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원작 설정에서 한 100만광년쯤 멀어졌습니다.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메텔과 기념 사진 찰칵. ※
프로 도박꾼이 스페이드 에이를 찾는답시고 돋보기를 들고 한참을 쳐다봐도 속내를 제대로 감출 줄 아는 딘이다. 그가 포커판에서 잔뼈 굵은 꾼들을 상대로 판돈을 거머쥐는 건 다 까닭이 있다. 배회하는 유령마저 가뿐하게 속여넘길 줄 아는 능청스러움은 지금도 제 기능을 다하는 중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색색으로 빛나는 요란한 경고등에도 불구하고 태평스런 어조로 눈 하나 꿈쩍 않고 반문했다. 대신 테이블 아래에선 상황이 달라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 동생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 즉시 샘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역력한 웃음을 띄고「오늘은 날씨가 참 좋죠? 하.하.하.」식의 엉뚱한 소리를 읊었다. 백설공주가 독을 바른 사과를 일곱 조각으로 잘라 상한 굴요리와 같이 해서 난쟁이들에게 권하는 식이었다. 리가 눈알을 굴려댔다. 어쨌거나 이제 바톤은 딘에게로 넘어왔다.
『헛수작 부릴 생각일랑 말고 내 눈을 똑바로 봐, 딘 윈체스터. 방금 말한 그「콜트」라는 거 말이야. 1835년에 사무엘이라는 작자가 만든 오래된 총을 말하는 거겠지? 은으로 만들어진 총알은 모두 13개. 손잡이에 펜타곤이 음각되어 있고, 기다란 총신에 브라브라 뭐라고 문자가...』 『제법 잘 아네.』 뜨거운 풀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바비큐를 굽느라 고생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짜증을 부렸다. 『빌어먹을! 농담이 아니야. 콜트가 너희들의 목적이라면 난 여기서 깨끗이 손을 떼겠어.』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은 처음이다. 그거야 내 수용 범위를 한참 넘기 때문이지! 난 그렇게 엄청난 건 감당할 수 없어. 맨주먹으로 뱀파이어 임금님과 맞장을 뜨는게 차라리 낫겠다. 맙소사, 이걸 봐. 너희들 때문에 소름이 돋았잖아!』
일단은 그녀더러 진정하라 다그쳐야 했다. 보통의 인간은 소름이 돋았다고 하면서 팔뚝을 내미는 법인데 저놈의 여자는 블라우스 자락을 좌우로 벌려 자기 가슴을 드러냈다. 덕분에 식당 안의 남자들 눈이 죄다 앞으로 돌출되어 나왔다.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고 하면서 입이 아니라 엉뚱한 어깨에다 들이붓기도 했다. 쓰고 있던 안경을 밀어올리고 핸드폰에 내장된 카메라를 이때다 터뜨리는 작자도 있었다. 이가 갈린다. 뜬금 없는 플래쉬가 성가시기도 하거니와 딘은 도대체 이 상식 밖의 여편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울러 어딘가로 굴러가버린 자신의 이성을 찾아 식당 바닥을 열심히 더듬거리고 있는 다수의 손님들 또한 충분히 골칫덩이였다.「마이클」이라는 이름이 적혀진 조각 하나를 주워 원래 주인을 향해 재빨리 던져주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언니는 스트립 쇼가 취미야? 보는 우리가 부끄러워 죽겠어. 제발 가슴 좀 가렷!』 『뭐가 어때서 그래. 여자 가슴 처음 봐? 두 사람 다 R등급 시청이 가능한 나이잖아.』 『나는 몰라도 내 동생은 아직 아니야! 얜 아직 어리단 말이야. 진짜지 이대로 쫓겨나고 싶어?! 경고하는데 자꾸 이러면 우리가 먹는 밥 값의 전부를 그쪽이 부담하게 될 거야. 아무튼 우리가 콜트를 찾고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당신을 부른 건 뱀파이어 때문이지 콜트 때문이 아니라고. 댁은 그 점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 『잠깐만. 콜트로 루더를 죽였다며. 그건 다시 말해 콜트가 너희들 수중에 있다는 얘기잖아.』 『있었다 - 과거형으로 정정해야 옳아.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으앗! 설마, 그걸 뱀파이어가 낼름 집어갔다는 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아. 젠장... 하여간 설명하려면 무지 길어.』
정말로 길다. 딘은 노란 눈의 악마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그리고 딱 하나 남은 콜트의 총알을 차례차례 떠올리고는 이마를 접었다. 머릿속에서 잔뜩 녹이 쓸어버린 그네가 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의 높은 음이 싫어 그네의 움직임을 멈추고자 줄을 잡았다. 순간 무거운 문이 탕 소리를 내며 닫겼고, 한 남자가 사무적인 어조로「사망 시각은 오전 10시 41분...」이라 선언한다. 참지 못하고 샘이 아빠를 찾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여기에 동조하여 영혼을 갉아대는 쇳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꼭 쥐어오는 샘의 손이 차갑고 축축하다. 아아, 미칠 것만 같다. 머리카락을 모조리 쥐어뜯고 싶다.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을 수만 있다면.
