가까이 가면 때릴 거잖아.』 『안 때려.』 『맹세할 수 있어?』 『때리진 않고「엎드려 뻗쳐」시킬 거야.』 『그게 그거잖아!』 『그럼 윗몸 일으키기를 백 번 할래?』 『내가 왜 그걸 해야 하는데.』 『알았어.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마. 대신 저리로 가서 벽을 쳐다보며 딱 1시간동안만 서 있으렴.』 『제발... 딘!』 『그러니까 귓구멍 파고 잘 들으란 말이다! 혼자선 절대로, 절대로! 움직이지 마. 여의치 않아 혼자서 움직이게 됐을 적엔 최소한 총 정도는 가져가. 빈 몸으로 덜렁덜렁 다니지 말고! 밥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형의 말, 알아 들었어?』
이건 흡사 남자 친구를 처음 사귄 딸네미를 야단치는 엄마다. 히스테릭한 딘의 반응에 샘은 슬그머니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 그들 형제는 특별히 어떤「일」에 매달려 있지 않다. 예의 오쿠림바 사건의 뒷 마무리를 위해 여섯 손가락 소녀를 추적하는게 요즘 하는 일의 전부,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을만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형제의 직업이 그렇고 그렇다보니 예기치 않은 상황에 빠질 가능성은 농후했다. 아버지의 지인이라면서 연락을 해왔는데 알고 봤더니 그게 개인적인 복수를 꿈꾸던 뱀파이어더라 식의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때문에 평소에도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인다 싶으면 바짝 긴장하고 최악의 상태에 대비했다.
여기서 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이상한 것이 과연 있었나? 날씨는「초록」이다. 그런데 딘은 그걸「주홍」으로 보고 총도 안 갖고 혼자 아침 식사를 하러 나간 부주의한 동생을 닦달하고 있다.
무릎을 낮추고 의자에 앉은 형과 가만히 눈을 맞췄다. 딘이 움찔해서 얼른 시선을 피했다. 이것 봐라, 샘은 한쪽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올렸다. 『뭔가를... 숨기고 있군. 딘.』 그리곤 형의 무릎으로 올라가 있던 자신의 노트북을 강제로 빼앗았다.
Posted by 미야
2007/02/14 14:15
2007/02/1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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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칠거칠한 마음의 황야를 달리는,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회개, 구원, 심판》3부작의 3편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2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먼젓번 글을 읽지 않으면 흐름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
듬직한 체구와는 달리 움직일 때 그다지 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다. 제시카는 그런 샘에게「알라스카 곰이 고양이 흉내를 내며 걷는다」고 놀려대곤 했다. 무거운 전공 도서를 한아름이나 안고 나타났음에도 인기척이 전혀 안 났다며 책을 정리하던 대학 도서관 사서가 자지러지게 놀란 적도 있다. G번 서가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괴담도 있었겠다, 사서는 두꺼운 안경을 떨어뜨리고 반복하여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으로 멀쩡한 사람을 귀신 취급했다. 아마도 그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문을 열고 닫는 동작에도 상대방은 TV에서 머리를 들지 않았다.
『나 왔어. 저어... 형?』 방송으로 지구 온난화네, 남극의 빙산이 죄다 녹고 있네 어쩌고 하면서 심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살짝 숙인 딘은 그 앞에서 머리를 쥐어싸매고 있다. 얼핏 보면 과연 세계는 끝장났다고 탄식에 빠진 염세주의자처럼 보인다. 절대로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형이 엘리뇨와 이상 기후를 염려하고 있다? 그래선 사담 후세인이 부시 대통령과 사돈을 맺었다는 뉴스가 되어버린다. 돌아서서 체인을 단단히 걸어 잠구면서 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머리가 아픈 거야?』 최근들어 그의 형은 가벼운 두통을 앓고 있다. 정확하게는 이마를 꿰맨 실밥을 뽑고 난 다음부터 그런 증상을 호소하기 시작했는데, 본인 말로는 머리 한 구석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한다. 「맙소사, 샘. 넌 이게 상상이 가니. 이 형이 여자랑 못 해본지가 벌써 석 달이나 되었다고」 욕구불만이 두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지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다. 기혼자의 몇 프로가 첫사랑과 결혼했는지를 거금을 들여 조사하는게 오늘날의 미국이라지만, 과연 그런 웃기는 주제로 연구를 한 학자들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샘이 아는 내용이라는 건 딘이 만사에 짜증을 부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그의 형은 대단히 지쳐 있었다. 『딘? 대답 좀 해봐. 괜찮아?』 그러다 샘은 그릉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깨달았다. 그의 형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친 자세 그대로 얉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자위가 너구리처럼 먹색이다. 바스락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해가며 품에 안고 있던 쇼핑 봉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저녁 8시 40분. 바닥을 뒹굴고 있는 벗겨진 햄버거 포장지로 눈을 돌렸다. 맛 없다고 투덜거렸음에도 일단은 먹어주었으니 안심이다. 원래 사람은 심각하게 몸이 아프면 끼니를 거르기 마련이다. 이걸 다시 말하자면 먹는 걸 등한시하지 않는 이상 큰 탈은 나지 않았다고 보아도 괜찮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포장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샘은 시끄러운 TV 소리를 줄이기 위해 리모컨을 들었다. 이제 그들의 수다꺼리는 카트리나 대참사로 옮겨갔다.「대기 불안정」,「테러와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온난화와의 전쟁이 문제라고 스티븐 호킹 박사도 주장...」등등의 내용이 얼핏 귀를 자극했다. 거대한 파도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삼켜버리는 영화속 장면이 참고 자료로 등장했다. 손깍지를 끼고 패널에 앉은 사람들 표정이 40일 금식을 눈앞에 둔 성직자인양 다들 심각했다. 그래도 샘이 보기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별 생각 없이 ▼ 모양 버튼에 엄지손가락을 가져갔다.
