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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6/07 시즌2 : 마탑요시 2-4 by 미야

시즌2 : 마탑요시 2-4

글자를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이렇게나 두꺼운 책에 그림 한 점 없을 리는 만무하고... 요컨대 글자보단 그림이 보다 많은 걸 설명하는 법이다. 친절하게 인어 공주의 진주 목걸이 갯수마저 설명하는 동화책 삽화를 바라는 건 아니다만, 돌아가는 이야기의 전말을 적절하게 묘사했을 한 점의 그림을 찾아 리나의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였다.
다섯, 여섯, 열 다섯... 뭉텅그려 서른 장을 한꺼번에 넘겼다.

쓸데없는 짓이라며 요세이가 그런 리나의 노력을 폄하했다.
『역사책에 친절하게 삽화를 그려넣었을 리가 없잖소. 이것은 역사책이오. 읽다보면 지루하고, 졸립고, 짜증나고... 말 그대로 글자 범벅이라 나중에 눈이 쏘는 듯 아파지지.』
졸다가 화냈던 당사자다. 요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그렇죠.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았거든요. 뭐랄까, 낭만이 있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배려라는게 있었다고나 할까.』
『낭만? 배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소.』
배려라는게 있었다면 애당초 책의 두께부터 어떻게든 조절을 해두었을 것이다. 서가에서 꺼내는데 팔뚝이 저려 죽는 줄 알았다. 열 권의 분량을 무식하게 하나로 묶어서 어쩌자는 건가. 실수로 발잔등 위로 떨어뜨리는 날엔 식은 땀을 흘리는 수준으론 안 끝난다. 최소한 발가락 뼈가 산산조각 난다던가, 아니면 발잔등이 무너져 내리던가... 남의 발을 불구로 만드는게 낭만이라면 할 말이 없다만, 그는 옛날 사람들이 배려라는 걸 할 줄 알았다는 리나의 말에 선뜻 동의를 할 수 없었다.

『먼저 읽어본 사람의 말이니 믿어도 됩니다. 책에는 그림이 없어요.』
『오로지 글자와 마침표만?』
『그 마침표도 가끔씩 빼먹었다오. 대신... 옳커니. 거기라면 좀 볼만한게 있을지도.』
그렇게 중얼거린 요세이는 벽돌 같은 책은 냅두고 따라 오라는 손짓을 했다.
『초와 부싯돌을 챙겨요.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다녀오도록 합시다.』
『어디를』
『저 아래.』
『아래?』
『시원~한 곳이오.』

참으로 시원하겠다.
이 경우엔 어두컴컴하다, 내지는 음침하다, 그것도 아니면 박쥐와 함께 샬랄라라고 해야 맞다.
책은 관두자는 말에 신나서 요세이의 뒤를 헐레벌레 따라나선 리나는 그가 가리킨「아래」가 어딘지를 깨닫자마자 윽 소리를 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돌 계단 앞으로 저승으로 인도하는 정령들이 절반은 눈을 감고 돌로 만든 꽃을 들고 있다. 그 앞에서 리나는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15분만에 도착한 그곳은「납골묘」입구였다.

『뭡니까, 이건!』
보고도 모르나. 요세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구(舊) 제미나미스 왕실 납골묘요. 지금은 사용하는 일 없어서 이 지경이지만 예전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매우 신성한 장소였소. 일단 신발의 먼지를 털고 잠시 묵념을 할까요.』
『...』

리나의 긴 침묵을「싫은데요」라고 해석한 요세이는 난감하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그치만 묵념을 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칠 입장이 아니다. 리나에게는 오래 전에 죽은, 누군지도 모르는 멸망한 왕족들을 향해 고개를 숙일 까닭이 없었다. 단순히「죽은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공경을 보내야 한다면 사람들은 고개가 무거워져 두 번 다시 하늘을 쳐다보지 못할 것이다.
하여 요세이는 묵념은 깔끔이 생략, 오래 전에 자물쇠가 부셔져나간 출입문을 잡아당겼다.
문짝 자체가 열리고 닫긴 일이 최근엔 없었는지 먼지가 덩어리째 떨어져 내렸다.
- 더럽다.
덕분에 리나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열려진 문 저편에서부터 싸안 기운이 불어왔다.
그 느낌이 해골이 내뿜는 최후의 숨결 같아서 리나는 진저리쳤다.

