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134 : 135 : 136 : 137 : 138 : 139 : 140 : 141 : 142 : ... 233 : Next »

[S☆N-fanfic] Orion 02

※ 느려서 죄송. 그치만「고등어 자반」을 2년에 걸쳐 썼다는 걸 감안하자면 이건 엄청나게 빠른 거라고요. (그건 자랑이 아니지 않나) ※


두꺼운 구름이 해를 가려준 탓에 걱정했던 것처럼 끔찍스럽진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꼬박 3시간을 걸었음에도 타고난 체력이 뒷받침을 해주어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가끔씩 바람이 불어왔고, 운동화 끝으로 뽀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샘은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면서 땀이 차오른 목덜미를 긁었다.
빛깔이 없는 무채색의 하늘, 그리고 검게 물들어가는 지평선...
순간 방향감각이 마비되었다. 이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손목시계의 초침이 거꾸로 돌고 있다. 우아하게 날개짓하던 공중의 새도 게시판에 붙여진 흑백 사진처럼 같은 자리에 못 박혔다.
가방을 아스팔트 바닥에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붕괴된 건물의 잔해처럼 보이는 낡은 울타리가 가깝다. 그 옆으로 시보레 임팔라가 매우 느린 속도로 미끄러져 지나가면서 강렬한 원색 - 피처럼 새빨간 - 의 길죽한 바퀴 자국을 도로에 남겼다.
샘은 분석하듯 꼼꼼한 시선으로 자동차를 관찰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차체의 표면으로 입을 굳게 다문 샘의 옆모습이 고스란히 반사되었다. 아니, 꼭 그렇진 않다. 그것은 뒤집어진 요술 거울처럼 비춰진 형상 전부를 기괴하게 일그러뜨렸다. 코가 휘어지고 입술이 일그러졌다. 턱이 앞으로 길게 돌출되어 나오면서 주둥이가 짐승의 그것처럼 뾰족해졌다. 드러난 이는 누렇고 날카롭다.
코요테! 그 사실을 깨닫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강한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관자놀이가 제2의 심장처럼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 코요테는 아즈텍 어로 노래하는 개를 의미해.」
쿵 소리를 내며 임팔라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아아, 그 남자다.
다시 반복되는 소음. 쿵쿵.

『...』
잠들지 못한 채 계속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꿈을 꾸고 있었다.
당혹감에 휩싸인 샘은 어설프게 남아있던 꿈의 찌꺼기를 떼어내기 위해 힘을 주어 두 눈을 깜빡였다. 한동안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어디로 와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곳 - 고향에서 가까운 국도변의 메마르고 음침한 풍경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었고, 짓눌린 신음 소리는 목구멍 안에서 자신의 꼬리를 깨문 채 빙빙 도느라 바빴다. 그리고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듯 펄쩍 뛰어오르기도 했다.
안 된다. 고함을 지르면. 등 돌리고 누운 제시카를 의식한 샘은 뻣뻣한 아랫입술을 가만히 빨아들이며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함께 불쾌한 꿈에서 빠져나오는데 일조한 정체불명의 소음에 귀 기울이며「저건 뭐지?」생각했다.

오래된 배관이 드디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높다. 12년 전에 지어진 4층 높이의 이 서민 아파트는 벌어진 창틀 틈새로 칼바람이 든다는 문제 이전에 이미 다른 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쥐가 망가뜨린 전기 배선은 누전으로 인한 화재의 위험성을 높였다. 옥상에 설치된 벤츄레타는 폭풍이 불기라도 할라치면 망령난 할망구처럼 끼꺽거렸다. 곳곳에서 막힌 하수도가 말썽을 부렸다. 구정물이 역류라도 할라치면 날벼락을 맞은 세입자들은 분노에 차서 문짝을 있는 힘껏 걷어차곤 했는데 나중에 발가락이 퉁퉁 붓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이는 곤란에 대처하는 현명한 태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웃집 침실에까지 소리가 들리게끔 발길질을 해봤자 막힌 하수도가 저절로 뚫리는 건 아니니까.

「그치만 홧김에 문을 찼다면 어이쿠 외침도 같이 들렸어야 옳지.」
기척을 죽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샘은 카펫 위로 두 다리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숨겨둔 야구 배트를 찾아 바닥을 더듬거렸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거실 쪽에서 다시 작은 기척이 들렸다. 샘의 판단으로는 분명 바퀴 달린 테이블이 옆으로 끌리는 소리였다. 화분을 올려두는 용도로 사용하는 이동식 테이블은 제시카의 표현대로라면「고약한 훼방꾼」이었다. 덤벙거리는 성격의 그녀는 여차하면 테이블 모서리에 다리를 부딪치곤 했는데 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나갈 적에 특히 더 그랬다.

