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맨날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 급조했습니다. 이거, 시즌 피날레가 다가오면서 피 말라 죽겠군요. 스트레스 받아서 일상 생활마저 망치고 있어요. 촬영을 모두 마친 그들이 30분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까닭이라는게 <내용이 이 모양이면 3시즌은 물 건너갔어. 다른 쇼를 알아봐야겠군> 라는 것 때문으로 밝혀지기만 해봐! 쥰쥰은 도시락 폭탄을 들고 크립키 테러하러 미국 갈테다! 크릉! ※
주어진 시간이 겨우 5일 - 거기다 이미 사흘을 소비 - 라는 강박관념이 드넓은 사바나 초원으로 불을 질렀다. 코앞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매캐한 연기 내음이 섞이자 수풀에 숨어있던 하이에나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끼잇끼잇 울었다. 불길이 그들이 있는 곳까지 이르려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차갑게 식어버린 모카라떼를 옆으로 치운 샘은 뻣뻣해진 뒷목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제 하이에나는 정신 나간 개처럼 짖기 시작했고, 새끼를 품은 짐승들은 서둘러 이동을 결심했다. 징조는 대흉.
일이 그 지경인데도 딘은 강 건너로 화염이 치솟았다며 느긋한 모습이다. 정말로 5일이 지나면 동네를 뜰 작정인지 꾸려놓은 짐을 도로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가방은 자동차 트렁크로 던져졌다. 무섭다며 울부짓는 하이에나만 꼼짝없이 바보가 된 셈이다. 샘은 그런 형의 귓바퀴를 세게 잡아당기며「평소에 생각이라는 걸 하고는 살고 있는 거야?!」라고 마구 호통을 치고 싶었다. 물론 희망사항이다. 그런 짓을 하려면 아직 개발되지도 않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엄마 메리의 손을 간절히 붙잡고「제가 형 할게요. 딘 말고 저를 먼저 낳아주시면 안 될까요.」애원을 해야 한다. 머리를 잡아뜯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공상을 해야 할 정도로 형은 그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임팔라의 뒷자석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해서 EVP를 녹음한 파일을 반복하여 듣고 있는 그는 마치 흘러간 유행가를 감상하는 철부지 청소년처럼 보였다. 언뜻 보니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박자까지 맞추고 있다. 심각함이라던가, 진지함은 빵 부스러기마냥 죄다 어디다 흘리고 왔다. 경찰서에 가서 분실물 신고라도 하고 싶다. 정 안 된다면 마녀의 집을 빠져나온 헨델과 그레텔처럼 숲속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바구니에 주워담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차갑게 쏘아붙이는 소리가 그래서 나왔다. 『그게 그렇게 재밌어?』 『어...』 대답도 대충대충. 『뭐야, 그 태도는. 진짜로 레드 제플린 노래를 듣고 있는 건 아니겠지, 딘.』 『스콜피언즈네요.』 약이 바짝 올라 성을 내는 동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추워요... 엄마?》 그래봤자 이미 골백 번은 넘게 들은 파일에서 이거다 싶은 점을 새롭게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유령은 - 또는 유령이라 짐작되는 그 무엇은 전화질은 무지 좋아하는 주제에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혼잣말만 하고 있다. 그것도 춥다, 어둡다. 외롭다. 이 세 가지 전통적 주제에서 뱅글뱅글 돌았다.「내 이름은 라일라이고, 꽃다운 나이 열 다섯에 폐렴으로 죽어 1982년에 그린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식으로 상세한 수다를 떨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정녕 욕심이었다. 진절머리를 내며 고작 단어 몇 개로 이루어진 하소연에 재차 귀를 기울였다. 《추워요...》 안 되겠다. 아버님 댁에 보일러를 새로 놔드려야겠다.
반면 두 번째 샘플은 이와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저 나쁜 년의 각을 떠버려...》 딘은 제일 먼저 기계적 조작 없이도 사람의 귀로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엄청난 에너지다. 거기다 상당히 거친 말투다. 화가 단단히 났고, 명령조다. 그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악의가 가득하다. 세상에, 각을 뜨라니. 가엾은 전쟁 포로들의 껍질을 산 채로 벗겨냈던 고대 멕시코로 착각한 거 아니냐고 진지하게 묻고 싶다. 아니, 그것보단 엄마를 찾는 어린애에서 곧장 원한에 사무친 원령으로의 승격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오래된 보호의 주문. 그리고 증오에 찬 목소리.
음악 감상(?)을 끝낸 딘은 뿔딱지가 난 것이 분명한 샘에게로 돌돌 뭉친 휴지 조각을 던졌다. 휴지는 조수석에 앉아있던 동생의 정수리를 정확히 맞추고 바닥으로 굴러갔다. 그런 것에 맞았다고 아플 리 없건만 샘은 두 눈을 시퍼렇게 치켜뜨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이, 동생아. 조사는 잘 되어가냐.』 『누구 덕분에 대단히 잘 되어가고 있지.』 그리고는 보복이랍시고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주워 딘을 향해 도로 던졌다. 어깨를 살짝 비틀어 이를 피하고. 『볼.』 딘은 투수의 제구 능력이 형편없음을 마음껏 비웃었다.
