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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책이라던가, 작가라던가 하던 것들은 죄다 허구입니다. 사실 조사는 모조리 패스, 논문 쓰는 것도 아닌데 공부하긴 싫더군요. ※


1시간 가까이 기다렸어도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딘은 턱을 치켜들어 높에 걸린 벽시계를 쳐다보는 것으로 지금이 몇 시인지를 확인했다. 꼭 마흔 다섯 번째 시도였다.

이제 샘은 코흘리개 어린애가 아니다. 행여라도 몹쓸 사람이 잡아갔을까봐 전전긍긍해할 필요는 없다. 동생은 남들보다 키도 곱절로 크고 체격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샘을 잡으려면 사자 조련사 정도의 강단이 필요하다. 칼이나 총 같은 무기를 들고 위협하는 것도 쉽지 않다. 기백에서 일단 밀리는데다 아무런 예고 없이 어둠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상대방의 권총을 어렵잖게 잡아채곤 하기 때문이다.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한 흉악 강도가 거꾸로 당한다. 고도로 훈련된 특수 기동대 대원을 맨손으로 제압하고 입고 있던 제복을 벗겨낸 실력자이니 동네 깡패 다루는 것쯤이야 식은죽 먹기다.

따라서 딘이 초조한 표정으로 납치, 봉변, 성추행,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 등등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객관적으로 샘은 평범한 민간인이 아니라 미래에서 전송되어 온 터미네이터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딘이 보기엔 샘은 여전히 귀여운 동생이었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소중히 지켜줘야만 하는 작은 강아지였다.
꼬리치며 천진난만하게 웃는「바보」를 떠올린 딘은 근심에 젖었다.
나쁜 놈이 혹시라도 내 동생 건드렸음 어쩌지.
손톱여물을 썰어대며 시계를 쳐다보는 건 그리하여 이제 마흔 여섯 번째가 되었다.
『핸드폰 전원도 꺼버리고 말이야.』
돌아오기만 해봐라. 궁딩이 팡팡을 해버릴테다.

마음이 심란해진 우리네 아버지들이 거실에서 신문을 들춰보는 건 다 까닭이 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객관적으로 설명한 글자들로 한참을 눈을 돌리다보면 모든게 남의 일인양 멀게 느껴지는 법이다. 텍사스의 기록적인 가뭄, 블랙베리 같은 휴대용 E메일 장치를 사용하느라 엄지손가락이 아픈 이들을 위한 엄지 특별 마사지법, 무장한 은행 강도, 힐러리 클린턴의 대권 출마, 다 남의 일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말다툼 끝에 부인이 집어던진 스탠드마저 남의 일인양 느껴지게 된다. 마침내 두근거리던 심장이 식고 가파르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신문을 접고 깨어진 스탠드의 파편을 봐도 감정적으로 아무런 느낌도 없음에 안도한다. 이제 청소기를 돌릴 시간이다.

마찬가지의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딘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기 위해 그간 닥치는대로 끌어모은 각종 자료들로 눈을 내리깔았다. 게중에서 아무거나 잡고 제목을 확인해봤다.「동유럽 지역의 민간설화 - 무덤에서 부활한 조상들」이었다. 잘도 부활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딘은 혀를 내둘렀다. 진짜지 샘이 어디서 이런 걸 구해왔는지 모르겠다. 근방 대학 교수의 연구실을 털었나? 언뜻 봐도 아무나 들락거리는 도서관에서 일반인이「일주일간 빌려주세요」라고 얘기를 꺼낼 종류는 절대 아니었다. 무려 1910년대에 인쇄된 책이다. 코를 가까이 들이대자 특유의 산성지 냄새가 났다.
글쎄다. 잘은 몰라도 이걸 헌책방에 팔려고 내놓으면 책방 주인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 첫째, 장물로 의심하고 붉은색 긴급 부저를 누른다. 그 둘째, 이게 왠 떡이냐 만세를 부른 뒤에 단골 호사가들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힌 수첩을 쥐곤 부지런히「여보세요? 거기 아무개 씨 댁이죠? 댁이 관심을 가질 멋진 책이 나왔어요」라고 외친다.
아쉽다고 한다면 먼젓번 책 임자가 뒷장으로「이건 내 소유물」이라는 의미로 손수 이니셜을 남겼다는 거다. 옆으로 뉘여 쓴 글자《B.B.》는 대단히 예쁘장하고 꼼꼼해 보였다. 딘은 즉흥적으로「베스」라는 여자 이름을 떠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책 읽는 취향은 썩 좋은 편이라 할 수 없구려. 차라리「고담시의 위대한 영웅 배트맨」에 심취하는게 낫지.

그래도 머리에 베고 누우니 책의 두께가 일부러 자를 대고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았다. 완벽한 베개다. 그 안락함에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와 깜짝 놀랐다.
미안해, 베스. 얼굴도 모르는 책 주인에게 사과한 딘은 똑바로 누운 자세 그대로에서 손을 이마 위로 얹었다.