「도둑치고는 주의력이 산만한 편이군. 짐작하자면 무릎에 퍼렇게 멍이 들었을 걸.」
몽둥이를 바짝 당겨 쥔 샘은 벽으로 바짝 붙어 천천히 이동했다. 그 자세에서 고개만 길게 내밀어 바깥을 염탐하려는 찰나 슥, 하고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린 샘은 숨을 멈추고 체내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머릿속으로 빨아들였다. 흥분감에 두 눈이 활짝 밝아졌다. 상대에게 들키지 않고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첫 발을 내딛은 뒤 재빨리 야구 배트를 둥글게 휘두른다. 그 모든 동작을 그림으로 그려본 뒤 참았던 호흡을 훅, 내뱉었다.

『!!』
앞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정확히 샘의 오른팔 - 더 정확하게는 야구 배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방어랍시고 왼팔을 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손목이 뒤로 꺾기면서 관절이 고통을 호소했다. 이래서는 몽둥이를 휘두르기는커녕 주먹을 뻗을 수도 없다.
『젠장!』
상대는 샘이 가진 무기를 먼저 빼앗을 작정인 듯했다. 그것은 나름 정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뻔한 행동이어서 다음 수를 어떻게 놓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이렇게 하는 거지.」
상대가 야구 배트에 열중한 사이, 샘은「하수구가 막혔을 적의 나의 분노」라는 걸 실감나게 재현하며 다리를 높게 들어 남자를 찼다.

와당탕 소리를 내며 상대방이 2m 뒤로 날려갔다. 샘은 이때다 하고 쫒아갔다. 단숨에 때려눕힐 참이었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상대는 몸의 균형을 바로 잡지도 못했음에도 샘의 얼굴을 향해 제대로 된 펀치를 먹였다. 뿐만 아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눈앞으로 별이 반짝이게 만든 그 짧은 틈을 타고 샘의 어깨를 잡았다.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벽이 아닌 천장이 시야에 가득 찼다. 바닥에 세게 부딪친 뒤통수가 깨지게 아픈 건 둘째다. 강철처럼 단단한 손이 샘의 목을 누르며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했다.

『저리 비켜!』
『워, 진정하라고, 아기 토끼 씨.』
『누가 아기 토끼라는 거야?!』
『하긴... 야구 배트를 힘차게 휘둘러대는 아기 토끼라는 건 좀 그렇네.』
남자는 즐겁게 말하며 친근감을 담아 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오랜만이야, 샘. 그동안 잘 있었어?』

샘은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심지어 눈꺼풀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그 반응을 오해한 것 같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서서히 샘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마치 잠자는 공주님을 깨우기 위해 키스라도 할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뭐야.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건 아니겠지. 혹시 죄다 까먹었어? 기억이 안나?』
그럴 리 없다. 어떻게 잊을 수 있다는 건가. 샘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분주히 움직였다.
『딘...』
그제야 남자는 매우 기쁘다는 투로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나야. 날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알았다. 2년이나 되었다. 날 수로 따지면 730일이나 된다.
처음 1개월이 힘들었다. 샘은 두려웠고, 혼란스러웠다. 딘과 다시 만나게 될 수천 가지의 상황을 상상했고, 그때마다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아프리카 오지로 달아나도 딘은 싱겁게 뒤쫓아왔다. 그리고 자신은 코끼리에 밟혔다. 로켓과 미사일로 무장한 군대가 겹으로 둘러싼 요새에 틀어박혀도 소용없었다. 딘은 컴퓨터를 해킹해서 모든 암호와 비밀번호를 무력화시킨 뒤에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 들어와 샘에게 총을 쏘았다. 무인도에 숨어 로빈슨 크루소 흉내를 내봤자, 고래 뱃속에 들어가 요나 흉내를 내봤자, 돌아서면 항상 딘이 있었다.

「나에게서 도망쳐봐. 시골로 돌아가도 좋고, 이대로 대학에 가도 좋아. 경찰에 가서 내 이야기를 해도 괜찮아. 그들에게서 보호를 받으렴. 이름을 바꿔 어딘가로 숨는 것도 좋지. 해외로 달아나는 것도 한 방법이야. 그렇게 필사적으로 내게서 도망쳐.」
상상 속에서 딘은 손가락을 세우고 장난스럽게 까딱까딱 흔들었다.
「네가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머리를 써서 숨으면 숨을수록, 나는 널 찾아내는 일에 무한한 기쁨을 느끼겠지.」
하여 마지막은 항상 같았다.

