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4 : 풀무불의 노래 6

해골 무늬 밸트와 마법사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 라고 굳은 어조로 일장 연설을 막 시작하려던 찰나, 유나는 길이 3척이 넘는 장검을 빼들고 45° 각도로 베어 올렸다.
100m 트랙을 40초에 뛰는 굼벵이가 있는가 하면, 단 10초만에 돌파하는 육상 선수 칼 루이스도 있는 법이다. 아직도 능선 너머에서 어슬렁거리는게 다수였지만 재빠르게 움직이는 성질 급한 몬스터들 가운데 일부는 벌써 코 앞으로 닥쳐 누런 침을 흘려대고 있었다.

『타핫!』
무게라는 걸 전혀 모르는 동작이었다. 얼핏 봐선 마분지 뼈대에 은박지만 살짝 바른 연극 무대용 소품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은박지라면 렛셔 데몬의 가슴이 세로로 갈라지진 않을 터, 그것도 절단면이 흐트러짐 하나 없이 일직선으로 깨끗하다.
여자는 피를 빼지 않은 신선한 돼지의 창자처럼 생긴 것을 밟고 재차 검날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울음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마물이 긴 손톱을 휘둘러댔다. 그걸 살짝 피하면서 이번엔 검 손잡이를 아래로 하여 내리찍어 렛셔 데몬의 무릎을 두동강이 냈다.

돌아다 보니 이부는 미친 사람처럼 티카티카 새의 궁둥이로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멀뚱히 남은 청년이「해골 밸트...」라고 말을 흐렸다.
태워서 돌려보내기엔 이미 늦었다. 유나는 치잇 소리를 내고 검을 고쳐 잡았다.

『할 말은 많지만 상황이 이러니 긴 이야긴 나중에 하자. 지금은 이것만 기억해라. 넌 열심히 네 앞가림만 해라. 날 돕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버려.』
『엄호하겠습니다.』
순간 부웅- 하고 은백색의 검날이 그라바스의 머리통 바로 위를 날았다.
자신의 머리카락 몇 올이 그대로 잘려나가는 걸 보고 그라바스는 서둘러 외쳤다.
『그렇게 하고 말고요! 암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무서운 여자다. 검을 쥐는 방식도 그렇지만 그 냉정함이라는 것을 맨 정신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다. 머리를 순식간에 도려내고 움직임이 멎은 데몬을 발로 찬다. 한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가로로 무기를 휘둘러 흉부를 망가뜨리고, 측면으로 돌아 옆구리로 칼집을 넣어 치명상을 입힌다. 계산된 동작이자 동시에 무의식에 가까운 현란한 칼춤이었다.
자신 이외엔 아군이 없다. 모두가 적이다. 따라서 몰살시키려 하려 함에 머뭇거림이 없다. 잘려진 몬스터의 머리가 땅에 수북히 쌓여간다. 뼈를 쪼개고, 살을 가르고, 힘줄을 절단낸다. 커다란 검을 빙글빙글 회전시키며 날렵하게 뛴다. 닿는 족족 해체된다. 그러고도 만족이 되지 않아 읏샤, 하고 도끼질을 하여 찍어 넘긴다. 소의 염통 같은 것이 얼굴을 향해 쏟아져도 표정엔 변화 한 점 없다. 오물을 닦아낼 생각도 않고 손잡이를 차올려 괴물의 턱을 박살냈다.

흐르는 피에 여자의 발이 살짝 미끌어졌다. 그라바스는 놀라 이름을 불렀다.
『유나! 조심해요!』
『계속 떠들면 입을 꿰매버린다. 집중할 수 없잖아.』
돌아오는 대답이 엄청 퉁명스럽다.
자세를 가다듬고 심호흡, 뜨거운 숨을 삼키고는 곧장 돌격하여 세 마리의 데몬을 더 쓰러뜨렸다.