골치가 아프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배트맨에 열광하는 것 이상으로 흡혈귀에 빠져들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처녀의 피를 갈구하는 백작에게서 - 작위를 정식으로 받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운 남자에게서 매력을 느낀 것이다. 맛이 살짝 간 오늘날의 처녀들이「외계인이여, 어서 날 납치하여 주세요」라고 떠들어대듯, 불과 수 십년 전엔「흡혈귀여, 빨리 나의 목을 물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1902년엔 목덜미에 가짜로 점 두 개를 찍고 다니는게 대 유행이기도 했다. 빈혈 환자인양 뺨은 하얗게 분칠을 하고 일부러 시든 장미꽃을 골라 드레스를 장식했다. 뿐만 아니라 자정 무렵에 모여 레드 와인을 홀짝거리며 피를 마시는 척했다. 게중 일부는 용감무쌍하게도 진짜 피를 마시기도 했고, 소화되지 않는 철분에 위장이 뒤틀려 고생했다. 아편에 취해 진짜로 피를 마셨다고 착각한 나머지 고해성사를 들어줄 신부를 불러달라며 소동을 부린 남자도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웃기는 사람들은 많았다.
『꼴통들. 나 원, 한심스러워서... 그러다 진짜가 숨어들어 오기라도 하는 날엔 몰살이라고.』
다행히 진짜 뱀파이어들에게도 이런 풍습은 대단히 꼴사나웠던 모양이다. 사교 파티 도중의 대량 실혈사(失血死)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선 말이다. 하긴, 아무리 뻔뻔한 성격이라도 화장하고 돌아다니는 가짜들 틈새에서 피를 빨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긴 어려웠을 거다. 말 그대로 입맛이 떨어졌을 터.

어쨌든 여기서의 문제는 수 많은 소설과 시, 그리고 영화에서 어둠에서 창백한 하얀 손을 내미는 이 사악한 존재를 미화시켰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놈의 미화 작업은 필연적으로 사실을 왜곡시켰다. 뭐가 사실인지 아닌지, 죄다 섞여버린 것이다.
딘은 가만히 박자를 맞추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뱀파이어는 박쥐로 변신하지 않는다. 당연한 거지만 영국인이 애용하는 박쥐 우산으로도 변신하지 않는다. 햇빛을 보는 날엔 잿더미가 된다는 주장도 거짓이다. 화상을 입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십자가와 마늘이 유일한 대항 무기라는 속설 또한 완전히 날조된 거짓이다. 애쉬의 말로는 은으로 만든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며 무려 10년에 걸쳐 수녀 노릇을 한 뱀파이어도 있었다고 한다. 무기를 소지한 채 수녀들을 욕보이겠다고 성당으로 난입한 소련군 여섯을 물어뜯어 죽이고 그대로 도주, 여지껏 생사불명이라니 무섭다. 그래가지고 성수에 과연 반응은 하기는 할련지... 남자 망신 다 시킨 소련군 여섯이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질렀다는 건 딘의 관심 밖이었다. 은십자가가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은총알로도 처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가 생각하는 건 오로지 그게 전부였다.

다시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고 상식적인 선에서「무기」라고 짐작되는 것들을 나열해 보았다.
십자가, 은총알, 나무말뚝, 양파, 마늘, 성수, 자외선, 성스러운 빵, 로즈마리...
깔깔대며 자지러져라 웃는 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농담하는 거 맞지? 뱀파이어들의 후각이 예민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양파와 마늘에 질색하겠어? 개에게 레몬즙을 뿌리면 기겁하지만 죽지는 않는다고.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건 뭐야. 성스러운 빵이라니? 뱀퍼인 나도 그런 건 처음 듣는데.」
본인에게 묻지 말도록. 성스러운 빵 어쩌고는 순전히 바비 아저씨의 추측이니까.
사실 성만찬에 쓰는, 누룩 없이 구워낸 떡의 효과에 대해선 사실 그도 매우 궁금해하던 참이다. 아울러 고백하자면 언젠가 한 번 시험해봐야지 하고 몰래...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기겁했다.
『샘?!』
모르는 사이에 살짝 졸았던게 분명하다. 동생이 언제 돌아왔는지 전혀 몰랐으니까.
뿐만 아니다. 샘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침대에 누운 딘과 눈높이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코앞으로 동생 얼굴이 불쑥 전진해오자 딘은 당황했다.
심장에 안 좋다, 이런 건. 놀란 나머지 몸을 벌떡 세우려 했다.
『와, 왔으면 말을 할 것이지.』
그보다 0.5초 더 빨랐다.「그냥 그대로 있어」라고 작게 속삭인 샘은 손바닥으로 딘의 가슴을 눌러 일어나려던 움직임을 제지했다.

『왜.』
『이게 더 좋아.』
『하아?』
『우리 얘기 좀 해.』
『앉아서도 얘기는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샘. 난 이러는 거... 조금 불편하거든?』
샘과의 거리는 불과 한 뼘 남짓. 어쩐지 한 침대에 둘이 나란히 누워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상당히 거북했다. 농담이 아니다. 그래서 딘은 이대로가 더 좋다는 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일어나 앉으려 했다.