「넌 내 꺼야. 다른 사람이 널 지키고 있어도 반드시 빼앗을 거야, 새미.」

그것은 떠벌이의 허풍 같은 것이 절대 아니었다. 지구 끝까지라도 추적해서 딘은 정말로 샘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걸 떠올리자 머리가 차가워졌다.

샘은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응?』
독이라도 뿜어낼 듯한 눈빛으로 딘을 쏘아보았다.
『날 죽이러 온 거야?』
그렇다. 처음 1개월은 견딜 수 없게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2년이면 상당히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
『아님 한가하게 맥주라도 마실까 생각하고 이 집에 들어왔어?』
딘의 눈썹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리고 모든 의미를 함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와.』

가시 돋친 발언이었어도 딘은 이 모든게 흥미로운 듯했다. 여전히 그는 재밌다는 투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맥주를 얻어 마시려던 건 아니야. 다만 뭐랄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그가 화내지 말라는 제스츄어를 해보이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거실 불이 켜졌다. 샘과 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등 스위치가 있는 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샘?』
속옷 차림새의 제시카가 이게 다 무슨 소동인가 근심하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록 눈꼽이 끼어 있었지만 졸음이 싹 달아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샘의 입이 얼어붙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딘은 친근감을 어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안녕하세요? 제시카.』
그러면서 그녀의 속옷에 프린트된 스머프 그림 - 정확하게는 가슴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난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멋있네요. 저도 스머프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Posted by 미야

2009/03/03 10:02 2009/03/03 10:02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164

Comments List

  1. 아이렌드 2009/03/03 14:15 # M/D Reply Permalink

    앜~~!! 다음주부터 전개될 스토리는 한층 더 기대되는걸요.
    (젠슨과 제러드와 [다크 엔젤]까지 믹스된 패러픽이 있던데...이거 시작해야 할까요? 소근소근...)

  2. 나마리에 2009/03/03 22:25 # M/D Reply Permalink

    와 Orion 2 편!! 기다렸사와요. >.<
    딘하고 샘이 다시 만났군요...
    다음은 어떻게 될지. 두근.

  3. 바자소녀 2009/03/03 23:12 # M/D Reply Permalink

    엄청 기디리고 있었는데~드디어!!!기쁜 마음에 얼른 읽었어요^^

    너무 재밌습니다~~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두근두근이예요~~

  4. T&J 2009/03/04 13:32 # M/D Reply Permalink

    와아-
    같은-비슷한-장면이 이렇게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는 거군요-
    샘을 바라보고 웃는 딘의 미소가 무척이나 섹시하게 느껴지는 건 제가 오바한건가요?으음;;;;;
    많이 기다린만큼 알찬 글이었어요~그저 올려주시는 것만으로 굽신굽신~
    다음 글도 기다립니다!

Leave a comment

[S☆N-fanfic] Orion 01

※ 뼈대가 되는 설정은 다른 분의 팬픽에서 따왔습니다. (← 범죄행위) 다시 말해 이전 내용으로 다른 작품이 있다는 거듸요. 여기서 샘과 딘은 형제가 아닙니다. 헑헑헑. 신고하면 땟지하겠소.


캘리포니아 제리코에서 20대 젊은 여성이 윔홀(벌레구멍)에 빠졌다는 -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왔다.
실종된 여성의 이름은 에이미.
백인,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에 신장 168cm, 마른 체격.
근무하던 식당에서 주방보조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게 마지막으로 목격되었고, 그녀가 운전하던 차량은 센테니얼 고속도로 주변에서 매우 깔끔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지갑과 핸드폰을 제외한 소지품이 조수석에 얌전히 놓여 있었으며, 혈흔과 같은 싸움의 흔적은 전무했다. 다만 차량의 기름 잔량이 바닥을 치고 있어서 어째서 에이미가 갓길에 차를 세웠는지가 쉽게 추측이 갔다. 경찰은 그녀가 도움을 구하러 밖으로 나갔다가 몹쓸 강도라도 만난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시대는 저물어 언젠가부터 들판에는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었다. 그런 짐승들에겐 힘없는 여자들은 한 입 거리다. 신문에서도 바로 그 점을 언급했다. 미국은 이제 안전과는 거리가 먼 나라다.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니 스스로가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샘! 이러다 약속 시간에 늦겠어. 자기는 아직 옷도 안 갈아 입었잖아.』
『미안.』
여자 친구의 야단에 읽던 신문에서 눈을 떼어냈다.
그러나 남자는 지독한 폭염 속에서 에어컨도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늙은이처럼 무기력해 보였다. 신문을 치우겠다는 의지도, 의자에서 읽어나겠다는 투지도 없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다시 등 뒤에 달린 태엽을 감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뭔가 이상했다.