『엇, 뭐야. 누구야!』 막대 눈금 하나 크기로 볼륨을 줄였을 뿐인데 그의 형이 소파에서 펄쩍 뛰었다. 『미안. 깼어? 자는 걸 깨우고 싶지 않아 주의했는데.』 『놀랐잖아, 임마. 도둑처럼 살금거리고. 끄응... 몸이 찌푸드한게 기분 나쁘군. 언제 왔어?』 『방금 전에.』 눈을 부비면서 잠에서 깨어난 딘은 어딘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동생을 쏘아보았다. 아직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눈꺼풀이 평소보다 다섯 배 가량 두꺼웠다. 『늦은 저녁에 쏘다니는 건 나쁜 어린이나 하는 거예요. 그나저나 술은 안 사왔냐, 새미.』 『머리가 아프다면서 술 타령이야? 얼굴은 그만 구기고 이거나 받아. 타이레놀 사왔어.』 진통제 포장지가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았다. 딘은 능숙하게 동생이 던진 걸 받아쥐면서 혀를 찼다. 『쳇! 진통제는 사양할란다. 계집애처럼 약이나 먹을 바엔 그냥 앓다 죽지.』 『두통에 여자 남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 『물론 두통엔 남자 여자가 없지. 하지만 모름지기 남자라면 이런 못 생긴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키는 대신, 차가운 맥주를 마시면서 머리 아픈 걸 훌훌 털어내야 하는 법이야.』 샘은 가만히 입술 끝자락을 끌어올렸다. 『맞는 말이야. 형이 옳아. 다들 그렇게 하지. 그리고 40살이 되자마자 출렁거리는 똥배 및 48사이즈의 허리 둘레를 걱정하게 되고. 내 짐작이 맞다면 멀잖아 형도 그렇게 될 거야.』 웃으면서 던지는 동생의 핀잔에 딘은 샛노래진 얼굴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보니 아랫배가 조금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차라리 욕을 해요!』 그래서 딘은 차가운 맥주 생각을 접고 동생의 충고를 받아들여 진통제를 먹기로 했다.