시선을 내리깔고 커피잔을 들었다. 이런 격정,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맹세라도 해줘?』 『알았어, 딘 윈체스터. 콜트가 목적은 아니라는 거지?』 상체를 뒤로 젖혀 등받이로 몸을 기대면서 리는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믿을게.』 그녀는 이외로 쉽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보다 더 고약할 순 없겠다. 하필이면 콜트로 뱀파이어를 죽이다니.』 『어째서? 콜트는 초자연적 존재를 죽일 수 있는 궁극의 무기잖아.』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먼. 너희들, 그 무기를 만든 사무엘이란 자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지? 그러니까 그렇게 태평스런 소리를 지껄이는게야. 질문 하나 할게. 그가 만든 콜트의 총알이 하필이면 13개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어?』 당연히 그런 적 없다. 딘은 검지손가락으로 턱을 지긋이 눌렀다. 『글세. 딱히 그 문제로 고민해본 적은 없는데... 그가 평생에 걸쳐 죽이고 싶은 대상이 아마도 모두 열 셋이었나 보지. 총알 하나당 유령 한 마리. 어때?』 진지함이라는게 요~만큼도 없는 무성의한 대답에 리의 목소리가 음침해졌다. 『기가 막혀서. 너는 바보냐.』
오늘날의 호텔이나 아파트엔 13층이라는게 없다. 불길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매달 13일에는 비행기나 기차 여행의 예매가 취소되는 일이 빈번하다. 여기다 금요일이라는 특정 요소까지 겹치게 되면 직장인들은 갖은 핑계를 대고 결근을 감행한다. 덕분에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손실액만 수 십억 달러를 가볍게 상회한다. 『독일에는「13시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라는 표현이 있어. 당연히 좋지 않다는 의미야. 중국에선 음력 13번째 달을「근심의 지배자」라고 부르지. 이스가리옷의 아들 유다는 예수의 13번째 제자였어. 고대 바빌로니아 천문학에서는 13번째 궁이 까마귀 자리였는데 이는 불행의 상징이었지. 동화책에 나오는 13번째 아이의 대부는 커다란 낫을 든 죽음이고 말이야.』 이쯤해서 샘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헤브라이의 카발라에선 13을 행운의 수로 여깁니다. 아랍어에서 유일자를 의미하는 단어인「아하드」의 키 값은 13이거든요.』 아는체 하는 참견이 결코 반갑지 않은지라 리의 눈초리 쌀쌀맞았다. 『그래서 뭐. 사무엘 콜트가 유일신을 찬양하는 의미로 은총알 13개를 만들었다고?』 『아뇨. 그러니까 제 말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특정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다지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리는 여러가지 의미가 뒤섞인 긴 호흡을 내쉬었다. 『틀린 소리는 아니군. 확실히 그럴지도. 허나 이것 하나만 말해두지. 보통 불을 제압하는 건 물이지. 물을 부으면 불은 꺼지니까. 그런데 사무엘 콜트는 여차하면 맞불을 놓아 불을 끄려고 했던 사람이야. 천재였거나, 아님 이단아지. 산불을 끄려면 폭탄을 빵 터뜨리는게 최고라고 주장하는데 그게 정상이야? 그러니까 나라면 콜트에 손을 대지 않아. 주인을 닮아 상식 밖일게 뻔하니까. 그런 물건은 상자에 넣어두고 그대로 납땜해서 봉인하는게 최선이야. 어차피 뱀파이어는 목을 베면 죽게 되어 있다고. 수상쩍은 콜트로 쏴죽일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봐. 안 그래?』 그 말에 형제들은 그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안 그러냐고.』 재차 묻는 말에도 딘은 대답을 안 했다.
눈치는 멀쩡하다. 리의 눈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이런. 너희들... 쓰고 싶은 거구나. 그 콜트를.』 그들의 적이 노란 눈의 악마라는 얘기까지는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악마를 죽이려면 반드시 그 콜트가 필요하다는 걸 설명하기도 싫었다. 어차피 지금은 콜트가 문제가 아니었고, 그 점이 형제들을 침묵시켰다. 딘은 샘에게 은밀히 눈짓했고, 샘은 뭔 소리인지 잘 알았다며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공유하는 비밀에 그들의 영혼 만큼의 무게가 실렸다.