『샘?』
립스틱을 바르다말고 거울 앞에서 옷무새를 마무리하던 제시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샘은 원래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그는 성실한 성격의 사내였다. 게다가 이번 모임은 샘의 미래를 축하하기 위해 가장 절친한 친구들이 약소하게 준비한 자리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기에 샘은 달력에다 빨간색 색연필을 들어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여 동그라미를 그려놓기까지 했다. 분명히 그는 이번 모임을 기다렸다. 마지못해 싫은 장소로 끌려가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
골똘한 생각에서 깨어난 그는 사람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털어내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꾸며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여자의 본능은 그가 말한「아무 것도 아님」이 거짓말임을 쉽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제시카는 벽에 걸린 시계를 곁눈질로 쳐다봤고, 째깍거리는 시계는 지금이 샘의 두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그러지 마, 샘. 나는 자기의 고민을 같이 공평하게 나누기를 바라」라고 말할 때가 아님을 강조했다. 그들은 이번 모임을 주최한 브래디네 집에 가기 전에 가게에 들러 한 병의 와인을 구입해야 했다. 8시 정각에 초인종을 누르려면 도중에 뜀박질을 해야 할지 모른다. 높은 구두를 신고, 귀부인처럼 화장을 한 모습으로 전력질주를 한다라... 내키지 않는 일이다.
『푸른색 셔츠를 입을 거지?』
그래서 제시카는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사내아이가 침대 밑으로 성인 잡지를 숨겨뒀다는 걸 눈치 챈 엄마처럼 행동했다. 쉽게 말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는 얘기다.

『가문의 영광이어라~♪』
『샘과 그의 엄청난 LSAT 점수를 위하여~!!』
『무려 174점!』
『휘우우~!』
휘파람까지 불어대는 친구들의 호들갑에 샘의 피부가 빨갛게 물들었다.
『저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다들...』
부끄러움에 겸손하게 말하지만 174점이나 되는 거다. 엄청나게 높은 점수로 그가 원하는 로스쿨 아무 곳에나 갈 수 있다. 월요일에 면접 예정인데 브래디의 말로는 점잖은 양복과 구두를 신고 가서 가만히 웃고 나오기만 하면 끝이라고 한다. 약간은 상스럽게 손가락으로 오케이 싸인을 만들어낸 브래디는「그것 말고 다른 결말이 나온다면 상어가 풀을 뜯어먹는 소리가 될 거야」라고 했다.
뭔가 틀려먹은 그 표현에 식탁에 앉은 전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상어가 풀을 뜯어먹다니.
『그거, 고양이가 풀 뜯는 소리 아니었어?』
『제기랄. 고양이나 상어나 거기서 거기지.』
시시콜콜 따지는게 매우 귀찮다는 표정을 지은 브래디가 와인 잔을 들어올렸다.
『아무튼 샘 윈체스터를 위하여. 그의 앞날에 할로겐 램프가 밝게 빛을 발할지어다.』
『뭐야. 형광등이라는 거냐?』
『시끄러, 혹스터. 백열전구는 에너지 효율이 낮단 말이야!』
아무래도 식탁 아래서 발길질이 행해진 것 같다. 음식을 담은 접시가 덜그덕 소리를 내며 콩 튀듯 튀는 걸 봐선 말이다.

말싸움이 벌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화제를 바꾸는게 상책이다.
거꾸로 쓰러질 것 같은 와인 병을 두 손으로 붙잡은 랠프가 눈치껏 말했다.
『네 성적이라면 내년에 전액 장학금을 받을지도 몰라, 샘. 그런 얘기를 가족들에게 해봤니?』
『어...』
『우리 아들은 진짜 대단하다며 아버지가 많이 기뻐하실 거야.』
샘은 모호하게 웃으며 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쩌면.』
순간 랠프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가족들에게 아직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건 아니지?』
『우린 그렇게 단란한 가족은 아니라서...』
『맙소사, 샘.』
스탠포드 대학에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로렌스 출신인 샘 윈체스터는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다.
특히 아버지와 아주 안 좋다.
구 소련이 붕괴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과는 상관없이 고집불통 아들과 아버지는 현재까지 냉전 중이다.