『겨우 이깟 알약 사러 동네 한 바퀴를 돌았던 건 아닐테고. 뭘 사러 밖에 나갔던 거니?』 이 틈새로 약을 끼운 채 궁금해하는 딘의 질문에 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겉옷을 벗었다. 『스케치북, 지우개, 미술용 연필.』 『엑? 헌터는 그만두고 미스터 피카소가 되기로 마음을 돌렸냐?』 『나는 헌터 일은 그만두지 않을 거야. 피카소가 되는 건 내가 아니라 형이야.』
라스베가스에서의 의뢰에 실패한 이후, 그들 형제는 오쿠림바의 주문을 코앞에서 채어간 - 딘의 표현대로라면 그렇다 - 소녀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시작부터 대략 난감이다. 샘은 당시 유령에게 당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탓에 문제의 여자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적엔 돌연 장소가 바뀌어 낯선 모텔방 킹 사이즈 베드 위였다. 체스터는 어디로 갔는지, 유리창이 깨진 자동차는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옆에선 떨떠름한 표정을 한 형이 아버지의 일기장을 넘겨가며「잠자는 야수는 도대체 어떻게 깨워야 하는 건가요, 아버지!」라며 화를 내고 있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그 잠자는 야수씨는 형의 몸뚱이를 꽉 붙잡고 늘어져 무려 사흘 밤낮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꼼짝만 못 하게 했게. 귓볼 만져줘~ 머리카락 만져줘~ 이러면서 날 무지 짜증나게 만들었지. 담요에 둘둘 말아 고속도로에 내던지고 싶었다니까.』 보이스카웃 선서 동작까지 해가며 형이 주장했다. 샘의 얼굴이 곧바로 벌개졌다. 『거짓말! 그런 쪽 팔리는 부탁은 제시카에게도 하지 않았다고!』 『그 정도가 쪽 팔리는 부탁이라는 거냐. 이거 눈물 나오게 한심해서... 아이고, 새미. 여자에게 부탁하려면「거길 입으로 물고, 빨고, 핥아줘」정도는 되어야 할 거 아냐. 수준 낮아서 이 형은 말 하기가 싫어진다.』 『그, 그런 걸 어떻게 부탁을 해!』 『왜 못해? 여자 친구인데 뭐가 어때서. 반문하는 네가 이상하다.』 『부끄럽지도 않아?! 형은?!』 『전혀.』 그림물감을 곱게 펴서 피부에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파랗게 변한 동생에게 윙크를 해보이며 딘은 팔꿈치를 괴였다. 순진한 동생을 골려먹는 것도 나름대로 재밌다. 단, 그 후환이 대단히 두렵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아니다.
『아, 아무튼 난 기억에 없거든? 반면 딘은 그 여자의 얼굴을 직접 봤고, 말도 나눴고, 몸싸움도 했잖아. 비록 형편 없이 깨지긴 했지만... 그것도 열 네 살짜리에게. 내 말이 맞지?』 『뭐... 그렇지.』 봐라, 곧바로 치고 나오는 것을. 좋은 시절은 다 갔음을 깨달은 딘은 슬픈 표정을 짓고 앉은 자세를 바꿨다. 누가 뭐라고 했는감요. 전 열 네 살짜리 계집애에게 뒷통수를 맞은 형편 없는 녀석이랍니다. 이어지는 건 언제나의 취조실 형사 놀이다.
샘은 지난 보름 내내 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반복해서 질문하곤 했다. 그 아이의 생김새가 어떻더냐, 눈에 띄는 특징이 뭐였느냐, 혹시라도 자기 이름이 무어라 하진 않았느냐, 머리카락 색은 뭐냐, 눈동자 색은 어떠냐, 입고 있던 옷은 어땠느냐, 신발은 뭘 신고 있었느냐. 샘은 미처 모르는 듯했다. 이것이야말로 딘이 앓고 있는 두통의 원인이다. 그는 살짝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묻지 마! 더 이상은 생각이 안 나, 안 난다고! 정말이라니까!』 같은 질문이 오늘도 어김 없이 반복될 거라는 예감에 딘은 몸서리쳤다. 아울러 외쳤다. 『내가 범인입니다, 형사 나으리! 내가 죽였거든요? 내가 범인 맞아요!』 『딘... 추해.』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데! 입장을 바꿔봐. 너라도 허위 자백을 하고 말거다!』 그런다고 해봐야 샘이 은근슬쩍 봐줄 거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게 낫다. 몰랐던 사실인데 동생은 은근히 새디스트 기질이 있다. 이쪽에서 괴로워하면 오히려 더 신나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법조계로 나갔어도 아마 크게 성공했을 거다. 싸늘한 표정으로「증인은 지난 목요일 오후 4시엔 직장 회의실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회사 CCTV로 녹화된 장면을 보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이란 말입니다!」라며 피의자를 쥐 잡듯 추긍할 거다. 그리곤 스미스소니언 협회에서 좋아라 수집해갈, 땅속에서 파낸 100만년 전의 부싯돌 창끝처럼 변한 사람을 보며 좋아라 할 것이다. 딘은 욱씬거리는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자신이 그 부싯돌 창끝처럼 변한 사람이라는 점을 슬퍼했다. 진통제를 한꺼번에 열 다섯 알을 삼키면 괜찮아질까. 약을 먹었음에도 두통이 한층 더 심해졌다.