『좋아, 마이너리그.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되었니?』 『장난치지 마. 자동차 안이 쓰레기 천지가 되면 곤란해지는 건 바로 형이야.』 샘은 또다시 휴지를 돌돌 말고 있는 딘을 향해 단단히 경고를 주었다. 그제야 후회막급이 된 딘은「어머머! 내가 우리 베이비에게 무슨 짓을?!」이라 혼잣말하며 떨어진 휴지를 부랴부랴 치웠다. 하여간 진짜 못 말린다. 샘은 설명에 앞서 땅이 꺼져라 한숨부터 쉬었다. 답답한 자동차 안에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잠복하는 일은 정신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사소한 일에도 발끈하게 되는 이상 서로 조심하는 수밖엔 없다. 누구는 전혀 조심을 하지 않고 있어서 문제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게에서 얻은 비닐 봉지를 쓰레기통 대신 사용하라 내밀었다.
『아무튼 전통적으로「일곱 해」라는 건 저주가 풀어지는 햇수이자 계약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햇수야. 성경에 나오는 안식년인 셈이지. 레위기 25장에는 6년 동안 밭을 파종하고 포도원에서 열매를 거두어도 7년째가 되면 땅을 쉬게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와. 저절로 자라난 곡식이나 포도 열매는 그대로 놔두어야 하는게 규칙이었어. 이런 이미지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기 때문에 중세 시대엔 마녀가 마법을 걸어 사람을 돼지로 만들어도 7년째가 되면 사람으로 돌아온다고 믿었어.』 『와우! 돼지를 잡아 푸짐한 저녁 반찬으로 먹기 전에 7년은 꼭 기다려야겠군. 혹시라도 그게 돼지가 아니라 몹쓸 저주에 걸린 사람이라면 곤란하잖아.』 정 그렇게 걱정이 되면 아예 돼지 고기를 먹지 마 - 라고 샘이 빈정거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가였던 솔론의 말에 따르면 일곱 살은 최초의 인생 전환기야. 그는 사람의 생애를 7×10 으로 봤거든. 솔론이 생각한 사람의 적정 수명은 70세 - 그 첫 번째 과도기인 일곱 살이 되면 젖니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오게 되지. 이때부터 인간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되니까 어른으로서 노동 일에 가세해야 한다고 보았어. 풀을 베고, 밭일을 돕고, 우유를 짜고, 가축에게 먹이를 주고, 물을 길어오고, 세탁을 하는 등의 일들을 해내야 했지.』 『와우! 감옥에서 30년 썩겠다. 그래선 어린애 학대잖아.』 『꼭 그런 것도 아니야, 딘. 옛날 사람들은 아동기를 사춘기, 청년기, 성인과 구분되는 삶의 한 단계라는 걸 생각하질 않았어. 심지어 7살 미만의 아이는 영혼이 없는 동물과 마찬가지라고 여기기도 했으니까. 천 년 전에는 일 하러 밖에 나가기 위해 엄마가 아기를 바구니에 넣어 벽에 하루종일 걸어두기도 했어. 현대인과는 아무래도 감각이 틀리니까 얼굴이 샛노랗게 된 아이들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지.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걸 금지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한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 뭐래도 사실상 별종이었던 셈이야.』 『거 되게 무섭구먼! 하지만 살짝 이해가 가는 것도 사실이야. 난 네가 일곱 살이었을 적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거든. 앉으라면 서고, 서라고 하면 앉고... 할 수만 있다면 네가 나에게 가까이 오는 걸 금지하고 싶었어.』
샘의 표정이 극단적으로 변했다. 『딘. 거기서 왜 이야기가 그리로 가는 거야?』 『원한이 깊어서 그런다, 아가. 모처럼 새로 세탁해서 갈아입은 셔츠가 동생의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선 학교에서 놀림거리가 될 수밖에 없잖겠냐. 진짜지 넌 구제불능의 울보였어. 그리고 악당이었고. 내 첫 번째 여자 친구였던 에밀리에게 냄새 고약한 썩은 우유를 끼얹고 지랄했던 걸 떠올리면 아직도 손에서 땀이 나.』 『거짓말! 내가 아무렴 썩은 우유를 여자에게 던졌을까! 그런 기억은 없어. 그리고 형이 첫 번째로 키스한 여자 친구의 이름은 에밀리가 아니라 엘리슨이었다고.』 『뭐야. 무슨 머리통이 그래. 그놈의 잘난 대갈통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기억하는 거냐? 아빠랑 내가 에밀리인지 엘리슨인지 뭔지 하는 여자애 엄마에게 손바닥이 닳도록 빌며 용서를 구했다는 건 생각 안 나? 진짜지 그놈의 암모니아 냄새 풀풀 나는 우유는 지독했다고. 거기다 넌 에밀리인지 엘리슨인지 하는 아이에게 똥 냄새 난다고 욕설을 퍼부어서 그 가엾은 아이가 일주일동안 아예 학교를 못 나오게 만들었어. 덧붙여 나 역시 네놈 엉덩이 껍질을 벗겨서 일주일동안 걷지도 못 하게 만들어 주었고. 젠장,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도대체 답지않게 왜 그런 나쁜 짓을 한 거니? 새미.』 『모, 몰라. 기억에 없어...』 『흐응, 어련하실까. 스탠포드 대학에서 너에게 장학금을 준 건 순전히 실수야.』 『어, 어린애였잖아! 제대로 된 판단력을 기대하면 곤란하다고!』 『그려. 그러니까 살짝 이해한다는 거야. 일곱 살 미만의 아이는 영혼이 없는 동물과 마찬가지...』 거기까지 말한 딘은 이마를 주먹으로 치며 입을 다물었다.