리는 한바탕 발광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이것들이 진짜...! 악을 악으로 물리친다고 해도 상관 없어? non timebo mala. 사무엘은 자신의 좌우명대로 어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어둠을 사용하기도 했지. 그치만 어둠은 누가 뭐래도 두려운 존재야. 이용한다고 생각했는데 거꾸로 이용당할 수도 있다고. 이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지만 말고 뭐라고 대답을 해! 사람이 기다리고 있잖아!』 『커피가 식어요.』 『으이그!』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거칠게 내던지는 것으로 즐거운 아침 식사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담배를 피울 시간이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신호했다. 뭐, 사람에겐 각자의 사정이라는게 있는 것이고... 오른손 손가락에 담배 한 가치를 끼우면서 그녀는 쓰게 웃었다. 참견할 일도 아니고 참견해서도 안 된다. 타인의 인생에 뭣 모르고 깊게 관여했다가 커다란 댓가를 치룬게 엇그제다. 그 상처가 너무나 지독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들이 콜트를 원한다면 원하도록 내버려 두자. 뭔가를 숨기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라지. 이것은 비즈니스. 재화와 기술을 서로의 이해 관계에 따라 재배치한다. 입술 사이에 문 담배의 위치를 바꿔보았다. 뭉게구름이 되어 날아가는 허연 연무에 동생 쪽이 콜록거리고 기침을 터뜨렸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몸이 튼실하진 않은 것 같다. 두꺼워 보이는 팔뚝은 근육이 아니라 풍선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그런 동생을 흘끔 쳐다본 딘이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샘은 부랴부랴 고개를 가로저었고, 리는 그 내용이「내가 가서 담배를 꺼달라고 말해볼까?」라는 걸 알아차렸다. 알았다, 이놈들아. 그녀는 재빨리 바람을 등지고 서서 연기가 그쪽으로 가지 않도록 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거다 하고 생각해둔 건 있어?』 『특별한 건 없어. 단지...』 리는 계속해 보라는 시늉으로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근방으로 수상한 무리가 나타나진 않는지 주의깊게 살펴봐야겠지. 행방불명 되었다가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시체로 발견된 사람은 없는지도 확인하고. 그리고 루더의 가족에 대해 조사할 거야.』 『진짜로 특별한 건 없네. 꽤나 스탠다드 하잖아.』
딘은 화를 낼지 말지를 정하려는 듯 약간 뒤로 물러섰다. 『뭐야, 그 재미 없다는 식의 반응은. 우리가 어리석게 굴고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흥분할 것까진 없잖아.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어, 보이. 하지만 너무 정석대로라 의외라고나 할까. 조금은 과격하게 나올 수도 있겠거니 기대했거든. 예를 들자면 말이야, 흡혈귀 한 마리를 잡아 무섭게 고문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걸 모두 불게 만든다... 어때?』 『그거야 댁의 방식이지. 어이가 없다, 정말.』 문제는 리가 농담으로 그런 소리를 꺼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라면 정말로 뱀파이어를 생포해 거꾸로 매달아놓고 커다란 바늘로 피부를 쿡쿡 찔러대고도 남을 것이다. 그것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이다. 상상하자마자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딘은 정색하고 말했다. 『당신, 이거다 하고 결정하면 막 나가는 그런 면은 고든과 비슷하군.』 『그건 욕이야~!!』 고든을 잘 아는지 리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반박했다.
Posted by 미야
2007/06/10 23:24
2007/06/10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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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애쉬 가라사대, 퍼스트 네임, 미들 네임, 죄다 불명이고 나이 및 거주지 역시 불명. 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이 시대 최고의 뱀퍼라 했다. 누가 뭐래도 자타가 공인하는? 이쯤해서 딘은 로드 하우스로 전화를 걸어「네놈이 사람을 추천하는 기준은 실력이 아니라 젖가슴 사이즈냐!」따지고 싶어졌다. 그러나 체면상 사람을 면전에 세워두고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애써 참으며 리에게 반대편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제기랄, 이놈의 망할 여자는 옷을 입은게 아니라 입다 말았다. 그것도 허겁지겁 벗어던진 걸 다시 허겁지겁 주워 입었다. 그쪽으로는 눈치가 젬병인 샘도 단번에 알아차리고 안색이 변했다. 남자와 밤새도록 뒹굴고는 머리도 빗지 않고 그대로 뛰쳐나온 꼬락서니다. 서둘다 팬티를 뒤집어 입지는 않았을까. 그럴 가능성 많다. 브래지어는 무작정 손에 쥐고 있다가 핸드백에 꾸셔 넣었을지도. 스타킹의 스타일을 망친 얼룩의 성분이 과즙이 아닐 거라는 짐작에 그저 착잡할 따름이다. 젖꼭지가 훤히 보이는 셔츠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기를 쓰며 평정심을 가장했다. 「어쩐지 애쉬와는 죽이 착착 맞을 것 같군.」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셔츠를 새로 갈아입고 깨끗하게 면도까지 끝낸 이쪽만 바보가 된 셈이다.
『미안, 미안. 이런 모습이라. 주로 밤에 움직이는 체질이라 아침엔 영 정신을 못 차려.』 그게 꼭 체질 탓만은 아닐 터인데? 딘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곤 있지도 않은 청바지의 보푸라기를 잡아뜯었다. 일부러 대꾸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자! 그러지 말고 일단은 좀 먹자. 난 배가 고파 죽겠어. 이 가게에선 뭘 시키는게 좋아?』 샘이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에그 토스트가 맛있어요.』 『양이 적잖아.』 나름대로 신경써서 추천해준 메뉴를 일언지하로 묵살한 리는 고개를 길게 빼고 다른 사람들의 식탁을 염탐했다. 무심하게 인쇄된 메뉴판 글씨보단 아무래도 식사 중인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더 생생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법이다. 왼편으로 보이는 40대의 머리숱 적은 남자는 콘 샐러드와 구운 소시지를 주문했다. 씹는 속도가 현저히 느린 걸 봐선... 에이.『저건 맛 없겠어.』그 반대편에선 마트 계산원인 듯한 여자가 크림 스프와 버터 바른 빵을 음미 중이었다.『70점.』화장실 입구 가까이로 진공 청소기처럼 음식을 흡입하고 있는 트럭 운전사가 보였다.『완벽해. 난 저 사람과 같은 걸 먹을 거야.』날씬한 몸매와는 별도로 리에겐 식탐이 있는 듯했다. 입술 위로 맑은 군침이 - 생기가 돌았다.