『시원하지 않소?』
『잘도 시원하겠다.』
이를 갈며 라이팅 주문이 걸린 단도를 꺼내들었다. 요세이가 미리 준비한 양초는 눈짓으로 사양했다. 뜨거운 촛농이 손잔등 위로 떨어지는 건 질색이었다. 앗, 뜨거 - 하고 쥐고 있던 양초를 놓치기라도 하는 날엔 대 재앙으로 확대될 수 있다. 하여 주문을 걸어둔 칼날을 세우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파앗, 하고 푸른 불빛이 어둠을 물리쳤다.
좋은지고. 요세이는 빛나는 단도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마법은 최고다. 남자는 자신의 양초를 한심한 듯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뭐. 미국은 우주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하기 위해 비싼 개발비를 투자하지만 러시아에선 맘 편하게 하고 연필을 사용한다. 연필이 뭐가 어때서. 종이에 글자만 적을 수 있으면 된다.

『철의 황제에게 멸망당한 이후 제미나미스엔 왕조가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귀찮은 거미줄을 손끝으로 걷어내며 앞장서던 요세이가 설명했다.
『알 투아에서 보낸 섭정관이 대신 제미나미스를 통치했습니다. 그러길 한 200년 정도 계속했죠.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평화로웠다? 그거 무지 특이하네요.』
엄지손톱만한 작은 왕국도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면 10년에 한 번 꼴로 반란을 일으키는 법이다. 그런데 200년동안 타국에서 보낸 섭정관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고 다들 생업에만 열중했다? 곡괭이 들고「독립 만세」를 외치는 농부들이 단 한 명도 없어 들판은 평화? 이해가 안 간다.

『왕조 재건의 의지는 뿌리조차 남아있지 않았군요.』
차갑게 비난하는 뉘앙스를 읽어냈음이다. 앞편에서 요세이가 고개를 흘끔 돌려 리나를 쳐다봤다.
『뭐랄까, 재건을 하고 말고 건덕지가 없었어요. 말 그대로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겁니다. 죽은 시체를 되살려 옷을 갈아입힐 생각은 그래서 아무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 몰라라 했다? 더 이해가 안 가네. 남들은 꺼진 불씨도 되살리려 애쓰는데.』

검게 변색된 2중의 철문이 나타났다. 그걸 손으로 밀자 끼이- 하는 불쾌한 소음이 납골묘 전체를 긁어댔다. 철렁 소리내어 철문을 도로 닫자 다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리나는 불안감을 느끼고 걷는 속도를 느리게 했다. 칠흑의 어둠은 라이팅 주술을 건 단검을 보고도 달아날 생각을 하려 하지 않는다.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가 등줄기를 압박한다. 위축되어 곁눈질로 어두운 벽감을 쳐다봤다. 벌레가 있지는 않을까, 행여 해골을 밟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며 손에 쥔 단검을 한층 더 높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벽감 구멍으로 사람의 넙적다리뼈가 볼록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날엔 심장에 제법 무리가 갈 거다.

『사람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게끔 안치하는 건 일반인들이나 그렇게 합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도굴꾼이라는게 있잖아요.』

일반인들과 달리 귀족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들은 돌로 뚜껑을 덮어 밀봉한다. 살점을 벗어던진 깨끗한 뼈를 석고로 튼튼히 고정시킨 뒤에 그 위로 두께 5cm 이상의 대리석으로 누르는게 일반적이다. 허나 봉납된 귀인들의 귀중품들을 노리는 도굴꾼들은 대리석을 하나하나 망치로 깨부순다. 이 과정에서 작은 뼈가 고스란히 들러붙은 석고 조각이 바닥을 뒹굴기도 한다. 심하면 두개골이 석관에서 송두리째 빠져 나가는 일도 있다. 그걸 실수로 밟았다간「재수 옮 붙었네」수준으론 안 끝난다. 짐짐한 마음에 며칠은 잠을 설친다.

『게다가 이곳은 출입에 제한이 그리 많은 것 같지도 않고요. 봐요. 자물쇠 하나 없잖아.』
『괜찮아요, 인버스 씨. 자물쇠보다 더 무서운게 있으니까 함부로 안 들어와요.』
『자물쇠보다 더 무서운 것?』
『저주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꽤나 강력한.』

촛불을 높게 들었다.
오래된 조각이 불빛을 받고 죽음에서 되살아났다.
여자다.
크고... 희고...
『날개?』
굳은 표정을 한 아름다운 천사가 천장에서부터 바닥에까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6/06/07 14:56 2006/06/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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