그래봤자 샘은 또 다시 손으로 딘의 몸을 꾸욱 눌러대며「안돼」라고 했다.
강하게 힘주어 누르는 동작에 기가 막혔다. 이게 뭔 짓인고?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것으로「치워주지 않을래?」라고 물었다. 하지만 샘은 딘이 취한 제스츄어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신 질릴 지경으로 똑바로 눈을 맞춰오면서 딘이 반항을 포기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누워있어야 했고, 샘이 원하는 건 오로지 그 사실 하나밖엔 없는 듯했다.

녀석이 또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딘은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구나, 이 형은.』
『묻고 싶은게 있어.』
『내가 그 여자와 섹스를 했는지, 안 했는지? 이 바보, 척 보면 모르겠냐. 난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샤워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어떤 남자가 여자와의 정사 끝에 책을 베고 누워 졸겠니. 그것도 제목이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도 겁나게 먼「무덤에서 부활한 조상들」이라고.』
외출했다 돌아온 주인 상태를 확인하는 개냐. 딘은 착잡한 심정으로 벌릉거리고 움직이는 샘의 코를 노려봤다. 녀석은 긴장하여 냄새를 맡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았을 여자의 냄새를, 정액의 냄새를 찾으면서 킁킁 소리를 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비명이라도 질러대고 싶었다.

『계속 그러면 한 대 맞는다.』
『우... 형한테서 땀 냄새 나.』
『쳇! 그거 참 대단히 미안하게 됐수다.』
딘은 발끈했다. 하여간 이놈의 자식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데 천재적이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말이 뭐냐. 나더러 목욕 좀 하고 살라고?』
『아니.』
『아님 겨드랑이에 데오도란트라도 바르라고 충고하고 싶어?』
『그게 아니라...』

샘의 표정이 잡작스럽게 어두워졌다.
그걸 본 순간 차갑고 끈적거리는 젤리 느낌의 무언가가 천천히 딘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뱉을 수 있다면 뱉고 싶다. 왠지 불길하다. 정체 모를 한기가 뒷맛 나빴다. 저런 표정을 짓는 동생은 무지 오랜만이다. 천사 나부랭이를 믿는다고 나불거리던 그를 향해 다음엔 하느님께 기도도 드리겠구나 하고 빈정거렸더니 샘은「난 지금도 매일 기도하고 있어」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떨궜다. 아이고 맙소사, 그때의 얼굴이다. 철렁 소리를 내며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어째서야... 어째서 딘은 나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어?』
『뭐?』
『왜 밖을 내다보지 않았느냐고.』
딘은 최대한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야 네가 총알처럼 빠르게 뛰쳐나갔으니까. 붙잡고 자시고 할 틈을 전혀 안 줬잖아.』
속상해하며 샘이 부정했다.
『거짓말이야. 난 가방을 세 개나 들고 있었어. 그게 얼마나 무겁던지 걷는 것조차 버거웠다고. 뛸 수 없었어. 딘의 표현대로 총알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단 말이야.』
『가방? 그것도 세 개씩이나?』
이상하다. 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딘은 뭔가가 어귀가 살짝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무슨 소리야. 넌 가방을 들고 있지 않았어. 샘? 너 지금 취했니?』

정곡을 찔렸다. 눈에 띄게 당황한 샘이 화들짝 뛰었다.
『아, 아, 안 취했어!』
『뒤로 느낌표가 붙는게 영 수상하군. 게다가 말을 더듬기까지. 으이그!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두 잔? 석 잔?』
『마, 맛만 봤어. 진짜야.』
『이놈아! 특허법 위반이야. 그건 딘 윈체스터가 여차하면 요긴히 써먹던 변명이잖아.』
동생이 취했음을 확신한 딘은 주먹으로 동생의 머리를 따악 소리가 나게끔 때렸다. 알콜 냄새가 안 난다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하는 행동으로 보아 일찌감치 짐작했어야 옳았다.
『이 술주정뱅이!』

슬슬 동생을 재워야 할 시간이었다.
『대화는 맨 정신일 때 계속하자. 너는 지금 바로 눈을 붙이는게 좋겠어.』
『안 졸려, 딘. 하나도 안 졸리다고.』
『그러셔요? 어서 이리 와서 누우세요. 자빠져 누우라고요.』
『싫어. 난 알고 싶단 말이야... 계속 생각했어. 술집에서도 그것만 계속 생각했다고.』
『셔츠는 벗자. 아가? 만세를 부르렴.』
『왜 날 붙잡지 않았느냐니까... 내가 묻고 있잖아.』
『알았어, 말리지 않을테니 바지고 뭐고 전부 입고 자.』
『딘.』
『자꾸 반항하고 그러면 찬물 틀어놓고 샤워기 앞에 널 그냥 세워버릴 거야.』
 경고를 담아 말을 일단 끊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 진짜지... 알콜에 약한 동생이 너무나 싫었다.