『어제 저녁엔 죄송했어요, 리.』 절대로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었음에도 샘은 사과부터 했다. 아침나절부터 형으로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단단히 다짐을 받은데다 어쨌든 얼토당토한 오해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눈치가 없어서 그쪽이 헌터라곤 생각을 못 했어요.』 별 거 아니라며 리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고개 숙일 필요 없어. 오해 받게끔 분위기를 조장한 내 잘못도 없잖아 있으니까.』 분위기만 조장한게 아니라 정말로 그쪽인 거 아냐? - 입만 열지 않았을 뿐이지 그 생각을 굴뚝처럼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손톱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만지작대는 샘의 눈빛은 더할나위없이 냉랭했다. 모두가 찬양해 마지않던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는 진작에 치워졌다. 대신 진열장을 앞켠을 차지한 건 언제 녹을지 추정이 불가능한 히말라야의 만년설이었다. 혀를 델 만큼 뜨겁고 진한 커피가 서빙되어 나왔음에도 덕분에 샘의 주변 온도는 계속해서 영하권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쪽은 전갈좌?』 질문의 내용으로 보자면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딘도 마찬가지다. 기가 드세거나, 성격이 더럽거나, 남자를 깔고 앉을 것처럼 생긴 여자 -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의 마누라인 크산티페 같은 여자는 무조건《전갈좌》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선입관으로 잡지에 나온 심심풀이용 별자리 점괘보다 질이 더 나빴다. 『응? 나는 사수좌인데.』 틀림없이 맞을 줄 알았는데 왜 아니라는 거지 - 하면서 딘이 머리를 만졌다. 『그거 이상하네. 분명히 전갈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튼 흐트러진 옷무새로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여자는 질색이었다. 「한 가지 좋은 점도 있네.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형은 저 여자에겐 작업을 걸지 않겠군.」 샘의 입술 끝부분이 살짝 올라갔다. 숯덩이처럼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을 넘어갔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취미가 아닌 듯했다. 촉촉이 젖은 데니쉬롤을 큼직히 찢어 덩어리째 입에 넣으면서 리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 애쉬의 말로는 뱀파이어에게 노림을 당하고 있다고 하던데.』 아침 식사를 즐기는 일반인들에 대한 배려는 요만큼도 없는 행동이었다. 딘은 신음했다. 『여긴 식당 한 가운데야, 리. 부탁이니 다른 사람들 귀를 생각해.』 『흥! 괜한 걱정이야. 누가 우리에게 관심이나 둘 것 같어?』 『뭘 모르시는 말씀. 이미 충분히 시선을 받고 있다고. 저쪽에 앉은 트럭 운전사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당신 옷을 열 번은 넘게 벗겼다는 건 아시는감?』 『알다마다. 하지만 그가 열심히 훔쳐보는 건 내 몸뚱이지 여기는 아니니까 괜찮아.』 그러면서 리는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런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말부터 해둘게. 내가 너희들을 나흘 남짓 미행을 해봤는데 특별히 수상하다 싶은 징조는 전혀 없었거든?』 그건 윈체스터 형제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고도 남는 폭탄 발언이었다. 나흘 남짓 미행을 했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휘둥글 떠보였다. 녹색의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로 투명한 모르스 부호가 총알처럼 날아다녔다. 「맙소사, 샘. 무슨 낌새를 느꼈던 적 있어?」 「없어.」 「저쪽에서 미행을 했다잖아.」 「전혀 눈치 못 챘어.」 「이런 일이 가능하긴 한 거야?!」 헌터로서의 자존심과 긍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딘은 상처 입은 목소리로 외쳤다. 『거짓말!』 『어머? 진짜야. 수상한 거 없었대도.』 『그게 아니라 우릴 미행했다는 거 말이야. 우린 전혀 몰랐는데.』 『바보 같은 소리! 손이라도 흔들면서「지금부터 미행을 하려 합니다. 각오를 해주세요. 화장실에 가면서 방구를 뀌면 이미지가 구겨질지도 몰라요.」이랬어야 했다는 거야? 상대방 몰래 뒤를 밟는게 미행의 사전적 의미야. 알아차리게 미행하는 건 미행이 아니지.』 이런 걸 가리켜 확인 사살이라 한다. 심각한 균열이 발생한 벽돌을 향해 쇠망치를 깡깡 내리친 뒤에 사방에 널린 파편은 무시해도 그만이라며 다시 먹는 일에 열중했다. 잘게 찢은 계란에다 토마토를 얹고는 당근과 같이 하여 맛있게도 냠냠. 걸신 들렸다. 구운 감자를 절반으로 토막내곤 한 입에 꿀꺽이다. 그러고도 성이 차질 않아 다음으론 베이컨을 공략했다.