『아이고, 이런. 바로 그건가.』 애완동물, 그리고 일곱 살 미만의 아동의 공통점은? 연약한 자아. 의심되는 영혼의 부재. 『빌어먹을!』
일의 돌아가는 가닥을 대략으로 잡은 딘은 상체를 앞으로 바짝 내밀어 눈앞의 2층집을 응시했다. 밤 9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남편은 귀가를 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마 무지하게 바쁜 날인가 보다. 그렇다면 재니스는 혼자 거실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아니다. 재니스는 TV더러 바보 상자라 그랬다. 텔레비전이 있어도 순전히 장식품이다. 그럼 다시 정정한다. 스탠드 조명 아래로 석간 신문을 펼쳐놓고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뉴스에 코웃음을 치고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진정한 여자는 남자들 틈새에서 바지를 입고 애쓸 것이 아니라 눈화장을 완벽하게 한 채 진공 청소기를 말끔하게 돌려야 한다, 이러면서... 『지금은 1950년대가 아니야, 딘. 진공 청소기 돌리면서 마스카라를 왜 발라.』 딘은 동생을 무섭게 쏘아보며 버럭 화를 냈다. 『거, 무지하게 꼬투리 잡고 있다! 그런 거 말고 보다 건설적인 주장을 하면 안 되겠니. 예를 들자면 현관을 깨부수려면 망치보단 도끼가 더 효율적이라던가... 응?』
샘은 심하게 짜증을 내는 형을 근심에 젖어 쳐다보았다. 갑자기 허겁지겁 차에서 내리더니 설명도 없이 트렁크를 열고 중장비처럼 생긴 각종 무기류를 챙기고 있음이다. 혹시라도 남들이 볼까 무서웠다. 목소리를 바짝 낮춘 그는 딘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형! 도끼는 왜 들고 그래. 제 자리에 내려놔. 응? 아직 저 사람들은 깨어 있을 거야. 아무리 못 해도 자정까진 기다려야 할 걸. 초기 청도교 이주민 흉내를 내는 사람이라 해도 9시부터 잠자리에 들지는 않아. 제발, 형! 이러다간 경찰이 체포하러 들 거야!』 『물론 그러시겠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당장 구해내야 할 어린애가 저 안에 있단 말이다!』 그렇게 외친 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동생에게 산탄총을 던졌다.
Posted by 미야
2007/05/06 15:43
2007/05/0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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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ice님의 팬픽을 읽고 덩달아 슝슝... 급조한 탓에 제목도 없고 엉망입니다. ※
아무래도 사람인데 시선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 동네 도서관을 찾은 새내기 대학생 리처드는《G-008》번 서가 앞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멈칫거렸다. 예쁘장한 얼굴에 포동포동한 뺨, 화사한 금발, 콱 깨물어주고 싶은 고사리 손... 더하기 더러운 콧물, 플러스 왕방울 눈물. 엄마 치마 폭에 싸여《마이크와 붕붕 꼬마 자동차》동화책을 읽으면 딱일 법한 코흘리개 꼬맹이가 새카맣게 변한 더러운 주먹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홀로 짊어진 꼬마 예수는 훌쩍훌쩍 숨을 삼켜가며 무지 서럽게 울고 있는 중이었다. 분주한 쇼핑 센터도 아닌데 어린애가 보호자를 잃어버렸다? 그런 멍청한 일이.
대출을 하고자 옆구리에 꿰고 있던《19세기 서양 미술사》책을 잠시 내려놓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슬픔에 잠긴 아이와 얌전히 눈을 맞췄다. 『곤란에 처한 모양이구나. 무슨 일이지? 꼬맹아.』 『나는 꼬맹이가 아니예요.』 당돌하다. 게다가 아이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모르는 사람이 사탕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 - 아이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음에 리처드는 한층 더 깊은 수수께끼를 느꼈다. 이런 아이들은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리처드는 선의로 손을 내밀어도 주의 깊은 이 아이가 자신의 팔을 결코 잡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건 나름대로 대단히 섭섭한 일이었지만, 아동 성추행범이 우굴거리는 오늘날의 미국을 생각한다면 올바른 선택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네 이름은 뭐지?』 『샘.』 『좋아, 샘.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건 알고 있지?』 『네.』 『그런데 넌 책을 읽으러 온 것처럼은 안 보이는구나. 왜 여기서 혼자 훌쩍거리고 있는 거지?』 순간 아이가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구 맙소사, 리처드는 재빨리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으앙~!』 아니나 다를까, 참았던 울음보가 터졌다.