Posted by 미야

2007/06/02 22:29 2007/06/02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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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크앙... 3시즌이 고프다. 엘리스님이 올려주는 팬픽 번역이 없었다면 진작에 시체됐을 거예요. ※


홧김에 뛰어나왔으나 그 다음부터가 막막했다. 아침부터 내린 가느다란 빗줄기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다 수중엔 우산조차 없다. 이래선 꼭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숲속을 방황하는 헨델과 그레텔이 된 기분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멍한 눈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대로라면 미아가 되어버리는 건 기정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식인 마녀의 끔찍한 함정일지언정 과자로 만든 집이 코앞으로 나타나면 반색하고 들어가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버릴지도 모른다.
보슬비에 목덜미가 흠뻑 젖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몸을 차갑게 하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 벌써부터 어깨가 덜덜 떨렸다.
샘은 모텔에서 500m가량 떨어진 곳까지 팔을 흔들며 걸어오고 난 뒤에야 아무런 준비 체조 없이 강으로 뛰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멱을 감으려면 최소한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감정을 앞세워 무작정 달려나온 건 실수였다.
그렇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더 챙겨들고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는 수 없었다. 옷깃을 바짝 세우고 불빛이 많은 방향을 향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영화나 보러 가? 팝콘을 먹으면서 1시간 30분짜리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럭저럭 시간을 맞출 수 있다. 단, 예약도 없이 아무 때나 입장이 가능한 영화관은 호환마마나 전쟁보다 훨씬 더 무서운 필름을 돌리고 있는 경우가 다수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스펙타클한 액션 영화나 특수효과 죽여주는 오락 영화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게 좋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살색의 제전이다. 이렇다 할 대사도 없고, 줄거리도 없는... 그걸 깨닫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싹 달아났다.
그럼 무얼 하는게 좋을까.
아니, 그보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걸까.
가슴 안쪽이 새파랗게 식어갔다.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추위를 떨쳐버리기 위해 가벼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어서 겨 들어와!》
전화를 걸어봤자 받지 않을 거라 짐작한 딘이 핸드폰으로 문자를 날렸다.
이를 무시하고 뛰는 속도를 올렸다.
《이눔이 형이 하는 말 안 들을겨?!》
짜증이 치밀어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어째서일까.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날 밤이 생각난다.
「나는 아버지 부하가 아니예요! 날 언제까지고 맘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명령을 내리면 로봇처럼「그러겠습니다」대답하는게 자식의 도리라는 건가요? 그건 절대로 아니예요. 저도 생각이 있고, 판단도 할 줄 알아요. 그런데도 아빠는 나를 무슨 부품인양 다루려 하죠. 어둠에 숨어있는 존재를 사냥하기 위한 요긴한 부품 말예요. 샷건이나 사냥용 나이프와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반들반들 닦여 있어야 하고, 기회가 오면 우릴 휘둘러 그들을 죽이는데 사용해요. 평소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시는 적도 없죠. 의견을 제시하면 깨끗이 묵살하고요.」
그것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대단한 싸움이었다.
「질문을 할게요, 아버지. 당신의 둘째 아들이 사냥을 싫어한다는 건 아세요? 꿈이나 장래희망이 뭔지는 알고 계시냐고요!」
죽을 각오를 하고 시작한만큼 쌓아두고 하지 않던 말을 이때다 하고 퍼부어댔다.
「하나도 모르죠. 아빠는 나에 대해 하나도 몰라요. 뿐만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그럴 필요도 못 느끼고요! 그거 알아요? 당신은 이기적이야!」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손을 가위표로 흔들며 선언했다.
「이젠 지긋지긋해. 모두 관둬요. 끝내요! 차라리 생판 모르는 남남으로 사는게 낫겠어요!」

원시적인 주먹다짐이 오고가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존은 사랑스런 아들을 두둘겨 패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냉정함을 유지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는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걸 기억해라, 새뮤얼.」
「주워담을 필요 없어요, 아버지. 난 떠날 거예요.」
「어디로 간다는 거냐.」
「상관 마세요. 오늘부터 난 당신 아들이 아니니까.」
그때 샘은 뭔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효과 좋은 접착제로도 다시 이어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삽시간에 두동강이 나버렸다. 정확히 무엇이 망가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무어라 명칭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하느님께 빌어도 한 번 부숴진 건 절대로 복구되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소중한 거였는데... 영원히 잃어버렸다.