『다만 뱀파이어들은 인간과는 다른 시간적 개념 속에서 살고 있지. 녀석들 수명이 인간보다 세 배 가까이 기니까. 그런 연유로 기껏해야 사나흘 가지고「습격의 징조는 없음」이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게. 달력에 3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어서 석 달 뒤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3년 뒤에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 식의 이야기도 가능하거든. 기본적으로 뱀파이어 녀석들은 조급한 편이지만 영리한 놈들은 기다림의 미덕이 뭔지를 아주 잘 알아.』 여기까지 말한 리는 계란에다 깨 소스를 더 뿌렸다. 『어쩌면 3년이 아닐 수도 있어. 길게는 30년도 가능하지. 그들은 한 번 노린 멋익감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거든. 이건 너희들에겐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닐 거야. 현장에서 뼈가 굵은지 30년이나 흘러 은퇴를 결정하고 태평하게 낚시질이나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등뒤에서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거야.「거기 누구쇼?」하고 돌아다 보았더니 하얗게 빛나는 엄니가「바로 납니다」라고 대답하는 걸 상상할 수 있겠어?』 딘은 묵직한 한숨과 함께 튀긴 생선 조각을 접시 밖으로 치웠다. 『상상하게 하지 마. 입맛 떨어져.』
사실 어렵게 상상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그렇게 당한 사람 하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니엘 젱킨스.』 제대로 먹은 것도 없으면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샘이 그 불운한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젊은 시절엔 뱀파이어 헌터로 제법 유명했다고 들었어요. 은퇴 후엔 콜로라도 주 매닝에서 은거했고요. 하지만 평온한 노후는 아니었어요. 곰에게 맞아 죽은 것처럼 해서 자기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죠. 거기 경찰들은 미치광이 강도의 소행이라 추정했지만 범인은 여지껏 못 찾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영감님을 살해한 건 사람이 아니였으니까요. 루더라는 자가 리더로 있던 뱀파이어 무리가 바로 그를 죽인 범인이었어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어. 바보 같은 젱킨스... 늙다보니 만사가 게을러져서 냄새 지우는 일을 까맣게 잊은 거야. 일주일에 한 번 목욕하는 건 빼먹어도 괜찮지만 그건 잊어선 결코 안 되는 거였어.』 두 장째 베이컨을 포크로 찍으면서 그녀가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냄새요?』 『뱀파이어의 코는 개의 후각의 꼭 다섯 배야. 냄새로 개체를 구분하지. 거기다 한 번 맡은 냄새는 절대 잊지 않아. 그들의 능력으로는 8,800㎢ 면적을 자랑하는 광활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 딱 한 사람만 찝어 찾아낼 수도 있어. 우리처럼 GPS 기술을 빌릴 필요도 없지. 마음만 먹으면 네브라스카에서 뉴햄프셔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올 걸. 때문에 우리들 뱀파이어 헌터들은 냄새를 추적당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있어.』 『아.』 그러고보니 생각난다. 존도 비슷한 얘기를 꺼내면서 그 부분을 걱정했더랬다. 『우리 아버지는 뱀파이어가 우리들 냄새를 못 맡게 하려고 썩은 짐승의 가죽을 태웠죠.』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리의 표정이 나빠졌다. 자동차에 깔려 죽은 개라도 봤다는 식이다. 『겍! 뭘 태웠다고라? 싫다... 머리 정수리를 민둥산이로 밀어댄 18세기 승려들이나 그랬을 거다. 고리짝 시절의 속설을 믿고 스컹크 냄새를 풍겼다는 거니?』 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긴 해도 냄새가 아주 나쁘긴 했어요.』 『그리고 장담하는데 그리 썩 좋은 효과도 못 봤을 거다. 세상에, 그런 멍청한 방법이라니.』 「멍청하다」라는 표현에 샘은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은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정확히 아는 것과, 알고자 노력하는 건 아무래도 차이가 컸다. 많은 책을 읽고 정보를 구했어도 그것이 꼭 옳은 것들이었다곤 할 수 없다. 「18세기 승려들이나 쓰는 방법이었대요, 아빠.」 딘도 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뜻 보기에 그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왠지 그 시선 만큼은 굉장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샘은 하던 곁눈질을 멈추고 얼른 형의 팔꿈치를 찔러 필요하지도 않은 소금병을 집어달라고 부탁했다.