『숫자가 너무 많아.』
날린 바람의 화살이 다섯 발이다. 여섯 발째를 준비하다 말고 그라바스는 도리질했다.
이제 화살은 안 된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서 폭발하는 데몬의 찌꺼기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다. 덕분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짜증을 내며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순간 괴성과 함께 코앞으로 괴물의 날카로운 어금니가 보였다. 기겁하여「여행의 수호자」를 방어하며 휘둘렀다. 이빨 조각이 튀면서 비싼 값을 주었다는 나무 봉 또한 따악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얼씨구?』
어이가 없어 부러진 나무 봉을 내려다 보았다. 무게만 있음 뭘 하나, 속이 터엉 비어 있다.
거짓말 같아 한쪽 눈을 감고 부러진 단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 봤다.
실망이다. 피리로 만들려고 조각도로 속을 파다 실패한 어중간함이다.
신성수 플라군이란 나무는 - 정확하게는 신성수 뿌리에서 다시 키워낸 자녀목이지만 - 대나무와 사촌이었나. 돈이 아깝다. 그라바스는 칫 소리를 내곤 부러진 반토막 중 하나를 땅에 버렸다.
『언젠가 사일라그에 갈 일이 생기면 그곳 사람들에게 더 튼튼한 물건을 만들라고 한바탕 야단을 쳐야겠어. 이런 불량품을 특산품이라고 팔아먹다니, 양심에 털 났다. 털 났어.』

입술을 삐죽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바람과 대기의 정령, 내 친구 바바라는 내 손에 모여 나를 지키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라.』
동시에 오른 팔로 슉- 하고 맹렬한 기운이 솟구쳤다.
정령 바바라가 만들어낸 칼날은 모양이 금방 물에서 건져 올린 국수 가락처럼 흔들거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그 날카로움은 금속으로 만든 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모양만 가지고 타박하지 말자. 기술만 잘 넣으면 튀긴지 일주일이 넘은 딱딱한 도넛은 물론이고 바위도 벨 수 있다.
이엽~! 하고 팔을 둥글게 움직였다. 단단한 몬스터의 피부가 잘려지는 촉감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고급 종이를 잘 드는 가위로 잘라낼 적의 감각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별안간 기분이 나빠져 앞으로 내지른 팔을 도로 거두었다.
악취는 그렇다치고 인간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체액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원래 렛셔 데몬의 피는 검다. 그런데 이것은 제법 붉다.
『무슨 영문으로...』
손가락으로 비벼봤다. 끈적임 또한 알던 것과 많이 달랐다. 데몬의 피는 말라붙은 포도 쥬스와 비슷하다. 이건 훨씬 묽고, 맑다. 된장 찌개가 썩은 듯한 고약한 악취를 빼면 데몬의 피라고 보기 어려웠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데 엉덩이로 강렬한 킥이 날아들었다.
『아욱! 놀랐잖아요.』
『딴 짓이냐, 그라바스. 괴물에게 씹혀 먹히고 싶다면 계속 그러고 있어.』
그제야 눈치챘다. 유나의 발 아래로 토막난 데몬 두 마리가 추가로 더 쓰러져 있었다.
『멍청하게 있지 마라. 정면으로 돌파할 거야. 따라오지 못해도 두고 간다.』
장검으로 데몬의 배를 찔렀다. 푸욱 하고 살을 찢는 소리가 났다. 그걸 비틀어 다시 빼내는 대신, 검의 손잡이를 도움닫기 발판인양 힘차게 밟고 점프했다. 솟구쳐 오르는 유나의 등으로 보이지 않는 날개가 파닥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태양을 가렸다.
이대로 달나라까지 단번에 날아가려는 건가.
놀란 그라바스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어 천녀의 그림자라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살육이라는 죄를 지은 천인은 하늘로 오름을 허락받지 못하고 다시 지상으로 떨어졌다.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중력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다시 지배받게 된 천녀는 착지하면서 무게가 실린 오른 발로 몬스터의 몸에 꽂혀진 검의 손잡이를 재차 밟았다. 체중에다 운동 에너지까지 더해졌다. 몬스터의 몸을 세로로 찢어발긴 흉기는 땡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라바스는 발가락까지 굳는 것을 느꼈다.
저 장면, 이미 본 기억이 있다.
순간 환청처럼 칭얼대는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부, 나에게도 그거 가르쳐줘.
- 따라하면 죽여버린다.