『샘이 대학에 가겠다고 했더니 펄펄 뛰며「자동차 같은 거 사용하게 해주지 않을테다!」라고 하셨다더군.』
바넷사가 제시카의 오른쪽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시골 양반이라 고지식했던가봐. 아니면 하나뿐인 외아들이 골치 아픈 공부는 말고 가업을 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던지 결사반대를 했대. 그래서 샘은 무작정 집을 나와 터벅터벅 걸어 스탠포드에 도착했어.』
물론 그럴 리 없다. 캔자스 주에서 캘리포니아 주까지 두 다리만을 사용해서 이동했다면 지구가 태양 주변을 일곱 바퀴 반을 돌았을 것이다. 제시카는 말도 안 된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거짓말이죠?』
바넷사는 그렇다 아니다의 대답은 생략한 채 그동안 속으로 궁금해 하던 걸 질문했다.
『두 사람, 언제 약혼할 거야?』
『에?』
『샘이 반지를 사러 다닌다는 소문이 있어. 뭐, 소문이라고 할 것도 없지. 직접 눈으로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릴 너무 궁금하게 만들지 말아줘. 알지? 좋은 소식은 빨리 퍼뜨리는게 좋아. 이 동네엔 샘의 친구가 많으니까 당신들의 약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고.』
당황한 제시카가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기도 전에 바넷사는 다시 롤러코스터를 타듯 화제를 바꿨다.
『어때? 샘은 요즘도 하루에 2시간씩 운동을 하나?』
그리고 그녀는 샘이 근육광에 스포츠광이라고 흉을 봤다.
『남자의 허영심이라니.』
동시에 그녀는 단단한 아랫배를 가진 남자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아 기분이 좋겠다고도 했다.
제시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모두를 향해 어중간한 미소를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표시가 나진 않았으나 미묘하게 적대적인 그녀의 태도는 무어라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피곤해...」
샘은 또 샘대로「아버지와의 불화」로 발목이 잡힌 눈치였다. 제발 그만 하라는 무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브래디는 앞장서서「샘과 그의 아버지를 화해시키는 일」은 이라크 전쟁만큼이나 중대한 거라며 열변을 토했다. 샘은 무좀에 걸린 발바닥을 긁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십사만 사천 명에 이르는 그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오지랖이 넓었다. 그리고 브래디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든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 이불을 끌어안았다.
기분이 그리 썩 좋지 않았던게 분명한 제시카는 취기를 이유삼아 샘의 포옹을 거절했다.
하지만 샘은 그녀의 불편한 감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아물지 않았던 상처가 또 덧났다.

아버지.
대학에 가는 걸 반대했던 가족.

도시로 나가면 빌딩이 무너져 아들의 정수리를 덮칠 거라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아버지는 대학 진학을 필사적으로 말린답시고 차편을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선택했다. 완전 바보 같은 짓이었다. 가끔씩 곰이 뒷마당으로 어슬렁대는 두메산골이라고 해도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불법이긴 해도 히치하이크도 한 방법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샘은「걸어갈 거니까 됐어요!」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거품을 물며 경기를 일으켰고, 샘은 가출하듯이 가방을 꾸려 그 날로 집을 나왔다. 그리고 저녁의 어스름한 어둠을 배경으로 해서 계속해서 걸었다.

세상에 대해 겁이 없었다. 사람에 대해 겁이 없었다. 청년은 순박했고, 믿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와 보는 이들의 눈을 끌어당기는 섬세한 표정을 가진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반짝이는 들짐승의 눈빛을 가졌고, 빈틈없는 미소를 짓는.
악마.

뒤척이며 이불을 더욱 끌어당겼다.
생각하지 말자. 일찍 일어나려면 눈을 감고 조용히 잠을 자는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피가 순환하며 혈관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게 느껴졌다. 안 된다. 진정해야 한다. 떠올려선 안 된다. 그 때의 일은... 주먹을 쥔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버릇처럼 손등을 꽉 깨물고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 같은 것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양이 메에 울었다. 한 마리, 두 마리... 테니스 선수가 라켓으로 네트 너머로 공을 넘기는 것처럼 해서 양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어.」
희망에 찬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음을 믿고 있던 어린 청년을 어두운 수렁 아래로 잡아끌면서 사내가 속삭였다.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거야. 죽이기엔 아까우니까.」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사내가 말한다.
「그러니까 넌 멀리 도망치도록 해. 내가 어떻게든 다시 잡으러 갈 테니까.」
밤새도록 강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샘의 눈에는 그의 모습이 한층 더 매력적이고 친절해 보였다.
「기억해둬, 내 이름은 딘이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넋이 나간 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흡사 맹세의 의식인양.

Posted by 미야

2009/02/22 22:04 2009/02/22 22:04
Response
No Trackback , 10 Comments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154

Comments List

  1. 나마리에 2009/02/23 22:55 # M/D Reply Permalink

    ;ㅁ;

    미야님 새 시리즈! 진짜 두근두근거려요. 아흑.

  2. 아이렌드 2009/02/24 14:14 # M/D Reply Permalink

    범죄의 세계로 오신걸 환영해효....(소근소근)

    1. 미야 2009/02/24 14:41 # M/D Permalink

      반드시 완전범죄로 성공시켜야 해요... 소곤소곤

  3. T&J 2009/02/24 16:29 # M/D Reply Permalink

    전 미야님의 문체가 너무 좋아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보이거든요, 그런 문체가 글과 너무 잘 어울려서...허허...이번 글도 느낌이 좋습니다. 고로, 기대하겠습니다...