『좀 있다 내가 냄새를 감추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가르쳐줄게. 필요한 재료들이니 혼합 방법이니 하는 것이 제법 복잡하니까 필기를 해둘 노트가 필요할 거야. 식당에서 나가면서 적당한 사이즈의 수첩을 하나 사도록 해라. 그건 그렇고 너희들, 젱킨스를 죽인 뱀파이어를 추적했구나. 그와는 절친한 친구였었나 보지?』 『아뇨. 아버지의 지인이었어요.』 그 대답에 쓴웃음 비슷한 것이 리의 입가로 올라왔다. 『호오, 이거 놀랍다. 동료도, 친구도, 혈연 관계도 아닌, 그냥 아버지가 아는 사람이었는데 얽혀 들어갔다 이 말이니? 이거 의리가 보통이 아니시구먼.』 『비꼬는 건가요.』 샘이 예민하게 반응하자 리는 살짝 색을 바꿨다. 『그냥 감탄하는 거라고 하자, 샘 윈체스터. 정식 뱀파이어 헌터도 아니면서 젱킨스의 복수를 하려 했다는 건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아무튼 거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긴 나중으로 하고... 중요한 것부터 질문할게. 젱킨스를 습격한 무리의 리더가 루더라고 했지?』 『예.』 『오케이. 그의 조무래기를 몇 건드린 모양이군. 루더가 너희들을 노리고 있나.』 『아뇨. 루더는 죽었어요. 우릴 노리는 건 그의 가족이라 들었습니다.』 『흐음. 그거 대단한걸. 그럼 루더의 목은 둘 중에 누가 베었지.』 『아무도요. 아버지가 콜트로 그를 쏘았...』 『뭐얏?!』 갑자기 리의 안색이 돌변했다. 얼굴색만 바뀌었던가. 펄쩍 뛰며 테이블 앞으로 몸을 던졌다. 『지금 콜트라고 했어?!』 끓는 기름에 물이 부어졌다. 아니면 염산에 구리 조각이 떨어졌다. 반응이 지나치게 격렬했다. 자글자글 소리를 내는 리의 눈빛 앞에서 샘은 어쩐지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무심코 털어놓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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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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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어려선 동생을 끌고 축구를 해보는게 소원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아버지 존은 짓궂게 질문했다. 「어떠냐, 딘. 우리 새미가 헛발질 않고 공을 멋지게 찰 수 있을 것 같니?」 무리한 주문이었다. 그 전에 걸음마부터 가르치는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렇게나 기다려 마침내 샘이 제대로 축구를 할 수 있게끔 되자 딘은 11명의 사나이들이 곤죽이 되도록 풀밭을 뛰어다니는 운동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 대신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 딘의 관심은 자동차와 여자, 효과적인 여드름 치료제, 그리고 맥주로 온통 쏠려버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축구 말고「동생과 같이 하는 온 동네 술집 투어」가 딘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나란히 섹시한 아가씨도 꼬시고, 코가 비뚫어지게 마시고, 경찰을 피해 달아나고.「방탕의 하룻밤」이라는 제목으로 못된 계획을 짜면서 속으로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제기랄. 동생은 겨우 맥주 한 잔에 혀가 꼬이는 족속이었다.
『쳇! 재미가 없어, 재미가. 그놈의 약해빠진 주량은 도대체 누굴 닮았나 몰라.』 존은 사나이답게 마시는 타입이었다. 작정하고 폭음을 하면 무서웠다. 그가 절제를 아는 사람이라는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술이 사람을 잡았을 것이다. 엄마는 적당히 즐기는 수준이었고... 아빠의 말로는 할머니가 술에 약했다고 한다. 포도주 한 잔에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신부가 그대로 뻗는 바람에 할아버지가 대단히 난감해 했다는 것이다. 결혼식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신랑은 신부에게 맹세의 입맞춤을 하는 대신 술 깨는 약부터 찾아 먹여야 했다. 뭘 모르고 축하주를 권한 친구는 잔치에서 쫓겨났다. 『어휴. 이런게 바로 격세유전이라는 건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동생의 얼굴을 가볍게 토닥거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선 평생을 기다려도 고주망태가 된 두 사람이 도로변에 나란히 서서 사이좋게 오줌을 싸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원하던 오붓한 추억 만들기는 정녕 꿈이다.