스승은 화가 단단히 난 어조로「안돼」라고 즉답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전부를, 아니 알고 있는 그 이상을 가르쳐 주고자 하던 스승이「알려고 하지 마라」고 단칼에 거절한 것은 그것이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기술 자체가 어려워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실력이 늘어 허공에서 공중재비를 맘대로 돌게 되었을 적에도 스승은 기술 전수를 거부했다. 뿐만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재차「따라하면 죽여버린다」고 강조했다.

『정말로 두고 간다, 그라바스!』
『예! 예!』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심호흡을 하고 가방을 단단히 고쳐맸다. 여기서 뒤쳐지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유나는 자신의 사전엔 망설임이란 단어가 없다는 투로 이미 한참을 앞서 나가고 있었다. 까딱하다간 버림 받게 생겼다. 그라바스는 주먹을 질끈 쥐고 유나를 따라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구두끈이 도중에 풀리는 일 없기를 기도했다.

『카오오~!!』
『적당히 해줘, 데몬 씨. 난 맛이 없다고.』
정면에서 아구를 쩍 하고 벌린 렛셔 데몬은 앞발을 들고 덤비는 곰보다 훨씬 박력 있다.
오금이 하나도 저리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 그래도 침착하게 상대의 공격 리듬을 읽으며 갈퀴짓을 하는 손톱을 피했다. 싸늘한 촉감이 뺨을 비껴가자 그라바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반토막난「여행의 수호자」로 렛셔 데몬의 눈을 찔렀다.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동작이었다. 속이 빈 나무 조각으로 데몬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는 일류 검객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빠른 판단과 정확함, 그리고 두둑한 배짱이 요구된다. 긴장하여 눈꺼풀을 깜빡 움직이는 날엔 되려 이쪽이 씹혀 먹힌다. 나아가 치고 빠지는 결정적 순간을 놓치면 안된다.
『으라차!』
무기로서 딱 한 번 멋진 활약을 펼쳤으니 이제 아쉬움이나 후회, 나아가 원한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이때다 싶자 절반만 남은「선물」을 데몬의 눈에 찔러박은 채 손을 놓아버렸다. 영원히 안녕... 언젠가 사막으로 바다 만큼의 큰 비가 내리면 말라버린 나뭇가지에서 새 싹이 돋아날지 모른다. 그러면 데몬의 시체를 양분 삼아 제2의 신성수 플라군이 성지에서 뿌리를 내리게 될 터. 그것은 무척이나 멋진 광경일 것이다.

『왼쪽으로 돌아라!』
뛰는 속도를 늦춘다 싶었는데 다 까닭이 있었다. 유나는 그라바스의 목덜미를 잡고 왼쪽을 향해 강하게 밀었다. 그러면서 어미 새가 독촉하며 쪼아대듯 피부를 때렸다.
『왼쪽, 왼쪽!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쪽!』
『나는 바보가 아녜요, 유나.』
『바보가 아니라면서 그렇게 좌우를 두리번거리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왼쪽이 어딘지를 몰라 그러는게 아닙니다. 기척이 있어요. 멀지 않은 곳으로!』
머리 수는 열 다섯에서 스물 정도... 이번엔 사람이다.
그렇다고 반색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탕- 타앙-
질겁하며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데몬으로는 부족해서 이번엔 화약입니까.
숨이 턱에 차 오르도록 뛰면서 그라바스는 이를 갈았다.
울리는 소리로 보아 비록 그 총구가 이쪽으로 향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다.
위기는 한 번에 하나씩. 모듬 세트 위기 상황이라는 건 결코 정의롭지 않다. 실수로 큰 파도에 휩쓸렸는데,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식인 상어가 나타났고, 하늘에선 천둥 번개가 치고, 지나가던 배에서 대포를 쏘아대면「너무하잖아」소리밖엔 안 나온다.