한심스럽게 에취 재채기가 나왔다.
비가 내리는 밤은 어느 때보다 어둡다. 쌉쌀한 느낌의 코를 문지르며 쓰게 웃었다.
나는 오늘부터 당신 아들이 아니야.
아아, 어쩌면 좋아.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원래 철새처럼 떠돌며 살던 그들이었다. 가지고 있던 개인 물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옷가지와 책, 그리고 약간의 소지품을 전부 모아봤자 가방 3개 분량이 전부였다. 제일 비싼 물건이 중국제 워크맨이었다. 샘은 누르고 또 눌러서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겨울 외투와 신발 두 개는 과감히 쓰레기통에 던졌다. 계절이 바뀌면 나름대로 아쉬워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일단 버리기로 결정하자 냉정하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결심이 서자 그 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큰 가방 두 개는 어깨에 걸치고 나머지 하나를 손에 들었다. 기세 좋게 나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았다. 굳은 표정의 젊은이가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다른 사람처럼 보여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섰다. 그래도 샘은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그저 달각 소리가 나면서 닫기던 현관문의 촉감만을 기억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결코 미련을 두지 말자고. 이것은 평소 그가 꿈 꾸던 새 인생, 새 삶으로의 첫 걸음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예식장으로 들어가는 새신랑처럼 크게 호흡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비록 아무도 축복해주지 않았을지언정.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하루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기억 속에... 샘은 불현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딘이 없었다.
아빠와 샘이 싸운다 싶으면 항상 중재자의 입장으로 두 사람을 뜯어말리던 딘이다. 그래서 언젠가 농담처럼 딘이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너무 자주 끼어들다보니 권투 경기의 심판이 되어「이제부터 싸울 시간입니다. 시작~!」선언하는 기분이 된다고.
농담만 한게 아니라 짓궂게 장난도 쳤다. 입으로 땡 울리는 종소리를 흉내내고는「새뮤얼 윈체스터, 경기 시작하자마자 독설을 퍼붓습니다~! 아아, 존 윈체스터, 반격을 시도합니다! 순식간에 코너로 몰리는 새뮤얼 윈체스터! 시작은 좋았지만 언제나처럼 형편없군요.」이러고 중계 방송을 했다.
동생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거였다면 그건 대박의 성공이었다.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샘은 그 이후로 약 두 달간 실어증 환자의 증상을 흉내내며 살았으니까. 그때가 윈체스터 가문 역사상 가장 고요했던 두 달이었다. 옆구리를 세게 꼬집혀「이게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라고 샘이 버럭 고함을 지르기 전까지 그곳은 침묵의 수도원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이후로 냄비가 펄펄 끓어 넘치지 않도록 가스 불을 조절하는데엔 입은 그다지 쓸모 없다는 걸 딘이 깨달았다는 거다. 그래서 실없는 소리를 꺼내는 대신 샘의 팔을 잡고 강제로 그의 방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언성이 조금만 높아진다 싶으면 얼른 대기하고 서서 흥분한 곰을 포획할 태세를 갖추었다. 뛰어난 재주꾼인 딘은 그가 나서야 할 타이밍이 언제라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그 타이밍이라는 걸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딘은 일절 두 사람의 다툼에 관여하지 않았다.
모습을 감추고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일 때문에 어디 멀리 떠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고장난 TV 안테나를 고쳐보겠다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실수로 사다리를 걷어차 오작가작 못 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지하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딘은 샘이 가방을 꾸리든 말든 일절 모르는 척했다.
떠나지 말아달라 애원할 거라 생각했는데.
화를 내며 들고 있던 가방을 빼앗을 거라 상상했는데.
침묵했다.

대학에 갈 거라고 딘에게 미리 언질을 준 적도 있다. 집을 나가겠다는 결심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언제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말린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샘이 아니었다. 딘이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며 팔을 잡으려 들었다면 단번에 뿌리쳤을 거다.
그런 주제에... 얼굴을 보이지 않은 딘에게 심한 배반감을 느꼈다.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데도 형은 내다보지도 않았어. 딘은... 날 안 봤어!」
샘이 그들을 버린 거다. 존과 딘을 그곳에 버리고 떠나왔다.
정말로 그런가.
샘은 동요했다.
어쩌면 그 반대가 아닐까.
소리를 내고 뚝 끊어져버린 그 무엇...
딘은 떠나는 동생을 향해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토록 원하던 대학으로 오고 나서도 샘은 행복하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악몽에 시달렸다.
그 내용은 늘 똑같았다. 쓰레기통에 겨울 외투와 신발 두 켤레를 버린다. 손바닥을 탁탁 털고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샘은 그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본다. 물건을 버린 사람은 그가 아니라 딘이다. 그리고 형은 뒤돌아 태평스런 목소리로 존에게 질문한다.「이거 말고 더 버릴 건 없나요? 아버지.」그때마다 샘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벌떡 깨어났다. 뿐만 아니라「싫어! 그러지 마! 왜 버리는 거야!」라고 소리도 질러댔다. 제시카의 증언이다.
「어떤 건지 몰라도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 외투였었나봐, 자기.」
그래서 제시카가 마음을 담아 샘에게 선물한 첫 번째 물건이 바로 겨울 코트였다.