『그치만 애시당초 열 네 살짜리 헌터라는 점부터 납득이 가질 않잖아.』 『본인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모를까, 이 형은 들었던 그대로를 너에게 말해준 거란다.』 『그것도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잡는다고 했다며.』 『아아, 그게 총 쥐는 실력을 봐선 단순히 허풍은 아닌 것 같았어.』 총 잡는 것부터 시작해 그 기백까지. 공포탄을 실탄이라 착각하게 만들 정도다. 산전수전 다 겪은 딘은 물론이고 오죽하면 유령도 총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라졌을까. 분명히 진작에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아이다. 얼음처럼 차가웠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여드름을 걱정하며 손거울을 들여다볼 평범한 여학생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에 무슨 옷을 입고 가면 좋을까를 궁리하며 잡지책을 넘기는 10대라고 하기엔 표정이 영 아니었다.
샘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맙소사. 그런 아이가 오쿠림바의 주문을 가져가게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거야?!』 『미안해, 샘. 기절한 동생을 돌보느라고 내가 좀 바빴거든. 그래서 속옷 사이즈랑 핸드폰 전화번호를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어.』 하여간 망할 주둥이다. 샘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제발 그만하라며 손바닥을 휘저었다.
딘은 비굴한 표정으로 동생에게 싹싹 빌었다. 『그러지 말고 애쉬에게 다시 연락이 오길 기다리자. 형사 놀이는 그만하고. 응?』 『그럴 수 없다는 건 딘도 잘 알잖아. 전화로 자기가 뭘 찾아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형에게 말했다며.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애쉬에게 사전에 알려준 정보 자체가 너무 부실하다고.「열 네 살의, 오른쪽 손가락이 모두 여섯 개인 여자 아이를 찾아줘. 아, 참고가 될지 몰라 알려주는건데 성격이 거지 발싸개 같은 아이야」하는데 나라도 질겁하겠다. 그래서 말인데, 딘...』 이쯤해서 샘은 어렵사리 구해가지고 온 쇼핑 물품을 주섬주섬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스케치북에 그 아이의 얼굴을 그려보면 어떨까 싶어. 전문가적인 몽타쥬까진 아니더라도「대략적으로 이런 얼굴입니다」라고 하면 애쉬나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손을 움직이다보면 미처 몰랐던 부분이 새롭게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제발 참아주세요. 딘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고 현실 회피 모드로 들어갔다. 미술은 젬병이다. 사과라고 나름대로 열심히 그렸놨더니 망할 놈의 담당 교사는《빨간 동그라미에 점 하나 찍은 거로는 점수를 줄 수 없어요》라고 정색했다. 답지 않게 빈둥거리지 않고 애써서 그린 그림이었는데 졸지에 5초만에 뚝딱 그려낸 낙서 취급을 당했다. 그 이후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딘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크레용을 잡지 않았다. 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반항했다. 『싫어. 나 안 그려. 몽둥이로 때려 죽인다고 해도 안 그릴 거야.』 『그러지말고 이리 와서 앉아. 착하지?』 『싫다고 했잖아, 샘! 그러니까 분홍 바탕에 피카츄가 그려진 어린애용 스케치북은 당장 내다 버렷!』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딘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눈이 동그랗게 변한 건 구석에서 신나게 연필을 깎고 있던 샘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사가지고 온 스케치북은 테이블에 거꾸로 뒤집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다. 그걸 앞면이 똑바로 보이게끔 원래대로 돌려놓으면서 - 피카츄가 맞았다 - 샘은 어쩐지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형을 보았다. 이건 꼭 마술사가 관객이 무작위로 고른 카드의 숫자가 무엇인지를 초능력으로 때려맞췄다는 식이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직 보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이 그림이 피카츄인지.』 『젠장! 나도 몰라... 그냥 알았어.』 머리가 못 견디게 아파왔다. 딘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진득한 신음 소리를 토했다.
Posted by 미야
2007/02/12 00:08
2007/02/1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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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이번 편에선 샘이 나오지 않으니까 글 쓰는 것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역시 두 사람은 같이 있어줘야만 해요. ※
생전 처음 만났음에도 10년지기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음에 길거리 술집은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친 나그네에겐 일종의 오아시스다. 풍요로운 야자나무가 있고, 유목민의 노랫가락이 있고, 발효된 낙타의 젖이 있으며, 흥에 겨운 웃음소리가 있으니 진실로 낙원이다. 그래도 딘은 호주머니로 손을 넣은 채 같이 목을 축이자는 사내의 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죠.』 『에이, 10분도 못 기다려주는 야박한 애인이라면 그냥 차버리라고. 다들 엉터리 같은 축구 본다고 호들갑이라 외로워 죽겠어. 잠시만 와서 우리랑 말 상대를 해줘요.』 『애인에게 전화하려는게 아녜요.』 『어, 그럼 마누라야? 아직 젊어 보이는 사람이 일찍도 장가들었군. 실례했수다. 그럼 당장 전화해야지. 모름지기 남자는 부인에겐 잘 해야 하거든. 동전은 있소? 뭐 하면 내가 빌려줄게요.』 딘은 멎적게 뺨을 긁었다. 누가 마누라냐. 동생이 알았다간 거품을 물고 기절하겠다.