샘은 결코 크지 않은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가며 흐느꼈다. 『형을 잃어버렸어요. 우, 우리 형은 말예요. 수퍼맨이예요. 뭐든지 잘 하구요. 진짜, 진짜, 멋진 형이예요. 그, 그런데 없어졌어요!』 그렇군. 리처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형과 같이 도서관에 놀러왔는데 화장실에 간다거나 해서 서로 길이 엇갈린 모양이다. 그래서 놀랐고, 당황했고, 어쩔 줄 몰라 울음이 터진 것이리라.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리처드는 환히 웃기부터 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책을 정리 중인 할아버지 사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랬구나. 형이 없어졌구나. 잘 알았다. 그러니 울지 말고 내 얘기를 잘 들어보렴. 그렇다면 저기 있는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어떻겠니. 네가 부탁을 하면 기꺼이 같이 형을 찾아주겠다고 할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이 도서관 대장이란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훤히 꿰고 있지. 그러니까 아마 네 형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자, 어떻게 생각하니?』 나름대로 멋진 제안이었다. 25년 경력의 유능한 사서이자 지역 도서관 자원 봉사자인 노먼 영감님은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억력 하나는 젊은이 못지않게 짱짱하다. 영감님이라면 이 꼬맹이와 동행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재빨리 기억해내곤「파란 셔츠에 뉴욕 양키즈 모자 쓴 인간, 빨리 와서 잃어버린 애새끼 데려가!」라며 방송 마이크에 대고 마구 호통을 칠 것이다. 그리고 놀란 아버지가 헐레벌레 달려오면 엉덩이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리라. 잡지의 책갈피를 일부러 찢은 상식 이하의 여고생을 상대로「터미네이터 - 심판의 날」영화를 찍은 분이다. 노먼 영감님은 믿을 수 있었다. 『어떠냐, 샘. 나랑 같이 저분에게 가서 도와달라고 그럴까?』
리처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참 떨어져 공상과학 소설을 읽던 한 소년이 읽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끔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그래, 내가 없어졌구나, 새미. 나도 미처 몰랐던 걸 가르쳐주어 대단히 고맙다! 흥!』 머리를 짧게 다듬은 소년은 눈물 투성이의 꼬마를 무섭게 쏘아본 뒤, 볼멘 표정으로《불타올라라, 불타올라라, 미래 영웅 마틴!》책을 머리 꼭대기까지 들어 올렸다.
얼랍쇼. 이건 또 무슨 전개란 말입니까. 설마, 이 꼬맹이의... 형? 그러고보니 둘 다 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같은 분위기에 비슷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요모조모 뜯어보지 않아도 한 핏줄이다.
확인을 위해 여전히 울고 있는 꼬맹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 동생이니?』 『yea.』 『하지만 이 녀석은 형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그래요? 흐음... 그럼 없어졌나 보죠.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동생이 없어졌거든요. 내 동생은 말예요, 어른 말을 잘 듣고, 얌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고, 씩씩하고, 영리한 녀석이예요. 그런데 갑자기 투명 인간이 되서 없어졌어요.』 심드렁하게 그렇게 말한 소년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읽던 책의 낱장을 넘겼다. 『그러니까 피장파장인 거죠.』
그 말에 징징 울던 샘이 발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없어지지 않았어! 딘!』 『그러냐.』 『투명 인간도 되지 않았어!』 『그래. 내 눈에도 잘 보이니 투명 인간은 되지 않았구나, 새미 보이. 하지만 대신 나쁜 말썽쟁이가 되었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난 나쁘지 않아!』 『도서관에선 조용히 책만 읽는 거야, 이 바보야. 너처럼 소리를 지르는 건 나쁜 얘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러니까 넌 나쁜 아이이고, 말썽쟁이인 거야.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덧붙여 머리 나쁜 바보도 되는 것이고. 어디 보자. 그러니까 말썽쟁이에, 바보에, 훌쩍거리는 계집애까지 되겠군.』 『우욱!』 『내 말이 틀려?』 『틀려!』 『좋아, 동생아. 기회를 주지. 지금부터 숫자를 1부터 10까지 셀테니 나에게 뭐가 틀렸는지를 설명해봐. 하나, 둘, 셋...』 『딘은 바보!』 『그걸 설명이라고 하고 앉았냐. 지나가는 새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땅바닥에 떨어지겠다.』
말다툼이 한창인 형제들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 사실은 어린애들이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말다툼을 하는게 너무나 재밌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다. 애들 싸움은 코미디 시트콤이다. 리처드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하고는 정의로운 심판관 내지는 관중이 되어 한 발 뒤로 뺐다. 사태가 훨씬 악화되면 그때 가서 끼어들어도 큰 무리는 없을 터, 지금은 두 아이들이 왜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 족하다. 하여 어디 계속 해보라는 시늉을 하며 팔짱을 꼈다. 뭐가 문제지? 너희 둘.