    우아아아아-
    형제가 아닌 그들이라...두근두근하군요

  4. 바자소녀 2009/02/28 04:33 # M/D Reply Permalink

    완전 재밌을 것 같아요^^ 미야님은 범죄의 세계로 발을 들이셨는데,,,

    전 무한 기쁨에 젖어 있으니~~부디 용서해주세요!! 그래도 재밌는 걸 어째요~

    아무튼 샘에게 그런짓(<-무슨짓^^;;)을 해놓고 당당하게 말하는 딘오라버니

    참으로 멋지십니다^^ 역시 형제가 아닌 그들도 참으로 좋으네요(<-뭔소린지^^;;)

  5. 비밀방문자 2009/03/01 21:3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6. 미야 2009/03/03 10:05 # M/D Reply Permalink

    비싸긴 비싸네요.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는데 눈에서 피가 났다능. 그래도 구미가 당겨 언제 도착하나 손가락 빼물고 있습니다.
    뉴욕 지하철이 물이 잠기는 부분이라던가 하는 내용을 보니 다큐멘터리와 동일하네요.

  7. 이플로피 2009/03/11 11:45 # M/D Reply Permalink

    안녕하세요 딘샘을 찾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발견했는대
    소설보다가ㅠㅠ 재밋어서 글이라도 남겨야할거같아서 이렇게 남깁니다ㅠ
    흑흑 자주들릴게요!!!<응?

  8. 쥬레스 2009/03/13 14:31 # M/D Reply Permalink

    우왓//////// 되게 오랜만에 들렀는데 새시리즈 연재하시는군요ㅠㅠㅠㅠㅠ

    미야님 정말 기대렸습니다ㅠㅠㅠㅠㅠㅠ//

    범죄의 세계; ㅂ;....제발 들키지 않으시길(응?)

    완결까지 달리셔요> </

  9. 달려라ㅋㅋㅋ 2009/04/21 00:46 # M/D Reply Permalink

    이런......범죄의 세계라면요 기꺼이......(소근소근)

Leave a comment

※ 1인칭 시점이라 폰트를 다르게 해봤는데 눈만 아프군요. 그런데 이번 주 휴방이우?



권총을 순식간에 분해하는 거라던가, 몸싸움이 났을 적에 상대방의 안다리를 기습적으로 후리는 것엔 자신 있다.

허나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도 모르겠다.

썩은 판자 위를 우리는 걷고 있다.

삐그덕 소리는 내는 바닥은 두 명분의 체중을 감당할 수 없을 터.


『세탁물이 잔뜩 밀렸어, 딘.』

그놈의 망할 빨랫감, 소금에 버무려 확 불질러 버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평상시처럼 행동하려 노력하면서 - 그래봤자 뻣뻣한 동작이었지만 - 가방에 잔뜩 구겨넣은 온갖 셔츠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몇 개는 너무 오래되어 이집트 파라오와 같이 사막 한 가운데로 매장된 용품처럼 보인다. 소맷단이 닳아 형편없이 헤어진 것도 있다. 소금과 철가루가 묻어 변색이 된 건 애교다. 생선 비린내 같은 퀴퀴한 냄새도 나고 있다.


『새 셔츠가 필요한 거 아니야?』

탐색하는 시선을 한 샘이 내가 좋아하는 감청색 셔츠를 눈여겨 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제대로 된 대화” 가 진행되길 기대하며「커피를 사오다가 건너편 가까운 곳에서 캐주얼 복장을 파는 할인매장을 봤어.」라고 덧붙였다.「같이 갈래?」라고도 했다.


오해는 풀렸고, 서로 화해를 했고, 피부 하얗게 뜬 마이클*이 말했듯이 위 아더 월드이고, 나는 이런 썩을 고민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지금 옷을 사러 나갈 기분이 아니다.

샘의 얼굴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나 역시 굳었다. 침을 삼키고 억지로 혀를 굴렸다.

『나중에.』

확실히 난 지금 동생을 피하고 있다.


샘의 목덜미에 난 상처는 이틀동안 반창고를 붙였다 떼어내자 금방 사라져「내가 저곳으로 칼집을 넣었지」곱씹을 꺼리를 주지 않았다. 그것은 넘어져 무릎에 생긴 생채기보다 빨리 없어졌다. 면도하다 실수로 벤 자국도 그보단 훨씬 오래가는데 말이다.

대신 인생은 공평하여 내 어깨 위의 상처는 덧났다.