『뭐? 마누라가 아니야?』 딘에게 줄 동전을 찾겠노라 주섬주섬 옷을 뒤지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가뜩이나 쌍커풀 짙은 눈이 앞으로 쏟아질 지경이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외모로 보자면 지중해쪽 출신이다. 체격이나 인상이 르네상스 시대의 매끈한 대리석 조각상을 많이 닮았다. 살짝 구부러진 매부리코가 매력적이다. 그런 남자가 혀를 끌끌 찼다. 『한심한 사람이군! 그럼 코가 꿰였다며 전화통만 쳐다보고 있을 까닭이 없잖소. 자, 이리 와서 편안하게 앉아요. 내가 맥주 한 병 쏠테니. 이보쇼, 주인장? 이 친구에게 나랑 똑같은 밀러라이트 주시게. 그리고 형씨는 얼굴 좀 펴요.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으려 한다고 오해하게 생겼잖소. 길게는 안 잡을테니 이리 와서 같이 마셔요. 딱 10분만! 응? 딱 10분만.』 그가 눈웃음을 치며「위하여! 주정뱅이들의 신 바커스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는 일부러 옆 의자의 쿠션을 손바닥으로 치며 어서 이곳에 앉으라 채근했다. 『빨리, 빨리!』 성격도 급하다. 못 말릴 사람이었다. 어린애처럼 박수까지 쳐가며 종용하는데 분위기로 보아 이젠 뒤로 뺄 수도 없게 되었다.
저편에서 한 테이블을 점령하고 앉은 축구광들의 웃음 섞인 함성 소리가 다시금 터져나왔다. 누가 골을 넣기라도 했나 보다. 구석에 앉은 노인이 셔츠를 벗어던지며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그게 꼭 코미디 드라마의 가식적인 웃음 효과처럼 보여 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말릴 사람들이다. 그 난리통에 줄리아 로버츠를 닮은 매력적인 여자가 재빠른 몸동작으로 성에가 낀 차가운 맥주를 가지고 달려나왔다. 시녀는 은쟁반에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담아 살로메에게 바쳤다. 『IN VINO VERITAS!』 술 속에 진리 있소. 분봉왕 헤롯이 기뻐하며 외쳤다. 군중은 새롭게 환호했다.
상호가 찍힌 병 뚜껑만 봤음에도 입안으로 쌉쌀한 술 맛이 돌았겠다.., 머뭇거리던 딘은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공짜 맥주의 유혹에 굴복했다.「딱 10분만」이라는 말을 믿기로 하고 사내가 손바닥으로 가리킨 라운지 의자로 가서 살짝 엉덩이를 내렸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앓지도 않은 치질이 걱정되는게 뒷맛이 영 나빴다. 뭐랄까, 해고 예고 통지서를 받으러 사장님 앞에 앉은 평사원이 된 듯한 기분이다.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이제 9시 18분이 되었다.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시간. 톱니바퀴가 살짝 어긋났다는 불길한 확신.
『어디서 오셨는가?』 뚜껑을 돌려 따면서 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했다. 『뉴올리언즈.』 『진짜로? 뉴올리언즈쪽 말투가 아닌데요.』 『거기서 그렇게 오래 살진 않았거든요. 직업상 여행을 자주 다녀야 해요.』 『호오, 그거 억세게 부럽수다. 여행을 자주 해야 하는 그 환상의 직업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형씨.』 『스포츠용품을 통신판매 합니다.』 검정 재킷의 남자가 자신의 콧망울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한쪽 눈썹을 살짝 비틀었다. 『에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좀 그럴 듯한 말로 둘러대슈.』 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납니까. 그럼 솔직히 말하죠. 성인용품을 팔아요, 저는.』 훤칠하니 생긴 남자가 푸웃,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배가 아프다며 몸을 구부리는데 그게 꼭 쇼트트랙 선수 안톤 오노가 보인 과장된 헐리우드식 액션 같아서 보는 입장에선 기분이 언짢았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배꼽을 쥐는 건 심했다. 『와하하~! 그건 좀 낫다. 이건 진짜요. 아까보단 나아요. 어차피 둘 다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점수를 주자면 전자는 25점, 후자는 71점. 나 말이지, 형씨가 쬐~끔 좋아졌소.』 이어「코가 비뚫어지게 마셔보자!」구호가 요란스럽게 합창되었다.