『샘, 네가 링컨 대통령이라고 해도 내가 학교에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어. 싫든 좋든 나이가 들면 학교에서 공부라는 걸 해야만 해. 너랑 하루종일 놀아주지 못 해서 나 또한 유감이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게 규칙이야.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 나나 아빠나 곤란하기만 할 뿐이야. 넌 네가 규칙을 무시해서 아빠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만 해.』 『알게 뭐야! 그런 규칙은 난 몰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형이 나랑 같이 있어줬음 좋겠어. 학교에 가지 말아. 아님 나도 딘과 같이 학교에 갈래!』 『나이가 좀 더 들면 싫다고 해도 억지로 끌려가게 되어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냐! 나도 학교에 갈 수 있어! 나이 들었어!』 『충분하진 않아. 엊그제 밤에도 천둥 친다면서 내 침대로 몰래 기어들어 왔잖아. 넌 아기야.』 『아기가 아니야! 이젠 혼자서 머리도 감을 수 있어! 아빠가 이제 우리 막내가 다 컸구나,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난 글자도 읽을 줄 알고, 산수도 할 줄 알아. 난 아기가 아니야.』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백 더하기 다섯이 몇이지?』 『우욱!』 『그래. 거기서 죽도록 손가락이랑 발가락을 헤아려라. 그런다고 답이 나오겠냐. 한심해서...』
조금 차갑다 싶게 쏘아붙인 소년은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읽던 책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미래 영웅인 마틴이 충견 스파르탄과 같이 어두컴컴한 지하도로 내려가는 장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악당들이 지하철 역에 폭탄을 설치했다. 마틴이 나서 멀잖아 발생할 끔찍한 참사를 막아야 했다. 한참 흥미진진한 부분이다. 어려서 그 책을 읽어봤던 리처드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소년은 줄거리에 푹 빠져 동생을 무시했다.
그것이 대단히 분했던 것 같다. 어린애의 목소리가 곱절로 날카로워졌다. 『딘은 우리 형이 아니야! 우리 형은 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다 들어줘! 학교 같은 곳에 가지 말고 나랑 놀라달라고 하면 놀아줄 거라고! 딘은 내 형이 아니야! 아니야!』 지지 않고 소년이 고함을 쳤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네 형이 아니야. 그리고 덧붙이자면 너도 내 동생이 아니야.』
꼬맹이는 펄쩍 뛰었다. 듣고 있던 리처드도 약간 놀랐다. 『뭐?』 『정확하게는 내 동생이 아니게 될 거야. 왜냐하면 저번 겨울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답장을 받았거든. 마음에 들지 않는 남동생은 북극으로 데려가고 대신 귀여운 여동생을 주마 약속받았어. 난 좋아서 고맙다고 인사했고, 산타클로스는 내가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잘 들어둬. 나의 새 여동생 이름은 샌디가 될 거야.』
그것은 잔인하다 싶은 거짓말이었다. 리처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줄 필요성을 느꼈다. 샘의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놀란 까닭도 있지만 공포감이 더욱 큰 원인이었다. 꼬마는 북극으로 끌려갈 수 없다며 얼른 자리에 납짝 주저앉았다. 안색도 새파랬다.
『저, 전화 했어?』 묻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응.』 『나, 나쁜 놈!』 『잘 가, 샘. 북극에서 새 친구를 많이 사귀기 바라. 펭귄이랑 북극곰을 자주 볼 수 있을 거야.』 『우, 우욱! 우욱...!』 『왜 울어? 넌 펭귄 좋아하잖아.』 『응...』 『북극곰도 좋아하잖아.』 『좋아해...』 『그런데 왜 울어?』 『그치만... 딘이 더 좋아. 펭귄보다, 북극곰보다 훨씬, 훨씬, 좋아...!!』 『어랍쇼? 나는 네 형이 아닌데?』 『아냐! 우리 형이야!』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른 꼬마는 한걸음에 달려가 형을 붙잡았다. 뺨을 비비고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누가 뭐래도 나는 초강력 접착제다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다시 전화해. 응? 전화 다시 해! 전화할 거지! 그렇지!』 『흐응. 네가 고집을 안 부린다면 생각해보지. 어떠냐, 샘. 형이 학교에 가도 안 울거냐?』 『우!』 『안 운다고 약속할 거야?』 못 이기고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울게.』 『오케이. 그럼 당장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여동생 샌디는 필요 없다고 해야겠다. 그건 그렇고... 으이그! 누구 동생 얼굴이 이렇게 더러운 거야. 화장실 가자, 화장실!』 능숙한 태도로 소년이 동생의 손을 잡았다.
『대출 기간은 일주일이다, 리처드.』 『예.』 『공부는 잘 되고 있니?』 『힘들어 죽겠어요.』 『젊은 놈이 늙은이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노먼 영감님이 카드에 도장을 찍는 동안 반대편 유리창 밖으로 아는 얼굴 둘이 지나갔다. 고개를 길게 빼고 보니 예의 아이들이었다. 언제는 산타클로스에게 공짜로 줘버린다더니. 꼭 붙들고 있는 모양이 누군가 동생을 달라고 하면 이빨로 물어뜯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저번에 빌려간 책은 반납을 아직 안 했구나.』 『앗차!』 『잘 되었다. 애들이 볼 새 책을 사게 연체료 두둑히 내놔. 특별히 과태료 10배로 해주마.』 『으악! 그런게 어딨어요!』 『그럼 주말에 여기서 서가 정리를 할텨?』
너무 울어대서 졸린 모양이었다. 꼬맹이가 두꺼워진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하품을 했다. 소년이 그런 동생을 등에 엎었다.