바비가 부랴부랴 꺼내가지고 온 청동 단검의 상태가「불결」했다는데 1달러를 건다.

뿌옇게 먼지가 쌓인 도구 상자의 모습을 떠올리자 욱씬거리는 통증은 배가 되었다. 수상한 물질이 표면에 뭍어 만지기도 꺼림직한 전체적인 모습, 훅 하고 입김을 불어봤자 때가 벗겨지지도 않는 뚜껑, 잘 움직이지 않는 자물쇠에서 뚝뚝 떨어진 녹슨 쇳가루,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마지막으로 뭘 썰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문제의 칼날... 그런 걸로 2cm 정도의 깊이로 찔렀으니 화농이 안 생기길 바란다는게 욕심이다. 사흘이 지나자 피부가 발갛게 부으면서 쏘는 듯한 독특한 아픔을 호소했다. 속에서부터 곪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다.


『제기랄. 이럴 때 꼭...』

화장실 벽면에 걸린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경험에 의거하여 판단하자면 피부 연고제만 발라서 나아질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항생제를 사려면 의사에게 진찰부터 받아야 한다.

이 마당에 병원에 간다는 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활활 다는 곳에 찬물을 반복하여 끼얹으며 속으로 조소했다.

오히려 난 이 통증이 마음에 들어.

어쩌면 난 파상풍에라도 걸려 꼴까닥 죽길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몰라.

천사 씨가 지옥에까지 내려가 어렵게 꺼내온 보람이 없는 인간이지.


추잡해.


『화장실에서 자위라도 했어?』

옳거니, 뿔났군.

많지도 않은 참을성이 바닥난게 분명한 동생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 친절하게 굴고 있는데 이쪽에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많이 답답하긴 했을 거다. 인공적으로 밝게 꾸며진「친해지고 싶어요」플랑카드는 언제 그랬냐며 예의 검은 빛으로 돌아갔다. 계집애처럼 앙 다문 입술을 보라지. 고슴도치마냥 뾰족하게 가시를 세운게 하나도 안 귀엽다.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아?』

『글쎄다, 새미. 내가 케이트 모스를 떠올리며 딸딸이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궁금해?』

『전혀 안 궁금해.』

동생은 잡아먹을 눈빛을 하고 내쪽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음절을 하나씩 딱딱 끊어 다시 말했다.

『욕실에서 형이 낸 끙끙 소리를 봐선 그 상대가 알래스카 북극 곰 - 암컷 - 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하나도 안 궁금해.』

목소리 톤이 신경질적으로 올라가는게 영 심상치 않다.

『더 늦기 전에 나한테 할 말 없어?』

솔직히 말해볼까.

잔뜩 흥분한 녀석이 나이트 스탠드를 들어 내 머리통을 후려칠까봐 겁이 났다.


『곪았어.』

『그건 나도 알아.』

『처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어.』

『침 바르고 냅두면 되.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긴.』

『하지만 열이 있어.』

『당연하지. 곪으면 원래 열이 나는 법이야.』

아스피린을 한 번에 두 알을 삼키며 손사레를 치고 보았다.

하지만 내 동생은 그 정도로 물러설 위인이 아니다. 아니나다를까,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엄청 살벌하게 생긴 것들을 한웅큼 챙겨왔다.

가위, 칼, 붕대... 그건 뭐냐. 송곳?

『어이.』

『늦기 전에 고름을 짜내야 해.』

동생이 소독용 에틸 알콜로 도구를 닦는 장면은 미치광이 의사가 등장하는 싸구려 B급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프면 참지 말고 소리 질러.』

눈동자를 굴리며 끄응 신음했다. 두 사람이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고, 난 지금 상반신 누드이고, 샘이 등뒤에서 거의 날 껴안 듯이 하고 있음에도 흥분은 되지 않았다.

『그럼 찌른다.』

얼핏 듣기에 색정적인 대사까지 더해졌음에도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하나, 둘...』

『!』


덧난 상처를 칼로 쑤실 적의 고통은 당해본 사람만 알지.

어디 그뿐이야? 살짝 건드려도 기절할 지경인데 그걸 손으로 누르며 마구 쥐어짜는 거야.

나 죽어, 나 죽어 소리가 나와도 결코 엄살이 아니라고.

『조금만 더, 더... 옳지.』

『쿠억~!!』

몸에 박힌 총알을 후벼팔 적의 감각과 아주 유사하다. 시야가 빙글 회전한다. 끓는 신음소리로 목구멍이 비틀어지는 것만 같다. 혀까지 올라온 비명을 억지로 집어 삼키며 배로 힘을 준다. 완전히 아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산모다. 그치만 내 뱃속엔 아기가 없다. 내보낼 구멍도 없다.