딘은 인상을 찡그리며 공짜 맥주를 천천히 기울였다. 어쩐지 상대하기가 싫어지려 했다. 이 남자는 호들갑스럽고, 시끄러웠으며, 천박했다. 면전에 대놓고「당신 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새빨간 거짓말이잖아」이라고 못을 박는 법이 어딨냐. 알면서도 속아주는게 주당들의 미덕이다. 『그럼 내가 뭘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요.』 짜증이 살짝 섞인 딘의 질문에 남자가 눈 크게 뜨고 대답했다. 『난들 아나~ 여하간 댁이 최소한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젠장. 차라리 배불뚝이 아저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파도 타기」를 하는 편을 선택하는게 좋았을지도. 남자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음을 확신한 딘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일행인 것이 분명한 여자가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짐짓 올렸다 내리며 미안하다 사과했다. 『이해해줘요. 지금 이 남자, 부인에게 버림을 받아서 화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했던 거랍니다. 평소에도 재수 없지만 덕분에 지금은 더 재수가 없어졌네요. 부인이 개인적인 용건이 있다면서 이 사람을 냅두고 혼자 뉴욕으로 떠났거든요. 그래서 짜증이 치솟아 어제부터 계속 이래요.』 여자가 하는 이야기를 엿들은 남자가 수탉이 홰치는 흉내를 내며 펄펄 뛰었다. 『그 입 다물라! 누가 마누라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거냣!』 『자기 뒤를 따라오면 그 날로 헤어지는 거라고 소중한 그녀가 말했다면서, 네마 나타스.』 『따라가지 않았으니 헤어지지 않은 거고, 버림도 받지 않은 거지. 우리 사이의 애정 전선은 이상 무! 누가 뭐래도 난 그녀를 사랑하고, 허니도 마찬가지로 날 좋아할 거라고 생각... 콜록. 생각은 하지만... 어, 어쩌지. 나 말고 딴 남자가 생긴 거면! 그, 그러면 나, 나는...!!』 『말도 더듬고 잘 한다. 봤죠? 이 남자, 완전히 이거예요.』 혀를 끌끌 차던 섹시한 카우보이 걸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모르겠다. 부인이 혼자 여행을 떠났다고 불륜을 의심하는 주제에 양편으로 멜론 사이즈의 가슴을 가진 언니 두 명을 양쪽으로 꿰차고 술을 마셔도 되는 거였나. 딘은 어쩐지 이 모든게 광대 놀음이 아닌가 싶어져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아, 상관 없소. 다른 자들에겐 마음을 절대로 주지 않거든.』 딘의 생각을 읽었나 보다. 자기 몫의 술병을 기울이며 네마 나타스가 딱 잘라 선언했다. 고개를 돌리고 이쪽을 쳐다보는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쓸쓸하고 비참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 마음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나의 지배자라오.』 듣다가 현기증을 일으키고 쓰러질, 너무나도 뻔뻔해 뺨히 화끈 달아오를 수준의 사랑 고백이다. 그런데 그걸 부인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찔찔 짜면서 하고 있으니 대단히 처량맞다.
도저히 못 참겠다며 카우보이 걸이 으이그 소리를 냈다. 『그만 울어. 계속 그러면 사진 찍어 회람으로 돌려버린다. 그나저나 왜 뉴욕이야? 이런 계절에. 뉴욕은 춥잖아? 휴가를 보내기엔 별로일 것 같구먼.』 『잊어먹었냐. 몇일 지나면 1월 26일이잖아.』 『아... 깜빡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여자는 그게 뭔 소리인지 알아들은 모양이다. 하지만 제3자에겐 땅 짚고 헤엄치는 소리였다. 1월 26일이 친정 어머니 생일이라도 되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딘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저울질했다. 그녀는 이렇게까지 목놓아 부르짖는 - 여보, 제발 날 버리지 마 - 남편을 두고 왜 혼자서 떠나겠다고 했을까. 그 첫 번째 가능성, 헤어진 전 남편과의 재산 분할권을 놓고 변호사와 만날 약속을 했다. 두 번째 가능성, 헤어진 전 남편과의 자녀 양육권을 놓고 판사 앞에 서야만 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요.』 네마 나타스는 화가 난 표정으로 딘을 쏘아보았다.