『낙찰~ 잘 되었다. 요즘 내가 허리가 영 신통치 않아서...』 『할아버짓!』 『딱 5시간만 봉사 혀. 그럼 합의 본 거다?』 당황하여 머리를 긁는 짧은 사이에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 딱 3시간만...』 거기까지 약속했음에도 리처드는 지갑을 열고 있었다.
《불타올라라, 불타올라라, 미래 영웅 마틴!》시리즈의 2권은 배경이 달 기지다. 정말 흥미롭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릴이 있다. 아쉽게도 이곳 도서관엔 들어와 있지 않다. 뭐, 당장 점심 먹을 돈이 궁진해도 애들 동화책 한 권 정도야... 어깨를 으쓱이며 리처드는 도서 기증 프로그램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 이름을 적어 올렸다. 그리고 종이 여백으로《딘과 울보 꼬마, 그리고 북극에서 계속 살게 된 불쌍한 샌디를 위해》라고 가볍게 웃으며 메모했다.
Posted by 미야
2007/05/04 22:52
2007/05/0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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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로자의 날이라는 건 좋군요. 랄라라라~ 러브리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기분이 대단히 언짢은 것이 분명한 가죽 재킷의 청년이「캐빈 쉐퍼드 씨?」라고 이름을 묻는 것과 동시에 경찰 신분증을 덥썩 내밀었다. 서류뭉치를 품에 안고 거래처를 향해 걷던 캐빈은「지난 주에 발급받은 신호위반 범칙금을 여지껏 납부를 안 했던가?」생각하며 걱정스런 표정부터 지었다. 동시에 그놈의 범칙금 때문에 일부러 사복 경찰이 직접 얼굴을 들이밀었다는 점에 저항감을 느꼈다. 미친 공무원 새끼. 전화부터 하면 어디가 덧 나냐. 나는 대단히 바쁜 사람이란 말이다. 그래도 선량한 시민인 캐빈 쉐퍼드는 공권력에 기꺼이 협조하며「무슨 일로 절 찾으시는 건가요, 보이든 형사님」이라고 공손히 되물었다. 평소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버릇 탓에 업체와의 미팅 시간까지는 아직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고, 그까짓 망할 범칙금따윈 당장 처리할 의사가 있었다. 째깍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오는 가운데 시계를 쳐다봤다. 자진 납부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설교를 들어야 한다면 대략 2분이면 충분할게다. 저 사내의 성격이「단칼」이 아니라면 최장 5분...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 미팅엔 늦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급해도 다음부터 내가 과속 비슷한 걸 하나 봐라. 일주일 전에도 같은 맹세를 했다는 건 까마득히 잊어먹고 가슴을 쳤다.
순간 로버트 보이든 형사가 떫은 감을 통째로 씹은 표정을 했다. 와이프가 그를 향해「사탄」운운한 것이 가장 큰 원흉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는 캐빈은 바쁘다는 투로 시계를 내려다보던 동작이 그의 심기를 상하게 만들었는가 보다 추측을 해볼 뿐이었다. 실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예의바르지 않게 굴었다. 그래서 캐빈은 서둘러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잠시나마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를 못 듣는 척했다. 그걸 신호로 남자가 수첩을 꺼내들고 안에 적은 메모를 주욱 흝어내렸다.
『음, 그러니까... 선생이 세를 놓은 집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건 알고 계시죠?』 『무슨 문제요. 뿌리가 썩은 나무가 지붕을 덮친 것 말씀입니까? 그게 큰 일이었다는 건 압니다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된 것 아닌가요.』 『지붕 얘기가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처럼 젊은 형사 나으리의 질문은 과속딱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2분 안에 과연 모든 대화가 마무리될 수 있을까? 근심하며 이마를 접었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부득이하게...」라는 식의 대화를 꺼내는 일 없으면 좋으련만. 불현듯 갑자기 궁금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걸까. 망가진 집의 수리는 얼마 전에 끝마쳤다. 업자와의 트러블은 없었다. 물론 견적서와 틀리게 나온 가격을 놓고 실랑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거야 엄마가 나이 어린 딸을 향해「그놈의 흉측한 빨간 셔츠는 그만 입거라!」라고 호통치는 것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마지막엔 분명히 신사답게 악수도 나눴다. 캐빈은 차분히 손가락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아내와 같이 집을 둘러보던 기억을 되살렸다. 하수관에서 오물이 누출되는 기미도 없었고, 지반이 내려앉거나 하지도 않았고, 흰개미가 벽장 선반을 맛있게 먹어치운 것도 아니고... 고개를 흔들었다. 까놓고 말해 부부 공동명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집세 이외엔 별 관심이 없던 터였다. 이어진 질문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그의 상상력 수준이 어떠하다는 걸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저어, 못된 애들이 장난이랍시고 담벼락에 페인트로 낙서라도 해놓은 건가요. 아니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부수었다던가...』 『그보다 훨씬 더 고약한 건데요, 쉐퍼드 씨. 거실 일부가 멋지게 주저 앉았어요.』 『어이쿠!』 부릅뜬 눈과 벌어진 입,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보아 정말로 놀란 눈치다. 주먹으로 배를 한 방 맞았다는 투다. 손에 힘이 풀려 서류뭉치가 아래로 굴러떨어지려 했다. 보이든 형사가 그것을 지적했고, 간발의 차이로 미끌어지던 물건을 도로 끌어당겼다. 이것이 연기라면 그는 당장 브로드웨이 무대로 진출이 가능한 대단한 실력자다.