2년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딘이 전화도 걸지 않았다.
혹시라도 은행을 턴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의 수상한 돈뭉치를 들고 직접 나타나기 전까지, 샘은 딘이 동생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말살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어, 얼간이. 어디서 귀신이라도 봤냐. 하얗게 질려가지곤.」
전혀 짐작 못 했다. 뜬금없이 나타나 그는 웃었다. 거칠거칠하게 수염이 돋아난 뺨을 긁으면서 바보처럼 미소를 지었다.
「왜 나타났어, 딘. 여긴 뭐하러 온 거야?」
2년만에 얼굴을 본 형이 반갑기는커녕 당장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샘은 그제야 자신이 마음속 깊이 상처 입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꺼져.」
「알았어.」
딘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담백했다.
「돈도 도로 가져가.」
「아니. 이건 여기다 두고 갈게. 정 필요 없음 버려.」

송두리째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사실은 바다 만큼 남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샘은 술을 마셨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 싶도록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주정했다.
「나쁜 놈. 필요 없음 버리라고 딱 잘라 말 하다니.」
마음이 너무나 아파 길거리 한 복판에 엎드려 누워 엉엉 울었다.
일주일 뒤에 딘이 안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샘은 그대로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속상해서,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아서 죽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딘은 태도를 돌연 바꿔 전화를 여러 번 걸어왔다. 메시지도 남겼다. 안녕, 잘 있니, 시험은 잘 봤니, 아빠는 건강하셔, 나도 잘 있어... 그 답게 가끔은 철자도 틀렸다.
물론 샘은 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형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으면 그토록 고생하며 일궈낸「평범한 일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임을 그는 잘 알았다. 그래서 무시했다. 더 이상 버려진 외투와 신발 두 켤레의 악몽을 꾸지 않음에 만족하고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았다...

샘은 걸음을 멈추고 모텔이 있는 쪽을 돌아다 보았다.
이젠 너무 멀어서 간판의 불빛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모든게 혼란스럽다. 가슴을 윽죄는 애절함에 목이 매였다.
『이 바보 멍청아아아아~!!』
고통 섞인 울부짖음에 근방을 지나가던 운전자가 급 브레이크라도 밟은 모양이었다. 끼익 하고 타이어가 지면을 긁어대는 소음이 희미하게 빗방울 속에 녹아들었다.

Posted by 미야

2007/05/31 01:24 2007/05/3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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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이번 글은 전반적으로 성인 취향입니다. 그리고 무지 길어질 것 같습니다.「난 그런 건 딱 질색이야」라는 분들은 모쪼록 피해주세요. ※


이런 늦은 시간대에 대관절 왜... 아니, 그보다 누가.
알아서 할테니 방 청소는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사전에 신신당부했다. 형제 좋아하시네. 젊은 남자 둘이서 만리장성을 쌓겠거니 생각한 모텔 관리인은 선뜻 그러라고 대답했다. 이런 경우는 질리도록 봤다며 비밀을 공유하는 듯한 은밀한 표정으로 방 열쇠를 건네주었다. (터무니 없는 그의 오해에 샘은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딘이 귀찮아하며 그 사실을 정정하려 하지 않음에 많이 속상했다) 그러니 야밤에 휴지통을 치워주겠다고 문을 두드리는 건 절대로 아닐 터.
거기다 모텔 관리인은 나이 지긋한 남자다. 그런데 지금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목소리는 젊은 여성이다. 머리 허연 60대 초반의 사내가 뛰어난 성대 묘사의 재주를 부리고 있다는 줄거리를 일찌감치 문서 세단기에 넣어 곱게 갈아버린 샘은 근심에 젖었다.

발 뒷굼치를 들고 문가로 걸어가 도어미러로 밖을 살펴봤다.
《미스터 마호고프 씨?》
굵게 웨이브진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다. 껌을 짝짝 씹으며 뾰족하게 생긴 입술을 오물거렸다. 보라색 아이섀도우를 짙게 바른 눈이 시원 큼직했다. 속눈썹도 길었다. 퍽 예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만하면 개성적인 외모다. 더하여 가슴 계곡이 훤히 드러난 V-라인의 현란한 꽃무늬 셔츠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말 그대로 양귀비 꽃밭이었다.
여자는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먹쥔 손으로 다시 문을 두드렸다.
《미스터 마호고프 씨! 이봐요?》
두드리는 동작과 같이하여 위아래로 출렁이는 가슴의 움직임이 문 반대편까지 전달되었다.

이놈의지랄맞은형이프런트에가서아가씨를불러달라고그랬어!

지평선 너머로 지름 500m의 운석이 시속 6만7천km의 속도로 날아갔다. 하지만 하늘을 직각으로 날아가는 불덩이만 무서운게 아니다. 지상에서도 세인트 헬레나 산의 분화구에서 시커먼 유황 연기가 솟구쳤다. 멸망의 징조다. 딘은 양동이로 퍼붓게 될 마그마와 화산재를 두려워하며 목을 움츠렸다. 듣자하니 1902년 서인도제도로 재앙이 닥쳤을 적에 지하감옥에 갇혔던 사형수가 운좋게 살아 남았다고 하던데. 허나 지금의 그에겐 두꺼운 콘크리트 덮개는 물론이고 머리를 가릴 얇은 이불 한 장 없었다. 어찌된게 사형수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