차갑게 쏘아붙이는 소리가 그래서 나왔다. 『잘 마시지도 못 하는 주제에 술집엔 왜 가! 다음부턴 오락실에나 가, 오락실에.』 형의 잔소리에 샘은 어쩐지 불만에 찬 표정이었다. 『오락실은 어린애들이나 가는 거잖아.』 『이게 어디서 쉰 소리 하고 자빠졌어. 넌 여전히 어린애야.』 『뭐? 어린애? 누가 어린애야. 키도 형보다 훨씬 크단 말이야. 나는 어른이야!』 『그래서 그걸 증명하려고 연거푸 데킬라를 두 잔이나 삼켰냐. 눈에서 불은 안 나오든?』 『눈에서 불은 안 나왔어. 하지만 입에서 욕은 나왔어.』 『호오. 그랬어요? 뭐라고 욕했는데.』 『Fuck.』 같잖은 말로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것부터가 비정상이다. 딘은 실없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샘의 등을 툭툭 때렸다. 『오냐, 대견하구나. 이 형은 네가 자랑스러워. 그러니 이제 그만 기절이라는 걸 해라. 응?』
딘이 그대로 엉덩이를 들려 하자 샘은 초조해졌다. 이대로 퍼질러 누워 눈이나 붙이라고? 이 세상엔 술의 힘을 빌어서만 표면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이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동안 그가 뾰족한 철쑤세미 덩어리를 목구멍 속으로 삼키고 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딘은 알아야 했다.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놈의 망할 철쑤세미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해야 옳았다. 허겁지겁 형의 팔을 붙잡은 샘은 간절함을 담아 낑낑 소리를 냈다. 딘은「얼씨구?」하는 표정이었지만 간만에 접한 동생의 어리광에 일단은 어쩔 수 없이 하자는 대로 했다. 동생의 눈이 만화에 나오는 미키마우스처럼 반짝거렸다. 나이가 스물 여덟이나 되었는데도 딘은 미키마우스가 여전히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샘의 헛소리를 들어줄 가치는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있잖아. 형이 내 옷을 버리면서 꿈에서 아버지가 오냐 그랬거든. 나는 끝까지 기다렸는데 내다보질 않아서 가방이 무진장 무거웠어. 얼마나 질질 끌리던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봐요. 차라리 잘 가세요. 본심은 아닌 거지? 그래서 난 눈물이 났어. 맨날 형이 날 말렸잖아. 돌아보면서 숫자를 세었는데 아무도 안 나타나는 거야. 그게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제시카가 옷을 사줬어.』 으이그, 미키마우스 좋아한다는 거 취소. 단어는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무작위로 얻어맞은 딘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공중 전화 박스에서 파란 팬티의 수퍼맨이 뛰어나왔어도 이보단 덜 황당했을 거다. 세상에! 그 머리 좋은 샘이 치약을 한 통이나 삼킨 고양이처럼 말하고 있다! 기가 막혀서 한참을 쳐다봤다. 동생의 뺨이 차츰 홍조를 띄기 시작하더니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딘은 확신했다. 장난꾸러기 고양이가 치약은 물론이고 구강 청결제까지 죄다 맛을 봤다.
『여보세요? 실례합니다. 지금 영어 하고 있는 거 맞아요? 샘 윈체스터 씨.』 『뭐야. 그럼 내가 과테말라어를 하고 있다는 거야?』 『어... 쿠바 아니었냐.』 『쿠바나 과테말라나 다 스페인어를 써.』 『옳커니. 내가 하고픈 말이 바로 그거야, 샘. 난 스페인어는 몰라. 영어로 하라고, 영어로.』 『귀에 염증 생겼어? 방금 전에 난 영어로 말했어.』 『틀려, 샘. 단언하는데 그건 바벨탑이 무너지기 전의 사람들이 쓰던 국적 불명의 언어였어. 이 불쌍한 중생이 만능 통역기라는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손 모으고 부탁할테니 영어로 말해줘.』 『우우... 답답하긴. 왜 모르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요점은 내 겨울 윗도리야! 쓰레기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난 의심하고 있어. 형은 귀찮아졌고 빨리 인연을 끊어버려야지 손바닥을 툭툭 털고 버렸어. 반복해서 그 꿈을 꾸고 나는 마음이 심란했어.』
여전히 뭔 소린지 종잡을 수가 없다. 가라는 강으로는 갈 생각도 않고 형편 없는 사공 탓에 배는 자꾸만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귀에 들어오는 단어는 있었다. 옷, 쓰레기통, 형이 버리다. 다 듣고 딘의 눈썹이 꿈틀 튀었다. 목소리도 커졌다. 『지랄한다. 네 옷을 내가 버렸다고? 멋대로 개꿈 꿔놓고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냐? 야!』 어리둥절해하며「어랍쇼, 이게 아닌데」라고 속삭였던 건 너무도 소리가 작았다. 당연히 딘은 샘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고, 2월의 하늘처럼 새파랗게 화가 치밀어 동생의 뺨을 마구 꼬집어댔다. 『아파!』 『아프라고 꼬집은 거야, 샘. 이게 어디다 대고 생트집이야. 하여간 넌 툭하면 자기 물건을 내가 어디다 치웠다고 그러더라. 저번에는 나더러 네 노트북을 만졌다고 펄펄 뛰더니, 이번엔 옷이냐?!』 대화는 이걸로 끝. 단호한 태도로 이불을 동생의 머리 꼭대기까지 올려 씌웠다.