형사가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렸다. 『어라. 여지껏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바로 어제 일인데요.』 『그런가요. 그러고보니 뭔가 전화가 온 것은 같았는데... 하지만 집사람은 제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출근하면서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한게 전부입니다.』 헤에, 이상하다. 뭔가 핀트가 잘 맞지 않았다. 아내가 말을 안 해서 전혀 몰랐다고? 보이든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계속 해보라는 투로 두 팔을 벌렸다. 캐빈은 다시 몸을 가누고, 침을 꼴깍 삼킨 뒤에 다시 말했다. 『부동산 쪽의 재정 관리는 아내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어요. 심지어 찰스턴로 23번지에 있는 2층집의 소유자는 제가 아니라 재니스입니다. 그런데 진짭니까, 형사님. 거실이 폭싹 내려 앉았다고요?』 『음? 소유자가... 아내라고요.』 형사는 쥐고 있던 수첩을 반으로 접어 품속에 도로 집어 넣었다. 『예. 집사람이 어려서 태어나 자란 집입니다. 외동딸이었던 재니스가 장인 어른으로부터 집을 물려받았지만 저와 결혼하고 나서도 그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망가진 집에 대해 근심하며 질문했다. 『그런데 거기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거실이 무너졌다니, 말로만 들어선 엄청 심각한 것 같은데... 요즘 진짜 왜 이러냐. 가스 폭발이라도 있었나요?』 가스 폭발은 무슨. 잔뜩 화가 나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자 섬세하게 생긴 얼굴이 열 살은 더 어리게 보였다. 『제가 거기서 발을 쿵쿵 굴렀어요. 그랬더니 푹 꺼집디다.』 『예?』 『왜 놀라슈. 당연히 농담인데.』
사내는 시치미를 뚝 잡아떼곤「부근으로 수상한 사람이 어슬렁거린 일은 없었느냐, 손해 보험에는 가입이 되어 있느냐, 임대료 같은 것으로 언성을 높이고 싸운 사람이 있느냐」며 경찰이 해봄직한 형식적인 질문을 몇 개 던졌다. 캐빈은 기억나는 것 전부를 성실하게 대답을 해주면서「얼마 전에 자동차를 후진하면서 접촉 사고를 냈어요. 음... 혹시 그 사람이 제게 원한을 가지고 해코지를 하는 걸까요?」라며 걱정했다. 『사고라고요. 그때 많이 다투셨나요, 쉐퍼드 씨. 아님 사람이 크게 다쳤다거나...』 『미등만 깨졌는데요.』 지랄염병하고 있네. 미등 갖고 살인 나디. 겉으로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젊은 법집행관의 표정은 걸작이었다. 『쯧쯧. 그럼 기껏해봐야 삿대질만 했겠네요. 그 정도론 원한을 가질 리가 없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마지막으로 캐빈은 또다시 비용을 들여 집을 수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넌더리를 내며「이참에 용한 무당을 불러 액땜이라도 해야겠어요」라고 불평했다.
늦은 점심 식사를 거의 끝마칠 즈음에야 딘이 건들건들 팔을 흔들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브로콜리가 몇 개 남은 더러운 접시를 옆으로 치운 샘은 따뜻한 동료애 - 내지는 가족애를 느끼며 환영의 의미로 함박 미소를 지었다. 『기다렸어. 어서와, 딘.』 그래봤자 답으로 돌아오는 웃음은 없었다. 그의 형은 배고파 죽겠다는 얼굴로 쓰러지듯 해서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동시에 달각 스위치가 켜지면서 대략 18년 전에 녹음된 소리가 육만하고 삼천 일흔 다섯 번째로 재생되었다. 『야채는 왜 남겨, 이놈아.』 그가 웃어주지 않은 까닭이 아마도 야채 때문이었나 보다. 동생이 남긴 브로콜리를 손가락으로 집어올려 싹싹 해치우면서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야단을 쳤다. 『음식을 가리고 먹으면 키가 안 큰다고 그랬잖아.』 눈앞이 아찔해지는 내용이었다. 샘은 신음했다. 『딘. 여기서 키가 더 크면 똑바로 허리를 펴고 출입구를 지날 수 없게 되어버려.』 『그래서 일부러 남겼다고? 변명은 집어치워. 다음부턴 남기지 말고 전부 먹도록 해. 대답은?』 『.......... 응.』 다섯 살짜리 어린애 취급에 발끈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아예 걸리버 여행기를 쓰지 그러냐」라는 이죽거림은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죽도록 배고파 하는 딘과 그깟 브로콜리를 두고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신 샘은 친절하게 메뉴판을 건내주며 자신이 먹은「스페샬 런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양도 푸짐하고 맛도 괜찮다. 가격도 적당했다. 『여기요?』 딘의 표정에서 긍정을 읽은 샘은 얼른 손을 들어 형을 위해 음식을 주문했다.