『세상 쓴 맛을 덜 봤군. 운명은 심지어 대포를 쏘아대는 배의 선장을 악명 높은 해적 애꾸눈 잭으로 설정하기도 하지.』
쓰게 웃으며 유나가 다시 그라바스의 목깃을 잡았다.
『이번엔 오른쪽, 오른쪽. 숟가락으로 밥 먹는 쪽!』
『왼손으로 밥 먹는 사람은 헷갈려서 어쩌라고 설명을 그딴 식으로... 그러지 말고 그냥 지그재그로 알아서 뛰죠.』
 개처럼 헐떡이며 제안을 해봤다.
썩 괜찮았던 것 같다. 잠시 생각하던 유나가 그렇게 하자며 엄지손가락을 척- 들었다.
하여 두 명은 각자 반대 방향으로 맹렬하게 달려나가면서 힘차게 모래를 박찼다.

Posted by 미야

2006/06/26 16:07 2006/06/2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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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29 19:13 # M/D Reply Permalink

    아마 리나의 기술이었겠죠.. 강하고 거침없는 유나의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합니다. 도약하는 유나를 천녀라고 묘사한게 인상깊었어요.(랄까 이미 그라바스는 코가 꿰인것 같은데요^^) 전투동작의 아름다움 외에도, 숙명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고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그런 유나의 운명을 암시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힘껏 도약하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아름답죠. 다시 읽어보니 그냥 지난친 생각인것 같습니다.--; 들려보니 두편이 올라와있어 굉장히 기쁩니다:)

    1. 미야 2006/06/30 12:03 # M/D Permalink

      리나의 기술은 아닙니다... 더 말하면 네타가 되기 때문에 함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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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N - CSI DAY

6월 25일, 캐이블 채널 OCN에서 과학수사대 라스베가스 6시즌 방영에 맞추어 특집 이벤트를 마련했었습니다. 오전 9시부터 26일 오전 9시까지 총 24시간동안 CSI만 방영했어요.

- 멀미가 나도록 텔레비전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월요일엔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닉 스톡크 요원의 수난 - 생매장] 까지 보고 하는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만, 교회 가는 시간 빼고 줄창 TV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광고 시간에 맞추어 화장실 가고, 머리를 감고, 밥을 먹어가면서 [그리섬 반장님 알라뷰~] 를 외쳤죠.

텔레비전을 보면서 휴식을 취한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해보니까 무지 힘들던데요. 나중엔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속이 울렁거리더군요.
그래도 출근만 아니었으면 새벽까지 불살랐다는 건 기정 사실... 이불을 뒤집어 쓰고도 [아까워~ 더 보고 싶어~] 이러면서 징징거렸으니까요.
이미 봤고, 내용도 꿰고 있는 에피소드였지만 한 번에 몰아서 보니까 감상이 남달랐어요.
아아, 반장님, 알라뷰~

Posted by 미야

2006/06/26 08:47 2006/06/2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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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ya 2006/06/26 12:51 # M/D Reply Permalink

    저도 첨엔 왠일인가 했습니다. 채널 잘못 돌렸나 생각까지..결국 종일 틀어놓았는데 한번씩 본 것이라도 여전히 흥미진진..
    근데 OCN 약간 개념이 좀...혹시 AXN같이 우리나라 방송 아닌건가. 요즘은 되려 챙기는 게 꼰대처럼 보이고, 아예 묻고싶은 이들도 있겠고 하겠지만.. 그래도 아예 영 딴 특집 편성해버린다는 건..
    어제가 그래도 6.25였는데, CSI 특집 종일 편성할 정도의 정성에 멘트 하나만이라도 6.25용으로 떼어주었으면 좀 나았을텐데..싶더이다. 급하지도 않을 CSI 특집은 좀 미루고라도 다들 하는 전쟁영화 특집 정도는 의례상으로 해주는 게 보통 아닌가....하고 아주 잠시간 생각했지만, 뭐 것도 어차피 알량한 배려이고 어차피 제겐 전쟁특집보단 CSI특집이 더 즐거웠고..
    요는 어제 왼종일 텔레비젼 끼고 살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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