『자다 물 마시고 싶으면 얘기 해. 그거 외엔 어떠한 말도 하지 마. 네 녀석 머리가 도로 맑아지기 전까진 나는 너랑은 어떠한 내용으로도 대화하지 않을 거야.』 『그건 곤란해, 형!』 대단히 곤란하고 말고. 그는 펄쩍 뛰었다. 술이 깬 상태에서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인디애나 존스의 모험 이상으로 위험한 법이다. 바닥이 뻥 뚫린 동굴에서 브레이크 장치 고장난 탈 것을 타고 아찔한 속도로 레일 위를 미끌어져 가는 것과 똑같다. 바짝 마른 혀가 쏘는 것처럼 아파왔다. 샘은 좁은 동굴을 가득 메운 채 굴러오는 둥그런 바위를 상상했다. 그는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난다. 뛰어라 인디애나 존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천둥이 치는 듯한 우르릉 소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부지런히 뒤를 곁눈질한다. 사망의 권세가 코앞이다. 마침내 가엾은 인디애나 존스는 종이처럼 납작해진다. 사람을 가뿐하게 즈려밟고도 바위는 아무 일 없었다며 계속해서 전진한다. 『왜 몰라주는 거야. 나중은 없어. 나중엔 말 못해! 못 한다고!』 머리가 맑아지고 나면 다시 얘기를 하자고? 맙소사. 그건 죽이겠다며 굴러오는 바위를 똑바로 쳐다보라 주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샘은 재차 낑낑 소리를 내는 것으로 형의 동정심을 자극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새 면역이 생겼는지 속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였을 수도. 남부 오지의 닭 우는 노래를 3개월간 듣고, 튀긴 닭요리를 6개월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은 사람처럼 화를 내는 걸 봐선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컸다. 『아악! 냉큼 입 다물엇! 난 네 소지품 안 건드렸어! 이 망할 자식! 경고하는데 물 달라는 거 말고 다른 소리를 지껄여봐. 죽도록 후회한다는게 뭔지 깨닫게 될테니까. 알아 들었냐!』 딘은 자신이 한 경고를 곧바로 실천에 옮길 사람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샘은 풀 죽은 목소리로「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진짜로 물 달라는 말 외엔 입 뻥끗도 하지 않았다.
『사춘기 다음에 내가 모르는 오춘기, 육춘기라는 것도 있는 건가.』 샤워기 아래로 서서 몸을 깨끗하게 씻어내리면서 딘은 이를 악물었다. 한참을 노력했음에도 우거지상을 짓고 있는 동생의 얼굴이 머리에서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몽정한 걸 들키고 창피해 죽으려 했을 적에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떨어지는 물줄기에 몸을 맏기면서 무거운 신음 소리를 삼켰다. 달짝지근한 럭키참스에 우유를 말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했던 시절이 그리울 뿐이다. 지금은 최고급 스테이크를 내밀어도 그렇게 빨리 기분이 풀리거나 하지 않는다. 감정 기복이 심해진 동생을 달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했다. 무거운 가방 셋, 겨울 옷, 쓰레기통. 으아, 나더러 뭘 어쩌라고? 샘은 그에게 기억도 나지 않는 일 - 옷을 버린 걸 추궁하고 있다. 『쓰벌. 차라리 남극 오존층의 구멍이 커지는 걸 내 탓으로 돌릴 것이지.』 비누로 겨드랑이를 문지르며 걸걸한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이 더욱 세게 나오게 조절했다. 순간 찬물이 쏟아져 나왔고 몸속에 박힌 철근들이 빳빳이 고개를 들고 곤두서려 했다. 질겁하고 다시 스위치를 반대 반향으로 돌렸다.
『샘! 어물거리지 말고 너도 빨리 세수해. 우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젖은 수건을 던지며 샘을 다그쳤다. 죄 지은 사람마냥 구석에서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샘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이렇게 일찍? 오늘은 앨런 아줌마가 보낸 자료를 찾으러 우체국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샘의 질문에 그는 부랴부랴 머리를 저었다. 『예정이 바뀌었어. 우린 아침 식사를 하면서 리를 만날 거야.』 『리? 그러니까... 애쉬가 소개해준다던 그 뱀파이어 헌터 말이야? 언제 연락이 온 거야?』 셔츠에 팔을 꿰다 말고 딘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거 왜 이러시나. 단기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셨나. 너도 어제 만났잖아. 왜 딴 소리야.』 『딴 소리를 하려는게 아니라 만난 적이 없대도.』 『어이쿠! 역시 단기 기억상실증인가 보다. 그렇다고 해도 병원에 들려 머리 MRI 사진을 찍을 짬은 없으니까 리를 만나면 뭐라고 사과할지부터 생각해둬. 샘? 넌 어제 그녀를 매춘부 취급했어.』
힐난을 듣기가 무섭게 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온하기 짝이 없던 뭉게구름이 갑자기 시커먼 폭풍으로 변했고, 그 폭풍이 비료를 싣고 가던 트럭을 멋지게 날려보내는 걸 직접 목격했다는 식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우레가 쳤다. 넌 어제 그녀를 매춘부 취급했어. 샛노란 불꽃이 일렁이자마자 거꾸로 뒤집힌 트럭이 폭발했다. 『거짓말!』 『다행으로 생각하렴. 리는 네가 가한 끔찍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화를 내진 않았어.』 『어제 찾아왔던 그 여자가... 맙소사! 뱀퍼였다고?!』 『그래.』 『그거 나 놀리려고 하는 농담이지.』 『네 생각은 어떻냐. 형이 너 재밌으라고 농담하는 거 같니?』 전기 면도기로 수염을 정리하다말고 딘은 쾌활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거울 너머로 샘을 관찰하면서 절도 있는 동작으로 슥슥 뺨을 밀었다.
Posted by 미야
2007/06/0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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