날아가는 동작으로 받아쓰기를 마친 웨이츄리스가 주방쪽으로 사라지기가 무섭게 샘은 손깍지를 끼고 딘과 눈을 맞췄다. 그게 꼭 강아지가 간식을 달라고 졸라대는 것 같아 딘은 가볍게 실소했다. 『어때. 뭐 건진 건 있어?』 딘은 기꺼이 자신이 알아낸 것 전부를 동생에게 알려줬다. 『캐빈이 아니었어. 그는 그 집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더라. 차를 거칠게 몰고 다니는 나쁜 버릇만 빼면 너와 비슷한 수준의 바른 생활 사나이더구나. 털면 약간의 먼지는 나오겠지. 그치만 피 묻은 칼이라던가, 권총이라던가 하는 건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야. 거실 바닥이 꺼져 숨겨둔 진실이 드러났다는 내 말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니까. 꼭 자동차 전조등 불빛을 정면으로 받은 멍청한 사슴 같더군.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 꼼짝도 않고 1분간 내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더라. 난 그가 일순간이나마 그가 영어를 못 하는 거라 믿을 뻔했어. 그래서 말했지. 실례합니다. 당신, 영어 할 줄 아세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킬킬 소리내어 웃다말고 샘이 고개를 끄덕였다. 『쉐퍼드 부부의 공동 소유도 아니었어. 주인은 재니스였어. 그렇지?』 『그래.』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재니스가 일곱 살이 되었을 적에 가족 전부가 이사를 나왔어. 재니스 쉐퍼드의 처녀적 성은 애링턴이고 그들이 거기서 나온 건 1976년이야.』 『흐응, 어디서 많이 듣던 거잖아. 일곱 살... 그게 자꾸 맘에 걸리네.』 목이 말랐는지 딘이 물을 마셨다. 일부러 따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샘도 덩달아 갈증을 느끼고 목을 축였다.
『애링턴 부부는 어땠어? 샘.』 컵을 나란히 내려놓고 샘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말이지... 잘 모르겠어. 짐 애링턴은 61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어. 아내인 로지 애링턴은 그보다 두 해 전에 암으로 죽었고.』 『그건 너무 평범하잖아.』 『미안해. 평범한 죽음이라.』 『이상한 놈. 그걸 왜 네가 사과하니. 어쨌든 좋아. 그럼 애링턴 부부가 1976년 이후부터 살지 않았으면서 그 집을 팔지 않은 까닭이 뭔지는 알아냈어?』 『짐 애링턴은 눈에 띄는 갑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재산가였어. 특별히 무슨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투자라고 생각하고 팔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야. 주식, 채권, 양도성 예금증서, 골프 클럽 회원권... 거기에 문제의 주택도 끼어 있었던 거지.』
팔을 번쩍 들었다. 이어지는 건 자신의 능력 부족을 한탄하는 기다란 탄식이다. 『욕해도 좋아, 딘. 완전히 막혔어.』 『뭐야, 결국은 이거다 싶은 건 전혀 없었다는 거냐?』 『하늘에서 계시라도 내려왔음 좋겠다니까. 오전까지 내가 조사한 건 모조리 허탕이었어. 아, 나왔다. 식사는 이쪽이예요. 고마워요, 아가씨.』 맛있어 뵈는 프라이드 치킨을 딘 앞으로 밀어주면서 샘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재니스에게 다른 형제는 없었나 알아봤는데 그것도 꽝. 애링턴 부부가 주술이나 마법에 심취했다는 증거도 없어. 짐 애링턴은 무신론자였고, 로지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 많은 봉사활동을 했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봐선 햇빛 하나 안 들어오는 지하실에 아이 방을 만들 괴짜는 아니야.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엔 아무래도 단서가 많이 부족해.』
접시로 눈을 내리깔고 미친 듯이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음식을 탐하던 딘이 흘끔 고개를 들었다. 『바비 아저씨께 조언은 구했고?』 『악마로부터 보호의 의미를 담은 문장이라는 건 아저씨도 동의했어, 딘.』 『그러니까 뭐시냐... 보호만?』 『부탁이니 먹는 도중에 포크를 들고 사람을 가리키지 말아줘.』 동생의 간절한 소원을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감자를 찍어 입안으로 넣으면서 딘은 도로 먹는 일에 열중했다. 버터를 바른 롤빵도 맛있다. 콩 볶은 요리도 먹을 만하다. 파슬리는 별로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에 넣었다. 시장이 반찬이었는데다, 원래 그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다응 의미응 업데?』 『입에 음식을 가득 넣고 말하는 건 실례야.』 『아우튼!』 『바비 아저씨는 이게 회색 마법의 한 종류래.』 『우?』 『자신이나 타인에게 육체적 혹은 비육체적인 도움을 줄 목적으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마법으로 오늘날 서양과학이 이해 못 하는 수단을 사용하여 의지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예술이며 과학이다 - 책에 나온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래.』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긍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단, 바비 아저씨가 이 말을 덧붙였어.「안이냐 밖이냐의 차이가 여기선 매우 중요하다」라고.』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샘.』 『권투 글러브는 권투 선수의 손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야. 그렇지? 동시에 상대방 선수를 때리기 위한 도구가 되는 거야. 아저씨가 말한 안과 밖의 차이라는 거, 이제 이해가 가?』 거기까지 말한 샘은 너무 빨리 음식을 삼켜 호흡곤란까지 일으키게 된 딘에게 서둘러 물컵을 내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5/01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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