호기심이 동했다. 『어떤 여자인가요? 당신의 부인이라는 사람.』 딱히 할 얘기가 없어 꺼낸 딘의 질문에 네마 나타스는 사탕을 선물받은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최고!』 좌우로 몸을 흔들며 종달새처럼 노래했다. 『마음은 불덩이 같고, 몸은 얼음인 여자. 진짜지, 진짜지 세상에서 둘도 없이 멋진 여자!』 그리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테디 베어 인형을 마구 껴안는 동작을 취했다.
왼편에 선 갈색 머리의 여자가 혀를 차며 네마 나타스의 등을 쥐어박았다. 『사랑에 눈이 멀어 등신이 되었구나. 슬프다, 과거와 미래를 꿰뚫는 왕이여.』 『꿰뚫긴 뭘 꿰뚫어. 과거와 미래를? 그녀의 따뜻하고 촉촉이 젖은 그곳도 제대로 꿰뚫지 못해 고자가 아닌가 의심이 되는 판국에 그딴 걸 잘도 꿰뚫겠다.』 『꺄악!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색광! 비단 도포를 벗은 우리의 왕을 보라. 베옷을 입은 헐벗은 백성이 되었도다. 위엄 가득했던 왕년의 자기를 상상도 못 하겠어. 상대는 그냥 헬레드에 속한 여자인데 어쩜 이렇게 타락했니.』 『그냥 여자?! 혀를 조심해. 여차하면 주둥이를 확 찢어버린다.』 『하! 누가 누구의 입을 찢어?! 어이가 없으려니까... 말을 말아야지. 하여간 아스모다이가 질투에 눈이 멀어 사라레이의 남편 셋을 참살했던 것보다 더 웃기게 되었다니까.* (->토비트서에 나오는 악마 이야깁니다)』 『이봐! 날 지금 그놈의 쪼다와 비교하는 거야?!』 『그게 비교가 되겠냐... 쯧쯧. 네쪽이 더 형편없다. 지금의 너를 봐.《이혼수속 밟으면 난 끝장이예요》라고 술주정이나 부리며 울고 있잖아. 최소한 아스모다이는 위엄을 부리며 뒤로 물러서는 법을 알았어. 그런데 넌 뭐니. 시뻘건 풀무불에 던지워졌을 적에도 실실거리고 웃던 자식이《아무래도 우리 허니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 같어, 난 이제 끝났어. 어쩌지》이러고 징징거리기나 하고. 넌 미쳤어. 단단히 미쳤다고.』 『INSANUM QUI ME DICET, TOTIDEM AUDIET. (날 미쳤다고 하는 너도 같은 소리를 들을 거다)』 가만히 듣고만 있을 여자가 아니었다. 빨갛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으로 사내의 턱을 가만히 쥐었다. 피어싱을 한 혀를 길게 빼고 낼름거렸다. 『골룸! 골룸! LIBERA ME. (날 살려주라)』
남의 말싸움을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는 취미는 없다. 딘은 기회를 보아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모르는 척하고 동생에게 전화나 걸러 가자. 네마 나타스가 놀라서 딘의 소매춤을 붙잡았다. 『워워, 어딜 도망가우!』 『두 분이 심각한 분위기인 듯하여... 싸움을 중재할 제3자가 필요합니까?』 『안 싸웠어. 그냥 사소하게 의견이 대립했을 뿐이예요. 에이, 그러지 말고... 앉아요. 전화는 그만 신경 끄고! 형씨 동생은 물건을 사러 밖에 나가선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이 동네엔 썩 괜찮다 싶은 가게가 없거든요.』
그건 또 뭔 소리? 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맹세코 이들 앞에서 동생 얘기를 꺼낸 적이 없음이다.