황소가 콧김을 뿜었다. 날카로운 뿔로 들이받기 전, 딘은 테이블 뒤로 얼른 도망쳤다.
『앨런이 남긴 메시지를 찾으러 프런트에 갔다고? 이 거짓말쟁이!』
『내가 왜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난 아가씨를 부르지 않았어, 샘.』
『그거 참 이상하군. 죄를 짓지 않았다면 왜 내 나를 슬슬 피하는건데.』
『그야 지금 내 눈에는 네가「13일의 금요일」에 나온 제이슨으로 보이고 있으니까.』
『하! 크리스탈 캠프장에서 난리를 친 살인귀는 제이슨이 아니라 제이슨의 엄마잖아.』
『그건 1편이고. 요즘 갠 우주로까지 진출했다고.』
『제이슨이 우주로 갔든, 프레디와 맞장을 뜨든 말든, 관심 없어! 지금의 내 관심거리는 형이 여자를 이리로 불렀다는 거야! 세상에... 이 엉덩이 가벼운 인간아. 그렇게나 그 짓을 하고 싶었던 거야?!』
『샘? 나는 너와 다르게 남자야. 언제라도 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니. 하지만 안 불렀어. 정말이야. 맹세해.』

딘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심장 부위를 눌러가며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건 꽤나 설득력 있어뵈는 동작이었다. 그 뒤로 쓸데없는 말만 덧붙이지 않았다면 샘은 그가 얼룩 한 점 없이 진실을 말했다고 설득당했을 거다.
『그런데 새미? 밖에 있는 여자 얼굴이 어떻든. 예쁘냐?』

거기서 어떻게 베시시 웃을 수가 있니.
이쯤되면 사람의 목을 맨손으로 마구 졸라대고 싶어지는 법이다. 기분이 상했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샘은「홧김에 가까이 있던 스탠드를 집어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영화속 범인들의 참회가 결코 꾸며낸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어떻게 저지를 수 있냐고 반문해선 안 되는 거였다. 정말로 화가 나면, 그러니까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키면 인간은 소크라테스라고 해도 스탠드를 들고 야구방망이처럼 휘둘러대게 되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주세요.
코피를 멎게 하는 동작을 흉내내며 - 고개를 뒤로 바짝 젖힌 채 콧잔등을 세게 눌렀다 - 천천히 숨을 고르던 샘은 천천히 하나부터 열까지 숫자를 헤아렸다.
효과가 있었다. 부리로 사람 머리를 피 나게 쪼아대던 새가 마침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록 이마가 철철 흐르는 피로 뒤범벅이었지만 샘은 힘줄이 돋아나도록 힘주어 붙잡은 스탠드를 도로 제자리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주여, 감사합니다. 시험에 통과했어요」짧게 기도했다.

어쨌든 듣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노크 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자를 방 안에 들일 의사가 전혀 없는 샘을 대신하여 딘이 문을 열었다.
『짜증나서 혼났네. 왜 이렇게 밖에 오래 세워두는 거예요.』
대단히 멎적어하는 딘의 얼굴이 나타나자마자 여자가 대놓고 툴툴거렸다.
『미안... 그런데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아가씨가 찾는게 211호가 맞나요?』
딘의 질문에 여자는 킁 콧소리를 내며 엉덩이로 손을 올렸다.
『이거 왜 이러시나. 지금 와서 뒤로 빼긴. 마누라가 사설 탐정이라도 고용했대요?』
그리고는 샘을 다시금 폭발하게 만드는 문제성 발언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미스터 마호고프 씨. 그쪽이 두 명이라는 건 미리 얘기를 하지 않았잖아요.』

딘이 여자의 엉덩이를 거머쥔다. 여자가 샘의 허리를 안는다. 망할.
딸각 소리를 내고 스위치가 켜졌다. 싸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지면서 사방으로 붉은 색 경고등이 번쩍거렸다. 샘은 빗방울에 젖어 축축해진 겉옷을 챙겨들고 성큼 걸음으로 방안을 가로질렀다. 여자와 대화하기 위해 입구를 가로막고 선 딘을 옆으로 밀쳤다.
시선만으로 살인이 가능하다면 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혐오와 미움으로 잔뜩 흐려진 녹색의 눈동자가 딘의 뺨을 후려갈겼다.

『샘? 샘!』
『밖에 나갔다 올게. 1시간이면 충분하지?』
『야!』
『그거 알아? 형은 변태야.』
뒤돌아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가는 동생을 딘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 화가 나 있었고, 앞뒤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손가락으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경을 치게 생겼다. 하도 공기가 살벌해서 딘은 감히 모험이라는 걸 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그는 샘이 피를 나눈 형제라는 사실을 잊고 그의 넓적다리를 향해 부엌칼을 휘둘러댈까봐 무서웠다.
『난 형과 나란히 한 여자랑 즐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어. 그러니 잘 해봐!』
싱글 베드 두 개짜리 방에서 성인 세 명이 어떻게 옷을 벗고 같이 뒹굴 수 있느냐는 소박한 의문따윈 머리에서 진작에 달아났다. 샘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녹색과 암청색, 그리고 새카만 빛깔의 화염이었다. 이게 만화였다면 뒤로 이런 의성어가 적혀졌을 거다. 활활.
『유황불 지옥으로 떨어져버렷!』
샘이 아는 한 그것은 최고 수준의 욕설이었다. 이윽고 분노로 가득찬 샘의 몸은 뻥 터져버렸다.