사람이 기절할 지경인데 망나니가 되어버린 샘은 덫난 부위를 입으로 세게 빨았다.

나도 모르게 무릎 걸음으로 도망쳤다.

거기에 부응하여 움직이지 못하게끔 뒤에서 끌어안는 힘이 더 강해졌다.

아이고, 살려줘.

『아파! 저, 적당히 해, 샘!』

『안돼.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모두 짜내는게 좋아.』

입으로 빨아낸 고름을 거즈 수건에 뱉어내면서 샘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다시 노랗고 빨간 불빛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순식간에 녹초가 되어버렸다.

완벽하게 뻗어 피고름이 묻은 더러운 수건을 치우는 모습을 동생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도구함이 달각거리는 소리마저 물 먹은 엔진음으로 들려왔다.

독한 위스키를 나발 불고 시체처럼 잠들었음 소원이 없겠다.


『아파 죽겠다고 하면 이 형이 또 우는 소리 한다고 타박할 겨?』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피곤한 투로 한숨을 내쉬는 소리는 귀에 들렸다.

『안 해.』

『거짓말쟁이...』

울분 섞인 내 말에 샘은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네, 네. 샘은 나쁜 아이예요. 형님의 동생은 거짓말쟁이예요. 그래서 엉덩이에 뿔이 났지요.』

『뿔이 아니라 털. 거짓말을 하면 엉덩이에 북슬북슬 털이 나는 거야.』

『그거 잘 되었군. 형은 엉덩이에 털이 난 여자를 엄청 좋아하잖아. 내 말이 맞지?』


비누 냄새가 나는 커다란 손이 열을 재기 위해 내 이마를 덮었다.

『얼간이.』

얼른 맞받아쳤다.

『계집애.』

그리고 속으로 다음의 말을 덧붙이고 웃었다.

엉덩이에 털난...........

Posted by 미야

2009/02/13 11:44 2009/02/13 11:44
Response
No Trackback , 6 Comments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143

Comments List

  1. 비밀방문자 2009/02/13 12:11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09/02/13 13:48 # M/D Permalink

      3월... 3월... 꼬르륵.

  2. T&J 2009/02/13 18:52 # M/D Reply Permalink

    혹시나해서 왔는데 또 올라와 있군요-ㅠ- 어쩜 좋아~!!!!!!막 이러면서 글을 읽는 데 스크롤이 내려갈 때마다 얼마나 움찔움찔하는지요-왠지 글을 읽은 제 입속이 텁텁하니 쓰군요(이건 뭐, 샘한테 빙의 된 거냐)

    14화를 보진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내용도 주워들었고, 또 사진들도 봤거든요. 전 정말 두 형제가 제 몸 다치는 것보다 서로의 몸을 더 걱정하고 챙기는 걸 좋아하는데 무려,,,,,,샘 목에 칼집을 내는 딘이라니요! 정말 14화 내용을 듣고 나서는 문어대갈(크립키)이 어디까지 두 형제를 몰고 갈 건지, 정말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지요. (물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문어대갈이 아닌 작가진이겠지만, 모든 책임은 문어대갈에게 돌리고 보는;)

    그러던 차에 이런 글을 보았으니-뭔가 사막의 오아시스라도 만난 느낌입니다.
    그럼요, 두 사람은 피고름을 입으로 짜내 줄 정도의 사이인 게지요. 말하지 않아도 상처가 덧났음을 알고(말해주길 바랐겠지요?), 또 그만큼 믿기에 상처를 내주는 두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전 감동해버렸답니다...(뭔가, 좀 수다스럽군요;)

    무튼, 이번 글의 핵심은 아무래도 딘의 마지막 대사와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인 것 같네요. 이 부분에서는 진짜 열폭...

    언제나 그렇듯 글 기다립니다.

    아, 이번 글도 잘 읽었어요!

  3. 라르 2009/02/16 01:56 # M/D Reply Permalink

    15에피가 3월13일에 방영됩니다.

    한주 더 휴방 연장됐어요. 혹시 몰라서 올려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너무 좋아요. >.<
    답답한 슈내.. 휴~
    본방보다 올려주시는 팬픽이 훨 좋으니
    엉엉 크립키 반성하라!!

  4. 미야 2009/02/16 14:04 # M/D Reply Permalink

    아니 2월에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휴방이 왜 이리 길어요. 거기다 왜 한 주 더 늘어... 흑흑.

  5. 달려라ㅋㅋㅋ 2009/04/21 00:40 # M/D Reply Permalink

    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에 웃겨주는건 정말

    계집애...... 엉덩이에 털 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134 : 135 : 136 : 137 : 138 : 139 : 140 : 141 : 142 : ... 233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5920
Today:
547
Yesterday:
620

Calendar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