남자가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한다며 버럭 화를 냈다. 『했어! 덧붙여 그 동생 이름이 샘이라는 것도, 그가 스케치북과 미술용 연필을 사러 나갔다는 것도 말해줬다고. 기억 안 나? 당신, 우리보다 늦게 시작했으면서 벌써 취했어? 보기와는 달리 술이 약하잖아. 아님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 거야?』 바싹 끌여당겨진 딘은 실례가 아닐 정도로만 해서 그 팔을 뿌리쳤다. 『컨디션이 별로라는 건 맞지만... 이봐요? 동생은 나에게 어떤 종류의 물건을 사러 간다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어요. 거기에 대해 아는게 전혀 없다고. 그런데 내가 뭘 말했다는 거요.』 『오우.』
물건을 훔치다 주인에게 들켰다. 주춤거리는 동작으로 멜론 가슴이 남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찔림을 당한 쪽도 헛기침을 터뜨리며 들고 있던 맥주병을 테이블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여자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핀잔을 주었다. 『너무 많이 말했어, 네마 나타스. 이건 분명히 네 실수야.』 남자가 등을 구부리며 손바닥으로 턱을 고였다. 어쩐지 심드렁한 표정이다. 『괜찮아. 실수한 건 맞는데 상관은 없을 거야. 이 친구는 자기 동생이 점잖케 생긴 어른용 스케치북을 구하지 못해서 안절부절해 하고 있다는 걸 알려줘도 놀라지 않을 걸? 아, 그러니까 말입니다요, 형씨. 댁의 동생 샘은 가게를 다섯군데나 돌아 분홍 바탕에 피카츄가 그려진 스케치북을 겨우 샀어요.「형이 이것들을 보고 화가 나 날 잡아먹으려 할텐데, 큰일났다」라고 크게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려드리죠.』 『피카츄... 입니까.』 『봐, 내 말이 맞지? 하나도 놀라지 않잖아. 사실 이 자는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진작부터 눈치 챘다고.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음에도 내색 안 하고 같은 테이블에 앉아준 거야. 그렇죠? 딘 윈체스터.』
딘은 긍정을 표시하며 자기 손목시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분침과 시침은 움직이는데 초침이 안 움직이고 있었어. 그때부터 알아챘지.』 『겨우 그 정도만 갖고 이 모든게 다 조작된 가짜라는 걸 알았다고?』 남자는 두 팔을 머리로 올리고 끄응 신음했다. 『쳇, 시시한 부분에서 걸렸군. 나름대로 애 많이 썼는데.』 『그래도 맥주 맛은 진짜 같았어요. 네마 나타스.』 『병 주고 약도 줘요. 그런 칭찬은 하나도 안 반갑네.』
네마 나타스. NEMA NATAS. 뒤집으면 SATAN AMEN. 사탄 아멘.
어느새 연보라색 눈동자로 돌아온 사내가 맥이 풀려버렸다며 손가락을 탁 튕겼다. TV소리가 꺼지면서 응원의 파도 타기를 하던 스포츠 팬들이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순식간에 가게 안은 깊은 바다처럼 고요해졌다.
반면 여자는 유혹하듯 손가락을 쪽 빨았다. 『그래? 난 지금부터 흥이 나는데. 소문 그대로잖아? 잘 생겼는데다 머리도 좋아.』 『그래서 뭐. 건드려보고 싶어? 관두는게 좋아. 저 친구, 이쪽에서 조금 부추겼다고 동생의 누드를 꿈꾸는 남자야. 190cm의 거구인, 그것도 남자의 누드.』 딘은 당연히 발끈했다. 『동생인줄 몰랐어! 내가 변태인 줄 알어?! 여자인줄 알았다고!』 그 투덜거림에 멜론 가슴이 두 손바닥을 삼각형으로 모으고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자폭성 발언이야, 딘 윈체스터. 그 덩치를 여자로 착각했다면 그건 더 웃기지.』 『그치만 눈 감고 있었는 걸!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았고...』 『한술 더 떠서 핵폭탄 수준의 발언까지! 어쩜.』 『웃지 마! 난 문제 없다. 그런 꿈을 꾸게 만든 당신네들이 문제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여자의 눈이 서서히 뱀의 그것으로 변화했다. 『무슨 꿍꿍이냐고? 그야 경고하기 위해서지. 조심해라, 딘 윈체스터. 1cm로 잘게 토막친 그대의 시신이 고속도로에 뿌려지기 전에 알아서 몸을 사리는게 좋을게다.』 여자가 의지를 분명히 하며 혀를 낼름거렸다. 두 갈래로 갈라진 뱀의 혀다. 길고도 가늘었다.
약이 바짝 오른 딘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거 미치겠네. 영문이나 알자. 도대체 나에게 뭘 경고하겠다는 거냐.』 끽 소리가 나도록 의자를 뒤로 끌며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내 마누라에게서 손 떼라는 거다, 이 자식아!』 『왜 소리지르는 건데. 환장하겠군. 당신 부인? 이봐, 난 댁의 마누라 이름이 뭔지도 몰라.』 『흥! 바로 그랬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거야, 딘 윈체스터. 아니었음 진작에 목이 달아났을 걸. 마침 바이킹 촌색시인 동생이 스케치북을 사가지고 돌아온 모양이군. 그러니 오늘은 그냥 보내줌세. VADE IN PACE. 잘 가게.』
순간 시야가 확 하고 변하면서 눈에 익숙한 모텔 벽지가 앞으로 불쑥 쳐들어왔다.
Posted by 미야
2007/02/09 20:16
2007/02/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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