그 파편을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뒤집어쓴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딘은 절망했다. 지옥이라는 장소가 단순한 상징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리로 가라고 말 하다니. 슬퍼져 온몸의 기운이 죄다 빠져버렸다.
반면 여자는 이 모든게 대단히 흥미로운 듯했다. 어쩐지 교활해 보이는 미소가 입가로 슬그머니 떠올랐다. 그녀는 씹던 껌을 뱉어 손가락으로 돌돌 말면서 이렇게 말했다.
『와우! 오싹오싹하네. 바람 난 부인이라도 봤다는 식이군.』
딘은 눈에 힘을 주고 여자를 쏘아봤다.
『알았어. 정정하지. 바람난「남.편.」이라도 봤다는 식이군.』
여자는 서둘러 바꿔 말하고 갖고 있던 껌을 은근슬쩍 구석으로 버렸다.

이상하다. 샘이 사라지자마자 어느새 말투마저 달라졌다. 아니, 분위기 자체가 돌변했다. 혹시라도 샘이 다시 돌아와 지금의 이 여자를 본다면「섹스」라는 단어를 연상하고 화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일이다. 천박한 느낌을 주던 색조 화장마저 지금은 평범하게만 보였다. 너구리가 다섯 바퀴 재주를 굴러 사람으로 변신했다.

여자가 엄지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봤어? 자동소총으로 날 쏘고 싶다는 표정. 한 순간에 머리 가죽 날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되던데. 1997년 뒤셀도르프에서의 사냥 이후 이렇게 긴장한 건 오랜만이야.』
딘은 이마를 찌푸렸다. 뒤셀도르프... 사냥?
『아아, 이거 진짜지 자꾸 왜 이러시나. 내가 창부가 아니라는 건 문을 열었을 때부터 곧바로 알아차렸잖아, 딘 윈체스터.』
그의 본명을 부르고는 재빨리 눈짓하며 부탁했다.
『허리춤에 찔러둔 권총에서 이제 그만 슬슬 손을 떼지 않겠어? 덕분에 나까지 긴장하게 되잖아. 난 총이라면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사실이다. 냄새만 맡고도 딘은 그녀가 길거리 여자가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경험이 부족한 동생은 빨갛게 칠한 입술만 보고 잘도 속아 넘어간 것 같다만, 딘은 그쪽으론 눈치가 백만광년은 빨랐다. 블라우스 밖으로 훤히 비치는 검정색 브래지어와 비슷하다. 보고 싶지 않아도 그냥 보이는 걸 어쩌라고.

『어머나! 그거, 실례야. 여자를 면전에 두고「냄새」운운 하는 건. 그렇게 말하면 나한테서 땀 냄새나 겨드랑이 냄새가 나는 것 같잖아.』
『그럼 뭐라고 해야 해?』
『댁은 어휘력이 형편 없군. 매춘부는 보석으로 만든 비싼 귀걸이를 하지 않지 -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잖아. 실제로 내가 지금 한 귀걸이는 티파니 진품이고 말이야.』
그러면서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합성 사파이어가 박힌 포스트 타입의 귀걸이를 보여주었다. 악세서리엔 문외한이지만 확실히 비싼 장신구다. 세련되고 정갈했다. 길거리 여자들이 아니라 잘 나가는 대기업 사무원에게나 어울릴법한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딘은 여전히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탁이 있었지만 여차하면 뽑아들 수 있도록 총 위로 살짝 얹은 손은 계속해서 그 위치를 지켰다.
『그런데 왜 매춘부인척 한 거지?』
『왜냐니? 그야 그편이 훨씬 재밌을 것 같아서지.』
여자는 당연한 걸 묻는다며 살짝 윙크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의미에서 그쪽 반응이 어떤지 보고 싶었어. 뭐, 애쉬가 설명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일단은 마음이 놓였다고나 할까. 무턱대고「어서옵쇼, 아가씨!」이랬으면 난 정말 실망했을 거야. 헌터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증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동생 쪽은 살짝 실망이야. 아직 순진해서 그런가, 아님 시력이 나쁜가. 그런 형편 없는 눈썰미로 사람들 속에 숨은 뱀파이어를 무슨 재주로 알아차릴 거래?』

여기까지 말한 뒤, 오른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서두가 길었군. 이쯤하고 정식으로 인사하지. 만나서 반갑다, 딘 윈체스터. 내 이름은 리야. 그게 성이냐 이름이냐는 따지지 말아주기 바라. 다들「뱀퍼 리」라고 부르니까 리라고 불러.』
『리? 당신이?』
뱀퍼... 딘은 뱀파이어 헌터를 통칭 뱀퍼라고 부른다는 애쉬의 말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리가 최고의 뱀퍼라는 것도 떠올렸다.
『에엑?! 그런데 남자가 아니었어?!』
성차별 하고 지랄한다.
리의 한쪽 눈썹이 활처럼 구부러졌다. 거기다 악수를 하자고 했더니 무례하게 여성의 가슴 부위를 손가락질 하고 있다.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선 리는「이게 어딜 기어오르고 있어」라는 표정을 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5/27 09:48 2007/05/2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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